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역 2번 출구 앞에서 며칠 전 귀국했다는 그 친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난 지 십년쯤 됐을까. 정확한 기억이 없다. 그는 초등학교 사학년 때 우리 반 반장이었다. 어리숙하고 미련한 나는 똑똑한 그의 추종자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교가 달라지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칠십대 중반인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 역 부근의 음식점으로 가서 마주앉았다.

그의 늙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시간이동을 하면서 점점 젊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의 뇌리 속에 저장된 그의 과거의 모습이 슬라이드 영상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산동네 판자집에서 녹슨 양철문을 멋적은 얼굴로 열고 나오던 열두 살의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중학교 시절 내 방에 와서 같이 자려고 할 때 옆에 엎드려 미국으로 간 여자친구 편지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난 커서 선교사가 되고 싶어. 사랑하는 혜경이와 함께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고 싶어.”

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반장을 하는 여자아이를 사랑하는 그가 부러웠다. 선교사가 뭔지는 모르지만 숭고한 직업인 것 같았다. 좋은 데가 많은데 왜 오지로 간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의 정신세계는 나와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지만 형같이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가 나의 비좁은 다다미방에 와서 같이 놀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너 공산주의가 뭔지 알아? 인간의 뇌에는 붉은 피가 흐르고 있어. 붉은 피가 썩은 정신을 바르게 만드는 거지. 그래서 공산주의가 붉은 깃발인 거야.”

“그게 뭔데?”
나는 그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도 천대받지 않고 평등하게 산다는 거지.”

뭔진 모르지만 정부가 ‘반공’이라고 알려주는 것과는 다른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까까머리 검정 교복의 고등학교 시절 아이들을 가르쳐 돈 벌고 혼자 밥을 해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대학을 다닐 때도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원 선생을 하면서 등록금을 마련했다. 어느 날 그가 돈이 없어 대학을 졸업 못하는 꿈을 꾸었다며 불안해하기도 했다. 회사에 취직한 이후의 일개미 같은 그의 여정도 눈물겨웠다. 그 무렵 그가 내게 했던 이런 말이 아직도 내 기억의 서랍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학노트에 수많은 섬유 샘플을 잘라 페이지마다 귀퉁이에 붙이고 그 옆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사항을 전부 적어서 텍스트로 만들어 입시공부할 때 같이 외웠어. 여러 권이야. 그리고 밤이면 불을 끈 채 섬유제품 샘플들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또 만져서 몸으로 기억하게 해.”

세일즈맨으로서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한번은 하자가 있는 제품을 국내업자가 보냈더라구. 그래서 대구에 있는 공장을 찾아가 몇날 며칠을 버티면서 근성을 보여줬지. 그리고 돈을 모두 돌려받았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단호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오퍼상이 됐다. 마른 빵을 씹으면서 구룡의 중국인 가게 거리를 떠돌면서 거래처를 만든다고 했다. 그는 마침내 사업에 성공하고 부자가 됐다. 그리고 늙었다. 친구에게서 한 인생의 부침을 보았다. 늙은 그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그가 먼저 자기의 다른 친구 근황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젊은 날 몇번 본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재승이가 지금 폐암 말기야. 해골같이 말라서 호스피스 병동에 있어. 그래도 돈이 얼마 남아 있다고 그래. 그 돈으로 최고급 오디오기기를 사서 음악을 듣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구. 오늘 너 만나고 난 다음 그 친구한테 가보려고 그래.”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것은 자기가 평소 즐기던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뭐를 하고 싶을까. 낙엽이 떨어지듯 주변에서 죽는 사람이 흔하다 보니까 이제 다른 사람의 죽음 소식이 무덤덤하게 느껴진다.

“요즈음 어떤 즐거움으로 사시나?”
나는 그의 노년 생활이 궁금했다.

“가난했다고 돈에 끌려 일생을 살면 안되지. 육십대 중반에 사업을 접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어. 어려서 바둑을 좋아했는데 본격적으로 배우기로 했지. 내가 프로들이 모이는 연구실을 차려줬지. 그리고 돈을 주고 프로한테 개인교습을 받았어. 원래 7급 정도였는데 프로가 나한테 아마 4단으로 실력을 인정해줬어. 소원성취했지. 그리고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게 일본어였어. 일본어 학원을 가니까 모두 젊은사람만 있는 거야. 학원 선생의 눈빛이 며칠 하다 그만둘 늙은이로 아는 것 같더라구. 하기야 알던 사람 이름도 까먹는데 머리에 새 단어가 입력이 안되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도전했어. 집에서 화투장에 일본어 단어를 쓴 걸 붙여서 방바닥에 엎어서 깔아놓고 한 개씩 뒤집어 보면서 외웠지. 내 방식이야. 어떻게든 하루에 사십 개씩 머리 속에 입력했어. 지금은 일본 사람과 직접 말로 채팅을 할 정도가 됐어. 여행을 가도 불편하지 않게 말하고.”

그의 도전정신은 늙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헤어질 무렵 그가 멋적은 듯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상익아, 이제 나는 우파다. 그런데 부패하고 기득권에만 집착하는 놈들은 싫어.”

나는 그가 뭘 말하려는지를 생각해 봤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큰 복을 받았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중학교 이학년 때 아프리카 오지로 가서 선교를 하겠다던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너는 예수파라고 교정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