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긴 칼과, 진충보국을 탓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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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사회주의자 내지 故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로 몰기에 혈안이 된 무리들은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말을 마치 일제하의 박정희가 만들어낸 구호라도 되는양 확대재생산하며
  고 박정희 대통령을 억지친일자로 몰아 가는데 써먹고 있다.
  
  과연 그것이 타당한지 살펴보자!!
  
  박정희가 세상에 태어난 해는 이 나라가 일제에 강제 합방되고난 후
  7년이 지난 1917년이다.
  
  이 시기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으며,
  '일장기'가 온 나라를 뒤덮힌 시기에 태어나는 국내의 조선인 모두는
  일본국적으로 태어나고, 일제식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나라 잃은지 근 30년이 지난 시기인 23살 때 박정희는
  소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일제의 엘리트교육기관인 군관학교에 진학을
  꿈꾼다.
  
  이런 그가 출생이후 성장과정에서 보아온 것은
  '태극기 대신 일장기'였고, '애국가 대신 기미가요'를 불러야 했던
  그가 만주의 군관학교를 지원하는 시기는 1940년대 군국주의 일본의
  절정기로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무단정치(1910년대), 유화정책(20년대)에 이은 황국신민화(1930년대 이후)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민중에게는 국가에 충성을 하고자 해도
  충성할 나라가 사리진지 30년이나 지난 시기였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 하고
  1941년 진주만기습공격으로 이차대전을 본격적으로 획책한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기였다.
  
  이 불행한 시기에 박정희가 택한 '만주군 장교의 길'은
  일제하 소학교 교사로 일제식 교육의 전달자로 살기보다는,
  전쟁기 피압박 민족의 일원으로서 일본인 보다 잘되어 그들을 위압할 수
  있는 조선인으로서 일제군인이 되어 더욱 큰 지위에서 올라야겠다는
  포부에서 관비학교인 군관학교를 지원한 것이다.
  
  피압박 민족의 일원으로서 일본인보다도 더 우위를 점해서
  민족적 설음을 그리고 한을 풀수 있는 길로서
  당당히 도전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곳은 일본인도 가기가 힘이 들었던 곳이며,
  결코 친일한다고 해서 갈 수 있었던 곳도 아니었고,
  오직 그만한 실력과 자질이 있어야 갈 수 있었던 곳이다.
  
  나라 잃은 청년 박정희의 경우
  일제 최고의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군관학교에
  진학하여 이왕지사 일제하에 살아야할 운명이라면 조선인으로
  일제에 당당히 맞서 일본인과 실력으로 겨루고,
  나아가 보다 큰 자리에서, 큰 역할로 조선인을 감싸고 보호하며
  수난속의 민족을 위해 소학교 교사보다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소신의 발로에서 결단을 내린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방 후 초기 정부수립시 '반민특위에서 친일분자'로 매김한 정의,
  즉 '민족에게 악랄한 행위를 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데서,
  바로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한 심증을 더 갖게 하며, 이런 견해에 설득력을
  더하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폴의 리콴유가 당시 종주국
  영국의 옥스포드로 진학하여 두서의 성적으로 학교를 마친
  것이나 아편전쟁 후 열강의 반식민지국가로 전략한 중국의
  장개석이 일제의 군관학교로 진학한 것을 가지고
  친영 친일분자로 내몰지 않듯이 박정희를 친일로 내모는 것
  또한 억지뿐임을 증명하는 한 예가 되는 것이다.
  
  당시 일제하 이 나라의 형편을 둘러보면 더욱 이를 잘 이해하게 된다.
  
  박정희 죽이기에 혈안이 된 무리들은 박정희가 친일자임을 덮어 씌우기
  위해, 증거라고 내세워 목을 매달고 울궈먹는 것이 그가 동료교사의 자문을
  구해 '군관학교 지원에 부족한 자질문제를 메우기 위한 한 방편에서'
  이용한 것이 이른바 '진충보국 멸사봉군'이란 혈서 건이다.
  
  이 소동의 허구를 지적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 나라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는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했다.
  
  이것은 자본/물자/노동력/금융/생산/물가 등를 비롯한
  모든 인적/물적/자원을 전쟁수행을 위하여 국가 통제 아래
  두고,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모든 인적/물적/자원을
  침략전쟁에 투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정신적으로 '천황주체설'을 기조로 하는
  국체명칭을 강조하고 모든 것은 천황을 위해 바친다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던 시기이다.
  
  이 운동은 1938년 7월, 즉 중일전쟁 발발 후 1주년이
  되는 싯점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조선연맹'을 주축으로
  더욱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는 데,
  일본에서는 이미 1년전에 시작된 것이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으로
  고노에 내각이 들고 나온 것이고, 주요 골자를 보면,
  
  -거국일치(擧國一致) :
  전쟁수행을 위해 지배층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계급투쟁을 말아야한다.
  
  -견인지구(堅引持久) :
  전쟁수행기간중 고난을 참아야 한다
  
  -진충보국(盡忠報國) :
  충성을 다해서 나라에 보은해야 한다.
  
  -내선일체(內鮮日體) :
  일본과 조선은 하나 라는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조선인 전체를 황국신민화하여 전쟁에 동원할려고
  책동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 나라 방방곡곡에 보편화되어 침투되었던 일제의 정책이었고,
  조선인에게 주입되고 강요되어 일상화된 용어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집요하고 끈질긴 군국주의 동원체제하, 조선인이 일본인화된
  시점 (이 시기 조선인 90%가 창씨개명 등으로 일본인화 완료)에서도,
  
  잊혀진 애국가를 혼자 익히고, (건국초기 육사생도 중 유일하게 애국가
  가사를 기억해 낸 사람은 박정희 혼자였음-전남일보 칼럼),
  
  재능과 자질은 있었지만 군관학교에 진학하기에는 사상적 한계
  (사회주의자인 형 박상희의 민족지 동아일보 지국장 종사 등)가
  있었던 박정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미 그 당시 사회에 보편화 된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말로, '군관학교의 입학요건'에
  맞출려고 한 것이 틀림이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박정희는 자발적인 친일자', 또는 '천황주의자'라고
  몰아부친다면 이것이야말로 억지중에서도 억지일 뿐이다.
  
  조금만 깊게 그 시대의 상황과 정세를 사고하면,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일제하의 나라 잃은 수난과
  고통의 시기에 청년 박정희의 이러한 도전은 당당히 조선인의
  긍지를 살려 뜻한 바를 펼치려고 노력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그가 북의 김일성과 같은 비열한 역사조작의 명수였다면?
  지금도 이 사회에서 그러한 일을 엄청나게 조작해 내는
  무리들과 같은 파렴치를 저지르기로 작심을 하였다면?
  
  그의 독재기에 그가 바라는 과거사에 대한 엄청난 조작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의 과거사에 대한 변명도
  미화도 일체 하지 않았고, 그의 생을 마감했음을 지켜 본
  우리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부끄러움이 없었기에 그의 과거 일제시대의
  행적을 결코 피해갈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은 '역사의 판단'에 맡기며 당당한 삶을 살고 간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고난과 수난의 연속이었고,
  비록 독재라는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애국 애족하며 큰 민족적 족적을 남기고 불행한 최후를 마감한
  분인 것이다.
  
  그가 가고 난 오늘날,
  자의던 타의던 새삼 거론되는 그의 행적에서 더욱 더 돋보이는 현실이다.
  
  그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말아야 한다!!
  그는 결코 친일자가 아니었으며,
  일제강압기에 태어난,
  불행했던 이 민족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다.
  
  만군장교였기에 더 출세했으면, '민족을 탄압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으로
  그를 억지로 매도하겠다면,
  
  그는 만군 장교였기에 장군이 되어, 만주나 이 나라 총독이 되어
  큰 힘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민족을 구하는 큰 일도 능히 할 수 있는
  분이었음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2004-10-16, 10: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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