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세계가 일체가 되면 모호성의 바다에 익사한다-2
FREEEDOM 교양영어 (180): Moby Dick (Excer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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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strongly and metaphysically did I conceive of my situation then, that while earnestly watching his motions, I seemed distinctly to perceive that my own individuality was now merged in a joint stock company of two: that my free will had received a mortal wound; and that another’s mistake or misfortune might plunge innocent me into unmerited disaster and death. Therefore, I saw that here was a sort of interregnum in Providence; for its even-handed equity never could have sanctioned so gross an injustice. And yet still pondering―while I jerked him now and then from between the whale and the ship, which would threaten to jam him―still pondering I saw that this situation of mine was the precise situation of every mortal that breathes; only, in most cases, he, one way or other, has this Siamese connexion with a plurality of other mortals. If your banker breaks, you snap; if your apothecary by mistake send you poison in your pills, you die. True, you may say that, by exceeding caution, you may possibly escape these and the multitudinous other evil chances of life. But handle Queequeg’s monkey rope heedfully as I would, sometimes he jerked it so, that I came very near sliding overboard. Nor could I possibly forget that, do what I would, I only had the management of one end of it.


I have hinted that I would often jerk poor Queequeg from between the whale and the ship―where he would occasionally fall, from the incessant rolling and swaying of both. But this was not the only jamming jeopardy he was exposed to. Unappalled by the massacre made upon them during the night, the sharks now freshly and more keenly allured by the before pent blood which began to flow from the carcase―the rabid creatures swarmed round it like bees in beehive.


And right in among the those sharks was Queegueg; who often pushed them aside with his floundering feet. A thing altogether incredible were it not that attracted by such prey as a dead whale, the otherwise miscellaneously carnivorous shark will seldom touch a man.


그때 나는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너무나 강력하게 그리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Queequeg) 동작을 진지하게 지켜볼 동안에, 내 자신의 개성은 2명으로 구성된 단체 속에 지금 융합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자유의지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고, 상대방의 실수나 불운은 죄 없는 나를 부당한 재앙과 죽음 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뚜렷이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서 神(Providence)의 통치중단을 보았다(만물을 관할하는 神의 섭리가 중단된다) : 왜냐하면 神(섭리)의 공명정대한 법(equity)이 그렇게 조악한 불의를 용인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더 깊이 생각하면서 그를― 고래와 배 사이에 있는 그를, 그래서 사이에 끼여서 짓눌릴 위험이 있는 그를―가끔 홱 잡아당길 동안에, 더욱 더 깊이 생각하면서, 나의 이런 상황은 정확히 숨을 쉬는 모든 사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모든 인간은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런 샴쌍둥이 같은 연결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거래하는 은행이 파산하면 당신도 망하게 된다. 약사가 실수로 당신의 약 속에 독약을 넣어서 보낸다면, 당신은 죽는다. 진실로, 당신은 극히 조심함에 의해서 이런 일들과 다수의 다른 삶이 가져오는 사악한 운명(chances)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Queequeg의 멍키로프를 내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더라도 가끔 그가 멍키로프를 홱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가 배 밖으로 거의 미끄러져 떨어질 번 하였다. 또한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나는 밧줄의 한 쪽 끝만 조종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끔씩 고래와 배 사이에 있는―Queequeg와 배 둘 다가 상하좌우로 끝없이 요동하기 때문에 종종 그는 그 사이에 떨어지곤 하였다―불쌍한 Queequeg를 가끔 홱 잡아당기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당하게 되는 유일한 짓눌림의 위험은 아니었다. 밤 동안에 그들에게 가해진 학살을 아랑곳 하지 않고, 사체(고래)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전에 고여 있던 피에 의해서 생생하게 그리고 더 예민하게 매혹된 상어들이, 미쳐 날뛰는 상어들(creatures)이, 벌집의 벌 떼처럼 사체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상어들 가운데에 Queequeg가 있었다; 그는 상어들을 종종 물에 잠긴 두 발로 밀어내었다. 죽은 고래와 같은 먹이에 매혹되어서, 다른 때 같으면 잡다하게 육식을 하는 상어가 사람을 거의 건드리지 않는 일이 없다면, 이런 일은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설:

이성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세계는 정의를 불가능하게 하며 접근을 불허한다. 이러한 세계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바라보는 몽상가를 세계는 삼켜버린다. Ishmael은 “바다를 응시하는 것”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다. 바다의 모호성과 무형 속으로 사라지는 Pequod호는 Ishmael의 우려를 입증하고 있다. 자멸에 의해서만 Pequod호는 백색을 뚫고 들어간다. Ishmael은 모호성과 무한성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는 항해를 수용하면서도 항해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바다의 모호성 속으로 몰입하지 않고 항해를 정지함으로써 자멸을 면하게 된다. 그는 허무의 백색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허무의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고 구조되는 것이다.


Ahab의 비극적인 운명은 정지 상태에서 머물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이다. Ahab의 동기는 자연에 복수하고 神에게 반항하는 악마적 자존심(satanic pride)보다 더 깊은 곳에 놓여 있다. 그는 금전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교환의 매개물인 돈은 그에게는 가치를 추구하는 상징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고래의 금전적 가치를 부정한다. 이것은 이성적인 사고의 거부이다.


그는 가시적인 사물과 유동적인 세계를 구분한다. 그에게는 ‘인간과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달아난다.’ 가시적인 사물은 단지 ‘종이가면’에 불과하다. 가면의 벽을 허물고 “존재의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Ahab의 죽음은 이러한 논리의 결과이다. 그에게는 흰 고래 Moby Dick이 벽이다. 그는 작살을 던지며 벽을 뚫고 들어간다. 그리고 “비록 고래에 몸이 묶여 있지만… 여전히 추격하면서…”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사물은 관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가정은 오류이기 때문에 Ahab은 죽는다. 최후의 흰 고래 추격이 있기 오래 전에 Ahab이 말하듯이 ‘그 죽은 그리고 눈먼 벽은 모든 캐묻기 좋아하는 머리들을 그 벽에 충돌시킨다.’ Ahab은 실재(reality)에 도달하기 위해 항해를 극단까지 감행함으로써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과 그 지성이 탐구하는 세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不可解(불가해)한 세계와 직면해 있다. 그는 의미가 대단히 매혹적이지만 파괴적인 假面(가면)과 직면해 있다. 그는 인간적인 의미가 없는 벽과 마주 서 있다. Ahab은 “저 불가해한 것을 증오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의미의 모호성과 탐구하는 정신에 저항하는 사물을 증오한다. 그래서 그의 ‘삶의 행동’은 반항의 행동으로 변한다. 


‘Moby Dick’에 나타나는 최대의 역설은 항해의 필요성과 실패의 필요성이다. 인간으로서 지식의 탐구는 필수적이다. 궁극적인 것, 神적인 것, 불가해한 것에로의 항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삶의 행동이며 인간 영혼의 속성이다. 그러나 Ahab의 파괴적인 지식추구는 허무로 용해되어 버린다. Ahab은 극단에까지 상징적 항해를 추구하다가 그 항해의 무익함을 깨달으면서 파멸당하는 허무주의자이다.

 

[ 2022-10-28, 10: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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