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伍(낙오)한 부하 둘을 살리고 散華(산화)한 얍 대위
필리핀군 참전비(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97-6)와 율동리 전투 전적비(경기도 연천읍 상리 산 241-24번지)를 찾아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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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서북쪽 출구인 은평구 진관동인 구파발 삼거리를 지나 1번 국도인 통일로로 들어서 삼송리 고개를 넘으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통일로 IC’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 임진각 방면으로 3km쯤 가면 우측 도로변에 필리핀군 참전비가 나온다. 이 부근 버스정류장 이름도 ‘필리핀 참전비 앞’이다. 9710, 9709번 버스가 서울과 연결된다. 주차장도 50대 이상 세울 만큼 널찍하다. 앞이 탁 트여 있어 眺望(조망)이 좋다.
  
  
  
  필리핀군 참전비는 주변 면적도 1200평 규모로 넓고 기념물도 큼직하다. 기단 높이가 4.5m, 碑(비)의 높이는 17m. 조각상 높이는 3m. 1층을 감상하고 2층에 올라가 또 봐야 할 정도로 조각 작품의 규모가 크다. 아래측엔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우리 국민 50명의 모습을 浮彫(부조)로 만들었다. 碑文(비문)은 간결했다.
  
  
  
  
  
  <태양같이 밝고 불타는 정열의 기상을 지닌 삼성좌의 용사들! 한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흘린 468명의 고귀한 영혼을 위해 하나님의 가호가 영원하리라.>
  
  비문中 ‘삼성좌(三星座)’란 뜻을 몰라 찾아보니 필리핀 국기에 새긴 세 별(루손섬, 민다나오섬, 비사얀제도)로 즉 필리핀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참전비에는 ‘참전略史(약사)’도 새겨졌다.
  
  
  
  ‘필리핀 지상군 1개 대대 전투단은 1950년 9월19일 정의의 십자군으로 파한되어 용전분투하다가 1955년 5월13일 본국으로 개선한 나라이다. 여기 두 나라의 국민과 후손들에게 그 뜻을 전하고자 그들의 찬란한 전력과 지휘관들의 이름을 새긴다’는 글귀 아래 ‘1950년 8월7일 - 필리핀 정부 한국전 파병 결정’에서 ‘1955년 5월13일 - 귀국 개선’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戰歷(전력)을 담았다. 그 밑에는 ‘초대 - 대령 마리아노 아쥬린(MARIANO AZULIN)’ 등 역대 지휘관의 이름이 적혔다. 참전비는 1974년 10월2일 건립됐고 조각가인 故(고) 李逸寧(이일영) 선생의 작품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국가 ‘필리핀공화국’이 출범했다. 오랜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同病相憐(동병상련)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독립국가로 출범한 이후에도 공산 반란군에 시달리고 있기에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유엔의 군사원조 요청이 있자 신생 필리핀공화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대대 규모의 필리핀군은 1950년 9월 20일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부산에 도착했다.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반격 작전이 수행되면서 병력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필리핀 대대는 10여일 간의 적응 훈련을 마치고 후방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어 美3사단에 배속돼 개성~평양 간의 주 보급로 경계작전을 수행하다 중공군 개입으로 경북 김천으로 철수했다. 1·4후퇴 뒤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다시 전개되자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전투에 참가해 큰 戰功(전공)을 세웠다. 특히 전곡 진상리 전투(1951년 4월 11일), 연천 율동 전투(51년 4월22일), 적성 설마리 글로스터대대 구출작전(51년 4월24일), 철원 에리고지 전투(52년 5월18일), 양구 크리스마스고지 전투(53년 7월 15일)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참전기간 중 戰死(전사) 112명, 부상 229명, 실종 16명, 포로 41명의 피해를 입었다.
  
  
  
  
  
  
  주요 전투를 소개한다.
  
  *개성-평양 주보급로 경계작전(1950. 11. 1~27)
  필리핀 대대 전투단은 1950년 9월 부산에 도착하여 밀양-사천-왜관 부근에서 후방지역 경계작전을 실시하였으며, 11월 1일에는 평양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부터 개성에 이르는 유엔군의 병참선 경계작전을 수행하였다. 필리핀 대대 전투단은 이 개성-평양 주보급로 경계작전 기간중인 11월6일 미우리(신계 남쪽 5km) 부근에서 북한군과 교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며, 또 11월12일에는 신막과 신계간의 보급로를 차단한 북한군의 게릴라를 공격하여 은점리 부근에서 이들을 격퇴하였다.
  
  *율동 전투
  이 전투는 필리핀 제10대대 전투단이 美제3사단에 배속되어 연천 북방 율동에서 중공군 제34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4월22일 야간에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맞이하여 인접부대가 돌파되고, 대대의 우측중대와 중앙중대의 일부 陣地(진지)가 돌파되어 대대본부 지역까지 중공군이 침투하였으나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여 인접부대의 철수를 성공적으로 엄호하였다. 이 전투의 영웅은 특수중대의 얍 대위였다. 그는 자신의 진지를 중공군에 빼앗기고 예비진지를 점령해 역습 기회를 노렸다. 미군 지휘소에선 후방 철수를 지시했으나 통신상태가 나빠 필리핀 특수부대는 철수를 못했고 중대장인 얍 대위는 자신이 1개 분대를 이끌고 중공군이 점령한 고지로 쳐들어가 그곳에 낙오돼 숨어있던 두 명의 사병을 구출했다. 얍 대위는 철수과정에서 총을 맞아 전사했다. 필리핀 정부는 그에게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필리핀 대대가 진지를 사수해준 덕에 터키여단과 미군부대의 주력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필리핀군은 이 전투에서 전사 12명, 부상 38명, 실종 6명의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의 戰死傷者(전사상자)는 500여명으로 필리핀군이 치른 전투중 戰果(전과)가 가장 큰 전투였다.
   경기도 연천읍에서 북서쪽으로 3km쯤에 위치한 상리 산 241-24번지에 ‘율동리 전투 전적비’가 나온다. 야트막한 구릉에 축산농가들이 드문드문 붙어있는 마을의 도로변이다. 碑文(비문)엔 ‘자유와 세계평화를 위해 이 땅에서 공헌한 영웅적인 비율빈 용사들에게 바친다’는 글이 적혀 있다. 350평 정도 묘역에 기단높이 1.39m, 탑신높이 1.64m 규모로 연천군민 및 유엔한국참전협회가 1966년 4월 22일 건립한 작고 깨끗한 비석이다. 다섯 대 정도 주차공간이 있는데 주차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백석산-크리스마스 고지 전투(1953. 7. 15~18)
  이 전투는 필리핀 제14대대전투단이 백석산에서 美제34사단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를 지원하고 그 부근 前哨(전초)진지를 점령하여 중공군과 벌인 전투이다. 美제45사단 제180연대는 중공군이 휴전을 며칠 앞두고 실시한 ‘7·13공세’로 7월 15일 크리스마스 전초고지를 상실하자 곧 예비중대로 역습을 실시하였다. 이때, 필리핀 대대는 이 중대의 역습을 지원하여 크리스마스 고지를 회복하고 중공군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그 후, 대대는 동 고지의 우측 1.3km되는 지점에 전초진지를 편성하여 방어하고 있던 중, 7월 18일 야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격퇴하였으며, 휴전이 될 때까지 이 전선을 고수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크리스마스(남쪽 1090고지 부근) 고지가 군사분계선 남쪽에 속하게 되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20, 14: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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