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에게 역전KO 당해 더 유명해진 포먼, 세상을 떠나다!

마지막에 웃은 사람,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와 함께 권투 황금 시대를 이끌었다.
무하마드 알리에게 역전 KO패 당한 것으로 유명한 전 미국 헤비급 권투 챔피언 조지 포먼이 오늘 76세로 타계했다. 유족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독실한 설교자이자 헌신적인 남편, 사랑하는 아버지, 자랑스러운 증조부였다. 그는 신앙, 겸손, 목적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인도주의자이자 올림픽 선수,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故人은 깊은 존경을 받았다.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신념을 지닌 사람이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유산을 지키려 끊임없이 싸웠다. 축복을 받은 한 남자의 특별한 삶을 기리기 위해, 우리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기를 부탁드린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포먼은 1973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조 프레이저를 KO로 물리치고 챔피언이 되었다. 최강의 펀처로 평가되었으나 이듬해 자이레 킨샤사에서 알리와 맞붙어 8회에 KO패했다. ‘정글 속의 난투’라고 불리는 이 시합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권투역사상 고전적인 명승부로 기억된다.
알리는 1라운드를 치른 뒤 전술을 바꾼다. 로프에 기대어 수비에 치중한다. 포먼은 쏘나기 펀치를 날리지만 알리의 팔뚝에 걸린다. 간간이 알리는 역습을 한다. 포먼은 헛방을 많이 날리느라고 체력을 소모한다. 5라운드부터 피로의 기색을 보인다. 알리는 클린치를 할 때도 포먼에 안기듯이 몸을 기댄다. 귀에다 대고는 "야, 이것밖에 없어. 더 센 걸 때려 봐"라고 약을 올린다. 포먼은 당시 40승 無敗에다가 37KO승이었다. 거의가 전반전에 KO 시켰다. 5라운드를 넘기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하였고 체력소모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8회에 알리는 약점을 보인 포먼을 연타, 고목처럼 쓰러뜨려다. 그때까지 세 심판의 점수도 모두 알리의 리드였다.
포먼은 1977년 은퇴를 선언했으며, 목사 안수를 받이 휴스턴 지역 교회에서 설교했다. 조지 포먼은 은퇴 후 알리와 친해졌다. 포먼은 1988년 40세에 링에 복귀했으며, 1994년 45세에 헤비급 최고령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1997년 76승 5패(68KO)의 기록을 남기고 영구 은퇴하였다. 그는 프레이저, 알리보다 더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마지막에 웃은 사람이었다.

*2016년 6월4일자 조갑제닷컴에 내가 썼던 알리 부고 기사를 덧붙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꼽히는 미국의 흑인 헤비급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파키슨병을 앓다가 호흡곤란으로 오늘 사망하였다. 74세. 1970년대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가 세 번 대결한 헤비급 권투 시합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宿敵 프레이저는 간암으로 2011년에 죽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두 사람이 末年에 투병하다가 早死한 것이 안타깝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 세대(그는 해방동이인 필자보다 세 살 위)이다. 그가 벌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 시합은 다 보았다. 알리-리스턴(2회), 알리-프레이저(3회), 알리-포먼戰은 타이틀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건 名시합이었다.

알리에게 패배한 리스턴과 포먼은 절대 강자의 자리를 회복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사라졌다(리스턴과 포먼은 알리에게 지기 전엔 역대 최고의 강타자로 평가되었다. 포먼은 알리가 은퇴한 뒤 老年에 복귀). 아웃 복서였던 알리는 인 파이터 프레이저와 2승 1패(타이틀戰은 1승1패)를 기록하였다. 1971년의 첫 대결과 1975년의 타이틀 전은 권투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기로 꼽힌다. 1차전에서 도전자 알리는 15회에 다운(챔피언으로서 첫 다운)을 당하였고, 3차전에서 프레이저는 거의 失明(실명)이 되어 14회 TKO敗(15회 시작 전에 기권) 하였다. 마닐라에서 열려 '스릴러 인 마닐라'라고 불리는 이 시합은 YOUTUBE로도 볼 수 있는데, 마지막까지도 승부를 예단할 수 없었던 '死鬪(사투)의 드라머'이다. 나는 이 경기를 권투역사상 최고의 시합으로 꼽는다(다운이 없지만 주고 받는 펀치의 强度가 격렬하다). 경기 흐름이 인생의 축도판처럼 기복이 심하다.

1974년 아프리카 자이레 킨샤사에서 열린 시합(럼블 인 정글)에서 알리는 로프에 기대어 소나기 펀치를 견디다가 8회에 챔피언 조지 포먼을 KO시키고 7년 전에 박탈당하였던 챔피언 자리를 되찾는다. 역습 펀치를 맞고 넘어가는 포먼을 내려다 보면서 오른 쪽 주먹을 뻗다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였던지 중간에서 도로 거두어 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역전승이었다.

알리는 이슬람으로 改宗, 이름을 캐시우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바꾼 뒤, 월남전 기간중인데도 징집을 거부, 1967년부터 3년간 헤비급 타이틀이 박탈당하고 출전금지되었다. 이 기간 나는 공군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면서 언제 알리가 복귀하나 기다렸다. 출전이 금지된 3년간은 알리가 권투선수로서 전성기에 달할 때였다.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알리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가끔 그 잃어버린 시간대에 알리가 프레이저나 포먼, 또는 타이슨과 싸웠다면 어떠하였을까 상상해본다. 리치가 짧은 타이슨은 알리의 잽에 벌집이 되었을 것이다.

'알리 셔플'이라 불리는 그의 발놀림은 예술이었다. 레프트 잽은 역사상 최강이라고 평가된다. 알리는 3년간의 공백기를 거치면서 경쾌한 푸트워크와 스피드를 잃었다. 그는 복귀한 뒤 맷집으로 버티었다. 알리가 빠르기만 할 뿐 아니라 맷집도 좋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1960, 70년대, 알리의 모든 타이틀戰(마닐라 스릴러 제외)은 TV로 국내에 중계되었는데 다방이나 사무실에 사람들이 극장처럼 모여 앉아 흑백 화면을 보면서 환호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1976년 여름, 알리는 일본 프로 레슬러 이노키와 괴상한 시합을 하였다. 이노키는 링에 누워서 경기를 치렀다. 알리는 무승부 직후, 누워서 돈을 버는 사람은 창녀와 이노키뿐이라고 평하였다. 이 시합 뒤 알리는 한국을 방문하였다.

알리가 활약하던 1960~70년대는 미국에서 인종폭동과 反戰시위가 시끄럽던 시대였다. 알리는 "나는 베트콩과는 유감이 없다"면서 징집을 거부, 反체제 문화 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미국 대법원은 그를 징집거부로 기소한 사건에서 '양심적 병역 기피'를 인정, 무죄를 확정하였다. 그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감옥행을 각오하고 챔피언 타이틀을 포기한 용기는 높게 평가된다. 전성기에서 3년을 쉰 권투선수는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게 통설이었지만 알리에겐 통하지 않았다.

파키슨병을 앓으면서도 그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개막식에 聖火를 들고 나타났다. 딸도 권투선수. 알리는 네 번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링 잡지는 그를 역대 최고의 권투선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를 20세기의 최고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알리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때는 소련 기자 앞에서 미국을 변호하는 등 체제 옹호파였는데 고향으로 귀국하여 흑인 차별을 실감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홧김에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1964년에 리스턴을 TKO 시키고 챔피언이 되었다. 1980년에 마지막 시합을 하였다. 20년을 현역으로 뛴 셈이다. 그 동안 타이틀을 잃었다가 되찾는 식으로 세 번 챔피언이 되었는데, 어디를 가든 무슨 말을 하든 기사감을 만들었다.'떠벌이'로 불렸다.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권투선수로선 예술적이었고, 한 인간으로선 흥미진진한 인격이었다. 오늘 뉴욕타임스는 그의 죽음을 대통령의 죽음 이상으로 크게 취급하였다. 그는 한 시대의 정신을 구현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알리는 수많은 名言을 남겼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나는 당신들이 되라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자유가 있다.”(I don't have to be what you want me to be. I'm free to be what I want.)
“내가 권투 부문에서 너무나 위대하므로 그들은 ‘록키’라는 영화 속의 백인 이미지를 만들어 링 속의 내 이미지에 대응해야 했다.”(I have been so great in boxing they had to create an image like Rocky, a white image on the screen, to counteract my image in the ring.)
“나는 권투의 엘비스(프레슬리)였다.”(I was the Elvis of boxing.)
“나는 권투의 우주비행사이다. 조 루이스와 뎀프시는 제트 조종사 정도였다.”(I am the astronaut of boxing. Joe Louis and Dempsey were just jet pilots.)

가장 알리다운 名言은, “당신들이 되라는 사람이 되지 않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자유가 있다”일 것이다. 1964년 리스턴을 이겨 세계 챔피언이 된 날에 했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人生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드라마틱하게 꽉 찬 삶을 산 사람이다. 1960~70년대에 알리가 없는 세상은 참 심심했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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