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에 주어진 시대적 과업들(憲政 2013년 4월호)


許 和 平(제14대, 15대 국회의원)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뒤돌아보면 그 이전 선거들을 통하여 볼 수 있었던 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선거였음을 알 수 있다. 對국민 주요공약에서 여당과 야당의 구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각 당이 내건 핵심적 공약은 한결같이 경제민주화, 복지사회, 큰 정부였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행복시대를 열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겠다고 다짐했다.

총선과 대선에서 우파 정당으로 자처(?)하는 새누리당, 중도좌파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통합당, 좌파정당인 통합진보당 간에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며, 남한 정치 사회에서 이념적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거나 각 당 간 사전합의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면 참으로 혼란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으로서는 당연한 입장이었으나 새누리당은 이념 不在와 철학 빈곤을 드러낸 선거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새누리당이 兩大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한때의 時流 편승이 불가피했다면 이제는 본연의 위치로 돌아와야 할 시점이며 그런 다음 새로운 정부가 앞으로 5년 동안 總力을 기울여야 할 시대적 과업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새누리당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논쟁과 시비를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선 직후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논쟁과 시비는 소강상태에 놓여있으나 야당이 전열을 가다듬고 정국이 정상 상태로 돌아오게 되면 여당의 의도와 관계없이 뜨거운 정치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며, 이때 결말을 짓고 혼란을 차단하지 못하면 앞으로 5년 동안 계속해서 박근혜 정부의 멍에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헌법 제119조 2항에 명시된 ‘경제민주화’는 1987년 이래 25년 동안 두꺼운 지각 아래서 정치적 마그마로 응축되어 있다가 2012년 정치 계절을 맞아 대폭발을 일으킨 화산의 용암처럼 분출하여 정치 사회를 뜨겁게 하였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견해와 해석이 개인에 따라 다르고 집단에 따라 다른 가운데 찬성과 반대, 비판과 반박이 멈추지 않았다. 2012년 4월 11일 총선이 끝나고 2012년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면서 새누리당의 정통 경제학도 출신인 이한구 원내 대표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던 김종인 전 장관 간에 벌어진 舌戰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 것이 ‘경제민주화’다. 이한구 의원이 “경제민주화란 경제학 교과서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것”이라고 비판하자 김종인 전 장관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대기업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주장이다”라고 거칠게 반박하였으나, 새누리당은 大選 공약에 ‘경제민주화’를 명시했고 박근혜 후보는 兩者의 주장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논리로 넘어갔다. 그러나 논쟁은 멈추지 않았으며, 민주통합당은 재벌 개혁을, 통합진보당은 재벌 해체를 ‘경제민주화’로 규정했고 이에 찬성하는 대다수 지식인들은 ‘경제민주화’를 ‘경제평등사회화’와 동일시하였으며 각 당은 경제민주화와 관련하여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였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는 이들의 논리적 근거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 경제정책으로 兩極化 사회가 되고 재벌공화국이 되었다. 보편적 복지로 양극화를 해소하고 재벌개혁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하여 국민 모두가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다.”

이것은 심히 왜곡되고 과장된 논리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를 경제사회적 모순의 근본 원인으로 거론하면서 양극화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인, 학자, 언론인 등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反글로벌화, 反신자유주의, 反자유자본주의, 反자유시장경제론자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지난날 교실에서 신자유주의를 가르치고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수용했거나 공식적으로 천명한 바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왜곡된 과장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신자유주의를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국내에 이론을 소개한 학자는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임에도 2008년 미국 월街發 금융위기를 계기로 다수의 정치, 사회분야 학자들이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정치선동에 가까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30년대 대공황을 경험한 이래 지구상에 존재하는 자유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채택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 경제 환경은 1945년 이래 자유자본주의 경제 원칙을 내세워왔으나 실상은 국가 주도 자본주의 경제, 官治 자유시장경제로 일관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경제는 선진국 수준의 정상적 자유시장 경제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재벌 왕국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재벌 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으며 재벌의 영향력이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재벌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벌 왕국의 존재, 재벌 영향력의 심화는 분명코 방치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임에 틀림이 없지만 이들 모순, 경제적 모순 극복을 위한 방책에서 책임의 문제와 모순 극복 우선순위 문제를 정직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재벌을 우선적으로 懲治하는 것이 경제민주화며 사회 정의라고 하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대기업과 재벌로 인한 경제사회적 모순의 근원은 국가 주도 개발 경제, 관치 자유시장경제에 있으며 정경유착과 고비용 정치 구조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인위적이라기보다 태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권력, 관료권력과 관련된 정치적 모순을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난 대선 과정에서 정치적 발전이나 개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한계를 보였다는 것은 우리 정치인들이 그만큼 문제의식과 책임의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재벌 왕국에 민주공화국이 기대고 있는 모습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라면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치권력과 관료권력에 있음을 인정해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적 이슈에서 정치적 이슈가 되고 이념적 이슈로 변질됨으로써 자칫 한국 사회를 계급사회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되고 있다. 집권당은 이것을 한때의 정치적 유행상품쯤으로 다루고 있으나 야당과 좌파들은 항구적인 이념적 상품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이를 逆行하는 ‘경제민주화’가 경제 도약의 처방으로 각광받고 있는 현실을 가장 직설적으로 지적한 인사는 정치인도, 학자도 아닌 평범한 여성 사업가였다. 새누리당 대선 공동위원장의 한 사람이었던 김성주 위원장은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제민주화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에 역행하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주장 중심에는 김종인 전 장관이 있다. 그는 1987년 개헌 당시 개헌특별위원회 경제분과 위원장으로서 이것을 헌법 조항에 포함시킨 장본인이자 2012년도 정치 계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거론한 장본인으로서 그가 주장한 내용들, 글들을 보면 여전히 분명하지 못한 점들이 있을 뿐 아니라 본인의 추가 설명이 없으면 오해 받을 부분이 있으므로 그와의 본격적인 토의와 논의가 필요하다. 토의와 논의의 결과 ‘경제민주화’가 ‘경제평등화’를 의미하여 자유자본주의 헌법 정신과 상치된다면 이 조항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개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치하려면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그가 그의 책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에서 주장한 것처럼 “2013년 체제로 가기 위해”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면 그가 말하는 ‘2013년 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만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그가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란 트로이 목마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혼선을 마무리한 후 새로운 정부가 향후 5년에 걸쳐 노력해야 할 시대적 과업이 무엇인가를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경제융성, 제2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정치발전, 정치 근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시대적 상황이다. 우리는 경제 근대화와 권위주의 정치 체제로부터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전환에는 성공했으나 정치 수준 면에서 볼 때 후진국이므로 정치 근대화는 미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글로벌 경쟁시대, 디지털 시대, 지식산업시대로 특징지어지는 세기적 전환기에 처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一流국가 기반을 다지고 한반도 통일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한반도 기적’을 달성하는 것이 박근혜 정부에 주어진 시대적 과업이며, 이를 위해서 改憲은 불가피하고 장기적인 국가 성장 동력과 국제 경쟁력을 키워가기 위한 획기적인 교육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선진국형 저성장시대 경제정책만으로는 경제발전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치적 발전이 선행되지 않은 한 결코 일류국가 달성은 어렵다. 5년 만에 정치 근대화를 마무리할 수는 없지만 굳건한 토대 구축에 성공하게 되면 박정희 정부 시대에 이루어진 경제 근대화에 이은 정치 근대화로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비로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