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

박정희는 국민들이 성숙되지 않는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선동꾼들의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때 한국은 중산층이 든든하여 그런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으나, 남북한 좌익 선동꾼이 방송 등 주요언론 매체를 장악하여 對국민선동을 해대니 건전한 중산층도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는 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실천적인 한국적 민주주의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하도록 했다.

그는 그런 관점에서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1963년에 낸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몽땅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내면상의 독재守舊정권'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語錄 어디에서도 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런 유연성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유연한 실용적 행동은 자신감과 자주성에서 나온다.

朴대통령은 1970년대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할 만한 성숙성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런 조건하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면 국가의 이익과 안전이 정치논리에 의해 망가지고 위선자와 거짓말쟁이와 선동가들이 민주주의를 악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세대가 흐른 2006년에도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선동에 잘 속아 넘어가는 국민의 존재'이다. 민주주의는 主權在民의 원리에 기초하는데 권력을 만들어내는 국민들이 거짓과 선동의 밥이 될 때 그들이 선택하는 정권도 거짓말장이와 선동꾼들일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 필리핀,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그런 꼴이다.

한때 한국은 중산층이 든든하여 그런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으나, 남북한 좌익 선동꾼이 방송 등 주요언론 매체를 장악하여 對국민선동을 해대니 건전한 중산층도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선 언론의 이런 행패와 국민들의 미성숙을 보완해야 할 국가적 엘리트層도 얇아졌다. 국가적 엘리트란 인문적 교양(문학, 철학, 예술, 역사)을 체득하고 국가를 위하여 私益과 지역적 이해관계를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런 엘리트층은 전문성과 주체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한국어의 약70%를 차지하는 漢字語를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언어생활을 암중모색의 암호풀이로 전락시킨 것이 국가적 엘리트층 역할을 맡아야 했던 언론 교육담당자들이었다. 모든 인문적 교양의 바탕이 되는 國語를 파괴하는 데 앞장 섰던 언론 교육 지식인들에게 엘리트의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2大 위기인 좌경화와 저질화는 한글전용에 의한 국어파괴를 토양으로 하고 있다. 이 國語파괴가 소위 엘리트층의 상업주의와 대중영합에 의하여 이뤄졌다는 점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국가 엘리트의 원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이 한국의 위기, 그 핵심이다. 한글전용은 엘리트층의 자살이었다. 이 한글전용을 朴正熙 대통령이 한때 응원했다가 후회했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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