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11)여성새마을지도자들手記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趙甲濟의 注: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잠자던 농촌을 깨웠다. 근면, 자도, 협동이란 구호를 실천하여 농촌을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지도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남편과 노인들을 설득하면서 땅을 파고 길을 내고 다리를 놓았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싹이 돋았고 여성들이 역사창조에 主役으로 참여했다. 아래 글은 세 여성새마을지도자들의 手記이다. 오늘날 대폭발하고 있는 한국여성들의 사회적 에너지가 이때부터 각성되고 결집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서 읽어보자. 특히 이 자료를 프린트하여 젊은 자녀들에게 나눠주면서 말하자-'우리는 이렇게 살았다'고.
  
  
  趙甲濟의 머리글: 70년대 한국농촌에서 일어났던 일들
  
  유신시대에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은 3대 사업은 중화학공업 건설, 새마을 운동, 중동건설 시장 진출이다. 중화학공업건설은 朴대통령과 吳源哲 경제2수석 비서관이 주도했고, 중동건설은 기업이, 새마을 운동은 농민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새마을 운동은 공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졌던 농촌을 바꾸어놓았다. 그 힘은 새마을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였다. 우리 민족사상 농민이 수동적 백성의식을 떨쳐버리고 역사 창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백성을 국민으로 만든 셈이다.
  
  농촌을 바꾸는 데 기폭제가 된 것은 정부가 새마을 사업을 위해서 전국 농촌마을에 나눠준 시멘트와 철골이었다. 1971-78년간 지원된 시멘트는 마을당 2100포대(약84톤)이었고 철골은 마을당 2.6톤이었다.
  
  1974년 時價로 환산하면 연간 250만원이다. 그 뒤의 정권이 했던 식으로 정부가 이런 지원을 개별 농가 앞으로 했더라면 국민정신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을이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협동체제를 만들어 공동작업으로써 농로, 하천둑, 마을회관 등 마을의 공동재산을 건설하고 개선하는 일에 나섰다. 청와대 새마을 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朴振煥 박사에 따르면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동남아 국가 지도자들에게 강의했더니 “물자지원에 따른 부정에는 어떻게 대처했나”라고 묻더라고 한다.
  
  “시멘트와 철골은 부피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훔치기 어렵다. 전국적으로 마을마다 같은 양이 지급되었고, 이것을 마을주민들이 잘 알고 부정을 감시하는 인원이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1970년대에 시멘트와 철골은 국내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했다.
  
  시멘트과 철골은 주로 농촌마을의 길과 둑을 정비하는 데 쓰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을 넓히거나 포장하고 꼬불꼬불한 마을안길을 바로 하고 넓혔다. 동력경운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이런 길 정비는 농촌의 생산성 향상과 직결되었다.
  
  1971년부터 8년간 넓혀지고 바로된 마을진입로와 마을안길이 전국적으로 8만5851킬로미터였다. 마을당 2601미터다. 길을 넓히자니 작은 하천에 놓인 징검다리나 통나무다리도 콘크리트 교량으로 바꿔야 했다. 1971년부터 5년간 새마을사업으로 건설한 이런 작은 다리들이 전국에 6만5000개, 마을당 두 개였다. 마을주민들중에는 군 복무중 다리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 제대장병들이 많아 이들의 지휘하에 공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홍수 때 잘 무너지던 하천의 둑도 보강되거나 물이 잘 흐르도록 직선으로 바꾸어주었다.
  
  마을안길을 직선화하고 넓히는 과정에서 흙 돌 나뭇가지로 된 담을 헐고 시멘트 담을 쌓는 일이 이어졌다. 길가에 돌출한 農家도 헐어야 했으나 정부가 보상해주지 않고 마을사람들이 기금을 모아 보상했다. 이렇게 하여 마을안길과 농가마당까지 자동차와 동력경운기가 다니게 되니 농업의 기계화가 확산되었다. 1970년엔 두 세 마을당 한 대 정도이던 경운기가 1975년에는 마을당 2~3대로 늘어나고 1980년대엔 마을당 20대로 急增한다.
  
  이런 농촌개조사업을 정부가 보상을 해주면서 주도했더라면 엄청난 재정지출이 따랐을 것이다. 1970년대에 토지소유자가 새마을사업을 위해 자기 땅을 희사한 것이 마을당 1700평이었다. 이런 利他的인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처럼 마을의 공동이익사업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마을의 간접자본을 축적해간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새마을지도자의 양성과 교육에 운동의 成敗가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里長외에 마을마다 새마을지도자를 두 명씩 추대하되 보수를 주지 않도록 했다. 보수를 받지 않는 지도자라야 좋은 사람이 추대되고 마을사람들도 잘 따라준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1971년부터 8년간 새마을사업을 위해 투입된 마을주민들의 무보수 노동일수는 매년 평균 8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 일을 놓고 회의를 하는 마을회관도 마을마다 서게 되었다. 주로 겨울철 밤에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전등불 아래서 길을 닦고 다리를 놓으며 둑을 쌓는 일을 의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에 원자력 발전이 시작되면서 농촌 電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마을 속으로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마을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이 전국 농촌의 풍경이 되었다. 한국의 농민들은 민주주의를 책에서 배우기보다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보다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自助사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배우게 되었다(朴振煥이 쓴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 경제근대화의 새마을운동’).
  
  이런 풀뿌리 민주주의의 현장에서 여성들의 발언권과 참여가 높아졌다. 농촌근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성들이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등장하는 곳이 점점 많아졌다. 1960년대부터 여공들이 섬유, 신발공업쪽으로 진출하더니 1970년대엔 드디어 농촌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커졌다. 새마을운동은 여성지위 향상에 기여했다. 1970년대에 양성된 농촌의 지도자群은 그 뒤 농협과 지방자치단체의 간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볏짚으로 이어진 초가지붕은 해마다 갈아입혀야 했다. 겨울철이 되면 이 일이 아주 큰 행사였다. 1970년에 전국 250만 농가의 약80%가 초가집이었다. 마을안길을 정비하여 농가 마당까지 화물자동차가 들어올 수 있게 되니 시멘트 기와 슬레이트로 초가지붕을 바꾸는 농가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때 쯤 되면 초가지붕을 갈아입히는 작업을 할 줄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농촌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草家 지붕들이 알룩달룩한 원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가장 쉽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야였다.
  
  농촌아궁이도 19공탄용으로 개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산에서 땔감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朴대통령의 강력한 入山금지 조치가 효과를 내고 있었다. 도시에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가정용 연료가 가스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에 19공탄 수요가 줄어 농가로 퍼져갔다.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농촌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가는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또 다른 가시적 변화였다.
  
  우물에 의존하던 농민생활도 개혁되었다.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간이상수도 공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계곡의 맑은 물을 저수탱크로 끌어왔다가 파이프로 이 물을 개별 농가에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비위생적인 食水로 인해 발생하던 전염병이 많이 줄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늘었다.
  
  朴 대통령은 이 무렵 월간경제동향보고회 직후의 새마을운동성공사례 발표 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농촌에서 급한 환자가 발생하면 농민들은 어디에 있는 어떤 병원으로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朴대통령은 읍면단위로 보건진료소를 만들고 여기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견습의사와 간호원 한 사람씩을 배치하도록 했다. 1964년 우리나라 농민들 가운데 전등불 아래 살았던 사람들은 약12%였다.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農村電化사업이 확산되면서 1977년에 가면 농민들의 98%가 전등불 아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를 끌어오는 데 드는 비용의 약80%는 장기저리의 융자금으로 충당토록 했다.
  
  

  
  1. 산비탈에 쏟아부은 한 여인의 집념
  
  곽영화(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1동 부녀지도자)
  
  
  불의의 사고로 남편 사망
  
  저는 1942년 4월 서울에서 태어나 오남매의 맏이로 곱게만 자랐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비교적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쏟으시는 양친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푼 꿈을 가지고 법학과를 나온 무녀독남 외아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의 단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기만 했고 장차 법관이 되겠다고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서 편안한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안일하고 영원한 꿈은 잠시뿐이었고 충격과 긴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경의 과정을 밟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일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부산에 내려가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항상 신병으로 고생하시는 시부모님과 그리고 저와 어린 아이는 서울 약수동 시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간 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남편은 불의의 변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닷물에 던져졌고 4부두 뱃사공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뜻밖의 전보를 받은 우리 가족들은 허겁지겁 관리국을 찾아갔지요 마음속에 요행을 바라면서 부둣가에 가서 확인한 결과 틀림없이 나의 사랑하던 남편이었습니다. 얼굴은 깨어져 피투성이가 되고 오른쪽 눈알은 튀어 나왔더군요. 그리고 손과 발에는 핏자국이 맺힌 채 정말 어처구니 없는 형상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절망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현기증까지 났습니다. 수사기관에서 아무리 수사를 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단서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연애 과정을 통해서 오직 사랑으로만 얽혀진 우리 부부 사이에 이별이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모든 꿈은 산산이 깨어져 버렸고 인간 대열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린 초라한 몰골과 남편의 보기 흉한 시체 덩어리만이 내 차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경찰은 여러 날이 지나서야 익사라는 석연치 않은 판명을 내렸고 할 수 없이 관리국측의 주선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던 남편을 화장터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두 살 난 어린 것을 안고 허탈한 마음으로 나의 전부를 보냈던 서울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부모님을 따라서 시조부 양위분이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희망이 없는 남편의 고향
  
  남편의 고향집이라고 처음 와서 보니까 논 1백 평뿐이고 이것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줄 몰라서 벌레가 다 먹어 버리고 남는 것은 싸라기 한두 말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시조부님께서는 술로만 살아 가시고 시조모님 역시 중병을 앓고 계셨으니 말이 좋아 고향이지 나에게는 전연 낯도 설고 물도 선 곳이었습니다. 정말 답답한 마음은 풀 길이 없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는 환자를 보살피는 데 신경을 써야 했고 마음에 안정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생활의 위협이 엄습해 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가난과 고독 속에서 체념적으로 살아야만 했지요. 야속하기 짝이 없는 가난 때문에 면사포마저 써보지 못한 채 시련의 나날만이 연속되는 가정을 지켜야 했고 시아버님과 시조모님 두 분 환자를 간호해야 했지만 그게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게 했지만 불쌍한 어린 것의 장래를 위해서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 내가 직장이라도 가질까 하였으나 시아버님께서는 절대 반대하시면서 집에서 어린 것이나 잘 키우라고 하시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생활을 이어가야 하니 시어머님께서 서울 가서 장사라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마지막 소망을 어린 손자한테 걸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 약수동 시장으로 떠나셨습니다. 고무다라로 채소 등을 사가지고 시장거리에서 파노라면 단속 나온 구청직원들에게 발길로 차이고 내동댕이쳐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탄식하며 슬프게 우시는 시어머님의 마음은 또 어땠겠습니까.
  
  시어머님께서 보내주시는 적은 수입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시조모님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은 자리에 누운 채 대소변을 받아 내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환자를 씻겨 드려야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소변이 묻은 바지를 빨아야만 했고 미음을 쑤어서 끼니마다 환자의 입에 떠 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쉴사이 없이 환자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환자의 옆에 앉아서 밤을 새워야만 했습니다. 삶이 이토록 어렵고 고되다는 것은 꿈에 부풀었던 학창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고 인생을 단지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과거의 철없는 시절을 다시 한번 뉘우치며 배고파 보채는 어린 것을 껴안고 구석구석 다니면서 한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1970년 1월 시조모님께서는 결국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마지막 가는 영혼을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장례는 大小家(대소가) 친척들의 주선으로 무사히 치렀고 나는 남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것을 결심했으며 내 가정에 더 이상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버려진 산을 개간하기 시작
  
  강한 자존심을 무기로 인생의 낙오를 벗어버리기 위해 일복을 차려 입었습니다.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종갓집 종손부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정 무엇인가 해야만 했습니다.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황무지 같은 돌산이 하나 있을 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산이 하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웠습니다. 만약에 그 산이 토질이 좋고 평지에 있는 좋은 것이었더라면 오래 전에 팔아 쓰셨지 내 차례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산을 개간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나의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처참한 꼴이 된다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서 완전히 「나」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가짐을 정리하고 보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만 같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서 앞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손에 연장을 찾아 들고 산을 찾아갔습니다. 아카시아 나무와 고목이 된 아름드리 밤나무가 여기저기 수없이 많았으며 특히 가시덤불 우거진 잡초는 말할 수 없이 엉키어 있었습니다. 평생을 통해 연장이라고는 처음 만져보는 나로서는 너무도 서툰 솜씨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저앉지 않고 먼저 가시덤불과 아카시아를 베어 버렸으며 밤나무도 베어냈습니다. 연장을 잘못 만져 얼굴을 찍힌 적도 있고 가시덤불을 베어 낼 적에는 손가락도 수없이 베었으며 많은 가시가 손에 박혀 굳은살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진 풍파에 시달려 보기조차 앙상한 몰골에 신경은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워졌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서 뜬눈으로 새우게 되니 몸은 자연히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1970년 3월 봄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땅을 팠습니다. 몇 달을 계속하는 동안에 육신은 뒤틀리는 것 같고 손바닥은 부풀고 아파서 세수를 하지 못하는 때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특히 산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 매일같이 다니기가 힘이 들었으며,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발바닥은 아파서 땅을 디딜 수가 없는 상태였지요. 이러한 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며칠이나 하는가, 두고 보자고 며칠 안 있어서 가버릴 거라고 하면서 제 시아버님한테 며느리를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면 겉으로는 무척 생각해주는 것같이 하지만 내가 돌아서면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을 할 때는 정말 얼굴에 불덩이가 쏟아지는 것 같았으며 내 전신의 피가 거꾸로 곤두박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겨운 수모를 참고 견디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괭이 자루에 다시 한번 강하게 힘을 주었지요. 사회의 냉혹성을 뼈져리게 느끼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었습니다. 저를 괴롭히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결국 나는 가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죽기로 매달리다
  
  부모를 위하고 가정을 살리는 길이라면 내 또한 죽기까지 각오했습니다. 마지막 쓰러져 가는 가정을 안고 죽으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담대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린 것을 우산으로 받쳐놓고 비를 맞으면서도 땅을 파기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참으로 모질고 질긴 것이지요. 무심하고 야속하게 흘러가는 광음 속에서 조급하고 목말라 했던 내 생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정말 과감하고 철저하게 일을 했습니다. 말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고 성공을 애타게 갈망하며 죽기까지 매달렸습니다.
  
  아침에 일하러 갈 적에는 어린 것이 걸어가지 않으려고 울며 보채니 그럴 적마다 어린 것을 지게로 짊어지고 산에까지 갔습니다. 아카시아 아름이 넘는 큰 뿌리를 캐노라면 전신에 땀은 비오듯하고 배는 고프고 힘은 빠집니다. 손바닥은 터져서 물이 나오고 양쪽 팔은 아파서 들 수조차도 없으며 몸통은 아프다 못해서 두루뭉수리가 되는 것이고 몸이 부었는지 살이 쪘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감각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다시 한번 허리끈을 힘 있게 졸라매고서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땅을 파노라면 어린 것은 배고파 밥달라고 울어 대지요. 그럴 적마다 어린 것을 달래기 위해 『정욱아 여기 오줌을 누어라. 엄마가 흙으로 떡을 만들어 줄게』하면서 어린 것의 오줌에 흙을 뭉쳐 『떡 맛있다. 냠냠』하면서 달래면 어린 것은 신기한 듯이 배고픔을 잊고 울음을 그칩니다.
  
  3, 4월 긴긴 해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린 것을 달래노라면 눈물은 앞을 가리고 짜증은 끓어 올라 참을 길이 없으니 애매한 괭이자루만 땅에 팽개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짜증은 잠시뿐이었고, 죽어도 하고, 죽을 힘을 다해 일을 계속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던 일을 모두 마쳐야만 집에 오는 것이었고 해는 서산에 기울어지니 저녁을 하기에 바쁩니다. 저녁 식사라야 面(면)에서 주는 구호 밀가루로 죽을 쑤어 먹는 것이지요. 밀가루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도저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나의 피로와 궁색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힘을 내서 했습니다. 내 육체는 점점 시들어가지만 내가 뿌린 씨는 결코 옥토에 떨어져 좋은 결실을 이룰 것이라고 믿고 정말 진실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던 세월
  
  끼니마다 밀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면서도 한 줌 한 줌 절약하여 모은 쌀 30말로 남의 논 도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못자리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을 추수가 되기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심한 주위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농사를 짓게 되니 그런대로 식생활 유지는 해 나갔습니다만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평생에 밥 한 그릇 배불리 먹을 수가 없으니 기어코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만으로 살을 부수고 뼈를 갈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동반자가 없는 나로서는 너무도 어렵고 고달픈 생활이었으며 매일같이 쉬지 않고 산에 일하러 다니자니 하루가 천년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나의 소지품으로는 헌 누더기의 옷보따리 한 개와 다 떨어진 몸뻬 그리고 나를 증명해 주는 어린 것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속 옷 한 가지라도 사 주어야만 입었고 고무신 한 켤레라도 사다 주어야만 신었으며 이것마저도 아끼고 간수하다가 철이 지나서 못 입고 못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세탁 비누로 잿물을 사다가 녹여서 쌀겨를 버무려서 만들어 썼습니다. 그리고 시조부님을 비롯해서 시아버님과 어린애의 머리는 집에서 기계를 사다 놓고 빡빡 깎아드리며 헌옷 한 가지라도 알뜰히 기워서 입혔습니다. 그 며느리 잘못 얻어서 내 아들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몸으로 수고하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많은 나무 뿌리들이 하나하나 줄어들고 개간지가 눈에 드러나도록 넓어져 가는 것을 본 어느 심술궂은 사람은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나서 잘못하면 마을 사람들이 다 죽는다고 집에까지 쫓아와 법석을 떨며 사람을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내가 피로에 지쳐 쓰러질 때 나를 도와 주기는커녕 그러면 그렇지 하고 짓밟아 버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웃어른들의 마음을 맞추기란 죽기를 각오한 자 아니면 도저히 어려운 일이고 남몰래 피눈물 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개간을 하던 날 나는 괭이를 든 채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먼 곳에서 이를 지켜 보다 놀라서 뛰어 올라온 성씨 아주머니의 부르는 소리에 가물가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남이 먹을 때 먹지 않고 남이 쉴 때 나는 일했으며, 좋은 옷을 입을 때 나는 찢어진 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고비고비 눈물이요, 한숨과 괴로움이었습니다만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었기에 4천 평이라는 땅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대견하겠습니까.
  
  
  포도·복숭아 새 싹 나오자 너무 기뻐 엉엉 울었다
  
  나는 이곳에 수입이 빠르다는 포도나무 6백 주와 복숭아 나무 5백 주를 심었습니다. 남은 자리는 간작으로 수박과 토마토를 했지요. 포도와 복숭아가 어떻게 열리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던 중에 새 싹이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도 기쁘고 반가워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생의 보람, 그것은 정말 진주 같은 것이었지요. 피와 땀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고생 끝에 오히려 값진 것을 찾아낸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침묵과 고독만을 지키면서 감각없이 살아온 나는 생애 최대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로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과수나 원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되어서 세밀하게 배우고 관찰을 했습니다. 수박을 온상에서 키워 본답에 옮기기까지는 그 과정이 정말 조심스러웠으며 알맞은 온도와 보온 관계로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됐고, 아침 저녁 물을 주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온상에서 키운 수박을 본답에 옮기고 나니 날씨가 가물어서 물을 주어야만 했기에 나는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면서 일일이 물을 지어 날라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 것은 물지게를 붙잡고 기를 쓰며 보채니 견디다 못해서 뺨을 때려주고는 나도 같이 울었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분무기를 등에 지고 30통 이상 약을 뿌리자면 양쪽 어깨는 새파랗게 멍이 들고 등에는 약물이 쏟아져 옷을 버린 때도 수없이 많았으며, 목줄기가 뻣뻣하고 머리가 무거워서 한참씩 정신을 차리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포도밭을 지키기 위해 비가 오는 날에는 거적을 쓰고 앉아 밤을 새워야만 했고 울타리 없는 밭에 몰래 들어와 수박 포기를 뽑아갈 적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으며 수박밭에서 죽어버릴까도 생각했습니다. 일일이 물을 주어서 정성스럽게 키우던 중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뛰어올라가 보았더니 그중에서 제일 크고 좋은 것으로만 일곱 포기나 도둑을 맞았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분해서 기어코 찾을 욕심으로 인근 촌락을 샅샅이 뒤져보았더니 어떤 염치 없는 친구가 자기밭에 나란히 심어 놓았더군요. 오랫동안 내 가슴속 깊이에 쌓이고 쌓인 분노의 불길이 그 친구한테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는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살려 달라고 애걸 하더군요. 무지와 허영에 눌려서 한 여인의 부르짖는 절규를 외면한 채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 놓은 수박 포기를 뽑아 갔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겠습니까. 3백 포기의 수박이 자꾸만 죽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몸이 달아서 면사무소의 지소로 달려가 문의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망을 안고 나와서 농약사에 문의를 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3백 개에서 꼭 1백 포기가 죽었더군요. 죽은 것을 뽑아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벌레가 뿌리를 잘라 먹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박이 열릴 때는 정말 혼자 보기가 아까웠습니다. 내 평생 처음 보았거든요. 그리고 포도밭에 우거진 잡초를 뽑아 줄 적에는 풀잎에 황충이라는 벌레가 붙어 있어서 내 손에 무서운 독이 올라서 내 손 전체가 붓고 가려워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베어논 풀을 한 짐 잔뜩 지고 집에까지 와야 했으며 리어카에 많은 퇴비를 싣고 가서 또한 져 올려야만 했습니다. 나락논에 엎드려서 논을 매주기도 하고 변소의 인분을 퍼서 퇴비를 뒤적이기도 했으며 똥장구를 등에 지고 수박구덩이나 감자밭에 인분을 떠서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된다는 옛속담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남자지, 여자냐』
  
  나는 이왕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 속에 젖어 버리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남자지 여자냐』고 대꾸합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도로자갈 부역이나 못물 내려오는 도랑 치우는 부역 등 남자들만이 하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장 힘들고 하기 싫어 하는 일들만을 골라서 해왔습니다.
  
  남성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느끼면서, 여자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지요. 산에서 골라낸 돌멩이를 일일이 지게로 져다 버려야만 했고 비료를 구하지 못해서 지게를 지고 산골짜기에 다니면서 산초를 베어다가 퇴비를 만들어야만 했으니 나의 조그마한 육체는 말이 아니었고 내 어깨에 깊이 들은 멍은 풀릴 사이가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산에 다니면서 땔나무를 해야 했으니 손은 터지고 입술은 갈라졌으며 발은 얼어서 동상에 걸리고 했습니다. 미끄러운 골짜기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내려 오느라면 아랫도리는 휘청거리고 눈이 캄캄하면서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전에는 손이 예쁜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마디가 커지고 억세게 생긴 손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1973년도에는 포도가 3년생으로서 15만원이 나왔으며 1974년도에는 28만원이 나왔습니다. 1980년대에는 1백만원 이상의 소득 목표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1백50원도 구하기 힘들고 만져만 보고 준다고 해도 거절을 당했던 내 가정에 15만원이나 28만원이란 돈은 너무도 엄청나고 큰 것이었습니다. 피와 눈물이 아니고서는 맛보기 어려운 사연들이었습니다. 한 줌의 흙과 한 그루의 나무에도 피와 눈물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가정은 차차로 안정이 되고 병든 시아버님께서도 몸이 좋아지셨고 서울에서 혼자 고생하시던 시어머님도 집에 오셔셔 좋아하시며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시조부님께서는 매일같이 술만 잡숫고 돈타령만 하시더니 이제는 정신이 드셨는지 술도 줄이고 용돈도 안 쓰십니다.
  
  몸과 마음들이 한데 뭉쳐서 열심히 하게 되니 가정은 화목해지고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보고서 문화 가정이라고 하면서 여간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집에는 아들도 많고 며느리도 많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간 또는 시누이와 올케 간에 싸움 떠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효부 대통령상을 비롯해서 도지사 보화상 등 효부열녀에게 주는 이름 붙은 상은 모조리 다 받았습니다. 삶에 보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하느냐 못하느냐 심각한 갈래길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며 개척해 나갈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내 일생을 바치는 희생적인 정신으로 힘쓰고 애쓰며 기필코 내 청춘의 보상을 찾아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렵니다.
  
  특히 어린 것이 아빠를 찾을 적에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는 미국에 공부하러 가셨다고, 정욱이도 공부 잘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비행기를 타고서 미국에 가라고 하면 비행기를 타려면 돈은 얼마가 있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아빠도 모르는 어린 것을 소망으로 삼고 먹을 것도 없는 궁색한 생활을 지탱해 나간다고 나물밥과 밀가루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눈물의 어머니, 희생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백 번 천 번 다짐해 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상처를 안고 무서운 집념에 사로잡힌 채 오직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일념, 그 성공이란 먼 훗날 남의 것이 아니고 내 눈에 보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그것이기에 연간 1백만원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강한 정신력을 끝까지 발휘하여 용감하게 달려 가렵니다.
  
  개같이 벌어 벼락부자가 되기보다는 피와 땀으로 진실하게 벌어서 헐벗고 굶주리며 문전 걸식하는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서 도와 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저를 비웃고 헐뜯는 사람들이 지금은 태산 꼭대기에 올려 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곽영화를 지도자로 세워 가지고 새마을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80호가 살고 있으면서 他姓(타성)은 불과 몇 집 안되고 전주 李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으면서 양반만을 철저하게 내세우는 아주 깊은 산꼴짜기의 답답한 고을입니다.
  
  항상 일가끼리만 뭉쳐서 살아온 탓인지 남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집안 간에는 절로 의뢰심이 지배해 왔으면서 自助(자조)란 전혀 모르고, 협동을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공부를 해서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전부 도시로 나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들뿐이었으니 도저히 그 속에서는 나의 체통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다가 항렬이 제일 낮고 보니까 전부 나한테는 아저씨 할아버지뻘이 되고 심지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동네에서는 가끔씩 회의를 하고 특히 부인회를 한다고 하면서도 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부인회란 원래가 남편들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구나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을 일에는 전혀 캄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새마을이란 전혀 생각도 못하고 남자들이란 사랑방에 들어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화투 노름이나 했습니다. 전기나 전화는 물론 시설을 갖추지 못해서 호롱불을 켜야 했고 환자나 급한 일이 생겨도 일일이 사람이 다녀야만 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많은 물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못가는 실정이었습니다.
  
  
  節米로 모은 돈으로 교량 건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조차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마을 사람들이 늦게야 잠에서 깨어난 듯이 새마을 사업을 하자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날로 간부급을 뽑고 기존 어머니회를 바탕으로 해서 회원을 모아 보았습니다. 전체 회원은 36명이 되었습니다.
  
  節米(절미) 저축으로 하루에 쌀 세 주먹씩을 저축한 것 가지고 1년 통계를 해보니 4만3천원이었습니다. 1970년도까지 계속한 것을 보니까 25만8천원이며 백미가 31말 9홉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염원이자 어머니들의 보람인 교량 공사를 하자고 의논을 했지요.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이 속히 하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어머니 회원들은 리어카에 자갈을 실어 나르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시작한 지 한 달도 못가서 완전 개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까 어머니 회원들은 자신이 생겼는지 이동구판장 사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풍각 시장에까지 가려면 십리길을 가야 하고 장에 다녀오면 그 날은 일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비조합 회원 60명을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1인당 1백원씩을 출자해서 6천원을 모아 가지고 생활필수품 중 비누, 미원, 성냥 등 손쉬운 것을 사다가 회원의 가정으로 돌려가면서 팔기로 했지요. 1년 동안을 팔아 통계를 내보니 원리금 2만4천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원들은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물건도 더욱 많이 사다가 팔게 되니 이익금도 많이 남게 되더군요. 1974년도까지 원리금 통계를 내보니 15만5천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깐 우리 마을에도 본격적으로 새마을 운동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회의 때마다 내 가정에서 몸소 실천하고 체험했던 것을 이야기도 해주고 협동과 단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충실하게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節米저축금 10만원과 부락 자체부담 95만원을 들여서 도합 백1백5만원으로 전기가설 공사를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전깃불을 켜게 되었고, 전화도 동시에 끌어들였습니다. 지금은 전화 있는 집이 일곱 집이나 되고 텔레비전 안테나가 집집마다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량건물 7동을 헐어버리고 새 집으로 다시 지었으며 초가 지붕도 전부 슬레이트나 기와로 단장을 했습니다. 안 길을 넓히는 데에는 서로가 자기 골목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골목에는 한 아저씨가 반대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못 고치고 있습니다만 머지 않아서 그분도 뉘우치고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술집 색시의 눈물
  
  또 마을 창고와 구판장을 짓는 데는 군청으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보조받고 나머지는 자체부담에, 어머니회 기금을 보태서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 작업장으로 사용하던 동답 4백 평을 개간해서 뽕나무 1천2백 본을 심어서 누에 소득 15만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면서 당산제를 지내느라고 많은 물질을 허비했는데 지금은 당산제를 철폐했습니다. 감히 기초 자립마을도 생각을 못했었는데 지금은 우수 자립마을로 선정이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습니다. 그리고 1백60만원의 자부담으로 폭 5m 길이가 1천2백m인 산업도로 공사도 했습니다.
  
  가을에는 고추 건조실과 도정공장, 또 마을회관 상수도 설치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을 근처에 타지에서 술집 색시가 들어와서 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들이 자꾸만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 집에 와 술주정을 하면서 아내들을 못살게 한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일렀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내 돈 가지고 술 먹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하면서 자기 남편 없으면 그만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에 어머니 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다음에는 근처에 있는 다섯 마을 어머니들을 찾아서 의견을 이야기했더니 협조해 준다고 하면서 쾌히 응낙을 하더군요. 그래서 다섯 마을 어머니들과 함께 술집에 갔습니다. 색시되는 사람한테 좋은 말로 타이르면서 우리 새마을에 협조 좀 해 달라고 어머니들의 뜻을 이야기했더니 색시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 떠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앞으로 잘 사는 마을, 거짓과 허영이 없는 마을로서 협동하고 단합하여 알찬 마을 다듬기에 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새마을 여성 지도자로서 성실하게 일해 왔으며 푸른 녹색의 장원이 되기 위해서 내 전체를 바치며 힘 있게 살아 왔습니다. 마을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놓아도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것도 없어도 정신만 바로 살면 다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습니다.
  
  

  
  2. 역사를 울린 여성 새마을 지도자들 手記-서죽자
  
  도박과 술에 찌든 육지 속의 섬마을을 바꿔놓은 4년간의 분투
  
  서죽자 전북 순창군 유등면 유창리
  
  
  육지 속의 섬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전북 순창에서 동쪽으로 8㎞ 지점 유등면 유촌리 책암부락. 뒤에는 첩첩산이요, 앞은 섬진강 중류. 대교를 놓기 전에는 면사무소나 市場(시장), 아니 우리의 젖줄인 논과 밭에만 가려 해도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 나루터는 2천년 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백제 때부터 이곳을 피난처라고 할 정도로 육지의 섬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1962년. 결혼하여 와보니 속칭 「용시마을」로 산간벽지였습니다. 이런 속에 여지껏 행정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나룻배만 한쪽에 매버리면 도박꾼들은 안심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술타령 그 뒤에 온 것은 빈곤뿐이었습니다.
  
  이 가난 속에서 5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부녀자들은 고작 길쌈하여 남편들의 술값 노름빚을 갚아야 했고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식생활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 행상으로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잘살고 기름진 곳을 보면 언제나 눈에 선했고 어떻게 하면 이런 곳처럼 잘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971년 어떤 방법으로라도 직접 앞서 일해보려고 다시 고향으로 왔으나 생활은 여전히 도박과 술이었고 집집마다 빈곤은 여전했습니다.
  
  나는 이 가난의 이유가 첫째 도박, 둘째 술이라고 생각하고 이것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노인층 사랑방을 먼저 찾아가서 말씀드렸더니 좋은 의도라 호응을 해주시기에 힘을 얻어 젊은 층의 사랑방을 방문했지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느니 『재수없이 별 것 다 보겠다』느니 했지만 못 들은 체 주전자를 들고 다니면서 호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몇날을 울며 새고 나니 너무도 허무했습니다.
  
  나는 다시 혼자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방법을 달리해서 가장 입심이 세고 굴하지 않을 부녀자 네 명을 설득, 합동해 부녀자들을 설득해 나갔더니 성공을 했습니다. 17명의 회원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부녀회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새마을 사업이 나왔으나 우리 마을은 아는 이가 몇명 없었습니다.
  
  회원은 몇 안되었지만 부녀회는 일찍부터 조직이 되었기에 때는 이때다 하고 面(면)직원과 힘을 합해서 우리 부녀회원의 힘으로 남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로 결의해 6일 동안 퇴비를 뜯기로 했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을 하니 마을 앞에 풀더미가 산같이 쌓였습니다. 그랬더니 남자들은 의아해 했고 빈정대던 사람들도 약간은 누그러져 그 부인들도 회원의 대열에 들게 되어 나머지 3일 동안 퇴비를 하니 남자들도 감동하여 몇몇분들은 산에서 운반을 해주는 이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회원들은 남자들에게 대한 반발이랄까, 아니 가난의 울부짖음이랄까, 완전히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 무더운 여름, 땀으로 온몸을 적시면서 그 무거운 풀단을 이고지고 앞을 다투어 풀을 베던 그때가 말입니다.
  
  때마침 퇴비 심사에서 순창군 내에서 우리 책암부락이 1등을 해 시상금 5만원이 나오고 고압식 분무기를 받게 되자 잠자던 마을이 약간의 잠을 깨게 되었습니다. 마을에서는 전액을 우리 부녀회에 주시기에 부락의 숙원인 앰프방송 스피커를 마련했더니 우리 회원의 단결은 더욱 더 굳건히 되었습니다.
  
  다른 마을은 새마을 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나 우리 마을은 자금이 없고 또 관심 밖의 마을인지라 새마을에 대해서는 더욱 거리가 먼 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면장님을 방문해 사정을 했더니 시멘트 50포대와 철근 1t을 지원해줄 것을 약속받고 마음속으로 개선장군처럼 희망에 부풀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왔으나 부락민들은 전부 외면했습니다.
  
  누가 그 모래며 자갈을 운반하고, 땅을 누가 양보하여 새마을 사업을 하느냐고…. 그 일을 하다보면 농사는 다 지었다는 것이었다. 말은 점점 비화되어 치맛바람이 설치면 동네가 망한다고 직접 대놓고 모욕을 하게 되니 저는 배겨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부녀회원들은 밤에만 몰래 회합을 갖게 되고 퇴비처럼 우리 손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이웃 마을로 확산
  
  온 마을 부녀자들이 또다시 새벽부터 새마을 사업에 참여, 마을 안길을 넓히는데 각자 자기 집 담을 헐어버렸으니 부락은 발칵 소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남자들의 빈축이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의 힘은 더욱 더 강렬하게 불타 올라 새벽같이 나서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面을 통해 郡(군)에 알려지자 郡 간부와 직원이 부락에 와서 사진을 찍어가고 격려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노년층이 협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20일이 못 되어 온 부락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마을 안길 5백40m, 농로 4km를 확장, 집집마다 리어카가 들어가게 되니 영농방법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온 주민들은 저희 부녀회에서 말하면 무엇이든 앞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엌 개량 25곳, 공동 빨래터 2개소를 설치하게 되고 주점을 스스로 철거하게 되고, 술은 반드시 부인들이 받아 권하도록 되었으니 이 아니 화목하지 않게 되었겠습니까.
  
  이 사실이 인접 유촌·유천 양 부락에 퍼져 그 부락의 부녀대표들이 자연 나를 찾아와서 조직 및 추진방안과 방침을 배워가게 되고 개선방안과 새마을사업을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연구하게 되고 술 안 마시기, 노름 없는 마을로 만들기 위한 일을 서로 협조해 갔습니다.
  
  유천·유촌·책암마을의 농지는 거의가 水利(수리) 불안전답이어서 전답이 조금만 가물어도 메밀을 갈라는 등 애타는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이었습니다. 때마침 1973년 새마을 사업의 사업책정차 面에서 면장님과 직원들이 전부 오셔서 3개 마을 총회를 한 곳에서 갖고 「잘사는 새마을」 「소득 새마을」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새마을」을 표어로 3개 마을이 합심 연합해서 일하는 「연합 새마을」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양수장을 만들어 한해를 탈피하고 버려진 밭을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30마력의 기계를 郡을 통해 차용하고 옥토화하기 위하여 수로 1천5백m를 만들어 섬진강의 그 무진장한 물이 이 마을의 젖줄이 될 수 있으며, 나룻배만 보고 사는 마을이 밖으로 나오려면 섬진강 대교가 놓아져야 함을 역설하고 총화단결하면 안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몇몇 식견 있는 분들은 책암리 새마을처럼 한다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도 했고 면장님께서는 全(전) 주민이 총화단결하면 가능하다고 역설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업들이 이 지역의 숙원인지라 하면 된다고 확신을 했기에 유촌·유천 부녀회장님과 3만 주민의 합심을 이뤄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남자들의 힘을 북돋는 데 노력했고 자극을 주는 데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녀회에서 회장단 3인이 면장님을 방문, 방법을 문의한 결과 면장님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회장님들의 뜻이라면 틀림없이 된다고 하시며 面에서 3일 간격으로 좌담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세 마을 회원들은 「유촌 연합 새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키로 준비위원회를 조직, 남자들이 추진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 대교는 유등의 5개 면과 남원군 대강면 4개 마을이 시장과 연결되는 산업 간선 노선이므로 면장님을 모시고, 추진위원 대표와 함께 남원군 대강면장님을 방문, 해당 이장님들과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역시 그곳 면장님과 이장님들께서는 「가능성 없는 일을 왜 손대느냐」는 태도였습니다.
  
  
  5일 만에 산허리를 끊다
  
  효과없이 돌아오면서 우리 일을 우리가 해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번 다짐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부녀회원들은 10월20일까지 벼 추수를 하고 보리 파종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먼저 완료하고 새마을사업에 돌입하기로 3개 마을이 결의를 했습니다.
  
  첫 새벽부터 밤늦도록 작업반을 편성, 나락을 베고 남원군 대강면의 경운기와 유등면 일대의 경운기를 사전 예약하여 보리를 갈았습니다. 그러자 남자분들은 몇몇 불평도 있었으나 천지가 개벽한다고 웃으며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목적대로 10월19일까지 보리갈이와 추수를 완료하고 보니 전북에서 제1위로 군수님과 농산과장님께서 현지로 오시어 많은 격려를 해주시게 되었습니다. 또 면장님께서는 마을의 새마을 계획을 보고받게 되어 적극 협조해주시겠다고 치하를 해주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녀회원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고 부락민들도 더없이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10월22일 그 숙원사업 중의 하나인 양수장 기공식을 갖고 남녀 노소 없이 全부락민이 총동원되어 산을 끊고 도수로를 내고 양수장을 설치하는 데 전념을 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산허리를 불과 5일 만에 끊고 도수로를 내게 되었습니다. 너나없이 이 엄청난, 상상조차 못할 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수장 설치작업을 계속하면서도 주민들에게 천추의 숙원인 섬진강 대교 건설을 한번 해보자고 계속 설득전을 벌였습니다만 총회를 할 때마다 하기는 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한 길이 넘는 수심, 수천년 동안 못 놓던 다리, 역대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마다 내놓은 공약은 거짓으로 끝나버렸던 다리, 저곳에 다리만 놓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해보아라, 하면 될 것이다』
  
  자꾸만 마음의 집념은 이 다리로 쏠리게 되고 더구나 3개 마을 회원들은 모두가 저도 모르게 한마음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숙원」 이렇게 표현하기는 너무나 약합니다. 퇴비 한 짐을 지고 나루터에 서 있다가 저 나룻배가 이쪽으로 닿으면 배에 올라 논밭에 놓고 오고 홍수가 지면 건너가지 못해 그렇게 애타게 길러왔던 누에를 굶겨 버렸던 5년 전의 쓰라림. 강 건너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안부만 확인하고 애태우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인 귀여운 자식들. 학교에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어린 자식들, 야속하게도 남자들은 하지도 못할 일을 여자들이 무얼 안다고 떠드느냐고까지 했습니다.
  
  나는 부녀회원 3개 마을 총회에서 역설했습니다. 우리 몸이 저 물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완전한 다리가 놓여질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식들을 위하여 나는 물 속에서 다리발이 되어주겠다고 말입니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들의 설득 공작에 돌입하여 그해 겨울 내내 양수장 작업장에서, 밥상머리에서, 심지어 아이들의 호응까지 받으며 남자들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교각 두 개 세운 날의 감동, 『만세! 만세!』
  
  1974년 1월20일 섬진강 연합 새마을교 가설공사 추진위원 30명을 선출하고, 본 사업의 착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추진위원 30명이 분담하여 1년 동안의 배삯을 사전에 미리 받고, 희사를 받아 준비 작업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도 똑같이 이 사업에 호응하게 되니, 저마다 무리를 해서 내놓았는데 1백80만원의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2천8백만원이 드는 공사비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1백80만원을 면장님에게 가지고 가 우리 힘의 증거를 보이고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시멘트 1천2백 포, 철근 2t을 확약받았습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섬진강 대교의 기공식을 1974년 3월13일 군수님과 다수 기관장님을 모시고 강변에서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곳의 새마을 사업에 감동되어 각계 요로에서 45만원의 희사금이 모금되니 부락민은 더욱 더 힘을 얻게 되고 군수님이 현장에서 시멘트 4백50포대, 철근 5t을 전달하자 모두가 만세로 감사 표시를 했습니다. 온 부락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우리 회장 3인은 이날 얼마나 기뻤던지 꼬박 밤을 새워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작업장으로 달렸습니다.
  
  그날부터 우리 여자들은 강둑을 막고 남자들은 기초를 파고 우리 부녀회원들은 모래와 자갈을 모았습니다. 3월의 강바람은 차가웠으나 물 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추운 줄도 모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손이 부르트고 새 봄이 돌아오자 영세민들의 식량은 떨어져가니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부녀회에서는 구호곡을 거두기로 정하고 집집마다 내놓을 쌀·보리를 확보, 그 영세민들에게 양식을 주면서 일을 했습니다. 자재의 확보도 힘이 들어 면사무소 마루판자를 뜯어다가 거푸집으로 썼습니다. 그 깊은 물 속에 기초가 하나 둘 만들어져 가고, 착공한 지 25일 만에 교각 「다리발」을 설치하던 날 『야! 만세, 만세!』 강가의 메아리 속에 2개의 교각이 서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 우람하고 거대한 교각들….
  
  사랑하는 자식처럼 쓰다듬어 보곤 했었습니다. 몇몇 할머니들은 절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진을 찍어 이 고장 외지 거주자를 방문해 새마을 성금에 나서서 1백50만원이라는 거액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친 몸을 지도자의 스피커 소리에 벌떡 일으켜 세워 현장으로 달려갔고 하나하나의 교각이 서게 됨을 즐거운 낙으로 생각하면서 힘없는 팔·다리에도 불끈불끈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밤에는 야간작업반의 야식을 우리 부녀회에서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보내 주어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4월 중순이 되자 자주 비가 내리게 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기예보에 全 마을사람이 신경을 쓰게 마련이고 비가 온다면 야간반을 편성, 밤을 지새며 일했던 것입니다. 막아놓은 둑, 세워놓은 거푸집, 물 뿜는 양수기. 만약 한 가지만 날려보내면 우리는 절망이다. 날마다 현장에는 남녀노소 없이, 검은 얼굴, 부르튼 손, 고사리 같은어린 애들까지 나와서 일하는 모습, 과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비에 쓸려간 주민들의 꿈
  
  지나는 길손은 누구든지 이 광경을 보고 자기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위로를 하고 지나갔습니다. 사업은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나와 동아줄로 옭아매고 사전 대비를 했지만 5월28일, 하늘은 무심하게도 1백40mm의 비를 하룻밤에 내리고 말았으니 야간 작업을 어찌하겠습니까. 온 부락민이 횃불을 들고 그 빗속에서 필사적으로 떠내려가는 거푸집을 건져내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허우적대는 젊은 청년들은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절박감을 가졌습니다. 강둑에서 울음을 터뜨린 우리 회원들. 그 울부짖음은 가난에 지치고 굶주림에 시달려 기어이 잘 살아보겠다는 안간힘 속에서 나온 최후의 발악이었습니다.
  
  동녘 하늘이 희멀게지고 비는 그쳐가는데 그렇게 애타게 요행을 바라던 보람도 없이 거푸집은 간 곳 없고, 모든 자재는 겨우 목재 몇십 개밖에 구해내지 못하고 깨끗이 쓸려갔습니다. 야속하게도 아침햇살은 붉은 물 위를 찬란히 비추어주니 추진위원장님과 책임자들은 모두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남은 건 실망, 오가는 사람의 대화는 그저 한숨과 낙담뿐이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저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야 했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다치고 지쳐서 누워있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위문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낙담 속에 있던 차 면장님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왔습니다. 지사님께서 며칠 내에 이곳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요구는 할 것 없지만 이 현실을 지사님께 알릴 수 있도록 현황 설명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던 차 남원군 대강면에서 협조금 30만원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에 힘입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 집집마다 다니며 부모님의 灌木(관목)을 모두 켜서 거푸집에 사용키로 하고, 호당 椽木(연목·서까래) 다섯 개를 지출키로 합의하고 사업은 다시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열심히 일했습니다만 농번기가 돌아와 모든 일은 계획대로 되지도 않고 너무도 오랜 기간이 걸렸기 때문에 손이 모자라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러한 곤경에 빠지자 생과 사, 즉 살기 아니면 죽는다라는 신념 아래 일하던 사람들도 차츰차츰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사업을 내년으로 미루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못다한 일은 내일 하면 된다는 책임감 없는 사람들의 말이 입에서 오르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이쯤 되니 일은 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자재와 찬조금을 우리 부녀회에서 책임을 지기로 하고 노동력은 남자들이 맡기로 하고 나머지 상판용 일부 모래, 자갈은 반별로 할당을 하게 하니 남자들은 할 수 없이 다시 일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사업이 매듭짓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교각이 완전히 서고 상판이 한 칸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밤마다 다리 위에서 회의를 가졌고 다음날의 계획을 다짐하곤 했습니다.
  
  
  불가능이란 없다
  
  이렇게 수많은 날을 공사장에서 살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가 비일비재했습니다. 7∼8m의 높은 다리발 위에서 시멘트 콘크리트 작업을 하다 시멘트가 밑으로 떨어져 일하던 사람이 맞아 의식을 잃고 병원에 후송되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지금 와 생각하면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오직 피와 땀으로 뭉쳐진 자주, 자립, 협동 새마을 정신과, 날마다 밤낮으로 현장지도를 해주신 면장님을 비롯한 직원님들의 힘에 의하여 좌절했다가도 다시 힘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보람이 있어 우리는 길이 1백46m, 폭 5m, 높이 8m의 거대한 새마을 다리의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1975년 11월22일 全군민이 지켜보는 속에 지사님을 비롯한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개통하는 그날 부락민은 너무나 감격하고 대견스러워 목이 터지게 만세를 불렀고 또 너무나 기쁘고 신기한 나머지 펑펑 우는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돌아가신 옛님이 이 거창한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恨(한)이 되어 슬퍼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사뭇 축제 속에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자주, 자립, 협동. 새마을 정신은 이 세상 어떤 일도 불가능이 없다는 실증을 우리는 몸소 겪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얻어 유천·유촌·책암·무수 마을에 상수도 사업을 1974년도에 완공하고, 이어 양곡보관 창고와 양곡 공판장도 마련을 하게 되니 이제 그 육지의 섬 용시마을은 불과 3년 만에 개벽을 하게 되고, 모두 희망에 찬 날을 보내며 식량증산에 총 진군, 통일벼 생산에 여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눈부신 발전을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군수님, 면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삶의 보람이란 열심히 일하는 데 있다고 보며, 쉬지 않고 일해야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3. 역사를 울린 여성 새마을 지도자들 手記-최영자
  
  끈질긴 여인 때문에 사라진 거지마을 이야기
  
  최영자 경남 산청군 산청읍 지리 덕촌마을 부녀지도자
  
  
  심심산골의 「거지마을」
  
  저는 경남 산청군 산청면 덕촌 부락 부녀 지도자 최영자입니다.
  
  산청 하면 거기가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지리산 하면 아는 분이 많겠지요. 등산지로 유명하고 6·25를 생각하면 그 지긋지긋한 반란군의 아지트였던 지리산 그 기슭에 자리잡은 산청. 6·25가 거쳐간 전쟁의 허허벌판에서 제대로 복구도 못하고 빨치산과 맨주먹으로 10여년을 싸워온 우리 고장. 타 郡民(군민)들이 잘 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敵(적)과 싸워야 했고 他郡이 발전할 때 우리는 내 땅을 지키느라고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이 심심산골 두메에 「거지마을」이라 낙인이 찍힌 부락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산청군 산청면 덕촌마을인 것입니다.
  
  1968년 가을 내가 이 부락에 이사를 왔습니다. 이토록 낙오되고 표현할 수 없는 가난한 부락, 심지어 면직원 하나도 찾아와 주지 않는 버려진 마을이었습니다. 발을 딛는 그날부터 동네 생활의 비참하고 눈물겨움이 소문 그대로임을 알았습니다. 가구수 54세대 총 인구 3백23명 중 고용살이로 나간 청소년 39명, 농토라야 논 1백 반, 밭 90반, 그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는 것이라야 지게질뿐이어서 뼈가 부서지도록 이웃마을 또는 가까운 읍으로 품팔이 하는 외엔 할 일이 없었습니다.
  
  5일마다 맞는 장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종일 장에 나가 서성거리다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마다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이유 없이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하며 서로 싸웠습니다. 돌, 연장 할 것 없이 잡히는 대로 휘두르니 말린다는 사람이 또 같이 치고, 나중엔 줄싸움 패싸움을 하니 온 동네가 수라장이 됩니다. 부인들은 부인들대로 서로 입에도 담지 못할 욕설을 하고 싸우니 이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정꾼들은 술만 깨면 서로가 화해하고 그러다 과음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우고…. 사람들은 착하고 온순한데 봄마다 보릿고개에 바가지를 들게 한 그 무서운 가난이 자포자기의 타락길로 몰아넣고 만 것입니다. 끼니도 못 먹는 주제에 그렇게 술을 마시니 어찌 빚지지 않겠습니까?
  
  논밭이라야 뒷산 첩첩 골짜기에 한 두둑 두 두둑. 위치와 조건이 너무나 나빠 제대로 가꾸지도 못하고 가을에 겨우 추수라고 거두면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먼저 먹은 것을 갚아야 하니 어찌 거지꼴을 아니하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눈오고 추워서 일을 못하는 날에는 노름판이 벌어지더군요.
  
  이 한심스러운 모양을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약 1년을 넘기면서 이웃도 익히고 부녀자들 마음도 내 나름대로 파악해 갔습니다. 앞으로 단 1년이라도 이 부락을 위해 노력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즉 큰일은 못할망정 나의 정성과 끈기로써 착하고 알뜰하게 남편과 가정을 이끌 수 있도록 주부들을 지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싸움질과 술주정, 그리고 가난
  
  가난한 가정일수록 가정싸움은 잦은 법.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누가 남편인지 아내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치고 받습니다. 한번은 이웃싸움 구경을 하고 얼마나 놀랐던지 3일을 앓아 누운 적이 있어 지금도 간혹 그 이야기를 하고 모두들 웃는답니다.
  
  이렇게 메마르고 이해 못하는 洞民(동민)들, 특히나 이퇴계 선생님의 후손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부락인지라 씨족간의 갈등과 서로의 투기가 뒤엉킨 洞民들을 한 덩어리로 모아보기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약한 힘으론 여간 힘들 것 같지 않았습니다. 총 55세대가, 그마저 산허리 중턱에 동네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산비탈 돌밭에 매달린 집 모양은 돌 한 치 흙 한 치 차곡차곡 쌓아올려 게딱지 같았습니다.
  
  지붕은 이엉을 못해 그대로 비가 새는 집이 대부분이었으니 우리가 어찌 초라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은 국민학교도 제대로 다니기 힘들었고 어쩌다 고등학교를 나오면 대학을 나온 사람보다 더 뽐내고, 그런 사람은 아예 부락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인 양 떠나버리고. 못살아서도 他官(타관)으로 나가고 조금 살 만하면 또 떠나버려 군데군데 공터가 불어나니 동네는 갈수록 허술해지고, 인심은 날로 거칠어 간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한 購販 사업
  
  1969년 9월 초 이해가 빠를 듯한 부녀들 몇 분을 찾아가서 『우리 돈벌이 한번 해보자』고 제의했더니 『돈벌이라면 삼수갑산이라도 가야지』 하고 통쾌한 응답이 터지더군요. 노동을 하고 품팔아 버는 돈이 아니라 돈도 벌고 우리의 환경개선도 하기 위해 3백원씩만 거두어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여 시장가격이나 다름없이 부락 공동 購販(구판) 사업을 해보자고 제의를 했더니 모두들 움츠러들면서 『어른들이 반대할 것이고, 남편들도 야단을 칠 거며, 우리는 글도 몰라 장부정리도 못하고 돈도 없다』며 일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며칠 후 비오는 날을 이용, 집집에 호별방문을 했습니다. 집집마다 어른(시어머님)들께 제 뜻을 설명드렸더니 모두들 아연실색을 하시면서 『동네가 망할라니 사내들 술타령에 계집떼까지 따라 미치게 만들 참이냐』고 『미친년 같은 소리 입에 담지도 말라』는 과격한 할머니들의 호통에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이장님을 찾아가 의논을 했더니 역시 안될 일을 붙잡고 공연히 애쓰지 말고 포기하는 게 상책이라는 얘기였습니다.
  
  『당신이 그 일을 성공시키면 나는 손가락 끝에 불을 켜고 昇天(승천)하겠다』는 고함소리를 듣고 말았습니다.
  
  남이 하면 하겠다는 몇 집을 찾아가 권유를 하였습니다. 『만약 손해를 보면 내가 변상하겠다』는 조건하에 겨우 일곱 집에서 2천1백원을 출자하여 나를 포함해 합계 2천4백원으로 1969년 9월27일 購販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읍에 나가 외상 물건 5천원과 현금 구매 2천4백원, 총 7천4백원어치의 물건을 구입하니 각오는 단단히 했지만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쳤습니다. 그날부터 걱정도 걱정이려니와 그 무엇에 쫓기는 것 같은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제가 부락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들은 소리는 『당장 치우라』는 말과 『계집들까지 다 버리게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히고 동네 유지 5~6명이 모여 나에게 당장 오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죄인처럼 마구 떨렸습니다만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했기에 고양이 앞에 쥐처럼 불려가 쪼그리고 앉아 호된 꾸중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로 온 동네를 이렇게 시끄럽게 하며 망칠 짓을 하느냐』고 『이사온 지 얼마 안된 젊은 여자가 너무 간이 크다』는 얘기였습니다.
  
  『나 혼자 잘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제 힘껏 노력하여 무언가 한번 이 부락을 탈바꿈해보려고 하는 것이니 그만두라는 말씀만 거두어 주시면 어떻게 해서라도 꼭 성공시켜 보겠습니다. 기왕 사온 물건이니 달리 처분할 길도 없고 한 달만 해보고 매듭을 짓겠습니다. 구매점으로 인해 사고가 날 때는 제가 모두 책임을 지겠으니 참아 주십시오』
  
  이렇게 애원하며 한달간의 양보를 간신히 받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 부락에 술집이 하나 생겼습니다. 부녀자들은 남편들이 매일 장날이 된 것처럼 술을 먹게 될까봐 무척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술 장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부녀회에서 술을 판매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술을 들여 놓은 것이 큰 화근이 되었습니다. 자기 장사를 방해한다고 그 술집 주인은 사람으로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악담을 날이 갈수록 심하게 퍼부었습니다.
  
  밤새도록 동민에게 욕설을 퍼붓고 나를 걸어 모략하기를 일삼으니 동민들은 『미친 개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한 달을 못 채우겠다』면서 장사를 그만두라는 의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뒤범벅 속에서 10월27일, 드디어 기다리던 한 달이 다가왔습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기분으로 결산한 결과 5천2백원의 이익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도 벅찬 영광입니까? 회원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터진 순간 내가 느낀 승리의 감격은 그 어느 누구도 이해 못할 것입니다.
  
  적은 밑천으로 많은 이익금을 직접 보게 되자 진작 하지 못한 것을 모두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 회의때 10여명의 부인들이 앞을 다투어 부녀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동민들은 첫달이라 그럭저럭 되었지 앞으로는 안된다고 빈정대기도 하고 술파는 집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악담과 중상모략에 열중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귀담아 듣지 말라는 회원들의 부탁이지만, 나 역시 여자요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니, 시시각각으로 몰려오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참고 견디기엔 너무도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더없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제 구세주를 만난 기쁨, 한 달의 이익금이 자신이 없어 헤매던 내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이었습니다.
  
  회원 수가 늘어나니 이것저것 말썽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략자의 꼬임에 넘어가는 사람, 이해를 못해 말썽인 사람 등 이렇게 되니 자연히 월례회의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매번 중간 회의가 있어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운데 또 그 중간에 모이게 되니 어른들과 남편들의 꾸중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회의를 안할 수도 없는 것이 오해가 거듭되면 회원들의 질서가 문란해져 더 큰일이니까요. 이때부터 나는 집집마다 다니며 어른들과 남편들이 이해하실 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 매달려 목구멍이 말라붙도록 이야기를 했습니다.
  
  
  會則 제정
  
  그칠 줄 모르는 걱정 속에서 또 두 달째 월례회의가 돌아왔습니다. 이번 이익금은 1만원으로 껑충 뛰고 나니 또 다른 난관이 닥쳤습니다. 회원들은 이익금 계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는 구판장을 적게 이용했고, 누구는 많이 이용했으니 이익금을 물건 사는 대로 배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막힌 질문을 받고 그때서야 나는 큰 문제점이 앞에 놓인 것을 깨닫고 會則(회칙)의 필요성을 느끼고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1. 1차 계획은 3년으로 하고, 3년 안에 말썽을 부려 탈퇴하는 회원에게는 무조건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2. 사정으로 인해 부락을 떠나려는 회원은 원금과 이익금을 돌려준다.
  
  3. 구판장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을 다른 곳에서 구입할 때는 그 물건값의 열 배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4. 구판장 외상값은 당월 27일에는 꼭 지불해야 한다.
  
  5. 우리 회원은 서로 험담을 삼가고, 올바른 일을 지도하자.
  
  6. 장사는 회원 번호대로 한 달씩 맡아 한다.
  
  7. 한 마을에서 협동 단결하여 뭉쳐진 부녀회이므로 이익금 계산을 하지 말고 다른 곳에서 구입하지 않는 한 균등히 분배한다.
  
  8. 통장에 기재된 금액은 각자 소유이나 마을의 공익 사업에 공동 부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이렇게 여덟 가지 회칙을 만들어 세 번째 월례회 때 이러한 내 뜻을 발표했더니 이십여 명의 회원들이 각자 의견 충돌로 떠들썩했습니다. 밤이 깊어서야 겨우 합의를 보아 회원 전체의 찬성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즉석에서 다시는 불평 불만을 못하게 전체 회원에게 회칙준수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경 속에 세 번의 월례회의 결과 총 이익금 2만5천원이 확보되니 회원들의 기쁨은 날로 높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되었습니다. 서툰 솜씨의 윤번제 장사는 겨우 익힐 만하면 넘겨주어야 하니, 늘 내가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나 역시 서툴렀기에 착오 없는 장부 정리를 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로해진 나는 그동안 몇번을 몸져누웠습니다. 밤늦어 서성대는 주정꾼들을 보고 『알맞게 마시고 돌아가시라』면 『네가 술값 주느냐?』, 『너희 집이냐』, 『건방진 년』이라느니 평생 당해보지 못한 별별 수모를 겪으면서 울기도 수없이 울었습니다. 울다가도 「그 누구도 안된다던 일도 성공했는데 그까짓 수모쯤 웃어 넘기자」고 결심했습니다.
  
  차츰 세월이 흘러 남편들의 주량이 줄어드는 가정도 나오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가족계획을 계몽하다
  
  이렇게 차츰 무언가 조금씩 달라져 갈 때 또 이 부락에서 꼭 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가족계획」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 아이들은 보통 7∼8명이 되니 어찌 살기가 수월하겠습니까. 구판 사업은 갈등 속에서도 차근차근 진척되어 가니 다음은 「가족계획」으로 차례를 바꾸어 설득을 시도했습니다. 제 복 제가 타고 나니 생기는 대로 낳아야 하고 그래야 잘 사는 놈도 있고 못 사는 놈도 있으니 아들 다섯 딸 둘은 되어야 한다고 말들을 하니 기가 막혀 말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후 며칠을 두고 생각한 끝에 하루는 보건소를 찾아갔습니다. 우리 마을에 부녀회를 조직하여 구매점을 운영하는데 가족계획 계몽이 너무나 뒤떨어졌으니 계몽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건소에서는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부락에 우리가 계몽해 보았자 결과는 『소 귀에 경 읽기』라면서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린 덕택에 같이 힘껏 해보자는 응답과 함께, 보건소 직원들이 동네에 오는 것은 집이 비는 낮에는 곤란하니 밤에 와 주시도록 약속을 받고 돌아와서 집집을 다니며 회원들을 제법 많이 모았습니다.
  
  보건소 직원 세 분이 그날 밤 찾아와서 온갖 성의와 지혜로써 가족계획에 대한 계몽을 철저히 해주셨습니다. 그후에도 몇번 반복한 끝에 주민들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족계획의 장점을 납득한 부녀자들은 차츰 실천하게 되어 약도 먹고 루프도 사용, 나중에 가서는 그렇게 주정을 부리던 남자들로부터도 협조의 손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만 치면서 심심하면 화투를 일삼던 사람들이 어느 사이에 변하여 『애쓰는 여자들 보기가 부끄러워서도 이젠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등 나만 보면 미안해 했습니다. 술집에 앉았다가도 슬금슬금 피해 나가게 되더군요. 그러자 그동안 저를 그토록 꾸중하시던 어른들은 제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우리가 힘이 된다면 도와주겠다 하시니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날이 거듭할수록 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단결이 두터워져 가니 모략자의 극성은 날로 더해 결국 내 가정을 파괴 직전까지 몰아넣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엄청난 거짓말에 온 동민들이 나를 대신해서 분개해 일어났고 젊은 층에서는 참다 못해 구두 고발까지 하면서 도와주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참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던 분노를 조용히 가라앉혔습니다. 이 정도 역경을 견디지 못해 부녀회까지 파산한다면 이 부락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그 뒤에는 영원히 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았던 것입니다.
  
  그 누가 뭐라 해도 오직 조국만은 나를 믿으리라 생각하면서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드디어는 『저토록 분한 꼴을 보면서도 이 부락을 위해 참고 나가는데 우리가 방관만 하지 말고 그 보람을 안겨주어야 한다』 하고 온 동민은 부녀회에다 온갖 정성과 협조로 저를 분발시켜주는 바람에 더없이 든든하고 감격했습니다. 이렇게 눈물과 웃음의 뒤범벅 속에서 1969년도 저물고 대망의 1970년 밝은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아이들 놀이터 부지 공동매입
  
  이 마을은 아이들이 제대로 모여 놀 빈터조차 없었습니다. 군데군데 빈터가 있지만 모두 밭을 일궈 밭주인에게 애들이 야단을 맞아 이리저리 쫓기면서 몰려다니니 측은했습니다. 귀여운 자녀들이 힘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가 제일 필요하다, 이런 것을 장만해 주는 것이 어머니 된 도리라고 평소에 마음먹고 있던 의견을 월례회의에서 제의하여 밤이 깊도록 의논을 했습니다.
  
  놀이터도 절실하고 적당한 빈터도 있기는 하나, 그 땅을 사들일 돈의 마련이 문제였습니다.
  
  節米(절미) 운동의 의견이 나오니 분식으로 끼니를 잇는 집이 대다수라 난관에 봉착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가능의 관문을 뚫기 위하여 한 달에 회원당 1백원 상당의 밀가루 또는 쌀, 보리쌀 할 것 없이 節米하기로 결론을 얻고 빈터를 구입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방향에서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넓지는 않지만 놀이터로 가장 알맞은 그 빈터를 부녀회에서 구입한다는 말을 듣고 그 구매장 만들 때부터 말썽 부리던 집에서 하룻밤 사이에 시세보다 비싼 값으로 조르고 졸라서 地主(지주)로부터 매입해 버렸던 것입니다. 잘 설득시켜 다시 양도를 받아야 하겠는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도저히 가망이 없겠다고 판단하고 그날로 나는 뒤로 빠지고 그 땅을 산 집과 친한 친구를 앞세워서 매입하기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물론 당장 필요한 매입 대금은 군수님과 보건소장님을 졸라 조합융자 3만원을 1년 후에 갚기로 하고 미리 준비했습니다. 결국 그 집 남편을 설득시켜 자기의 매입금보다 3천원을 가산한 3만5천원에 양도받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드디어 1970년 4월20일 놀이터용 1백 평 땅이 우리 부녀회의 보물 1호로 등록되었습니다. 융자받은 돈이야 결의된 대로 32명의 회원이 11개월간 節米운동으로 거뜬히 갚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계약서가 내 수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그 전말을 알게 된 地主부인이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남편에게 돈 뭉치를 던지는 등 또 한번 동네를 시끄럽게 했고, 읍내에서 보건소 직원과 국민학교 선생님을 초청하여 수습하게 된, 길고 긴 얘기가 생겼지만 낱낱이 열거하지 못합니다.
  
  세월은 흘러 1971년 4월을 맞이하자 열한 달의 정성어린 절미운동의 결실로 놀이터 매입 융자금 3만원을 상환했고, 구판사업 이익금은 확실히 불어나 동네는 생기가 넘쳐 흘렀습니다. 그렇게 난관을 극복해 가면서 구판사업, 가족계획, 절미운동, 이 모두가 하루하루 진척되어 가는 데 때를 맞추어 우리 마을은 「1972년도 새마을」로 1971년 12월에 선정받았습니다.
  
  
  洞民 만류로 읍내 이사, 끝내 포기
  
  이때 남편이 이제 이만하면 이 부락도 눈을 떴고 일을 잘 하고 있으니 당신이 하는 일을 잘 가르쳐서 인계하고 읍내로 다시 이사하자고 말했습니다. 집도 논도 없는 우리가 아이들 학교 길도 출근 길도 불편하며 절약하겠다고 들어온 것이 도리어 우리 가정으로는 큰 손해였습니다. 동네일에 대한 미련이 더 남았지만 그동안 남의 집처럼 겉돌기만 했던 내 가정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도 안 가서 남녀 동민들이 『간다는 말 취소하라』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안된다』 『사람이 실없으면 못 쓴다』 『일을 하려면 끝까지 하고 아니면 아예 손을 대지 말았어야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이 부락에 아주 집을 짓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졸라댔습니다. 우리 회원들은 울상이 되어 『회장이 떠나려면 떠나기 전에 부녀회를 해산하고 가라』 『회장이 없으면 한 달도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 말 못할 수모와 갖은 역경 속에서 3년 만에 뜻이 모이고 평탄 대로에 선 오늘의 이 대견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떨어져선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한사코 붙드는 동민, 특히 노인네들의 만류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우리 부부는 며칠을 두고 생각하고 상의하여 좀 고되고 불편하더라도 이 부락과 함께 영원히 우리 운명을 맡기기로 결심을 하고, 다섯 식구가 아쉬운 대로 살 수 있는 조그마한 3칸집을 마련했습니다. 마음을 고정시키고, 그것도 나의 소망대로 되고 나니 남편에겐 미안했지만 기쁘기 한량 없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동민들은 기쁜 얼굴로 찾아와서 새마을 작업 시작 전에 어서 집을 짓자고 성화였습니다. 1972년 2월 음력 정월 초이렛날부터 온 동민이 자기 일처럼 총동원하여 20일도 안되어 우리 슬레이트집을 더 손질할 곳도 없게 지어 음력 2월12일 큰 잔치 속에 이사를 했습니다. 동민들은 밥솥같이 평생을 두고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서로 보고 살자는 뜻이라면서 자손 대대 물려줄 세 말들이 큰 솥을 기념품으로 걸어주었습니다. 나는 너무도 감격스러운 나머지 눈물도 못 감춘 채 약속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참아가면서 영원히 한 가족이 되어서 부락 발전의 혜택을 다함께 누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을회관 건립
  
  새마을은 날로 번창하고 그로 인해 각 기관에서 우리 마을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졌습니다. 또 우리 덕촌의 기사가 경남 매일신문(1972년 2월7일자)에 실려서 나는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얼마 후 또 민주공화보에서 조그마한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내 힘껏 조용히 봉사하려는 것이 너무 갑자기 과대평가를 받게 되어 몸둘 바를 몰랐으며, 길거리에 다니기조차 민망스러웠습니다.
  
  그후부터는 기관에 발걸음이 잦게 되었고, 새마을 부녀지도자와 산청군 부녀교실 지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구매점 이익금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마을 안 길도 거의 끝맺어 갈 때 이번 새마을 사업을 기해서 우리 부녀회 이익금으로 회관을 한 동 건립하자는 부녀회의 결정 사항을 지도자와 이장에게 전달했더니 모두 환영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마을회관 때문에 한번 의논을 하고 싶었지만, 남자들이 너무 무능했던 과거가 부끄러워 입을 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으로 洞會(동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이장, 지도자, 개발위원들의 합의된 사실이므로 큰 난관 없이 승인을 얻었습니다. 총 공사비는 우리 부녀회의 이익금으로, 노동은 부녀회에서 하되 남자가 해야 할 일은 도움을 받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1969년 8월27일부터 1972년 3월27일까지 티끌모아 태산이 된 구판사업 이익금 27만원이 마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최대의 공사에서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4월로 접어들면서 찻길조차 없이 매달린 산비탈 마을에 모래와 자갈을 운반하는 개미떼 행렬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회관 공사 부지에 인도로 오려면 5백m가 넘고, 논둑길을 타면 2백m였습니다. 시멘트 5백 포와 섞여서 소비될 모래 열세 차, 자갈 다섯 차는 동민의 지게나 큰함지박이나 주전자에 담겨서 논두렁을 타고 와야 했습니다. 이고 지고… 꼬마들은 주전자와 세숫대야로 나르고 동민이 총 동원되어 14일간에 걸쳐 첫 재료가 도착되었습니다.
  
  우리 부녀회원들은 달밤을 이용해 야간작업까지 하였으므로 발이 부어 슬리퍼를 신은 이가 많았습니다. 국도변에다 부어놓고 모래를 날랐기 때문에 행인들의 찬사와 격려가 대단했습니다.
  
  쉬지 않고 블록도 찍었습니다. 기초 공사를 착수할 무렵, 나에게 1주간의 교육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남자 지도자와 이장님께 모든 설계와 일을 맡기고 떠났습니다. 교육장을 들어서니 입구에 「이곳을 거쳐 가는 자여, 조국은 너를 믿는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부녀회를 조직하고 지금까지의 그 괴로웠던 사연들 때문에 내 가정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남편도, 그 누구도 내 심정을 몰라줬지만 조국만은 나를 믿어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육영수 여사를 만나다
  
  1주간의 교육은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 교육이며 아주 감명깊은 소중한 날들이었습니다. 이곳을 거쳐 가는 자는 진정 조국을 한시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교육중에도 마을회관 건립이 가장 큰 관심사였기에 교육 수료가 무섭게 그동안 우뚝 섰을 회관의 모습을 연상하며 달려왔더니 회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것으로 직감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해서도 안될 일이라 걸음을 재촉하여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일부 젊은이들은 내 의사대로 현대식으로 지으려 하고 노인네들은 크게 지어 쓸데없다고 논란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가정용이 된다면서 가정 집 모양으로 지으려 하여 밤새도록 洞會를 하다 싸움만 하고 말았다니 어찌 맥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그날밤, 당장 洞會를 하기로 하여 온 동민들 앞에 그간 제가 받은 교육의 내용을 보고하고 회관 건립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부터 다시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일을 하다가 잘 되지 않고 까다로운 일만 나오면 지도자와 이장은 모르겠다고 나앉아 버렸습니다. 이 회관을 건립할 때 이장 집으로 지도자 집으로 얼마나 울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몇번을 계속하니 남편이 단단히 화가 나 당장 그만두라고 야단이고, 중 3년짜리 아들은 집이고 뭐고 다 버리고 이사가자고 울고 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이렇게 악몽 같은 날이 계속될 무렵, 1972년 전국 새마을 여성촉진대회에 경남대표로 선정을 받아 7월5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을 받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님이 베풀어주신 청와대 오찬회에 전국 대표 27명의 하나로 참석하였습니다.
  
  육영수 여사님을 모시고 청와대 새마을 담당관님과 마주앉아 오찬을 같이하면서 그칠 줄 모르는 칭찬을 송구스럽도록 들으면서 여러 가지 애로점, 하고 싶은 일들을 의논하면서 너무나 감명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골도 심심산골 오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아녀자가 이 얼마나 영광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더없이 무겁고 무거운 짐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상품을 안고 돌아온 날 동네는 축제의 기분에 들떠 그날 밤 동민들이 모여 지금까지의 고생담을 나누고 있을 때 3년 동안을 하루같이 그렇게도 극성이던 그 모략자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적극 협조하겠다고 다짐하며 내 앞에 각서를 써서 놓았습니다.
  
  
  군수로부터 포상
  
  수많은 눈물의 범벅 속에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큰 건물이 들어섰고 부락 자금 6만원으로 아담한 목욕탕이 세워졌습니다. 보면 볼수록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운 건물들, 우리 부녀자들의 피땀으로 결실을 맺었으니 동민들의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각 기관장님들의 칭찬을 받으면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1972년 11월8일 허순도 군수께서 친히 나오셔서 『의식주 해결도 제대로 못하는 가난한 부락에서 특히나 부녀자들이 앞장서 산청군 전체가 본보기가 되었으니 감사한 마음에서 여러분들의 노고에 얼마 되지 않은 보답이지만 내 직접 여러분들께 전달한다』고 하시면서 밀가루 1백10포대를 주셨습니다.
  
  동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이 모두가 우리 회장님 덕택이라고 좋아했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때거리가 없을망정 이 밀가루를 뜻있게 쓰기 위하여 나는 못다한 마을 뒷길 2백m를 남자 하루 3분의 1포, 여자 하루 4분의 1포로 나누어 줄테니 정하고 일을 하자고 제의했더니 동민들은 찬성했습니다. 찬성하면서 『우리 회장 밉고도 예쁘다』는 말에 모두 한바탕 웃었답니다.
  
  이제 동민들은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1970년 들어서 지금까지의 하루하루 달라지는 우리 생활과 환경, 他부락의 탈바꿈에 충격을 받아 1971년에 뽕나무 신청도 제법 하여 땅이 없으니 논두둑 밭두둑에 메워 심었고 1973년도 누에를 쳐서 거의 3만~15만원의 수입까지 보았으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이익금이 아니겠습니까. 누에를 대규모로 치는 분들이 들으시면 웃으시겠지요.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겠습니까.
  
  회관을 건립하면서 우리 구매점을 홀 옆에 조그맣게 넣었더니 매달 돌아가는 번호제 장사라 일정한 곳에 가게를 두기가 곤란하여 구매점은 집집이 돌아가기로 했더니 빈 방이 하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그 방을 요긴하게 쓸 연구와 생각 끝에 하루는 보건소로 찾아가 우리 마을에 이용원을 하나 허가해 달라고 했더니 호수가 적다는 이유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못사는 마을에 동정 좀 해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되고 며칠을 생각하다가 하루는 군수님께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쾌히 승낙하시며 즉석에서 보건소에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된다던 허가증을 못얻고 몇 개월의 성화로 1973년 4월2일에야 허가증을 얻어 郡 부녀계장님의 금일봉 5천원과 우리 절미저축 2만5천원을 포함한 4만원으로 시설을 하여 시골 조그만 부락 이용원으로서는 아쉬운 대로 쓰게 만들었습니다.
  
  허가는 내 이름으로 내고 기술자 종업원을 한 사람 두어 대인 1백원, 소인 50원으로 요금을 정했습니다. 이발을 하려면 하루 일을 못하고 읍에 나가 돈 많이 주고 하던 번거로움을 면했으며 매월 2천원씩 이발소 월세를 받아 전기료를 내고 나머지 조금씩 남는 것을 저축하여 그 돈으로 어버이날에 연세가 많으신 어른들께 간소한 대접을 하고 어린이 날에 공책 연필을 상품으로 해서 착한 일 하는 아이, 저축 많이 하는 아이들을 뽑아 시상과 간단한 다과회를 마련하기로 의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녀회에 세 번째 재산이 불어났습니다.
  
  차츰 마을이 탈바꿈해 가니 他官에 나돌던 공무원들이 고향을 찾아들어 우리 마을에 공무원이 6∼7명이 되니 이것도 하나의 자랑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변전소를 지척에 두고 호롱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에는 부락 앞을 지나는 이웃마을 전선이 있어 호당 3천원이면 불을 켤 수 있었는데 그 돈을 마련치 못해 그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이것만으로도 이 부락 가난을 알고도 남을 것입니다.
  
  1972년도 우리 부녀회 기금으로 회관을 건립하고부터 나는 이 부락에 대대로 소원이라는 이 전기를 끌어들이는 사업을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시켜 볼 목적으로 『우리 이제 밝은 눈을 살 기금을 모으자』고 회원들과 합의를 하여 회원가입이 안된 아랫마을에 가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설득하고,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노인들은 기관의 협조를 받으며 半(반) 억압적으로 회원 가입을 시켰습니다. 이때 나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새 회원을 가입시킨 지 채 20일도 못되었을 때 전국 새마을 여성 촉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27명 대표들은 서로 애로점과 하고 싶은 일들을 상의했습니다. 시간관계로 육영수 여사님께서 『돌아가 서신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보내고 열심히 기금을 모으라』 하시니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습니다. 돌아오기가 바쁘게 청와대 새마을 담당관님께 구구한 사연을 서신으로 보냈더니 즉시 회답이 왔습니다. 열심히 기금만 모으면 금년 가을이나 내년까지는 꼭 불을 켤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기금 모으기에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1973년을 맞으면서 나는 또 청와대로, 도지사님께로, 서신을 띄우고 군청에 날마다 쫓아다니며 극성을 부렸습니다. 그랬더니 『금년 가을에는 꼭 된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절미, 저축, 보리베기, 모심기, 구판사업 등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1993년 11월4일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내선 가설비가 호당 5천원이고, 외선은 대통령 특별하사금 보조라 하셨습니다.
  
  
  드디어 전기가 들어오다
  
  온 동민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고 노인네들은 오래 사니 우리도 전깃불 구경하겠다고 둥실둥실 춤을 추셨습니다. 공사비 25만원을 우리 기금으로 거뜬히 지불했고 그 공사 때 온 동민은 물론 우리 부녀들까지 개미처럼 매달려 그 무거운 電株(전주)를 산 위에까지 옮겼으니 그때 전공들의 칭찬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자기들이 여태껏 공사를 그렇게 해도 부인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곳은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맨처음 2천4백원의 구판사업 밑천이 모이고 모여 기금도 늘고 이익금도 늘어나 4년 동안에 우리 부락은 조상들이 상상도 못한 탈바꿈을 한 셈입니다.
  
  이제 나는 또 수도 사업을 목표로 『쉬지 말고 달리자』고 회원들 가슴에 불을 붙였습니다. 남자들은 완전히 우리 회원들(부녀)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주정꾼들도 볼 수가 없었으며 그렇게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던 ○○은 자기 스스로 사표를 내고 한 동민으로서 얼마나 조리있게 일을 잘 보살펴 주는지 모릅니다.
  
  새마을사업에 열중하여 이제 너무 지치고 넉넉지 못한 환경에 쫓기는 동민들을 무언가 일을 바꾸어 돈벌이를 시켜보려고 묘안을 짜 보았습니다. 마을 옆에 약 10m의 낭떠러지가 있는데 7∼8년 전만 해도 그 위에 밭을 일구었다는데 지금은 가옥 옆에까지 무너져 위험한 상태가 되어 있어 여기에 석축을 쌓아 제방을 하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군수님, 내무과장님, 복지계장님, 부녀계장님을 약 한달을 다니면서 졸라 내무과장님과 부녀계장님을 끌다시피 모시고와 현지답사를 시켜드리고 부녀계장님의 많은 뒷받침으로 얼마 후 공사비 41만8천원을 받아 11월1일부터 공사를 하게 되니 동민들은 깜짝 놀라며 좋아했습니다.
  
  22일간에 걸쳐 높이 4m, 길이 60m의 석축공사를 완공하니 돈벌이하고 마을 튼튼하고 얼마나 좋으냐고 기뻐들 하시니 이렇게 한 가지 한 가지 완공될 때 지치고 시달려 견딜 수 없는 피로도 말끔히 가셔지고 흐뭇한 그 기쁨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1975년도는 마을 내부환경 조성 완성의 해로 정하고 면사무소를 쉴새없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신규사업으로 창고 1동(20평), 暗渠(암거·속 도랑) 7개소를 책정받아 양회 6백 포, 철근 1t의 자재 지원도 약속을 받고 全 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1974년 11월5일 기공식을 하면서 『1975년에는 우리 마을 내부 일을 끝내자』고 결의하고 재료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2월15일에는 양회 2백 포가 도착하고 철근도 연이어 도착하더군요. 이번에는 리어카와 경운기로 운반하였으나, 경운기는 운반비가 들어야 했고 길이 너무 경사가 져서 이고 지는 만큼의 힘은 들었으나 한꺼번에 많이 할 수 있는 덕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리어카는 아주 큰 것으로 1974년도 새마을 경진대회 때 우리 덕촌 부녀교실 시상품으로 경남도지사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금년 새마을 사업에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재료가 도착하기가 바쁘게 블록을 찍었습니다. 음력설을 지내고 解凍(해동) 후에 찍으면 블록 질은 좋지만 일철이 곧 다가오기 때문에 일이 늦어지므로 조금씩 회관 안에서 찍기로 하여 한달 반 동안에 2천3백 장을 찍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모래자갈을 마을 앞에서 큰길까지 5백m나 운반하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어서 부녀자들의 개미행렬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길은 양 옆의 논들이 모두 이웃마을 토지요, 이 마을 토지는 하나도 없으니 한 두 평도 아닌 그 많은 토지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 부락에 오기 전에 논둑을 바로 쌓음으로써 겨우 1.5m의 길을 만들었는데 그때만 해도 地主들로부터 괭이와 몽둥이 세례를 받아 죽을 뻔했습니다. 이 길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때 노임소득 3호사업으로 농로 5백m분 50만원을 받았으나 地主들의 완강한 반대로 큰길까지 잇는 길은 손도 대지 못하고 산쪽에 잇는 농로를 닦기로 하였습니다.
  
  여기는 산을 뚫고 나가기 때문에 별다른 애로는 없지만 일거리가 말할 수 없이 많아 일부 주민들은 짜증을 냈지만 이것은 돈벌이사업이기 때문에 돈벌어 쓰고 새마을사업도 할 수 있어 마음이 조금 가벼웠습니다. 1975년 1월24일부터 27일까지 폭 0.5m의 산길이 5m의 탄탄대로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나자 창고와 수도암거공사에 전력을 다 해야 했습니다. 겨울에 찍은 블록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것도 어려움이었지요.
  
  이즈음, 먼젓번 새마을사업 책정을 받을 때 농로 1km만 달라고 郡새마을과에 졸랐더니 산청군에서 본보기 지도자이니 농로 사업이 확정되면 그것만은 소원을 풀어주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죄송스러워 그 다음에 물어 보지도 못하고 또 너무 바쁜 일에 쫓겨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하루는 군청에 들렀더니 새마을과에서 『이제 농로 사업비는 필요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번 3호 사업으로 농로를 했고 마을 앞길은 토지 해결을 못할 것이고 할 수 없이 딴마을로 돌려야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딴 곳으로 빼앗기기 싫어 지주들과 어떻게 싸워서라도 꼭 길을 뚫고야 말겠다고 사업을 책정받아 그 길로 돌아와 동민들께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너무 일거리가 무더기로 닥치니 어안이 벙벙해 말을 못하는 지경이었습니다.
  
  이장과 지도자는 저 논들을 한두 집도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 노인들측에서 먼저 『불과 3, 4년 동안에 우리 부락이 이렇게 달라졌으니 남은 새마을 자재도 있고 하니 같은 값이면차도 오면 오죽이나 편하겠냐』면서 또 부딪쳐서 싸워보자는 것입니다.
  
  
  옛날 모습 자취 감춰
  
  아마 이 길을 닦자면 지도층의 한 사람이 맞아 죽는 소동이 일어나야지 보통 역경으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찌나 고마운지 나는 『우리는 地主들께 어떤 수모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고 무조건 굴복하여 길만 뚫고 보자』고 했더니 모두들 『그렇게 해서라도 되기만 하면…』이라며 말끝이 흐려졌지만 당장 이튿날부터 부딪쳐 보기로 했습니다.
  
  한쪽편에는 새마을 사업에 여념이 없고 또 우리 지도자와 몇분 권위 있는 노인들을 모시고 地主를 찾아 이 부락 저 마을로 돌아다녔습니다. 결과는 뻔하지요. 괭이로 당장 쫓을 듯 설치는 사람, 『우리 논살 때 돈 보태주었느냐』는 식의 별별 욕을 마구 하는 사람, 그중에 그래도 승낙을 얻어 중간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한 치 한 치 진척되어 갈 때의 그 곡절을 어찌 다 담아 말씀 드리겠습니까. 하다 못해 동네 노인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연고자들에게 읊조린 정성, 거기에 감화를 받고 양보해 주시는 지주에게 더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동민들의 모습이 자립 협동하는 정신으로 충만된 새마을 정신의 표현이라면 이런 고통쯤이야 백번이라도 딛고 일어설 자신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사연 속에 농로와 창고가 거의 같이 완성되어 이제 거대한 트럭이 멋대로 들어서니 이 통쾌한 기분이야 이루말할 수 없답니다. 너무나 벅찬 일들로 수도 사업이 중도에서 일철을 만났습니다. 당분간 제자리 걸음이 되더라도 곧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4년 전에 비하면 모두 부자가 됐습니다. 물론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지만 지난 날처럼 밀가루를 물에다 풀어먹고 이웃 동네로 구걸하러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뼈저린 가난은 면한 셈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거지마을」이란 낙인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덕촌이 부촌이 되었단다』하는 말을 듣고 말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우리 대한민국 부녀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한 줌의 쌀을 헛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節米 저축을 해보세요. 보잘 것 없고 하찮은 것 같아도 그것이 모여서 한 공동체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나아가서는 우리의 살림에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부락에는 먼저는 그 한 줌 한 줌의 정성이 우리 어린이들의 놀이터를 장만했고, 또 이발소를 차리고, 1974년 1월부터는 12만원의 적금을 부어 가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회원들께 이제 이 돈은 절대로 쓰지 말고 10년 계획으로 또다른 꿈을 그리며 모아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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