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海灘의 密使, 세지마 - 韓日 막후(幕後) 조정자로 변신한 소설 「不毛地帶」의 주인공
  
  일본육사·육대를 수석으로 졸업, 대본영 참모로서 태평양전쟁을 기안했던 세지마는 11년간의 시베리아 포로생활 뒤 이도오쮸 회장을 거쳐 「나까소네의 제갈량」으로 국가재편성에 참여, 일본 보수화의 책사 역할을 하면서 한일간의 새 파이프라인으로서 권익현(權翊鉉)·박태준(朴泰俊)·이병철(李秉喆) 인맥을 창구로 하여 원대한 對韓작전을 펴고 있다.
  
  <1986년 9월 월간조선>
  
  「대망」에서 「불모지대」까지
  
  안동농림학교 시절, 김재규(金載圭)학생의 별명은 노기대장이었다. 노기대장은 러일전쟁 때 여순요새를 함락시킨 장군이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따라서 자결한 일본 무사정신의 화신이었다. 金載圭는 노기 대장을 존경했고, 그를 닮으려고 했다. 그런 그가 가미가제 특공대원을 배출하기도 했던 일본 요까이찌(四日市)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지원, 입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겠다.
  
  10·26직전 金載圭가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는 증언은 많다. 사무라이 영화를 비디오 테이프로 즐겨 보았고, 무사들의 노래가 녹음된 카세트를 승용차에 꽂고 다니며 들었으며, 사격장에 나타나 기관단총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애독한 소설은 「대망」(大望)이었다. 일본소설가 야마오까 소하찌가 쓴 대하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번역판인 「대망」은 70년대초 국내에서 수십만 질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죽음의 미학」을 추구하는 일본무사들의 격정과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는 도꾸가와의 야망이 한국인들을 매료했던 것이다.
  
  10·26당일 대통령의 두 경호원을 사살했던 명사수 朴善浩는 검찰관의 신?【?『金부장은 본인의 은사이고, 직업도 알선해 주고, 본인을 알아주고, 삼국지·대망 등과 같은 책을 읽어라, 검소한 생활을 하라, 우쭐거리는 행동을 삼가라는 등 좋은 말씀을 하여 왔기에 본인이 평소부터 존경하여 왔습니다』고 진술했다.
  
  궁정동 경비원들이 무조건 朴善浩의 명령에 따라 총질을 하고, 朴善浩도 金載圭의 갑작스런 지시에 무조건 복종함으로써 10·26이 일어났다. 이들은 재판정과 서울구치소의 교수대에서까지도 그런 무조건적인 복종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라져갔다. 「대망」에 이어 슈퍼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여류작가 야마자끼 도요꼬(山崎豊子)가 쓴 대하소설 「불모지대」였다.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대본영 참모 이끼 다다시가 참혹한 시베리아 수용소의 포로 생활을 거치고 귀환, 종합상사에 들어가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는 이 소설은 특히 기업체에서 많이 읽혀졌다. 삼성 李秉喆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이 책을 권했고, 독서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선 이 책을 교재로 쓰기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현대 일본의 사무라이」인 상사맨이었고, 그런 점에서 「대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비슷하고, 실제로 독자층도 거의 같았다고 한다.
  
  「대망」이 크게 히트한 그 바탕에서 「불모지대」도 많이 팔린 수 있었다는 얘기다. 「불모지대」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바로 그때 몰락한 제세산업의 창업 주 李彰雨가 쓴 「옛날, 옛날, 한 옛날에」가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독설이 많은 이 책엔 좌절한 젊은 기업가가 상사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몰이해에 항변하는 내용이 가득 들어 있어 상사맨의 활약상을 미화한 「불모지대」와는 미묘한 대조를 보였다.
  
  종합상사 계획에 자문 역할
  
  「불모지대」의 주인공 이끼 다다시의 모델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가 밀사의 임무를 띠고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의 정계 및 재계를 무대로 소설보다도 더 거창한 스케일의 활약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불모지대」가 국내 독서계를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이 전설적인 대본영 참모출신이 일부러 그런 시나리오를 쓴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한국등장은 타이밍에서 절묘한 바가 있었다. 사무라이적인 분위기가 「대망」을 타고 맨 먼저 상륙하여 정지작업을 한 뒤, 신화적 이름이 「불모지대」로 소개되어 무대가 준비되고, 드디어 장본인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과정은 「스타탄생」의 연출로선 압권이었다.
  
  그가 「나까소네의 밀사」로서 한일경협 40억 달러 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직후, 한국의 어느 재벌은 세지마 류조의 전기를 번역하여 사원연수교재로 썼다. 일본엔 「세지마 류조를 연구하는 모임」이 많다고 한다. 세지마 류조가 한국의 경제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첫 번째 관여는 1973년이었다. 이해 2월 일본 종합상사 이도오쮸의 부사장 세지마는 李洛善 당시 상공부 장관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의 경제사정을 살핀 뒤 「한국에서의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서」를 李장관에게 제출했다. 세지마는 지난 81년 3월17일 이도오쮸 회장실에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趙東成교수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金鍾泌 총리가 그때 수출 1백억 달러 달성은 지상명령이라면서, 그것을 위해 종합상사 육성에 관한 자료를 만들어 서울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계획서를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세지마는 이 계획서에서 종합상사가 이익을 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므로 정부가 강력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趙교수는 81년 인터뷰에서 세지마 회장(당시)에게 『수출실적(매출액)과 이윤 가운데, 종합상사는 어느 쪽을 더 중시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세지마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이나 한국이나 국가의 요구는 수출이 최우선이고, 따라서 수출실적을 이윤보다 중시해야 한다. 이익이 나지 않아도 수출을 중단해선 안 된다. 다른 영업이익을 수출쪽으로 전용해서라도. 국가의 발전 없이는 기업의 발전도 없다』고 말했다. 종합상사를 단순한 영리집단으로만 보지 않고 국가의 한 기관으로 보는 세지마의 국가주의적 관점이 잘 드러난 얘기였다.
  
  「한국종합상사」란 책을 쓰기 위해 2백여 명의 경영자를 면담했던 趙교수는 『세지마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머지 면담자들의 얘기를 다 모아놓은 것보다 더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을 보여주더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세지마 계획서」를 접수한 직후, 다시 삼성·대우 등 재벌기업에 대해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건의안을 내도록 했다. 정부는 이 국내기업의 건의서와 「세지마 계획서」를 참고하여 1975년 4월30일 「종합상사 지정요령」을 공포, 종합상사 중심의 수출전략을 채택했다. 세지마는 삼성물산이 종합상사가 되자 李秉喆회장의 부탁을 받고 부장급 직원 4명을 삼성에 파견, 무역관계 업무를 자문하도록 했다.
  
  이들 이도오쮸 직원들은 삼성의 고문 대우를 받았는데 3년 전 철수했다. 이들 파견직원 중 한 사람인 고바야시는 『종합상사의 기능은 정보 그 자체이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고 강조하곤 했다. 세지마는 1980년에 대만 정부의 부탁을 받고 그곳의 종합상사 계획에도 자문을 했다. 한·중·일 3국의 종합상사 운영에 작전 참모역할을 한 것이다,
  
  세지마―李秉喆·김정열(金貞烈)·권익현(權翊鉉)
  
  세지마와 친한 소수의 한국인 중 반드시 꼽히는 사람은 이병철(李秉喆)회장이다. 나이는 李회장이 1910년생으로 한 살 위다. 두 사람은 인상이나 체격도 흡사하다. 깐깐한 분위기도 공유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李회장은 가장 일본적인 인사관리를 하는 경영자로 꼽혀 서로 통할 점도 많다. 소설 「불모지대」에는 주인공 이끼다다시의 한국인 친구가 등장한다. 이모라는 이 친구는 이끼와 육사동기이며 큰 회사사장이고, 한국고위층과도 잘 통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한때 이 친구는 고 이종찬(李鍾贊)장군이나 김정열(金貞烈)장군을 모델로 한 것이란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엔 세지마의 육사동기생이 없다. 세지마는 일본육사 44기다. 이형석(李炯錫)장군(소장예편)은 44기로 입교했으나 병을 얻어 1년 쉬고 45기로 졸업했다. 李장군은 재학 때나 졸업 뒤 한번도 세지마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고 李鍾贊장군도 세지마와 별 면식이 없었다고 그의 동생 이종승(李鍾勝. 보라매회 회장·공군대령 예편)은 말했다. 金貞烈장군은 세지마보다 나이는 여섯, 일본육사기수로는 10기 후배다. 국제화재보험의 신응균(申應均)고문(일본육사 53기·육군중장예편)은 『아마도 작가가 이형석(李炯錫), 李鍾贊, 金貞烈장군을 모델로 하여 한 인물로 적당히 빚어낸 듯하다』고 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金貞烈은 세지마와 친면이 있다고 한다. 지난 71∼73년 사이 삼성물산 사장으로 일한 그는 李秉喆회장과 친한 세지마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던 것 같다. 지금 한국정계에서 세지마의 상대역을 맡고 있는 權翊鉉 민정당 고문(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도 자신이 10·26 뒤 세지마와 가깝게 됐다는 항간의 추측을 부인하면서 삼성정밀의 전무시설(1978∼79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세지마―李秉喆라인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친 것 같다. 세지마는 자신을 모델로 한 「불모지대」를 읽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인 야마자끼는 한 두번 만났다는 것이다. 소설 내용은 비서가 읽고 이야기 해주어 대충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權翊鉉민정당 고문은 세지마를 만난 자리에서 소설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세지마는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묘사한 부분은 거의 사실이지만 그 뒤 상사생활이나 여자관계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세지마와 가까운 일본인 중에는 세지마가 「불모지대」를 실제로는 읽었지만 일부러 안 읽은 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평생을 참모형으로 살아온 세지마다운 처신이란 얘기다. 그런 태도가 적어도 일본에선 그의 인기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하다.
  
  세지마는 매스컴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공식 석상에서 강연은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삼가는, 입을 아주 조심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사나 책은 거의가 세지마 주변인물을 상대로 취재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가 한일관계에서 있어서 수행한 역할도 그의 입을 통해 확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사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정보장교 출신인 權翊鉉의원도 『상대방이 말을 않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權의원은 그러나 세지마와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비밀회담을 한 사실은 시인했다. 세지마의 행적은 그 줄거리가 대강 이러했던 것 같다.
  
  세지마-朴泰俊 인맥의 浮上
  
  세지마는 朴正熙 대통령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육사 57기 졸업인 朴대통령에게 세지마는 나이는 여섯, 기수로는 13기가 위다. 태평양 전쟁계획을 기안한 세지마는 관동군에서 일한 적도 있어 만주군 출신인 朴대통령도 그의 명성을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리란 추측이다. 세지마가 한국의 고위층과 더욱 가깝게 된 것은 10·26이후였다. 朴대통령의 죽음으로 한·일 인맥도 단절된 상황에서 그 맥을 다시 잇기 보다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부설해야 할 필요성이 양국간에 다같이 대두됐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 신시대에 어울리는 비공식 채널의 탐색이 시작된 것이었다.
  
  한국에서 새 권력담당자가 등장한 직후인 1980년 1월29일 세지마(당시 이도오쮸 상담역)는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나가노 시게오, 부회장 고또오 노보루(지금 회장)와 함께 방한하여 고위층을 예방했다. 이들은 81년 2월에도 한국에 왔었다고 한다. 한일간의 새 인맥구축을 위한 탐색이었으리란 추측이다. 나가노 회장은 이즈음 포항종합제철의 朴泰俊회장을 세지마에게 소개, 두 사람은 가깝게 됐다고 일본 언론에선 보도하고 있다.
  
  신일철(新日鐵)의 사장시절 나가노는 포항제철 건설 문제로 朴회장과 친면을 갖게 됐었다. 朴회장은 소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고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를 졸업, 귀국하여 육사 6기로 임관한 일본통이다. 육사생도시절 중대장은 고 朴正熙대통령이었고 그 인연으로 5·16을 같이 하고 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을 거쳐 포철을 맡게 됐다. 뿐 아니다. 朴회장은 중령시절 육사 교무처장으로 일했다. 학과를 조정하고, 육사 11기부터 학사학위를 받게 하는 등 이른바 정규육사의 기틀을 잡는 데 큰 몫을 했다. 朴회장은 63년에 소장으로 예편했는데 64년 1월 朴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켜야겠는데, 자민당에서 일본을 잘 알고, 일본정객들이나 경제계 인사들과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달라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네밖에 없네라고 하십디다』 이렇게 하여 朴泰俊은 일본에 가서 여덟달 동안 기라성 같은 일본의 정, 재계 인물들을 만나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는 유세행각을 폈다고 한다.
  
  『정계에선, 이께다, 사또, 오히라, 경제계에선 경단련회장, 야하다제철 사장, 후지제철(뒤에 신일철) 사장 등을 만나 뒤에서 한일회담을 도왔죠. 그때 만들어진 인맥은 내 개인적인 인맥이 아니라 국가적인 인맥이오. 우리나라에 이만한 제철소가 선 것도 그 인맥 때문이오』 朴회장이 세지마와 알게 된 것도 10·26뒤가 아니라 포철 사장 시절이란 것이 朴회장 측근의 얘기다. 포항제철의 제강공장은 가와사끼 제철이 이도오쮸를 수출 창구로 하여 건설했기 때문에 이도오쮸 부사장(뒤에 부회장, 회장)이었던 세지마와 친면을 갖게 됐다는 얘기다.
  
  다만 기존의 한일간 인맥이 단절된 10·26 뒤 朴泰俊―세지마 라인의 중요성이 갑자기 부각된 것은 확실한 듯하다. 지난해 말 朴회장은 최경록(崔慶祿)주일대사의 후임으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포철을 대신 맡을 사람이 없고 하여 이규호(李奎浩)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임명됐다. 朴회장은 李대사가 공식부임하기 전에 李대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정·재계인사들에게 인사를 시켰다고 한다. 물론 세지마를 李대사에게 소개했을 것이다. 朴회장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 발족한 한일경제협회의 한국측 회장직도 맡아 세지마와 상대할 자연스런 자리를 확보했다.
  
  세지마―權翊鉉창구가 정계용이라면 세지마―朴泰俊창구는 재계용이다. 세지마―李秉喆관계는 다분히 개인적인 친면 관계로 보인다. 세지마―崔慶祿대사 관계도 공식적인 것이었지만 각별했다. 육사 11기생들의 생도시절 육사교장이었던 崔慶祿장군(육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 역임)은 5공화국 출범 직후 주일대사로 임명됐다. 崔대사는 일제시대 일본 구마모도 중학교를 졸업했고, 예비사관학교를 나온 경력으로 해서 朴회장처럼 일본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崔대사도 85년말 귀임한 뒤, 일본에서 「세지마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아 한일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친밀하게 된 점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세지마 밀사―權翊鉉의 담판
  
  1982년 11월30일밤 나까소네 수상은 세지마를 도쿄의 자기 집으로 불렀다. 나까소네 수상은 세지마에게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여 현안문제를 매듭짓고 싶다는 뜻을 털어놓으면서 밀사역을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때 세지마는 총리직속의 임시행정조사위원회의 핵심위원으로서 나까소네의 측근 상담역을 맡고 있었다. 權翊鉉고문(민정당)에 따르면 나까소네가 스즈끼 수상 내각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을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만났는데, 이야기 도중 갑자기 『내가 수상이 된다면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수상 취임 3일 뒤 나까소네 수상으로부터 權고문에게도 연락이 왔다고 하니 이때부터 세지마―權翊鉉라인이 나까소네 방한의 정지작업을 책임지게 됐던 것이다. 세지마의 등장 이전에 일본측은 朴정권 시대에 잘 통하던 모오리 마쓰헤이(당시 한일의원 연맹 간사장)를 보내 막후교섭을 시도했으나 면담도 못하고 돌아갔다. 이때 모오리 의원은 고다마 요시오 등 우익폭력조직과 관계가 깊은 일본인을 중계자로 하여 접근을 시도했으나 고다마같은 「흑막」이 활약하던 그런 무대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82년 12월9일 세지마는 극비리에 오사카 공항을 출발, 김해 공항에 도착했다. 귀빈실에서 權翊鉉 당시 민정당 사무총장을 만나 회담했다. 양쪽이 모두 양국정상의 특명을 받고 온 상황이었으므로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즉, 교과서 왜곡문제와 한일 경협차관 문제로 냉각된 두 나라 관계를 나까소네의 공식방한으로써 타개한다는 기본적인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세지마는 이날 중으로 도쿄에 돌아가 한밤중에 나까소네의 사저를 방문, 이 성과를 보고했다고 한다.
  
  며칠 뒤엔 權총장이 비밀리에 오사카로 날아가, 골프여행을 한다면서 하루 전부터 로얄 호텔에 묵고 있던 세지마를 만났다고 일본언론에선 보도했다. 일본 외무성의 기우찌 아시아국장이 이 비밀교섭에 참여한 것은 그 뒤였다는 것이다. 82년 12월30일 세지마는 외무성의 동아시아과장만 데리고 다시 서울에 와서 청와대를 방문, 경협차관문제를 40억 달러선에서 타결하기로 하는 등 83년 1월로 예정된 나까소네 방한의 준비작업을 끝냈다. 남은 것은 양국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에 의한 확인뿐이였다. 이렇게 해서 한일간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됐던 것이다. 「나까소네의 키신저」란 얘기를 듣게된 세지마는 천황의 손녀 결혼식에서 주례를 설 정도로 천황가의 신임도 받고 있어 84년 9월의 한일정상회담 등 두 나라 사이의 큰 행사에는 막후 조정자 역할을 하기에 적격이다.
  
  태평양 전쟁 기안, 2백개 사단 운용
  
  여기서 잠시 세지마는 어떤 인물인가를 알아보자. 그는 1911년 도야마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와미 중학교 시절, 육군의 대연습 광경을 구경하고는 감격, 군인의 길을 택해 도쿄 유년학교를 지망했다. 유년학교는 3년제 고등학교 과정으로서 일본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훈련을 받는 곳이다. 40대 1의 경쟁률을 겨우 뚫고 거의 꼴찌로 합격한 세지마는 졸업할 때는 수석이었다. 일본육사에 자동적으로 입학, 1932년 7월 육사 44기로 졸업했다. 3백15명의 졸업생 가운데 수석을 하여 천황이 주는 은시계를 받았다.
  
  육사생도시절 만주에선 관동군이 중앙의 지시를 무시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전체를 점령,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사변의 주동자는 관동군 작전 참모 이다가끼 세이시로(뒤에 육군상·조선주둔군사령관·전범으로 처형)와 이시하라 간지의 콤비였다. 좌관(左官‥영관)급 참모들이 장성급 지휘관을 얼굴 마담으로 삼고 군을 좌지우지한 것이 일본이 대륙침략과 군국화로 치닫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세지마의 육사 생도시절에는 청년장교들이 5·15사건을 일으켜 이누가이 수상을 죽이고, 경시청 등을 습격했으나 정권탈취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거사엔 육사생도 일부가 참여, 퇴학당하기도 했다. 이들 청년 장교들은 농촌의 피폐와 재벌의 횡포, 정당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국정을 일대 개혁하자는 이른바 「소화유신」을 주장했다.
  
  이런 질풍노도의 시기에 육사를 졸업한 세지마는 고향의 보병연대에 배속되어 3년을 보낸 뒤 만주의 관동군으로 전출되어 변경에서 항일게릴라들을 토벌하는 일을 했다. 1936년 2·26사건이 터졌다. 도쿄에 주둔한 부대의 위관급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천황이 그들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 반란으로 사이또 내(內)대신(전조선총독)등 여러 중신이 살해됐다. 반란군은 오까다 수상 관저도 습격 수상으로 보이는 사람을 사살했는데 그는 오까다 수상의 처남인 마쓰오 예비역 해군대좌였다. 마쓰오는 세지마의 처 기요꼬의 아버지였다.
  
  세지마는 1937년 사단장의 추천으로 육군대학에 응시, 30대 1의 관문을 통과, 합격했다. 일본군부에서 출세하려면 육군대학을 나와야 했다. 육군 대학 입학자를 내기 위해 부대에선 응시자로 추천된 장교에겐 휴가를 주고, 호텔까지 잡아주며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세지마의 입학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2년 뒤 졸업할 때는 또 수석이었다. 유년학교, 육사, 육대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 장교는 쯔찌(　政信), 나가다(永田鐵山)등 일본육군의 엘리트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세지마는 육대 수석 졸업생이 졸업식 때 천황 앞에서 하게 되어 있는 이른바 「어떤 강연」에서 「일본군의 통수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천황과 7.5m 사이를 두게 되어 있는 강연석을 5m로 좁혔다는 일화가 있다. 1939년 5월 세지마는 28세의 중좌로서 대본영의 육군참모겸 해군참모작전과 작전반에 배속됐다. 2차 세계대전의 전야였다. 세지마는 갖가지 계획서를 작성, 육군참모총장을 수행, 궁성으로 들어가 천황에게 보고하는 일을 주로 했다. 물론 천황을 직접 대면하지는 못하고 총장이 보고할 동안 옆방에서 대기해야 했다.
  
  세지마는 태평양 전쟁의 계획 수립에도 깊게 관여했다. 진주만 폭격 17일전에 전투부대에 통보된 개전명령서는 그가 기안한 것이며 「히노데와야마가다」(日出은 山形)란 개전지시의 암호문도 세지마의 작품이었다. 태평양 전쟁중 세지마는 만주, 중국, 남방 등에 나가 있는 일본 육군의 병력운용을 맡았다. 1941∼45년간 대본영육군부 명령은 약 1천4백통인데 거의가 세지마가 관계한 것이었다. 2백개 사단 6백만의 병력을 좌지우지한 것이 이 젊은 작전참모였다. 세지마는 카다르카날에서 일본군의 철퇴를 주장, 관철시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945년 4월부터는 연합함대의 참모를 겸직하여 한때는 육군참모본부, 대본영, 연합함대의 세 참모직을 겸했다.
  
  11년간 포로생활, 신문으로 공백 복원
  
  45년 7월17일 그는 관동군 참모로 전출됐다. 임박한 대소(對蘇)전에 대비하고, 패전 뒤의 처리문제를 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소련이 8월9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만주를 침공, 관동군은 붕괴되고 세지마는 항복 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에서 11년간을 포로로 보냈는데 「레 미제라블」을 수십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1946년 9월18일 포로생활중이던 세지마는 소련군에 의해 일본으로 압송되어 도쿄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세워졌다.
  
  한시간 동안 연합군 검찰관으로부터 신문을 당했다. 검찰관들은 세지마로부터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유리한 진술을 얻어내려고 했으나 세지마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부인하는 쪽으로 증언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세지마는 가족과의 면회를 스스로 사절하고 당일 시베리아로 돌아갔다. 세지마가 11년간이나 포로생활을 한 것은 이런 「비협조」에 대한 소련측의 보복이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1956년 8월19일 세지마는 일본으로 귀환했다. 세지마보다 여섯 살 아래인 기요꼬 부인은 한때 긴자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두 딸을 데리고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세지마는 관동군에 있을 때나 시베리아로 끌려가서도 혼자서 일찍 송환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동료들에 대한 의리로 해서 그런 기회를 거절했다고 한다. 崔慶祿 전 주일대사는 최근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사시절 여러 번 신세를 졌지요. 한일간에 문제가 생기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곤 했습니다. 제가 미안해서 전화를 걸고, 찾아 뵙고 부탁드리겠다고 하면, 언제나 펄쩍 뛰어요. 대사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분인데 여기까지 오시게 할 수 없다면서 꼭 그분이 먼저 움직여요. 하루는 나를 찾아와, 대사각하, 사죄해야 할 일이 있다고 머리를 숙여요.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을 했다는 겁니다. 뭐냐하면 그분 가족이라 해보았자 노부부뿐인데, 원래 방이 두칸밖에 안 되는 낡은 집에 살았어요. 그런데 부인이 신경통으로 아파서 최근에 조금 좋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게 양심에 걸린다는 거예요. 그 노부부를 같이 만난 적이 있는데 세지마씨가 자기 손을 만져 보라고 해요. 꼭 거북이등처럼 거친 손이었어요. 시베리아에서 영하 40도 아래서 강제 노동하다가 동상에 걸려서 그렇게 됐다고 그래요. 부인의 손도 마찬가지인데, 세지마씨는 귀국할 때 부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해요. 그래서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세지마는 귀국 뒤에도 1년반 동안 실업자 생활을 보내야 했다. 40대 중반의 그는 이 기간에 11년간의 포로생활로 생긴 공백을 메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崔 전 대사에 따르면 세지마는 도서관에 가서 지난 11년간의 신문을 빠짐없이 읽으며 잃어버린 세월을 복원해 갔다고 한다. 『아무리 빨리 읽어도 하루 열흘 분밖에 못 읽겠더라고 해요. 그래서 신문철을 아예 대출하며 집에서 밤새워 읽으니 하루에 한달 분을 소화하겠더랍니다』 세지마는 몇 년 전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를 정보의 귀재라고 이야기하지만 제임스 본드도 아닌데, 특별한 정보가 그리 많을 리도 없다. 나의 가장 큰 정보원은 내외의 신문기사다. 목적의식을 갖고 신문이나 자료를 읽으면 개개의 정보에서 차원 높은 새로운 정보가 생긴다』
  
  세지마는 이도오쮸 회장 시절 중공이 베트남을 침공하기 석달 전에 이를 예언했었다고 한다. 그 비결에 대해서 세지마는 『신문을 알뜰히 읽고 분석하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종합상사란 정보의 흐름을 사물의 흐름으로 바꾸는 조직이다』고 정보를 강조하곤 했다. 세지마의 실업자 시절 가족의 생계는 가축시험장에 취직한 부인이 맡아서 꾸려나갔다. 저녁밥을 세지마가 지어놓고 부인의 귀가를 기다렸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