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 안철수는 지난 3월22일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0대 후반부터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등 다양한 형태의 공직 제안을 받았다. 정치는 잘 모르고 정치권으로 가는 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므로 안 하는 게 낫다.”
정치권으로 가는 것을 '인생의 낭비'라고 했던 안철수는 지난 2일 서대문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2011 청춘콘서트'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바꿨다.
“10년 동안 꾸준히 기회가 많았지만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의식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면 한 사람이 크게 바꿀 수 있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다만 시장도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게 많다. 국회의원과는 다르다.”
깃털처럼 가벼운 그의 言行을 보면 '평생 거짓말 한 번도 안했다'는 김대중이 오버랩된다.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않고, 최근들어 그의 행태 자체가 하나에서 열까지 '매우'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 安씨는 지난 9월4일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나라당에 대한 응징을 주장하며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현재의 집권세력”이라는 표현을 썼다.
安씨는 이명박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이다. 미래기획위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브레인 29명이 국가 미래를 연구하는 조직이다.
2009년 11월부터 安씨는 대통령직속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위원도 맡고 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대통령의 가치-세계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참여가 불가능한 조직이다.
安씨는 집권세력을 비판하려면 ‘대통령 직속’에서 나온 후에 했어야 한다.
최근 청와대 관계자는 언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부 위원회가 安위원장을 해촉한 적은 없다”면서 “다만 위원회 활동 시한이 끝난 것도 있고, 개인적 이유로 활동이 뜸한 것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安씨는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이각범 위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지만 “강의가 겹쳐서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미래기획위원회에는 지난 6월 자체 세미나에 참석한 후 활동이 뜸했으며, 신성장동력평가위는 활동 시한이 끝나 자연스럽게 安씨의 임기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安씨 주변에 윤여준 前의원 등 親한나라당 인사가 포진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그를 ‘反한나라당 인사’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安씨는 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표현의 자유’ 같은 부분이 거꾸로 간다면서 現정권을 독재인 양 묘사했다. 2008년 촛불 난동 때 초등학생들이 광장에서 대통령을 향해 온갖 상욕을 하고, 참여연대 출신의 모 인사는 매일 밤 시위대 선두에 서서 ‘청와대 진격’을 외쳤다.
민주당의 천정배 최고위원은 2010년 12월 모 행사에 참석 “이명박 정권, 어떻게 해야 하나. 확 끌어내려야 하지 않나. 확 죽여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대중을 선동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인데도 安씨는 ‘표현의 자유’가 제약 받고 있다고 한다.
■ 安씨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장 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한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安씨는 ‘서울시의 무엇을 바꾸고 싶냐’는 질문에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서울시는 완전히 하드웨어에만 매몰돼서 남에게 보이는 사업만 (진행) 돼왔다. 여러 가지 소프트웨어, 실제로 사는 사람의 불편함, 위기관리는 도외시 되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예를 들면, 도로 표지들이 무원칙하다. 직진하다가 갑자기 좌회전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통일이 안 되어 있다. 교통 막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관심도 없다.”
安씨의 주장과 달리 올해 서울시는 전체예산의 13.4%에 해당하는 2조 7000억 원을 교통 분야에 사용했다. 서울의 교통정보시스템인 토피스(TOPIS)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토피스는 실시간 교통상황, 지정체 구간, CCTV영상, 주차장 정보, 출퇴근ㆍ명절ㆍ연휴 통계자료 정보 등 서울 전역의 교통정보를 주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도 안철수는 오세훈 시장과 서울시를 ‘하드웨어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현재 安씨의 정치권 진출 가능성에 대해 여러 가지 전망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안철수라는 이름은 정치권의 최대 변수가 됐다. “정치권으로 가는 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하므로 안 하는 게 낫다”고 했던 안씨.
그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생 낭비’에 나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
![]() |
[관련자료] '원순닷컴'에 게재되어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원순의 관계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 이야기
1. 이명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시장 시절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그만두고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사업을 열심히 벌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대통령이 서울시장 당선된 뒤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 나는 그 분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 때 나는 “월급을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좋은 데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면서 환경미화원과 소방대원을 위해 기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환경미화원들은 새벽, 주로 미명에 일합니다. 그때가 가장 차들이 적게 다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때는 대부분의 차들이 속도를 많이 내는데다가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가장 많이 나는 시간대이기도 합니다. 환경미화원들이 사상을 당하고 공상으로 처리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주는 돈은 대단히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과 그 유족의 삶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소방대원이라고 다를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들의 유자녀를 돕기 위해 아름다운재단은‘등불기금’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기부해 주실 것을 요청 드렸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이대통령의 월급은 바로 이 기금에 4년 임기동안 전액 기부되었습니다.
2. 이대통령과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가게 초창기에 ‘지상 최대의 벼룩시장’이라는 큰 행사를 우리가 주최했습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여러 기관, 단체, 시민들이 헌 물건을 가지고 나와 파는 일종의 벼룩시장을 연 것입니다. 이틀 동안 진행된 이 행사는 30여만 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반향을 얻었고, MBC는 7시간 동안 행사 전체를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해외에서 귀국하자말자 긴 시간을 내서 잠실운동장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엄청난 인파에 고무 받아 이대통령은. 차후에 벼룩시장을 지속적으로 열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는 등 다양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뚝섬 영동대교 아래에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후에도 이대통령은 아름다운가게 행사에 여러 번 참여하였고, 아름다운가게 본부 사무실을 방문하여 아름다운가게의 미래발전방향에 대한 브리핑을 받고 명예고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3. 뿐만 아니라 나는 서울시의 ECO-COUNCIL이라고 하는, 이대통령의 자문기구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이는 이 회의에서 서울시의 환경과 지속가능한 정책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논의의 상당 부분은 서울시 정책에 반영되기도 하였습니다. 뚝섬의 서울숲이나 상암동 난지도 골프연습장 취소 등의 조치는 대부분 여기서 논의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만남과 논의를 통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이대통령과 친하게 지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실용적 정책과 의견 수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내가 2004년 독일을 3개월 여행하게 되었을 때 베를린 도시국장을 꼭 만나보라고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나도 독일에서 돌아와 세계인권선언의 조문을 울타리에 새겨 넣는 테마공원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권유해서 승낙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대선에 돌입하고 있는 때여서 더 이상의 진전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 ECO-COUNCIL의 멤버 중의 한 사람인 문국현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고 또 다른 멤버였던 사람들이 정치권을 오갔지만 나는 이 선거과정에는 일체 중립을 지켰고 정치과정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원칙이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정파적인 입장에 설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그러자고 변호사까지 그만두고 지난 20-30년을 이런 공익적 활동에 나섰겠습니까? 제가 권력에 관심이 있었다면 진작 청와대나 장관직을 맡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제안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나라당조차 저를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여러 차례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처럼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든 것이지요.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