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구권과의 수교 秘話-헝가리가 징검다리 역할

헝가리의 고마운 이해

盧 전 대통령은 이어서 북방정책의 구체적 추진과정인 동구권과의 수교 문제에 대해 증언을 시작했다.

<동구권 가운데 가장 먼저 헝가리와 수교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내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실질적으로 북방정책의 기초를 닦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최초의 인연이 맺어진 나라가 바로 헝가리였다.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는 북한측의 방해공작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된다』고 협박했는데, 처음에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전체가 북한에 동조했다. 『서울이 적합하지 않다』는 반대에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어 참으로 어려웠고 막막하기까지 했다. 이 벽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그런 과정에서 가장 먼저 서울올림픽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지지와 참가의사를 밝힌 나라가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 IOC 위원이었던 슈미트씨는 과거 헝가리 펜싱 대표로서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던 인물이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편이었던 그는 올림픽 선수를 지내면서 자유세계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인지 서방세계의 사정을 잘 알고, 또 그 공기를 많이 맡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로 통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서울올림픽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인접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지인(知人)들에게도 서울을 이해시키는 노력을 해주었다.

그의 지원과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의 전력투구가 어우러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과거 미국의 꼭두각시로만 알고 있던 한국이, 또 서울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1984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 참석하면서 첩꽁?홍보를 개시했다. 여러 나라 대표들과 IOC 위원들에게 우리의 올림픽 준비상황을 설명하고, 그 기회를 활용해서 북방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나의 전부터의 외교관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올림픽 시설, 메인 스타디움 등 여러 시설에 필요한 전자 시스템, 전광판 시스템 등의 사업에 헝가리를 참여시켰다.

나는 이런 식으로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도 하나하나 마음으로 다가갔다. 소련 대표인 그라모프 체육상과 스미르노프 IOC 위원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잡게 된 것은 LA 올림픽이 끝나고 그해 10월인가 11월인가 멕시코에서 LA 올림픽 평가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다슬러 회장 입회하에 소련의 그라모프 체육상과 스미르노프 IOC 위원을 처음으로 만났다. 나는 그들을 설득해 『서울올림픽이 부적절하다』는 논리를 「참여하는 쪽」으로 결론짓게 했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소련측의 약점은 모스크바 올림픽을 치른 후 LA 올림픽에 불참하고, 서울올림픽마저 불참하면 한 세대 젊은이들의 꿈이 좌절되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공산국가지만 젊은이들의 불만이 대단하는 점이 공산권 측의 취약점이었지. 이 점을 내가 파악한 겁니다』

朴哲彦 특보가 헝가리와 막후 협상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헝가리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정식 채널로는 어려웠다. 나의 의지를 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朴哲彦 보좌관을 골랐다. 헝가리와 수교하기 전에 朴보자관은 헝가리 최고 실력자인 크로스 서기장까지 만났다. 나의 헝가리 방문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첫 동구권 방문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만했다. 또 헝가리로서도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처음 맞는 자유진영 지도자였다. 그래서 내가 헝가리 의회에서 연설할 때 그 감회가 특별했다고 기억된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9년 11월, 유럽 5개국 순방길에서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헝가리를 방문했다. 盧대통령은 11월23일 헝가리공화국 국회에서 「화해의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헝가리는 당시 동구권에서 시장경제체제로 나아가는 데 앞장서는 역할을 했다.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는 나라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지하경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는데, 헝가리 정부는 그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정당이 여럿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 있다가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를 해야 할 입장이어서 인지 군소(群小)정당이 1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자유진영에서 올림픽을 치른 대통령이 왔다고 해서 그 정당의 대표자들이 전부 내게 면담 신청을 해왔다. 큰 정당, 작은 정당, 심지어 운동권 학생 대표까지 나를 만나기를 원했다. 나는 그들을 개별적으로, 또는 여러 사람을 함께 한 자리에 모이게 해서라도 모두 만나주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묻기도 하고, 헝가리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억압도 당하고 뒤집어 엎는 기질도 있고 해서 어투도 좀 거칠고 극렬한 주장도 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온유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앉아 있는 장발(長髮)을 한 학생 대표에게 은근히 관심이 갔다. 옷차림도 이상했는데 그가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는데도 한 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해서 나는 그에게 일부러 말을 시켰다.

『당신이 학생대표인가』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해
『얘기를 좀 듣고 싶다. 지금 헝가리의 학생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꿈꾸고, 헝가리가 앞으로 어떻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학생은 『여기 계시는 선배들이 다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가 아직 완전히 가셔지지 않았지만 헝가리가 우리보다도 훨씬 더 발전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양적 분위기의 헝가리

동석했던 孫柱煥 전 장관은 『헝가리가 동구권 수교의 최초 국가인데, 헝가리와의 수교는 올림픽이 인연이 됐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서울올림픽이 헝가리와의 수교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盧泰愚 전 대통령도 동의했다. 『서울올림픽이 헝가리와의 수교에 징검다리 역할을 했고, 헝가리가 동구권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헝가리가 재미 있는 나라야. 여남은 群小정당이 자기들끼리 헐뜯지 않을까 상당한 흥미를 가졌다고. 그런데 얘기를 해보니까 아주 온순해. 지금까지 자기들이 사회주의했던 것을 거세게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네들이 민주주의 방식으로 발전해야 된다 하는 의견이 파도도 없이 흘러가는 인상을 받았어』

―10세기에 헝가리를 세운 사람들이 몽골-투르크 계통 민족입니다. 이들이 러시아쪽에서 와서 정복왕조를 만들었는데, 조금 동양적인 분위기가 있죠.

『지도자들과 대화에서 그 뿌리가 나오더라고. 그러니까 각별한 공감이랄까 동지의식 이런 것이 나오더라고. 만나면 좀 편하지요. 독일과는 완전 대조적이야』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독일은 2차大戰 이후에 다 양보하고 그랬지만 원 기질이 공격적이야. 게르만 민족의 공격적인 특성이 그대로 있어요. 내가 독일의 여러 지도자들과 접촉도 많이 했는데, 겐셔 외상(外相) 같은 이는 독일의 성공한 外相이라고 평이 나 있지만 나에게는 몇 가지 기억되는 일이 있어요. 1981년에 내가 특사(特使)로 가서 겐셔 外相을 만났는데, 金大中 문제를 거론하는 거야. 그래서
「단 한 마디만 얘기하겠다. 당신들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주어서 고맙소. 그러나 독일 全국민이 金大中씨를 위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내 혼자서 더 많이 사랑해요.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이랬어 허허허.

내가 대통령 취임하고 서울에 와서 다시 만났거든. 그때도 EU, 즉 구주(歐洲)연합체를 어떻게나 자랑하던지,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해주었지. 「EU의 인구가 얼마나 되나. 몇 억 안되는데. 21세기 되면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가 東아시아에서 나오는데 그러지 마라」이랬어』

―6共 때 북방정책으로 새로 수교한 나라가 39개국에 인구가 17억 3천만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45개국으로 알고 있어요』

―북방정책을 숫자적으로 결산한다면 한국인들에게 17억,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되는 사람들과 교류하도록 시장과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죠. 요 뒤에 나올 거요. 더 나갑시다』

5. 韓蘇수교와 고르바초프-그는 돈에 無知했다

고르비, 7·7선언에 호응

이어서 盧대통령은 소련과의 수교에 얽힌 비사(秘史)를 육성증언하기 시작했다.

<1988년 7월7일 내가 이른바 7·7선언을 하고 두어 달 뒤인 그해 9월16일, 고르바초프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연설을 했다. 나는 그 연설을 듣고 무릎을 쳤다. 7·7선언에 대한 회답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때 중요한 항목으로 한반도 평화, 한국과의 협력 등이 언급됐다. 고르바초프는 내가 만나고 국교를 맺을 때까지만 해도 공식노선은 자유 민주주의와는 달랐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것이 시장경제 체제의 우위성을 소련의 사회주의 생산의 취약점, 경제적인 취약점을 대폭 보완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지, 그 사람이 공산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옐친은 공산주의를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내가 모스크바를 방문(편집자 注 : 盧泰愚 대통령은 한소 수교 이후인 1990년 12월14일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하고, 그 뒤에 고르바초프가 일본에 들렀다가 제주도에 와서 정상회담(1991년 4월20일)을 가질 때만 해도 그는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는 이자(利子)의 개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듯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회간접자본 투자의 중요성과 시장경제체제의 우위성,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발전했는가를 많이 설명해 주었다.

후에 대통령을 그만 두고 몇 차례 만났을 때 고르바초프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뿐만 아니라 헝가리를 비롯한 다른 동구권 국가의 원수들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의 공통된 반응이 한결같이 『앞으로 한국을 자신들의 발전 모델로 삼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측과는 여러 채널로 접촉했는데, 우리 쪽에서는 金宗輝 수석과 朴哲彦 정책보좌관이 맡고 있는 두 파트에서 나누어 일을 맡았다. 두 사람이 역할을 놓고 다툰 일은 전혀 없었고, 뒤에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자기에게 부여된 일만 하면 되니까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임무를 주어 결과를 보고 받으면 정리는 金宗輝 수석에게 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구상을 하고 전반적인 계획을 세운 것도 金수석쪽이었다. 朴哲彦은 5共 때부터 對北문제의 비밀창구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일의 계속성과 일관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정책보좌관으로 기용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韓·蘇 정상회담(1990년 6월5일)은 누가 먼저 제의해서 이루어졌는지가 분명치 않다. 서로간에 사인이 오갈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회담이 있기 얼마 전 1990년 5월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자신의 수석 외교 보좌관인 도브리닌(전 주미대사)을 내게 보냈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직 국가수반회의(IAC:Inter Action Council) 참석을 빌미로 방한(訪韓)한 도브리닌은 내게 소련과의 경체협력에 관한 의사를 타진하고, 「소련측은 수교의사를 가지고 있는데, 한국에서 만날 수는 없고 워싱턴에서 美·蘇 회담을 전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날 용의가 있다」는 고르바초프의 의사를 전달해 왔다>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

고르바초프는 서울올림픽 개막 전날인 1988년 9월16일,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한반도 상황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는 전제 아래 한국과 경제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또 이날 연설에서 『소련, 중국, 일본, 북한, 남한의 해안선이 만나는 지역에서 군비감축과 군사행동 제한을 위한 다자간 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盧泰愚 대통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1988년 10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고르바초프가 언급한 5개국에다 미국을 포함하는 「평화협의체」구성을 촉구했다.

고르비의 농담

孫柱煥 전 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우리 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소련측 요청에 의해 회담 장소가 샌프란시스코로 정해졌다고 한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

<나는 도브리닌의 訪韓이 우리가 전에 여러 채널을 통해 소련측에 보냈던 사인들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르바초프가 감지해 반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소련측은 도브리닌의 특수 임무를 극비로 추진해 심지어는 외무장관인 셰바르드나제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당시 경제협력에 얼마를 주겠느냐고 흥정 비슷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그 자리에서는 경제협력을 한다는 이야기만 포괄적으로 있었을 뿐 흥정은 전혀 없었다. 후에 고르바초프를 만나서도 경협(經協)의 원칙만 이야기했을 뿐 구체적인 사항은 훨씬 그 뒤에 우리측 김종인(金鍾仁) 경제수석과 소련측 마실리코프 부수상 사이에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사전에 양국간의 교섭은 빈번했지만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은 갑작스레 결정됐다. 일본 방문(편집자 注 : 盧대통령은 1990년 5월24∼26일 일본을 방문, 일본 국회에서 「변화하는 세계 속의 새 韓日 관계」를 주제로 연설했다)을 앞두고 소련측으로부터 최종 대답이 온 것이다. 도브리닌이 다녀간 것이 1990년 5월20일이었고, 사흘 뒤인 5월23일에는 전직수반회의(IAC) 참석자 초청만찬을 가졌는데, 나와 도브리닌의 상춘재에서의 만남은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일본에 갔다가 5월26일에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6월3일에 샌프란시스코에 간 것이다. 무척 긴박하게 돌아간 셈이다.

결과론이지만 소련측이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소비재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개방을 하고 나서 소비재가 동나다시피 했다. 그래서 제일 급한 것이 소비재를 대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국의 발전모델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앞으로 소련이 시장경제 체제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과 한국 정부의 경제개발 담당 각료, 참모들의 협력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소련이 외국으로부터 돈을 많이 빌리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가능하면 현금 차관을 많이 받고 싶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런 보고를 받고 관계자들에게 『우리가 얼마 정도를 도와줄 수 있는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경제협력이라고 해서 무상원조가 아니고 국제금리에 맞춰 빌려줄 생각이었다. 그 결과 30억 달러가 적당하고 반은 현금 차관, 나머지 반은 물자로 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결과를 갖고 소련측과 협의하라고 했다. 당시 상황은 참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내가 5월24일부터 26일까지 일본에 다녀오자마자 한국 대통령이 소련 대통령을 만난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그래서 기자들이 난리가 났는데, 발표는 나중에 하기로 韓·蘇 양국이 합의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 발표 예정 날짜가 5월31일이었는데, 이미 언론계에서는 그런 얘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金宗輝 수석이 오프 더 레코드로 브리핑을 했다.
그런데 부산지역의 신문 하나가 이를 깨고 보도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방송은 이를 받아 방송하고, 신문들은 왜 못쓰게 하냐고 항의하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1990년 6월5일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제는 얼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우리의 만남 이 자체가 해빙이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받아 수교를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가 과실(果實)을 수확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본다』고 했다. 그랬더니 고르비는 『과실이 익어야 먹지, 익지 않고 선 과실을 먹게 되면 배탈납니다』하길래 나는 『한 번 알아보십시오. 동양권에 盧아무개 대통령은 참고 기다리는데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盧아무개가 「자 이제 따 먹읍시다」하면 그것은 다 익은 것입니다』고 말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對蘇 30억 달러 지원은 수지맞는 거래

슐츠 전 美 국무장관은 우리나락 동구권, 특히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슐츠 장관과는 레이건 대통령 시절 내가 미국을 방문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슐츠 장관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내게 특히 큰 도움을 준 일이 있다. 1984년쯤인가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의 체육장관 회의에서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들은 살아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을 한 일이 있다. 그래서 북한이 테러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나는 생각 끝에 슐츠 장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에 와 달라는 나의 부탁을 받은 그는 한국을 방문해 주었다. 나는 그를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 세우고, 그의 모습이 全세계 매스컴에 보도되도록 언론플레이를 했다. 어떤 테러도 막는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슐츠는 그대로 협조해주었다. 이런 사이였기 때문에 내가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슐츠와는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가 있었다. 슐츠 장관은 또 소련 동구권 중국 등에 많은 친구를 갖고 있었다. 나는 슐츠에게 『당신과 친한 사람들에게 내 뜻을 다 관철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슐츠는 그런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에서도 슐츠 장관은 많은 이바지를 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韓·蘇 정상회담 때도 슐츠 장관의 도움이 보이지 않게 컸다.

韓蘇 수교는 남북한의 안정 내지 한국안보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숫자로 정확하게 계산하지는 못했지만 소련이 북한에 수출하는 석유가격을 공산권 특별가격에서 국제시세로 올렸을 때 북한의 원유수입 부담액이 북한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무기체제에 있어 비행기 로켓 등 고도 정밀무기의 지원삭감이 우리 한국의 안보예산에 삭감 내지 유보해 주는 효과 등은 엄청난 것이다. 비행기값만 하더라도 얼마나 되겠는가. 經協 이후 소련의 對북한 전투기 지원은 즉각 중단됐다.

30억 달러를 놓고 말이 많지만 북한의 위협을 줄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이익을 보았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어쨌든 간에 그 이후에 소련에서 미그 29보다도 최신형인 수호이 전투기를 북한에 보내기로 했던 것이 중단됐다. 그리고 기름, 최신무기 등의 지원이 연이어 중단됐다. 우리가 준 돈으로 다시 우리 소비재를 사감으로써 우리와의 교역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원자재를 주면서도 조건이 붙어 있었다(편집자 注 : 소련은 1991년부터 북한에 대한 무역 거래 특혜를 처례, 현금지불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소련으로부터의 석유수입이 75%나 감소했다).

북한은 압박해야 고분고분해진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 정권이 韓蘇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수교를 맺어놓았는데 최소한 고개를 돌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시 원상복귀시키자면 훨씬 힘이 들게 마련이다. 고르바초프가 도브리닌을 보냈을 때나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를 직접 만났을 때나 경제협력에 대한 원칙적인 협의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액수에 대해서는 논의한 적이 없다.

우리측은 미국과의 지속적인 동맹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일환으로 韓蘇 정상회담이 끝난 후 내가 백악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백악관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레그 駐韓 미국대사는 韓蘇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미국이 확실히 지원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주면 한국과 소련의 직접 접촉을 미국이 반대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본국(本國)에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련과의 갑작스러운 신뢰관계 구축이 북한의 도발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측이 분석한 결과 북한측은 우리가 조금 약하게 보이면 먹으려고 덤비고,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절대 도발적인 행위를 못하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미국에게 굴복한 것도 레이건 대통령, 부시 대통령이 『한번 해보자』는 식으로 과감하게 나갔기 때문이다. 나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어떤 결의가 金日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金日成이 꼼짝 못하고 따라온 것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결국 비핵화(非核化) 선언까지 따라온 것이다>

盧대통령은 韓蘇 수교와 관련하여 친소(親蘇)정책을 위해 反美를 조장했다는 등의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과는 다르다면서 아쉬워했다. 육성증언을 직접 들어본다.

<서울올림픽 당시 우리 관중들이 소련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고, 美蘇 대결이 벌어지면 소련을 응원하도록 조작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견들이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잠깐 내 생각을 언급하겠다. 내가 LA 올림픽에 참석했을 때도 공산권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중국이 참가했는데 미국인들이 열렬하게 환영했다. 미국 선수들보다 더 열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올림픽도 북한의 공작 때문에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 전부가 반대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참가하게 되니까 주인 입장에서 반가움을 표시한 것이다. 게다가 미국측에 대해 국민감정이 약간 좋지 않은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LA타임스, 미국 상원의원 등이 서울올림픽을 한동안 반대하고 나선 일이 있지 않은가. 국민들 가운데서는 『우리가 제일 믿는 미국이 이래서 되겠느냐. 金日成을 도우면서 우리를 골탕먹일 수 있느냐』는 감정이 있기도 했다>

經協이 對蘇 수교의 조건은 아니었다

盧 전 대통령은 韓蘇 수교과정에서 소련측이 經協자금을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는 보도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韓蘇 수교를 위해 나는 親書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소련측이 수교의 조건으로 경제지원을 요구하면서 수교협상을 질질 끌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990년 9월30일에 수교하고 내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국내정세는 고르비에겐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정상회담을 하면서 의회를 비롯해 설득해야 할 인사들이 많아 정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소련 국민들에게는 자유와 개방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였다. 나느 모스크바대학에서 연설(편집자 注 : 盧대통령은 1990년 12월14일 모스크바대학에서 「냉전의 벽을 넘어,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연설했다)하면서 고르비가 취한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 칭찬했다. 나는 『모스크바가 굉장히 추운 도시, 추운 지역이라고 해서 서울을 출발할 때 방한(防寒)할 수 있는 털모자와 두꺼운 옷을 갖고 왔다. 그런데 와보니까 서울보다 더 따뜻했다. 이상하다고 여겨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고르바초프가 제창하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의 훈풍(薰風)이구나. 그래서 따듯하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소련인들은 유통분야의 동맥경화증으로 인해 어느 지역은 식량·생필품이 남아 돌고, 어느 지역은 없고 해서 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이런저런 불만들이 의회에서 표출되어 고르비에겐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소련의 對한반도 정책 선회에 대해서는 돈 오버도퍼가 「두 개의 코리아」에서 표현을 잘 해놓았는데, 1988년 시점에서는 소련 공산당이 「한국은 극동지역에서 가장 유망한 경제 파트너」라는 결의를 하고,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시기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의견들이 이미 내부적으로 논의된 상태였다. 나는 이 결정이 첫째로 88년 서울올림픽의 영향이고, 두 번째로는 7·7선언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셰바르드나제, 수교일자 앞당기다

원래 양국 정부가 합의했던 韓蘇 수교예정일은 1991년 1월1일이었다. 그런데 소련측은 1990년 9월30일로 수교 일자를 앞당겼다. 그동안의 양국관계로 볼 때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수교일자가 앞당겨지게 된 사연에 대한 盧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본다.

<셰바르드나제는 특히 韓蘇 수교 날짜에 있어 우리측 요청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우리측은 수교를 1990년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셰바르드나제가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 정부는 현지에 나가 있는 최호중(崔浩中) 외무장관에게 셰바르드나제를 만나 가능한 한 수교일자를 앞당겨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崔장관은 수교 발표 예정일 며칠 전 한 외교 리셉션장에서 셰바르드나제를 만나 이런 뜻을 전했고, 셰바르드나제는 한국 정부의 제의를 놀랍게도 수교 발표 당일인 9월30일 받아들였다.

그는 펜을 꺼내 발표문에 적혀 있던 수교 예정일 「1991년 1월1일」을 삭제하고 대신 「1990년 9월30일」이라고 썼다. 양국 외무장관은 이날 韓蘇 수교문서에 조인하고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 注 : 셰바르드나제는 그 직전 북한을 방문, 韓蘇 수교 방침을 통고했다가 북한 당국자들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무례를 당하고 와 감정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모스크바를 방문(1990년 12월14일)하면서 경제원조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액수에 대해 논의를 거부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액수에 대해서는 실무자에게 검토를 지시했다. 50억 달러 요청 등의 이야기는 실무진에서 한 일이므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총 액수가 30억 달러로 결정되고, 그 가운데 절반은 현금 차관, 나머지 절반은 수출물자 공급이었다는 것이다.

經協차관(헝가리 6억 달러, 소련 30억 달러 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단순히 볼 때 많은 금액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북방외교로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을 감축시킴으로써 우리측에 군비절감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많은 비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거저 준 것이 아니라 빌려준 것으로, 원금과 이자를 돌려 받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는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이들 북방국가들에 대한 수출은 크게 늘어나 계속 무역흑자를 내고 있어 북방외교의 성과를 차관문제를 시비 삼아 퇴색시켜서는 안된다고 본다. 韓蘇 수교를 韓中 수교보다 먼저 한 이유는 나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 때문이었다. 멀리서부터 손을 잡아 나중에는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金宗輝 수석은 나의 이런 전략을 잘 실천에 옮겨 주었다>

제주에서 고르비 內外 위로

<고르비와 제주도 정상회담 때(1991년 4월20일)는 이미 양국이 수교를 한 데다가 횟수로 3차 회담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친숙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고르비는 당시 일본을 방문하는 중에 북방 5개 도서 문제를 비롯한 日蘇간의 현안문제가 뜻대로 되지 않은 탓에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는 대단히 기분이 안 좋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두 내외를 위로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문을 연 지 얼마 안되는 제주 신라호텔에 방을 잡도록 하고 두 내외에게 『일본에서의 일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신혼여행을 왔다고 생각하라. 내가 당신들 신혼부부를 위해 방을 하나 꾸며 놓았으니 다 잊어버리고 나와 오늘 저녁식사를 한 뒤 둘이 푹 쉬시오. 내가 지금 당장 위로해줄 일은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두 내외는 감명을 받는 듯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때 고르바초프의 부인 라이사 여사는 소련 국내여론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제주도 해녀(海女)들과 수산물 파는 데를 돌아보면서 그냥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생선을 주무르고 하는 사진을 찍게 해서 텔레비전에 나오게 했다(편집자 注 : 이 회담에서 고르비는 한국의 유엔가입 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울에 강의하러 온 그를 두어 차례 만났다. 그렇게 세계를 변화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는데도 자신이 뿌리를 박고 있는 나라가 잘 되지 못하니 결국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자신의 사상, 자신의 논리가 바탕이 되고 뿌리가 돼서 소련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이 되고, 그것이 온 세계에 칭찬의 대상이 됐다면 고르비가 오늘과 같이 초라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인상,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그런 초라한 꼴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평가를 깎아 내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가는 더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므로 지금은 단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고르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소련이란 나라가 해체되어 대단히 어려움에 빠져 있지만 만약 고르비와 반대되는 사람이 나타나 군사패권국가로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면서 자유진영과 패권을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면 인류는 재앙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르비는 경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여 정치개혁을 하면 경제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또 한 가지 고르비는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고르비는 고수(高手)였다.

고르비가 『경제 참모를 바꿉시다』제의

고르바초프는 머리도 샤프하고 순발력도 있고 여러 가지 보는 안목이 지혜스런 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경제에 대한 지식만은 그 수준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족한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시장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가졌더라도 소련 경제가 그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고르바초프는 정상회담을 하면서 내게 『나의 경제참모 수백 명이 아무 소용없으니 당신 참모 한 사람과 바꾸자』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 역시 농담으로 『그럽시다. 우리 金鍾仁 경제수석을 여기에 남겨놓을 테니 잘 활용하시오. 그러나 당신쪽 참모는 안 데리고 가도 됩니다』라고 했다.

한국의 북방정책에 대한 미국의 비판이 강하다는 뉴스가 우리나라 언론에 대대적으로 실렸다. 金鍾輝 수석은 그것을 보고 내게 『韓蘇 수교도 급하지만 韓美관계도 돈독히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와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우리나라나 모스크바가 아닌 미국 땅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회담이 끝난 후에 부시 대통령과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이 없으면 한국의 지원국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도 이상하고 모양새도 좋지 않으니 회담을 갖자고 했다.

미국 대통령 일정은 최소한 6개월 전부터 잡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고르비를 만나고 난 다음에 날짜가 안 잡혀 있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미국 관광을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직후가 돼야 말하자면 정치적 모양새도 갖추고 韓美관계의 공고함도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북한의 이간을 막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전조율을 위해 金鍾輝 수석이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그리스의 대통령인가 수상이 부시 대통령과 만나기로 되어 있던 일정을 조정하여 韓蘇 정상회담 다음날 韓美 정상회담(1990년 6월6일 워싱턴)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아마 다음날인가 그날 오후로 일정이 밀려났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성사는 한국의 발전적인 변화와 크렘린 지도부에서의 결정에 의해 가능했다고 본다.

도브리닌은 외무성 이야기만 했지만 군부는 반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軍과 연결된 군수산업 분야에서도 對북한 무기수출에서 얻는 이익을 들어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크렘린의 최고 지도부에서 韓蘇 수교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쪽의 제의와 분위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보여준 모습과 경제력, 한국의 능동적이고 자신에 찬 외교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회담을 하자고 한 것은 소련측이지만 그 이전에 우리는 몇 가지 채널로 소련에 접근했다. 제6공화국 들어서 우리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중국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나 중국보다는 소련이 더 하기 쉽고 더 빨리 성사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소련을 집중 공략했다.

經協으로 對北 무기지원 차단

金鍾輝 수석은 내게 『수교가 없는 상태에서 각하의 모스크바 방문이나 고르비의 서울 방문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회담장소는 제3의 지역이 되어야 하는데, 모스크바는 곤란하고 변경지역이라야 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던 중에 「고르비가 워싱턴을 방문하여 귀로(歸路)에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를 거쳐 돌아간다」는 정보 보고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즉시 소련측과 접촉해 블라디보스트크를 제의했는데, 소련측이 도브리닌을 보내 샌프란시스코가 더 좋겠다고 회답해 온 것이다.

소련과 수교과정에서 經協 차관에 대한 구체적인 액수는 마실리코프 부수상이 서울에 와서 金鍾仁 수석과 결정한 것이다. 당시 소련이 한국과 수교하면서 소련에서 북한에 원조하고 있던 고도 정밀무기에 대한 공여를 제한하기로 한 것은 1990년 8월에 내가 마실리코프 부수상을 별도로 만난 자리에서 결정된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소련이 經協 차관을 먼저 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 당신네나 한국이나 양쪽이 다 좋지 않다. 수교 이전에 經協이 이루어지면 우리가 수교를 마치 돈으로 산 것이 된다. 당신네는 최대강국인데 먼저 經協을 받으면 수교를 돈으로 판 게 된다. 우리가 經協을 할 원칙이 있으니까 이걸 수교 뒤로 미루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당시 金鍾輝 수석은 『우리나라에서도 韓蘇 수교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당신네들이 우리와 經協을 하는 마당에 북한에 고도 정밀무기, 말하자면 전투기라든가 전차 미사일이나 군사협력, 군사원조를 주게 되면 나도 對蘇 經協의 반대론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마실리코프 부수상이 『對北 군사협력은 한국과의 經協이 이루어지면 중단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이 지켜져서 그후 북한에 한 대의 전투기, 한 대의 전차, 한 기의 미사일도 안간 것이다.

내가 소련을 처음 방문했을 때 소련의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과 각료들도 만났다. 당시 옐친은 자신이 소련 전체 대통령이 안되니까 러시아를 분리 독립하려고 했다. 때문에 그가 한국은 러시아 공화국과도 별도의 외교관계를 맺자고 제의했다. 나는 옐친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우물쭈물해서 완곡한 표현으로 거절했다. 일본은 한소수교에 대해선 경계하는 자세에서 관망을 했던 것 같고, 중국과의 수교에 대해서는 협조적이었다>

이어서 盧 전 대통령은 1992년 11월18∼19일 옐친 러시아 대통령 방한시 소련측에 의해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의 블랙박스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당시 한국 언론은 『가짜 블랙박스를 받았다』면서 우리 정부의 무능한 외교를 질타하고 나선 적이 있다. 과연 블랙박스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었을까.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대한항공 블랙박스의 진실

[KAL 007편 블랙박스는 옐친 자신도 내게 가짜를 준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블랙박스란 말은 소련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쪽에서 추측한 것이 확대되어 소동으로 번진 것이다]

金鍾輝 수석은 블랙박스 사건에 대해 이렇게 보충 증언한 바 있다.
『블랙박스 소동은 저널리스틱한 흥밋거리의 하나로 다루어진 감이 있다. 그것은 애초부터 블랙박스가 아니라 그 자체(격추된 대한항공기 잔해)를 盧대통령에게 보여줌으로써 옐친 나름대로는 친분과 성의를 표시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 친분과 성의 표시의 제스처로 말하자면 사전에 귀띔도 하지 않고 선물을 준비한 것이다. 그때 옐친의 입장에서는 盧대통령과 한국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자기네 對外 외교에 한국을 이용하려는 측면이 있어 한국과 친한 것을 대외적으로, 특히 일본에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또 하나는 한국으로부터 經協을 더 많이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을 때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증언.
<블랙박스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옐친으로부터 블랙박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언론은 블랙박스라고들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 옐친은 나와 한국에 대해 무척 호감을 갖고 있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감추지 않아 내가 그것을 충분히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호흡이 통하면서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우리를 속인다거나 사기극을 벌였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격추된 KAL기의 엔진부분인지, 다른 부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죄송스럽다」고 해서 자기 나름대로는 사과하는 뜻으로 내게 전하겠다고 갖고 온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떻든 KAL기의 잔해 일부를 찾아냈으니까 그거나마 소중히 가져오게 되면 사과도 되고, 자기들의 정성을 표시하는 게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편집자 注 : 옐친은 이 방한중 舊소련-북한 간의 우호협력조약 중 제1조인 무력자동개입 조항의 폐기를 약속함으로써 북한과의 군사동맹 관계를 정리했다).

중앙아시아 교민 연해주 이주 작전

지금 우리가 고생하고 있어서 30억 달러(실제 제공은 약 15억 달러)가 큰 돈이라고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러시아와는 어떤 노력을 해서든지 관계를 빨리 개선해나가야 한다. 극동 시베리아쪽의 보고(寶庫)를 눈으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쪽에서 보면 일본에게는 침략을 당한 경험이 있어 서먹서먹하고, 미국과는 아직도 경쟁상태이다. 중국과도 원만하지 않은 상태여서 제일 부담 없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다. 특히 한국은 산업분야의 기술과 노하우를 갖고 있으면서 자기들에게 어떤 위협도 주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 절호의 기회를 우리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여튼 소련에 제공한 經協 자금 30억 달러를 놓고 비판도 많지만, 러시아가 북한에 무기 지원하지 않은 액수만 따지더라도 30억 달라는 갚고도 남은 셈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1992년 11월18일 한국을 방문해, 이튿날인 11월19일 나와 정상회담을 갖고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공산당 포기와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배우겠다고 연설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옐친이 국제적인 현실에 눈을 뜨고, 또 한국에 와보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바보짓을 해왔는가를 깨닫는 것 같았다. 옐친은 다혈질적인 분 같았다. 그가 처음 訪韓했을 때 나는 그와 테니스 시합을 가졌다. 나는 재임중 두 사람의 외국 국가원수와 세 차례의 테니스 시합을 했다.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먼저 테니스 게임을 하고, 또 그가 訪韓했을 때 청와대에서 다시 겨룬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았는지 옐친 대통령이 테니스를 제안해왔다. 그는 윔블던에 출전했던 소련선수를 코치로 삼아 몇 달 동안 연습을 한 후 한국에 오면서 그 코치를 데리고 왔다. 그래서 우리는 친선게임을 갖기로 했다. 키가 큰 옐친 대통령은 원래 대학시절 배구선수였다고 하는데 국가대표는 아니었지만 실력이 국가대표 선수급으로 인정할 만큼 잘했다고 들었다. 때문에 배구의 킬러를 치는 솜씨로 정공을 내려치니까 맞으면 아주 굉장한 스매싱이 되고, 안 맞으면 형편없이 네트에 꽂히곤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연습을 하기는 했어도 그리 숙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게임은 그와 코치, 그리고 우리쪽은 나와 이현우(李賢雨) 경호실장이 한 조가 되었다. 그런데 첫판에서 옐친이 져버렸다. 그러자 그는 패배를 못참겠다는 듯이 한번 더하자고 했다. 나는 애초부터 이길 생각이 없는 게임인데다 그에게 공을 보내면 우리가 또 이길 것이라고 생각해 공을 그의 코치쪽으로 보내 코치가 요리하도록 함으로써 1대 1로 비기게 한 일이 있다>

金泳三과 朴哲彦의 갈등

이어 韓蘇 수교를 주제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셰바르드나제가 수교일정을 1990년 9월30일로 앞당긴 이유중의 하나가 이 사람이 북한에 가서 모욕을 당했던 감정 때문입니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어요. 북한측은 자기들이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그렇게(무례하게) 한 건데, 정상적인 외교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런 짓을 한다고. 어디라고 자기 종주국 소련의 外相을 공갈 협박하겠어. 이런 일들을 서슴없이 하거든. 그런데 그게 먹혀 들어가는 것이 金日成의 능력이야. 金日成이 직접 공갈치는 것은 아닌데, 金日成은 어쨌든 외국 사람들 마음을 끌어당기고 사로잡기도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특수한 수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원래 수교하기 전에 經協까지 논의하고, 이것을 수교조건으로 했으면 소련이 상당히 많은 經協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수교를 결정한 다음부터 經協교섭을 시작한 것은 순서가 바뀐 것 아닙니까.

『그것은 소련이란 나라가 지금도 저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이 굉장한 나라요. 우리야 필요했기 때문에 (수교를)했지만 돈으로 수교를 샀다는 것은 소련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이것을 나도 알고 그 사람도 입장을 알기 때문에 참모들간에 그런 얘기가 나오더라도 치워버렸어요』

―소련이 독일 통일과정에서도 그랬지요.

『맞아요. 우리 생각에는 독일에게 돈을 많이 받고 독일 통일을 눈감은 것으로 상상하지만 그게 아니야. 그냥 주어버렸어. 경제적으로 소련은 돈을 다루는 방법은 잘 몰라. 그들은 利子 개념이 뭔지도 몰라. 중국 사람과 완전히 틀리지. 여기에 슈퍼 파워로서의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1990년 초에 金泳三 대표가 朴哲彦 보좌관을 데리고 소련에 갔다가 고르바초프에게 親書 전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처음에 金泳三씨가 朴哲彦이를 같이 가자고 한 거야. 朴哲彦이는 안 가려고 하는 것을 내가 가라고 해서 朴哲彦이가 따라간 거야. 갈 때까지는 좋았지요. 그런데 가자마자 그만 틀어져 버린 거라. 朴哲彦이는 정상적으로 공직자 코스를 밟았기 때문에 외교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근본을 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양반(金泳三)은 (외교절차를) 전혀 무시하니까 의견이 근본부터 틀려서 「안됩니다」그러면「무슨 소리냐」해서 멀어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