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사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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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南侵 전쟁 최다 戰死者 부대는? (再錄)
1만 8402명 희생된 육군 8사단…1사단은 1만 96명으로 7위

趙成豪(조갑제닷컴)  

6·25전쟁 전사자 수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소장 崔北鎭) 자료실은 “육군 제8보병사단(오뚜기 부대)이 6·25전쟁 기간 中 가장 많은 戰死者를 낸 부대”라고 밝혔다. 6·25전쟁 당시 전투를 수행한 사단은 1, 2, 3, 5, 6, 7, 8, 9, 11, 12, 수도사단이다.

8사단 정훈공보참모 임문택(학군34기) 소령은 그 이유를 ▲중공군 2차 공세(일명 ‘크리스마스 공세’)와 ▲ 6·25전쟁 最多 전투 참가 기록(약 158회)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특히 ‘최다 전투 참가 기록’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임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美軍은 정세판단을 잘못했다. ‘중공군이 5~6만 명밖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그 정보만 믿고 진격했던 國軍과 美軍은 중공군의 유인 섬멸전에 당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美軍은 중공군의 개입 목적을 ‘수풍발전소를 방어하기 위한 소규모 공세’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일보 2010년 11월24일字 《다시 쓰는 6·25전쟁》의 ‘중공군 2차 공세篇’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1월6일 중공군이 갑가지 사라진 이후 24일까지 18일 동안 청천강 일대의 전선에는 정적이 흘렀다. 美 극동군사령부(사령관 맥아더) 정보참모부(G-2) 월로비 소장은 중공군이 갑자기 물러난 것은 싸울 만한 의지도 戰力도 없기 때문이라고 오판했다. 미군의 공군력과 강력한 화력을 경험한 중공군은 다시는 공세를 재개할 수 없을 것이며, 한번만 더 미군과 국군이 공세를 감행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 도쿄에 위치한 맥아더 극동군사령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11월25일 중공군 38군은 戰線(전선)에 대치하고 있는 국군의 3~4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해 국군 2군단 예하 육군 7사단을 포위했다. 중공군 38군 소속 113사단이 깊숙이 침투해 후방을 차단하고 나머지 중공군은 양 날개를 펼쳤다. 이런 거센 공격과 병력 열세 속에 7사단이 포위망에 빠지자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비슷한 시간 국군 7사단 오른쪽 영원 일대에 포진하고 있던 국군 2군단 예하 8사단도 역시 3배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 42군의 포위망에 빠졌다.>

국방일보는 “11월24일부터 시작한 중공군 2차 공세는 중공군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라고 적고 있다. 중앙일보 2010년 1월15일字 白善燁(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大韓民國》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상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전쟁 내내 국군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이 여러 면에서 미군에 뒤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동쪽 전선에 있던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예하부대인 국군 6사단과 7사단, 8사단도 인원과 장비 무기 등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면서 전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중공군은 이 점을 노렸다. 동쪽의 방어벽이 쉽게 무너지면서 그 서쪽에 있던 미군의 형세가 매우 위험해졌다. 잘못된 판단이 거듭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들(美軍)은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에 대해 방심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인 軍隅里(군우리)에 진출하면서 미군은 그 지형적 조건이 초래할 엄청난 비극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국군 6, 7, 8사단과 9군단 예하 美2사단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軍隅里(군우리)까지 철수했다. 이곳에서 다시 중공군과 만난 韓美 兩國軍은 3일 동안 激戰(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 大敗했다. 이것이 ‘서부전선 최악의 전투’, ‘인디언의 笞刑(태형)’이라 불리는 ‘군우리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는 특히 터키 여단의 활약상이 컸다. 그들의 방어로 퇴각로가 조기 차단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 패배 후 美2사단은 평양 이남으로 퇴각했으며 국군은 38선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다.

1951년 발행된 美 10군단 지휘보고서는 중공군 2차 공세 이후, 육군 8사단은 장교 323명, 병사 7142명의 병력손실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3사단과 5사단(약 3000명)의 피해(白善燁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大韓民國》 中에서)를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임문택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후 우리 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청천강에서 38선 부근까지 퇴각해야 했다”고 말했다.

“1950년 10월23일부터 26일까지 육군 6사단이 UN군과 국군 중 최초로 韓滿(한만)국경 압록강 楚山(초산, 注-‘楚山 진격전’)까지 치고 올라갈 때 8사단의 10연대도 바로 밑 熙川(희천, 注-평안북도 희천군)이라는 지역까지도 확보했었습니다. 그때 중공군과 북괴군은 UN군을 타깃으로 삼지 않고 상대적으로 약했던 한국군만을 집중 공격 했습니다. 중공군의 主 공격대상 부대가 육군 1, 5, 6, 8사단이었고 그 중 8사단은 후방지역 방어를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8사단은 6·25전쟁 기간 중 영천전투(1950년)를 비롯,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勝戰했다. 총 158회 전투에 참가, 154회 참가한 육군 6사단 보다 많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영천지구 전투(1950.9.4~9.13) - 영천 봉화산, 태약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 15사단을 완전 궤멸시킨 전투. 8사단의 戰功(전공)을 대표하는 전투이다.
*홍천ㆍ횡성 부근 전투(1951.2.5~2.12) - 원주ㆍ홍성ㆍ횡성線에서 敵 7사단, 12사단 병력 섬멸.
*노전평지구 전투(1951.2.12~10.28) - 강원도 인제군 노전평 부근에서 敵 2ㆍ13ㆍ15ㆍ45사단 격멸. 적 4990명 사살, 포로 1094명.
*백석산지구 전투(1951.9.30~10.1) - 사단장 최영희 준장이 요충지인 백석산을 점령하기 위해 적의 기선을 제압한 전투. 敵 101명 사살, 포로 24명.
*인제지구 방어전투(1952.3.23~10.20) - 인제에서 벌어진 主 방어 임무수행 전투. 敵 319명 사살, 포로 1명.

[ 2022-10-01, 19: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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