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박용구, 김동인의 기록. 제이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일 때였다. 일본군의 전선이 중국과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 병력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선총독의 주재하에 회의가 있었다. 다나카 정무총감이 입을 열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모두 전선으로 나가 싸우고 있는데 조선 청년들만 후방에 그냥 있습니다. 전쟁이 계속된다면 일본 청년들은 씨가 마를 것입니다.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해야 합니다.”

일본인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군부의 엽서 한 장이면 일본 청년들은 군에 끌려갔다. 중국전선에서 오십만 명의 일본 청년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남양군도에서도 이십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고 있었다. 자식 잃은 일본인 부모들은 멀쩡하게 대학에 다니는 조선인 청년들을 보면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런 배경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제도를 실시할 법령이 일본 정부의 각의를 통과하고 중의원에 제출됐다. 그 시절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학도병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시대의 사실주의 문학작품이 가장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것 같다. 그 속에 나타난 몇 명의 모습을 압축해서 묘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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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백사십사년 일월 이십일 오전 아홉시 그는 천 명의 학병과 같이 대구에 있는 팔십 연대에 입대해 학생복을 벗고 카키색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대구역에서 그를 태운 군용열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압록강을 건널 때 눈이 내렸다. 얼어붙은 강을 내려다 보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날이 밝았을 때 기차는 만주 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양산도, 육자배기 등 민요의 대합창이 폭풍같이 기차 안을 휩쓸었다. 기차가 봉천 산해관 태원 등 일정지역에 도착할 때마다 학병들이 내렸다. 음울한 하늘 밑으로 행진해 가는 그들에게 미친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구일째 되는 날 소주의 일본군 육십사단 십칠연대에 도착했다.

그 부대의 오분의 일은 학생 출신의 조선인이었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도 원래 군인들이 아니었다. 상당수가 소설가, 동화작가, 만화가, 연극인, 교사등의 지식인이었다. 사병 중에는 동경대학교 교수도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 이병주씨가 체험한 중국 전선의 기록이다.

태평양 전선은 어땠을까. 일본군 일등병 김종식은 화물선에 태워져 사이판 섬에 내려졌다. 음울해 보이는 군용창고와 위안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수송선에 실려 남쪽으로 향했다. 몇 날 며칠 후 도착한 곳은 뉴기니였다. 미군의 공습이 두려워 두더지같이 굴 속에서 지내야 했다. 과달카날섬의 일본군이 전멸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병사들 사이에서 적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보급이 안되어 굶어죽었다는 얘기들이 돌았다. 그의 부대는 다시 수송선을 타고 솔로몬군도의 북쪽에 있는 부겐빌 섬으로 향했다. 전세가 기울면서 수송선을 호위할 함대나 비행기는 없었다. 믿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수송선 안은 시루에 담긴 콩나물들 같이 병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수송선이 기우뚱하면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갑판 위에 있던 병사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는 기름과 갖가지 파편들이 흩어져 떠 있고 처참한 비명소리들이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

어두운 밤하늘을 보는 그의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리운 식구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다음날 연합군의 비행기가 저공으로 떠서 그 부근을 샅샅이 정찰했다. 미군 잠수함이 공격한 일본군 수송선은 침몰했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고 보고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작가 박용구의 기록이다.

중국 전선을 돌아본 그 시절의 작가 김동인은 학병 중의 한 사람으로 빙의되어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주판을 놓고 편지나 쓰던 손이 총검을 영국군 가슴에 박았다. 그에게 원한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일본군의 한 사람이고 그는 영국군의 한 사람이다. 내 칼이 조금만 늦었으면 내가 죽었을 것이다.

멸시하던 조선인에게 일본 시민권을 주는 대신 일본인과 동등하게 병역의무를 이행하라는 결과였다. 은행원이던 나는 학병이 싫었다. 군입대를 피해보려고 시골에 내려가 숨었다. 사회는 그런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신문은 나같은 사람이 큰 반역자라고 했다. 학교의 직원이나 선배들이 나를 찾아다녔다. 늙은 아버지가 그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학병을 피하면 무서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나 한 사람의 병역기피로 인해 전 조선인이 보복을 받는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지원했다. 일본군에게 개인의 생명은 무의미한 것 같아 보였다. 적은 병사 한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비용을 아끼지 않는데 일본군은 한발의 포탄을 아끼기 위해 수십 명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전쟁 초기의 진주만 기습도 사람 어뢰로 시작됐다. 가미가제등 특공대가 되면 적의 한 척의 배를 없애기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했다. 그걸 일본의 무사도 정신이라고 했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다이쇼 이십년에 세상에 나왔다. 나는 조선이 소멸하고 일본제국에 병합된 이후 태어났으니 엄정한 의미로는 나면서부터 일본인이다. 그러나 조선인 학병인 우리는 일본인하고 다르다. 실수나 잘못이 있으면 조선인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멸시하고 비하한다. 기괴한 소식이 들린다. 미국 영국 중국이 카이로에 모여서 회담을 했는데 일본이 조선을 놓아주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남의 덕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의 행운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일본군 병사였던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다. 그들의 영혼이 세계의 경제 문화 대국이 된 대한민국을 보고 어떤 마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