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오쮸에서 석유에 집착
  
  세지마는 선배장군의 소개로 이도오쮸 상사의 항공기부 과장대리로 입사한다. 1958년 12월의 일이었다.
  세지마는 입사조건으로 이런 요구를 했다고 한다.
  
   면접 시험을 보고 채용을 하지 않는 치욕은 삼가주기 바람
  11년간 언론의 자유를 속박하지 말 것
  영업에 관한 지식은 전무상태이니 양해해 달라.
  
  세지마는 1960년 항공자위대의 신 기종 결정을 둘러싼 수주전에선 미쓰이 물산의 F-104A 전투기에 밀려 참패했다. 그의 말대로 영업에는 별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세지마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업무부본부장(이사)에 취임하여 이도오쮸의 경영에서 참모본부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부터였다. 조직관리·인사·경영전략 수립에서 세지마는 작전참모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섬유재벌 정도로 알려져 있던 2류상사인 이도오쮸를 미쓰비시, 미쓰이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회사로 키우는 데 두뇌 역할을 했다.
  
  소설 「불모지대」에서는 이끼 다다시가 이란에서 유전발견에 성공하는 것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도오쮸가 1970년에 자바의 해저유전 개발에 성공,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이도오쮸는 세지마 업무본부장의 강력한 권고로 미국 회사가 시작한 개발사업에 자본참여, 원유판매권을 얻었는데, 시추가 성공하며 해피 엔딩이 됐던 것이다.
  
  세지마는 석유공급원의 확보에는 이상할 정도의 집념을 보인다. 한일협력위 등 공식석상에서 세지마는 꼭 석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지마는 대본영 참모로서 일본이 미국에 의해 석유로 목이 졸려 개전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체험했던 사람이다.
  
  1940년 7월25일 미국은 무기·석유 등을 수출허가품목으로 지정했다. 일본은 미국계 메이저로부터 기름을 사 쓰고 있었으므로 불안했다. 일본은 독자적인 석유공급원 확보를 위해 화란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를 손에 넣기로 하고 그 전 단계 작전으로 지금의 월남에 군을 상륙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1941년 8월 1일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금지시켰다.
  
  미국은 경제압력으로 일본의 남진정책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온건파들까지도 개전론으로 몰아갔다. 일본은 개전직후 화란령 동인도의 유전시설을 점령했으나 88%가 파괴되어 산유량은 격감했다. 일본은 결국 석유자원 확보에도 실패, 패망했던 것이다.
  
  세지마는 종합상사는 영리보다는 국익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종의 「종합상사 국가기관설」의 신봉자로서 석유자원의 확보를 위해서는 회사의 이해관계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대로 실천했던 것 같다. 세지마는 일본―스리랑카 경제 합동위원회의 일본측 회장이다. 세지마는 중동의 원유를 실은 탱크들이 스리랑카 근해를 지나야 일본에 올 수 있다는 점을 중시, 이 나라와의 친선은 맬라카해협 연안국들과의 우호 만큼이나 일본의 안전에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그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세지마의 호적수로서 1960, 70년대의 일본 상사맨 사이에서 우상이 되었고 「불모지대」에서 세지마의 라이벌로 설정된 이는 닛쇼이와이 상사의 가이후 하찌로였다(부사장까지 역임).
  
  세지마는 참모형, 가이후는 지휘관형이었다. 가이후는 록키드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상사를 떠났다. 세지마는 이도오쮸를 떠나도 그의 조직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은 데 대하여 가이후의 인맥은 그의 퇴진과 함께 붕괴된 점을 들어 일본 경영학계에선 세지마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세지마는 1972년에 이도오쮸 부사장, 77년에 부회장, 78년에 회장으로 승진했다가 81년에 상담역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도오쮸는 지난해 매출액이 미쓰비시(16조 5천억 엔) 미쓰이(16조엔)에 이어 14조 5천억 엔으로 세 번째다<외형이 크게 된 데는 세지마가 주도한 종합상사 안택산업(安宅産業)의 합병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3대 상사는 엔화의 폭등으로 매출액 기준으로는 미국의 엑슨이나 GM을 능가하는 세계 3대 회사이기도 하다. 종합상사 랭킹 5∼6위에서 맴돌던 이도오쮸를 이렇게 키워 놓은 세지마는 상담역으로 물러난 뒤부터는 새롭고 보다 넓은 지평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 육사 인맥의 정점인 세지마
  
  여기서 한일 양국에 걸치는 세지마의 영향력, 그 원천을 분석해 볼 필요가 생긴다. 한국에서도 한국 육사인맥은 막강하지만 일본에서도 일본 육사인맥은 단결력과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 일본 육사는 61기까지(59∼61기는 졸업은 못하고 패전을 맞음) 약 5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졸업생이 만든 동창회로 해행사(偕行社)가 있다. 현재 약 1만8천명이 해행사 회원이다. 신응균(申應均) 金貞烈등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동창 10여명도 회원으로 명부에 실려 있다.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에 편입된 사람들(朴正熙, 강문봉.姜文奉 등)은 해행사 회원이 될 수 없다.
  
  1만8천여 명의 생존 일본육사출신들은 거의가 경제계의 수뇌부에서 활약하고 있다. 군 조직의 운용이나 상사의 운용은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육사출신 엘리트들은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지마도 육사선배의 소개로 이도오쮸에 들어갔지만, 사선을 함께 넘어 의리가 강한 이들은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면서 경제계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이 전후에 종합상사를 앞세워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작전참모가 경영참모로 변하고 총칼 휘두르던 사무라이의 승부정신이 상사맨의 집념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전후에 일본 경제계의 인물 공급원 구실을 한 또 다른 기관은 만주철도 조사부였다. 2천명의 조사연구원을 부리며 40년간 6천여 건의 보고서를 냈던 이 세계최대의 두뇌집단은 식민지 경영의 아이디어 산실에서 일본재건의 엔진으로 변신했던 것이다. 해행사의 명부를 훑어보면 60, 70대의 이들이 거개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중임을 알 수 있다. 남자와 여자의 평균수명이 모두 세계최고로서 고령화 사회인 일본의 독특한 풍토이다. 이런 장로우대의 풍토에서 올해 75세의 세지마가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세지마는 5년전부터 해행사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동대경제간화회(同台經濟懇話會)는 세지마 인맥의 또 다른 샘이다. 일본육사에는 병과에 따라 상무대, 진무대 등 별명이 따랐는데 동대란 대를 같이하는 일본육사출신들이란 의미다. 이 간화회는 일본 육사 출신의 경·정계인들이 조직한 일종의 연구·간담회다. 8백30여명이 회원으로 있다.
  
  그 가운데 2백명쯤은 상장기업이 이사 경험자들이다. 현역관료로선 최고직급인 사무차관도 늘 4∼5명쯤 된다. 이들은 한 달에 한번씩 만나 발표회 등을 갖는다고 한다. 이 모임의 대표간사, 즉 회장역을 맡고 있는 것이 세지마 류조다.
  
  이 모임은 매년 1월 세지마 류조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이 연두 강연은 「연두교서」로 불릴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85년 1월9일 산께이 회관에서 세지마는 「소화 60년의 내외 정세전망, 일본의 정치와 경제」란 제목으로 연두강연을 한 바 있다. 이 간화회는 6개 위원회와 국방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해행사나 간화회가 오른쪽으로 편향된 성향을 띠고 있다 해도 구성원의 성분으로 미루어 이상할 게 없다. 일본육사와 육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엔도사부로(중장)가 전후에 평화운동과 일본중공국교회복 운동을 벌이다가 해행사에서 제명된 사건이 이들 육사인맥의 성향을 엿보게 해준다.
  
  일본 육사인맥의 정점에 서 있는 세지마가 한국에서도 일본육사인맥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고 일본에선 자주 보도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 세지마는 일본육사출신의 한국인으로부터 직접,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세지마의 대한(對韓)창구역을 맡고 있거나 그를 좋아하는 고위층 인사중에 한국육사출신이나, 일본사정에 정통하고 일본인의 미덕을 높게 평가하는 인물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權翊鉉의원 같은 경우엔 군에서 물러난 뒤 기업체에서 경영자의 경험을 가졌다는 점에서 세지마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감각이나 경험에서 공감대가 넓은 사이는 가까워지기도 쉬운 법이다.
  
  국가재편성 「임조」의 참모장
  
  일본육사인맥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세지마가 한일 양국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나까소네 수상이 그를 「국사」(國士)로 모시고, 또 부리면서 부터다. 나까소네는 지난 80년 스즈끼 수상 밑에서 행정관리청 장관이 되자 임시행정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임조」(臨調)라고 약칭되는 이 조직은 전후 일본의 청산이니, 국가 재편성이니, 제2의 개국이니 하는 거창한 모토를 내걸고 있다.
  
  전후 패전국의 입장에서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강요됐던 국가운영시스템을 일단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체제와 국가운용의 기조를 확립한다는 것이 「임조」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자 재정을 재건하고, 행정개혁을 통해서 방만해진 관료 조직의 군살을 빼고, 교육개혁을 통해서 국민교육의 방향을 재정립한다는 것이다. 패전국 체질, 패전국 콤플렉스를 청산함으로써 경제 규모에 걸맞는 국가 체제를 갖추자는 원대한 계획이 「임조」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한다. 최근 후지오 문부상이 『도오꾜 재판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것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변화의 한 물결일 뿐이다.
  
  이 「임조」의 참모장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세지마 류조다. 나까소네는 임조를 발족시킬 때 일본재계의 실력자들을 동원하여 세지마의 참여를 간청했다고 한다. 삼고초려를 다해 모셔 온 세지마가 뒤에 「나까소네의 제갈량」이 되는 것이다. 과거의 행정개혁시도가 실패한 것은 재계가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까소네는 일본재계의 천황이라고 불리는 도꼬 도시오(경단련 명예회장)를 「임조」의 회장으로 영입하고 이 얼굴마담의 밑에 세지마를 참모장격의 「임조」위원으로 붙여 놓음으로써 재계의 협력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즈끼 수상 퇴진 뒤 나까소네가 수상이 되면서 「임조」는 더욱 활발하게 숱한 행정개선안을 정부에 내고, 정부는 이의 실천을 약속함으로써 국가재편성 작업이 급템포로 진행되고 있다. 공무원 증원 억제, 봉급 인상 억제, 일본전신·전화 공사의 민영화(완료), 국철(國鐵)의 분할·민영화 추진 등이 「임조」의 주된 실적이다. 옛날엔 별로 친밀하지 않았던 세지마와 나까소네를 이어준 사람은 5·17직후 세지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바 있었던 고또 노보루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었다고 한다.
  
  나까소네는 고또와 동기생으로 도쿄 대학을 졸업했지만, 전쟁 중에는 해군경리장교였다. 이 해군 주계과(主計科)사관 출신들은 전후에 일본의 금융·재정 분야에서 큰 활약을 했는데 「청년 간화회」란 단체를 만들었다. 고또는 육군출신이지만 이 간화회에 관계했고, 나까소네와는 너, 나하는 처지였다. 세지마는 고또의 소개로 나까소네의 국가재편성 작업에 가담하여 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핵심 역할을 하게 됐다고 한다.
  
  1981년 12월엔 「임조」의 핵심 위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세지마가 「임조」의 기본 방향을 적은 메모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세지마 서간」으로 알려져 「임조」의 기조가 됐다고 한다. 세지마는 지난 84년엔 임시교육심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교육개혁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의 일부 지식인들은, 세지마가 교육의 기조를 국가주의적으로 몰고가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세지마도 『훌륭한 국제인이 되기 위해선 먼저 훌륭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세지마의 일생은 일본군 작전참모시절, 시베리아 억류 시절, 이도오쮸 시절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은 제4기에 해당한다.
  
  그는 활동무대를 점점 넓혀가서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말하고 있다. 군에 있든 상사에 있든, 또는 서울에 있든 그의 정신세계는 항상 일본과 천황에 붙박혀 있었다.
  
  세지마는 천황을 세 번 대면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육대수석 졸업 뒤의 어전 강연,
  두 번째는 1979년 스리랑카 대통령 주최의 만찬회 석상이었다. 이 자리에서 세지마는 천황에게 불려가 『세지마는 그 동안 나라를 위해 수고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세지마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감격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세지마는 천황을 떠나서는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되어버리는 전형적 일본인인 것이다.
  
  군, 재벌, 대륙침략파 인맥과 닿아
  
  한일관계에 있어서 세지마가 관계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는 한일협력위원회다. 한국측 회장은 劉彰順 전 총리, 일본측 회장은 기시 노부스께 전 수상이다. 이 단체에 세지마는 다께시다, 아베 등 일본정계의 실력자들과 함께 상무이사(총원 10명)로 되어 있다. 맡고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이다.
  
  세지마는 지난 82년과 84년 두 차례 합동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록을 보면 두 번 발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82년 3월 뉴 오다니 호텔(도쿄)에서 열린 회의에서 세지마는 일본의 행정개혁에 대해서 아주 간결하게 설명을 했다.
  
  『일본은 석유 등 7억t의 원료를 해마다 수입하고, 이 원료에서 매년 7천만t의 상품을 생산한다.
  사회복지·보장의 부담률이 높아지면 놀고 먹으려는 사람이 늘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일본은 오일 쇼크후 공채를 남발하여 재정상태를 위태롭게 했다. 공채금액이 예산의 2배나 되는 82억엔이다. 재정적으로는 파탄국이다. 행정조직이란 그 속성상 그대로 두면 무한대로 증원이 된다. 행혁이 진행되면 현재 정부의 인허가 사항인 1만1천 건의 업무중 3분의 1은 감소시킬 수 있고 그에 따라 공무원도 많이 물러나야 할 것이다』
  
  한일협력위는 일본측에선 기시 노부스께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세지마는 기시가 회장으로 있는 일본종합 연구소의 이사이기도 하다. 이 연구소는 국책연구회 및 한일협력위와 공동으로 지난 5월26일 도쿄에서 동아시아 문제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도 열었다.
  
  이 연구소는 기시계 친한파 인사들이 만든 것이다. 이사장은 한일교류 4대 단체중의 하나인 한일친선협회의 일본측 회장인 다나까 다쓰오 자민당 의원이다. 그는 일본의 조오슈(지금의 야마구찌 현) 군벌의 최후실력자였던 다나까 기이찌(수상 역임)의 아들로서 자유당 시절부터 李容九의 아들 (한국명 李碩圭·일본명 오오히가시 구니오·최근 사망)을 내세워 한일국교정상화 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 고또 노보루와 오오끼 등 일본 재계의 거물들도 이 연구소의 이사다.
  
  세지마는 국책연구회의 이사이기도 하다. 국책연구회는 50년대 말부터 지난 83년 사망 때까지 한일간의 가장 굵직한 파이프라인이었던 정치건달 야쓰기가 만든 조직이다. 연구보다는 정치자금의 조달창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 이 연구회도 일본 보수인맥의 한 거점이다. 이렇게 보면 세지마의 사상적 좌표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최근 대두하고 있는 일본의 신보수주의 분위기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그의 인맥은 일제시대 육사출신과 대재벌, 그리고 만주나 중국 침략 및 경영의 경험이 있는 정치인들을 중심한 보수친한파이다. 이 인맥과 통하는 한국내의 그의 인맥도 지일파, 군 출신, 재벌이다.
  
  대본영작전 참모, 관동군 경험, 시베리아 경험, 종합상사 회장의 경력을 가진 세지마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주시하면서 일본의 안전을 생각했던, 뿌리 깊은 대외 지향적 일본인들의 사고방식과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지마에 와서 달라진 것은 생각이 아니라 스타일일지 모른다. 세지마가 주도하고 있는 행정개혁과 교육개혁을 통해서 일본이 새로운 조직과 정신으로서 재 탄생한다면, 한국을 대하는 일본의 자세는 보다 적극적이고 때로는 보다 공격적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일본 전문가들도 많다.
  
  빈틈없이 성실하고, 대로는 매력 있는 이 희대의 참모는 군의 참모, 경영참모를 거쳐 이젠 나라의 참모로 변신했고 앞으로는 국제참모가 될지도 모른다. 세지마가 관여하고 있는 데가 일본을 보다 보수적으로, 국가주의적으로, 천황 중심적으로 그리고 대외 지향적으로 만드는 분야란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그가 한일관계에서 맡고 있는 역할의 성격도 짐작할 수 있겠다.
  
  야쓰기와 한일협력위
  
  세지마의 행동패턴을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전임자라고 할 수 있는 야쓰기(失次一夫)가 한일협력위를 무대로 하여 벌여온 공작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세지마를 인맥과 사상적 혈통으로써 평가해보는 방법이기도 하다. 객관성의 유지를 위해서 83년 10월 일본의 「국제정치」학회지에 실린 「일한관계와 야쓰기」란 논문(야마모도 쯔요시 씀)의 요지를 소개한다.
  
  「야쓰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사이 한일관계의 가장 중요한 일본측 비공식접촉자였다. 이 기간에 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은 이께다 및 미끼 수상 시절뿐이었다. 야쓰기는 이께다와는 친했지만 이께다는 오오노 반보꾸(자민당 부총재)에게 한일교섭의 막후공작을 맡겼고, 미끼는 야쓰기와 친하지 않았다. 한국측은 미끼 시절 새로운 인맥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껴 무임소장관 이병희(李秉禧)를 창구로 하여 한일의원연맹을 만들었다.
  
  야쓰기는 자유당시절 주일한국대표부 유태하(柳泰夏)참사관과 알게 되면서 한일간의 비공식접촉자로 등장했다. 柳를 기시수상에게 소개하고, 김동조(金東祚.당시 외무부 정보국장)를 기시수상과 극비리에 만나게 함으로써 한국측 창구를 만들고, 1958년 5월엔 기시 수상의 특사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을 방문, 한일간의 관계개선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얻어냈다.
  
  야쓰기가 한일관계에서 활약하는 무대는 1969년 2월에 창립된 한일협력위원회였다. 일본측 회장은 기시 노부스께였다. 기시는 일화(日華)협력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했고, 한일협력위와 일화협력위의 일본측 위원들은 많이 겹치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자민당의 우파로서 반공색이 선명하다는 점이다. 한일협력위의 장점은 자국정부가 국내사정으로 해서 어떤 계획을 제안할 수 없을 때 상대국의 요청인 것처럼 위장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제2회 한일협력위 회의에서 야쓰기는 『일한장기경제협력시안』을 제출했다. 『야쓰기 시안』으로 알려진 이 안의 내용은 두 나라가 동일한 경제권을 형성한다는 것으로 제1단계로 한국의 포항 이남과 일본의 야마구찌 현, 기다큐슈 일대를 묶어서 협력경제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은 이것은 『한국안』이었다.
  
  한국내에서 반일 분위기가 고조돼 있어 한국 측에서 제안을 못하고 張基榮상임위원이 야쓰기에게 부탁하여 『야쓰기 시안』으로서 대신 제출케 한 것이다. 이 안은 그 뒤 폐기되었다. 야쓰기는 2회 협력위 회의 직후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자를 구슬린다든지 돈을 빈다든지 하는 문제는 연설로써는 해결할 수 없다. 별실에서 그런 문제를 처리했다. 3일간의 회의기간중 큰 경제협력만 해도 5∼6건은 처리했을 것이다』 별실에서 협상할 때 야쓰기는 기시를 모시고 갔다. 『기시는 군자연하면서 모양 좋은 이야기만 하고, 곤란한 이야기는 내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 기시는 구체적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동석하는 것만으로도 야쓰기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대륙붕석유의 한일공동개발구상도 야쓰기가 70년 8월의 협력위에서 먼저 제안하고, 72년 7월 金鍾泌총리를 만나 담판을 지은 것이다.
  
  金大中납치사건 때는 金총리를 만나 『국가는 권위와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張作霖폭살사건에서 천황이 그렇게 했듯, 한국도 일시적으로 권위가 손상되어도 신뢰를 잃어선 안 된다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야쓰기는 다음날 朴正熙대통령과 만나서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朴대통령이 면담 초장에 한국말로 『이 사건에 한국정부 관계자가 관련됐다면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말하여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귀국 즉시 야쓰기는 다나까 수상에게 朴대통령의 뜻을 전해 73년 11월2일 金鍾泌총리가 일본에 건너가 다나까와 회담,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했다」
  
  있는 것은 국익 추구뿐
  
  야마모도 쯔요시는 이어서 「비공식접촉자로서 야쓰기의 생각」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야쓰기가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국가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있는 것은 국익의 추구뿐이라는 얘기였다.
  두 번째는, 어느 한 쪽에 너무 기울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비공식 접촉자로서 한국과 관계하는 자도 있어야 하고 북한과 통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며, 한국과 북한이 대립한다고 해서 양쪽의 비공식 접촉자끼리 대립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서로 정보를 교화,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쓰기는 대만에 대한 비공식 접촉자이면서도 중공과의 비공식 접촉자와 자주 만나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비공식 접촉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야쓰기는 재일조총련 부의장 김병식(金炳植)과도 자주 만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일본재계의 북한방문단 조직을 꾀했다. 1977년엔 친한파와 친북한파를 각각 서울과 평양으로 보내 양쪽 수뇌와 면담케 한다는 구상을 추진했다. 한국측 실력자를 친북한파 우쓰노미야 도꾸마 의원에게 소개시켜 주기도 했으나 이 계획은 한국정부측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세지마의 밀사역할은 야쓰기가 84세의 나이로 83년 3월에 사망한 무렵부터 더욱 활발해졌다. 야쓰기가 죽은 뒤에는 세지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세지마는 야쓰기 및 기시와는 오래 전부터 밀접한 관계이고, 야쓰기가 죽자 기시, 나까소네란 정치 지휘관 아래서 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대한(對韓)공작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朴정권 아래선 여러 갈래의 한일막후 루트가 공존했으나 세지마 등장이후엔 세지마창구로 일원화 된 느낌이다. 야쓰기와 세지마는 인격이나 스타일, 그리고 경력이 판이하다.
  
  야쓰기는 출신성분도 안개에 가려져 있고, 학력은 국졸이며, 「소화의 괴물」이란 별명을 들으면서 정계의 뒷켠에서 국수주의자들과 어울려 정치낭인 역할을 하며 지내온 우익적 인물이다. 전후엔 미군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됐었다. 우익을 심하게 비판하는 사람은 우익활동을 밥벌이 수단으로 한다고 하여 「생활우익」이라고 하는데 야쓰기도 그런 욕을 먹을 때가 있었다.
  
  세지마는 모든 면에서 모범생이며, 야쓰기처럼 흑막적인 면이 없는 양성이고, 일본인의 미덕을 한 몸에 아우르고 있는 듯하다. 세지마의 등장 이후 한일관계의 막후가 돈문제로부터 깨끗해졌고 채널도 거의 공식화됐다는 평도 받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천황주의자인 세지마가 『있는 것은 오로지 국익뿐이다』는 야쓰기의 좌우명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세지마의 화려한 경력과 미덕은 한일 국경만 넘으면 군국주의자로 매도당할 수 있는 것들이고, 세지마 자신도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역사학자 오오에(大江志乃夫)는 세지마를 혹평하는 몇 안 되는 일본인 중의 하나다.
  
  『그는 한번도 일본군국주의의 전쟁책임을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수상의 참모기능을 강화하여 대통령적 수상으로 키우려 획책하고 있다. 일본을 전쟁으로 끌고 간 옛 참모본부의 수법을 재현하고 있다. 한번도 전쟁중의 자기 책임을 시인한 적이 없는 세지마는 국가지도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이 비판을 뒷받침하듯 세지마는 지난 5월30일 「국제인 육성 심포지엄」의 기조연설에서 『일본이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은 미국 등 외국에 있는 일본의 재산이 동결되고 무역이 두절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조슈출신 知韓인맥이 그의 뒤에
  
  세지마의 한국측 창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세지마를 존경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세지마의 경륜과 겸손, 특히 그의 청렴결백함이 주로 칭송의 대상이다. 「결백하므로 권위가 선다」는 말은 세지마 에게도 해당되는 모양이다. 일본의 언론도 세지마에 대해서만은 거의 흠을 잡고 있지 않다. 국사(國士)란 말을 정관사처럼 붙이며 그를 살아 있는 신화를 만들려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참고로 한 일본언론의 보도 가운데 그에 대한 유일한 비난은 「너무 낭만이 없다」는 지적이었다. 權翊鉉고문은 세지마가 단순히 나까소네 개인의 참모가 아니란 점을 강조했다.
  
  나까소네의 후임자로 거론되는 다께시다, 미야자와, 아베 등 뉴 리더 3명도 모두 세지마를 중용할 사람이란 것이다. 실제로 세지마는 이들 뉴 리더에게 한국내의 세지마 인맥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당분간 세지마의 밀사역할은 계속될 전망이다. 뉴 리더 가운데다음 총리가 가장 유력시되고 있는 아베는 기시 전수상의 사위다. 세지마와 함께 한일협력위의 상임이사다. 기시, 아베, 그리고 한일친선협회의 일본측 회장 다나까 다쓰오(통산장관·한일협력위 사무총장 역임·중의원 의원)는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찌현)번 출신 인맥을 잇고있는 사람들이다.
  
  메이지 유신에서 양대 주동 세력은 조슈번과 사쓰마번(지금의 기고시마)이었다. 유신이 성공한 뒤 조슈인맥은 육군, 사쓰마 인맥은 해군을 장악했다. 육군의 뒷받침을 받는 조슈 출신 수상들이 잇따라 나왔다. 한일합병의 길을 연 이또오 히루부미, 일본군벌의 창시자 야마가다 아리또오, 총독시절 조선을 무단통치한 데라우찌, 만주침략의 길을 튼 다나까 기이찌(다나까 다쓰오의 아버지)가 전전(戰前)의 조슈출신 수상들이다.
  
  전후엔 한일회담의 길을 연 기시(그는 1936∼39년 사이 만주국 산업부차관으로 만주경영의 실질적 책임자였다)와 그의 친동생으로서 그 회담을 타결 지은 사또오 수상이 조슈출신이다.
  
  지금까지 모두 7명의 수상이 조슈로부터 배출됐는데, 이들은 한국과 만주에 대해 「공격적인 관심」이 많았다는 특징이 있다. 그들의 고향이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시모노세끼가 야마구찌 현에 속함)것도 그런 성향의 한 이유이겠다. 반도 및 대륙 지향적인 조슈인맥이 일본육사인맥, 재벌인맥과 함께 열렬한 천황주의자 세지마의 뒤를 바치고 있는 셈이다.
  
  세지마는 요즈음 한일간의 기술이전 문제에 간여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고위층에서도 세지마에게 일본기술의 대한(對韓) 이전에 있어서 총대를 매어줄 것을 부탁했다는 말도 있다. 행정개혁으로 민영화된 일본전신전화 회사의 기술이 삼성그룹을 창구로 하여 이전될 것이고, 이 일에 세지마가 관여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세지마는 일본전신전화의 민영화에 깊숙이 개입했다),
  
  우리로서는 세지마의 매력에 취할 것이 아니라, 30대 초반에 벌써 2백개 사단 6백만의 병력을 운용한 천재적인 작전참모가 한국을 어떤 전략개념으로써 파악하고 있으며, 냉온탕식 공략법에 능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을 대하는 그의 배역이 무엇인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