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돌궐의 대두 그리고 흑치상지의 자살
문무대왕이 간다(20) 고국을 멸망시킨 나라에서 출세했던 흑치상지의 비극적 최후

정순태(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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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돌궐은 당태종 때인 630년 이정(李靖)과 이적에게 멸망당하고, 西돌궐은 당고종 때인 657년 소정방(蘇定方)에게 본거지인 스이아브(碎葉‧ 쇄엽)가 함락되어 망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돌궐 부흥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쿠쿨룩(骨咄祿: 재위 682∼691)은 중국 북부의 연주(燕州: 섬서성 扶豊縣)을 습격하여 3만 마리의 말과 양 등을 약탈했다. 그 이후, 흩어져 살던 돌궐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쿠쿨룩은 바이칼湖(호) 남서쪽에 위치한 유목민족의 성지(聖地) 외튀겐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가한(可汗)임을 선언했다.

유목기마민족은 한번 일어섰다고 하면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흥 돌궐은 682년부터 687년까지 중국을 무려 46차례나 공격했다. 그 영토는 서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동쪽으로는 만주의 대흥 안령산맥에 이르게 되었다.

연연도대총관이던 687년, 흑치상지의 부대는 황하퇴(黃河堆: 산서성 山陽縣 동북)에서 쿠쿨룩이 이끈 부흥 돌궐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적을 40리나 추격했다. 이때의 전공으로 그는 무측천으로부터 연국공(燕國公)이라는 작위와 식읍(食邑) 3천호를 받았다.

흑치상지는 58세 때인 687년, 회원군경략대사가 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爨寶壁)과 함께 돌궐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찬보벽이 전공(戰功)을 탐내 자기 부대 단독으로 무리한 진격을 감행하다가 全軍이 궤멸했다.

그에 따라 찬보벽은 참수당했고, 흑치상지도 문죄(問罪)되었다. 이럴 무렵에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의 모반사건이 발생했는데, 혹리(酷吏)로 악명 높은 주흥(周興)은 흑치상지를 그 모반사건에 연루시켜 사죄(死罪)로 얽었다. 이에 흑치상지는 옥중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혹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고도 한다.

조희절의 모반사건은 아직도 진상을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배경에는 686년에 공포된 고밀(告密)이라고 불리던 밀고제도 때문이었다. 이 제도는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투서에 의한 밀고를 장려하는 것이었다.

서경업의 반란 후 무측천은 새로운 반란을 사전에 포착‧ 진압할 목적으로 비밀경찰을 깔아 공포정치를 강행했다. 여기에 일단 걸려들면 당사자와 가족은 물론 친척‧ 친우들까지 잔혹한 고문을 가해 옥사시키기 일쑤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의 장남인 흑치준(黑齒準)의 호소에 의한 再조사로 698년 무고함이 밝혀져 좌옥금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 고국을 멸망시킨 나라에서 출세했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비극적인 것이다. 흑치상지가 건설한 청해성의 성도(省都)인 西寧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기도 했다.

[ 2016-11-27, 17: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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