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월 특별이민 비자 받고 미국으로 移民(이민)-17
前 CIA 요원 마이클 리의 現代史 秘話-17/송현욱 집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나는 백방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가족은 아직도 서울에 있었고 내가 먼저 자리를 잡은 후에 뒤 딸아 오도록 되어있었다. 영주권은 있으나 아직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기관에는 절대로 취직이 안 되고 일반직장에도 그 당시는 취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보낸 구직이력서는 전부 되돌아왔다.

李明山(마이클 리)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韓美양해각서 ‘美8군 정보훈령 I-65’가 ‘I-69’로 바뀌고, 지금까지 대방동 소재 수용소의 관리를 502군사정보단이 해왔는데, 이제부터는 그 운영관리를 국군 정보사령부로 이관하게 됐다. 그래서 수용소 관리뿐만 아니라 심문활동의 주도권도 국군 정보사령부로 이전됐다.
  
  이 일을 위해 모든 행정절차와 시설과 설비의 재고(inventory), 경비근무, 대외업무, 일체를 넘겨주는데 정보사령부 파견대장 김흥태 중령과 우리 부대 행정장교와 내가 함께 어울려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작업이 1974년 5월에 종결됐다. 그 사이 나에게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와 나의 가족에게 미국 정부로부터 ‘SE-1 특별 이민비자’가 떨어졌다.
  
  이 비자는 미국 정부에게 15년 이상 공로를 세운 외국인에게 주는 특별비자다. 나는 서둘러 집을 팔고 임시로 머물 셋방을 얻은 뒤, 딸과 두 아들의 이민 전학수속을 했다. 그리고 1974년 5월4일부로 부대에 사표를 냈다. 부대에서는 내가 미국에 들어가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추천장과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생애 제2막의 휘장을 내렸다. 그리고 502군사정보단은 내가 떠난 얼마 후에 501군사정보여단으로 개편됐다.
  
  1974년 5월10일, 나는 김포비행장에서 보잉-747 점보여객기를 탔다. 우선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후 가족을 불러들일 셈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다. 지금 떠나면 내가 언제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될지 모르는 착잡한 마음과 새로운 운명의 개척을 위해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들뜬 마음이 교차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눈을 감고 지나간 세월의 굽이굽이를 회상해 볼 때, 충남 부여 시골에서 지게를 지고 농사일에 뼈가 굳은 촌놈이, 중학교에서 월사금 미납으로 퇴학을 맞은 가난뱅이가, 고아원에서 배가 고파 울던 멍청이가, 미국 이민을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적같기만 했다. 나 자신의 힘이나 처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볼 수 없는 어떤 강한 밧줄이 나의 몸을 묶어 끌고 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말로만 듣고 상상만 했던 아름다운 하와이에 비행기가 도착하고 입국수속을 마친 후 그 자리에서 영주권, 소위 ‘그린 카드(Green Card)’를 받았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그리곤 비행기를 갈아타고, 로스앤젤레스와 클리블랜드를 거쳐 워싱턴 내셔널 비행장에 도착하니, 연락을 받은 친구 송현욱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장으로 부터 송 집사가 살고 있던 메릴랜드 州(주) 아스펜 힐까지의 연도에는 마치 나를 환영이나 하는 듯 훈훈한 봄바람과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친구 송현욱 집사의 집에 임시로 머물면서 나는 백방으로 구직활동을 했다. 가족은 아직도 서울에 있었고 내가 먼저 자리를 잡은 후에 뒤따라 오도록 되어 있었다. 영주권은 있으나 아직 시민권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기관에는 절대로 취직이 안 되고 일반직장에도 그 당시는 취직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내가 보낸 구직이력서는 전부 되돌아왔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자격자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회사에는 빈자리가 없고 신규채용도 계획된 것이 없어 아주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리가 나면 꼭 연락을 하겠습니다.”
  
  거의 이런 식의 거절이었다. 거절 치고는 참으로 친절한 거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조급하고 초조했다. 한 달이 지났다. 6월 중순, 친구의 권고가 처음부터 좋은 직장 구할 생각을 하지 말고 우선 아무데나 가보라고 해서 근처에 있는 서민백화점 ‘K-Mart’를 찾아갔다. 인사책임자가 아주 친절했다. 현재 구직이력서가 16통이 들어와 있고 빈자리가 없다고 했다. 빈자리가 있다고 해도 나의 순번은 열일곱 번째라고 했다. 한숨을 쉬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다시 들어가 백화점의 총지배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마침 키가 크고 대머리의 총지배인이 외부에 나갔다가 들어오고 있었다.
  
  “I'm the general manager here. What can I do for you?”(내가 총지배인인데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그는 나를 자기 사무실로 안내했다. 나는 솔직하고 간결하게 나의 의사를 말했다. 그는 분명히 내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아까 그 인사책임자를 불렀다. 인사책임자는 같은 얘기를 반복했다. 내 앞에 16통의 이력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사실을. 미국 사회에서는 어디를 가나 편법이나 예외가 적용되지 않는다. 총지배인도 미안한 표정으로 지금은 자리가 없으니 자리가 생기면 꼭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가 오른손을 불끈 쥐고 “이 주먹으로 문을 한 번만 더 두들겨보자!” 하고, 이번에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총지배인의 사무실에 곧장 들어갔다. 그가 깜짝 놀라 정색을 하며 물었다. “What's up?”(무슨 일인가?)
  
  나는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나를 귀찮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심각한 태도로 단호하게 총지배인을 내가 설정한 코너로 몰고 갔다.
  
  “총지배인님! 나는 이 나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현재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는 생소합니다. 나는 이 나라에 뿌리를 박고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합니다. 나에게는 당장 일자리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빈둥빈둥 직장도 없이 세월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나의 가족은 아직도 서울에 있습니다. 저들을 빨리 데려와야 합니다.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고 나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나는 절대로 급료를 요구하지 않겠으니, 내일부터 무보수로 이곳에 출근하게 하여 주십시오. 나에게 빗자루를 하나 주십시오. 가게 안팎을 매일 깨끗이 쓸겠습니다. 화초가게에서 물을 주겠습니다. 화물트럭이 들어오면 짐을 내리는데 돕겠습니다. 나의 그런 공로를 인정하시고 이 다음에 자리가 생기면 나에게 우선권을 주어 그곳에서 내가 일하게 하여 주십시오.”
  
  총지배인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인사책임자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력서가 16통이나 들어와 있다고 완고하던 저들이 이젠 전혀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보석부의 리처드(Richard)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를 완구부(Toy Department)로 보내고 이 사람을 내일부터 보석부(Jewelry Department) 지배인으로 배치하게. 시간당 $4.20 일세.”
  
  그리고 나에겐 “자네는 빨리 가족을 데려오도록 하게”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와! 취직이 되었다. 그때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법정 최저임금이 시간당 $2.50이었다. 사람들이 백화점 점원의 초봉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라고 했다(노크를 해도 문이 열리지 않으면 주먹으로 두들겨라!). 나는 이 백화점에서 2년간 최우수 점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성심성의를 다해 열심히 일했다.
  
  <계속>
[ 2014-10-08, 16:3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