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의 기획으로 탄생한 金法敏
文武大王이 간다(3)/망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인 김유신은 신라 왕족 김춘추를 누이에게 소개하여 혼인을 하게 한다. 신라 가야의 연합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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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기획했던 政略결혼과 김법민의 탄생 

그렇다면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문무대왕 金法敏(김법민)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해서 578년 왕위에서 쫓겨난 眞智王(진지왕)의 손자 金春秋(김춘추)다. 어머니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왕 仇衡(구형)의 손자인 金舒玄(김서현)의 막내딸이자 金庾信(김유신)의 누이인 文姬(문희)이다. 다음은 <<삼국사기>> 문무왕 즉위연도(661)에 실린 그의 출생과 관련한 유명한 스토리이다.

<언니(宝姬․ 보희)의 꿈에 西元山(서원산) 정상에 앉아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국내에 가득 찼었다. 깨고 나서 아우(文姬․ 문희)에게 꿈 얘기를 하니 아우는 농담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하고,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庾信(유신)은 春秋公(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다행히 근처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자”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술상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 꿰매게 하였다.
그의 맏누이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아우(문희)가 나와 옷고름을 다는데, 그녀의 수수한 단장과 가벼운 옷맵시는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춘추가 기뻐하면서 이내 청혼하여 대례를 갖추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법민이다.> 

위의 <<삼국사기>>의 인용문에서 김춘추와 김문희의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의문 해소는 신라 당시의 기록인 金大問의 <<花郞世紀‧ 화랑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춘추의 조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하여 재위 3년만에 폐위된 신라 제25대 임금인 眞智王(진지왕)이다. 김춘추의 生父(생부)는 진지왕의 장남으로 早死(조사)한 이찬(관등 제2위) 金龍樹(김용수)이고, 養父(양부)는 용수의 동생인 龍春(용춘)이다.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임금인 仇衡(구형)의 증손녀이다. 문희의 조부는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新州(신주)의 軍主(군주)였던 金武力(김무력)이다. 김무력의 아들이 蘇判(소판: 관등 제3위)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萬明(만명)과 눈이 맞아 변경(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했었다. 만명은 肅訖宗(숙흘종: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딸이다. 葛文王(갈문왕)은 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존호였다.

아무튼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는 폐위당한 임금의 손자, 어머니 김문희는 신라에 패망당한 금관가야 구형王의 후예였다. 김법민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가 그러했던 만큼 김춘추-김법민 父子의 등극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필사본 「花郞世紀(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世 風月主(풍월주), 김춘추는 18世 풍월주다. 풍월주는 요즘 육군사관학교의 「대표화랑」쯤에 해당하지만, 그들에 대한 신라사회의 기대와 聲望(성망)은 대단했다.

김춘추-김문희 정략결혼의 기획자는 망국의 후예로서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품은 가야김씨 庾信(유신)이었다. 그는 8세 연하(年下)의 신라김씨 춘추(春秋)를 유인해 그의 여동생 문희와 婚外情事(혼외정사)의 분위기를 만들었음은 앞에서 썼다. 유신의 첫째 여동생 寶姬(보희)는 달거리 중이어서, 바느질을 사양했다. 이때 둘째 여동생 文姬가 앞으로 나아가 춘추를 모시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지나 문희의 배가 불러왔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당시 춘추에게는 이미 寶羅(보라)라는 미색(美色)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보라는 「프리섹스의 化身」이었던 美室(미실)의 손녀였다. 美室은 일찍이 제5世 풍월주 金斯多含(김사다함)의 연인이었고, 그가 전사한 후에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雲雨(운우)의 情을 나누면서, 화랑 조직을 움직인 배후의 실력자였다.

더욱이 김춘추와 보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 춘추는 보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文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김유신은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한 최후의 이벤트를 감행했다. 김유신은 그의 집 뜰에 땔감을 잔득 쌓아 놓고 “처녀가 애를 뱄다”고 외고 펴면서 짐짓 文姬를 불사르려고 했다. 이때 김춘추는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따라 남산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덕공주가 연기 나는 곳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고해 바쳤다. 선덕공주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소!』

김춘추는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하고, 혼례 올릴 것을 사당에 고했다. 그 얼마 뒤 보라宮主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는 뒤를 이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김법민은 철저한 정략결혼의 산물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대왕의 妃는 慈儀王后(자의왕후)인데, 파친찬 金善品(김선품)의 장녀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품은 신라 화랑의 대표인 풍월주(21世) 출신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용모가 매우 잘 생겼고, 언행이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좋아하고, 仙道(선도)와 佛道(불도)에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上等(상등) 골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선덕여왕 10년(641)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36세의 나이로 早死(조사)했다. 태종무열왕이 마음 아파하고 아찬(관등 제6위)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의 딸 자의가 문무대왕의 왕후가 되자 파진찬(관등 제4위)으로 추증되었다. 선품공의 차녀는 體元(체원: 20世 풍월주 역임)에게 시집가서 아들 吳起(28世 풍월주)를 낳았고, 그의 3녀 夜明(야명)은 문무대왕을 섬겨 宮主(궁주: 왕의 소실)가 되었다.  

金法敏(김법민)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즉위로 인해 갑자기 왕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자란 태자나 왕자는 미식(美食)과 미색(美色)으로 흐믈흐믈해지게 마련이다. 운동 부족에 의해 야성(野性)을 지니기도 어렵다. 세계제국 唐나라와 싸워야 했던 결단과 투쟁의 시기에 野性(야성)을 지닌 문무대왕이 재위(在位)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의 축복이며,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법민은 본디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그는 23세의 약관에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한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4년(650) 6월 조에는 『왕은 비단에 五言詩(오언시)인 太平頌(태평송)을 써서, 이를 春秋(춘추)의 아들 法敏(법민)으로 하여금 唐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송은 겉보기에 아부의 극치이다. 

<위대한 大唐 王業을 열었으니/ 드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五星이 만방에 도는구나/……/ 三皇과 五帝의 덕이 하나가 되어 大唐을 밝게 비추리로다.>

650년이라면 唐고종 즉위 다음 해인 永徽(영휘) 원년이다. 그렇다면 태평송에 대한 唐고종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는 『高宗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大府卿(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 2016-09-03, 20:2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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