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유적만 남은 인도의 불교
印度이야기(6)/ 불교의 발상지 보드가야(Bodhgaya)와 정복자 아소카王

정인채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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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석

불교의 발상지 보드가야(Bodhgaya)로 향했다. 동인도로 향하며 비하르(Bihar)의 보드가야는 이슬람, 힌두에 이어 불교를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바라나시를 출발해 가야(Gaya)까지 기차로 이동한 후, 다시 보드가야까지 짧은 거리(11km)를 더 들어갔다.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는 기차로 불과 세 시간 거리였다. 북인도를 동진(東進)하며 경험한 기차 여행 중 가장 짧았다. 그런데 가깝다는 점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기분을 내 3등석에 타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제까지는 줄곧 2등석의 침대칸*을 이용했다. 요금도 합리적이지만 위아래 3층으로 침대를 펼 수 있어 장거리 여행에 적합했고, 좌석이 지정되어 비교적 편하고 안전하다는 장점도 있어 여행객들이 애용하는 좌석이기도 했다. 그런데 보드가야行은 괜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2등석 침대칸-3Tier Sleepers Express

처음으로 타본 3등석 기차칸은 거의 곡예 수준이었다. 3등석은 어차피 딱딱한 철망 의자라 입석(立席)은 개의치 않았지만 문제는 열차 안에 발 디딜 틈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몇몇 인도인들은 객석 사이의 난간을 딛고 서 위태롭게 균형을 유지하며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선 채로 자세를 못 잡아 휘청이던 나는 급기야 배낭을 밟고 올라가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더듬으며 겨우 버텼다.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밟고 올라선 배낭은 뭉개지지 않았다. 콩나물시루 같은 사람들 사이에 꽉 끼인 것이다. 인도의 버스보다도 스펙터클했지만 괜히 사서 고생한 셈이었다.

가야에 도착하자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기진맥진해져서 다짜고짜 릭샤에 올라탔다. 원래 인도에서 릭샤를 탈 때는 먼저 요금을 정해놓고 가야 한다. 미터기가 무용지물이고 도착하면 딴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비단 외국인에게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 현지인들도 미리 가격을 확인하고 흥정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지친 나머지 릭샤를 곧바로 출발시킨 것이다. 이럴 경우에도 방법은 있다. 목적지에 다다르면 딱 한 마디 위엄 있게 반말투(힌디어)로 ‘멈춰’라고 하는 것이다. 릭샤가 멈추자마자 생각해둔 요금을 내고 내려버리는 것이다. 대답도 말고, 눈도 마주칠 필요 없다. 확실히 계급 사회를 응용한 것인데 예상할 수 있듯이 쉽지만은 않다. 과거 은사로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방법인데 이것이야말로 릭샤계의 진정한 고수다. 그런 묘수를 떠올리며 가는 사이, 찌푸렸던 얼굴이 갑자기 활짝 펴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티벳 승려들이 서로 수돗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무더운 날에 승려들의 몸을 감싼 붉은 법복이 오히려 가볍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줄곧 심산(心酸)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일순간에 풀어져 버렸다. 평소 종교는 엄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상이 신앙으로 가득 찬 인도에서는 종교란 무릇 편안한 것으로 느껴졌다.

보드가야의 메신저들

숙소를 정하고 밖을 내다보니 유독 원숭이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풍경을 가만히 보자니 현장(玄奘) 그러니까 삼장법사(三藏法師)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가 떠오르고, 서유기(西遊記)와 더불어 손오공(孫悟空)이 연상되었다. 손오공이란 혹시 이 원숭이들에게서 비롯된 캐릭터일지도 모르겠다는 유쾌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힌두교의 신들 중에는 하누만(Hanuman)이 있다. 라마야나(Ramayana)*에 등장하는 하누만은 숲 속의 원숭이 종족 바라나족(Vanaras)의 왕으로 극 중에 재주꾼으로 맹활약하며 인도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은 람의 사자(使者)가 되어 그의 아내 시따에게 소식을 전하는데 이 때문에 하누만은 인도 문학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깔리다사(Kalidasa)**의 걸작 메가두따(Meghaduta)***에서도 떨어진 아내에게 소식을 전하며 하누만의 영감을 받아 구름[雲]을 메신저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원은 물론 집안과 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하누만을 보면 인도인들이 얼마나 그에게 친숙한지 여길 수 있는 대목이다. 보드가야에서 지붕 이곳저곳 뛰어넘는 손오공들은 마치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마야나(Ramayana)-라마야나는 4세기 경 실제 인물인 발미끼(Valmiki)가 역사적 인물이었던 람(혹은 라마)의 영웅적인 삶에 관한 시를 취합해 창작한 인도 최초의 대서사시(12,000頌)다. 라마야나란 비슈누의 일곱 번째 화신 람의 이야기를 의미하며, 람과 그의 아내 시따(Sita)에 얽힌 무용담, 하누만의 충성 그리고 마왕 라바나의 흉포함을 그린 작품이다. 라마야나는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인도의 2대 서사시로 꼽힌다.
**깔리다사(Kalidasa)-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메가두따(Meghaduta)-메가두따의 뜻은 ‘구름의 사자’로 풀이된다.

불교의 메신저는 아소카 왕이다. 보드가야의 마하보디(대보리사) 사원 또한 그가 남긴 찬란한 유산의 일부다. 아소카에 의해 인도 밖으로 전파된 불교는 全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실 지금의 인도에서는 티벳 승려들을 제외하면 불교 신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불교의 源流라고 할 수 있는 힌두교는 사상적인 뿌리는 같지만, 평등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대중성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각기 다양한 신을 모시는 힌두교는 만민(萬民)의 구제가 아닌 개인의 수양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불교의 대중성에 위협을 느낀 사제 등 특권층은 불교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층이 독보적이었던 지위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불교는 인도에서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불교는 인도에 없지만 불교의 찬란한 유적만은 이곳에 남은 셈이다.

*인도에서 불교도는 8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인도 내 종교 분포: 힌두 78%, 무슬림 15%, 기독교 2.5%, 시크교 1.9%, 불교 0.8%, 자이냐교 0.4%, 기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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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발상지 보드가야(Bodhgaya)의 마하보디(대보리사) 사원. 


보드가야 역시 이슬람의 침략으로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킨 모습은 내가 믿는 종교와 다르다고 배척하며 파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인도의 포용력을 느끼게 만든다. 그 위대한 상징의 하나가 보드가야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는 고타마 붓다(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를 기리며 마하보디 사원을 세웠다. 그런데 인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아소카는 왜 불교를 지지하게 되었을까? 어떻게 이토록 신비로운 유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칼링가 전투

이 전쟁에 관해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이것이 승리라면, 패배는 무엇인가? 승리인가, 패배인가? 정의인가, 불의인가? 이것이 용맹함이라면, 무고한 아녀자와 아이들을 죽이는 것도 용맹이란 말인가? 내가 한 일은 제국을 번성시키는 일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들의 번영을 빼앗고 파괴하기 위한 일인가? 누군가는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었다. 또 누군가는 자식을 잃었다. 이 흩어진 주검들의 잔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승리의 징표인가 패배의 낙인인 것일까? 시체로 몰려드는 독수리와 까마귀들은 죽음과 악마의 전령(傳令)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如是我聞-부처가 열반에 들고 그의 말씀을 정리하는 회의가 열렸는데 그를 보필했던 제자 아난다에게 최초의 설법에 대해 묻자, 아난다가 ‘나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로 답을 시작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모든 불경의 첫 머리말이다.

전쟁이 끝난 하루 뒤, 정복자는 이제 막 손에 넣은 도시를 둘러보았다. 일방적인 승전이었다. 군사들은 환호했고, 마침내 눈엣가시였던 세력을 축출해냈다. 이로써 거의 모든 인도땅이 그의 발아래 놓인 것이다. 하지만 전후의 처참한 폐허를 둘러본 정복자는 새 전리품에 스스로 의문을 표했다. 가옥들은 모두 불탔고, 살육의 향연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피가 흥건했고, 조각난 시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뒹굴었다. 10만 명에 달하는 적군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몰살했고, 15만 명을 생포했다. 이는 기원전 261년, 피비린내 났던 칼링가(Kalinga)** 전투의 결말이다.

**칼링가(Kalinga)-칼링가는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 마우리아 왕조가 융성하던 시기 지금의 인도 동부 오리사(또는 오디사 Odisha)와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에 걸쳐 있던 왕국이다.

앞서 마치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고뇌하는 대사를 내뱉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누린 정복자, 佛王으로 널리 알려진 아소카 왕(Ashoka, 기원전 273~232년)의 독백이다. 재위 8년 째 아소카 왕은 마우리아 왕조의 권위를 무시하고 통치를 거부하던 칼링가를 초토화시켰다. 역사에서는 칼링가 정복를 전후로 정복과 살육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 아소카 왕은 다르마(Dharma, 法)에 따라 제국을 통치했고, 불교의 포교에 힘썼다고 기록한다. 

아소카, 마우리아의 황금기

불교 전파에 있어 아소카 왕의 역할은 크다. 언어와 화폐가 통일되지 않은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에 당시의 국가 조직과 중앙 집권 체제는 설익었고,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2~185년)는 아소카 왕 사후 불과 반세기가 지난 뒤 곧 쇠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원전 250년경부터 이루어진 불교의 확산은 인도 국내는 물론, 스리랑카와 중앙아시아로 전차되며 불교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정복의 역사보다 길이 남을 아소카의 업적임에 분명하다. 그는 마우리아 왕조의 황금기를 구가했고, 과연 신화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法輪, 수레바퀴)는 왕권을 상징하며 전륜성왕은 직역하면 ‘윤보(輪寶)를 돌리는 성군’ 즉, 무한한 통치권을 가진 가장 이상적인 군주를 뜻한다. 인도 국기에도 아소카의 사자상에서 따 온 차크라가 새겨져 있다. 아소카 왕은 불전(佛典)에서 아육왕(阿育王) 또는 아수가(阿輸迦)로도 전해진다.

한편,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아소카라는 인물은 상당히 흥미롭다. 결국 아소카의 평화도 피가 낭자했던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후였다. 북쪽으로는 카슈미르와 네팔 지역,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남으로는 키스트나(Kistna) 강 유역까지 넓혀 남인도 타밀 지역을 빼면 현재 인도 영토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땅은 차지할 만큼 차지했던 셈이다. 오히려 당시 초보 통일 왕조의 미숙했던 국가 운영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대륙을 가득 채운 광활한 영토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반란과 진압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결국 마우리아 왕조는 오래도록 천수(天壽)를 누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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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링가는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 마우리아 왕조
융성기에 지금의 인도 동부 오리사(또는 오디사)와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에 걸쳐 있던 왕국이다.
 

그렇게 보면 아소카 왕이 흡족했던 칼링가 정벌 이후 영토의 확장보다는 통치에 주력했던 것이 이해된다. 무자비한 살육을 후회하면서 어떤 극적인 깨달음을 얻기도 했겠지만 정복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넓은 영토였다. 이제 자신이 확장한 영토는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대상이었다. 더 이상 피를 보는 것도 무의미했다. 아소카 시대의 마우리아 왕조는 군사력과 납세 등에 있어서 왕의 권한이 강력했지만 광대한 영토에 비해 국가 조직이 엉성했다. 지역별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함은 물론 각기 다른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는 등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가 완전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종교를 통해 제국을 하나로 묶으려던 그의 통치 방향은 매우 시의적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특히 당시 佛法은 국가의 기강을 잡는 데 용이했다. 마애(磨崖) 비문에 적힌 내용은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부모에게는 마땅히 유순해야 한다. 윗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생명에게 자비심을 보여야 한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이들 법의 공덕을 빠짐없이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시에 제자는 스승을 존경해야 한다. 친척에게도 적절한 예를 표해야 한다.(소마애 법칙)” 

다분히 교화(敎化)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정복과 살육으로 얼어붙은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용의했고, 피정복민의 불만은 물론 피에는 피로 돌아올 수 있는 악순환을 끊는 고도의 한 수였을 것이다. 지금도 종교라는 코먼센스(Common sense)를 통해 잘 통제되는 대국 인도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가 정치적 수단은 아니지만 거대한 국가를 하나로 묶는데 역할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그 유명한 인드라 간디*의 연설에서도 그녀는 힌두를 상징하는 하얀색 사리**를 입고 자신의 정통성을 어필했다.  

*인드라 간디-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무남독녀로 두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역임했다.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다.
**사리-인도 여성들의 전통 의상이다.

사실 그 유명한 칼링가 전투의 회의(懷疑)는 다소 과장스러운 느낌이 든다. 신화에는 필연적으로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고, 정복을 거듭하며 바로 하루 전날까지도 초토화를 지시한 왕이 갑작스레 치를 떨며 후회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극적이다. 어쩌면 아소카는 훗날 그렇게 기억되고 싶었을 것이다. 신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멋진 각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복자를 떠나 세상의 어떤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내일 후회할 짓을 할까. 아소카 왕은 정복자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에 탑(塔)과, 석주(石柱) 그리고 비문(碑文)을 남겼는데 이것이야말로 정복자의 진정한 트로피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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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 왕은 전국 방방곡곡에 탑(塔), 석주(石柱)
비문(碑文)을 남겼다.

그의 석주 비문과 마애(磨崖) 비문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전국적으로 발견된 스무 여개에 가까운 비문은 판독이 가능한 인도의 사료(史料)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들 비문은 불법의 정신을 교시하는 용도(마애 비문) 외에도 아소카 왕이 이룩한 마우리아 왕조의 광대한 영토(석주 비문)를 증명해주는 역사적 근거다. 특히 석주 상단을 장식하는 사자상(獅子像)은 現 인도의 상징이기도 하는데 아소카 왕이 이룩한 대제국으로부터 인도의 국가적 기원과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국가의 입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편, 碑文으로 전해지는 역사적 기록에 대해서는 대륙의 스케일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칼링가 전투만 해도 비문에는 아소카 측의 희생자는 1만 명이었던 것과 반해 칼링가 왕국은 병사와 민간인을 포함해 10만 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칼링가 왕국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처절하고 치열했던 전투였던 점을 감안하면 아소카 군이 십분의 일 밖에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점은 믿기 힘들고, 당시 시대적 정황상 10만이라는 숫자는 통상적으로 많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승자의 위업을 부각하기 위해 다소 과장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끝자리 하나 더 붙이는 것은 칼링가 전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역사는 승자 독식이고, 역시 자신의 업적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서는 비문과 같은 기록을 잘 남겨야 하는 것이다.

정복자와 성왕(聖王)

아소카가 잔혹한 정복자가 아닌 신화적인 왕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무수한 피를 본 뒤 내린 처방 덕분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뒤, 무력에 근거한 공포 정치가 아닌 종교를 통해 선정을 베풀었다는 것은 시작보다 좋은 마무리로 귀결되었던 셈이다. 물론 처음부터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칭송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른 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그가 왜, 어떻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볼 수 있다. 아소카는 더 원대한 꿈을 꿨고, 더 큰 업적을 남겨 역사 속에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얼핏 위대함을 추구한 인물의 끊임없는 고뇌와 성장통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始祖) 찬드라굽타(Chandragupta, 기원전 340~298년)의 손자였던 아소카는 사실 2대 빈두사라(Bindusara, 기원전 320~272년) 왕의 수많은 왕자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브라흐만*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에게는 배 다른 손위 형제들이 매우 많았다. 일찍이 무예에 출중하고 용맹하여 능력을 발휘**했다고 하지만 그가 왕위 계승 서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방 총독으로 임명***되는 등 역량을 인정받긴 했지만 아버지 빈두사라는 후계자로 첫째 아들인 수심(Sushim)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다. 실제로는 수심이 적자이자 이상적인 후계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라다굽타 등 당시 마우리아의 대신(大臣)들은 수심의 오만함에 위협을 느꼈고, 대신들의 지지 속에 결국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기에 이른 것이다.

*브라흐만-지식계층 또는 사제계급을 의미함.
**현재 인도 중서부의 말와(Malwa) 지역에 해당하는 아반티(Avanti) 지방의 폭동 진압에 파견됨.
***당시 아버지 빈두사라 왕의 데칸 고원 정복을 도왔던 것인지, 반란 진압에 기여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아소카는 우자인(Ujjayini)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269년 비로소 아소카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전폭 지지했던 라다굽타가 수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아소카는 정당한 후계자였던 수심을 불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는 등 한 명을 제외한 99명의 이복형제를 모두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빈두사라가 101명의 자식을 낳았을 만큼 초인적인 정력가였다는 얘긴데 역사적으로 명확한 근거가 없는 만큼 다소 과장된 면도 있지만 말이다. 이를 통해 분명하게 시사하는 점은 아소카가 정적(政敵)을 비롯한 반란의 씨앗을 철저하게 제거했다는 점이다.

아소카와 수심의 라이벌 관계는 최근 인도의 TV 역사극에서도 재현된 바가 있다. 아무래도 인도인들의 역사극이기에 신화적인 인물인 아소카에 초점이 맞춰지고, 수심의 야비한 측면이 부각된 면이 있다. 하지만 인도인들이 당시의 역사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엿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흥미롭다. 이 드라마에서도 수심은 오만하고, 대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아소카의 재능을 질투하며 차기 대권에 위협을 느낀 그가 어린 아소카를 위험한 반란 진압에 앞장서도록 획책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진압 과정에서 아소카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아소카는 반란 진압에 성공하고 수심은 더욱 불안해져 아버지 빈두사라와 아소카 사이를 이간질하기에 이른다. 아소카가 야망과 권력욕이 강하다며 아버지 빈두사라에게 그를 칼링가로 추방할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결국 대신들의 뜻을 모은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고, 수심은 숙청된다. 하지만 여기서 인도인들도 언급하는 역사적인 사실은 아소카는 적자가 아니었고, 부왕(父王)이 아닌 대신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그 수가 몇이든 형제들을 제거하고 왕권을 차지했다는 점이다. 비범한 인물이지만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칼링가 정복 이후 성군(聖君)으로 거듭나기까지 在位 초기의 아소카는 사실 피로 물든 정복을 거듭하고, 반발자들은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축출했던 인물이었다. 왕위에 올랐지만 인정에 목말랐을 법하다. 그는 아버지와 조부를 넘어서고 싶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영토였다. 정복 전쟁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넓은 땅을 차지했다. 형제이자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반항하는 세력까지 몰살한 그의 두 손은 혈성(血腥)으로 가득했다. 허무하기도 했고, 정복만으로는 모자랐을 것이다. 아소카는 부족함을 느끼며, 더 높고 위대한 곳을 바라봤을 것이다. 영토 곳곳에 석주와 비문을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고, 법을 바로 세우며 종교를 번성시켜 해외까지 전파시켰다. 그 결과 무수한 시간이 지난 오늘날, 아버지는 물론, 최초 통일 왕조를 세웠던 조부의 업적을 능가했으며 인도의 국가 정체성을 확립한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그 원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지겠다는 욕망, 인정받겠다는 열망이 아니었을까. 아소카 왕이 남긴 마하보디 사원을 향하며 바로 이곳이 무자비한 정복자와 성왕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해봤다.

*아소카는 ‘아소카의 지옥’으로 불리는 고문실을 따로 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건물 외관과 상반된 기능에서 ‘천국 같은 지옥’으로도 불렸다.

마하보디 사원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처럼 우주적이고 독창적인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가까이 다가가자 통로를 따라 조그마한 초들이 빈틈없이 자리 잡아 불을 밝히고 있었다. 사원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한국의 山寺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 느낌만은 묘하게 닮아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어디에서 왔든, 어떤 색깔의 승복을 입었든 상관없이 무수히 많은 순례자들과 참배객들이 사원을 향해 밀려들고 있음을 대번에 알게 된다. 물론 이곳을 찾는 주된 이유는 불교의 성지이자 석가모니의 흔적을 쫓기 위함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한 명, 아소카 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글쓴이: 鄭仁采 inchaijung@mac.com

[ 2015-04-16, 16:4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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