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주필을 했던 고교 후배한테서 오래 전 이런 말을 들은 게 뇌리에 떠오른다.

“대학 병원을 갔는데 복도에서 노조원들이 병원장을 둘러싸고 욕을 하더라구요. 야 이 새끼야 원장 될 때 노조에서 밀어줬는데 왜 이 따위야 하면서 완전히 봉변을 주는 수준이더라구요. 원장이 도망치려고 하니까 노조원들이 차 앞에 드러눕는 거예요. 의사 먹물들이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병원장은 왜 도망을 치려고 할까. 그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속칭 먹물이라 약한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들은 세상에 대고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사십대 남자가 있었다. 명문대학을 나오고 모범적으로 직장 생활을 하는 양순한 성격이었다. 어느 날 밤 그가 갑자기 변호사인 나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 근처의 차 안에서 아내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좀 해주세요.”

나는 그의 나약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빼앗기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법은 개인의 불륜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이웃의 여성과 사랑을 나누어도 걸리면 그 남편에게 돈을 주면 된다. 그게 위자료다. 현실의 감정과 법 사이에 간격이 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법에 호소하기 전에 자기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강한 존재가 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나라면 주위에서 쇠파이프라도 줏어다가 아내를 범하는 남자를 작살내 버릴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러면 법에 걸리잖아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자기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만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앞뒤를 재고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나약한 먹물이었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무리한 말을 쓸데없이 한 것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법의 밥을 먹어온 변호사다. 세상이 법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와 나의 현실 인식은 다르다. 법의 본질은 국가가 대신 복수해 주고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념은 교과서에만 남아있었다. 현실에서는 형사나 판검사가 법이다. 그들에게 사건은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하나의 기록일 뿐이었다. 그들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의를 위한 사명자가 아니라 그냥 월급날을 기다리는 보통의 노동자였다. 피해에 대한 감정이입도 공감도 잘 안된다. 오히려 앞에서 싹싹 비는 범죄인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법의 날은 무디어졌다. 물론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강철중 형사 같은 정의파도 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극히 소수였다.

유튜브를 보다가 특이한 한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철망을 넘어 병아리를 품은 암탉 쪽으로 뱀이 접근하고 있었다. 닭은 구석에 노란 병아리들을 몰아넣고 그 앞에서 뱀을 응시하고 있었다. 뱀이 다가오자 닭은 부리로 뱀을 쪼아대며 사투를 벌였다. 얼마 후 뱀은 싸움을 포기하고 닭 우리의 철망을 넘어가고 있었다. 목숨을 건 닭의 투지가 뱀을 이겼다. 그리고 병아리들을 지켜냈다. 눈물겨운 싸움이었다. 결국 인간도 자기의 것은 그렇게 지켜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젯밤 유튜브를 돌리다가 압축된 짧은 영화를 보았다. 외떨어진 농가에 괴한이 침입했다. 그 괴한은 혼자 있던 여성을 보자 주먹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 기절하게 하고 강간 중이었다. 어느 순간 길다란 꼬챙이가 달린 창을 들고 돌진한 그녀의 남편이 괴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카타르시스가 되는 느낌이었다. 자기의 성은 일차적으로 그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게 아닐까. 철저한 법치주의 미국에서는 개인의 총기 휴대가 허용되고 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사회에서 힘으로 우선 자기를 지키라는 의미는 아닐까.

먹물들이 불법 앞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너무 말이 많아졌다. 내가 옳은지 자신이 없다. 하나님은 대신 복수해 준다고 했다. 노자도 참고 있으면 원수의 시신이 강물에 떠내려온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먹물의 나약함에는 반대다. 반지성이 지성을 압도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