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 민간인 피납자,피살자 통계

민간인 피납자 80661명,민간인 피살자 59964명

  
  
  6.25 전쟁 때 민간인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이승만 정부가 조사한 '6.25事變 被拉致者(피납치자) 名簿(명부)'에 따르면 8만 661명이 전쟁 기간 중 납북됐다. 6.25때 좌익이 학살한 민간인 피살자는 총 5만9964명에 달한다. 이 자료 역시 이승만 정부가 취합한 것이다. 이 자료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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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굴 특종] 국가 작성 6·25 拉北者 8만 명 名簿 발견!(월간조선 2002년 2월호)
  
  
  
  
  
  金成東 月刊朝鮮 차장대우 (ksdhan@chosun.com)
  
   「서울特別市 被害者 名簿」 피해자 명단 4616명 수록
  
  
   李承晩 政府가 6·25 전쟁 당시 北韓에 의해 拉致된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해 문서로 남겼으나 납북가족 문제를 다루는 주무 부서인 통일부는 그런 문서들이 작성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민간인 拉北者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문서들이 발견됐다. 李承晩 정부의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特別市 被害者 名簿」와 작성처를 大韓民國 政府라고 밝힌 「6·25 事變 被拉致者 名簿」가 그것이다.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特別市 被害者 名簿」는 표지 하단에 「공보처 통계국」으로 표기되어 있어 정부가 작성한 문건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문서 표지 상단에는 「檀紀 4283年 自6月25일 至9月28日(6·25 事變中)」이라고 적어, 조사 대상이 된 피해 발생기간을 밝히고 있다. 6·25 전쟁 발발 직후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의 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 명단을 조사한 것이다. 발행일이 檀紀(단기) 4283년(1950년) 12월1일로 되어 있는 被害者 名簿(피해자 명부)는 중구, 종로구 등 서울시내 9개 區廳(구청)별로 조사한 명단을 담당 공무원이 漢字로 일일이 적어 謄寫(등사)한 것이다.
  
   당국은 지금까지 6·25 拉北者들의 경우 拉致(납치)를 당한 것인지, 자진 越北(월북)한 것인지 구분이 모호하다는 입장을 밝혀 왔지만 이 문서는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된 인사들을 명확하게 구분해 주고 있다.
  
   피해조사 항목은 姓名(성명), 性別(성별), 年齡(연령), 職業(직업), 所屬(소속) 및 職位(직위), 被害(피해) 月日, 被害種類(피해종류), 被害場所(피해장소), 略歷(약력), 住所(주소) 등 10개 분야다. 拉北者를 구분해 주는 것은 10개 분야 가운데 被害種類 항목이다. 拉致, 被殺(피살), 行方不明(행방불명)으로 피해상황을 구별해 놓았다.
  
   被害者 名簿에는 소설가 李光洙(이광수), 玄相允(현상윤) 고려大 총장, 孫晉泰(손진태) 서울문리대 학장, 국회의원 安在鴻(안재홍)·趙素昻(조소앙) 등 당시의 유명 拉北인사들과 함께 의사, 변호사, 경찰, 공무원, 교사, 상업, 학생, 노동 등 다양한 분야의 拉北인사들이 기재돼 있다.
  
   소설가 李光洙의 경우 항목별로, 「男·59·著述家·興士團 理事·7월12일·拉致·自宅·(略歷란은 공란)·孝子洞 3統7班」으로 돼 있고, 玄相允 고려大 총장의 경우는 「男·58·敎授·高大總長·7월26일·拉致·仁寺洞 樂園市場 앞·(略歷란은 공란)·嘉會洞 1統3班」으로 기재돼 있다.
  
   피살자 가운데 金寬泳씨의 경우는 「男·37·辯護士·前 南勞黨員·9월24일·被殺·自宅·檢事 二年 辯護士 三年·城北洞 3統5班」으로 기재돼 있다.
  
   문서에 기록된 피해자 총수는 4616명이다. 이 가운데 拉致가 가장 많은 2438명이다. 拉致를 당한 사람 가운데 여성은 93명이다. 行方不明者는 1202명, 被殺者가 976명이다. 區廳별로는 중구(892명), 종로구(769명), 용산구(579명) 順으로 피해자가 많았다.
  
   공보처 통계국은 被害者 名簿 凡例(범례)를 통해 다섯 가지 문서 작성 사유와 작성 방법을 적고 있다. 凡例는 이 名簿가 애초에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했다가 被害者 전체로 대상을 확대했음을 밝히고 있다.
  
   피해자 조사대상을 만 14세 이상으로 했고, 의용군으로 입대한 사람은 제외했다는 점도 적고 있다.
  
   편집의 특징은 凡例 다섯 번째 항목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각 區별로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명단 게재 순서를 姓氏 順으로 했다는 점이다. 피해자 중 金氏 姓을 가진 사람이 많으면 金씨부터, 李氏 姓이 많으면 李씨부터 명단을 게재하는 식이다. 해당 페이지를 쉽게 찾을 수 있게 性別 색인표도 만들어 놓았다.
  
   被害者 名簿는 명단 외에도 부록으로 1950년 10월25일 현재를 기준으로 작성한 「臨時人口 및 被害調査 結果 明細」를 싣고 있다. 사망자 부상자 등 원인별 피해자 수와 주택 피해, 사업체 피해, 폭격·화재 등으로 인한 人口의 이동, 내무부·외무부·재무부 등 공공기관의 피해상황 등을 각 기관별로 자세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 명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이미일)가 최근 古書수집가로부터 입수해 所藏(소장)하고 있다.
  
  
   「6·25 事變 被拉致者 名簿」 납북자 8만661명 밝혀
  
  
   이번 취재 과정에서 확인된 또 다른 문서는 보다 방대하다.
  
   문서 표지 하단에 大韓民國 政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6·25事變 被拉致者 名簿」는 李承晩 政府가 서울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拉北者 명단을 작성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다.
  
   月刊朝鮮이 확인한 이 문서에는 서울特別市 납북자들의 명단(1만8330명)만 실려 있지만 이 문서 앞부분에 있는 總括表(총괄표)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 충청, 강원,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 등 전국의 납북자 숫자가 기록돼 있다. 서울 지역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납북자 명단이 작성됐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문서가 밝히고 있는 전국의 拉北者 명단은 8만661명이다. 남자가 7만9145명, 여자가 1516명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만8330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1만5871명), 강원도(1만422명), 충청남도(9972명), 경상북도(7483명), 전라북도(7013명), 충청북도(6166명), 전라남도(3554명), 경상남도(1805명), 제주도(45명) 順이다.
  
   납북자의 절반 이상이 서울, 경기, 강원 등 중부 이북 지역에 집중돼 있다. 全지역에서 납치된 남성의 숫자가 여성에 비해 월등히 많지만 가장 적은 인원이 납치된 제주지역만은 반대다. 총 45명의 被拉者 가운데 여자가 30명으로 남자 15명의 두 배다.
  
   인민군 점령지역이 아니었던 제주도에서도 납북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주소지를 근거로 납치자 명부가 작성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사항목은 姓名, 性別, 年齡, 職業, 所屬 및 職位, 拉致年月日, 拉致場所, 住所 등으로 8개 항목이다. 1950년 12월에 작성된 「서울시 被害者 名簿」보다 두 개 항목이 줄었다. 略歷란과 被害種類란이 없어졌지만 거의 동일한 양식으로 작성됐음을 알 수 있다.
  
   拉致, 被殺, 行方不明 등이 실렸던 被害種類란이 사라진 대신 被害月日을 기재하던 난이 拉致年月日로 바뀌었다. 문서의 제목대로 被殺者나 行方不明者를 제외한 拉北者만을 기록했기 때문에 被害種類란은 필요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6·25 事變 被拉者 名簿」가 작성된 시기는 1952년 10월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6·25 사변중 被拉者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3년 발행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拉北者 수를 8만453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 統計年鑑은 休戰 이후에 발간된 것이다. 被拉者 名簿의 拉北者 수가 1952년 발행 統計年鑑에 기록된 숫자에 비교적 근접해 있고 休戰 이후에 발행된 統計年監의 拉北者 수가 증가한 점을 감안하면 1952년께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인정하는 6·25 事變 납북자 수는 8만여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6·25 事變 被拉者名簿」는 현재 통계청 대전 청사內 「통계전시관」에 복사본이 전시돼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음이 이번 취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발견된 名簿는 공신력 있는 문건』
  
  
   이번에 발견(확인)된 6·25 전쟁 당시 북한이 拉致해 간 인사들의 명단은 향후 납북자의 생사 확인 등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북한은 납북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우리 정부도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해 정부 차원에서는 6·25 납북자 송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다.
  
   宋榮大(송영대) 前 통일원 차관은 『발견된 문건의 작성 주체가 정부라면 공신력 있는 문건으로 봐야 한다』면서 『지금이라도 정부는 그런 신빙성 있는 자료를 근거로 북한에 납북자 송환을 요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이번 납북자 명단 발견을 계기로 송환 요구를 함으로써 이 문제를 이슈화한 후 남북한 고위층의 협상을 통해 납북자 송환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국제 인권단체 등과 연대해 한반도 납북자 문제를 국제적으로 여론화함으로써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국제적 차원의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休戰 이후 납북된 납북어부 가족들의 정부에 대한 피해보상 소송을 돕고 있는 全承萬(전승만) 변호사도 『정부는 이번에 발견된 명단을 근거로 북한에 대해 6·25 납북자들의 송환을 촉구해야 한다』면서 『과거 서독이 돈을 주고 동독에 있는 정치범들을 서독으로 데려온 것처럼 정부도 납북자들을 데려오기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실천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全변호사의 말대로 납북자들을 데려오기 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실천방안을 세울 의지가 있는가.
  
   정부는 지난해 4월 납북자 문제 등을 전담하는 통일부에 이산가족 1과와 2과를 신설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납북자 문제 해결에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납북자 명부 등 송환 요구에 기초자료가 될 자료 수집에는 미온적이다.
  
   주무 부서인 통일부에서는 같은 정부기관과 정부 관련 기관 내에 6·25 事變 被拉致者 名簿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기자는 李承晩 정부가 만든 6·25 피랍자 명단冊 2권을 확인한 다음 통일부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부는 6·25 납북자 명단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失鄕私民(실향사민) 명단 외에는』
  
   ─1956년에 대한적십자사에서 납북자들의 신고를 받아서 작성한 失鄕私民 명단 외에는 없다는 말이죠? 주무 부서로서 행자부 등 다른 정부 기관에는 납북자 명단이 작성된 문건이 있는지 확인은 해보셨습니까.
  
   『우리가 노력을 했고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도 요구를 했지만 통계자료만 있고 실사자료가 없으니까 행자부에서 그걸 어떻게 해요. 생각을 해보세요. (있다면) 50년 전 戰時(전시)의 자료인데… 그 당시에는 자료 정리가 안 됐잖아요』
  
   ─취재를 하다 보니까 6·25 납북자 가족들은 1952년도에 정부에서 납북자 명단을 작성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拉北, 被殺, 行方不明 이렇게 항목을 나눠서 조사해서 명단을 작성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씀드렸잖아요. 통계는 나와 있어요. 그 당시에 사망이 몇 명, 피랍이 몇 명, 실종이 몇 명 이런 식으로 당시 내무부에서 경찰에서 들어오는 이런 걸 통합해서 냈지 누가 납북자다, 누가 사망했다, 이런 게 없다는 겁니다』
  
   ─통계로는 되어 있어도 일일이 개인별로 피해를 조사해 작성한 명단은 없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失鄕私民」 명단은 정부 조사 아닌 가족들 신고 받아 작성한 것
  
  
   통일부 관계자가 6·25 전쟁중 납북자 관련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는 「失鄕私民」 명단이란 정부가 작성한 문건이 아니다.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 6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 두 달 간 납북자 가족들의 신고를 받아 작성한 명단이다. 「안부탐지 조회서」라는 제목의 신고서를 대한적십자사에 제출한 납북자 가족은 7034명이다. 이 가운데 여자는 150명이었다. 출신지역별로는 휴전선 以南이 85%를 차지했고 특히 서울과 경기 지역의 납북자가 전체 被拉者의 절반을 넘었다. 직업별로는 공무원이 1359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농업(1005명), 상업(966명), 회사원(737명), 학생(677명), 교육자(355명), 기술자(330명) 順이었다. 정치인과 언론인도 각각 85명, 75명씩이었다.
  
   대한적십자사가 이 문건을 작성한 이유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한 납북자 송환 노력의 일환이었다. 납북자 가족들의 신고를 받은 대한적십자사는 1956년 10월 국제적십자사에 생사확인을 요청하는 7034명의 명단을 보냈고, 국제적십자사는 이 명단을 북한 측에 통보했다. 북한적십자회도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越南人士 1만4132명에 대한 행방을 알아봐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1957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19차 국제적십자회의에서 북한적십자회는 대한적십자사가 생사확인을 요청한 拉北人士 7034명 중 337명의 생존자 명단을 보내왔다. 당시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2001년 1월에도 민주당 金成鎬(김성호) 의원이 7034명의 납북자 명단과 함께 생존자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北에 유리한 「失鄕私民」이란 말을 대한민국 공무원이 쓰다니
  
  
   문제는 失鄕私民이라는 용어다.
  
   失鄕私民(Displaced Civilians)이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1952년 1월8일 휴전회담 제66차 회의에서 유엔군 측에서 포로교환을 제의하면서부터다. 이전에 열린 휴전회담에서 북한 측이 『우리가 拉致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다』고 주장하자 被拉者(Kidnapped Persons)란 용어를 피해 失鄕私民이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협상 전술상 택한 표현이다.
  
   대한적십자사가 1976년 9월에 펴낸 「이산가족 백서」 163쪽에서는 유엔군 측이 被拉者를 失鄕私民이라고 규정한 것은 중대한 過誤(과오)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유엔軍側이 被拉者를 失鄕私民이라고 규정한 것도 重大 過誤의 하나였다. 결국 실향사민이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지 강제연행된 피랍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측의 주장인 자진월북자만 있을 뿐 타의에 의한 실향사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구를 객관화했기 때문이다. 실향사민이란 용어는 공산군 측에게 오히려 대한민국을 선택하여 死線을 넘어 自進 越南해 온 수백만 피란민을 北으로 송환하라고 정치공세를 펴는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진 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대한민국 정부의 공무원으로서는 「失鄕私民 명단」이라는 말보다 「적십자에서 작성한 납북자 명단」 또는 「적십자 작성 납북자 신고서」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기자가 전화로 하루 만에 다른 정부기관에서 찾아낸 명부를 통일부는 없다고 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정부內에 납북자 명단이 없다고 했지만 기자는 앞에서 소개한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전화로 하루 만에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정부기관 안에서. 결국 통일부는 자료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로부터 「서울특별시 被害者 名簿」를 입수한 기자는 지난 1월2일 오전 문서 작성처가 공보처 통계국이었던 점에 착안, 공보처와 공보처 통계국 후신인 통계청에 6·25 전쟁 납치자와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전화로 확인을 요청했다.
  
   통계청 통계정보국자료관리과의 관계자는 잠시 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료 검색 결과 통계청 전시관에 「6·25 피립(拉字를 립字로 잘못 音讀해 기록해 놓은 것으로 판단됨-편집자注)치자 명부」가 전시돼 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기자는 그 관계자에게 전시관에 있는 자료를 확인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날 오후 그 관계자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그 관계자는 『확인 결과 립은 랍의 誤字였고, 규장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복사를 해온 문건으로 판단된다』고 확인해 주었다.
  
   곧바로 규장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확인한 결과 국립중앙도서관에 「6·25 事變 被拉致者 名簿」가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관계자는 『1996년에 하버드大 엔칭(YENCHING)도서관에서 마이크로 필름으로 影印(영인)해 온 문서』라고 밝혔다. 528쪽으로 이루어진 그 문서에는 6·25 사변 납북자가 8만661명에 달한다는 사실과 함께 서울에 거주하던 1만8330명의 납북자 명단이 실려 있었다.
  
   통일부가 노력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던 납북자 명단이 하루 만에 발견된 것이다.
  
  
   이미 언론에 공개된 납북자 명단도 확보 안 해
  
  
   정부 당국의 6·25 납북자들에 대한 무성의는 이미 공개된 납북자 명단조차 확보해놓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1989년 10월5일, 韓國藏書家協會(한국장서가협회) 辛永吉(신영길) 회장은 개인소장 자료 하나를 공개했다. 辛회장이 공개한 개인소장자료는 「六·二五 事變 被拉致人士 名簿」였다. 이 名簿에 게재된 납북인사는 총 2316명이다. 「서울 특별시 被害者 名簿」에도 이름이 올라 있는 玄相允 고려大 총장, 孫晉泰 서울大 문리대학장, 국회의원 安在鴻 등 당시 유명 납북인사들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역시 筆寫(필사) 등사본인 110쪽 분량의 이 名簿는 「6·25事變 被拉致者 名簿」, 「서울특별시 被害者 名簿」처럼 중구, 종로구, 마포구 등 구청별로 납북자 명단을 기재하고 있으나, 기재 항목은 姓名, 職場, 年齡, 住所, 被害日月 등 다섯 개 항목으로 간략하다.
  
   다른 名簿들이 서울지역 납북자들만 수록한 것과 달리 수원·양주·광주 등의 경기도 일부 지역의 납북자 명단도 市外 지역으로 묶어 게재했다. 간략하게나마 서울 외의 지역 납북자들의 명단이 실린 것은 이 문서가 정부에서 작성한 것이 아닌 6·25 전쟁 직후부터 활동하던 「6·25 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가 작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단체는 1950년대 중반까지 납북가족의 송환을 촉구하는 대회를 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으나 生業 전념 등의 이유로 활동을 멈췄다. 문서 좌측 하단부에는 세로로 「六·二五事變被拉致人士家族會」라는 단체명과 함께 단체의 직인이 찍혀 있다. 우측 상단부에는 세로로 「國會議長 申翼熙 閣下」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 작성 시기는 申翼熙(신익희) 선생이 국회의장으로 재임한 기간인 1950년 6월부터 1954년 5월30일 사이로 추측된다.
  
   이 문건은 辛회장이 1979년 서울 청계천 고서점에서 발견했다. 辛회장의 처삼촌인 金準枰(김준평) 前 서울변호사회장이 6·25 당시 납북됐기 때문에 고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납북자 名簿를 보게 돼 당시 5000원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辛회장이 공개한 「六·二五 事變 被拉致人士 名簿」는 조선일보가 1989년 10월6일자로 특종 보도했고, 「통일한국」 1989년 12월호에는 名簿에 수록된 2316명의 명단까지 공개됐다. 이 명부는 지금까지도 辛회장이 所藏하고 있다. 辛회장은 『근래에 정부 기관에서 이 문서의 존재를 문의해온 적은 없었다』면서 『문서가 공개됐던 1989년에는 정보기관에서 이 문서를 복사해 갔다』고 말했다.
  
   辛회장은 『문서가 공개된 후 납북자 가족들로부터 부모님의 납치일을 묻는 전화가 많이 왔다』면서 『문의를 한 대부분의 가족들은 부모님이 납치당한 날을 제삿날로 정하기 위해서였다』고 기억했다.
  
   정부는 언론에 공개됐고 많은 납북자가족들이 그 문서를 근거로 제삿날을 정하기도 했던 납북인사 명단조차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8만여 명의 납북자들
  
  
   2000년 11월30일에 창립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창립 이후 지금까지 정부 관련기관에 납북자 명단이 보관되어 있는지 확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는 등의 납북자 명단 확보 노력을 해왔다. 이 단체의 납북자 명단 보관 확인 요구에 대한 행자부, 경찰청, 국정원 등 정부 관련기관들의 답은 『그런 자료는 없다』였다.
  
   정부는 6·25 전쟁중 납북자 명단을 안 찾는 것인가, 못 찾는 것인가.
  
   辛회장은 「六·二五 事變 被拉致者 名簿」를 공개한 직후 정보기관에서 명단을 복사해갔다고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李美一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안 찾는 것인지, 못 찾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정부 안에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작성된 납북자 명단이 있다고 확신한다. 실질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된 1980년대 중반까지 담당 경찰이 바뀌어도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계속 이어진 것은 납북자 명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울시에 국한된 명단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피랍자 명단도 그 방증이다』
  
   6·25 납북자 명단을 정부가 안 찾는 것인가, 못 찾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납북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6·25전쟁중 납북자이고, 다른 하나는 휴전 이후 납북자들이다. 金大中 정부가 말하는 납북자란 납북 어부 등 休戰 이후의 납북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2000년 9월3일 방송의 날 열린 방송 3社 공동 초청 특별대담에서 납북자와 관련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청와대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된 내용 그대로 옮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지금 국군포로는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 그러냐면 1953년 휴전 때 포로교환 다 하지 않았느냐, 이런 입장이고 납북자는 그런 일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실제 우리가 여러 가지 정보와 모든 것을 해서 판단하고 파악한 바로는 국군포로가 한 300~400명 파악되고 있고 또 납북자도 그 정도 수, 그래서 전부 합해 700~800명이 파악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는 휴전 이후의 납북자 수는 3790여 명이다. 이 가운데 480여 명이 아직 북한에 잔류하고 있는 것으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이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金大中 대통령조차 6·25 전쟁중 납북자 8만여 명에 대해서는 납북자로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北이 싫어해서 (납북자) 얘기 못 한다』
  
  
   정책 담당자의 6·25전쟁중 납북자를 보는 시각도 대통령과 다르지 않다. 2000년 11월29일에 열린 국회 외교통상위원회에서 벌어진 한나라당 柳興洙(유흥수) 의원, 朴寬用 의원과 통일부 洪良浩(홍양호) 인도지원국장과의 일문일답이다.
  
   <柳興洙:지금 설명에 의하면 전쟁중에 납북된 사람은 그러면 이산가족이나 이런 데에도 전혀 대상이 안 되어 있었습니까. 교환할 사람이나 앞으로 들어올 사람에 전혀 안 들어가 있습니까?
  
   洪良浩:그 분들이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시에 그 대상으로 되어 있고 추첨이 되면 교류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柳興洙:그러니까 통일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그 납북자라는 것은 전쟁중에 납북된 사람은 안 들어가 있는 것 아니오?
  
   洪良浩:예, 전쟁 이후의 것으로 그동안 정부가 통계를 잡아 왔습니다
  
   (中略)
  
   洪良浩:국군포로 문제와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북한에서 현실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포괄적인 이산가족 차원에서 우선 해결하는 것이….
  
   (中略)
  
   朴寬用:이산가족하고 왜 혼재를 하느냐는 말이에요. 北이 싫어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北의 기분 맞추어 주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北이 싫어하기 때문에 이야기 못 한다는 그런 이야기지요>
  
   이런 6·25 전쟁중 납북자를 바라보는 당국의 시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기자와 납북자 문제를 다루는 통일부 이산가족 1과 강기찬 사무관과의 問答(문답).
  
   ─6·25 당시 납치된 인사들을 廣義(광의)의 이산가족 범주에 넣어 해결한다는 게 정부의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납북 인사 가족들은 6·25 납북자 문제는 이산가족 범주에 넣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북측에 송환을 요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6·25 납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무엇입니까.
  
   『6·25 납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없습니다. 휴전 협정 이후의 납북자 가운데 귀환 희망자는 모두 송환한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고 두 번째로는 제3국으로 이탈한 납북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귀환시킨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현실적으로 송환이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산가족에 포함해서 상봉을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통일부의 입장입니다.
  
   솔직히 6·25 납북자들의 경우는 본인들 주장이나 1956년 적십자사에 신고한 失鄕私民 명단 외에는 뚜렷한 실사 자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데 납북, 월북 등 그 사유를 불문하고 인도적인 견지에서 포함시켜서 하는 것이지 꼭 6·25 납북자라고 해서 포함시켜 하는 것은 아닙니다』
  
  
   大韓民國 정부는 왜 전쟁의 와중에도 납북자 명단을 작성했나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들은 『정부나 언론이 납북자 문제를 다루면서 6·25 전쟁중 납북된 우리 부모나 친척들을 제외시키고 거론하는 데 분노해서 단체를 결성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들은 『6·25 전쟁시의 납북사건은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가정을 파괴한 심각한 인권침해 사항으로 현재도 진행형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6·25 전쟁 납북자 문제를 인권 차원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北에 강제로 끌려간 부모나 형제들은 북한 공산치하에서 인권을 유린당했을 게 분명하고, 남한에 남은 가족들 역시 연좌제 등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으므로 이 문제는 인권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도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도 송환 요구보다는 생사확인이나 가족상봉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宋榮大 前 통일원 차관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 해결은 한계에 부딪쳤으므로 정치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宋 前 차관의 말.
  
   『전쟁중 납북자 문제는 전쟁 포로 문제와는 구분이 됩니다. 제네바 협약에는 해당이 안 됩니다. 전쟁 포로 문제와는 구분해야 됩니다. 우리는 북한에 강제로 끌려간 인사들을 납북자라고 하지만 북한은 자진 월북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또한 이 문제는 인도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문제이면서 인도적 문제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동안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만 접근을 해왔습니다. 정치적 문제이자 인도적 문제라는 양면이 있는데 인도적 차원에서만 접근을 했으니까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문제를 제대로 풀려면 남북 頂上회담 같은 데서 정치적 협상을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金大中 정부는 失機(실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과의 협상을 통한 해결 이전에 남한 사회 자체적으로 6·25 납북자 가족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걸까.
  
   명지大 정치외교학과 신율 교수는 『정부가 남북 관계를 고려해 지금까지 전쟁중이나 휴전 이후 납북자에 대한 송환 요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 유기』라면서 『국군포로 특별법을 제정했던 것처럼 납북자 특별법을 제정해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선 법의 제정이라는 상징을 통해서라도 가족을 북한에 빼앗기고도 우리 사회에서는 연좌제 등으로 고생한 납북자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납북자 문제를 인도적 차원으로만 접근을 하든, 납북자 가족들이 주장하는 대로 인권적 차원으로 접근을 하든, 그동안 없다던 대한민국 정부 작성 6·25전쟁 납북자 명단은 발견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단순히 기록만 하기 위해 전쟁 와중에 납북자 명단을 작성했을 리는 만무하다. 金大中 정부 역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부임을 자임하고 있다.
  
   李美一 6·25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휴전 후에도 납북 사건이 끊이지 않은 데에는 우리 정부가 전쟁중 납북자 문제를 북한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을 압박하지 못한 것도 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면 납북사건이 재발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는 북한에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 즉 납북자 명부까지 발견됐습니다. 저는 우리 정부가, 특히 통일부가 북한의 대변자가 아닌 우리 국민의 대변자임을 믿고 싶습니다』●
  
  
  
   납북자 가족들의 이야기
  
  
   『생사확인만이라도 해주오』
  
  
   6·25 전쟁납북자가족협의회 회원들의 소망은 차라리 소박하다. 부모나 형제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고, 언제 사망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를 확인했으면 하는 것이다.
  
   鄭址和(정지화·58)씨의 아버지(鄭城薰·정성훈)는 6·25 전쟁 발발 직후까지 서울 명륜동에서 대륙공업社라는 자동차 서비스 업체를 경영하면서 대한청년단 단원으로 일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6월28일에 피신했다가 남아 있는 가족이 걱정돼 명륜동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7월1일에 인민군에 연행됐다. 鄭씨는 7월14일 어머니(권영원)와 함께 北으로 끌려가는 아버지의 뒤를 멀리서 따랐다. 창동까지 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인민군들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납북자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창동 부근에서 아내와 아들을 본 아버지 鄭씨는 北으로 끌려가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鄭址和씨는 그 이후로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납북된 후 재산마저 몽땅 잃게 된 鄭씨의 어머니는 4남매를 키우기 위해 동대문 시장에서 노점상, 과일상 등의 장사를 해야 했다. 새벽 네 시에 집을 나간 鄭씨의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통행금지 시간인 밤 12시. 鄭씨네로서는 아버지가 납북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鄭씨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鄭씨는 장교가 되고 싶어 ROTC(학군사관)를 지원했지만 아버지가 납북됐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이른바 연좌제에 걸린 것이다. 연좌제로 인한 피해는 거기서 끊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나가는 해외출장조차 포기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鄭씨는 연좌제가 폐지된 이후에야 비로소 몸을 담고 있는 회사의 신원보증을 받고 해외에 나갈 수 있었다.
  
   鄭씨를 못 견디게 한 것은 경찰의 감시다. 鄭씨의 어머니는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를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보고를 해야 했고, 鄭씨는 담당 형사로부터 가끔씩 『요즘 뭘 먹고 사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鄭씨 어머니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명륜동에 허름한 집을 한 채 장만했을 때는 담당 형사가 찾아와 鄭씨의 어머니에게 『남편이 北에서 내려와 돈을 대주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간첩으로 남파돼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한 것이다.
  
   鄭씨의 어머니는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 다섯 살이다. 鄭씨네의 戶主는 지금까지도 아버지 鄭城薰씨다. 어머니가 사망신고를 못 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자는 鄭씨 외에도 10여 명의 납북자 가족들을 만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鄭씨와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 납북자 가족들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부모나 형제들이 공산치하에서 받았을 고통이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 李鎣浩(이형호)씨가 북한에 납치된 이준모씨는 1982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묘에 아버지의 사진을 넣어 합장을 했다고 한다. 李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까지 30년 동안 아버지를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혹독한 북한 공산 치하에서 고통을 받는 것을 내가 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돌아가셨다면 영혼만이라도 그 고통스런 치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서 제사도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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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보] 6·25 납북자 명부 발견 이후… 6·25 전쟁 피랍자 가족들 이야기 (월간조선 2002년3월호)
  
  
  
  
  
  金成東 月刊朝鮮 차장대우 (ksdhan@chosun.com)
  
   『부친 소식을 직접 들은 듯한 기분』
  
  
   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발굴 특종-국가 작성 6·25 拉北者 8만명 名簿 발견」 題下(제하) 기사가 보도된 직후 기자는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로부터 여러 통의 이메일과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은 60代에서 70代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납북된 부모나 형제들의 생사확인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기업 사장으로 있다가 정년 퇴직한 후 서울 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車炯東(차형동)씨가 보낸 이메일에는 납북자 가족들의 공통적인 생각과 바람이 들어 있다.
  
   <(前略) 제 부친의 성함은 車潤弘(차윤홍)입니다. 6·25 전쟁 때 납북 당하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경로로 부친의 생사를 알아보려 노력했으나, 오늘까지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
  
   제 부친은 1904년생이십니다. 우리나라 헌법제정 기초전문위원을 하셨고, 초대 국회 의사국장, 상공부 상역국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아직 생존해 계실 가망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이 저희들의 심정입니다.
  
   일단 명부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부친의 소식을 직접 들은 듯한 기분입니다.(後略)>
  
   납북자 가족들은 납북된 부모나 형제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작성한 납북자 名簿(명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납북된 가족의 소식을 들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명부에 찾고 있는 가족의 이름이 들어 있는 납북자 가족의 경우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납북된 부모와 형제들의 소식에 목말라 했던 것이다.
  
   6·25 전쟁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이 납치해 갔다는 사실이 정부 작성 문서로 밝혀졌으므로 정부는 북한에 공식적으로 6·25 전쟁중 납북인사들에 대해 송환을 요구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에 송환을 요구해야 그들의 최소한의 소망인 납북된 부모와 형제들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여순반란 사건 사진전시회 열었다고 납치
  
  
   이희철(61)씨는 아버지 李東浩(이동호·1914년생)씨가 납북됐다. 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공개된 공보처 통계국 작성 「서울특별시 被害者 名簿」 10쪽에 납치로 기록돼 있다. 나이는 37세, 납치일은 7월30일, 납치장소는 명동 2가 40번지, 직업은 사진재료상으로 돼 있다.
  
   李씨의 아버지는 「사진문화」라는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사진을 직접 찍기도 하고 잡지도 발행하는 한편 사진재료도 취급을 했다. 李씨는 아버지가 납북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그 중에 여순반란 사건 사진전도 있었는데 그게 밉보였던 것 같습니다. 반란군들의 잔악상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李씨는 1952년에 어머니(홍성희)마저 잃었다. 李씨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기억을 끄집어내기조차 싫다』는 말로 과거의 겪은 일 모두를 설명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가장인 아버지가 납치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희철씨와 마찬가지로 전태희(60)씨도 아버지가 납북됐다. 田씨의 아버지 田鳳彬(전봉빈·1908년생)씨는 납북 前 국회 전문위원으로 있었다. 자택에서 보안서원 두 명과 인민군 장교 두 명 등에 의해 납치됐다. 田씨는 아버지가 피랍 도중에 처형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납북 인사들이 평북 강계에 끌려가 있을 때 부근에 국군포로들도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2代 국회에 경북 영주에서 출마했었는데 영주 출신 국군 포로 중 한 명이 아버지를 알아보았답니다. 그분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포로교환 후 우리집에 찾아와서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주었답니다』
  
   그 이후로 田씨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시리라는 기대도 접은 지 오래다.
  
   『어느 정권도 6·25 납북자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순서상 남북이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일이 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조건 없이 보내 주면서 왜 북한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송환 요구는 못 하는 겁니까.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가족들이 애를 끓이며 가족을 기다렸다면 우리는 그 이상 애가 끓었을 겁니다. 그들은 생사여부나 알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몰랐던 것 아닙니까』
  
   金智慧(김지혜·60)씨도 아버지 金占碩(김점석·1913년생)씨가 납북됐다. 金占碩씨의 납북 당시 직업은 변호사였다. 광복 후 서울지검 부장 검사로서 송진우 암살사건, 여운형 암살사건 등을 담당했다. 1949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다. 「피해자 名簿」에는 연령 48세, 직업 변호사, 소속 및 직위 대한변호사회 총무, 피해종류 납치 등으로 기록돼 있다.
  
   1950년 7월8일 北으로 납치됐다. 1951년 1·4 후퇴 직전 평북 만포진에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아버지와 관련된 최근의 소식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것으로 확신하는 金健雄(김건웅·60)씨의 소원은 아버지 金相烈(김상열·1908년생)씨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납북 당시 金相烈씨의 직업은 서울대학교 학무과장이다.
  
   『1950년 9월22일 밤 12경에 인민군과 청년들이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아버지(金相烈)를 납치해 갔습니다. 당시 國大案(국대안)을 반대하던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치된 것 같습니다』
  
   金씨는 『연좌제를 통해 정부가 납북된 인사들의 가족을 감시한 것은 남북 대치라는 현실적 상황 때문에 이해가 간다』면서도, 『납북인사를 월북인사 수준에서 관리한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납북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우리 남한의 엘리트들은 다 잡아간 것 같다』면서 『명부 발견을 계기로 정부는 떳떳하게 북한에 대해 6·25 납북자 송환을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李最永(이최영·68)씨네 가족의 바람은 납북된 아버지 李鍵(이건·1897년생) 목사의 유해 송환이다. 李鍵 목사의 납북 당시 직업은 서울신학교(現 서울신학대학교) 교장이었다.
  
   李씨는 『북한이 우리들의 부모와 형제를 납치해 간 것은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테러』라면서 『지금이라도 정부가 특별법을 서둘러 제정해 납북인사 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아원 앞에 아들 버리고 통곡도
  
  
   金玉粉(김옥분·74)씨는 남편이 납북된 경우다. 金씨의 남편 權慶晶(권경정·1920년생)씨는 마포형무소 간수부장으로 있다가 납북됐다. 마포 형무소 부근 친구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잡혀간 이틀 후 탈출에 성공했으나, 탈출한 다음날 다시 납치당했다.
  
   남편이 납북된 후 정부에서 남편 대신 여자 간수로 일할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만삭의 몸이라 할 수 없었다.
  
   『남편의 납북으로 살길이 막막해진 저는 이를 악물고 고아원 앞에다 아이를 버렸습니다. 아이가 너무 울어대어서 부둥켜안고 다시 데려왔습니다』
  
   金씨는 고향인 경북 봉화에서 행상과 포목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서후식(68)씨와 서정식(67)씨는 사촌 간이다. 두 사람 다 아버지가 납북됐다. 형제가 납북된 것이다. 후식씨의 아버지는 徐承杓(서승표·1905년생)씨로 경성제대를 나와 광복 전에는 평북 운산 군수, 강계 군수 등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대한중석 총무이사로 있다가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치됐다. 사촌 동생인 정식씨의 아버지 徐承根(서승근·1907년생)씨는 東京大 상대를 졸업한 후 대법원 행정처 경리과장으로 있다가 납북됐다.
  
   정식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몰라 아버지의 생일을 제삿날로 삼고 있다』면서 『인간의 도리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것부터 해결해 나가는 게 진정한 햇볕정책』이라고 말했다.
  
  
   『정부 상대 소송 내겠다』
  
  
   부부가 납북된 경우도 있었다.
  
   李憲(이헌·본명 이상규·1892년생), 黃基成(황기성·1902년생) 부부가 그들이다. 李憲씨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한민당 결성에 참여해 정치활동을 하다가 납북됐고, 부인 黃씨는 당시 「婦人(부인)」 잡지의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대한부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가 납치됐다. 당시 납북됐던 玄相允(현상윤) 고려대 총장이 자신의 명함에 대학(고려대)을 중도에 그만두고 전주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제자 李哲承(이철승)씨를 위한 응원연설을 부탁하는 글을 적어 보냈을 정도로 黃씨의 지명도는 높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은 피해자 名簿에 납치로 기록돼 있다.
  
   玄相允 총장이 黃씨에게 보낸 명함 메모를 갖고 직접 찾아온 李憲씨의 손자 李武憲(이무헌·60)씨는 『부친(李釋文·이석문·1995년 사망)의 유언이 할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토록 하는 것이었다』면서 『이번에 납북과 월북을 가려 주는 문서 덕분에 독립유공자 지정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울지방 검찰청 부장 검사로 있다가 피랍된 李柱臣(이주신·1910년생)씨의 3남 이경찬(63)씨는 『정부에 대해 6·25 납북자들에 대한 법적인 책임을 물을 계획이었다』면서 『정부가 작성한 납북자 명단이 그 증거이므로 자료가 완비되는 대로 그동안 책임을 방기한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는 법적 소송을 하겠다』고 밝혔다.
  
   납북자 名簿가 공개된 후 「6·25 전쟁 납북자 가족협의회」(회장·李美一)는 1월31일 주무부서인 통일부에 6·25 전쟁 납북자들에 대한 정부의 본격적인 조사와 이들 가족들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요구했다. 「6·25 전쟁 납북자 가족협의회」는 이와 함께 6·25 납북자 문제를 다룰 특별전담기구 구성과 특별법 제정 등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2월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통일부의 관계자는 『6·25 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공개질의서는 검토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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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좌익이 학살한 5만9964명 名簿 발견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靈光 대학살 2만1225명
  
  金成東 月刊朝鮮 차장대우 (ksdhan@chosun.com)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피살자 명단
  
  
   6·25 납북자 8만여 명 名簿(명부) 발견(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이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피살자 명단이 발견됐다. 6·25 피살자 名簿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이미일)가 납북자 名簿를 찾는 과정에서 함께 발견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名簿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번에 발견된 피살자 名簿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도 동일한 문건이 소장돼 있으며 통계청도 피살자 名簿의 일부인 서울시와 경기도 지역의 피살자 명단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표지에 적힌 이 名簿의 정식 명칭은 「6·25 事變 被殺者 名簿」이며 작성 주체는 공보처 통계국으로 돼 있다. 작성일은 1952년 3월31일이다.
  
   名簿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名簿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市道별로 구분한 다음 郡이나 區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은 姓氏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凡例(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軍警을 제외한 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었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靈光郡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大韓民國統計年鑑의 기록은 피살자가 12만2799명
  
  
   최근 발견된 6·25 사변 납북자 전국 명단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견된 6·25 피살자 5만9964명의 명단이 실린 名簿 외에도 인원이 추가된 새로운 名簿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발간된 「大韓民國統計年鑑(대한민국통계연감)」에는 납북자 수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月刊朝鮮이 2002년 2월호에서 「납북자 名簿 8만여 명 名簿 발견」 제하 기사를 보도한 후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8만2959명의 납북자 명단이 적힌 총 5권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납북자 名簿를 찾아냈다. 月刊朝鮮 보도시에는 전국적으로 납북자 명단이 작성됐다는 정황 증거와 함께 서울특별시 납북자 1만8330명의 명단만 제시됐지만, 이를 토대로 확인 작업에 나선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의해 전국 납북자 명단이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같은 해에 작성된「大韓民國統計年鑑」은 피살자 수를 12만2799명으로 밝히고 있다. 통계연감과 납북자 名簿의 수치가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12만2799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피살자 名簿가 존재할 개연성이 높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우리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5만9964명의 명단이 적힌 피살자 名簿뿐』이라고 밝혔다.
  
   부친(李錫圭·이석규)이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에 피살된 李哲承(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은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전주교도소 등에 문의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알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아버님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李의장은 또 『요즘의 사회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이상한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면서 『이번 문서 발견을 계기로 공산당에 의한 학살자들에 대한 보상 문제와 함께 공산당이 저지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광군 피살자 중 열 살 이하 어린이가 2500여 명
  
   때늦은 겨울비, 아니면 때이른 봄비가 내리던 날인 3월5일, 기자는 「죽음의 기록」을 등에 지고 영광으로 향했다. 6·25 당시 영광군의 피살자 2만1225명의 명단은 A4 용지 772장 분량이었다. 피살자 명단을 꺼내 훑어보았다. 명단을 입수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한 살, 두 살, 세 살… 아이들의 죽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대략 수를 세어 보았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영광을 찾기 前 호남지역 향토사학자인 金井昊(김정호·65) 향토문화진흥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유독 영광 지역의 민간인 피살자가 많은지를 물었다.
  
   『6·25 사변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 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九岫山(구수산·해발351m) 주변 백수면과 염산면에서 민간인 피살자가 많았습니다. 영광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은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진영 모두 그로 인한 희생도 컸을 겁니다』
  
   金원장의 설명은 기자가 품고 있던 또 하나의 의문, 즉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는데도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해소해 주지 못했다. 영광 현지를 찾기 前 기초 취재를 위해 만났거나 전화로 통화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많이 죽었다』거나 『영암에서 제일 많이 죽었고 그 다음이 영광일 것』이라고 말할 뿐 그 수치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몇천 명은 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그나마의 수치였다.
  
   영광 가는 길에 同行을 한 田玲先(전영선·61) 안양 대동서적 사장에게 영광에서 얼마나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田사장은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 출신으로 만 아홉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6·25 때 큰아버지가 경찰에게 피살됐다.
  
   『엄청 많이 죽었어요. 한 수천 명은 될걸요』
  
   ―2만 명이 넘던 데요.
  
   『그렇게 많습니까. 많이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열여덟 살에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한 田사장은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4년 前부터 6·25 전쟁 때 영광에서 죽은 無主孤魂(무주고혼)을 위한 薦度齊(천도제: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齊儀式)를 올리고 있다. 無主孤魂들의 이름이라도 제단에 놓고 천도제를 올리면 좋을 것 같아서 6·25 때 자신의 고향인 백수면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찾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田사장은 기자에게 취재가 끝나고 나면 영광지역 피살자 名簿의 사본을 꼭 달라고 몇 번을 부탁했다.
  
   영광군 피살자 名簿를 보면 사망일시가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까지 분포돼 있다. 영광에 인민군이 진입한 시기는 1950년 7월23일이다. 인민군이 진입하기 전에도 빨치산 등 토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음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이 완전 토벌된 때는 1951년 2월20일이다.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전라남도 영광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기자가 가고 있는 곳은 2002년 3월의 영광군이 아니라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이었다.
  
  
   야든이의 태극기 걸기
  
  
   영광군 영광읍에는 해발 257m 높이의 물무산이 있다. 이 물무산에는 1950년 6월에서 1951년 2월 사이의 영광군의 상황을 상징하는 하나의 죽음이 있다. 「야든이의 죽음」이 그것이다. 야든이는 그의 아버지가 여든 나이에 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본명이 아닌 별명이다. 姓이 楊(양)씨인 것으로 전해질 뿐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8·15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영광군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영광 군수의 이름은 몰라도 야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지역의 명물이었다. 힘이 셌던 그는 품을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장터에서 짐을 나르고 초상집이나 잔칫집에서 심부름한 대가로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바보」로 불릴 정도로 일을 할 때는 요령을 피우는 일이 없었던 야든이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대신 그는 공짜밥을 절대로 먹지 않았다.
  
   6·25 전쟁 때 인민군들이 물러간 후에도 영광군에는 빨치산들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잔존해 있었다. 잔존해 있는 빨치산 때문에 영광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천하가 되는 상황이 他지역 수복 후에도 한동안 지속됐다. 영광읍에 있는 물무산도 마찬가지로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영광읍내의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물무산 정상에 있는 국기 게양대였다. 낮에 태극기를 걸어 놓으면 빨치산들이 밤 사이에 인공기로 바꿔 놓았다. 빨치산이 숨어 있는 물무산 頂上까지 가서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야든이에게 아침마다 물무산 頂上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이 맡겨졌다. 야든이는 태극기를 안고 물무산에 올랐다가 인공기를 들고 내려오는 일을 아침마다 반복했다.
  
   야든이에게는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든이는 물무산 빨치산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둔다. 남북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단지 생존을 위한 「밥」이 절실했던 야든이에게 죽음을 선물한 것이다.
  
   영광 출신인 鄭♥(정종·86·철학박사) 前 원광大 교수는 『야든이가 살아 있을 때 이웃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는 늘 유쾌했을 정도로 그는 선량한 국민이었다』면서 『야든이의 죽음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 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시댁 식구의 목숨과 친정 아버지의 목숨을 선택해야 했던 여인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극단의 선택을 강요한다. 6·25 전쟁 당시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 살던 한금례(88)씨의 증언은 같은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의, 친정 아버지의 목숨과 시댁 식구의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가슴 아픈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천정리에는 이웃 대전리에서 시집을 온 한 여인이 있었다. 한금례씨는 여인의 남편이 한모씨라는 것은 기억하지만 여인의 성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의 친정은 경찰 가족이었다. 빨치산들에게 軍警(군경) 가족은 학살 대상 1호다. 빨치산들은 여인의 친정 식구들을 모조리 죽였다. 마침 외출했던 여인의 친정 아버지는 학살을 모면하고 딸이 있는 천정리로 도망을 쳤다.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같은 마을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
  
   여인이 친정 아버지를 숨겨 주었다는 사실은 첩보원 역할을 하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빨치산들에게 알려졌다. 빨치산들은 여인에게 친정 아버지를 내놓지 않으면 그녀의 시댁 식구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결국 여인은 친정 아버지를 김근호씨 집에 숨겨 주었다는 자백을 하고 말았다.
  
   빨치산들이 김근호씨 집에 들이닥쳤을 때는 여인의 친정 아버지가 이미 몸을 피한 후였다. 빨치산들은 당장 친정 아버지를 찾아내지 않으면 여인의 시댁 식구들 뿐만 아니라 숨겨준 집 식구들까지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때까지 빨치산들의 행태를 보아온 여인은 빨치산들의 위협이 단순한 위협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느 쪽의 죽음이든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해산기도 가시지 않았던 여인의 선택은 친정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여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친정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 안도보다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여인의 앞에 놓인 것은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갓난아이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의 떼죽음이었다.
  
   여인의 가족들이 체념 상태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悲報(비보)」라고도 「朗報(낭보)」라고도 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전리로 돌아가 숨어 있던 아버지가 결국 빨치산에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친정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여인의 시댁에 짙게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이란 말을 이런 상황을 묘사하는 말로 쓰기에는 여인에게 부닥친 상황이 너무 잔인하다. 여인에게 닥친 당시의 현실은 불행 중 불행이라는 말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갓봉과 수리봉
  
  
   한금례씨의 또 다른 증언은 경찰에 의한 사살이다.
  
   백수면 구수산에는 갓봉(344m)과 수리봉(351m)이 있다. 갓봉은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이고, 수리봉은 대한민국 軍警이 빨치산 토벌 전진기지로 사용하던 곳이다. 갓봉과 수리봉은 직선거리로 2㎞ 떨어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에는 입석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彼我(피아) 간에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다. 한씨의 고향 천정리는 입석골 골짜기에서 3㎞쯤 내려오는 곳에 위치해 있다. 경찰이 갓봉에 있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천정리를 지나야 했다.
  
   1950년 11월경에 벌어진 일이다. 빨치산 토벌 작전에 나섰던 경찰병력이 천정리에 들어왔다. 경찰은 갓봉에 있는 빨치산 토벌에 애를 먹고 있었다. 산의 높이는 낮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등으로 둘러싸인 갓봉을 정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도 경찰은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한씨는 빨치산과 전투를 하기 전이었는지 후였는지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천정리에 들어온 경찰이 빨치산과 내통한 사람들에 대한 색출작업을 벌인 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경찰들이 그날 빨치산과 내통했다며 어린아이 두 명을 포함해 일곱 명의 천정리 사람들을 총살시키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씨가 지금도 안타까워하는 것은 갓난아이의 죽음이다. 빨치산인 남편을 대신해서 끌려나온 한 여인의 등에는 아기가 업혀 있었다. 경찰은 여인을 향해서 총을 발사했고, 여인을 관통한 총알은 등에 업혀 있던 아이까지 관통했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에구… 쯧쯧』
  
   말을 마친 한씨는 52년 전 벌어졌던 그 사건이 바로 당장 목전에서 벌어진 일인양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한참 혀를 차던 한씨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공산당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했어. 잘못 걸리면 온 가족을 전부 죽였으니까. 운이 있으면 살고 운 없으면 죽고, 그 사람들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고 살리고 했어』
  
   현재 백수면 길용리에 사는 전계선(62)씨도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밤손님」(영광 사람들은 빨치산을 밤손님이라고 불렀다)에게 밥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의 나이는 만 10세였다. 당시에도 그는 백수면에 살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었음에도 전씨는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더 강해 보였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한 죽음에 대한 목격 때문이다.
  
  
   좌익 스승이 「반동」 제자를 죽이다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한 한참 후의 일이다. 백수 동초등학교에는 金모라는 교사가 있었다. 金교사는 음악을 잘해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온 후 金교사는 본색을 드러냈다. 좌익이었던 것이다.
  
   전씨가 동네 어귀 고구마밭 부근에서 마을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다. 金교사가 한 아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길용리에 사는 2학년 아니면 3학년에 재학 중인 아이였다. 전씨와 함께 놀던 아이들은 金교사가 끌고 오는 아이가 「반동」의 가족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전씨는 그때 끌려오던 아이의 표정이 어땠는지, 몸짓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전씨가 눈을 떴을 때 金교사는 자신이 끌고 온 아이를 칼로 찌른 후 고구마밭 고랑 사이에 처박고 있었다. 전씨는 다리를 후드득 떨었다. 金교사의 목소리가, 6·25 전쟁 前에 학교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그토록 멋지게 들렸던 목소리가 귀신의 음성처럼 웅웅 울렸다.
  
   金교사는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향해 칼에 찔려 밭고랑에 처박혀 있는 아이에게 돌을 던지라고 외쳤다.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돌을 들었고 전씨도 돌을 들었다. 전씨는 그때 자신이 들었던 돌의 무게가 천근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차마 던질 수는 없었다. 전씨가 던진 돌은 힘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신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도망을 가면 경찰의 앞잡이로 몰려서 가족들을 죽일 텐데 도망을 갈 수 있겠습니까. 당시 우리 백수면 사람들은 피란을 가면 밤손님들한테 반동으로 몰리고, 피란을 안 가면 경찰들에게 빨치산 앞잡이로 몰리던 상황이었어요.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6·25를 겪은 영광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가 있다. 「숙청」이라는 말과 빨치산을 지칭하는 「밤손님」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특히 지금은 북한 관련 보도에서나 들을 수 있는 「숙청」이라는 말을, 그들은 일상 용어처럼 사용했다. 강한 자극을 받은 언어는 오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영광 사람들이 말하는 「숙청」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6·25 전쟁 중 영광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영광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의 특징은 대상자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일가 친척을 모두 학살했다는 점이다.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다
  
  
   6·25 전쟁 당시 열세 살로 빨치산 소년단으로 활동했던 金西用(김서용·가명)씨의 증언. 당시 金씨는 백수면 대전리에 살았다.
  
   『인민군이 패퇴한 후 빨치산들에게는 무기가 별로 없었어요. 갓봉에 있는 빨치산 본부에도 따발총하고 소련제 장총 몇 자루 그게 전부였어요. 정확히 몇 명인지 기억은 못 하지만 잔존 빨치산의 숫자도 별로 안 됐어요. 경찰이 우리가 있던 갓봉을 공격해 오면 우리 소년단들이 돌을 굴려서 못 올라오게 하는 역할도 했죠. 처음에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는 형식적이지만 인민재판을 통해 처형을 했어요. 나중에는 막무가내로 죽였어요. 주로 군경 가족들이 희생됐죠.
  
   빨치산들은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죽였어요. 나도 네댓 번 우익 쪽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있었는데 무기가 없으니까 죽창이나 칼로 죽였어요. 학살 후 구덩이에 묻기도 했지만 개울에 버린 시체도 많았어요.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구요. 빨치산들에 의해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그때는 무덤덤하게 죽이라면 죽였어요.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는데, 백수면에서 우익 인사를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이 최모라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칼을 사용했어요.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서 우익 쪽 사람들을 처형하는데 그날도 최모씨는 칼을 사용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사람들 앞에서 칼에 묻은 피를 빨아먹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죽음을 봤기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했던 우리들도 전율을 느낄 정도의 섬뜩한 광경이었어요. 빨치산에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어요. 내가 도망치면 우리 식구가 몽땅 죽을 테니까요』
  
   金씨는 빨치산과 전투 중이던 경찰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당했던 목격담도 털어놓았다. 金씨는 날짜에 대한 기억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하면서 그날을 1950년 12월24일로 기억했다.
  
   『나는 그날을 12월24일로 기억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기억하게 되었는지는 몰라요. 그 무렵에 팔로군이 온다는 소식이 빨치산에게 전해졌어요. 나는 다른 소년단원들과 함께 척후병으로 선발돼 대전리 묘동 부락으로 내려갔어요. 팔로군이 정말로 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간 거죠. 그런데 팔로군이 아니라 경찰이 오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때 군경을 「개새끼」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개새끼들이 온다」고 소리치면서 도망을 쳤지요. 우리들의 고함을 들은 마을 사람들도 함께 산으로 도망을 쳤죠. 산속에 피신할 곳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도망들을 간 거죠. 그때 경찰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어요. 도망가는 사람들을 모두 빨치산 편이라고 판단한 거겠죠. 나도 갓봉을 향해서 도망을 쳤는데, 도망을 치면서 내 눈으로 본 시체만도 50∼60구는 됐을 거예요. 여자들도 있었고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9·28 수복 후 더 많이 죽어
  
  
   金씨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광군에는 좌익들에 의해 일가족이 몰살한 경우가 많다.
  
   영광축산업협동조합 백종옥 전무는 4촌 이내 일가 26명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가운데서도 天佑神助(천우신조)로 살아났다. 바로 손위 형(종인)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당한 일가친척 중 성인은 15명이고 어린이가 11명이다. 학살로 잃은 직계 가족은 양친 부모님과 형님 두 분, 누님 두 분이다.
  
   당시 백전무는 세 살이었고, 형 종인씨는 일곱 살이었다. 백전무의 아버지(白德基·백덕기)는 6·25 전쟁 당시 백수면 부면장으로 있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던 백전무의 아버지는 비밀리에 우익 단체인 영광지역 대한청년단을 관리했다.
  
   사단은 9·28 서울 수복 후에 벌어졌다. 후퇴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영광읍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전무의 아버지는 청년단원들과 함께 몰래 태극기를 만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을 맞을 준비를 해 왔다. 1950년 9월29일, 소문대로 지프를 탄 미군 소속 흑인병사들과 국군이 영광에 들어왔다.
  
   백전무의 아버지와 청년단원들, 공산치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영광군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영에 나섰다. 흑인 병사들과 국군은 영광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증언자마다 그냥 스쳐지나갔다는 주장과 하룻밤을 묵고 떠났다는 증언이 엇갈린다. 중요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이후에도 국군이든 유엔군이든 영광에 주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잠깐 스쳐지나간 영광은 비록 인민군은 떠났지만 여전히 빨치산이 지배하는 인민공화국 치하였다. 좌익 세력에 의한 우익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과 학살이 시작됐다. 유엔군 환영에 나섰던 우익 쪽 민간인들이 좌익들에게 완전히 노출된 것이다.
  
   기자와 만난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이 유엔군 환영식으로 인해 영광지역의 피살자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하고 있다. 「6·25 피살자 名簿」에도 9·28 서울 수복 이후의 피살자 수가 이전의 피살자 수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빨치산 소년단 출신 金西用씨의 증언을 통해서도 그같은 사실은 입증이 된다.
  
   『유엔군 환영식이 있은 다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빨치산들은 유엔군이 온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앞잡이들에게 주민들의 행동거지를 잘 살펴보도록 지시해 놓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더 많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참혹한 광경에 눈이 멀어버리다
  
  
   백전무의 가족 전체는 유엔군 환영대회 직후 좌익들에게 끌려갔다. 손위 형 종인씨는 마침 가족들이 끌려갈 때 밖으로 놀러갔다가 禍(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웃집에서 『집으로 가면 큰일 난다』며 숨겨 주었다고 한다. 이웃집에 숨었다는 사실을 안 빨치산들은 죽창을 들고 와 종인씨를 찾았다. 金西用씨의 표현을 빌면 『씨를 말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변기통에 몸을 숨겼던 종인씨는 그곳을 무사히 탈출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백전무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적으로 이웃 아주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백전무는 가족이 좌익들에게 끌려갈 때 할머니의 등에 업혀 있었다. 감옥으로 개조한 면사무소의 창고에 종인씨를 제외한 가족들이 전부 갇히게 되었는데, 백전무가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마침 그곳에는 좌익 활동을 하던 백전무의 외가 쪽 먼 친척이 있었다. 백전무가 심하게 울자 그 친척은 할머니에게 백전무를 데리고 나가 있으라고 했다.
  
   백전무를 업고 창고 감옥에서 나온 할머니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 백전무가 창고에서 나온 직후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들을 처형했다. 좌익들은 백전무의 할머니를 찾아와 백전무를 내놓으라고 했다. 백전무의 할머니는 백전무가 하도 심하게 울어서 속이 상해 집에 오는 길에 버렸다고 했다. 『내 자식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손주가 뭐 그리 대수냐』며.
  
   좌익들이 돌아간 후 할머니는 그 길로 친정으로 피했다. 나중에 백전무의 할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백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 좌익들이 그 아주머니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백전무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 놓고 있었다. 좌익들은 백전무 대신 그 아주머니를 살해했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희생으로 백전무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좌익들은 백전무의 가족을 학살한 후 백전무의 고모 부부 등 친척들까지 찾아내 학살을 했다. 그렇게 해서 백전무의 4촌 이내 친척 26명이 살해된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곳은 현재의 백수 중초등학교 옆에 있는 대절산 기슭이다. 백전무의 가족들이 학살된 날은 음력 8월20일이다. 양력으로는 10월1일이다. 9·28 수복 직후인 것이다.
  
   백전무의 가족이 학살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먼 친척 할아버지가 몰래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백수면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는 몇몇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절산 기슭에 버려진 백전무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곳에는 백전무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친척 할아버지는 우선 어른 시신 13구만 찾아서 소달구지에 싣고 백전무의 집이 있는 백수면 논산리로 돌아왔다. 논산리로 돌아온 그 할아버지는 눈이 멀고 말았다. 참혹한 학살 현장을 본 충격 때문이었다고 한다.
  
   백전무가 아버지의 시신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 끝난 지 8년여가 지나서였다. 1961년에 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할 때였다. 백전무는 그때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가슴속으로 치미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두개골이 깨져 있었습니다. 몽둥이로 두들겨서 죽인 것이 분명했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당시 어린 나이였던 형님이나 누님들이 맞아서 죽을 때의 고통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습니다』
  
  
   6촌 이내 친척 300여 명이 떼죽음당하다
  
  
   백수면 논산리는 인동 張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6·25 당시 23세로 초등학교 교사였던 張孟龍(장맹룡·75)씨에게 6·25 당시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부탁했다. 張씨는 『별로 할 말도 없고 기억나는 일도 없다』며 기자의 방문을 거절했다. 『6·25 전쟁 때의 일은 기억하기도 싫다』는 張씨를 설득한 끝에 방문을 허락받았다.
  
   張씨에게 기자가 가져간 「6·25 피살자 名簿」 가운데 영광군 명단을 보여 주었다. 피살자 名簿는 姓씨 별로 기록돼 있다. 名簿를 넘기던 張씨의 시선이 張씨 성을 가진 피살자들의 명단에 오래 머물렀다. 침묵이 흘렀다. 張씨와 함께 名簿를 들여다보며 숫자를 헤아리던 田玲先 사장이 입을 열었다.
  
   『대충 세어봐도 백수면 일대에서만 피살자가 300여 명이네…』
  
   張씨의 입이 달싹였다. 깊은 과거를 헤집어 꺼내는 표정으로 그는 기억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300명이여, 300명… 우리 張씨가 백수면 상사리하고 여기 대전리에 많이 살았지. 논산리에도 張씨가 있었어. 池씨도 많이 살았어』
  
   ―대전리는 池씨, 張씨 집성촌이었습니까.
  
   『그렇지. 지금도 많이 살아』
  
   ―대전리는 군경에 의해 죽은 분은 없나요.
  
   『군경이 직접적으로 죽인 것은 없어. 대전리에서는 군인이나 경찰을 6·25 사변 중에는 만날 수 없었으니까. 다 여수 쪽으로 피란 가 버렸지』
  
   ―전남 영광 지방에는 7월23일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영광이 완전히 수복된 다음해 2월20일까지 인민군이 일부라도 남아 있었습니까.
  
   『아니지. 9·28 수복 후에 다 나가 버렸지. 그러고는 빨치산 세상이 된 거지』
  
   ―名簿에 적힌 피살자들이 죽은 날짜를 보면 9·28 이후에도 많이 죽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9·28 수복 이전에는 학살이 별로 없었어. 인민군이 가면서 방송이 나왔다지.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는데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라는 방송이 있었다더군. 생산유격대나 빨치산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니까. 국군이 오고 미군이 오고 하면 당시 우익 유가족들이 다 보복을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다 죽이라는 거였지. 그런데 또 유엔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을 서두른 것도 화근이 됐어. 빨치산 앞잡이들이 다 고해 바쳤거든. 그리고 나서는 선착순으로 죽였어』
  
  
   地主-머슴 갈등은 없었다
  
  
   ―생산유격대가 뭔가요.
  
   『인민군들이 자연 부락마다 다 조직해놨어. 생산유격대라는 조직은 인민공화국 조직이야. 그것이 말하자면 후방에서 군인의 역할을 하는 거야. 빨치산은 무기가 있었고 생산유격대는 대창을 들고 다녔어. 무기가 없었어』
  
   ―좌익들이 양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있습니까.
  
   『직접은 못 봤지』
  
   ―대전리에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습니까.
  
   『많아』
  
   ―가까운 친척 중에는 누가 희생당한 겁니까.
  
   『작은집 식구들이 죽었고… 아까 그게(피살자 名簿에 기록된 장씨 300여 명) 다요. 다 장서방네 식구들이니까. 그 명단에 나와 있는 장씨들의 대부분이 나와는 6촌 이내예요. 8촌도 몇 가구가 있고…』
  
   ―영광에서 왜 이렇게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 같습니까.
  
   『그 원인을 규명하자면 여순반란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여순반란 사건이 진압되자 반란군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까 각 부락으로 잠적해서 빨치산이 된 거니까. 백수면에도 여순반란 사건에 가담했던 군인들이 있었어. 그 사람들이 몰래 돌아와서 세력을 규합해가지고 구수산에 진지를 구축해서 밤이면 습격을 하고 다녔어. 그때는 밤손님이라고 했지. 누구를 죽였냐 하면 주로 군경 가족과 유지들이었어』
  
   ―6·25 전쟁 발생 전에 죽은 지역 유지가 있습니까.
  
   『있지. 당장 기억나는 사람으로는 지동현씨라고, 일제 때 보성전문 나온 양반이 있었는데 富農이었지. 그분이 빨치산들에게 피살됐어. 그렇게 빨치산들이 밤에 돌아다니면서 우익 인사들을 죽이고 하니까 좌우 간에 반목이 생길 거 아녀. 또 경찰은 6·25 전에도 사상이 수상한 사람은 3·1절 같은 행사가 열릴 때는 미리 예비 검거를 해가지고 끌고 가서 죽도록 때리고 하니까 좌익들도 감정이 생겼지.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군경가족 등 우익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영광의 농토가 꽤 넓던데 地主와 머슴 간의 갈등은 없었습니까.
  
   『여기는 地主와 머슴들의 갈등은 없었어. 地主들이 덕을 쌓은 분들이 많았어.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
  
   ―순전히 이념 갈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말씀인가요.
  
   『넓게 보면 그렇지. 이념 갈등이라고 볼 수 있지. 거기에 감정이 개입된 거고』
  
   張씨는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기자 일행에게 張씨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내 외가가 염산면 야월리야. 김해 金씨 집성촌인데 피란 온 사람을 하룻밤 재워주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 외가를 나가다가 빨치산에 잡힌 거야.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외가 식구 15명이 은닉죄로 몽땅 죽었어. 6·25는 정말 기억하기가 싫은 일이야. 기억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주니까 말야』
  
  
   사적인 감정으로 일가족 32명 학살
  
  
   영광읍 홍곡리에 사는 朴南道(박남도·81)씨는 매년 32명의 英靈(영령)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양친 부모, 형님 내외와 조카들 두 명, 큰집 식구들 등 27명이 6·25 때 피살당했고, 작은아버지의 가족 다섯 명은 1949년 초가을 빨치산들에게 학살됐다. 朴씨는 이들 英靈들을 위해 매년 음력 8월25일에 합동제사를 올리고 있다.
  
   가족들이 학살당할 당시 朴씨는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朴씨는 가족들이 좌익들에게 학살당한 이유를 『순전히 개인 감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일제 때 사촌형이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죽었어. 사촌형을 징용 보낸 게 그 마을에 P씨 성을 가진 구장(이장)이었다나 봐. 큰집에서는 구장에 대한 감정이 쌓였겠지. 해방 후에 큰집 4촌형들이 6형제였는데 죽은 형을 빼고 5형제가 구장네로 몰려가서 항의도 하고 행패를 부렸다나 봐. 「너희 때문에 우리 형제가 죽었다」고 말야. 어느 정도로 심하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쪽에서도 감정이 상했겠지. 그런데 그 구장 아들이 6·25 前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었어. 구장 아들로서는 우리 사촌형들의 행패를 가슴에 새겨 두었겠지. 그러다가 6·25 동란이 터진 거야. 해방 후 친일파로 몰려 몰락했던 구장네 집안이 다시 재기를 하게 됐지. 그리고는 큰집 식구들을 반동으로 몰아 죽이고 우리 식구들까지 죽여버린 거야. 우리 가족이 죽을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어』
  
   朴南道씨는 가족들의 정확한 피살일자를 모르고 있었다. 피살자 名簿에는 朴씨 가족들이 1950년 9월19일에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朴씨는 그해 10월에 광주에서 대한청년단 영광지부를 조직하면서 단장으로서 경찰과 함께 영광에 들어왔다. 朴씨가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영광에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향 마을 사람들은 학살당한 朴씨 일가들의 시체를 찾아다가 마을 앞에 진열해 놓았다. 베로 시신을 감아 놓기는 했지만 시신들이 너무 부패해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시신이 아버지 시신이고, 저 시신이 어머니 시신이다』고 가르쳐 주는 대로 절을 올렸다.
  
   『그날 산천초목이 떠나가라 하고 울었어. 울어도 울어도 피맺힌 한이 풀어지지 않더군. 가족들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지』
  
  
   『내 代에서 악연의 고리 끊어야…』
  
  
   그때의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은 朴씨는 지금도 말을 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맺힌 한을 생각하면 복수를 하고 싶었고, 대한청년단 단장이라는 당시의 지위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朴씨는 보복을 단념했다. 자신의 代에서 모든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한청년단원들 중에 가족의 복수를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朴씨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고 한다.
  
   실제로 朴씨는 멋모르고 부역에 나섰거나 빨치산을 도왔던 영광군 군남면민 2000명을 설득해 자수를 시키는 등 좌익에 가담했던 인사들의 구제에 앞장섰다.
  
   전쟁이 끝난 후 전남도의원을 지낸 朴씨는 미군과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가 크게 거론되는 데 불만이 많았다.
  
   『어떻게 미군이나 국군한테 죽은 것만 양민학살인가 말야. 저쪽(공산당) 놈들한테 민간인이 죽은 건 양민학살이 아니냔 말야. 좌익이 양민을 더 죽였지 우익이 더 많이 죽였느냐 말야. 가족이 죽창에 찔려 죽고 몽둥이에 맞아죽지 않은 사람들은 그 유족들의 고통을 몰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같아』
  
   朴씨의 불만은 現 정부의 對北정책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대통령이 지금처럼 북한을 돕는 거 못마땅해. 우리 경제가 성장해서 이북을 관리할 수 있는 여건이 됐을 때 도와야지. 우리 남한만 해도 결식학생이 얼마나 많아. 이북에 줄 돈으로 그 아이들을 도우란 말야, 내 얘기는』
  
   기자는 朴씨와의 인터뷰 중에 영광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기자는 백종옥 전무의 도움을 받아 朴씨의 집을 찾아갔다. 朴씨와의 인터뷰에는 백전무도 자연스럽게 동석을 하게 됐다. 朴씨와 백전무는 6·25 전쟁 때 가족이 입은 피해의 정도를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朴씨의 말.
  
   『백전무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둘 다 지역유지라면 유지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서로의 피해를 모르고 살았어. 빨리 잊기 위해서 말을 않고 살았던 거지. 우리뿐만 아니라 다들 그래』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에 사는 安喜柱(안희주·76)씨는 스물네 살에 6·25를 맞았다. 당시의 주소는 염산면 상계리. 安씨 집성촌으로 영광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숙청이 심했던 곳』이다. 安씨는 6·25 때 어머니와 네 형제 등 20명의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는 安씨가 초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사망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安씨 형제들의 경우는 한 집에 한 명씩은 조카들이 학살을 모면해 代를 잇게 됐다는 점이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安씨는 광주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농사를 짓고 있었고, 바로 위의 형이 면서기를 했다. 좌익들에게 크게 꼬투리를 잡힐 환경은 아니었다. 安씨는 인민군들이 광주에 들어오기 직전에 광주를 탈출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경찰이 영광지역의 치안을 회복한 1951년 2월에 학도병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염산면과 백수면에서는 빨치산 토벌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향에서 그가 만난 것은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 한 번 무너졌던 安씨의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입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安씨의 가족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노인이든 애든 가릴 것 없이 같은 姓씨면 한 구덩이에 몰아넣고 죽였다는 거야. 누구 하나를 죽여야 한다면 그 가족 전체를 죽인 거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잖아. 가족들이 학살당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그랬어』
  
  
   부인과 아들, 손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사를 참살
  
  
   安씨는 위안을 삼으려는 듯 염산면 축동리 동산부락의 朴씨들, 같은 축동리 축장 마을의 김해 金씨들, 염산면 반암리(현재는 군남면)의 韓씨들도 滅門之禍(멸문지화)에 가까운 학살을 당했다는 말도 곁들였다.
  
   염산면에는 이웃 함평군까지 이어지는 월암산(338m)이 있다. 염산지역 빨치산의 본거지가 됐던 곳이다. 월암산 밑에 오동리는 남조선 노동당 지하총책이었던 김삼룡의 고향으로 그를 추종하는 지역 빨치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염산면은 이곳 사람들이 6·25 전쟁 때 염산면 사람들의 절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증언을 할 정도로 좌익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백수면의 빨치산들이 칼이나 죽창으로 양민을 학살한 반면 이곳의 빨치산들은 설도港에다 산 채로 水葬(수장)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다로 던져버린 것이다. 일가족이 몰살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염산면에서는 특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많았다.
  
   영광군內에서 신도들이 가장 많이 학살된 교회는 염산면에 있는 염산교회다. 염산교회는 全교인의 3분의 2가 넘는 77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학살 사건도 9·28 수복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염산교회 김태균(47) 담임 목사가 전하는 당시의 이야기다.
  
   서울 수복 이후 영광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익청년들은 9월29일, 이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이때부터 좌익들의 보복이 시작됐다. 그해 10월7일 좌익들은 염산교회에 불을 지르고 기삼도씨를 비롯한 청년 신도들 다섯 명을 잡아갔다. 기삼도씨는 좌익들의 죽창에 찔려 죽었고, 나머지 청년들은 새끼줄에 서로 얽혀 매인 채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10월8일에는 이 교회 집사였던 노병재씨 일가족 아홉 명, 동생인 노병인씨의 일곱 식구, 역시 동생인 노병규씨의 식구 일곱 명이 설도 수문에 水葬된다. 노씨 일가만 23명이 같은 날 학살당한 것이다. 노씨 일가 외에도 김동곤 장로의 일가족 등 수많은 염산교회 신도들이 바닷물에 던져졌다. 그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1950년 3월에 염산교회 3代 목사로 부임한 김방호 목사 일가의 죽음은 끔찍함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교회가 소실되고 신도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金목사는 한 신도의 집에 지하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다.
  
   10월26일 좌익들이 지하교회를 덮쳤다. 그들은 金목사의 부인, 아들, 손자 등 여덟 명의 가족을 한 줄로 세워 놓고 金목사의 아들들에게 몽둥이를 주면서 金목사를 치라고 했다고 한다. 金목사의 아들들은 차마 아버지를 몽둥이로 치지 못하고 『함께 죽여 달라』며 애원을 했다. 좌익들은 金목사의 아들들을 발로 차버린 후 직접 몽둥이와 죽창을 들었다. 그들은 金목사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패서 金목사를 살해했다. 그 뒤를 이어 金목사의 부인, 아들, 여덟 살과 다섯 살이었던 손자들이 차례로 그들의 몽둥이에 맞고 죽창에 찔려 죽었다.
  
   같은 염산면의 야월교회도 좌익들에 의한 집단학살이 벌어진 곳이다. 교인 65명이 학살당했다. 염산교회의 피살자 77명보다 숫자는 적지만 학살당한 65명은 당시 야월교회의 신도 전부였다. 全교인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월교회에서 학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염산교회와 같다. 청년 신도들이 국군과 유엔군 환영대회에 참석을 한 것이다.
  
   살해하는 방법은 달랐는데 야월리에 난입한 빨치산들이 全교인을 교회에 모아 놓고 석유를 뿌린 후 교회당과 함께 불태워 죽였다고 한다.
  
   현재 염산교회는 이 교회의 신도로서 좌익에 학살된 77명의 영혼을 기리는 기독교 聖地(성지)로 꾸며지고 있다.
  
  
   靈光경찰서에서 보도연맹원 186명 처형
  
  
   영광 사람들 중에는 영광군에 피살자가 많은 이유를 좌익들의 무자비한 살육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보도연맹 처형 사건과 관련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도연맹은 광복 후 좌익 운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단체로서 1949년에 조직됐다. 1949년 말 현재 전국적으로 30만여 명이 가입해 있었다. 6·25 발발 후 정부와 경찰은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했다. 이른바 보도연맹 처형이다.
  
   이 보도연맹 처형사건은 영광군에서도 일어났다. 영광군 군서면에 사는 조영표씨는 영광읍에서 보도연맹 처형이 일어난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조장현)가 보도연맹원이었고, 그날이 부친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음력으로는 1950년 5월24일이고 양력으로는 7월9일이다. 인민군이 영광에 들어오기 14일 前이다.
  
   조씨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 밑에서는 살 수 없는 자유주의자였다』면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이 영광에서만 200여 명쯤 될 것』이라면서 『보도연맹원들이 희생당함으로써 그 가족에 의해 보복이 있었고, 또 그 보복에 대한 보복이 이어지면서 영광군민의 희생이 더 커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영광군 번영회 徐檀(서단·74) 회장도 조씨의 생각과 비슷했다. 徐회장은 『영광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친척이 되는 백수면 출신의 정황삼이라는 사람이 「삼각산 유격대」라는 부대를 끌고 와서 「반동」이라고 죽인 사람이 꽤 된다』면서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함으로써 먼저 민간인 학살의 동기를 부여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徐회장은 또 『영광경찰서에서만 186명의 보도연맹원이 처형됐고, 백수면 등에서도 보도연맹원 처형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희생된 보도연맹 숫자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면서 『좌익보다는 우익에 의한 민간인 피살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徐회장이 추정하는 左右 민간인 피살자는 3만8000여 명이었다.
  
   趙南植(조남식·71) 영광문화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趙원장은 영광군의 민간인 피살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을 다른 지역에 비해서 늦은 수복에서 찾았다.
  
   『영광은 다른 지역보다 수복이 한 달 정도 늦었습니다.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인민군 잔당들이 모여든 곳이 영광입니다. 바닷가치고는 제법 높은 산도 있고 유사시에는 바다를 통해 北으로 갈 수도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1951년 2월20일에 우리 아군에 의해 구수산 갓봉이 점령될 때까지 영광의 낮과 밤을 경찰과 번갈아 가며 지배할 수 있었던 겁니다. 유엔군 환영대회 등 여러 가지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적들의 침략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진 만큼 민간인들의 희생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좌우익 합쳐서 3만여 명 죽었다』
  
  
   趙원장의 영광군 민간인 피살자 추정치는 좌우익을 모두 합쳐 3만명이었다.
  
   영광군 순교자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펴낸 문건 「한국전쟁(6·25 동란)과 영광지방 순교자 현황」에는 영광군의 당시 피해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국군들이 영광읍내에 진주한 1950년 10월30일경에는 영광읍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사망자 수만 하더라도 군민 13만 중 3만여 명을 헤아렸는데, 그 중에서도 염산면 일대는 1만여 면민 중 목숨을 잃은 자만 5000여 명이 넘었으니 그 당시 영광군 일대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피살자를 3만여 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수치는 정확한 통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정황 등 추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趙南植 원장은 『지금까지는 영광지역에서 6·25 전쟁 때 발생한 민간인 피해 상황이 통계 등으로 정리된 것이 없으며 피살자의 명단이 공개된 적은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영광신문 이근철(36) 문화팀장은 『그동안 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영광에서만 2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해방 이후 내려오던 좌우익 갈등이 전쟁으로 더 심화될 수 있었고 그런 것들이 좌우 상호간의 살육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분석을 내놓았다.
  
   李팀장은 영광의 지역적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광은 개화기에 유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진화한 곳이었습니다. 1920년에 이 벽지에 영광중학교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로 깨어 있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1921년에는 영광유치원이 개설되기도 했습니다. 광주하고 가깝게 있지만 독자적인 문화행태를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서 남을 배척하는 심리가 강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郡民 내에 갈등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영광은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지 못한 곳입니다』
  
   기자는 충심으로 이 기사가 영광군민들의 새로운 반목을 낳는 불씨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어 서로를 치유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다. 영광군민들의 화합을 위해 徐檀 회장은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영광군민의 총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6·25 때 입은 상호간의 피해 때문입니다. 마음의 앙금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거죠. 이제는 彼我간에 앙금을 푸는 郡 차원의 행사가 필요합니다.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합동으로 드린다거나 종교 합동으로 위령제를 지내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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