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군, 石門 전투에서 大敗하다!
인기연재/文武大王이 간다(10): 신라의 和戰 양면책은 교묘했다. 672년 9월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臣(신)은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上表文을 올렸다.

鄭淳台(작가)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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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년 1월, 문무대왕은 백제 故土를 다스리던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사비성 외곽의 古省城(고성성)을 함락시키고, 加林城(가림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 해 8월, 평양성에 주둔하던 唐의 동주도행군총관 고간과 말갈 장수 이근행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馬邑城(마읍성: 평양성 서쪽)을 함락시켰다. 勝機를 잡은 고간-이근행 軍은 이어 황주→대방→白水城으로 진격했다. 당군에 의해 포위된 白水城은 예성강 하구의 白川(배천)이다.

이때 신라군은 唐軍의 후방을 급습함으로써 상황이 反轉되었다. 백수성에서 농성하던 고구려 부흥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당군을 들이치면서 되려 앞뒤에서 당군을 포위하는 형세로 급변했던 것이다.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은 이 전투에서 당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백수성에서 패한 고간의 당군은 石門(석문: 황해도 서흥)으로 후퇴하여 戰列(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당군을 추격했다. 672년 8월, 당의 장수 고간이 이끄는 정예기병은 신라군에 대한 통렬한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이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의 중앙군단이 대패했다. 대아찬 曉川(효천), 사찬 義文(의문)· 山世(산세), 아찬 能申(능신)· 豆善(두선), 일길찬 安那含(안나함)· 良臣(양신) 등이 전사했다. 고간의 誘引計(유인계)에 걸려 신라 중앙군의 주력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開戰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나당전쟁은 서역전선의 상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석문석투 패전 직전인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했다. 당-토번의 평화협상, 아니면 휴전협상으로 당나라가 對신라 전선에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동년 12월, 당군은 석문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고 잇던 백수산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이를 지원하려고 출전한 신라군마저 격파했다.

672년 石門 전투에서 대패한 후 신라의 持久전략

石門의 敗報(패보)를 접한 문무왕은 즉시 중신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78세의 太大角干(태대각간) 김유신은 “唐의 흉계를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장병들을 모두 동원해 山城戰(산성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南韓 지역에는 800개의 城이 있었다. 침략군에 소모전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전을 피하고 戰略遲久(전략지구)로 대응하며, 정세의 변동을 기다려야 한다는 김유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신라는 강남의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광주)에 晝長城(주장성: 南漢山城)을 축조해 강북의 北漢山城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진지로 삼았다.

신라의 和戰 양면책은 교묘했다. 672년 9월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臣(신)은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上表文을 올렸다. 사죄사 급찬 金原川(김원천)과 내마 金邊山(김변산)은 포로로 잡혀 있던 내주사마 왕예본, 열주장사 왕익을 비롯한 당의 장병 170명을 데리고 가 唐에 인도했다. 또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금, 은, 동, 針(바늘), 牛黃, 布 등을 예물로 보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는 唐 조정의 분위기를 일시 호전시키기는 했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고구려 부흥군과 당군의 전투현장에서는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673년 5월, 당군은 고구려 부흥군에 대해 대공세를 전개했다.

673년 9월, 당군은 임진강의 중류인 瓠蘆河(호로하) 남안의 七重城(칠중성: 파주시 積城面)과 왕봉하(경기도 고양)까지 남하해 고구려 부흥군과 대접전을 전개했다. 고구려 부흥군이 패퇴하자 드디어 신라군이 당군과 정면충돌한다.

임진강 계선 전투의 결과는 이후 東아시아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결전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하여 밤길을 도와 북상했다.

漢江(한강) 하구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鰲頭山(오두산)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臨津江(임진강)이 合水되는 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汶山IC(파주시 문산읍 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東進(동진하면 임진강의 결정적 순간과 同行(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韓民族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37번 국도를 東進하면 임진강 南岸에 임진왜란 때(1592년 4월30일) 피난하던 宣祖(선조)의 도하지점인 花石亭(화석정)이 보이고, 화석정에서 8km쯤 東進하면 도로변에 西人의 본거지였던 坡山書院(파산서원)이 보인다. 파산서원은 西人의 영수였던 牛溪 成渾(우계 성혼)이 나라 지키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朱子學(주자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파산서원에서 다시 6km쯤 더 나아가면 이제는 3~4층 건물이 즐비한 積城面 馬智里(적성면 마지리)이다. 馬智里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37번 국도에 들면 「七重城(칠중성)」의 위치를 표시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여기서 좁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重城山(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積城鄕校(적성향교)가 보인다.

중성산 위에는 나당전쟁 시기의 격전장이며, 주인이 자주 바뀐 七重城이 자리 잡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 『劉仁軌(유인궤: 唐將)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唐兵(당병)이 거란·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마당에 세워 놓고 농토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중성산 정상부에는 현재 軍의 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은 표고 149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르면, 왜 그때 칠중성을 彼我(피아)가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감악산은 파주 지역의 제1봉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中心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중성산의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中流(중류)의 물길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 호로‧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라고 불렸던 듯하다.  

고구려 부흥군의 요새 호로고루와 임진강 渡涉이 가능한 고랑포 

칠중성은 소규모 山城이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六溪土城(육계토성)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저지할 수 있는 요충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北岸의 瓠蘆古壘(호로고루)와 마주 보고 있다.

육계토성 부근에 걸린 飛龍大橋(비룡대교)를 건너가면 연천군 白鶴面(백학면)이고, 백학면에서 임진강 北岸의 지방도로를 따라 西行하면 곧 고구려 부흥군이 南下하던 唐軍과 격전을 벌였던 호로고루에 도달한다.

이곳은 南北(남북) 분단 전에만 해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호루고루는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支流(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平地城(평지성)인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호로고루성에서 하류 방면으로 조금 西進하면 高浪浦(고랑포)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지역이어서 민간통제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거슬러 올라왔던 임진강 水運(수운)의 중심 나루였다.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걸어서 강을 건넘) 지점이 많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부대(김신조 일당 31명)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외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2006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지역의 철책선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김에 고랑포대대 제3중대 막사에서 1박을 하면서 특히 임진강 북안과 임진강 지류 砂尾川(사미천) 일대를 답사했다.

칠중성→임진강→고랑포→사미천을 잇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金庾信(김유신)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을 구원하기 위해 北上했던 기동로이다.

이때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신라의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를 수레에 실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상류의 白峙鎭(백치진)의 고구려 수비군을 돌파하고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中和에서 소정방 軍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아사 직전의 唐軍을 구원한 김유신 부대는 귀로에 고랑포에서 추격군을 역습해 고구려 장수 阿達兮(아달혜)를 사로잡고 적병 1만 명의 목을 베는 戰果(전과)를 거두었다.

 

육상전 최후의 決戰場 買肖城(매소성)

 

고랑포 지역을 둘러본 필자는 임진강 위에 걸린 飛龍橋(비룡교)를 건너 다시 적성면 마지리로 내려왔다. 마지리에서 323번 지방도로를 타고 4km쯤 남하하면 감악산 계곡(적성면 雪馬里)에 「英연방軍 전적비」가 보인다. 이곳은 설마리 전투 때(1951.4.22.∼4.25) 유엔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英연방 제29여단이 중공군 3개사단(제187‧ 제188‧ 제189사단)의 공격을 3일간 저지시킨 현장이다.

이때 여단의 前方에 추진되어 있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탄약과 식량도 공급받지 못하는 악조건 하에서 병력의 90%를 상실하면서도 진지를 사흘간 고수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은 여단 전체가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전방의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으로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견제함으로써 차기 방어선(델타線) 구축과 서울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감악산은 표고 675m이지만,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고 몸피도 굵은 산이다. 감악산 정상에 올라가면 임진강 남안과 북안에 위치한 칠중성‧ 호로고루성이 내려다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이 보인다.

지금 감악산 계곡은 유원지로 변해 곳곳에 음식점과 산장에다 가요주점까지 들어서 있다. 334번 지방도로로 달려 감악산 계곡을 빠져나오면 연천군 신산리이고, 이곳에 飛龍師團(비룡사단) 본부가 주둔해 있다. 적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협박을 일삼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최전선 接敵(접적)지역마저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동두천市에 진입해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가 경원선의 보산역 앞에서 군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권승진씨를 픽업해, 함께 買肖城(매소성)을 향해 출발했다. 매소성은 漢灘江(한탄강) 유원지에서 우회전해 포천 가는 32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왼쪽에 보이는 야산(연천군 靑山面 大田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는 「大田里山城(대전리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매소성은 地利(지리)를 살려 쌓은 요새이다. 북동쪽에서 흘러내리는 한탄강이 매소성 앞에서 급격히 꺾어져 임진강 본류로 합수된다. 한탄강 너머에는 은대리성과 전곡리土城을 껴안은 全谷邑(전곡읍)이 펼쳐져 있고, 서북쪽 멀리로는 開城의 鎭山(진산)인 송악산이 육안으로 보인다. 20여 년 전 이곳에 올라왔을 때 전곡읍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제는 연천군 제1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서기 675년) 9월29일조에는 『李謹行(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키고, 戰馬(전마) 3만380필과 많은 병기를 획득했다』고 쓰여 있다. 이후 唐軍은 신라군에 대한 지상전을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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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시의 수퍼파워 唐에 開戰(개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大義名分(대의명분)에 대해선 文武大王이 당의 극동방면군 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인 「答설인귀書」를 통해 이미 설명했다. 이제는 開戰 이후의 전투상황과 羅唐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당시의 국제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2016-09-24, 22: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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