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집단 노동을 하면 어느 정도 거칠게 일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면 전쟁을 해도 이렇게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거칠게 일한다.

소련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국제녹십자사 총재 자격으로 내한하여 1995년 2월 5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김학준 단국대 이사장과의 면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째, 소련의 인민대중은 일하겠다는 의욕이 거의 없었어요. 둘째, 간부들도 안일에 빠져 인민에게 군림하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이어 고르바초프는 '근로의욕, 자발성, 창의성을 모조리 상실'했다고 말했다. (*김학준 저 <김정일과 코카콜라> 285페이지.

근로 의욕을 상실했을 때 노동의 결과는 전쟁보다 무서운 파괴를 불러온다. 2001년 미국 농무성 초청 한국 농업 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이다. 옥수수 최대 생산국의 종자 능력을 보니 북한 종자능력도 이에 비슷함에 놀라웠다. 결코 북한 옥수수 종자가 낙후된 것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북한 옥수수 종자는 시험포 조건에서 1정보(3000평, 1헥타르)당 10톤은 충분히 생산된다. 심지어 내가 탈북하기 전인 1980년대 말에는 '키 낮은 옥수수'(평당 33포기 심는)는 13톤 난다고 했다. 낮게 잡아 1정보당 10톤 옥수수가 생산되는 북한 종자임은 확실하다. 이런 생산 능력은 공산 농장에 나가면 1톤 미만으로 떨어진다.

필자가 남한에 와서 "당신들이 연구한 종자 능력의 몇 퍼센트나 농민들이 쫓아오는가?"라고 물었다. 대답은 "90% 쫓아오며 심지어 돈 되는 것은 연구원보다 더 앞서기도 한다"는 것이다. 북한 공산집단 농민들이 10%도 못 쫓아오는 것을 보면 1대 9라는 효율의 격차가 나는 셈이다. 전면 전쟁터라고 해도 이런 효율 격차로 <파괴>되지 않으리라 본다.

왜 이런 효율 격차가 나는지 역시 과학자는 데이터로 말해야 했다. 쉽게 말해 공산 농민들이 얼마나 거칠게 일하는지 조사해보았다.

조사 지점은 량강도 김정숙군 풍양리 5반(보파리)이다. 조사 시기는 내가 탈북하기 한 해 전인 1988-1989년이다. 북부 지역 옥수수 품종들은 대체로 1평에 30포기 정도 심는다. 1평은 70cm 이랑 사이에 길이는 570cm이다. 가을 수확철에 옥수수 대를 조사해보니 11대가 남았다. 이미 3분에 2의 옥수수가 없어진 상태에서 생산성을 논해야 했다. 남은 3분의 1 옥수수도 부실한 데다가 병충해 입은 것도 상당했다. 그러니 10톤 생산 능력이 1톤으로 급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1톤 생산된 것도 이 열악한 조건에서는 상당한 것이었다.

왜 평당 30포기의 옥수수가 가을에 11포기로 남는지 관찰해보았다. 파종시 북한만큼 옥수수를 100% 정확히 밭에 심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옥수수 영양 단지 모판에서 확실히 자라난 옥수수 모를 밭에 옮겨 심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냉이영양단지재배법'이라 한다. 남한에서 부식토가 달린 채소 모를 밭에 옮겨 심는 것과 같다. 다른 점은 남한은 부식토를 채운 비닐 틀 안에 모를 키웠다면 북한은 흙과 부식토가 섞인 덩어리(영양단지)에 모를 키운 것이다.

이렇게 정확히 옥수수 모를 밭에 옮겼는데 그 후 3분의 2가 사라지는 대부분은 김매기 때(제초)이다. 제초제가 부족한 북한은 대부분 인력, 축력으로 김매기를 한다.

인력은 봄철 농번기에 약 두 달, 가을철 한 달 정도 <농촌지원전투>란 명목으로 노동자, 사무원, 학생, 대학생, 군인 등 사회 인원이다. 거의 모든 농산 작업을 손 노동으로 하기 때문에 인해 전술로 총동원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아니면 공산 농장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할 정도이다. 하지만 숙련된 농민도 내 것이 아닌 일에 열심일 수 없는 판에 이들의 작업은 거칠다 못해 파괴적이다. 더구나 배고프고 불편한 잠자리, 비문화, 비위생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휘두르는 호미질 속에는 어린 옥수수모도 가림 없이 있다. 뒤 따라 소 보습으로 후치질 즉 고랑을 따라 보습이 지나간다. 고랑 따라 소 보습이 지나가면 흙밥으로 이랑을 덮는다. 이때 잡풀과 함께 잘린 어린 옥수수모는 생매장당한다.

한편 성성한 옥수수 어린 모도 생매장당하기 쉽다. 북한은 고도의 작물 조건을 보장한다면서 이랑 위에 심는 옥수수를 일직선이 아니라 톱날 식으로 심는다. 이것을 지그재그 재배라 한다. 이는 골고루 뿌리를 퍼지게 한다고 되어있지만 소탐대실이다.

왜냐면 톱날 사이처럼 심은 옥수수모 거리가 규정상 10cm 미만이어야 하는데 농촌 지원 꾼들은 그런 규정을 지킬 수 없다. 함부로 15cm 이상 벌려 심으니 후치질로 소 보습이 지나갈 때 일어나는 흙밥에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갈비뼈가 아롱아롱하도록 잘 먹이지 않은 소는 비칠거리며 보습을 끌고 가기에 이에 채찍질까지 당하니 놀라고 지친 소는 곧바로 갈 수가 없다. 그 통에 더욱 어린 옥수수 모들은 소 보습의 흙밥에 사정 없이 생매장당한다. 내 땅 내 옥수수라면 묻힌 것을 파헤쳐 살려 놓고 가야 하나 그럴 마음도 그럴 힘도 없다. 날래는 어케 되던 간에 오직 고된 오늘 이 순간 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모두 바라는 것뿐이다.

이를 감독해야 할 간부들도 작업 현장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괜히 땀 뻘뻘 흘리는 작업자들의 눈총을 맞느니 안 보이는 데서 땡땡이 치는 것이 장땡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미 질에 잘려 나가고 후치질에 생매장당한 나머지가 바로 3분에 1의 옥수수가 된 것이다.

물론 눈에 띄기 쉬운 길가의 밭들은 특별히 잘 관리한다. 이 사실은 전 북한 노동당 비서였던 황장엽의 증언으로 잘 보여준다. 농촌 시찰을 나가 보았는데 길가 주변은 아주 잘 가꾸어져 있다. 이를 알고 밭 안쪽으로 가보니 범이 새끼 칠 정도로 잡풀 속에 농작물이 있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말대로 왜 범이 새끼 칠 정도로 되었을까. 잡풀의 야생성은 농작물에 비할 바 없이 강하다. 이를 호미로 제거하여 죽이려면 잡풀의 생장점 바로 밑의 뿌리를 끊어 엎어놓아야 한다. 하지만 작업꾼들은 보다 쉽게 일하려 한다. 잡풀의 생장점 위를 칼로 베듯 쳐나가는 수가 다반사이다. 작업 후 보면 잡풀들이 모두 제거된 것 같이 멋지게 쓰러져 있다. 하지만 생장점과 뿌리가 남겨진 잡풀들은 그대로 살아 있다. 오히려 하나의 생장점을 쳐 버린 잡풀은 여러 개의 생장점으로 자라게 된다. 이런 위에 화학 비료를 뿌려주게 되는데 농작물보다 잡풀이 더 잘 빨아 먹고 커버린다. 말 그대로 범이 새끼 칠 속에 농작물이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옥수수의 공산 생산성과 작업 실정을 데이터화한 연구원은 나 하나밖에 없는 줄로 안다. 다들 이렇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공산 생산성을 데이터로 잡고 토를 달려는 자체가 정치범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야 할 무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필자가 하게 된 것은 너무나 젊디 젊은 연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하루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살아 나기도, 그래서 탈북하기도 하였다.

이런 데이터들을 만든 다음 해인 1990년 5월 31일 중앙당 제 1호 편지 즉 김일성 앞으로 보냈다. 이 날을 죽어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중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념적인 중앙당에서는 이 편지를 받고 <이색 사상> 즉 개인주의인 자본주의 사상 - 반동 분자로 보고 석 달 동안 은밀히 뒤 조사해보았다. 하지만 조사해보면 해볼수록 순수한 청년 연구원의 소행임이 드러나자 처형보다는 설득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의 지시를 하달했다. 정치가 뭔지 모르는 순진무구한 과학자를 과학자끼리 설득하라는 것이다. 하여 과학자들 관리 책임자인 과학원 과학지도국장을 나에게 내려 보냈다. 평양에서 김정숙군까지 오자면 나라 한 끝에서 맨 끝까지 오는 거리임에도 중앙당의 위임이기에 찾아왔다.

"당신의 데이터들은 과학 수치로서 맞다. 하지만 이대로 하는 것은 개인농으로서 이건 정치이다! 따라서 과학자는 과학 연구만 하라!"

"정치가 뭡네까?! 배시때기 부르게 하는 거이 정치가 아닙네까.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쌀은 공산주의라고 하시지 않았습네까."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고 과학지도국장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아주 매몰차게 반말로 강제하듯 말한다.

"너! 이번에 죽을 뻔했어! 알아! 과학 연구만 하라우! 그것밖에 출세의 길은 없어! 젊디 젊고 앞길이 창창 놈이니 아깝게 죽지 않으려면 함부로 날뛰지 마라!"

이제야 무서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지도국장이 돌아간 후부터 맥이 쪽 빠져 아무 것도 하게 되지 않았다. 과학자는 과학 연구만 하라고 하는데 생산에 도입 안되는 것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쌀은 공산주의라며 한평생 인민에게 이밥에 고기국 주신다고 하신 수령님이 아니란 말인가?! 최초로 믿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수령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아직은 몰랐다.

수령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신기하게도 과학지도국장이 돌아간 직후 출장길에서였다.
1990년 8월 말 매미 소리가 요란스러운 때 강원도 철원군 대전리에 갔을 때이다. 남조선을 곁에 둔 곳이니 대북확성기 소리도 들리는 곳이었다. 주변에는 대북 삐라가 수두룩했다. 보지 말라고 하지만 더 보고 싶은 것이 대북 삐라이다. 라디오 인터넷 막은 유일한 폐쇄 속 북한이니 더욱 더 외부 소식이 궁금하다. 더욱이 동족인 남조선 소식이 몹시 궁금하였던 것이다.

출장을 10일 간 연기하고 삐라들을 보는 것이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속에서 6·25 전범자가 수령임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죽었다 깨어도 미국과 남조선 괴뢰도당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세뇌되었었다. 그런데 180도 다르게 수령님이 전범자라니 까무라치도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와 내가 말하고 내가 놀랄 정도였다. 거짓말로 사기 치며 오직 권력 욕 밖에 없는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90년 8월 말인데 그로부터 석 달 후 탈북의 길에 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