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보소!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부르던 내가 있던 곳의 작업반장 생각이 난다. 이 분은 황해도 옹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옹진과 가장 멀리 떨어진 북방 끝 삽수갑산 산간 오지에서 이 분을 만났다. 이곳이 바로 내가 농업 연구로 나가있던 양강도 김정숙군 풍양리 5반이다. 이분과 그 형님 그리고 그 일대 주민 다수가 황해도 옹진 사람들이었다.

탈북 후 대북전단을 위해 백령도에 가보니 여기도 옹진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북한에서 말하는 신해방 지구 사람들이다. 옹진은 6·25 전쟁 전에는 남한 땅이었던 곳이다. 이 고장은 감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북한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다. 한편 곡식과 해산물이 넘쳐 가장 살기 좋은 곳이자 이 분들의 대대손손 고향 땅이다. 그런데 하루 아침 당국에서 가장 먼 북쪽 춥고도 삭막한 산간 오지로 대거 추방한 것이다. 적 지역에 살던 주민들이라 믿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곳은 압록강변이라 중국에서 더 잘 보이는 곳이다. 북한과 같은 공산국인 중국 쪽은 천지가 개벽되었다. 2003년 상해를 방문한 김정일 말 대로이다. 옥수수밥 먹다가 흰쌀밥으로, 고기로,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 오토바이, 자가용으로,흑벽집이 벽돌집으로, 신작로가 아스팔트로, 전무했던 관광 및 놀이터가 여기저기 생겨났고 산림도 우거졌다.

하지만 북한은 변화가 없다. 더 낙후해진 것뿐이다. 35년 전 탈북하였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그대로 간 것 같다. 변화된 것은 탈북을 막기 위한 철조망이 2중으로 처져 있는 것뿐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참 지독스러운 북한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폐쇄 또 전무후무하다. 폐쇄의 이유는 일제타승 8·15해방자, 미제 타승 6·25 수호자란 거짓 우상 3대 세습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탈북 35년간 변화는커녕 더욱 폐쇄된 탈북 전 마을을 보며 답답한 나머지 하소연 소리가 길어졌다.

1978년 농업과학원 밭작물 연구소 시절 해주와 옹진군에 출장을 갔었다. 놀라운 것은 거기 주민 다수가 평양과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주민 교방(交放)을 시킨 것이다. 그 지역 산의 소나무들 밑은 사람 키 두 배 이상 밑가지들을 쳐서 훤하게 하였다. 남한 간첩이 들어오면 추적하여 잡기 쉽게 하느라 한 조치인 것이다.

정치적 이유로 이렇게 추방된 주민은 양강도 삼수에서도 목격하였다. 북한은 1970년대 당 5차대회의 성과로 전국에 버스화를 실현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기름도 없고 버스도 모자라 말뿐이다. 하늘에 별 따기, 가물에 콩 나듯 다니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걸어가는 것이 낫다. 먼 거리는 할 수없이 기약 없이 언덕에 기다리다가 지나는 화물차를 타야 했다.

국가 연구원인 나도 예외가 안된다. 당시 연구지였던 김정숙군으로 가려면 혜산에서 삼수를 거쳐 가야 했다. 혜산에서 삼수로 넘어가는 산 언덕에서 화물차를 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적재함에 올라타 있었다. 옆에 앉은 젊은 남녀가 뜻밖에도 평양 말씨를 써서 반가워 통성(通姓)했다.

함경도 말이 지배적인데 그 가운데 평양 말을 쓰니 반가울 수밖에 없다. 알고 보니 두 젊은이는 평양에서 살다가 추방되어 온 이들이었다. 평양 말을 쓰는 나를 보고 같은 추방자로 알고 처음에는 반가워하였다. 하지만 그게 아닌 농업 연구를 위해 온 자로 알자 이내 낯색을 달리한다.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불만들이 쌓여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한이 쌓인 추방자들은 탈북자들 속에도 적지 않다. 탈북자 1호 약사박사 이하나, 전 국방과학원 기자 김길선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한 풀이로 불렀는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노래로 인상 깊었던 작업반장과 그 형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작달막한 키에 역도 선수 같은 몸인 이들은 타고난 농사꾼들이었다. 아마도 그 성실함이 이곳 남한이었다면 다 부농이 되고도 남을 분들이다. 농업 연구사인 나에게 찾아와 그렇게 흥미있게 농사기술을 물었던 작업반장의 형님은 암으로 얼마 후 갑자기 돌아갔다. 그 때도 동생인 작업반장은 장구를 치며 <날 좀 보소>를 불렀다. 겉은 웃는 것 같지만 속은 처량해 보이는 것이 알렸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정든님 오셨는데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이 작업반장은 나보다 10년 연상이었는데 북한 수명으로 보아 이제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땅 속에 계셔도 <날 좀 보소> 하며 한풀이하고 계시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