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침침한 속에서 청록빛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바짝 마른 초라한 모습의 노파의 얼굴이 보였다. 볼이 움푹 들어가고 골 깊은 주름이 나 있었다. 내가 소년시절 우리 집에서 몇 달 밥하고 빨래하고 허드렛일을 해주던 분이었다. 엄마의 먼 친척 언니가 된다고 했다. 너무 가난해서 우리 집에 와서 일을 거들어 주었다. 그 노파는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유령이 간곡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내 아들한테 50만 원만 가져다 줘.”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나 생생했다. 2023년 봄쯤에 꾼 꿈이었다. 소년 시절 그 노파의 아들이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내 또래였다. 그는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가 부러운 것 같았다. 그가 내게 했던 이런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나도 너같이 엄마가 해주면 뭐든 잘할 수 있어.”

그는 뒷바라지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부모가 원망스러운 것 같았다. 그는 성실하고 강했다. 측량기사가 됐고 공기업에 취직해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내가 변호사가 된 후 그에게 법률문제가 생기면 더러 나를 찾아오곤 했다.

우리들이 육십대 초쯤이었을 때였다. 그가 암에 걸려 소백산 자락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위로도 할 겸 깊은 산속 마을 뒤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었다. 꽁지머리를 하고 개량 한복을 입은 그는 은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항암치료도 더 이상 의미가 없대. 잘 살아야 5년 정도래. 내 나이로는 억울해. 10년쯤은 더 살았으면 좋겠어. 치료를 포기한 후 전국을 혼자 돌아다녔어. 동의보감을 찾아보고 산을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특효약이라는 봉삼을 찾아보기도 했어. 소백산 자락을 내려오다가 우연히 콩밭을 보게 됐지. 갑자기 밭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야. 그냥 들어가 봤어. 너무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거야. 거기서 살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 밭을 샀어. 흙벽돌 한 장 한 장을 내가 직접 쌓아올려 흙집을 지었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했어. 토끼도 키웠는데 처음에는 막 도망가던 놈이 요즈음에는 다가와서 다리에 막 몸을 비벼 정말 귀여워. 그런 걸 어떻게 잡아먹는지 몰라.”

그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후 이따금씩 그는 자기가 키운 고구마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죽은 엄마가 불쑥 나의 꿈 속에 나타난 게 그가 십년은 더 살고 싶다는 마지막해였다. 꿈이지만 금액까지 말하면서 아들에게 돈을 좀 주면 좋겠다는 유령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 며칠 후 나는 오백만 원을 봉투에 넣어 산 속 흙집에 있는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꿈에 나타난 그의 엄마 얘기도 전해 주었다. 그는 형편이 안 좋아 보였다. 그 한 달쯤 후였다. 그가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죽음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 무렵 어느 날 내가 사는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으로 한 여성이 찾아왔다. 착해 보였다. 그녀는 내게 저세상으로 가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평소에 그녀에게 내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혼수상태 속에서 그가 그녀를 간절히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마음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깜빡이던 그의 생명의 불꽃이 꺼져버렸다는 소식이 다음날 전해져 왔다.

요즈음은 주변 사람들의 소설같은 인생의 마지막을 종종 보곤 한다. 그들을 보면서 죽음을 깨닫는다.

우리들 대부분 젊어서는 가족들의 밥을 위해 그리고 아이들 가르치기 위해 일했다. 그게 보통의 아버지들 아닐까. 굴욕을 감수해야 돈은 들어왔다. 우리들이 마시는 소주잔에는 얼마의 눈물이 섞여 있었다. 늙고 가난해지고 암이라는 초청장을 받는 게 흔히 맞닥뜨리는 우리 세대의 운명이다. 죽음의 천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제 갈 시간이 됐다고 한다. 노년의 황혼이 의외로 짧다. 죽은 친구들의 비석을 보면 모든것이 태어난 날과 죽은 날로 압축되어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그의 죽은 엄마의 유령은 왜 내 꿈에 나타나 부탁을 했을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