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호랑이’란 별칭을 얻은 ‘포크찹 高地’ 전투
타일랜드군 참전비(경기 포천군 영북면 문암리 산24-2)를 찾아 “안내판, 화장실, 참전비 묘역 관리상태 최고 수준”

金東鉉(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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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의정부를 지나 포천방면 43번 국도를 이용해 北進(북진)하면 포천시가 나온다. 市 외곽 순환도로를 따라 운천·철원 방면으로 23km쯤 北上(북상)하면 도로변 우측에 타일랜드군 참전비가 나온다. 중간에 38선 휴게소도 통과하고 각종 군부대도 자주 나타나 전방지역에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타일랜드군 참전비는 도로 곳곳에 안내판(‘태국군 참전비’라 쓰여 있음)도 잘 설치돼 初行(초행)인 사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참전비 안내판을 따라 들어가면 50여 대 이상 주차를 할 수 있는 너른 공간이 나온다. 공중화장실도 관리상태가 좋아 깔끔하다. 참전비는 주차장 위 언덕에 있는데 90계단을 걸어올라가야 한다. 흰 돌의 基壇(기단)이 옆으로 30m쯤 길게 놓였고 왼쪽엔 소총 개머리판을 상징한다는 흰 기둥 세 개가 12m 높이로 솟았다.
  
  
  
  
  기단 오른쪽으로는 양복을 입은 남자와 軍人(군인)의 어깨동무한 모습이 조각돼 있다. 참전기념비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타일랜드의 육·해·공군 용사들! 여기 그들의 마지막 주둔지에 피 흘린 1296명의 뜻을 같이 새긴다.”는 碑文(비문)이 한글, 타일랜드어, 영어로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 참전비는 1974년 국방부가 제작했고, 남산미술원장을 지낸 조각가 李逸寧(이일영·2001년 作故)씨가 조각했다.
  
  
  
  참전비의 오른쪽엔 30평 규모의 타일랜드 불교식 사찰이 있다. 1994년 타일랜드국왕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태국에서 건물을 지어 이곳에 기증했다는 내용이 안내문에 적혀 있다.
  
  
  
  참전비가 있는 경내는 조경이 잘 되어있다. 잔디가 잘 자랐고 곳곳에 심은 나무들도 정돈이 돼 있었다. 訪韓(방한) 기간중(1999.4.26) 이곳을 방문한 추안 릭파이 타일랜드 수상과 비차이 바나신 駐韓(주한) 대사, 이진호 포천군수가 ‘태국군 용사 참전 50주년’(2000년)에 맞춰 기념식수해 놓은 표석도 보였다.
  
  한국전쟁 때 타일랜드는 유엔의 한국 지원 결의에 동의했으며 아시아에서 최초로 지원 의사를 표시하고 육군 1개 대대를 비롯해 함정 3척, 의료지원 3개 반 등 많은 장병과 장비를 파견시킨 국가이다. 타일랜드군은 1950년 부산으로 입항해 평양, 개성을 거쳐 유엔군의 철수 작전을 엄호하였다.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는 제8군의 작전 통제하에, 타일랜드 해군은 美 극동 해군사령부의 작전 통제하에 작전을 실시하였다. 타일랜드 공군은 그보다 11개월 후에 파병이 결정되어 1개 수송기 편대가 1951년 6월 23일 일본에 도착한 후 6.25전쟁에 대한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하였다.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는 약 4개월간 유엔군의 전선 후방에서 병참선 경계 및 對게릴라 작전을 수행한 후, 1951년 3월부터 전방 지역 작전에 투입되었다. 각종 전투 및 공비 토벌, 보급 물자 수송, 전상자 치료를 담당하였고, 금화전투에 참전하는 한편 평야 지대에서 중요 보급소를 보호하였으며 유격태 소탕에도 일조하였다. 의정부에서는 여러 개의 고지를 점령하고 휴전 후에는 포천지구에서 경계 임무를 맡기도 했다.
  
  휴전 후, 타일랜드 해군은 1955년 1월에, 공군은 1964 11월에 철수하였으며, 지상군은 1개 중대를 잔류시키고 1954년에 철수하였다. 일부 잔류부대는 1972년 6월에 철수하였다. 한국전쟁 때 타일랜드군은 전사 129명, 戰傷(전상) 1139명, 실종 5명의 손실을 입었다. 타일랜드군의 戰歷(전력)을 소개한다.
  
  *연천지역 방어(1951. 7. 31~9.7)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는 美제1기병 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7월31일부터 9월7일까지 연천 북방 율동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기간중 이 대대는 주 저항선 전방에 前哨(전초)를 운용하면서 적의 전초 진지에 대한 정찰전을 실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8월18일에 실시한 정찰에서는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 부대를 발견하고 이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 대대는 9월7일 예비 임무로 轉化(전화)하였다.
  
  *포크찹 高地 전투(234고지, 연천 서북쪽 20km, 1952. 11.1~11)
  이 전투는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가 美제2사단에 배속되어 연천 서북쪽 주 저항선을 방어 중 중공군 제113사단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이다. 중공군은 1952년 11월1일, 11월7일, 11월10일 야간 공격으로 포크찹 고지의 방어 시설물을 파괴한 다음, 중대·대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3회에 걸쳐 234고지를 공격하였다.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도 연대 및 사단의 지원화력을 이용하여 중공군 공격 제대의 진출을 차단하면서, 돌격해온 중공군을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쳐 이 前哨(전초) 고지를 지탱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는 그 용감성을 인정받아 ‘작은 호랑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으며, 중공군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유엔군에 심어 주게 되었다.
  
  *김화 351고지 전투(김화 서북쪽 10km, 1953.7.14~27)
  이 전투는 타일랜드 지상군 대대가 평강과 김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351고지에서 중공군 제16병단(제46·제47)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타이 대대는 1953년 7월13일 미 제2사단의 일부로서 사단의 전초 진지인 351고지에 투입되었으며, 7월14일부터 7월27일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사단 지원 화력의 엄호하에 근접전을 치르면서 이들을 격퇴하고, 7월27일 휴전이 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평강-김화 축선상의 주요 지형인 351고지가 휴전선 남쪽에 포함되었다.
  
   글: 金東鉉(조갑제닷컴 기자)
   사진: 金永勳(프리랜서)
[ 2010-03-18, 15:2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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