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대표, ‘해방 80년, 대한민국 역사에 족적을 남긴 80인’에 선정! 기사를 보고 이 글을 쓴다.

통상 <귀순자>는 꽃다발과 거금을 안기며 환영하였다. 하지만 180도가 된 것은 냉전이 끝난 소련과 공산권 붕괴 직후부터이다. 1992년 7월6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 처음 들어갔던 필자의 목격이다.

이미 대사관에 들어간 귀순 벌목공 3명을 <경찰을 부르겠어!> 하며 내쫓고 있었다. 장관이란 타이틀 속의 거창한 정부 기관인 통일원과 통일연구원, 이북오도청을 갖추고 통일에 오직 매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본적인 통일 전략과 상식선의 인도주의, 인권 원칙도 없고 정략적인 것만 있는 현실을 똑똑히 경험한 것이다. 얍삽하게도 서독처럼 <통일비용>을 부담하고 싶지 않다는 천민자본주의와 북한 통치자의 비위를 맞추며 회담을 통해 남북문제를 해결한다는 허황한 처사였다. 이는 <북한당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탈북자를 받지 않는다.>는 1994년 4월7일 김영삼 대통령의 정직한 발언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산으로 가는 배를 돌려 세운 것은 당시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이다. 필자는 1990년 11월 탈북하여 중국, 북한, 러시아 감옥을 거쳐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에 도착하였지만 위에서 말한 탈북자 정책에 막막하였다.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1950년대의 반 김일성 망명 인사 허진 선생과 선교사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4년간 생사를 버텨냈을지 지금도 상상이 안 간다. 이런 답답하고 막막한 속에 희망의 빛으로 다가온 이가 있었다.

당시 운동권 출신으로 소련 요원으로 발탁되어 레닌그라드 대학 전임강사였던 황성준이다. 그는 시위하다 한쪽 눈을 실명할 정도의 열렬 좌파 서울대 출신 수재급 운동가였다. 하지만 공산 종주국에 직접 살아보면서 허상을 낱낱이 깨달은 인물이다. 거짓 꼴이 된 근로자 절대주의 속에 묻혀 살아보니 자신도 가난함을 몸소 느껴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는 지난날 적대적인 조선일보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을 어떻게 만나 중대한 과업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 현지에 있는 탈북 벌목공 실태를 알아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공개되면 잡혀가기에 꼭꼭 숨어있기 때문이다. 난감한 중에 모스크바 현지에 있는 서울대 동창이 제보하였다. 모스크바 한인 교회에 공개적으로 다니는 탈북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필자였다.

흑암 같은 망명 상황에서 어머니같이 품어준 것이 선교사들이다. 첫 설교 제목도 3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실패자를 찾아온 주님>이란 설교 제목인데 마치 나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영혼을 울렸다. <주 너를 지키리>란 찬송가 구절이 내 영혼에 자리잡았는지 교회를 공개적으로 다녔다.

그 통에 앞길이 열렸다.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이때의 경험으로 지금도 북한의 테러 위협으로 여섯 명의 형사들이 24시간 경호하는 대상이지만 사실 겁이 없이 산다.

아무튼 황성준이 찾아온 예배날 교회 담임목사(조영철)는 신통히도 손님 소개 시간에 나를 첫 공개하여 만나게 되었다.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 기자의 명을 받고 왔다는 황성준은 진취적이었다. 내가 사는 허줄하고 위험한 숙소에 겁도 없이 따라와 함께 자면서 인터뷰하는 열정가였다.

인터뷰 시작부터 <귀순자>란 말이 정말 거슬렸다. 환영은 고사하고 받지도 않는데 무슨 귀순자란 말인가. 그리고 어감도 귀순이 귀신처럼 들려 듣기 싫었다. 그러자 황성준은 어떻게 불렀으면 좋겠는가고 반문한다. 이에 어려울 것 없이 즉답하였다. 북한을 탈출하였으니 탈북자하면 되지 뭘 그러냐고 했다. 황성준은 아! 그거 좋구만요. 하여 탈북자로 명명해지는 순간이 되었다.

물론 이것을 기사로 받아들인 월간조선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이 기사는 특종으로 국내외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촉매제가 되었다. 필자는 남한의 주요 언론사인 mbc tv 시사 프로에 영상으로 등장까지 하였다.

국회 외교 통일위원회 간사 강신조 의원, 경실련 사무총장 서경석 목사가 모스크바 현지에 찾아올 정도로 남한 사회에 놀라운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주류였던 보수 우익들이 가장 많이 들고 일어났다.

이 특종의 여파로 월간조선은 <관훈언론상>을, 황성준은 모스크바 조선일보 특파원 임명될 정도였다. 한편 학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북한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파동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영국의 더타임스, 일본 아사히, 미국 월스트리트 등 세계적 언론들과 그밖에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언론사 기자들이 찾아왔다. 이는 기거했던 조영철 목사 사모의 반감이 일 정도였다. 사모는 미국에 있는 여동생의 남자로 나를 정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어린 세 자식을 둔 모성 본능은 북한에 테러 당할까 심히 우려하였다. 실제로 그런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우려와 희생 속에 탈북자로서 원하던 원치 않던 한순간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 유명함은 일주일 동안 내가 없어졌을 때 모스크바에서 난리가 났다고 할 정도였다.

누구에게 알리지 않고 허진 선생의 별장에 나가 있었을 때이다. 사실 누구에게 알리고 갈 정도의 연고가 없는 외로운 탈북자 처지였다. 하지만 주말에 허진 선생이 자신 별장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난리를 전하는 것이다. 북한이 납치해 간 것이 아니냐고 모스크바 전체가 관심하며 걱정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든 말든 누구도 쳐다보지 않던 탈북자였는데 일주일간 없어졌다고 이렇게 관심하다니 오히려 내가 놀랐다.

진짜 북한 모스크바 대사관에서 나를 잡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KGB 후신인 러시아 정보기관도 언론에 알려진 나를 주목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언론의 힘은 이것만이 아니다. 해외 탈북자 전체 문제를 해결하는 역사도 일어나게 한 것이다. 많은 기자들을 만나는 중에서 월스트리트 저널 여기자 로제트와의 인터뷰에서이다.

우리는 정치 망명자이다. 그런데 남한은 받지 않고 북한은 잡아가려 하고 그러니 뭔가 보호받을 길이 없는가고 물은 것이다. 당시 허진 선생 집에 소유했던 월간조선을 흥미진진하게 탐독하였는데 정치 망명자를 보호한다는 막연한 정보를 알고 물은 것이다.

이게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로제트 여기자는 다른 기자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바로 한 해 전인 1993년 모스크바에 생긴 UNHCR(유엔고등판무국)에 자신의 남자친구가 있으며 이를 통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통역이 필요하여 지방 연합 언론 모스크바 특파원 송광호 기자와 로제트와 함께하였다. 훗날 송광호는 이 건으로 캐나다에서 북한 인권상을 수여받았다.

맞이하는 UNHCR 여직원은 프랑스 출신 이사벨이었다. 북한 사람으로서 첫 등록이라고 했다. 그 증서와 월스트리트저널 로제트, UNHCR 이사벨 명함은 사진은 아래에 앉힌다. UNHCR 첫 등록은 나도 모르게 탈북자 전체를 살리는 길을 연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남한대사관은 처음에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왜 유엔에까지 문제를 끌고 가 야기시키는가 하면서 너는 죽어도 한국에 못 간다고 엄포할 정도였다. 만약 남한이 안 받으면 나는 통일을 이룩한 독일로 간다고 했다. 하지만 남한당국은 급선회하여 유엔을 통해 탈북자를 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결론한다.

탈북자를 받아들이면 납치라고 우기는 북한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때로부터 황장엽을 비롯한 모든 탈북자를 유엔을 통해 받아들이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조갑제라는 언론인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음을 이 기회로 상기시킨다. 조갑제는 기자 생활 50여 년, 특종을 가장 많이 낸 기자로서 80세를 맞는다고 한다. 기회로 3만여 명의 탈북자를 구출했다는 존경과 감사가 지나친 것이 아니라고 본다.

2025 0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