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기 연재/동해안 공비 침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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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 승무원 석방
  
  1968년 5월8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에서 북한측 대표 朴重局은 미국측 대표 우드워드 소장에게 미국이 서명해야 할 사과문 초안을 제시했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푸에블로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해에서 나포되었으며 푸에블로호는 여러 번 공화국의 군사 및 국가 정보를 염탐하여왔다.
  ·미국 정부는 미국 선박이 북한 영해에 들어온 이후 자행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 대한 간첩행위에 대해서 사과하고 전적인 책임을 지며 앞으로는 영해를 침범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미국 정부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이 그들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정직하게 자백했고 미국 정부의 사과와 보장이 있었음을 고려하여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정부가 승무원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진지하게 요청한다>
  북한측 대표 박중국은 『미국측이 이런 내용의 문서를 제출한다면 승무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방도가 쉽게 강구될 것이다. 우드워드 장군이 다음 회의 때 준비한 문서를 갖고 나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우드워드 장군은 『우리가 제출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문서와 너무나 다르므로 상부에 북한측의 문서를 올려보겠다』고 답했다.
  1968년 5월17일 워싱턴을 방문한 쿠즈네초프 외무차관을 맞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푸에블로호 문제 해결에 소련의 협조를 요청했다. 러스크는 『우리가 하지도 않은 행위, 즉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서 사과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군의 비무장 지대 침
  범사태에 대해 언급하면서 소련이 평양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상황을 냉각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同席했던 駐蘇미국 대사 볼렌은, 미국은 소련을 포함한 제3국에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넘겨주어 그곳에서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도 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쿠즈네초프 차관은 당장 답을 해줄 수는 없다면서 이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석했던 駐美소련대사 도브리닌은 북한이 제공한 푸에블로호 승무원 관련 영화를 봤는데 북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만약 승무원들이 북한측
  에 대해 진술한 이야기와 같은 내용을 미국 정부측에 보고했다면 사과할 용의가 있지만 강박 상태하에서 이뤄진 그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계산된 어투로써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최대한의 무력으로써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
  다.
  미국 국무부는 1968년5월18일 존슨 대통령의 內諾을 받아 북한에 기묘한 제안을 했다.
  내용인즉, 북한측이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넘겨주면 미국측 대표가 북한측이 준비해온 승무원 신병 인수서 겉장에만 서명을 한다. 북한측은 겉장 뒤에 붙어 있는 사과 및 재발 방지 약속 내용을 들어 미국측이 사과했다고 발표하고 미국측은 우리가 사인한 것은 신병 인수서
  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세우자는 묘책이었다.
  이런 제안이 발전하여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 교섭은 기묘한 결말을 보게 된다. 1968년 12월23일 오전 9시 판문점에서 미국 대표 워드워드 장군은 북한측 대표 박중국과 마지막으로 만났다. 우드워드 장군은 미리 준비해간 성명서를 읽었다.
  「푸에블로호에 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그동안 판문점에서의 협상과정에서, 그리고 공개적으로 일관되게 공표된 것처럼 이 배가 불법적인 활동에 개입 하지 않았다는 것,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에 이 배가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는
  행위에 대해서 사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본인이 서명하려고 하는 문서는 북한측이 작성한 것으로서 上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나의 서명으로 인해 사실이 달라질 수는 없다. 나는 승무원들을 석방시킬 목적으로 오직 그들을 풀어주는 목적으로 서명할 뿐이다」
  우드워드 장군이 서명한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푸에블로호의 북한 영해 침범을 인정, 사과, 재발 방지를 약속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미국측은 서명 전의 성명을 통해서 이 내용을 부정한 셈이다. 다만, 승무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서명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미국측은 12월17일에 丁一權 국무총리에게 미리 이런 절차에 대해서 설명했고 丁 총리는 見을 내지는 않았다.
  12월23일 오전 11시31분 82명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한 사망자(호지스 수병)의 棺을 들고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귀환했다. 함장인 부커 중령이 귀환 해군사병 행렬의 맨앞장을 섰다. 우드워드 소장은 기자들에게 『북한측에 오늘 아주 작은
  양보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판문점 지역에서 북한측은 승무원들이 석방되기 전에 말한 『석방해주어서 감사합니다』란 영어 및 한국어 인사를 확성기로써 되풀이해서 선전 방송했다.
  이날 석방된 부커 함장은 판문점내 미군 하사관 식당에서 마련된 기자회견에서 『우리 배는 육지로부터 13해리 떨어져 항행했기 때문에 영해를 침범한 사실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포되기 전 비밀장비를 파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부커 함장은 구타당한 사실도 폭로했다.
  『그들은 보통 주먹으로 때렸으나 가끔 곤봉으로 팼으며 축구를 잘 해서 그런지 발길질로 세 차게 고문하기도 했다. 나 자신은 주먹으로 입을 한번 맞은 것을 비롯, 두 번 호되게 맞았다. 그들은 툭하면 집단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때렸다. 지난 주일만 해도 우리 승무원들의 약 반수가 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했으며 석방되는 오늘도 매를 맞았다. 그들은 내가 알고 있는 인간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12월24일에 캘리포니어 샌 디에고 미라마 해군기지로 보내졌다.
  이곳에서 승무원들은 다음해 1월10일까지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이 조사를 토대로 하여 해군 심리법원은 푸에블로호의 부커 함장과 부함장 스티븐 해리스를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상부에 건의했다. 혐의는 정보함을 적절히 보호하지 못한 점, 북한측이 이 배를 북한측 항구로 끌고 갈 때 비밀문서와 장비들을 파괴하지 못한 점, 그렇게 하도록 승무원들을 훈련시키지 못한 점, 이 비밀문서 및 장비들이 적의 손에 넘어가도록 한 점들이었다. 이 심리법원은 또 일본 주재 미 해군 사령관, 태평양 海域司의 해군 보안 부대 책임자들도 군법회의에 넘길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해군 장관 존 채피는 심리법원의 이 건의를 묵살하고 군법회의에 아무도 넘기지 않도록 조치했다. 승무원들의 경우 이미 북한에서 억류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겪었으며, 이 배에 대한 공격과 나포를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책임을 그들만이 질 문제는 아니란 것이었다.
  미국 CIA, DIA(국방부 정보국), 육해공군 정보국, NSA(국가보안국) 등 정보기관들은 푸에블로호의 비밀장비와 문서들이 북한에 넘어간 것이 앞으로 국가 保安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면밀해 조사했다. 푸에블로호는 나포되기 전 약8000통의 메시지를 수신했는데 이것
  이 북한 손에 넘어갔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정보 수집 체계에 대한 정보는 넘어갔으나 암호 해독 기능은 보호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푸에블로호에 실린 비밀장비용의 암호를 해독 하려면 암호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정보는 넘어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85년에 미국 해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소련 간첩망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18년 동안 암호 해독 열쇠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를 소련측에 넘겼다. 공산권은 이 암호열쇠로써 푸에블로호의 암호장비와 암호문을 풀 수 있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1969년 미국 의회는 외국군에 의한 공격과 나포를 당하지 않을 정도의 보호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보수집함(비행기)을 위험 지역에 보내서는 안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69년에 들어가서 푸에블로호型의 정보함은 모두 일선에서 退役했다.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사건
  
  1968년11월8일 미 국무부의 정보 조사국장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정보보고를 올렸다.
  <11월1-3일에 한국의 동서해안에 북한 무장병력이 침투했다. 이 사건은 올해에 중단되었던 북한의 연안 침투가 재개되었음을 뜻한다. 서해안의 瑞山 부근서 두 명의 공비침투가 목격되었다. 이날 늦게 이 지역을 수색하던 한국군은 두 명을 사살하고 다이나마이트를 발견
  했다. 2일 뒤 비무장지대에서는 일련의 총격전이 발생했다. 한 사건은 북한의 소대급 부대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두 사건은 동해안의 허리 부분에서 감행된 상륙작전으로부터 한국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도발이었다. 11월2일 저녁에 한 척의 선박이 목격
  되었으나 저지당하지 않고 동해안 울진 부근에 공비들을 상륙시켰다. 다음날 무장한 북한군은 白晝에 작은 마을을 점령하여 주민을 모아놓고 선전 선동 시간을 가졌으며 돈을 나눠주었다. 이 돈은 나중에 위조지폐임이 밝혀졌다. 마을 사람 네 명이 살해되었다. 한국군은 이 지역을 포위하고 11월8일 현재 8명을 사살했다. 지형이 험하여 작전을 어렵게 만들고 있으나 한국군은 침투병력 전부를 소탕할 자신이 있다고 한다. 침투 병력에 대해선 異說이 있다. 30명이란 說과 총60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상륙했다고도 한다(그 후의 조사에 의해서 120명이 상륙했고 그 가운데 107명이 사살되었으며, 7명은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겨울 추위로 죽은 것으로 추정). 이 작전은 월남형의 게릴라전이 겨울에 가능한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까지로는 동해 침투작전이 현지 주민들로부터 전혀 협조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비협조는 남한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려는 북한측의 노력에 항상 흠이 되어왔다>
  11월16일 미국의 태평양 지역 사령관은 미 합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김일성은 한국식의 베트남 전략을 남한에 대해서 실시하려는 것 같다. 처음으로 우리는 비무장 지대에서의 도발과 함께 후방지역에서의 冬季 게릴라전에 직면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에 게릴라전의 인프라를 구축하려 한다. 나는 남한 당국이 우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김일성의 도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럴수록 김일성은 더 대담한 공격을 할 것이고 이것이 남한 정부를 자극하여 (우리와 협의없이) 일방적인 보복전에 나서게 할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은 월남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활용하려 할 것이다. 월남에서 대결이 끝나고 우방군대가 철수하여 남한의 군사력이 다시 증강된다면(한국군이 복귀하여) 김일성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안된다」는 조급증으로 해서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할려고 할지 모른다. 그는 군사적으로 강력한 입장에 있으나
  혼자 힘으로 남한을 점령할 힘은 없다. 그가 오판할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나는 그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인간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가 공개적인 도발을 함으로써 국가와 그 자신에 큰 타격을 가져올 위험성이 적어도 그를 자제케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는 赤化통일
  의 시간이 달아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우리는 한국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다>
출처 :
[ 2001-10-29, 15:3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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