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깨씩만 더 살그래이’
1982년 4월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10)

吳効鎭(월간조선)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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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피었을 땐 정말 좋았었지


평촌이발소 주인 곽기달 씨 일가에게 총탄세례를 퍼부어 33명째를 살해한 우범곤은 유유자적 평촌리로 걸어간다. 거기서부터 평촌리까지 가자면 1.5km는 자갈길을 걸어야 한다. 군데군데 비가 괸 웅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하면서 우범곤은 한발 한발 사건의 대미를 장식할 곳으로 다가간다.

 

곽기달 씨 집에서 2~3분 걸어서 산모랭이를 돌아가면 왼쪽으로 깎아지른듯한 기암괴석이 시커멓게 나타난다. 신라 때 태종 무열왕의 세 왕자가 난을 피해 이곳에 와 놀았다 해서 이름이 봉황대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고 까마득한 석문(石門)을 지나면 붕황대가 나서고 그 위에 날아갈 듯 봉황부가 앉아있다. 

 

우범곤은 지난 4월초 식목일 연휴 때를 생각한다. 그때 그는 우체국 교환실에서 죽은 전은숙, 박경숙 양 등과 함께 이 봉황대에 올라가 학처럼 노닐었다.

<벚꽃이 만발했었지. 미칠 지경이었어.>

그는 그때를 생각하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옛날 얘기야, 다 옛날 얘기야. 나도 이제 곧 옛날 사람이 되겠지.>

 

식목일 연휴의 그날, 그 자리에 함게 있었던 서철서(20, 벽계리 3) 군은 우 순경과 아가씨들이 술과 콜라를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날 우범곤은 봉황루 앞 바위 위에 올라가서 저 앞 평촌을 내려다보았었다. 사람들은 그 바위가 콧대를 거꾸로 엎어 놓은 것 같대서 ‘콧댓더미’라고 부른다. 그렇다, 그때 기산 밑에 펼쳐진 평촌이 아득하게 보였었지. 신라 왕자들의 궁이 그 근처에 있었다고 그것을 궁시(宮所)라고 부른다지. 그 궁시로 가자. 초상집이 있지. 사람들이 많겠지. 

그러나 봉황대의 추억은 그를 울적하게 만든다. 이제 약간 남아 있던 술기운도 사라지고 정신이 깨어나 말짱하다.


술에서 깨어나서

술은 온갖 근심을 없앨 수 있는 거라.

벌써 진탕 취해버렸다.

촉루 흘러서 말라붙은 뒤요

야경소리 났다 안났다 할 때라.

깨어라 도 괴롭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내내 생각에 잠기운다.

창밖에 동풍 세차고

별빛 흐리게 쳐지내리려 한다.

-낙서 모음-


그는, 지난번 수해로 제방이 유실돼 요즘 다시 쌓은 둑길을 걸어 올라간다. 냇가의 자갈을 불도저로 밀어붙여 만든 길이라서 이건 온통 자갈투성이다. 작업복도 비에 젖었고 정글화에도 물이 스며들었다. 그는 휘청휘청 자꾸만 올라간다.


고독의 엽서

지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왠지 뭉게구름이 종내 눈물로 변했나보다.

너와 나의 정다운 대화를 이별로 나누고

그리움을 내게 안겨준 그밤.


장막보다도 더 어두운 밤에 나리는 비는

내 마음에 내리는 눈물인가 보다.

희야!

이젠 지쳐서 내가 울까 보다.

-낙서 모음-


희생된 곽 씨의 이발소를 지나며


그는 왼쪽으로 나타난 평촌리 애동부락을 그냥 지나친다. 柳씨들이 자작일촌해서 사는 마을이다. 이젠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귀찮아졌다. 조금만 더 가면 초상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을 텐데.

그는 자기가 가고 있는 곳을 명확하게 안다. 그는 앞으로 자기가 무슨 짓을 할 것이며, 종내엔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이란 걸 잘 안다.

<죽이고 죽겠지.>

결론은 참으로 간단하다. 그러나 그 결론은 고향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코스모스가 함빡 핀 계절에 손목을 잡고 거닐던

내 고장의 들을 생각한다.

거기에는 네 모습이 아롱져 있고-

스산한 바람에 나부끼는 네 검은 머리가

내 얼굴을 간지럽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엔 그리움이 무섭게 밀려오고

가을 밤에 외로움이 숨막히게 스며들어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낙서 모음, <내일을 위하여>의 일부-


그는 담배밭 사이로 난 한길을 걷는다. 한 뼘씩은 자란 담뱃잎들이 밤 공기 속에 상긋한 냄새를 풍긴다. 평촌이 코 앞에 있다. 개울이 둘로 갈라진다. 그는 왼쪽으로 접어들어 조그만 다리를 건넌다. 담배밭 옆에 새마을회관이 나타난다. 그 옆에 다 찌그러진 평촌 이발관이 서있다. 그는 그 주인 곽기달 씨를 생각한다.

<잘 가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경솔하게 나븐 경향으로 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아무개가 지금즘 내 욕을 하고 있겠지, 혹은 그 심중에는 나에게 대한 나쁜 비판이 가득차 있으리라. 이런 상상이 판단으로 옮겨지지 않아야 한다. 그 결과는 확실하지 못한 남의 마음과 행동을 나쁘게 규정짓고 동시에 그에 대하여 내 자신이 악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상상과 판단에 마음을 맡기지 않도록 할 일이다. -알랭

-낙서 모음-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교정하려고 이런 명언들을 옮겨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동안에 자신이 적어 놓은 그런 모든 명언들에 총격을 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서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손하다. 또 자기의 가치를 실제보다 적게 생각하는 사람은 비굴하다.

-낙서 모음-


<늦었어. 이젠 다 늦었어.>

곽기달 씨의 이발소 문 위 조그만 나무 상자에는 이런 글씨가 쓰여있다.

‘제2선 5호, 순찰함, 궁유지서’

우범곤은 순찰함을 힐끗 보고 서둘러 평촌 마을 안동네로 접어든다. 집집마다 울 안에 서 있는 감나무들이 봄비를 촉촉이 맞으며 수런수런 여린 잎을 피우고 있다. 


철면피 같은 ‘2천원의 부조’


26일 밤 12시.

우범곤이 徐씨들이 모여 사는 평촌마을 안동네에 들어선 것은 밤 12시 조금 전으로 보인다. 그때 마침 서진규(徐鎭圭, 48) 씨의 아들 동욱 군은 오줌이 마려워 마루에 나왔다가, 새마을 사업으로 콘크리트 포장을 한 마을 안길에 우범곤이 들어서는 걸 본다. 우범곤은 총 두 개를 양쪽 어깨에 메고서 진규 씨 집을 돌아 문두출(文斗出) 씨 상가로 간다. 그는 불이 켜진 서 씨 집을 그냥 지나친다. 여기서 총소리를 냈다간 바로 뒤 상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 씨 상가의 대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사랑채에 달린 쪽문으로 들어간다. 상가에선 내일 아침의 발인을 앞두고 그 준비들을 하느라고 부산하다.

 

사랑방에 있는 한명규(韓明圭, 53) 씨가 비를 후줄근하게 맞고 들어서는 우 순경을 보고 놀라 묻는다.

“우 순경, 이 우중에 우짠 일입니꺼?”

우범곤은 대수롭잖게 받아넘긴다.

“비상이 걸려 나왔심더.”

그리고 그는 사랑채를 돌아 안채로 간다. 안채 안방엔 사흘 전 병사한 문두출 씨의 시신이 모셔져 있다. 우범곤은 부엌 쪽 마루 모퉁이 기둥 옆에 총 두 자루를 세워놓고 상주를 찾는다. 상주 문천웅(文天雄, 30) 씨는 날 때부터 벙어리여서 큰 사위 이정오(李正五, 38) 씨가 마루로 나선다.

“부조할라고 그랍니더.”

그는 태연히 돈 2천원을 내민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한다.

“발이 험해서 절을 몬하겠고, 술이나 한 잔 묵고 갈랍니더.”

 

그는 마당과 마루에 있는 사람들을 쓱 한번 훑어본다. 지금 드르륵 할 수도 있다.

<목 좀 축이고 하자. 쪼깨씩만 더 살그래이.>

그는 자신의 자비스러운 마음을 스스로 흐뭇하게 여기면서 다시 사랑으로 가는 좁은 길로 간다.

이때 서진규 씨는 마당에 있다가 사랑채로 간다. 마당과 사랑방이 서로 통하는 문이 없어 돌아서 가야 한다. 사랑에 가서 보니 우 순경이 사랑방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 밤 12시 상갓집의 대학살, 이때부터 서진규 씨와 우범곤은 밤의 대학살을 눈앞에 두고 절묘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서 씨가 방문에 걸터앉아 있는 우범곤에게 말을 건넨다.

“와 방에 드가소.”

우가 신발을 가리킨다.

“괘안심더. 내 신발이 이래서 몬들아 가겠심더.”

그의 정글화에는 진흙이 많이 묻어 있다. 그걸 보고 서 씨가 그냥 혼자 방으로 들어간다.

 

 

(계속)

 

[ 2021-10-28, 16: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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