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도 체면이 있는데/사람이 예의가 없다면…
기해년에서 경자년으로 넘어오는 경계 길목인 자시(子時)의 문이 열리자 북악산 자락 '백서회관(白鼠會館)'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쥐떼들로 웅성거렸다. 경자년(庚子年) 올해의 주인공인 흰 쥐들이 모여 경자년 자축행사로 '쥐들의 가면무도회(假面舞跳會)'를 열기로 하고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경자년 흰쥐 해의 주인 행세를 한번 단단히 해보려고 분주하게 쫒아다녔다.
형형색색의 가면을 쓴 쥐들과 정의, 공정, 평등의 구호가 적힌 머리띠를 동여맨 쥐들도 보였다. 개중에는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축하내빈으로 초대받은 외국 쥐들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 쥐들의 최강 천적인 몹쓸 인간 군상들로부터 목숨을 빼앗기고 짓밟힌 억압과 탄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결사항전의 투지가 하늘을 찌를 듯한 모습이었다. 해학과 풍자로 인간 세상을 향해 고성방가(高聲放歌)하며 한판 굿판을 걸죽하게 펴 보자는 심산인 듯했다. 드디어 대회 개회가 선언되고 대회장인 서울백서협회(白鼠協會) 회장이 대회사를 낭독했다.
"전국에서 모인 서족(鼠族)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의 가면무도회는 우리의 짓밟힌 서권(鼠權)을 되찾고 우리를 탄압한 몹쓸 인간 군상들에게 조롱과 멸시로 우리가 당한 서러움만큼이나 분풀이를 하자는 것이 대회 개최의 취지인 것입니다. 우리 서족들은 인간 생명을 구원하고자 실험용으로 육신을 희생양으로 바쳐왔음에도 우리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삼아 온 배은망덕한 못된 인간 군상들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며 본때를 한번 멋지게 보여줍시다. 그래서 이같은 다짐을 만장일치로 결의하며 자주독립을 외치고자 새해 자정을 기해 자축행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족 동지 여러분, 우리의 강점은 이 시대 권력자들의 비리와 약점을 밤낮으로 엿듣고 수집해온 정보가 튼튼하다는 점임을 명심합시다. 우리를 괴롭히는 자, 그 어떤 놈들도 우리의 막강한 정보력을 발휘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삼읍시다.
우리 서족들이 지구상에 정착한 지도 무려 3600여만 년이 되었고 쥐과(科) 포유동물로 220여 속(屬) 1800여 종(種)의 서족(鼠族)들이 뿌리내리고 살아 오지만 인간과 고양이, 뱀 같은 천적들에게 구박만 받아온 그 서러움을 경자년 흰쥐 해엔 기어이 설욕합시다. 실천 행동으로 천적중의 천적인 인간들의 설날 음복상(飮福床)에 제일 메뉴로 훌륭한 '서생원 얘기'를 올려놓기로 합시다. 새해 운세를 점치고 시국정담을 나누며 음복을 하는 모습을 인간들은 설날 민심(民心)이라 부르니 쥐띠해인 경자년 민심의 제1주제는 당연코 쥐 얘기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쥐만도 못한 인간군상'을 화제로 삼아 쥐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기로 합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상서삼장(相鼠三章)'을 중국에서 온 내빈께서 낭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환영합시다."
왕서방쥐가 등단하여 정중하게 '상서삼장'을 읊으며 쥐만도 못한 한국의 쓰레기같은 못된 놈들에게 호통을 쳤다.
"상서유피(相鼠有皮):쥐는 죽어도 가죽이 있는데
인이무의(人而無儀):사람이 예의가 없다면 되겠는가
불사가위(不死可爲):죽지 않고 무엇하리
상서유치(相鼠有齒):쥐는 치아가 있는데
인이무지(人而無止):사람이 되어 잘못에 대한 그침이 없다면
불사하사(不死何俟):죽지 않고서 무얼 기다리나
상서유체(相鼠有體):쥐도 체면이 있는데
인이무례(人而無禮):사람이 예의가 없다면
호불천사(胡不遄死):어찌 죽어버리지 않는가"
중국 왕서방의 정중하고 준엄한 경축사를 들은 한국의 쥐들에게서 "명색이 동방의지국에 산다는 우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뒤이어서 경상도에서 올라온 경서방이 김삿갓의 풍자시 '월월산산(月月山山)'을 소리내어 읽어 내려갔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구부(舅婦)간에 나눈 김삿갓의 풍자시는 해저물녘에 시아버지를 찾아 온 사랑방 손님에게 눈치빠른 며느리가 저녁상을 올리려고 "인량복일(人良卜一)할까요" 하고 여쭈었다. 합자하면 식상(食上)이 된다. 즉 저녁상 올릴까요 하며 시아버지에게 며느리가 물은 것이다.
시아버지 대답인즉슨 "월월산산(月月山山)이라" 했다. 합자하면 '월월'은 친구 붕(朋)이 되고 '산산'은 나간다는 의미의 출(出)이 된다. 시아버지의 대답은 "친구가 나가거든 내가 먹을 저녁상을 올리라는 지시였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두 연놈이 주고받는 괴상한 문자놀음을 지켜 본 과객(過客)이 밥얻어먹기는 틀렸구나는 생각이 들었던지 벌떡 일어나 나가면서 '정구죽천(丁口竹天)이로구나' 하며 놀려주었다. 정구죽천을 합자하면 가소(可笑)가 된다. 가소로운 연놈들이란 조롱이요, 무시였다. 결국 경자년 새해 쥐들의 가면무도회는 쥐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못된 인간들을 질타하고 군주같지않은 거짓말만 하는 군주, 장관같지 않은 가소롭고 허접한 장관, 가렴주구의 탐욕 패거리, 권세가(權勢家)들을 규탄하는 성명서 채택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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