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세계가 일체가 되면 모호성의 바다에 익사한다-1
FREEDOM 교양영어 (179): Moby Dick (Excerpt: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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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mentioned that upon first breaking ground in the whale’s back, the blubber-hook was inserted into the original hole there cut by the spades of the mates. But how did so clumsy and weighty a mass as that same hook get fixed in that hole? It was inserted there by my particular friend Queequeg, whose duty it was, as harpooner, to descend upon the monster’s back for the special purpose referred to. But in very many cases, circumstances require that the harpooner shall remain on the whale till the whole flensing or stripping operation is concluded. The whale, be it observed, lies almost entirely submerged, excepting the immediate parts operated upon. So down there, some ten feet below the level of the deck, the poor harpooner flounders about, half on the whale and half in the water, as the vast mass revolves like a tread-mill beneath him.* 


Being the savage’s bowsman, that is, the person who puloled the bow-oar in his boat (the second one from forward), it was my cheerful duty to attend upon him while taking that hard-scrabble scramble upon the dead whale’s back. You have seen Italian organ-boys holding a dancing-ape by a long cord. Just so, from the ship’s steep side, did I hold Queequeg down there in the sea, by what is technically called in the fishery a monkey-rope, attached to a strong strip of canvas belted round his waist.


It was a humorously perilous business for both of us. For before we proceed further, it must be said that the monkey-rope was fast at both ends; fast to Queequeg’s broad canvas belt, and fast to my narrow leather one. So that for better or for worse, we two, for the time, were wedded; and should poor Queequeg sink to rise no more, then both usage and honor demanded, that instead of cutting the cord, it should drag me down in his wake. So, then, an elongated Siamese ligate united us. Queequeg was my own inseparable twin brother; nor could I any way get rid of the dangerous liabilities which the hempen bond entailed. (to be continued)


고래의 등에서 첫 작업준비를 끝냈을 때 blubber-hook( 고래의 지방층을 도려내는 갈고리)가 조수들이 삽으로 파 놓은 원래의 구멍 속으로 찔러 넣어진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저 갈고리처럼 저렇게 다루기 힘들고 무거운 덩어리가 저런 구멍 속에 어떻게 고정될 수 있었을까? 그 갈고리는 나의 특별한 친구 Queequeg에 의해서 그 곳에 박혔다. 작살수로서의 그의 의무는 지금 언급한 그런 특수 목적을 위해서 고래의 등위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작살수는 지방층을 잘라내는 전체 작업이 완료될 때 까지 고래의 등 위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을 상황이 요구한다. 고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바로 그 부분을 제외하고 거의 전적으로 물에 잠겨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라. 그래서 아래쪽 그곳에서, 갑판 수평면에서 10피트 아래인 그곳에서, 가련한 작살수는, 그 거대한 덩어리(고래)가 바로 자기 아래에서 밟아 돌리는 바퀴처럼 회전할 때에, 몸의 반은 고래위에서 그리고 반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나는 그 야만인(Queequeg)의 노잡이, 즉, 그의 보트에서 앞노(앞에서 두 번째)를 젖는 노잡이기 때문에 죽은 고래 위에서 힘든 작업(지방층을 긁어내는)을 하고 있는 그를 도와주는 것은 나의 즐거운 의무였다. 여러분은 이탈리아의 노래꾼들(organ-boys)이 긴 줄로 춤추는 원숭이를 잡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똑 같이, 배의 가파른 측면에서 고기잡이 업계에서 기술적인 용어로 monkey-rope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 나는 저 아래 바다 속에 있는 Queequeg를 붙잡고 있었다. 멍키 로프는 그의 허리둘레에 메어져 있는 강력한 帆布(범포) 줄에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 둘에게는 우습도록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멍키로프는 Queequeg의 넓은 범포 벨트와 나의 좁다란 범포 벨트 양쪽에 단단히 메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든 나쁘든 우리 둘은 당분간은 결혼한 상태였고 그래서 만약에 Queequeg가 물에 가라앉아서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때는 관례와 명예심이 요구하는 대로 내가 줄을 끊어버리는 것 대신에 줄이 나를 그의 뒤를 따라 바다 아래로 끌고 가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 때 기다란 샴 쌍둥이같은 연결이 우리를 결합시켰다. Queequeg는 나 자신과는 떨어질 수 없는 쌍둥이 형제였고 그리고 나는 결코 밧줄의 동맹(bond)이 含意(함의)하고 있는 그 위험한 책임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계속)



*해설:

‘Moby Dick’은 상징적 항해 이야기다. Ishmael은 항해를 비전과 동일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전의 場(장)은 바다이다. 모든 街路(가로)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섬의 도시 또는 그 도시 바닷가의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들”처럼 인간 각각의 감수성은 대양을 향해 열려 있다. 바다의 환상에 몰두해 있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은 바다에 대한 조용한 명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마음이 바다에 끌리는 것은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왜 고대의 페르시아 사람들은 바다를 성스럽게 생각했을까? 왜 그리스인들은 바다에게 神性(신성)을 부여하고 바다의 神을 主神 제우스의 친형제라고 생각했을까? 이 모든 것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다.’


다음 章에서 그 의미는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돛대 꼭대기 망루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는 파수꾼(watergazer)은 파도의 물결처럼 요동치는 상념으로 환희에 빠져 있다.


‘마침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발 아래에 있는 신비한 대양을 인간과 자연에 미만해 있는 저 깊고 푸른 바닥 모를 영혼의 可視的(가시적) 이미지로 착각하게 된다. 그를 피해 달아나는 모든 이상하고 보일 듯 말 듯하며 유동적이고 아름다운 것들, 바다 위로 솟아오르고 있는 모든 희미하고 형체를 분별하기 힘든 형태의 물고기 지느러미들이 그에게는 사람의 영혼 속을 휙휙 날아 지나가는 저 포착하기 힘든 생각의 화신처럼 보인다.’


항해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은 파도처럼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세계와 융합하게 된다. 자아의 정체성은 범신론적인 바다 속으로 침잠해 버린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러한 ‘나는 투명한 眼球(안구)가 된다. 나는 無이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라는 비전은 갑자기 위험하게 된다. 자신과 외부의 구별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면 투명한 안구가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하고 모든 것이 보이기도 하는 환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이 돛대에서 미끄러지며 몸이 바다로 떨어지는 순간 자아와 세계는 분리되며 외부의 사물은 자아와 다른 존재가 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무한대의 공간이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사물과 일체가 되었던 자아는 공포 속에 되돌아온다. 자아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이지 하나가 아니다. 바다 속에 잠기는 것은 익사하는 것이다. Ahab은 몰입으로 인해 익사하게 되는 것이다. Ishmael은 이러한 몰입에 회의를 느낀다. 바다를 응시하는 것(water-gazing)은 하나의 역설적인 행위이다. 절대에 대한 탐색과 절대에 대한 지식이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arcissus 이야기의 깊은 의미이다.…Narcissus는 샘물에 비치는 자신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미치도록 괴로운 나머지 샘물 속에 뛰어들어 익사한다. 나르시스가 본 것과 같은 이미지를 우리는 바다와 강에서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幻影(환영, phantom)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 자신의 반영일 뿐 아니라 생각의 화신이다. 그 이미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바다의 환영과 같다. 그 환영은 우리가 해안에 서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으며 그 환영을 좇아 우리가 바다 안으로 뛰어 들면 바다는 파멸적이 된다. 백경은 무한히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형상들의 총합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며 “공중에 솟아 있는 雪山(설산) 같은 하나의 거대한 환영”이다. 모비 딕의 “끊임없는 航行(항행)”은 백색의 모호성의 반복이고 백색은 유동적인 실재에 대한 동의어이다.


백색의 다양한 의미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유동적인 바다는 비이성적이며 모호하고 무형이다. 백색이 주는 궁극적인 공포는 백색은 定議(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백색은 무색이다. 무색은 구별이 없으며 개별성을 부정한다. 고로 백색은 유동적이어서 定形(정형)이 없는 바다와 같다. (계속)

 

 

[ 2022-10-25, 10:0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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