印度이야기(3)/침략은 받아도 정복된 적이 없는 영혼
막강한 外勢와 직면해도 눈앞의 전투에선 질지언정 전쟁에서는 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저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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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전투

기원 전 326년의 일이다. 인더스 강의 지류 히다스페스(現 젤룸 강)를 사이에 두고 알렉산더는 북인도 파우라바 왕조의 라자(Raja, 왕) 포루스의大軍군과 마주했다. 페르시아를 제패한 알렉산더는 아직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 듯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다. 알렉산더의 視線은 이제 인도를 향해 있었다. 그는 이곳을 넘어 인도 동남부까지 넘볼 기세였다. 포루스는 보병 3만, 기병 4000, 전차 300량과 더불어 코끼리 100마리에 이르는 대군을 히다스페스 강 以南에 집결시켰다. 알렉산더는 보병 2만 5000과 기병 5000을 이끌고 진군했다.

포루스는 알렉산더의 병력이 히다스페스 강을 도하(渡河)하는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적을 면전(面前)에 두고 大부대가 일시에 강을 건넌다는 것은 자멸행위였다. 수차례 기회를 엿보던 알렉산더는 밤을 틈타 멀찍이 우회한 지점에서 도하하기로 결심했다. 날이 저물었다.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우는 암중모색(暗中摸索)하던 알렉산더에게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손짓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병력을 나눴다. 포루스 군대가 주둔(駐屯)해 있는 여울목 맞은편에 예비 병력(보병 9000, 기병 2000)을 주둔시킨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강을 따라 상류(上流)로 이동했고, 미리 물색해 놓은 지점에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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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전투


뒤늦게 움직임을 포착한 포루스도 급히 자신의 아들에게 기병 2000과 전차 120량을 내주며 이를 저지토록 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알렉산더의 군이 전열을 가다듬은 뒤였다. 포루스의 본대(本隊)가 알렉산더의 예비 병력을 견제하며 발이 묶인 사이 알렉산더는 파상공세로 포루스의 아들이 이끄는 병력을 괴멸시켰다. 포루스의 아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눈앞에서 아들을 잃은 포루스는 본대를 움직여 알렉산더에 맞섰다. 코끼리 부대가 선봉에 서고 그 뒤로 3만의 보병이 긴 방진(方陣)을 이뤘다. 그 양쪽에는 전차 부대와 기병(騎兵)을 절반씩 나누어 배치시켰다.

이에 반해 알렉산더는 전선(戰線)을 우회할 기습 병력을 뺀 대부분의 기병을 진영(陣營)의 한쪽에 집중시켰다. 양쪽으로 병력이 분산된 포루스의 전차 부대와 기병을 한쪽부터 집중 공략했다. 이에 대응해 포루스는 남은 전차 부대와 기병을 보냈지만 전선을 우회해 기습적으로 나타난 알렉산더의 기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에워쌌다. 포루스 군의 측면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코끼리 부대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일찍이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도 이들을 대적한 적이 있었다. 코끼리 부대의 위용은 대단했지만 그것도 통제가 될 때의 얘기였다. 약점은 코끼리 몰이꾼들이 방어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알렉산더의 공격은 몰이꾼들에게 집중되었다. 몰이꾼을 잃은 코끼리는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피아(彼我) 구분 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 건너편에 대기 중이었던 예비 병력이 戰場에 도착했다. 이것으로 히다스페스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히다스페스 전투는 알렉산더의 원정 기간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전투는 페르시아라는 완충 없이 이루어진 동서양의 격돌이었고, 인도로 가는 길목에서 벌어진 필연적인 한판 승부였다. 물론, 알렉산더가 밟은 인도땅은 전체 인도 대륙의 크기로 보았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원정으로 인해 끝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알렉산더의 꿈도 거기서 멈췄다. 인더스 강을 거슬러 회군(回軍)하던 그는 진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인도의 여러 군소 국가들을 그의 발아래 종속시켜 놓았지만 그가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자 이 또한 사상누각(沙上樓閣)의 운명을 맞이했다.

알렉산더 본인의 아쉬움과는 달리 그의 遠征은 향후 인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종교, 예술, 문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인도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알렉산더의 침략이 群小 국가가 난립하던 인도의 민족적 결속을 다졌고, 통일 국가가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히다스페스 전투는 ‘만약’이라는 말이 조심스러울 만큼 결정적인 역사의 한 장면이다. 알렉산더 외에도 인도를 탐했던 세력은 많았다. 바로 그 침략의 역사는 오늘날 인도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端緖)가 된다.


인더스 강을 넘어온 자들

알렉산더의 인도 원정은 정치, 종교,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하지만 기원전 3000년 경 인더스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알렉산더는 인도의 첫 손님은 아니었다. 귀빈이든 불청객이든 인도가 복잡다단한 다양성 속에 특유의 조화로운 모습을 가지기까지 몇 번의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먼저 아리안(Aryans)의 유입을 들 수 있다. 시베리아 등지의 유목민으로 게르만, 앵글로색슨 등 서양인의 선조격인 이들은 기원 전 2000년 경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아리안은 기원 전 17~18세기 이동을 시작해 일부는 유럽으로 또 다른 일부는 기원 전 13~15세기 사이에 히말라야를 건너 인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에 이들은 인도 북서부의 펀잡(Punjab) 지방에 정착했다가 점차 남하해 갠지스 강 유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유목에서 농경문화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드라비다 등 인도의 원주민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큰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를 가진 아리안들은 우월한 신체, 鐵器 문화, 싸움에 능한 유목민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당시 청동기에 머물러있던 왜소한 원주민들을 손쉽게 남부로 밀어냈다. 우월성을 바탕으로 원주민을 종속시킨 것은 바로 지금의 카스트(Caste)로 불리는 계급 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간이 흘러 아리안과 원주민의 교류는 오늘날 인도인의 인종적 특성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지역적으로 북인도 사람들이나 상류층처럼 서구적인 외모와 체형을 가진 인도인들에게서 아리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반대로 남인도 지역이나 하층민일수록 원주민에 가깝다는 점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아리안은 기원 전 7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도시 국가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당시 고대 국가는 부족 연맹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왕이 있는 국가도 있었으나 대부분 부족장들의 의회가 국가 운영의 주체였다. 수많은 군소 도시 국가들이 난립했던 시기로 북부의 코살라(Kosala), 중부의 마가다(Magadha), 남부의 비데하(Videha)가 대표적이었다.  기원 전 4세기까지 이들 도시 국가의 세력 다툼이 이어졌고, 알렉산더의 원정 시에는 마가다와 난다(Nanda)가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했다. 사실 알렉산더보다 먼저 인도에 침범한 것은 페르시아였다. 다리우스의 전성기 페르시아는 인더스 강 유역과 펀잡 지역 일부를 점유하기도 했다. 다만 알렉산더의 원정이 보다 본격적이고, 적극적인 아프로디테(Aphrodite)의 구애(求愛)와도 같았다. 어찌 당황스럽지 않았겠는가.
 
알렉산더가 물러나자 난다(Nanda)를 멸한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 굽타(기원전 324~297년경)는 기원 전 4세기 말 알렉산더가 종속시켰던 인도 서북부를 수복하고 서쪽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동쪽의 벵갈만에 이르기까지 북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웠다. 王位에 오르기 전 찬드라 굽타는 알렉산더 대왕을 마주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이를 계기로 통일 국가에 대한 이상을 품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인도 최초 강대국의 등장이었다. 찬드라 굽타의 손자인 아소카 왕(기원전 273~232년경)에 이르러 마우리아 왕조의 治世는 절정에 달하는데 북으로는 카슈미르와 네팔, 남으로는 타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아소카 왕은 칼링가 정복(기원전 261년)을 계기로 정복 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佛法에 귀의했다. 불교 확산은 물론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정책을 폈고, 異종교 간의 공존을 유도하는 등 평화로운 황금기를 구가했다. 정복이 아닌 법제를 통한 통치를 꿈꿨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평화 다음이 문제였다. 군사력과 납세 등에 있어서 왕의 권한은 여전히 컸지만 당시 광대한 영토에 비해 국가 조직이 엉성했고, 지역별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함은 물론 각기 다른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는 등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인도는 이후 굽타 왕조(4~6세기)가 등장하기까지 다시 분열되었다. 기원 전후 수 세기 동안 서북부를 중심으로 異民族의 침입도 지속되었으며 외래 문화의 유입은 더 활발해졌다. 하지만 이는 해당 지역에 한정되었고, 인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이후 북인도를 장악한 굽타 왕조는 인도의 문화 부흥 시대를 열었다. 예술, 문학, 종교, 철학은 물론 수학과 천문학의 발전도 이어졌다. 굽타 왕조의 세력과 정치적 영향력도 마우리아 왕조처럼 강성했지만 남인도에 이르는 통일 국가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특히 이 시대에는 4세기 말부터 훈족(Hun)의 침입이 거셌다. 굽타 왕조는 인도 亞대륙의 우산이 되어 훈족을 격퇴해냈지만 이는 결국 굽타 왕조의 세력 약화로 이어졌다. 이 시기에 훈족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입된 사람들은 북인도 뿐 아니라 서인도와 남인도까지 이동해 자리 잡았다.


영토와 정신의 지배 사이

굽타 왕조의 멸망 이후 많은 군소 왕국이 난립하며 명멸해갔지만 이후 4세기 동안 이렇다 할 이방인들의 침입은 없었다. 내부의 세력 다툼에 고심하는 사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뜸했다. 하지만 11세기에 이르러 중세로 접어든 인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세력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이슬람 세력이다. 아프가니스탄 가즈니(Ghazni) 왕조의 마흐무드(Mahmud)는 황량한 중앙아시아에서 벗어나 인도 펀잡 지방의 비옥한 땅에 군침을 흘렸다. 마흐무드는 무려 열다섯 차례 이상 인도를 침략했는데 그는 인도 북부를 유린하며 정복 전쟁의 화신(化身)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이는 정복이라기보다는 약탈에 가까웠다. 수만 명의 인도인들을 도륙하는 한편 일방적인 재물의 착취와 약탈에만 초점을 맞췄다. 우수한 중앙아시아産 말을 탄 기병들의 기동력을 이용한 그는 수확기에 맞춰 어김없이 침략을 감행해 재물을 착취한 뒤 가즈니로 돌아갔다. 그러나 북인도의 국가들은 무기력했고, 이러한 침탈 속에도 결속력을 발휘하지 못해 지리멸렬했다.

종교적 박해는 극에 달했다. 마흐무드의 침략은 주로 인도의 사원 도시인 마투라, 타네사르, 카나우즈, 솜나르 등에 집중되었는데 사원의 재물을 착취했음은 물론, 철저하게 힌두교 사원들을 파괴했다. 이러한 상황은 마흐무드의 사망(1030년)으로 비로소 잦아들게 되지만 이를 계기로 터키와 아랍 등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장악하는 빌미를 주었다. 이후 13세기부터 16세기 비로소 무굴 제국이 등장하기까지 노예 왕조, 할지(Khalji) 왕조와 투글루크 왕조 등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 세력이 번갈아 델리를 중심으로 한 북인도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술탄(Sultan)이라 칭하며 델리 술탄 시대(Delhi Sultanate)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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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델리의 꾸뚜브 미나르(Qutb Minar)


지금 북인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유적들은 바로 이 시기부터 폐허가 된 힌두 유적 위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델리의 꾸뚜브 미나르(Qutb Minar)*가 다름 아닌 궁정 노예 출신으로 노예 왕조(1206~1290)**를 이룬 꾸뚜브딘 아이바크(Qutb-un-din-Aibak)가 짓도록 한 건축물이다. 그는 마흐무드 사후 가즈니 왕조를 타도했던 구르(Ghur) 왕조의 무하마드(Muhammad)를 섬겼는데 인도 정복 전쟁 중 主君이 사망하자 스스로 술탄임을 선언하며 인도 내에 본격적인 이슬람 국가를 세웠다. 꾸뚜브 미나르는 바로 이슬람 세력의 인도 강점(強占)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미나르(Minar)는 탑을 의미한다.
**노예 왕조는 힌디어로 ‘굴람 칸단’ 혹은 ‘맘루크’ 왕조로도 불린다.

16세기부터는 무갈 제국이 인도의 주인이 되었다. 바베르(Baber, 1483~1530년)와 후마윤(Humayun, 1508~1556년)이 제국의 초석을 다졌고, 후마윤의 아들 아크바르(Akbar, 1542~1605) 대에 이르러 대제국의 용모를 갖추었다. 이후 잔하기르(Jahangir, 1605~1627년), 타지마할에 얽힌 고사(故事)로 인해 낭만 황제로 기억되는 샤 자한(Shah Jahan, 1628~1658), 그리고 반대로 욕심많고 무자비한 아들로 기억되는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년) 등을 거쳐 19세기에 쇠퇴하기까지 무갈 제국의 시대가 이어졌다.

잠시 한 눈을 팔아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수많은 왕비 중 한 명인 뭄타즈 마할을 잃은 슬픔에 대역사(大役事)를 감행한 아버지는 무척 감성적이었다. 형제들과의 오랜 내전 끝에 급기야 아버지를 유폐(幽閉)하고 마흔의 나이에야 대권을 이어받은 아우랑제브 또한 권력에 집착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샤 자한의 낭만 시대 또한 정복 전쟁으로 시작되었고, 특히 타지마할의 축조(築造)는 엄청난 댓가와 희생 그리고 국부(國富)를 소모한 결과였다. 반면 아들 아우랑제브는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힌두교를 무력으로 탄압하며 살상을 서슴지 않는 등 압제(壓制)를 펼쳤지만 치세 후반부에는 매우 금욕적인 종교인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아우랑제브가 뭄타즈 마할의 셋째 아들*이었다는 점이다. 총애했던 왕비의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 타지마할이 내다보이는 아그라 성(Agra Fort)에 가뒀던 것이다.

*왕비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의 총애를 받았으며 모두 14명의 자식을 낳은 뒤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지나치게 총애한 나머지 왕의 행렬에 항상 동반했던 것이 문제였다.

북인도의 이슬람 문화는 무갈 제국에 이르러 완전히 꽃피웠다. 지금의 북인도를 보면 바로 그 영욕(榮辱)의 역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인도의 남과 북이 그토록 다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준다. 그렇다고 북인도를 보면서 ‘이것은 진정한 인도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그릇된 시각일지 모른다. 어찌 살갗을 맞대지 않고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가? 외부와의 끊임없는 밀당(밀고 당기기) 속에 북인도의 모습이, 그 천연적 방패 아래 남인도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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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사원


델리의 꾸뚜브 미나르, 후마윤의 묘, 랄 낄라(赤城), 푸라나 낄라(古城), 아그라의 타지마할, 아그라 성 등은 물론 자이루프의 요새들 또한 이슬람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북인도는 완전히 무슬림화 되었단 얘긴가? 그렇지 않다. 인도인들의 이슬람교 개종은 더뎠고, 그 중독성 강한 이슬람의 전파도 인도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슬람은 페르시아, 그리스, 훈족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넘봤던 그 어떤 세력들보다도 막강했지만 그럼에도 무슬림은 기본적으로 인도 사회에서 소수였다.

지배자가 누구든 촌락 단위에서는 뿌리 깊은 힌두교의 관습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권(利權)을 대가로 일부 하층민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해서 그들이 근본적인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령 농노(農奴)가 농지를 대가로 개종하더라도 신분상의 급변화는 없었다. 무슬림 단체 또한 원래 힌두교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계급, 종교, 정치, 경제, 생활 등이 모두 유기적으로 얽힌 인도에서 그들은 대부분의 힌두교도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삶의 패턴을 유지했다. 아! 그렇다면 지도층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두 종교가 섞일까봐 서로 거리를 두었다. 司祭는 서로의 사원을 멀찍이 두었고, 일반인들과의 접촉도 꺼렸다.

무굴의 시대가 지나자 이슬람이 남긴 찬란한 문화 유산과 함께 인도의 종교 목록에 이슬람교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하지만 불과 기름의 관계, 힌두와 무슬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단지 분리 독립 과정, 카슈미르 분쟁 등 굵직한 문제뿐만이 아니다. 현재 인도에서 무슬림은 전체 인구 중 10% 정도를 차지한다. 기본적으로 무슬림 주거지는 힌두(전체 인구의 80%)와 분리되어 있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충돌해 유혈사태가 일어나 수십 명씩 사망한다. 한편, 갈등은 갈등이고 그들도 인도인이다. 인도 사회에 녹아든 그들의 모습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야시장을 거닐다 만나는 닭 잡는 사람들도 무슬림이고, 인도 영화 산업인 발리우드(Bollywood)를 견인하는 3대 칸(khan)*과 같은 인물들도 무슬림이다. 

*
인도 영화 산업 중 힌두-영어권을 지칭하는 발리우드의 3대 칸으로 불리는 배우들로 샤룩 칸, 아미르 칸, 살만 칸이 있다. 칸은 무슬림 성이다. 이들의 대중 문화적 영향력은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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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주거지의 닭 잡는 사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인도

아리안이 정착한 뒤 원주민과 융화되며 인종과 계급 등 인도 사회의 골격이 갖추어졌다. 알렉산더의 進軍은 그리스 문화의 전파는 물론 동서양 문화가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인도 문화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을 바탕으로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왕조가 등장했다. 이후 간헐적인 外侵과 함께 군소국가의 난립, 굽타 왕조의 시대 및 훈족의 유입 등을 거친 뒤 인도는 또 하나의 막강한 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이슬람은 인도를 장악하고, 기념적인 건축물을 쌓아올렸다. 大帝國을 건설한 그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그들 못지않게 뿌리 깊은 힌두교의 전통과 사상까지 지배하지는 못했다.

또 누가 젖과 꿀이 흐르는 인도땅을 넘보았는가?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고 지금의 인도가 그 모습을 갖추었다. 맷집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외부의 침입이 이루어진 인도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단순하게 풀이하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히다스페스 전투도 그렇고 어디 한 번 속시원하게 이겨본 적이 드물다. 그런 면에서는 지난 1962년, 영토분쟁과 남아시아 패권국의 자존심을 내걸었던 중인전쟁(中印戰爭)도 떠오른다. 당시 인도는 중국에 일방적으로 패퇴했다. 재미있는 점은 분명히 지고 점령당한 기억들만 가득한데 지나고 보면 인도는 인도다.
 
마주 앉은 여러 명의 인도인들 보고 있으면 개중에는 아리안 계통의 인도인도 있고, 원주민의 피가 흐르는 이들도 있다. 펀잡이 고향인 사람이 있고, 타밀에서 올라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멀리 동북부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얀 사람이 있고, 왜소하고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과 생김새가 흡사한 이들도 있다. 모두 인도인이고,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인종적 다양함은 당연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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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상류층 사회문화를 엿볼 수 있는 결혼식


종교적으로도 그렇다. 흔한 광경은 아니지만 힌두교도, 시크교도,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도가 함께 어울려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예술 작품으로 치자면 참으로 진귀한 컬렉션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부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하지 못한 느낌도 든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해보면 인종과 계급, 그리고 종교가 달라 서로 신뢰하지 않고 견제하는 모습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함께 자리한 모습이 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같다. 이 절묘한 조화는 다름 아닌 길고 험난했던 침략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막강한 외세와 직면해도 눈앞의 전투는 질지언정 전쟁에서는 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저력이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 2015-04-02, 14: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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