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空
수년 전 겨울, 눈 내리는 날이었다. 사람을 통하여 조계종 종정 眞際 大禪師(진제 대선사)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 듣고 대구 桐華寺에 가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선 수행을 강조하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셈 치고 그 법을 구해보지 않겠느냐?”라던 말이 머리에 오래 남았지만, 그 말보다도 大禪師의 풍채가 압도적이었다.
大禪師의 대칭적이고 원만한 모습에서 문득 ‘圓空神體’(원공신체)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경주박물관에 있는 新羅 聖德大王神鐘(신라 성덕대왕신종)은 별명이 奉德寺鐘(봉덕사종)이고 속칭은 에밀레종이다. 이 종에 새겨진 640여 字의 頌詞(송사)가 있고 ‘圓空神體’라는 말이 나온다. 이 梵鐘(범종)이 그냥 종이 아니라 그 형상이 둥글고 속이 비어 있으므로 바로 ‘神의 몸’을 상징한다는 뜻이다.
神의 속성을 圓空, 즉 둥글고 속이 빈 존재로 규정한 것이 참으로 의미 깊다. 원만하면서도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그런 사람은 부처님을 닮은 사람이다. 둥글둥글해서 누구와도 싸우지 않으며 속이 텅 비어 있어 모든 것, 즉 갈등과 淸濁(청탁)까지도 다 받아들여 하나의 질서로 융합한다.
*眞際-moment of truth
나는 평생을 글로써 먹고 산 사람이라 作名(작명)에 관심이 많다. 大禪師를 만나고 돌아와서 ‘眞際’라는 法號(법호)의 뜻에 대하여 한동안 생각해보곤 하였는데 이 분의 강론을 모은《禪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니 답이 있었다.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臨濟正脈(임제정맥)의 法燈(법등)을 付囑(부촉)하시고 眞際라는 法號와 함께 傳法偈(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이때가 1967년, 山僧(산승)의 나이 서른넷 되던 해였습니다.>
‘眞際’는 참 眞과 때 際이니 진실의 시간이다. 際의 함축된 뜻은 11시 10분이란 식의 時刻(시각)이 아니라 時間(시간)의 개념으로서 ‘즈음’에 가깝다. 즉 ‘진실을 깨달을 즈음’, 줄이면 ‘진실의 순간’이다. 영어에 ‘moment of truth’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게 眞際의 정확한 영문 번역일 것이다. ‘moment of truth’를 보통 ‘결정적 순간’이라고 번역한다. 인간이 어떤 사물의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은 그의 인생이나 역사에서 결정적 순간이 된다. 불교인들에겐 ‘得道(득도)의 순간’으로 설명하는 게 나을 것이다.
眞際! 참으로 잘 지은 이름이다. 부처님과 조사님들이 남긴 ‘看話禪’의 맥을 잇고 있는(대선사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바로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통의 맥을 계승하고 있다) 큰 스님의 이름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으리라. moment of truth를 眞際 두 글자로 요약한 한자의 놀라운 축약력이다. 理性的인 한자와 生動하는 한글을 같이 쓰게 된 것은 한국어의 축복이다. 이 축복을 재앙으로 바꾸려는 이들이 한글전용론자들이다. 언어는 여러 나라 말이 뒤섞여야 풍성해진다. 표현력도 강해진다. 언어에 감정적 민족주의나 순결성을 요구하면 언어 파괴로 이어진다. 한자 한글 혼용론자들은 문명계승자들이고 한글전용론은 민족문화 파괴이고 문명 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