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은 사람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사는 족속은 정보에 약하다. 출판 정보에 가장 어둡다. 그래서 신문의 책 소개 등을 빠짐없이 읽고 그걸 통해 책을 사서 읽는데 책 소개가 여간 잘 쓴 문장들이 아니다. 이걸 읽고 난 후, 또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같은 책을 검색,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읽는다. 책의 내용도 자세히 알 겸, 맛깔스런 문장을 맛보기 위해서다. 이걸 읽고 난 다음 책을 살까 말까 결정한다. 혹 구입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신문의 책 소개는 복사하여 보관한다. 시일이 흐르고 난 뒤, 책 소개를 다시 읽고 마음이 변하여 사보는 경우가 있다.

며칠 전부터 조선일보에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란 책 소개가 있고 부제는 “‘바위에 쓰인 글씨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다.”이다 평소, 비문(碑文)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얼른 사고 싶었다. 어제 사려고 했지만 막상 어제가 되니 책 구입은 후순위로 밀리고 그 자리를 술 구입이 차지했다. 어제 동사무소에 가서 ‘소비 쿠폰’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아사히맥주 8캔을 18000원에 사서 대낮부터 마셨다. 술은 낮술이 최고다. 건강상으로도 낮에 먹는 게 낫다. 낮에 먹으면 적게 먹히고 밤에 잠도 깊이 잘 수 있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비 쿠폰으로 가장 먼저 산 것은 공책 5권이다는 점이다. 공책을 사고 난 후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으니 술 먹는 변명거리가 된 셈이다.

우리집 가까이에 초등학교가 있고 그 앞에 문구점이 있는데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몇 군데 된다. 문구점 아지매가 나더러 “할배는 무슨 공책을 이리 자주 삼미꺼 예?”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한글 배운다 아이미꺼.”했다. 다시 아지매가 “아이고 할배가 거짓말도 잘 하네예.” 했다. 책을 읽다가 보면 고운 문장이 나온다. 책에 밑줄을 긋기도 하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공책에 적어 놓는다. 처음 만난 단어도 적어 놓는다. 하나의 ‘필사’인 것이다. 요사이 ‘필사하기’가 유행이지만 나는 수십 년 전부터 몸에 배인 버릇이다. 그렇게 적은 놓은 단어나 문장을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읽어 보면 새로운 감정이 일면서 기분이 썩 좋아진다.

이야기를 되돌려 오늘 아침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저 책의 출판사 소개글을 읽었다. 읽는 도중에 이 책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는 순간 소개글에 '일제 강점기'란 글자가 나왔다. 거기까지만 읽고 말았다. 안 사기로 작정했다. 그 대목을 옮겨 보자면 이렇다.

“일제강점기의 대지주 조병학은 폐교 위기의 세브란스를 살리기 위해 전 재산을 기부했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실렸다. 일제에 국방헌금을 냈다는 이유인데 ‘친일파 독지가’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전 재산을 기부하는 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인 반열에 든 사람이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전 재산을 의롭게 쓴 것이 존경스럽고 문장 또한 좋지만 싫어하던 용어, '일제 강점기'란 다섯 글자 때문에 책 구입을 없던 일로 하고 말았다. 읽고 싶었던 책을 안 읽는 아쉬움은 있지만 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를 편협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나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