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周永의 육성 회고록(2) 고향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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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KBS에서 한 강연 중 제2장을 소개한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오기로 결심한 것이 그의 성공을 예약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그래서 그 다음으로 농촌에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우리 동네가 한 50호 있는데, 구장네 집에서 신문을 봤습니다. 동아일보를 봤습니다. 그 신문을 보기 시작해서부터는 농촌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여러 가지 그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얘기가 쓰여져 있고 도시의 생활, 모든 여러 가지 정치, 사회면…
  
  그때는 우리가 경제면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신문이 오면 사회면 또는 재밌는 소설 이런 것을 제일 많이 봤습니다. 그 당시 아침 조간은 방인근 씨가 쓰는, 우리가 열여섯 살쯤에 그걸 봤는데, 그 ‘마도의 향불(魔道の香)'이라는 소설을 썼고, 석간에는 이광수 씨가 쓴 ‘흙’이라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감명도 받고 도시를 동경하게 되고, 또 도시에 나가서 농촌에서 사는 걸 떠나 도시 생활을 하고 싶은 열렬한 동경심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가서 어떤 생활을 해보겠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못하고 어쨌든 그 농촌을 떠나기 위해서 맨 처음은 그 당시 청진, 성진, 그쪽에 일본제철이 조그마한 용광로 제철소를 만든다고 해서 그런 공장에라도 가서, 일을 해볼까 하고 거기를 갈 생각을 했습니다.
  
  여비가 없으니까 첫 계획은 동네에 나보다 두어 살 더 먹은 지주원이란 사람하고, 우리 둘의 계획이, 가면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가거나 또는 어디서 일을 하면서 갈 생각으로 처음 떠났습니다. 떠나서 처음에, 그 사람은 나보다 두세 살 더 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부끄러우니까, 새벽에 떠나 한 50리쯤 가서 어느 농촌에서 법을 얻어오라고 나에게 시켰습니다. 여러 집을 기웃기웃하는데 한 집이 아침 조반을 먹어서 그걸 들여다보면서 “길가는 사람이 노비가 떨어졌으니 밥을 좀 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주인이 조반을 먹다가 쳐다보면서 “노비가 떨어지지 않게 붙들어 매야지 꼭 잡아매지 않아서 떨궜느냐”고. 그 말에 그냥 부끄러워서…사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을 건네는 사람은 밥을 줄 사람인데, 그땐 부끄러워서 거기서 밥 먹는 걸 포기하고 도망갔습니다.
  
  그 다음 원산을 지나서 고원이라고 갔는데, 그때 고원에서 태안까지 철도를 닦았습니다. 평원선이라고. 철도를 닦았는데, 그때 열여섯 살인데 공사판에 가서 그 흙을 담는 밀구루마를 밀면서 일을 하는데, 장마가 졌습니다. 45전을 주는데 밥값은 32전이었기 때문에 비오는 날이 많으면 외려 밥값은 더 부족해지고 옷은 점점 해지고 신발은 떨어지고…그래서 외려 빚을 져가지고 떠날 수도 갈 수도 없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있다는 소문이 들렸는지, 아버지께서 찾아와 고향에 다시 붙들려갔고 또 농사를 짓고 또 한 해를 지내고. 그리고 그 다음해 아버지께서 소를 팔아 집에다 궤짝 속 밑에다 감춰둔 것을 훔쳐서 서울에 왔습니다.
  
  서울 와서, 그때는 그래도 그 돈을 조금 가지고 있으니까 ‘부기(簿記) 학교’라고, 이를테면 경리 장부 정리하는 학원에 등록하고 며칠 다녔는데, 어떻게 또 집에서 서울에 부기학원에 있다는 것을 편지로 받아 그것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께서 또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찾아와서 아버지는 이제 내려가자 그러고, 전 안 내려가겠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통사정을 해서 할 수 없이 고향에 내려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왕 서울 왔으니 아버지께서 동물원 구경을 시켜주겠다 그래서 동물원에 갔습니다. 창경원. 아버지께선 동물원을 거저 구경시켜 주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가니까 바깥에 대인, 어른은 10전이고 소인은 5전이라고 입장료가 쓰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아주 구두쇠로는 일등이니까, 자기는 ‘시골에서 호랑이들 다 봤으니 난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가 들어가서 호랑이 보고 나오라’고. 그래서 뭐 ‘나도 호랑이 안 봐도 좋다고’, ‘나도 그림에서 다 봤으니 안 봐도 좋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그러면 이왕 왔으니까 동물원 들어가서 호랑이나 보자’고 해서 아버지가 10전 내고 내가 5전 내고 들어가서 보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 도저히 평생을 농사일을 하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흉년이 들면 굶고 그렇게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시골에 있을 생각을 안 하고, 그 다음 해 봄, 그때는 아버지가 철통같이 돈을 잘 감추고 하니까 어디서 훔칠 수도 없고 꿀 수도 없어서 내 친구 한 사람하고 서울을 걸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서울로 떨어지고 나는 인천에 갔습니다. 인천 가서 그냥 세 끼 밥을 먹기 위해서 모든 닥치는 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물론 부두에서 짐을 내리고 나르는 일부터 모든 일을 다 하고, 또 거기서 얼마 지내다가 서울에 올라와서는 또 채석장에서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동은 다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힘든 일을 했기 때문에 저는 오늘날 그냥 그늘 밑에 서서 시원한 바람만 쐬어도 나처럼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드물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태양 밑에서 모든 힘든 노동을 했기 때문에.
  
  
  <쌀장사로 자리를 잡다>
  
  그렇게 모든 일을 해 나가고 그러면서도 아주 근검절약해서, 좀 있다 안정된 직장을 처음 얻었습니다.
  
  정미소에 들어가서 쌀을 배달하는 일을 맡으면서, 한 달에 12원씩 받았습니다. 그때 쌀값이 15원 했으니까 쌀 한 가마값 조금 안되게 받고, 그리고 세 끼는 그 집에서 먹고. 이렇게 안정된 직장을 잡아가지고 그 다음에는 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정미소에서 한 3년 있으면서 쌀장사 하는 것을 배워가지고 쌀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내가 장사를 시작한 맨 처음입니다. 쌀장사를 하기 때문에 모든 배달을 직접 하는데, 가게에서 정미소 값하고 똑같이 팔고, 배달을 해주기 때문에 배달료를 좀 벌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당시에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지금 무악재 고개 넘어 그 당시 서울여자상업학교, 그때는 경성여자상업학교, 그 기숙사에 쌀을 대고, 또 배화여학교 기숙사에도 쌀을 대고, 그래서 쌀장사가 곧 잘됐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그 당시에는 일본 사람들이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는 2차 대전이 일어나서 쌀이 통제가 되면서 개인은 쌀장사를 못하게 됐습니다. 쌀은 정부가 관리하고 배급제도가 시작돼 또 그만뒀습니다.
  
  거기서 조금 얻은 돈을 가지고선 가장 적은 돈을 가지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게 뭐냐 생각해서 여러 군데를 쫓아다녔는데 그때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 경성서비스를 다녔는데 그 사람 얘기를 들으니까,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 참 돈이 잘 벌릴 것 같아서, 그 사람을 데리고 일을 하는데…얼마 안 되는 돈으로는 도저히 안되어서, 그 전에 쌀을 외상으로 얻어다 팔고 외상을 갚고 하던 삼청정미소의 오윤근씨라고 하는 그 영감님을 찾아가 고리대금을 얻었습니다.
  
  그분은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그 전에 내가 쌀장사를 할 때 쌀을 외상으로 얻어서 쌀값을 잘 갚았기 때문에 아주 날 신용했습니다. 거기서 2천 원을 얻어가지고 아현동 고개 넘어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수리공장을 샀는데, 그것을 산다고 해봤자 공장 권리금만 샀지 그 땅은 딴 사람 것이고, 함석집에 자동차 4대 들여놓고 수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 2023-01-29, 21: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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