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예멘의 통합과 內戰
통일이 단순한 병합과정이 아니라 이질화한 체제를 하나로 통합하는 장기적 과정임을 망각한 대가는 內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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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注: 다음은 월간조선 2003년 1월호 별책부록 '한반도의 대전환'에 실렸던 柳志鎬 前 駐예멘 대사의 예멘 통일사례 분석이다. 최근 연방제 事變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남북 통일을 단순한 병합과정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예멘의 통일사례를 설명한 柳 前대사의 글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돼 여기에 올린다.]
  
  
  
  南·北 예멘 통일사례 연구
  
  合意 통일 뒤 內戰으로 무력 통일
  
  南·北 예멘의 수뇌들은 두 정부 간의 기계적인 병합을 일단 이루어 놓기만 하면, 그 다음에 올 통합과정은 무난하게 진행될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은 기계적인 두 정부 간의 단순한 병합과정이 아니라 반세기 동안 이질화한 두 남북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장기적 과정임을 망각한 대가는 內戰이었다.
  
  柳志鎬 前 駐예멘 대사
  1933년 충북 제천 출생. 고려大 생물학과 졸업. 한국일보 논설위원·駐日 대사관 공보관·외무부 대변인·駐 西베를린 총영사·駐예멘 대사·외무부 본부대사·한국국제교류재단 상임감사 역임. 現선문大 객원교수.
  
  
  영토적 분단은 151년, 정치적 분단은 23년
  
  1990년 5월22일, 협상 끝에 南·北 예멘의 평화통일이 선포되었다. 南·北 예멘의 수뇌들은 국민적 염원을 실현시킨 주역들로서 국내외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정치적 갈등과 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몰고 온 사회적 혼란과 경제난 등이 원인이 되어 통일 예멘은 남북으로 갈려 內戰(내전)을 겪어야 했다. 남쪽의 분리 기도가 북쪽에 의해 무력으로 분쇄됨으로써 가까스로 再분단을 막을 수 있었지만, 통일과도기의 실패를 노정시킨 셈이 되었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는 예멘式 정치협상에 의한 통일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예멘 통일사례에 대한 평가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멘의 분단은 영토적 의미에서는 영국이 1839년 아라비아 반도 남서단의 아덴 항구를 강점한 시점에서 南北 통일이 선포된 1990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세기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분단은 南예멘이 존속했던 1967년부터 1990년까지 23년간에 불과했다.
  南예멘보다 약 半세기 전에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했던 北예멘은 영국 식민통치下에 있던 南예멘의 독립운동을 선동하고 정신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南예멘이 독립했을 무렵에는 內戰 때문에 남쪽의 신생 정부와 통일 문제를 협의할 겨를이 없었다.
  
  
  분단 기간 중에도 內戰 반복
  
  비교적 짧았던 정치적 분단 기간 중에도, 두 차례에 걸친 南·北 예멘 간의 전쟁과, 그 前後 南·北 예멘 내부 문제에서 일어났던 내전들은 南·北 예멘 간의 긴장과 불신을 증폭시켰다.
  첫 內戰은 1962년 北예멘에서 일어났다. 北예멘 군부와 이집트군, 南예멘 지원병, 소련 등의 배후세력을 포함하는 「共和派」 진영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이맘(이슬람 종교지도자)의 部族 民兵, 즉 「王黨派」 간의 내전이었다. 이집트가 1967년 6일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예멘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예멘 내전은 사실상 사우디 아라비아 주도로 수습되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北예멘의 戰後復舊(전후복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공화파」 중앙정부와 사실상 독자적 사법권 등을 향유하고 있는 「왕당파」 부족세력에 대해 개별적으로 경제 원조를 제공했다.
  이렇게 北예멘의 내전이 사실상 종결되었을 무렵, 南예멘은 이미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소련에 기울고 있어 北예멘과 이념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北예멘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군수 지원 아래 1972년 南예멘에 대해 先制공격을 감행, 제1차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아랍연맹의 중재 덕분에 두 주 만에 休戰(휴전)이 이루어졌다. 이어 南·北 예멘의 頂上들은 아랍연맹 주선으로 열린 첫 頂上회담에서 통일원칙에 전격 합의했다.
  이렇게 시작된 통일을 위한 南北대화는 1979년 제2차 南北전쟁으로 중단될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제2차 南北전쟁은 소련 원조로 강화된 南예멘이 게릴라들을 앞세워 北예멘의 국경지대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났다. 南예멘이 우세했던 제2차 南北전쟁도 아랍연맹의 중재로 단기전으로 끝났고, 南北대화를 再開(재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北예멘의 살레 정권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석유 발견, 部族 세력에 유익한 지방의 도로 및 학교 증설, 국민회의당의 창당과 첫 선거 실시, 그밖의 部族 세력과의 관계개선에 주력하여 1960년대 초 공화국 체제 출범 이래 처음으로 경제 및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자신감을 얻은 살레는 실용주의 정책을 추구하는 南예멘의 모하메드 나세르 대통령을 상대로 제2차 南北전쟁으로 중단되었던 남북대화를 부활시키는 의욕을 보였다. 그 덕분에 1986년 1월 南예멘 대통령이 親衛 쿠데타의 실패로 失脚(실각)할 때까지 兩 頂上은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兩 국민 간의 人的 왕래가 허용되었고, 석유매장이 집중되어 있는 국경지대에서 경비병 간의 우발적인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도 정상 간의 신속한 접촉을 통해 위기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1986년 南예멘의 정변은 모하메드 나세르가 이끄는 온건·실용주의 세력과 이스마일 사회당 총서기가 이끄는 강경·마르크스주의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에서 촉발된 것이었다. 그 결과 4300명이 사망하고, 당시 외국 원조 총액과 맞먹는 1억4000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내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강경파 정치국원인 알리 알비드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알비드 정권으로 하여금 複數(복수)정당제 및 부분적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을 간접적으로 유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알비드의 南예멘 사회당 총서기가 2년 후 北예멘과의 본격적인 통일협상에 앞서서 어느 정도의 체제개혁을 단행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南·北 예멘의 최고 권력자들은 1989년 11월 말 아덴에서 통일헌법案에 합의하고 헌법 비준절차를 거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는 많은 예멘인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그 결정이 그대로 실천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에 서둘러 통일협상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北예멘의 일방적 양보
  
  통일을 주도했던 北예멘의 경우, 살레 대통령 정부는 영향력이 막강한 部族세력을 통일협상에서뿐만 아니라, 3년간의 통일 과도기 聯政(연정)에서도 통일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제했다. 이들 부족세력들은 이슬람교와 私有재산을 부정하는 南예멘 사회당 정권과 타협하여 권력을 分占하려는 살레의 움직임에 은연중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예멘 통일을 반대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北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이처럼 통일을 서두른 것은 당시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상황을 통일의 호기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南·北 예멘의 수뇌들은 두 정부 간의 기계적인 병합을 일단 이루어 놓기만 한다면, 그 다음에 올 통합과정은 무난하게 진행될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통일 과도기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北예멘 지도부가 통일 과도기 설정에 선뜻 합의했던 주된 까닭은 南예멘 측의 요구조건들을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하루 빨리 통일협상을 타결시키고자 하는 살레의 의욕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인구 면에서 北예멘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南예멘은 통일헌법에 따라 6개월 후에 총선을 실시할 경우 승산이 없을 것으로 보고 총선에 대비할 과도기의 설정을 요구했다
  병합에 대한 합의 도출을 중시했던 만큼 양측 수뇌들은 과도기 聯政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분야에서 이질화한 제도와 관행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사전 협의를 하지 못했다.
  北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南예멘의 알비드가 제의한 과도기 설정, 聯政에서 부족 세력 제외, 과도 기간 중 50對 50의 권력 分占, 야전군의 통합 유보 제의를 수락했다. 兩 頂上들이 통일헌법 마련에 합의한 1989년 11월30일부터 통일이 선포된 1990년 5월22일까지 본격적인 협상 기간은 거의 대부분 행정부 고위직 안배를 논의하는 데 소비되었다.
  聯政의 최고정책결정 기구인 5人 대통령 평의회는 北예멘 출신 세 명, 南예멘 출신 두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장일치에 의해 의사를 결정했다.
  과도기 聯政의 권력구조가 4對 1의 인구 격차(北 950만 명, 南 240만 명)를 비례적으로 반영시키지 않은 것은 北예멘 측의 일방적인 양보였음이 분명하다. 이보다 더 큰 살레의 양보는 통일에 반대하는 南예멘 군부를 무마할 필요가 있는 알비드의 사정을 고려하여 야전군 통합을 과도기로 넘기기로 한 결정이었다.
  
  
  총선에서 패배하자 전에 거절했던 연방제 들고 나와
  
  과도기 끝에 실시된 1993년 4월27일의 총선거 결과, 南예멘 사회당은 北예멘 출신 살레의 국민회의당과 부족세력의 이슬람黨에 이어 3위로 전락했다. 南예멘 출신 알비드는 통일협상 과정과 통일 후 聯政에서 배제되었던 부족세력이 대통령위원회, 내각 및 국회에서 사회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한 선거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 곤란했다.
  사회당의 선거결과 불복으로 야기된 憲政 위기는 살레 대통령의 양보로 5人 대통령위원회의 제1당에 배당될 세 자리 중 한 자리를 제3당에 돌리게 함으로써 해소되었다. 각료 수 배정을 둘러싸고도 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조각은 1개월 이상 지연되었다. 국민회의당과 사회당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사회당 총서기 겸 부통령인 알리 알비드는 거처를 수도에서 아덴으로 옮기고 새로운 3당 聯政 참여를 사실상 거부했다. 국내 원로 집단과 오만 등 근린왕국들에 의한 중재노력은 무위로 그쳤다.
  사회당 수뇌부가 살레 대통령에게 제시한 최종적인 수습책에는 聯邦制(연방제)로의 체제 전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살레 대통령에 의해 묵살되었지만 그러한 제의가 통일협상 당시 北측에 의해 이루어졌다가 南측에 의해서 거절되었다는 점에서 3년 반 만에 연방제에 대한 평가가 反轉(반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초 북측이 넌지시 제의했던 연방제에 의하면 국방, 외교 및 국내 치안 기능을 연방정부 소관으로, 지방 행정부를 포함한 기타 정부 부서 기능은 남북의 지역정부 소관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연방제下에서는 북쪽 지역정부 관할하에 있는 지역에서 사회당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에 거북할 수 있었다. 군부에 대한 통제권의 移管, 군부 통합, 減軍(감군) 등 南예멘 군부에 불이익이 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반대할 수 없다는 것도 南예멘이 연방제를 거부했던 이유였다.
  
  
  北예멘, 군사력으로 南예멘의 再분단 시도 좌절시켜
  
  이런 상황에 1994년 초부터 근접한 南·北 예멘 야전부대들 사이의 무력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무력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양측은 통일협상에서 南예멘 측이 3개 정예여단을 北예멘 수도 외곽 40km 지점에, 그리고 나머지 두 여단을 국도 근방에 각각 주둔시키는 대신 北예멘 측은 3개 여단을 南예멘 수도 외곽 40km 요충지대에 배치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北예멘 지역에 마련된 南예멘軍 부대 근방에는 北예멘軍 부대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南예멘 지역에 배치된 北예멘軍 부대 근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병력배치의 결정은 통일에 합의한 단계에서도 상호 불신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1994년 예멘 內戰을 검토한 한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북측은 남측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기 전에, 北예멘 지역 내에 배치되어 있던 5개 여단의 南예멘 병력을 전부 無力化했다고 한다. 北軍이 처음부터 공세적인 전투를 벌인 데 비해 南軍이 시종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던 점으로 미루어 北軍이 南軍의 분리기도를 무력으로 분쇄하기 위한 작전을 면밀히 계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南軍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 아래 유엔평화유지군의 개입을 유도하여 일정線에서의 휴전선 설정으로 再분단을 획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미국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평화유지군 파견 구상에 호응하지 않고, 北예멘이 군사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다음에 간단히 열거하는 네 개항의 예멘 통일사례의 시사점은 2003년 2월에 취임할 차기 대통령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통일은 기계적인 두 정부 간의 단순한 병합과정이 아니라 반세기 동안 이질화한 두 南北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장기적_예기치 못하는 상황 변화에 대해서도 수시 신축성 있게 적응할 수 있는-과정이라는 인식을 확산, 정착할 필요가 있다.
  둘째, 평화적인 협상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일부 주장은 南·北 예멘의 통일 경험에 비추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셋째, 이질화한 분단국들이 평화적으로 상대방의 이익과 특수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면서 政體를 합치는 데 있어서 聯邦制가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느슨한 聯邦制나 국가연합의 경우일지라도 양측은 최소한 의회민주주의와 複數정당 제도를 어느 정도 확립해 놓지 않고서는 깨질 위험이 크다.
  넷째, 예멘 통일이 초기 통일 협상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후의 통합과정에서 실패했던 가장 큰 요인은, 통일 협상이 끝난 후에도 국내외 통일반대 세력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등한히 한 데에 있었다. 통일협상 과정에서 超黨的 지지 확보는 협상력을 높이고, 통일 후 국민 화합을 위해서도 긴요하다.●
출처 : 월간조선 2003년 1월호 별책부록
[ 2006-02-01, 10: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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