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사나이

나의 이용문 장군 취재는 즐거운 시간 여행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분들이 모두 유쾌하게 회고담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용문과 함께 하였던 추억을 떠올리는 이들의 얼굴엔 절로 웃음이 번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아들 이건개(李健介)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5·16 직후 군사정권이 안정되지 않을 때 만났던 박정희 소장은 온몸이 살기(殺氣)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이용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게 사라지더라고 한다.
이용문은 한마디로 멋진 사람이었다. 잘생기고 마음과 머리도 좋았다.
고향 후배인 白行傑(육군 장성 출신)이 그를 적확하게 묘사하였다.
“남을 잘 도와주는 분이었어요. 그게 즐거운가 봐요. 풍채는 또 얼마나 멋진 분이었습니까. 얼굴은 늘 벌겋게 홍조(紅潮)를 띠고 온화하면서 근엄하고요. 그분이 찡그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고, 돈에는 무관심할 만큼 청렴결백하시고.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에는 그렇게 치밀할 수가 없었어요.”
태평양전쟁 때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미군과 사투(死鬪)하고 있던 김정렬(金貞烈) 日軍 대위(뒤에 국무총리 역임. 故人)는 마닐라로 출장을 갔다가 장교 휴양소에 일본 육사 선배인 이용문이 자주 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남기고 왔다. 몇 달 뒤 기적처럼 김정렬의 부대에 李 소좌가 나타났다. 메모를 보고는 그 어려운 교통편을 이용하여 정글 속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李 소좌는 그냥 덤덤하게, 마치 어제 본 후배를 대하듯 “잘 있었어”라고 말했다. 얼마나 고생해서 찾아왔다든지, 반갑다든지 하는 표현이 전혀 없었다. 남의 생명을 구해주고도 인사를 받으면 면구스러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그냥 덤덤한 사람이었다. 우정이나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하지 말로써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용문의 남을 돕는 행위는 타산을 무시한 것이었기에 즉각적이었다. 한 평양고보 동기생은 1·4 후퇴 때 피란을 가서 가족과 함께 연고가 없는 부산진역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모습이 지나가던 참모학교 부교장 이용문의 눈에 띄었다.
“어디 갈 데가 있니?”
“보다시피 가두(街頭) 방황 중이다.”
“자식아, 여기 타!”
李 대령은 자신의 지프에 트레일러를 달고 오더니 친구의 가족과 짐을 싣고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을 구해서 나갈 때까지 마음 푹 놓고 쉬라고 한 뒤 휑하니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새벽에 찾아온 군인

이용문 장군은 전란(戰亂)의 광풍(狂風)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屍山血海로 변하는 시대를 산 사람이다. 태평양전쟁 때는 日軍 장교로 남방전선에서, 전후(戰後)의 反식민 민족독립운동 시기엔 월남에서, 해방 후의 창군(創軍)시기엔 기병부대에서, 북한군 남침 때는 적화된 서울 남산에서, 그리고 수도고지와 지리산에서 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이런 살벌한 현장에서 이용문은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하였다. 억울한 사람, 고통 받는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념전쟁의 아수라장에서 약한 이들에 대한 인간애를 일관되게 보여준 군인은 흔하지 않다. 이용문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부제(副題)를 ‘젊은 巨人의 초상’이라고 했는데, 이 ‘巨人’은 업적이 크다는 뜻이 아니라 속이 깊고 통이 큰 너그러운 성품을 가리킨다. 영리하고 끈질기며 용맹한 사람은 많지만 너그러운 사람과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한국에서 이용문과 박정희는 예외적 존재이다. 이용문은 너그러운 사람, 박정희는 아름다울 정도로 균형이 잡힌 인격체였고 이 점에서 서로 통하였을 것이다.
이용문 평전을 쓰게 된 계기는 <월간조선> 기자 시절이던 1984년 6월호에 쓴 기사였다. 이 기사 취재를 위하여 맨 처음 만난 이는 반공 사상검사로 유명하였던 선우종원(鮮于宗源) 변호사(국회사무총장 역임. 故人)였다. 그는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있었던 정치파동의 뒷이야기를 실감 있게 전해주었다. 장면(張勉) 국무총리를 비서실장으로 모시다가 총리와 함께 물러난 뒤였는데, 그의 집을 새벽에 불쑥 찾아온 이가 있었다. 경비원이 “웬 미군이 왔습니다”라고 해서 나가보니 평양고보 선배 이용문(당시 육군본부 작전국장)이었다(이용문이 비행기 추락사한 현장을 조사한 경찰도 미군 장교가 사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용문은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우리 같이 혁명하세”라고 하는 게 아닌가? 무리하게 개헌하여 정권을 연장하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제거하는 ‘혁명’을 도모하자는 제의였다. 이런 대화가 오고갔다고 한다.
“우리라니? 선배님 말고 많은 장군들이 가담하고 있습니까?”
“아니야… 자넨 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는가? 너희들이 찬성하면 장면 박사를 추대하고 곧 혁명을 일으키겠어.”
“난 못합니다. 민주주의란 수단과 절차가 중요한데 아무리 목적이 좋더라도… 더구나 우리 집안은 3대째 천주교 신자입니다.”
“야 이 사람아, 이런 판국에 페어플레이가 있을 수 있나? 조금도 주저 말고 거사(擧事)하세. 참모총장도 알고,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묵계도 받아 두었어.”
두 사람은 방안에서 두 시간쯤 열띤 토론을 벌였다. 후배인 선우 씨가 설득당하지 않자 李 장군은 탁자를 쾅 치면서 일어났다. 희끄무레 동이 터오는 바깥으로 나가는 李 장군에게 선우 씨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일은 내 목숨 다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자네는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야.”

李承晩 제거 계획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러곤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 13년 뒤 (4·19 혁명 후)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선우종원 씨는 《망명의 계절》이란 책에서 이상과 같은 에피소드를 공개했었다. 다시 그 15년 뒤인 1981년에 국토통일원은 6·25 戰史 관련 미국정부 문서집을 두 권 발간했다. 비밀 등급이 해제 된 외교·국방문서였다. 나는 이 속에서 미군이 한국군과 함께 이승만 제거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용문의 생애에서 한국 현대사와 가장 중요하게 관련되는 대목은 이 부분이다. 당시 한국 육군의 참모총장은 이종찬(李鍾贊) 중장, 작전국장은 李龍文 준장, 작전차장은 朴正熙 대령이었다.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이 허락을 하지 않음으로써 좌절된 한국군과 미군의 이승만 제거 합동작전에 위의 세 사람이 직간접으로 관계하였다는 기사를 쓴 것이 평전으로 발전한 셈이다.
부산 정치파동 9년 뒤 박정희 소장은 장면 정부를 타도하는 군사혁명을 일으킨다. 만약 이용문이 비행기 추락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그가 혁명의 지도자가 되고 박정희가 참모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가상(假想)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육군본부에서 이승만 제거 계획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는 이용문이었지만 직책상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이종찬 총장이다. 이종찬은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펴고 군대를 동원하려 할 때 ‘군은 정치에 이용당하면 안 된다’면서 공개적으로 항명(抗命),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10년 전 구글로 자료를 검색하다가 정치파동 당시 미국 대리 대사였던 알란 라이트너 2세가 1973년 10월 26일 워싱턴에서 한 ‘역사를 위한 육성 증언’ 기록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한국 육군참모총장이 지프차를 타고 내가 살고 있던 관사(官舍)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참모총장들의 의견도 종합하여 말한다고 했다. 국군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후방이 이렇게 혼란해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소수의 군인들과 해병대를 동원하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자택 연금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구속된 40~50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숨어 있는 의원들을 나오게 하여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군대가 정권을 장악할 생각은 없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군대를 즉각 물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또 한국의 육군은 유엔군의 지휘를 받고 있으므로 행동하기 전에 미국 정부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한국 육군총장이 필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못 본 척하겠다는 말을 나로부터 듣는 일이었다. 미국의 (직접) 개입은 필요 없었다. 나는 즉각 워싱턴에 전보를 쳐 이 제안을 수락해줄 것을 권고했다.>

한국군 장교단의 세계사적 공헌

미국 국무부(당시 장관은 딘 에치슨)는 대리 대사의 제안을 검토하고 한국군 참모총장의 제의를 거절하도록 지시, 이승만을 살렸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이 이승만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결정의 한 배경일 터이다.
만약 그때 이종찬 총장의 제의(이용문, 박정희도 관련)를 미국이 받아들여 이승만을 연금하였더라면 자유를 얻은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었을 것이고 (이는 李 대통령의 실각을 의미) 그 뒤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張勉 같은 만만한 親美 인사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휴전을 前後한 이승만의 비상한 외교는 불가능하였고 지금과 같은 韓美동맹은 없었을지 모른다.
부산 정치파동의 막후(幕後)에서 벌어진 이승만 제거 계획의 좌절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이가 바로 박정희 대령이었다. 5·16 군사혁명을 준비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이종찬, 이용문, 박정희가 관련된 이 비사(秘史)는 역사적 사실과 인물평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준다. 군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한 사람이라 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이가 미국과 짜고 전쟁지도자이기도 하였던 대통령을 체포하려 하였으니!
이승만 대통령은 이종찬 총장이 관련된 사실을 알았지만 대역죄(大逆罪)를 저지른 그의 군복을 벗기지 않았다(閑職인 육군대학 총장으로 보냈다).
뒤에 박정희 정부 아래서 국방장관이 되는 정래혁(丁來革)은 당시 이용문의 부하장교였다. 그는 “우리 청년 장교들 사이에선 이건(이승만의 강압적 개헌 시도) 민주주의가 아니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종찬, 이용문, 박정희는 모두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박정희는 일본 육사 2년 유학 뒤 만군 장교로 복귀) 태평양전쟁 때 상대하였던 미군에 대한 반감이 강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삼아 건국하고, 한국전을 통하여 미군과 손을 잡음으로써 日軍 출신들까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신념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군이 박정희의 군사혁명으로 근대화의 지휘탑이 되지만 다른 나라의 군부 통치와는 달리 자유민주적 질서와 시장경제를 말살하지 않고 오히려 이 제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한국군의 태생적인 성격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추운 겨울(The Coldest Winter)》이라는 한국전 관련 책을 쓴 데이비드 핼버스텀은 유명한 反월남전 보도 기자 출신이지만 이 책에선 한국군이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에 끼친 역할을 극찬하였다.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의 영향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것과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한국군의 이런 민주적 성격이 마셜 플랜에 의한 서구 부흥이나 일본의 근대화보다 더 성공적인 한국 근대화의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용문이 핵심적으로 관계한 1952년 부산 정치파동과 장교단의 대응은 국가와 군대, 정치와 군의 관계에 대한 화두(話頭)를 제공한다. 이용문이 작전국장 퇴임식에서 했다는 말, “군대는 정치를 해서도, 이용당해서도 안 되지만 정치를 알아야 한다”는 名言은 요사이도 현실성을 갖는다.

피 땀 눈물의 금자탑

이번 평전(評傳)에는 李龍文 장군의 장남 李健介 변호사의 글이 추가되었다.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아련한 동화(童話) 같다. 박정희가 5·16 전후의 긴장된 시국(時局)에서도 이용문의 유족(遺族)을 성심껏 보살펴 준 이야기, 그리고 이건개가 朴正熙, 육영수(陸英修) 부부와 이어간 인연은 한 편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이건개가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발탁되고, 수사 지휘자로서 1974년엔 문세광의 총탄으로 사망한 육영수, 그 5년 뒤엔 김재규에 의하여 시해(弑害)된 박정희의 죽음을 조사해야 했던 사연은 한국 현대사라는 무대에서 빚어졌던 수많은 드라마 중 하나이다.
공식적으론 이용문의 생애는 韓國戰과 관련지어 기록되고 평가될 것이다. 오바마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무승부가 아니고 승리한 전쟁이며, 냉전(冷戰)에서 자유진영이 이긴 것은 한반도에서 韓美軍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한 덕분이다”고 자랑한다. 한국전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세계사적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나온다. 기습을 받은 국군이 버티고, 미군이 참전하고, 유엔군이 가세하고, 자유진영이 결속한 덕분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 합작한 비열한 침략전쟁은 역효과를 불렀다. 한국이 살고, 대만이 지켜졌으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고, 서독이 재무장하였고, NATO가 군사동맹체로 강화되었다. 미국은 국방비를 세 배로 늘려 본격적인 對蘇 군비경쟁에 들어갔고 그 40년 뒤 소련이 무너진 것이다. 對蘇포위망을 완성시킨 것이 기습남침이었으니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은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것이다.
이용문을 포함한 수백만의 자유민이 한반도에서 흘린 피가 수십억 인류(人類)에 자유와 번영을 선물한 셈이다.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고귀한 희생이었다. 이용문은, 그러한 영웅시대를 만든 영웅 중 한 사람이다.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위대한 승리로 기념해야 한다’는 미국 대통령들의 말이 옳은 이유이기도 하다.
피로 이룬 韓國戰 승리, 땀으로 성공한 산업화, 눈물로 세운 민주화. 그야말로 한국의 현대사는 피, 땀, 눈물의 세계사적 금자탑이다.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가 쓴 ‘가장 위대한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이다. 피, 땀, 눈물엔 그러나 서열이 있을 것이다. 피>땀>눈물의 순서가 아닐까?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韓國戰 승리와 戰後 근대화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뽑아내야 마땅하다. 그런 자부심은 피, 땀, 눈물을 흘린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에 기초해야 옳다. 부족한 점이 많은 이 評傳이 한국전 발발 3주년을 하루 앞둔 날에 순직한 李龍文에 대한 감사의 기록으로 남았으면 한다. 그런 기록 남기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분들-이건개 변호사, 증언자들, 그리고 재출간 작업에 참여하였던 조갑제닷컴의 李知映, 吳淑伊, 曺義煥 씨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