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는 1979년 10월18일 새벽 2시쯤, 비상계엄령이 펴진 부산의 계엄사령부(군수기지사령부)에 나타났다. 야간 비행으로 급히 내려온 것이었다. 金載圭는 朴興柱 대령(수행 비서관) 등 참모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부산지역계엄사령관 朴贊兢 중장에게 朴 대통령의 지시를 구두로 전달했다. 그 골자는 “데모의 징후가 여러 他 지역에서도 엿보이니까 빨리 사태를 진정시키라”는 것이었다.
朴 중장은 金載圭가 3군단장일 때 그 휘하에서 사단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해서 친면이 있었다. 金載圭는 18일 아침 계엄사령부에서 열린 계엄위원회의에 참석했다. 崔錫元 부산시장을 비롯, 부산지검장, 시경국장, 교육감, 관구 사령관, 법원장 등 계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金載圭는 이렇게 말했다.
“4·19는 우리 軍의 수치였다. 계엄군이 본분을 이탈, 시민과 합세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이번에는 軍의 본분에 충실하라.”
金 부장은 또 1964년의 6·3 사태 때 6사단장으로서 서울지구 계엄 업무를 맡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金載圭의 이 부산 출장은 그와 朴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요인이 됐다.
나는 어제 저녁, 전직 정보부 간부 K씨를 만나 식사를 하다가 재미 있는 일화를 들었다. 그는 정보부 안에서 보고서를 잘 쓰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金載圭는 1979년 10월18일 오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K씨를 부장실로 불렀다. 피로한 표정이었다. 金 부장은, 자신이 메모한 종이를 건네주면서 "각하께 보고할 문서로 정리해달라"고 했다.
K씨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 金 부장의 메모를 읽고 깜짝 놀랐다. 비상계엄령을 부른 부산시위의 원인에 대하여 <첫째, 장기 집권에 대한 반감>이라고 적혀 있고 대책으론 <첫째, 유신헌법 철폐, 직선제로 개헌>이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K씨는, 朴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장기집권' '유신철폐'인데, 정보부장이 시위학생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메모를 다듬으면서 완곡한 표현으로 바꾼 뒤 부장실로 올라가 제출하였다. 金 부장은 훑어보더니 보고서를 홱 던지면서 화를 냈다. 무서운 눈매로 노려 보는 것이었다. 왜 정확하게 쓰지 않느냐는 질책이었다. K씨는 "이렇게 보고하면 각하가 화를 내실 것입니다"고 했다. 金 부장은 "졸병은 졸병 일에 충실해야지 장군처럼 생각하면 안 돼!"라고 했다. K씨는 메모에 충실하게 보고서를 다시 써 올렸다고 한다.
金載圭는 10·26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 국민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십 개 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부산을 다녀오면서 바로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김계원, 차지철 실장이 동석하여 저녁식사를 막 끝낸 식당에서였습니다. 부산사태는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高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民亂(민란)이라는 것과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 및 따라서 정부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등 본인이 직접 시찰하고 판단한 대로 솔직하게 보고를 드렸음은 물론입니다.
그랬더니 朴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더니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車 실장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朴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朴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 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해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李承晩 대통령과 여러 모로 비교해 보았지만 朴 대통령은 李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 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항소이유 보충서》 中 발췌)
K씨는 "金載圭가 머리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대통령에게 정확한 보고를 올리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車지철 경호실장이 金 부장에게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는 보고를 하지 않도록 요구하였으나 굽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金載圭는 1979년에 이상한 지시를 자주하였다. 정보부에 자체 특공팀을 만들어 침투훈련을 시켰다. 본부 지하를 요새처럼 꾸몄다. 직원들에겐 사격훈련을 많이 시켰다. 市街戰(시가전)에 대비하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金은 擧事(거사)를 구상하고 있었으나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弑害(살해)엔 성공할 수 있었으나 執權집권)엔 실패한 원인이 되었다.
31년 전 오늘은 부산시위가 마산으로 옮겨붙어 위수령이 선포되는 등 釜馬(부마)사태로 악화된 날이다.
秘話/金載圭의 부산 시위 현장 視察 보고서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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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0, 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