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사건진상조사보고서』
서 문
제주4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빚어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사건의 진상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야 합의로 마침내 지난 2000년 1월에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제정‧공포됨으로써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를두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위원회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설치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해 분석하였습니다.
이런 작업의 결과, 위원회는 2003년 3월 29일에『제주4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습니다. 위원회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두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접수된 의견들을 검토, 일부 내용을 반영하여 지난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4특별법’이 제시하고 있는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03. 12.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국 무 총 리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이삼룡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것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 노출이 안된 것은 그래도 조직이 지켜진 것이다. 4 발발 후 나는 정치위원으로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소재한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김시종은 “나는 ‘4’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개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전향, 경찰관 생활을 했던 김생민은 “우리는 북한이 1949년에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에서 양군이 철수를 하면 이젠 국내문제이고, 그러니까 미군이 철수하고 남로당 세력이 강하고 이북에는 팔로군이 들어와 있어서, 국제정세나 국내정세나 모두 유리하다고 보았다. 강경파들은 그래서 무장투쟁을 하며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본 것이고, 온건파들은 ‘우리만 고립된다’고 반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무장투쟁 결행방침은 1948년 3월 15일께 전남 도당 조직지도원(오르그)까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남로당 제주도상위(島常委)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된 유혈사태의 시발이었다.
*4월 3일 무장봉기 때 동원된 무장대 인원수는 350명이었고, 병기로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이날 사건 중에서 신엄지서 관내 마을인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구엄리는 우익인사의 영향력이 큰 마을이었다. 무장대 측 자료에 의하면 이날 구엄리 습격에 모두 120명이란 인원이 동원됐으며, 무장은 소총 4정, 다이너마이트 5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고 한다. 지서 주변에 40명을 배치해 습격하려는 순간, 이웃 애월지서를 공격하는 습격조가 예정시간보다 30분 가량 앞당겨 행동에 옮기는 바람에 사전에 발각되어 지서 측으로부터 응전을 받아 지서 점령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원화(宋元和) 순경이 숙소에서 피습을 받아 칼과 죽창에 열 네 군데나 찔리는 부상을 입고도 지서로 달려가 구사일생했다. 무장대는 이날 우익인사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공격해 우익활동을 하던 문영백(文永伯)의 10대 딸 두 명을 살해했다. 결국 이날 구엄리에서는 우익인사와 그 가족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었고, 교전 과정에서 무장대 2명이 사살됐다.
애월지서에는 지서 마당에 폭발물이 던져졌으나 불발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서 마당에는 전날 내린 비가 고여 있었는데 사제 폭발물이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애월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80명이 동원됐다.
제주읍 외도지서에서는 이북출신의 선우중태(鮮于仲泰) 순경이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외도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14명이 동원됐으며, 총은 99식 소총 1정이었다고 한다.
조천지서는 약 한 달 전인 3월 6일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관 대부분이 교체돼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에 불리한 상태였지만, 4월 3일 새벽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조천지서에 근무했던 정도일은 “어떤 순경이 우연히 밖을 내다보다가 은밀히 지서로 접근하는 무리를 발견해 한 발의 공포탄을 쏘았는데 모두 도망갔는지 그것으로 상황이 끝났다”고 증언했다. 무장대 측 자료는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써 포위전은 완전히 성공했으나 사전 발각으로 퇴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한림지서는 습격을 받자 지서를 지킬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무장대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아 지서 안에서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이북출신 김록만(金祿萬) 순경이 숙소인 여관에서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또 다른 경찰관 2명도 각기 숙소에서 잠을 자다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한편 무장대는 경찰을 지서 안에 묶어 놓은 후 지목했던 우익인사의 집을 찾아다니며 공격했다. 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 감찰위원장 겸 한림면 위원장을 맡았던 현주선(玄周善) 등이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이날 경찰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국민회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원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화북지서도 피해가 심했다. 특히 화북지서는 무장대의 방화로 불길에 휩싸여 전소되었고, 이 때 지서 안에서 숙직을 하던 사환이 불에 타 숨졌다. 또한 민가에 세들어 살던 김장하(金章河) 순경과 그의 아내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결국 화북에서는 경찰관 1명, 경찰관가족 1명, 경찰사환 1명 등 3명이 숨지고, 지서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화북 공격에는 무장대 14명과 99식 소총 1정이 동원됐다.
*제2구경찰서 관할인 남원지서를 습격한 무장대는 10명이었으며, 99식 총 2정과 일본도,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대에게 첫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청단원으로서 지서 경비를 거들던 협조원들이었다. 협조원 방성화는 무장대가 지서 안으로 뛰어들면서 쏜 총알에 복부를 맞아 숨졌고, 또다른 협조원 김석훈은 각목과 칼에 맞았으나 가까스로 도망쳤다. 이어 무장대는 고일수 순경을 붙잡아 칼로 살해했다. 무장대는 마지막으로 지서 무기고를 부숴 미제 카빈총과 공기총, 그리고 탄알 등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 이로써 이날 남원지서에서는 경찰 1명과 협조원 1명이 숨지고, 협조원 2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대정골에 위치했던 대정지서에서도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경찰관 1명이 중상을 당했다. 보성리 향사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대정지서는 경찰관이 3명뿐인 소규모 지서였다. 이날엔 2명의 경찰관이 지서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이무웅(李武雄) 순경이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장대 측 자료에는 이날 7명이 습격에 참여, 2발의 사격으로 경찰관 1명을 즉사시켰다고 기술돼 있다.
*모슬포지서 소재지인 모슬포는 경비대 제9연대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모슬포지서는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무장대는 대동청년단 대정면 책임을 맡고 있던 강필생(姜必生)의 집에 폭발물을 투척하였다. 강필생은 폭발물 파편이 몸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지만 목숨을 구했다. 이후 강필생은 경찰에 투신했다.
*성산포지서에는 14명의 경찰관이 있었으나 이날 밤 근무자는 3명뿐이었다. 40명의 무장대가 99식 총 2정을 갖고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발포하자 모두 도망가버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무장대 측 자료는 2정의 총이 모두 고장이 나는 바람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함덕지서에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에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상 현지 확인을 통해 살펴본 바, 4월 3일 하루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피해상황을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화북=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신엄‧구엄=경찰 부상 1명, 민간인 사망 5명‧부상 10여 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 방화 4채
△남원=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1명‧부상 2명
△한림=경찰 사망 1명‧부상 2명, 민간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외도=경찰 사망 1명
△함덕=경찰 행방불명 2명
△세화=경찰 부상 2명
△대정=경찰 부상 1명, 민간인 부상 1명
그런데 이 통계는 무장대 측 자료와 차이가 있다. 무장대 측의 자료는 4월 3일 공격에서 경찰관 10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함덕지서에서 행방불명된 2명 중 납치해간 1명을 살해했다고 해도 5명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세화‧대정지서 등의 사례에서 보듯 무장대는 지서 밖에서 총격을 가해 경찰관이 쓰러지면 상부에는 ‘즉사’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고 부상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있었다. 또 무장대 측 자료에는 ‘서청 사망 7명’이란 표현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이날 숨진 경찰관들은 마을마다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때 사망한 경찰관들은 방침에 따라 순경은 경위로, 경사는 경감으로 모두 2계급 특진되었다. 이날뿐만 아니라 제주4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희생된 모든 경찰관들은 2계급 특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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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제주4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빚어진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사건의 진상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여야 합의로 마침내 지난 2000년 1월에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제정‧공포됨으로써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한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를두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위원회 산하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설치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관련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해 분석하였습니다.
이런 작업의 결과, 위원회는 2003년 3월 29일에『제주4사건진상조사보고서』를 조건부로 채택했습니다. 위원회는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수정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시한을 두어 객관성과 공정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후 접수된 의견들을 검토, 일부 내용을 반영하여 지난 10월 15일 진상조사보고서를 최종 확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 보고서가 ‘4특별법’이 제시하고 있는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는 소중한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03. 12.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장
국 무 총 리
차 례
서문/3
화보/5
Ⅰ.제주4사건 진상조사 개요
1.진상조사 배경 35
2.진상조사의 근거와 목적 40
3.위원회 구성과 운영 43
가.위원회 구성 43
나.위원회 운영 43
4.진상조사 활동 45
가.문헌자료 조사 46
1) 국내 / 46
2) 국외 / 48
3) 자료집 발간 / 50
나.증언채록 조사 51
다.검증‧분석작업 53
Ⅱ.배경과 기점
1.광복 전후의 제주도 상황 57
가.일본군 철수와 귀환인구 급증 57
1) 제주도의 지리적 특수성 / 57
2) 일본군 항복과 송환 / 63
3) 귀환인구 급증 / 68
나.인민위원회 태동 72
1) 제주 인민위 특성 / 72
2) 인민위 조직과 활동 / 74
차 례
다.미군정과 도제 실시 79
1) 미군정 실시 / 79
2) 제주도제 실시 / 83
라.정치‧사회경제 동향 90
1) 정치 동향 / 90
2) 사회경제 동향 / 98
2.3사건과 무장봉기의 전조 102
가.3사건과 총파업 102
1) 3사건 / 102
2) 3 총파업과 군정당국의 대응 / 114
나.검거선풍과 관민 충돌 123
1) 검거선풍 / 123
2) 관민 충돌 / 129
다.2사건과 고문치사 146
1) 2사건 / 146
2) 고문치사 사건 / 149
라.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준비 152
1) 1 검거사건 / 152
2) 무장봉기 결정과정 / 152
3) 무장봉기 준비 / 157
4)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진위 / 162
Ⅲ.전개과정
1.무장봉기와 5선거(1948.4.3～1948.5.10) 167
가.1948년 4월 3일 상황 167
1) 무장봉기의 슬로건 / 167
차 례
2) 12개 경찰지서 피습 / 169
나.무장대의 조직과 무력 174
1) 무장대 구성원 / 174
2) 무기 현황 / 178
3) 조직과 편성 / 181
다.미군정의 대응 188
1)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설치 / 188
2) 평화협상 추진 / 190
3) 진압정책 채택 / 198
라.제주도 5선거 좌절 205
1) 선관위원‧선거사무소 피습 / 210
2) 2개 선거구 무효화 / 213
2.초기 무력충돌기(1948.5.11～1948.10.10)
가. 미군사령관의 진압 지휘 213
1) 미 20연대장 파견 / 213
2) 박진경 연대장의 진압작전 / 217
3) 응원경찰 증파 / 221
나.연대장 암살사건과 경비대 개편 225
1) 박진경 대령 피살 / 225
2) 11연대 후기 진압작전 / 229
3) 9연대 재편 / 233
다.8지하선거와 무장대 개편 236
1) ‘남조선 대의원’ 선거 / 236
2) 김달삼 월북 / 239
3.주민 집단희생기(1948.10.11～1949.3.1) 241
가.강경진압 방침 채택 241
1) 국내외 정치상황 / 241
2) 미군의 지휘‧통제 / 248
3)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 / 260
차 례
나.계엄령 선포 276
1) 계엄령의 실태 / 276
2) 불법성 논란 / 281
다.중산간마을 초토화 286
1) 초토화의 배경 / 286
2) 언론통제‧해안봉쇄 / 290
3) 중산간마을 방화‧소개 / 293
라.진압부대 교체 302
1) 연대교체의 의미 / 302
2) 전투력 강화 / 305
3) 집단살상 지속 / 308
4.사태 평정기(1949.3.2～1950.6.24) 320
가.진압‧선무 병용작전 320
1)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 / 320
2) 선무공작 / 325
3) 5 재선거 실시 / 331
나.무장대 약화 333
1) 이덕구 사살 / 333
2) 주둔부대 교체 / 334
5.사건 종결기(1950.6.25～1954.9.21) 338
가.한국전쟁과 예비검속 338
1) 한국전쟁과 제주도 상황 / 338
2) 예비검속 / 340
나.잔여무장대 궤멸 341
1) 잔여무장대 활동 / 341
2) 경찰 진압작전 / 344
3) 군 진압작전 / 353
차 례
다.한라산 금족해제 356
1) 금족 해제와 마지막 토벌 / 356
2) 이재민 구호와 마을재건 / 357
Ⅳ.피해상황
1.개황 363
가.인명피해 개황 363
1) 인명피해 수치 / 363
2) 희생자 신고서에 나타난 인명피해 실태 / 367
3) 군‧경‧우익단체의 인명피해 실태 / 373
나.물적피해 개황 376
2.인명피해 378
가.집단 인명희생 378
1) 초토화 시기 살상 / 378
2) 도피자가족 살상 / 391
3) 자수자 살상 / 400
4) 함정토벌 / 403
5) 피난 입산자 살상 / 404
6) 보복 살상 / 413
7) 예비검속자 살상 / 421
8) 무장대의 살상 행위 / 438
나.형무소 재소자 희생 442
1) 일반재판 대상자 / 443
2) 군법회의 대상자 / 448
3) 군법회의 재판의 법적 검토 / 461
4) 한국전쟁 발발과 형무소 재소자 희생 / 468
다.고문 실태 479
1) 고문의 유형 / 481
2) 고문‧구타 후유증 / 495
차 례
라.연좌제 피해 496
1) 연좌제 피해실태 / 496
2) 연좌제 피해사례 / 500
3.물적 피해 509
가.마을 공동체 피해 509
1) 피해실태 / 509
2) 마을복구 및 이재민 정착사업 / 511
3) ‘잃어버린 마을’ 실태 / 517
나. 공공시설 피해 524
다. 산업 피해 526
Ⅴ.진상조사보고서 결론 / 533
｜자 료｜
1. 제주4사건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543
2. 제주4사건 일지/545
3. 제주4특별법 관련법령/563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시행령/조례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시행세칙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의한호적사무처리규칙
4. 찾아보기/591
5. 위원회 및 기획단 명단/614
Ⅰ.제주4사건 진상조사 개요
1.진상조사 배경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하‘제주4특별법’으로 약칭)은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됐다. 제주4특별법은 제주4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법의 제정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은 제주4사건은 실로 사건 발생 50여 년 만에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에 의해 재평가를 받게 됐다.
미군정 하에서 일어난 제주4사건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1960년 4월 19일 이전까지는 남로당에 의해 주도된 공산반란이고, 군경에 의하여 피살된 자는 모두 무장유격대원이거나 그 동조자라는 것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나아가 제주4사건은 구체적인 근거 제시도 없이, 소련이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제주도를 비롯해 한반도 전체를 적화시키기 위해서 공산도배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4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제주4사건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1960년 5월 제주대학생 7명이 ‘4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 진상조사 작업에 나섰다. 이어서 5월 27일에는 남제주군 모슬포에서 유가족 등 주민들이 집회를 열어 ‘특공대 참살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1960년 5월 23일 국회에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사건에 관한 조사단이 구성되자,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이 제주4사건의 진상도 조사하여야 한다고 발의했다. 국회는 이를 받아들여 경남반(반장 최천)의 조사지역을 확대하여 6월 6일 하루 동안 제주4사건의 진상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자 당시 제주신보사는 6월 2일자 사고(社告)를 내고 ‘4사건 및 6당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접수하여, 국회조사단에 제출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1960년 6월 6일 제주도의회 의사당에서 열린 국회조사단의 증언 청취 자리에서 10년 동안 한을 품어온 희생자 유족들은 학살 당시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국회조사단 조일재 의원은 총살을 집행한 군인이나 경찰 등을 증인으로 소환할 것을 요청했고, 박상길 의원은 가해자 처벌에 대한 시효문제가 제기되자,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여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단 3일 동안 제주신보사에 접수된 피해 건수는 총 1,259건, 인명피해는 1,457명에 달했다. 이 신고서를 접수한 제주신보의 신두방 전무는 6월 23일 제주시 외도동에서의 일가족 10명 학살사건의 가해 경찰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1960년 4 혁명으로 비로소 시작된 4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음해 5 군사정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5 발생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4사건 진상규명동지회 회원 이문교‧박경구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진상조사에 앞장섰던 제주신보사 신두방 전무가 구속됐고, 진상규명을 호소했던 모슬포 유족들도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6월 15일 경찰은 전년도에 건립된 ‘백조일손 위령비’를 부숴서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5 이후 20여 년간 군사정권 하에서 4사건에 대한 논의가 다시 금기시 됐다. 반공법‧국가보안법과 연좌제 등의 구도 하에서 4사건에 대한 발설조차 힘들어졌다. 이제 4사건은 역사 속으로 묻혀지는 듯했다.
1978년 소설가 현기영이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그 진상과 상처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작가는 4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4사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8년 사건 발생 40주년을 맞이하여 각종 추모모임과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정치권에서는 국정감사 과정에서 4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자는 4사건 진상규명 운동은 1989년에 이르러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 해 제주지역의 사회단체들은 ‘4월제 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제1회 ‘제주항쟁 추모제’를 제주시민회관에서 개최했다. 이 행사 직후인 5월 10일 ‘제주4연구소’가 발족됐다. 또한 제주신문은 1989년 4월 3일을 맞아 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는 제민일보의 은 말한다｣로 이어져 1998년까지 5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1990년대 들어 유족들과 제주도민들이 본격적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 정치권이나 지방의회‧자치단체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0년 6월 유족들은 ‘제주도4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를 조직했고,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사건 위령제를 봉행했다. 또한 제주도의회는 1993년 ‘4특별위원회’를 설치, 읍‧면별 피해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제주도의회와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가 각각 4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러한 분위기 변화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공인된 단체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할 경우 정부에서는 모든 협조를 하겠다”(1993. 5. 8)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제주출신 변정일 국회의원은 1994년 2월 2일, 여‧야 국회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도4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4 특위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정식 의안으로 발의됐다. 제주도의회는 같은 해 2월 7일, ‘4 피해신고실’을 개설하여 제주4사건으로 인한 피해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5년 5월 제주도의회 4 특별위원회는 �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발간해 14,125명의 희생자 명단을 밝혔다.
이렇게 제주도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1996년 3월 신구범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대해 4사건의 진상 규명을 공식 요청했다. 그 해 11월 12일에는 제주도의회 4특위가 ‘국회 4특위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12월 17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의 찬성 서명으로 ‘제주도 4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이 발의됐으나, 구체적인 처리 절차를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의 역사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4사건을 소재로 창작과 연구활동을 했던 시인(이산하)과 출판사 대표(김영호), 연구소 대표(김명식)가 잇따라 구속됐다. ‘4’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제작자(김동만)와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인권운동가(서준식)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4 계엄령 불법’을 보도한 제민일보 4취재반이 이승만 전대통령 양자에 의해 피소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진상규명 운동은 식지 않고 해를 거듭할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1998년 4사건 발발 50주년을 앞두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1997년 4월 1일 서울에서 강만길‧김중배‧김찬국‧정윤형을 공동대표로 한 ‘제주4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됐다. 같은 해 9월 26일에는 ‘제주4사건 희생자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원회’가 조직됐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제50주년 제주4 학술‧문화사업 추진위원회’가 창립됐다. 이러한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1998년 4사건 50주년을 맞이하여 위령제‧국제심포지엄‧예술제‧종교행사 등이 개최됐다.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4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새정치국민회의는 1998년 3월 30일 당내에 ‘제주도 4사태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특위는 5월 7일 제주에서, 9월 28일 국회에서 각각 ‘4사건 공청회’를 개최했다.
1999년에 접어들자 제주에서는 더욱 구체적인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됐다. 3월 8일 ‘제주4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결성됐다. 또한 1999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제주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근민 도지사의 건의에 따라 위령공원 조성을 위하여 정부의 특별교부세 30억원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은 정부가 4사건 문제 해결에 첫 발을 내딛는 시발이 되었다.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20세기의 사건을 21세기로 넘길 수는 없다’는 슬로건 아래 1999년 12월말 제15대 국회 폐회 전에 특별법 제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제주에서는 10월 28일 24개 유족단체와 시민사회단체가 결집된 ‘4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특별법 제정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과 성금 기탁 등으로 성원했다. 나아가 연대회의는 ‘제주4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국시민사회단체 활동가 184단체 694명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전국적으로 홍보했다.
1999년 10월 11일 한나라당 제주출신 3명의 국회의원이 ‘제주4사건 특별법(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11월 18일 야당인 한나라당은 변정일 외 112인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반면 여당인 국민회의는 당론으로 국회 내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차후에 특별법을 제정한다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특별법 제정 문제에 소극성을 보였다. 국민회의는 11월 17일 ‘제주4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제출했다(11월 26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의결). 그러나 국민회의의 특위 안에 대한 반발이 거세어지자 국민회의는 방침을 선회했다.
결국 국민회의는 11월 24일 임채정 정책위의장이 4특별법 제정을 약속했고, 12월 2일 추미애 의원 외 102인의 발의로 ‘제주4사건 특별법(안)’을 제출했다. 12월 7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여‧야가 각각 제출한 ‘4특별법(안)’을 단일안으로 만들어 국회 본회의에 회부했다. 20세기를 보름 남겨둔 1999년 12월 16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제주4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본격적인 4사건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된 지 만 10여 년만의 결실이었다.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그동안 진상규명 운동에 앞장서 온 유족‧시민단체 대표 8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주4사건 특별법 제정 서명식이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4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제주4사건 진상규명의 역사는 한국 정치 민주화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조금씩 진전돼 온 셈이다.
2.진상조사의 근거와 목적
제주4특별법은 제1조에서부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진상규명을 통해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두 번째 제시된 목적이다. 따라서 특별법은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과거 정권의 4사건 성격 규정에 문제가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특별법 속에 담겨진 진상조사의 필요성은 이 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의 제안이유 등에서 살필 수 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제주4특별법은 변정일 의원 외 112인이 발의한 한나라당의 안과 추미애 의원 외 102인이 발의한 국민회의의 안을 통합해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통일안으로 제출, 통과된 것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출한 특별법안의 제안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와 그 진압과정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고, 그 진압작전에 투입된 일부 군인‧경찰들이 희생되었으며, 부락 전체가 소실되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 모두가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로 취급되는 등 희생자 및 그 유족은 물론 제주도민 전체가 공‧사생활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받아왔으나, 이 사건이 발생한 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이 시도됨에 따라 혼란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인 바, 정부차원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의 희생자 및 그 유족 등 관련자의 명예를 회복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세우고 국민화합과 민주발전에 이바지하려는 것임.
즉, 제주4사건으로 말미암아 수만 명의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고 일부 군인‧경찰이 희생된 사실을 정부 차원에서 밝힘으로써, 유가족과 제주도민 전체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데 법 제정의 취지가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동안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채, 4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을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연좌제 등으로 제주도민의 공‧사생활을 제약해 왔던 불명예를 해소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국민회의 의원들이 제출한 특별법안의 제안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제주4사건이 일어난 지 50여 년이 흘렀으나 지금까지 정부차원에서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나 희생자 등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는 없었다. 따라서 제주4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제주4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국민화합과 인권신장에 이바지하고자 이 법을 제안한다.
즉, 4사건 발발 50여 년이 흐르도록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하여 공식적인 희생자 실태를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제라도 정부가 진상규명에 나서서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국민화합과 인권신장에 이바지하고자 이 법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이 발의안에 대해 행정자치위원회 수석전문위원 박봉국도 “지난날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의 한 부분을 치유하려는 취지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고 이 법안을 심사할 때에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역사의식과 정책의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99년 12월 16일 제208회 국회본회의에 상정된 제주4특별법은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의 제안 설명을 거쳐 표결없이 가결 통과됐다. 추미애 의원의 제안 설명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피해자 규모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동안 이 사건을 덮어두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이 죽어가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양민피해가 있었다면 이제 이를 조사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역사를 승계한 후대의 의무일 것입니다. (중략)
제주도민은 더 이상 기다리기에도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제주도민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각 당이 제주도민에게 이 법의 통과를 굳게 약속한 이상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도록 본 의원이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추미애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억울한 희생에 대해서 조사해 그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역사를 승계한 후대의 의무’라고 강조했다.제주4특별법에 목적(제1조)을 “제주4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한 것도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제정 경위와 특별법 조문 내용 등을 종합하면, 4특별법은 제주4사건이 발발한 지 50여 년이나 경과되었고, 그 원인과 억울한 희생자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전개되어 왔음에도 국가 차원에서의 진상규명이 없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제주4사건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새롭게 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무장유격대와 진압군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희생자의 유족들 역시 연좌제 등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점을 중시하여 제주4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한 뒤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자는 것이다. 요컨대 억울한 희생을 신원(伸寃)하며, 화해를 통하여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함으로써 인권신장 및 민주발전 그리고 국민화합과 민족의 단결에 기여하기 위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3.위원회 구성과 운영
가.위원회 구성
제주4특별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는 ‘제주4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다. 위원회는 특별법시행령 제3조에 의해 위원장인 국무총리를 포함하여 법무부장관‧국방부장관‧행정자치부장관‧보건복지부장관‧기획예산처장관‧법제처장과 제주도지사, 그리고 국무총리가 위촉하는 유족 대표, 관련 전문가,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인사 등 20명 이내로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위원회는 2000년 8월 28일 출범했다. 위원회의 위원은 국무총리를 포함한 정부 각료 등 당연직 8명과 유족 대표, 학자, 변호사, 군 장성출신, 시민단체 대표 등 위촉직 민간인 12명 등 모두 20명으로 구성됐다. 위원장은 초대 이한동 국무총리, 2대 김석수 국무총리, 3대 고건 국무총리가 각각 맡았다. 위원회는 진상조사를 위한 관련자료 수집 및 분석과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권한을 가졌다.
한편 특별법 제7조는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의 객관성과 효율성을 위해서 ‘제주4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을 별도로 설치 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기획단은 특별법시행령 제12조에 의해 위원회 소속 장관이 지정한 국장급 공무원과 제주도 부지사, 유족 대표와 관련 전문가 등 15명 이내로 구성하도록 했다.
기획단은 2001년 1월 17일 발족했다. 기획단 위원은 각 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제주도 부지사 등 당연직 5명과 유족 대표, 학자, 변호사, 시민단체 대표 등 위촉직 10명 등 모두 15명으로 구성됐다. 기획단 단장은 박원순 변호사가 맡았다. 기획단 산하에 상근 진상조사팀으로 전문위원 5명과 조사요원 15명 등 20명이 편성됐다. 진상조사팀 팀장은 양조훈 수석전문위원이 맡았다.
나.위원회 운영
제주4특별법은 제주4사건에 대한 정의(제2조)를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4사건의 진상규명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때까지 7년 7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실태를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도록 그 범위가 정해져 있다.
위원회는 이 같은 입법 취지에 따라 발발배경, 전개과정, 피해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조사하되 특히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다는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조사에 착수했다. 아울러 제주4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객관성과 공정성 확보에 주력하기로 했다.
진상조사는 2년 동안 4사건 관련자료를 수집, 분석하고 6개월 이내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는 규정에 따라, 2000년 9월 조사에 착수, 2003년 2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진행됐다. 진상조사의 과정은 ①자료 목록 및 증언채록 예정자 명단 정리, 자료조사 기관 및 단체 선정→②자료 수집 및 증언채록→③분석작업→④보고서 작성‧심의의 수순을 밟았다. 그러나 이런 일정은 직렬적이기보다는 병렬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완 병행함으로써 새로운 연구성과나 중요한 체험자의 증언 등이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위원회는 진상조사 기본방향과 진행상황을 점검 협의하고 2003년 3월 29일 제7차 전체회의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심의 의결했다. 다만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수정 보완하기로 했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9월말까지 20개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을 접수했고, 이 수정의견을 심의하기 위해 검토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용하였다. 그 결과 33건의 수정안이 마련되었고, 2003년 10월 15일 제8차 전체회의에서 이 수정안을 의결함으로써 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었다.
실질적으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업무를 맡은 기획단은 모두 12차례 회의를 개최, 진상조사 기본계획에서 보고서 내용 검토에 이르기까지 심도있는 심의를 했다. 상근 진상조사팀은 국내외 기관을 상대로 자료를 조사 입수하는 한편 제주도와 서울, 일본, 미국 등지에서 사건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채록 조사를 실시했다.
4.진상조사 활동
제주4특별법에는 진상조사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한 몇 가지 규정이 있다. 그 첫째는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에는 관계 행정기관 또는 단체에 대하여 관계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요구를 받은 관계기관 또는 단체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제6조 ②항)는 것이고, 둘째는 “관계기관 또는 단체는 제주4사건 관련자료의 발굴 및 열람을 위하여 필요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제6조 ③항)는 것이며, 세 번째는 “정부는 제출요구를 받은 자료를 외국에서 보관하고 있는 경우에는 해당 국가의 정부와 성실히 교섭해야 한다”(제6조 ④항)는 것이다.
또한 증언채록의 활성화를 위해 “누구든지 제주4사건과 관련하여 자유롭게 증언할 수 있다”(제5조 ①항), “제주4사건 희생자와 그 유족이라는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이나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제5조 ②항)는 규정도 있다.
이런 특별법의 규정들은 실제로 진상조사 작업에 도움을 줬다. 국내 어떤 기관도 ‘4’ 관련자료 제출 요청이나 열람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미국과 러시아, 일본 등 외국주재 한국대사관에서도 진상조사팀의 자료조사 작업에 협조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일부 기관에 소장했던 ‘4’자료들이 오래 전에 실종됐거나 폐기된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위원회는 도표에서 보듯 국내외 28개 기관과 국가를 대상으로 자료조사를 실시, 관련자료 총 10,594건을 입수했다.
□ 자료수집 기관 및 국가
구 분
기관 및 국가
국내 (19)
국회,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정부기록보존소
국사편찬위원회, 육군본부, 해군본부, 해병대사령부
기무사령부, 정보사령부, 군사편찬연구소
경찰청, 제주경찰청,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제주도의회, 중앙도서관, 언론기관
국외 (9)
미국, 러시아, 일본
유사 해외사례(대만, 남아공,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
□ 수집자료 분포상황
구 분
건 수
구 분
건 수
연감/군경/법령
267
일반재판 판결문
1,562
정부기관 발간물
245
국회양민학살보고서
1,878
연구저서/단행본
254
미국자료
1,870
수록논문/학위논문
370
러시아자료
19
기사/논설/기고문
2,912
일본자료
92
회고록/전기
55
북한자료
101
영상물/사진첩
188
외국번역물/기타
65
문학작품
13
증언채록자료
571
관보
132
계
10,594
가.문헌자료 조사
1)국내
문헌자료 조사는 먼저 ‘4’ 관련자료 목록 작성에서부터 출발했다. 지금까지 발표됐거나 비록 발표되진 않았지만 검색하면 관련내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료 리스트를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1,500여 종의 목록이 작성됐다.
두 번째의 작업은 진상조사 대상 기관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여러 차례 논의 끝에 국내의 경우 19개 기관이 선정됐다. 이 과정에서 제주4사건의 진압 당사자였던 군‧경의 작전기록과 국무회의록, 재판기록 등 정부 측 자료 확보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당시의 신문‧잡지기록, 국회속기록, 미군정청 법령과 행정명령, 인사명령과 개인 회고록, 무장유격대 기록 발굴에도 역점을 두었다.
각 기관에 먼저 ‘4’ 관련자료 소장여부와 관련자료의 제출을 요청했다. 그리고 진상조사팀을 직접 파견, 자료실을 열람하거나 중요한 기관에 대해서는 몇 개월씩 상주하면서 자료를 검색했다. 그 대표적인 기관이 대전 소재 정부기록보존소와 서울 소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과천 소재 국사편찬위원회 등이었다.
정부기록보존소에는 2001년 4월부터 2개월 동안 조사팀 4명을 투입, 집중적인 자료 검색작업을 벌였다. 이 조사결과 1949～1950년 국무회의록, 이승만 대통령 유시철 및 재가문서, 예규철 등 정부 문서를 발췌 입수했다. 또한 일반재판 판결문과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형무소 수감 중 사망 사실이 적힌 수용자 신분장 등 상당수의 행형자료들을 찾아서 복사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대해서는 그 이후 세차례 추가 조사가 진행됐으며 모두 2,500여 건의 자료를 확보했다.
이에 앞서 2001년 2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조사팀 5명이 파견되어 군사편찬연구소가 소장한 자료에 대한 검색작업이 있었다. 이 조사는 군 관계 자료 이외에도 이 연구소가 갖고 있던 미군정 시기와 한국전쟁 전후의 미국자료를 검색하는 데 비중을 두고 실시됐다. 미국 현지조사에 앞서 국내에 들어온 미국자료를 모두 검색한다는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이 연구소를 통해 405건의 관련자료를 입수했다.
2001년 8월에는 조사팀 3명이 2개월 동안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대한 검색작업을 벌였다. 현대사 관련 국내자료뿐만 아니라 ｢미군정기 군정단‧군정중대｣ 등 미국자료도 입수했다. 특히 독립신보‧동광신문‧한성일보‧현대일보 등 폐간된 신문 검색을 통해서 귀중한 ‘4’관련 기사들을 발췌할 수 있었다. 이 위원회를 통해 입수한 자료는 1,500여 건에 이르렀다.
군 관계기관은 군사편찬연구소 이외에도 국방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해병대사령부, 기무사령부, 정보사령부 등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자료조사가 실시됐다. 이들 기관을 통해 제주주둔 주요 지휘관 인적 사항과 경비대의 인사명령,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 육군 역사일지 등을 입수할 수 있었다. 또한 제주작전 전사자 101명의 명단도 입수했다. 그러나 인명희생이 가장 극심했던 1948년 말과 1949년 초의 전투일지나 상황일지 등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울러 지역별 부대 주둔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 등이 거의 없어서 구체적인 작전상황이나 지휘관 및 주둔부대를 문서로써 입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경찰에 대한 자료조사는 경찰청과 제주지방경찰청, 제주경찰서, 서귀포경찰서 등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경찰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는 제주작전 전사자 122명의 명단과 ‘4’당시 경찰지휘관 명단이 전부였다. 진상조사팀은 경찰청 4개 문서고를 비롯, 제주지방경찰청 자료실 등을 열람했지만 ‘4’에 관계된 직접적인 자료를 찾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갖고 있던 ‘4’관련문서들이 4 등 정치적 변동기에 일부 없어졌고, 최종적으로는 1981년 3월 24일 내무부의 ‘연좌제 폐지지침’에 의해 전부 폐기됐다고 주장했다. 진상조사팀은 경찰 부서장들로부터 ‘4’관련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확인서를 받았다.
국회에서는 1960년 4 혁명 직후 조사됐던 ｢양민학살사건 보고서｣와 미군정기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 속기록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국회 속기록 등을 입수했고, 통일부에서는 북한 신문‧잡지에서 4사건을 언급한 기사를 발췌했다. 이밖에 중앙도서관 등에서는 ‘4’관련 논문과 저술들을 수집했고, 방송과 신문사를 대상으로 특집 프로나 기사를 입수했다. 또 제주도의회 자체에서 1993년부터 신고받아 정리한 ｢제주도4 피해신고서｣(14,125명)를 제출받아 분석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 국내외 자료수집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충돌 당사자였던 군‧경과 무장유격대의 관련자료들이 상대적으로 미흡했다. 특히 경찰 자료 등의 자체 폐기는 4사건의 구체적인 진상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주었다.
2)국외
국외 자료조사는 미국, 러시아, 일본 등 3개국을 대상으로 진상조사팀의 현지출장 조사방법을 택했다. 이때 현지 전문가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국외 조사에서 가장 비중을 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자료 조사는 제주4사건이 미군정 시기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 문서보관기관에 ‘4’관련자료가 많을 것이란 예상 때문에 심도있게 추진됐다. 먼저 국내에 들어와 있는 미국자료 검색을 통해 ‘4’ 관련자료를 발췌하였고, 그 다음에 조사팀을 미국에 파견했다.
미국자료 조사팀은 제주도와 공동으로 전문위원 3명(장준갑‧김창후‧양정심)으로 구성되었다. 1차 조사는 2001년 3월 29일부터 4월 27일까지, 2차 조사는 그 해 6월 23일부터 12월 1일까지 총 6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조사팀이 주로 자료를 검색한 미국 문서기관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이하 NARA로 약칭)이었고, 맥아더기념관(MacArthur Memorial)과 미육군군사연구소(U.S. Army Military History Institute)를 추가로 조사했다.
NARA는 ‘4’조사팀이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테이블을 제공하는 등 자료 발굴작업에 협조적이었다. 조사팀은 이 조사를 통해 ‘4’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미국자료 800건을 발췌 입수했다. 복사한 분량만도 1만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었다.
수집자료 중에는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작전일지, 미 CIC 자료, 무쵸 대사 보고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 공한철, 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군단 작전참모부 슈 중령의 제주활동 보고서 등 새로운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지 등 미국 주요 신문들이 제주4사건을 다룬 기사들도 입수됐다.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열린 미군정 수뇌회의 참석 차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영접 나온 유해진 제주도지사, 김익렬 9연대장 등이 한 컷에 담겨진, 귀중한 스냅 사진도 NARA에서 찾아냈다.
미국자료 조사팀은 자료 검색과정에서 ｢제주도에 관한 보고 제1편(Cheju Do Island, Parts Ⅰ& Ⅱ)｣등 ‘4’ 직‧간접자료 28건이 아직도 비밀문서로 묶여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2001년 11월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미 육군부 정보보안사령부에 비밀해제를 요청했다. 이에 정보보안사령부는 해당문서가 NARA에 이관됐다고 통보해 왔다. 그러나 NARA 측은 내용이 없는 해당문서 목록만 이관 받았을 뿐이라고 답변, 재차 정보보안사령부에 문서 소장여부와 비밀해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미 정보보안사령부는 2002년 7월 4일 해당 문서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최종 통보를 해왔다. 이 문서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었다.
러시아자료 조사는 2001년 9월 3일부터 10일까지 조사팀 3명(김한욱‧박찬식‧전현수)에 의해 모스크바 소재 문서보관기관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이 조사팀은 러시아연방 기록관리청‧대외정책문서보관소‧현대문서보관센터‧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국립문서보관소 등 6개 기관을 방문, 자료 검색을 했다. 이 결과 �년 4월 남조선정보보고｣ ｢남조선 선거 관련 정보보고｣등 19건의 관련자료를 입수했다.
일본자료 조사는 2000년 12월, 2001년 12월, 2002년 7월 등 모두 세차례에 걸쳐 2명의 조사팀(양조훈‧김종민)에 의해 실시됐다. 이 조사에서 4사건을 다룬 일본어자료 92건을 입수했다. 일본조사는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한 증언채록 조사도 함께 추진됐다. 이와는 별도로 ‘4’ 수장 희생자의 쓰시마섬(對馬島) 표류 인양 가능성에 대한 현지조사도 있었다.
국외자료의 효율적인 발굴을 위해 현지 전문가를 ‘해외 전문위원’으로 위촉하는 공동 조사활동도 전개했다. 미국 현지전문가로는 후지야 가와시마 교수(보울링그린 주립대)와 박명림 박사(하버드대 연구원), 일본 현지전문가로는 문경수 교수(리츠메이칸대), 러시아 현지전문가로는 바르타노프 부소장(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이 참여했다.
한편 해외 과거청산 역사 규명에 대한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외국 진상조사보고서 입수작업을 벌였다. 대만 2사건 연구보고서, 아르헨티나 국가실종자위원회 조사보고서, 남아공 진실과 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스페인 보고서 등을 수집했다.
3)자료집 발간
국내외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분야별로 정리하는 작업이 추진됐다. 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피해상황 등의 진상규명은 물론, ‘4’의 실상을 파악하는 기초자료로써 활용하기 위해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 자료집 주요내용
권호
구 분
주 요 내 용
건수
쪽수
형태
1권
신문편①
국내신문(1945.8～1948.3)
415건
448
책자
2권
신문편②
국내신문(1948.4～1949.3)
464건
540
″
3권
신문편③
국내신문(1949.4～1961.11)
519건
640
″
4권
정부문서․국회
속기록․잡지편
국무회의록/대통령재가문서
국회속기록/국내잡지
134건
551
″
5권
군경자료편①
작전명령/인사명령
육군역사일지/경찰정보보고서
200건
507
″
6권
관보편
미군정청법령/미군정청
임명사령/대한민국 관보
132건
572
″
7권
미국자료편①
주한미육군사령부
387건
502
″
권호
구 분
주 요 내 용
건수
쪽수
형태
8권
미국자료편②
美6사단/7사단/군사고문단
971방첩대/주한미군사
유엔한국임시위원단
243건
469
책자
9권
미국자료편③
주한미육군군정청
주한미육군고문관실
137건
516
″
10권
미국자료편④
미극동군사령부/합동주간정보분석
미국정부/대한민국정부
153건
422
″
11권
미국자료편⑤
주한미사절단․주한미대사관
민간인문서/미국신문
136건
405
″
12권
북한․러시아․
무장대자료편
북한신문․기관지․잡지
러시아/무장대자료
99건
275
복사본
이런 목적 아래 자료집 발간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생생한 1차 자료를 중심으로 모두 12권의 제주4사건 자료집이 발간됐다. 자료집을 발간할 때 신뢰성과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영인본을 함께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나.증언채록 조사
최근 구술사(Oral History)는 역사연구에서 그 중요성이 점차 부각되고 있다. 특히 제주4사건처럼 특이한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의 하나가 바로 관련자들의 증언(구술)채록이다.
여기서 4사건을 ‘특이한 사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한국전쟁 다음 가는 인명피해를 유발한 사건임에도 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할 공문서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반세기 동안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조사 작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 기간 억제돼 왔다는 점이다. 셋째는 사건의 성격에 대해 아직도 보는 시각에 따라 첨예한 대립 구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살필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동시대 체험자들의 구술이 필요했다.
증언조사는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하는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사건의 현장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우선 선정하되 균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제주도의회 피해 신고자료와 신문, 방송의 자료, 증언집 등 기존 자료에 언급된 증언자들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이어 증언대상자에 대한 기관 추천을 받았다. 그리고 진압작전 지휘관과 무장대 출신자 등에 대한 자체 발굴작업도 진행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증언채록 대상자 모집단으로 2,870명의 명단을 작성했다. 이 명단을 중심으로 다시 500여 명을 추려내는 작업을 했다. 기준은 첫째, 평범한 사람보다는 특이한 출신성향의 경험자, 둘째 특정사건이 일어났거나, 피해가 심한 마을 출신자, 셋째 기관 추천 및 자체발굴 대상자들을 우선 선정하는 것으로 세워졌다. 그리고 증언대상자의 나이 등 증언의 신뢰성과 능력을 고려했다. 증언대상자들 가운데 조사기간 중 사망했거나 본인의 고사로, 또 새로운 중요한 증언대상자의 발굴 등의 이유로 일부 교체 보완됐다.
증언채록 조사는 2001년 7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503명을 대상으로 추진됐다. 모든 증언은 녹음기로 녹취하고 캠코더로 녹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 증언자의 출신성향별 통계
계
농어업
군인
경찰
학생
주부
피난입산
우익단체
503
90
45
48
55
39
52
66
좌익단체
공무원
회사원
교원
미국인
재일동포
기타
20
9
10
13
3
35
18
조사는 제주, 서울, 그리고 일본, 미국에서도 진행됐다. 특히 제주에는 조사요원 3명이 상주하면서 증언채록 활동을 벌였다.
일본 증언조사는 도쿄와 오사카 지역 재일동포 35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4’무장투쟁을 결정한 1948년 2월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했다는 한 재일동포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또한 미국 조사에서 4사건 기간에 제주에 근무했던 피쉬그룬드(Harold Fischgrund연대 고문관) 웨솔로스키(Charles L. Wesolowsky연대 고문관), 에드워드(Joseph Edward연대 대대 고문관) 등 미군 장교 출신 3명을 만나 미군의 입장을 청취한 것도 의미있는 조사였다.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가운데는 증언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 차례 요청에도 응하지 않아 12명에게 위원회 명의의 협조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 2명이 나중에 증언채록 조사에 응했다
조사팀은 사전에 증언대상자들의 기존 증언내용을 심층 분석하는 한편, 그 해당 증언자의 주변 사건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를 준비, 기초적인 설문을 마련했다. 증언조사는 개인적인 체험담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한 뒤, 준비된 설문에 따라 질의 응답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 증언조사 결과는 모두 7권의 증언자료집(총 2,958쪽)으로 정리되었다.
이 증언조사는 50년 전의 사건을 증언자들의 입을 통해 생생히 드러냈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기억의 한계성과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기억의 선택성으로 혼선을 빚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증언내용 가운데는 사건 발생 시점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례가 많았다. 따라서 어떠한 증언이든 철저한 검증과 분석이 필요했다.
증언자료를 진상조사보고서에 인용할 때에는 이 점에 유의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증언이 사실(facts)에 부합한가를 판단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단순히 한 증언자의 이야기로만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증언자의 증언내용과 각종 문헌자료의 내용에 대한 비교 검토,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해석 등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했다. 즉 교차검토(Cross Check) 검증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해당 증언자의 신뢰도에 대한 검증도 함께 실시했다.
다.검증․분석작업
증언이든 문헌자료든 그것이 진실일 때 사료의 가치가 있다. 따라서 각종 자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4사건을 다룬 기존의 기록 가운데는 실제의 사실과 다르게 기술한 자료들이 많다. ‘4’ 논의가 한때 금기시 된 탓인지, 이런 왜곡된 기록들을 반복 인용하는 사례도 많이 발견됐다.
진상조사팀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그래서 어떤 자료나 증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앞에서 밝힌 교차검토 검증작업이었다.
이때에 문헌자료와 증언은 상호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왜곡됐거나 오류를 범한 내용일지라도 한 번 활자화된 자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설로 굳어지기 쉽다. 다른 자료로 반증할 수 없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게 바로 증언조사였다.
그러나 증언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줄 많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탓에 수치나 날짜 등이 불분명하고 혼돈을 일으킬 가능성 또한 있다. 이를 해소하면서 실마리를 찾게 해주는 게 바로 문헌자료이다. 따라서 자료와 자료, 문헌자료와 증언 사이를 교차하면서 검증에 검증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다량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data base)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했다. 입수된 각종 자료와 증언 내용들을 주제별로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사건의 날짜, 지역, 주제, 인명, 단체 등 여러 형태로 검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데이터 베이스 검색은 단지 하나의 필드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필드를 이용해 보다 광범위한 내용(합집합)이나 보다 구체적인 내용(교집합)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문헌자료와 증언의 신뢰도에 대한 검증을 했고, 진실에 더욱 가까운 자료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진상조사와 분석과정에서 다음 16가지의 핵심요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데 역점을 두었음을 밝힌다.
① 50여 년의 진상규명 역사
② 4사건의 정의
③ 4사건의 배경과 발발원인
④ 남로당의 개입범위와 역할
⑤ 무장대의 조직과 활동
⑥ 서청의 개입범위와 역할
⑦ 사망자 숫자
⑧ 가해자 통계구분
⑨ 무장대에 의한 피해
⑩ 토벌대에 의한 피해
⑪ 집단피해 마을 및 물적 피해
⑫ 군법회의의 적법여부
⑬ 계엄령의 집행문제
⑭ 집단살상 지휘체계
⑮ 미군의 개입과 역할
⑯ 연좌제 피해
Ⅱ.배경과 기점
1.광복 전후의 제주도 상황
가.일본군 철수와 귀환인구 급증
1)제주도의 지리적 특수성
①동북아 요충지
제주도는 한반도 남서 해상에 위치한, 한국에서는 가장 큰 섬(면적 1,825평방㎞)으로 북쪽 목포와는 142㎞, 북동쪽 부산과는 286㎞가량 떨어져 있다. 동으로는 일본 규슈(九州)와 쓰시마섬(對馬島), 서로는 중국 본토 상하이(上海), 남으로는 동지나해를 사이에 두고 오키나와(沖繩)와 타이완(臺灣)과 대하고 있다.
제주도는 한국, 중국, 일본 등 극동지역의 중앙부에 자리잡은 관계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 받아왔다. 13세기에는 몽골 족이 세운 원(元)이 제주도를 점령, 100년 가까이 지배하면서 일본과 남송(南宋) 정벌 전초기지로 삼았다. 원은 비록 실패했지만,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제주도를 발판 삼아 일본 침공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 전쟁 때 제주 섬 서쪽지역인 모슬포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 중국 대륙을 향한 도양 폭격기지로 삼더니,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對美)결전의 최후 보루로 제주를 선택,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8 광복 직후에도 제주도의 지리적 중요성이 부각된 몇 가지 사례들이 있다. 1946년 10월 21일 AP통신은 뉴욕 발 기사로 “조선 제주도가 장차 서부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지브롤터(Gibraltar‧지중해의 전략요충지)’화 할 가능성이 있다”고 타전, 국내 언론으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47년 3월 28일 이승만(李承晩)은 방한중인 미 육군성 차관 드래퍼(Draper)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자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하면서 “한국정부가 수립되면 한국인들은 매우 기꺼이 미국이 제주도에 영구적인 기지를 설치하도록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한 1949년 5월 제주를 방문한 유엔한국위원단의 보고서에도 “대한해협 남쪽 그리고 일본의 남부와 중국의 북부 해안에 위치한 제주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하다”고 기술하고 있는가 하면, 1949년 8월 진해에서 열린 이승만-장제스(蔣介石) 회담에서 중국 측은 중국 본토를 공격할 3개의 전투폭격기 비행단이 주둔할 공군기지를 제주도에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고 주한 미국대사 무쵸(Muccio)가 본국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바 있다.
이러한 제주도의 지리적 중요성은 1945년 8 종전 직전의 상황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격전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제주도는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게는 본토사수를 위한 ‘최후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국군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으로 부각되었다.
②일본군 방어진지
일본군 사령부가 제주도의 방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44년 10월 필리핀이 미군에 의해 함락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방비책임은 해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병력수도 수 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초부터 전황은 일본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제주도 방비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일본 방위총사령관은 1945년 2월 9일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해 7개 방면의 육‧해군 결전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작전 암호명은 ‘결호(決號)작전’. ‘결7호 작전’은 조선 반도, 특히 제주도 방면의 방비책을 골자로 하고 있다.
1945년 3월 12일 일본 대본영(大本營) 각군 작전참모회의에서 ‘결7호 작전’ 시행을 한반도 방어책임을 맡고 있던 제17방면군 사령관에게 하달했다. 이에 따라 작성된 ‘결7호 작전 준비요강’에는 “적(미군)은 규슈(九州)북부 방면 상륙, 또는 조선해협 돌파를 위한 기지를 설치하기 위한 제주도의 공략이 예상된다”면서 “제주도에는 당초부터 유력한 병력을 배치하여 독력(獨力)으로 이 섬을 사수해야 한다”는 방침을 적고 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1945년 4월 제주도의 모든 군을 통솔하는 제58군사령부가 편성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나가즈(永津佐比重) 중장이며, 종전 당시의 사령관은 도야마 노보루(遠山登) 중장이었다. 그 휘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등 3개 사단과 1개 여단(독립혼성 제108여단) 및 야포병 연대, 공병 연대, 치중병(輜重兵) 연대 등이 배속되었다.
제96사단은 1945년 4월 서울에서 제주도 북부지역으로 이동해왔으며, 제111사단은 만주 관동군으로 활동하다 그 해 5월에 제주도 서부해안에, 역시 관동군 예하부대였던 제121사단은 제주도 서부지역에 각각 배치되었다. 독립혼성 제108여단은 일본 본토에서 그 해 5월 제주로 와 동부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오키나와 함락(1945년 6월 25일) 직후인 7월 13일 일본군 참모총장은 제주도 작전에 관한 특별지시를 제17방면군 사령관에게 시달했다. 그것은 ①제주도에서의 작전 목적은 적의 공해(空海)기지 설정의 기도를 파쇄함에 있다. 이를 위해서 작전 초동에서 공세를 취할 것 ②제17방면군 사령관은 1개 사단 병력을 남선(南鮮)에 준비하고, 제주도에 대한 적의 침공 공산이 다대해지면 적시(適時) 이를 제주도에 투입, 제58군의 전력을 증강할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지시에 따라 8월 중순에 제주도에 제120사단을 증파할 계획이었으나, 종전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945년 8 당시 제주도 58군사령부 휘하의 일본군 병력은 6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 때 일본군의 방침은 미군이 제주 섬에 상륙했을 때 최후까지 싸운다는 이른바 ‘옥쇄(玉碎)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제주 섬에서 한라산(해발 1,950m)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계획했던 사실은 ｢조선에서의 전쟁준비｣에 기록된 1945년 8월의 ‘제주도 병력 기초배치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병력 배치도를 보면 일본군의 주력진지가 1차 저지선인 해안선에서 훨씬 후퇴한 중산간지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북부, 서부지역에는 96사단과 111사단을, 동부와 남부지역에는 121사단과 108여단을 배치하는 한편, 특히 동부 고원지대 상당 지역을 포기, 유격전 진지로 삼은 것이 특이하다.
□ 제주도 일본군 병력 기초배치도
일본군은 그 해 5월부터 제주도 주민 22만 명 가운데 어린이와 부녀자, 노약자 등 약 5만 명을 조선 본토로 이주하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잦은 미군기의 공습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군은 미군이 섬에 상륙하게 되면 섬 주민들을 한라산으로 끌고 가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미군과 싸우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것은 20여 만 명의 제주도민들을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섬 전체가 요새화되면서 제주도 주민들이 당한 고초는 조선 전체에서 가장 심하였다. 일본군은 제주‧고산‧모슬포‧서귀포‧성산포 등 해안가 곳곳에 굴을 파, 특공대원들이 어뢰정을 타고 그대로 미군 함정에 돌진하는 특공기지를 설치했다. 기존의 모슬포비행장 이외에도 제주읍내의 동쪽 10㎞ 지점의 ‘진드르’와 서쪽 2㎞ 지점의 ‘정뜨르’에 동‧서 비행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제주도 중산간지대도 일본군의 요새로 변해 갔다. 어승생악‧관음사‧녹산장 부근 등지에 거대한 기지가 구축되었다. 전도에 걸쳐 산봉우리마다 토치카가 만들어지고 땅 속으로는 갱도가 뚫렸다. 일본군의 복곽(複郭)진지로 최후 저항본부로 삼았던 어승생악(御乘生岳‧해발 1,169m)에는 산을 깎아내어 미로와 같은 수많은 인공 굴이 만들어졌다.
이런 엄청난 작업들은 제주도민들의 몫이었다. 전쟁 말기 젊은 사람들은 이미 강제징용이나 징병을 당하여 사할린이나 홋카이도 탄광, 남양군도로 보내졌다. 따라서 청년 일꾼이 절대 부족했다. 일제가 일반적으로 ‘국민직업능력 신고령’에 의해 강제동원한 노무자의 나이는 만 16～50세 사이이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이런 기준도 소용없었다. 일손을 구하기가 어려우면 예순 살, 심지어 일흔 살의 노인까지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다.
제주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전쟁물자의 강제공출이었다. 그런데 전쟁물자를 징발하는 일에 조선인 관리들이 앞장서서 더욱 주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8 직후 제주 도민사회에서 그 어느 지역보다 ‘친일파 청산’ 분위기가 확산된 것도 바로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전이 되자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도와 징병‧징용‧강제노역‧공출 등에 앞장서서 협력했던 사람들이 ‘친일파’로 몰려 마을청년들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일제 말기에 공직에 몸담았던 한림‧대정‧서귀‧중문‧조천 면장 등이 이런 문제로 봉변을 당했다. 1945년 9월 26일 조천면 한 마을에서는 30대 남자가 친일 경력이 문제가 되어 마을청년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한편 제주 섬이 일본군의 요새가 되면서 미군 공군기와 잠수함의 공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5월 7일에는 소개민을 싣고 제주항을 출항한 목포행 정기여객선 고와마루(晃和丸)가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 민간인 수백 명이 수장 당하는 대형 해상참사 사건이 발생했다. 또 7월에 미군기가 한림항 군기고를 공격하는 바람에 그 속에 쌓여있던 폭탄이 폭발, 인근의 민간인들이 큰 희생을 치렀는데, 이 공습으로 “민가 파손 400호, 사망자 30여 명, 부상자 200여 명을 냈다”는 기록도 있다.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미군 B29기에 의해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소련은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8일 이 전쟁 막바지에 참전했다. 다시 며칠 뒤인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같이 종전이 앞당겨질 줄은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일본군 측의 자료들을 보면 일본은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시점을 10월 말에서 11월 초로 보고 있었다. 일본인이 쓴 한국전 비사에는 “오키나와의 미 제6군은 11월 1일로 예정되었던 남부 규슈에 대한 상륙작전을 한창 준비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작전 일정대로 전쟁이 계속되었다면 제주도에 대한 미군의 공습은 1945년 9～10월경 집중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였었다. 일본군 측에서 예상했던 미군의 상륙 예상병력은 2～5개 사단이었다. 그것은 제주도가 ‘제2의 오키나와 섬’으로 변할 수 있는 기로에 섰음을 의미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미‧일 격전 속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20만 명이 죽어 갔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주도민들에게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그리고 이때 구축됐던 한라산의 산악진지와 일본군의 무기 등이 그로부터 3년 뒤에 무장유격대에 의해 일부 사용됐다는 점에서 4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2)일본군 항복과 송환
① 일본군 항복과 무장해제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1945년 9월 2일 항복 조인식이 일본 도쿄(東京)항에 정박한 미 군함 미조리(Missouri)함 함상에서 거행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미국, 중국, 소련, 영국 등 9개국 연합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정부 대표와 군 대표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는 사정이 달랐다. 2차대전 승전국인 미국 이외에도 소련이 뒤늦게 참전, 전후의 한반도 문제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에 소련의 참전이 거론된 것은 1945년 2월의 얄타(Yalta) 회담에서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전쟁의 조기 종결을 위해서 소련 수상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참전을 요청했다. 그 후 소련이 참전하지 않자 그 해 7월의 포츠담(Potsdam) 회담에서도 미국 측은 소련에 만주와 한반도로의 진격을 요청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이어 사흘 뒤에는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원폭의 위력은 대단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참전 없이도 전쟁을 곧 승리로 끌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때에는 소련 군대는 이미 청진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미국의 군사지도자들은 그 무렵 소련의 단독적 군사행동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를 경계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원폭의 위력과 소련의 참전으로 태평양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신속하게 끝날 조짐이었다. 8월 10일부터 워싱턴의 미 국무성‧육군성‧해군성 3성 조정위원회(SWNCC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는 전후의 조치들에 대해서 긴급하게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이 야간회의에서 일본 패망 후 한반도에 있어서의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구를 어디로 나누느냐 하는 과제는 본스틸(Bonesteel)과 러스크(Rusk) 두 젊은 대령에게 맡겨졌다. 두 장교는 철야를 하며 벽걸이용 극동지도를 펴놓고 검토를 하다가 서울 북방으로 통과하는 선, 즉 38선을 점령 분할선으로 정하였다.
38선 분할 획정안은 트루만(Harry S. Truman) 대통령의 승인을 받고 소련 측에 통보했는데, 소련은 이 제안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수도 서울과 인구의 3분의 2, 그리고 경공업과 농업이 발달한 38선 이남지역에 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38선 분할은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성격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후 미국과 소련 사이에 냉전이 격화되고 남‧북한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면서 군사적 분계선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 분단선으로 고착, 한민족에게 많은 아픔과 불행을 안겨줬다.
미국 군대가 한국에 진주한 것은 종전 25일 만인 1945년 9월 8일이었다.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이끄는 미 24군단은 9월 5일 오키나와를 출발, 8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선발부대인 미 7사단은 9월 9일 서울에 입성했으며, 이날 하지 중장은 조선총독부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의 서명을 받았다. 이로써 ‘일제 36년’은 막을 내리고 미군정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에 앞서 소련군 제25군은 8월 26일 평양에 입성, 38도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미군은 제주도 주둔 일본군 제58군에 대해서는 조선 본토의 제17방면군과는 별개로 취급했다. 1945년 9월 13일자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38선 이남의 일본군 현황’에서 일본군 총수를 179,720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 제주도의 일본군 병력을 다른 남한지역의 일본군과 별도로 집계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즉 서울(57,110명), 광주(34,710명), 대구(13,480명), 부산(15,420명), 여수(680명) 등을 합쳐 ‘남한 총계 121,400명’으로 해놓고, ‘제주도 58,320명’은 따로 기술하고 있다.
주한미군사에는 ｢제주도 주둔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란 소제목 아래 6쪽에 걸쳐 이 과정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이 기록에는 “제주 주둔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해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웠다”고 기록할 정도로 미군 수뇌부가 이 문제에 신중을 기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서울에 입성한 하지 장군은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上月食夫)와 사전 협의를 마친 뒤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미군 배치가 끝나는 대로 제주도에 무장해제팀과 조사팀을 공수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항복접수팀이 9월 28일 김포공항을 출발하기로 결정됐다. 항복접수팀은 최종적으로 지휘관인 제184보병연대 그린(Roy A. Green) 대령과 38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됐다. 주한미군사에는 항복 접수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항복접수팀은 9월 28일 아침 일찍 김포비행장에 집결했다. 그린 대령은 대원들에게 항복 접수 과정에서 기념품이나 선물을 받지 않도록 주지시켰다. 그들은 두 대의 C-47기에 탑승, 오전 7시에 이륙해 오전 9시께 제주읍에서 서쪽으로 1.5마일 떨어진 제주 서비행장 상공에 다다랐다. 그들은 미국 비행기가 전에 착륙해 본 적이 없는 비행장 주위를 선회하며 간밤에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착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비행장에는 일본군 참모장교 7명이 나와 이들을 영접했다. 약간의 혼란이 있은 뒤, 접수팀은 4대의 낡은 세단을 타고 조인식이 열리기로 된 읍내의 남쪽 끝에 있는 학교(제주농업학교) 건물로 갔다. (중략)
10시 45분 일본군 서명자들이 보좌관 3명을 대동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도야마 장군(중장‧제58군 사령관)은 일장기를 제외하고 훈장 계급장 등 모든 제복 장식품을 떼어냈다. 일개 대령에게 항복해야 하는 난처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든 것처럼 하지 않을까 염려했던 미국인들은 그를 보자 안도했다. 그린 대령과 월든 중령은 방 끝의 탁자에 앉아 있었으나 일어서지 않았다. 그들 뒤에는 일부 참모장교와 통역사 1명이 서 있었고, 제184보병연대의 기를 가진 호위병이 한 쪽에 약간 비켜 서 있었다. 그린 대령이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나머지 미국인 참관자들은 차려 자세로 서있는 일본군들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린 대령은 항복문서를 받도록 그를 임명한 하지 장군의 명령서를 읽고 나서, 영어와 일본어로 된 각 3부씩의 서명할 문서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일본군 대표들에게 자리에 앉도록 말했다.
문서 6부가 도야마 장군에게 건네졌고, 그 다음에 하마다(중좌‧제주주둔 해군 사령관) 사령관에게, 마지막으로 센다(제주도사) 민정관에게 건네졌다. 서명에는 6분이 소요됐다. 그들이 서명한 후, 문서는 그린 대령에게 건네졌다. 그는 3개의 펜으로 서명했다. 월든 중령이 마지막으로 서명했다. 미국인들이 모든 문서에 서명하는 데 단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서명하는 동안 생긴 유일한 소음은 많은 카메라의 촬영소리뿐이었다. 오전 10시 59분 그린 대령은 “항복 절차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결국 제주주둔 일본군 6만 병력의 항복절차가 단 14분만에 끝났다. 미군은 제주도 주둔 제58군을 별개의 지휘계통으로 판단, 별도의 항복문서를 받아냈던 것이다. 항복조인식이 끝난 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한 시간 가량 협의가 있었다. 항복접수팀 그린 대령 일행은 낮 12시께 곧바로 상경했다. 다만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해리슨(Harrison) 대령 등 몇 명의 장교들이 정보 수집차 제주에 남았다.
9월 28일 항복접수팀과는 별개로 무장해제팀이 제주에 들어왔다.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보고서에는 “제7보병사단 요원들로 구성된 무장해제팀이 구축함 1척의 호위를 받으며 2척의 LSM편으로 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제주도에 오전 8시에 도착하였다. 제24군단으로부터 파견된 항복접수팀은 2대의 C-47편으로 오전 9시에 제주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무장해제팀은 항복접수팀이 제주에 도착하기 1시간 전 제주항에 상륙한 것이다. 무장해제팀은 군단 병기장교 파우웰(G. F. Powell) 대령의 인솔아래 9월 26일 인천항을 출항, 이날 제주에 도착한 것이다.
무장해제팀은 완전 무장한 군복차림으로 그들이 갖고 온 군용트럭을 타고 제주 시가지를 통과, 제주비행장에 주둔했다. 주한미군사에 “오키나와와 거의 같은 크기로 중무장된 요새나 다름없는 제주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중대한 문제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미군으로서는 무장해제가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무장해제팀은 그때까지도 처리되지 않았던 무기와 폭발물을 바다에 버리고 비행기들을 폭파했다.
② 일본군 송환
1945년 10월 초까지도 제주 섬에는 일본군 약 5만 명 가량이 남아 있었다. 미군이 1945년 10월 1일 제58군사령부를 감찰한 자료에 의하면 “제58군의 총병력은 49,619명이며, 그 외에 한국출신 병사와 노무자는 17,161명이었는데 이들은 동원 해제되어 9월 1일 이전에 고향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45년 10월 7일자의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는 동원 해제된 17,161명의 신원에 대해 한국인 이외에도 한국에 집이 있는 일본군 장병 5,277명이 포함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남한에 있던 일본군의 송환은 1945년 9월 27일부터 시작되었다. 대전 이남은 부산항, 대전 이북은 인천항을 이용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의 일본군 송환작업은 그보다 한 달 가량 늦어진 10월 23일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68일만이었다. 송환업무를 책임질 부대 확보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일본군 송환업무를 전담할 임무를 띠고 10월 22일 제주에 파견된 미군팀은 제749야전포병대대였다. 이 부대는 인천항을 통한 일본군 후송업무를 마치고 제주에 배치되었다.
제주에서 승선한 일본군인들은 규슈 사세보(佐世保)항으로 옮겨졌다.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 10차례에 걸쳐 실시된 일본군 송환작업에 동원된 미 LST함은 30여 척에 이르렀다. 군인뿐만 아니라 제주에 살았던 일본민간인 860명도 송환되었다. 1945년 12월 초에 미 24군단 작전참모부가 집계한 항구별 일본군 송환숫자는 부산(382,499명)이 가장 많았고, 두 번째로 제주항(50,844명)이었으며, 그 뒤를 인천(20,233명) 진해(17,409명)순으로 이어졌다.
당초 미군 측에서 염려했던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다. 다만 “제주도에서도 약간 명의 분사(焚死)가 있었다”고 한다. 또 미군 측 자료에 의하면 1945년 9월 21일 오후 2시 모슬포항에서 폭발물을 실은 배들이 모종의 불에 점화되어 몇 번의 심한 폭발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4～5척의 배가 침몰했고 약 73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에 대한 일본군의 행패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 측으로부터 허용받은 무기를 들고 곧잘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고, 모리배들과 전쟁물자에 대한 뒷거래를 하였다. 심지어 엄청난 양의 군량미를 식량난에 허덕이는 섬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는커녕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작태를 저질렀다. 미군 보고서에도 “10월 1일 현재 제58군은 4개월 분량의 군량미를 보유하고 있다. 이 군량미는 주로 쌀인데 도민들이 50일 동안 소비할 수 있는 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군은 철수 직전에 제주비행장에 산더미처럼 비축했던 군량미를 모두 불태웠다.
3)귀환인구 급증
종전 후 제주도는 급격한 인구이동 현상을 빚었다. 6만여 명의 일본군이 철수하는가하면, 일본 등지로 나가 있던 제주인 6만 명 가량이 귀환했다. 1945년에는 제주 섬이 요새화되면서 전쟁을 피해 본토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전쟁 기간에 제주도에서 대략 3만 명의 젊은이들이 공장 노동자나 전쟁 노무자로 일본에 보내졌다”는 내용이 미군 보고서에 나와 있듯이 징병‧징용으로 제주를 떠난 청년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1945년 8 당시 제주도 인구는 일본군을 제외하면 22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이것이 1년 사이에 28만 명을 넘게 되었다. 따라서 해방 전후의 인구 변동률은 30%선에 육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도 대거 귀환하였다. 이와 같은 인구의 양적, 질적 팽창은 해방 후 정치적 긴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제주 전통사회에 경제적‧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제주의 인구 변화는 본토와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의 유별한 관계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제는 1918년에 제주～오사카 사이에 정기여객선을 띄웠다. 일본정부의 보조에 의한 명령항로로 개설된 이 뱃길에 첫 취항한 여객선은 함경환(咸鏡丸�t)이었다.
1924년에는 강원환(江原丸�t), 복견환(伏見丸�t)이 운항했으며, 1930년대에는 군대환(君代丸�t), 경성환(京城丸,200t), 복목환(伏木丸,600t) 등이 대체 운항했다.
□ 제주도의 인구 변동
연도
조선인
일본인
총계
연도
조선인
일본인
총계
1916
202,072
840
202,926
1933
188,509
1,355
189,940
1917
204,415
992
205,431
1934
188,410
1,434
189,932
1918
203,409
811
204,327
1935
197,543
1,425
199,063
1919
201,006
681
201,713
1936
195,278
1,406
196,774
1920
200,584
724
201,326
1937
199,742
1,486
201,277
1921
199,677
752
200,455
1938
202,241
1,355
203,651
1922
197,999
692
198,719
1939
204,650
1,354
206,052
1923
209,060
869
209,925
1940
207,514
1,355
208,915
1924
214,584
792
215,426
1941
216,081
1,402
217,530
1925
204,314
1,105
205,478
1942
222,785
1,375
224,208
1926
209,841
1,083
211,010
1943
223,200
1927
210,508
1,066
211,645
1944
219,548
1928
204,420
1,116
205,609
1945
1929
194,017
1,125
195,218
1946
276,148
1930
198,304
1,185
199,577
1947
275,899
1931
193,610
1,261
194,714
1948
281,000
1932
199,269
1,313
200,642
1949
254,589
□ 제주인의 日本出稼 변동표
연도
渡航者
歸還者
殘溜者
누계
총수
남
여
1926
15,862
11,742
4,120
13,500
28,144
1927
19,224
14,479
4,745
16,863
30,305
1928
16,762
11,745
5,017
14,703
23,564
1929
20,418
15,519
4,903
17,660
35,322
1930
17,890
12,029
5,861
21,416
31,786
1931
18,922
11,635
7,287
17,685
33,023
1932
21,409
11,695
9,719
18,307
36,125
1933
29,208
15,723
13,485
18,062
47,271
1934
16,904
9,060
7,844
14,130
50,045
1935
9,484
4,327
5,157
11,161
48,368
1936
9,190
4,739
4,451
11,095
46,463
1937
7,484
3,917
3,567
8,004
45,943
1938
8,979
4,780
4,199
8,972
45,950
일제는 1910년대에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본래 열악한 제주의 농촌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여기에다 가중된 조세부담, 자연경제구조의 붕괴, 일본인에 의한 산업 통제 등으로 제주사회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 당시 일본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중공업을 육성하다보니 노동 일손이 절대 부족했다. 그런 입장의 일본인의 눈에는 가난한 제주 섬이 조선 전체에서 저비용 노동인력을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노동력 시장’으로 비춰졌다.
제주～오사카 정기항로는 바로 이런 노동인력을 유입하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쌀 한 가마에 5원씩 하던 때인 1930년대 군대환의 3등실 배삯은 그 절반인 2원 50전이었다. 제주항 외항에 정박해 있다가 출항할 때에는 애월‧한림‧고산‧모슬포‧서귀포‧표선‧성산포‧김녕‧조천 등 섬을 한 바퀴 돌면서 포구마다 종선을 대어 승객을 실어 날랐다. 오사카까지에는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당시 제주인들은 본토의 부산이나 목포보다 일본과의 왕래가 훨씬 빈번했다.
1924년 오사카 직업보도회가 오사카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출신지별 표본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이 조사는 조선인 남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61%인 609명이 제주도 출신으로 나타났다.
1930년대 중반에는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인 5만 명이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젊은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두 명 중에 한 명 꼴로 진출했다는 뜻이다. 출가자 가운데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출가노동자들은 공장이 밀집된 오사카에 집중되었다. 1935년판 제주도세요람에는 “1934년의 경우 총 50,645명의 재일 제주도민 중 72%인 36,371명이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비록 낮은 임금을 받았지만, 이를 절약해 고향에 송금함으로써 제주도의 경제에 보탬을 주었다. 또한 일본 노동운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는가 하면, 자녀들이나 동생 등 부양가족을 일본으로 데려와 교육을 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고등교육 이수자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일본에 진출했던 젊은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 왔을 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을 외부에 노출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이미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행동양식이나 의식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었다. 그들은 일본 노동시장에서 저임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했던 자들로 일정하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향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자치활동과 야학,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급작스럽게 해방된 조국에는 이들을 수용할 만한 공장이나 일터가 없었다. 실업률도 증가했다. 이들은 곧 심각한 경제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특히 8 직후에 귀환자의 반입물품 제한과 일본과의 물자교역 불법화는 그동안 일본 오사카 중심의 노동시장 생활권을 유지해왔던 출가노동자들의 경제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종전 직후 귀환조선인의 휴대물품과 금액을 철저히 제한했다. 매사추세츠대 빅스 교수가 쓴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에는 “연합군 사령부는 1945년 11월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앞으로 자유롭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소지품 외에 천 엔(담배 20갑에 해당되는 돈)만 소지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광산과 공장에서 낮은 임금과 고된 노동으로 벌어들인 조선인 노동자의 다른 모든 재산은 그냥 남겨 놓아야만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8 이전 공산품의 40% 가량을 일본에서 구입해오던 제주도 사회는 일본과의 정기여객선 뱃길이 끊기고 반입물품 제한과 대일 교역마저 통제를 받게 되자 심한 생필품의 부족현상을 보였다. 이렇게 되자 제주 도내 곳곳에서 귀환자도 실어 나르고 물품도 반입하기 위해 20～50t 급의 어선들이 현해탄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물품반입 행위를 불법이라 하여 경찰에서 단속하면서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자유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제주도에 들어오는 물자는 간상배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일본을 위시한 각지에서 돌아오는 전재(戰災)동포의 물건이 태반이라 한다. 수십 년 간 고혈을 기울여 저축한 재산을 그대로 버릴 수 없는 재일동포들은 할 일 없이 물건을 사가지고 외국관헌의 눈을 속여가며 본국을 찾아 우선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이라 한다. 현재 법령이 그들의 재산반입을 아직 인정치 않는 이때, 그들이 이와 같은 밀수입을 하게 됨을 막을 도리가 없는 일이다. 당국에서 이와 같은 재일 귀환동포의 눈물나는 노력까지 분별없이 방지한다면 결국은 외국을 이롭게 하는 결과밖에 안될 것으로 민중들은 경찰당국의 현명한 조치를 갈망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모리배들이 끼어 들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모리배들은 미군정 관리, 경찰 간부 등과 결탁, 밀수품 단속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압수된 물품을 빼내어 잇속을 챙겼다. 급기야 이 문제는 지방언론과 중앙언론에서 ‘모리배 천하인가?’ ‘모리천하 제주도’란 제목아래 대서특필될 정도로 커다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나.인민위원회 태동
1)제주 인민위 특성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섬에서 하나밖에 없는 정당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정부행세를 한 유일한 조직체였다” 이 글은 1945년 전남도청에 근무했던 미군정 요원 그랜트 미드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한 주한미군정에 기록되어 있다.
1975년 하버드대학에서 제주도 4사건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반란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 점령 첫해에는 이 섬에 상주하던 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미군정 중대는 이 섬을 관할하는 데 인민위원회를 이용했으며, 또한 이 단체에 ‘전심전력의 지원(wholehearted support)’도 아끼지 않았다. 이 놀라운 협력관계는 이 섬의 권력판도에 대한 군정중대의 현실주의적 인식이 바탕이 되어 이뤄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논문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초기부터 강한 독자의지를 밝혀나가 전남 위원회에 종속되는 것을 싫어했다”면서 “군정당국과 인민위원회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가 행정구역상 도(道)로 승격(1946년 8월)하면서부터 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1946년 12월 미군정청 여론국에서 작성한 보고서 초고에도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수적으로 대단히 강했으며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온건한 정책들이 무척 매력적이었으므로 우파에서는 인민위원회 세력이 더욱 강대해질 것을 두려워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미국 쪽의 자료들은 한결같이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적‧사회적 헤게모니를 인민위원회에서 장악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중앙통제력이 강하게 미쳤던 서울 등지와 같이 1945년 말부터 이미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자취를 감추었던 육지부와의 상황과 비교할 때 이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비단 미국 측 자료뿐만 아니라 국내 언론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보도를 한바 있다. 1946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제주도 시찰기’에는 “제주의 인민위원회는 건준(建準)이래 양심적인 반일제 투쟁의 선봉이었던 지도층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분립된 한독(韓獨),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등의 우익단체와도 격렬한 대립이 없이 무난히 자주적으로 도내를 지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상의 분석 글을 보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를 집약하면 그 특성을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자치기구였다는 점, 둘째는 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했다는 점, 셋째는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는 점, 넷째는 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다섯째는 존속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는 점, 여섯째는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 조직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어 독자성이 강했다는 점 등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지방위원회의 성장과 지속을 위한 환경적‧생태적 요인 7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1930년대나 1940년 초반에는 인구가 감소했다가 해방 후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지역
② 소작농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으며 지주의 힘이 무너졌거나 약했던 곳으로 농민들이 어느 정도의 독립성과 견제수단을 갖고 있던 곳
③ 일제통치와 미군통치 사이에 공백기간이 길었던 곳
④ 통신과 운송시설이 비교적 열악하거나 인민위원회가 그러한 시설을 장악한 곳
⑤ 농민의 급진적 역사가 있는 곳
⑥ 비교적 분화된 직업구조
⑦ 상당한 기간 동안 우파와 좌파의 어느 쪽도 완전 지배를 못했거나, 아니면 지배적인 좌파가 온건한 정책을 취한 정치적 복합성이 존재한 곳
커밍스는 이런 조건을 갖춘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임을 지적했다. 이 분석틀에 의하여 제주도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①제주도는 1930년대에 인구유출이 심했고, 8 직후에 6만 명 가량의 유입인구 증가가 있었으며, ②소작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10% 미만인 반면 지주계급은 거의 없었고, ③사실상의 군정업무를 맡은 미 59군정중대가 1945년 11월 9일 상륙함으로써 전국에서 행정 공백기간이 가장 길었다. 또 ④제주도는 서울과 가장 먼 거리에 있으면서 여객선 등의 교통수단이 열악했고, ⑤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인 해녀봉기가 있을 정도로 급진적인 민중운동 역사가 있었으며, ⑥일본과의 직항로 개설로 전통적인 직업구조의 변화가 컸고, ⑦상당기간 인민위원회가 온건한 정책을 지향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랜트 미드도 미군정 부대와 인민위원회 사이에 우호관계가 지속됐던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이었음을 밝혔다. 이런 배경에는 미군정의 지방조직들이 한동안 인민위원회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미드는 그의 저서에서 “서울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인공의 급속한 해체가 지방에서는 보편적으로 이행되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거기에는 군정요원의 부족, 민정부대가 행정권을 양도받을 수 있을 때까지 법과 질서유지의 필요성, 서울에 있는 강력한 보수적 과두체제와 지방의 지배적인 진보적‧농민적 이해와의 대비 등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2)인민위 조직과 활동
인민위원회의 태생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으로 약칭)에서 비롯되고 있다. 건준은 해방직후부터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결성됐다. 8월 16일 아침 서울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명의로 민심안정을 도모하는 전단이 뿌려졌다. 이날 정오 휘문중학교에서의 여운형의 연설을 통한 건준 발족과 지방조직 결성 호소연설은 일반국민들에게 신정부 수립에 대한 정책 발표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건준은 치안을 확보하고 현존 시설 등을 보존, 관리하는 임무도 가졌으나 근본적으로는 독립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과도적 임무를 수행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런 목표는 건국에 대한 일반국민의 열망에 바로 접목되었다. 종전 소식을 접하게된 지방의 활동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와 닿는 문제는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국가의 수립을 어떻게 이루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공통적이고 현실적인 요청에 고리를 맺게 한 것이 바로 중앙의 건준 조직이었다.
건준 지방조직은 중앙 통제에 의한 일률적인 것이 아니었다. 군‧읍‧면 등에 생기기 시작한 이들 조직들은 그 명칭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자치위원회, 치안유지위원회 등 여러 가지였다. 이런 단체들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종전 보름 만인 8월 말에는 건준의 지부 성격을 띤 단체가 145개소에 결성되었다.
제주도(濟州島) 건준은 1945년 9월 10일 결성되었다. 각 읍‧면 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도단위 건준 조직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이날 임원진 구성도 있었는데, 위원장에 오대진(吳大進‧대정면), 부위원장에 최남식(崔南植‧제주읍), 총무부장에 김정노(金正魯‧제주읍), 치안부장에 김한정(金漢貞‧중문면), 산업부장에 김용해(金容海‧애월면)가 선출되었다.
또 집행위원으로 김시택(金時澤‧조천면) 김필원(金弼遠‧조천면) 김임길(金壬吉‧대정면) 이원옥(李元玉‧대정면) 조몽구(趙夢九‧표선면) 현호경(玄好景‧성산면) 문도배(文道培‧구좌면) 등 10여 명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주로 40～50대의 장년층으로 항일운동 경험자들이 많았다.
전국적으로 건준의 지도자들은 주민의 신망을 받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여론에 의해 추대되었다. 이제까지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일본인이나 대일 협력자가 자취를 감추자, 주민들은 그에 대신하여 자신들의 지방지도자를 특별히 형식적인 선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용이하게 선출할 수가 있었다. 거기에는 암묵의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독립의 의지와 저항적 자세를 관철한 사람이야말로 새로운 지도자로 합당하다는 것이었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 건준 결성모임에 참석했던 한 증언자는 “건준 면대표 선출을 마을 대표들이 모여 투표로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추대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는 건준 결성회의에서는 주로 당면한 치안문제, 물가대책 등이 논의됐으며 건준의 참여 범위에 대해서 “과거 악질적인 친일분자는 어쩔 수 없지만, 비록 공직에 몸담았다 할지라도 안 그런 사람은 건국사업에 참여시키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했다.
건준의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불리게 된 것은 중앙의 건준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으로 약칭) 창건을 선언한 이후부터였다. 인공이 과도정부의 성격을 추구했다면, 인민위원회는 과도적 지방행정기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인공이 선언됐다고 즉각적으로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 따라, 또 시기별로 각기 다르다.
이때에는 이데올로기 문제로 대립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건준 조직에는 소문난 친일세력만 배제되었을 뿐 웬만한 사람들은 거의 참여하는 편이었다. 제주도 건준 조직은 1945년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리 단위까지 파급될 정도로 가장 광범위한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
초기 읍‧면의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위원장들은 대체로 이념과 무관하게 지역 원로들이 추대되었다. 읍‧면 위원장은 제주읍 현경호(玄景昊), 애월면 김용해(金容海), 한림면 김현국(金顯國), 대정면 우영하(禹寧夏), 안덕면 김봉규(金奉奎), 중문면 강계일(康桂一), 서귀면 오용국(吳龍國), 남원면 현중홍(玄仲弘), 표선면 조범구(趙範九), 성산면 현여방(玄麗芳), 구좌면 문도배(文道培), 조천면 김시범(金時範)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대정의 우영하, 안덕의 김봉규, 남원의 현중홍, 표선의 조범구, 조천의 김시범 등 5명은 미군정 하에서 초대 면장을 지냈으며, 김봉규, 현중홍은 ‘4’발발 이후인 1948년 5월까지 면장 직에 있었다.
제주도 인민위윈회의 초기 활동은 행정기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치안활동에 주력했다. 이것은 인민위원회가 본래 행정기구를 표방했지만, 미군정에서 이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기관을 인수하지는 못했지만 앞에서 보듯 실질적인 내용 면에서는 읍‧면사무소의 인적 구성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는 제주도 군정업무를 맡은 59군정중대의 묵인 또는 협력이 있었다.
제주도 군정당국은 1945년 말 인민위원회 치안대 간부들을 소집해 치안유지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인민위원회 산하에는 청년동맹‧부녀회‧소비조합 등이 있었는데, 치안대의 활동은 주로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간부들이 맡아보았다. 당시 한림면 치안대 간부는 이런 증언을 했다.
미군정당국과 치안대가 부딪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미군이 각 지방청년 지도자들을 모이라 해서 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북국민학교에 집합했는데 나는 한림면 청년동맹 위원장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이 연설했는데, ‘일본군 물자는 결국은 당신네 것이니 물자를 잘 보관하라, 훔쳐가거나 불지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소란‧폭행행위가 없도록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협조해달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1946년까지도) 박경훈 도지사의 공문이 올 때 치안을 담당하는 한림면 청년동맹 위원장 아무개, 그 다음에 지서주임 순으로 내려 왔습니다.
1946년 초에 구좌면 세화지서 주임으로 발령받은 한 경찰관의 회고담도 당시의 세태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발령통지서를 받을 때 경찰서장이 소개장을 써 줬다고 했다. 그것은 구좌면 인민위원장 문도배에게 보내는 것으로, 지서주임을 보내니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건준이나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주로 적산(敵産) 가옥이나 향사 등을 사용했으며, 애월면과 구좌면 등지에서는 면사무소에 나란히 간판이 걸리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면사무소에서는 중요한 행정업무를 추진할 때 사전에 인민위원회 간부들과 협의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치안활동 이외에도 농사법에 대한 교육, 학습회, 체육대회 등을 개최했고, 마을마다 야학을 통해 문맹퇴치 운동도 전개하였다. 또한 대정중학원, 조천중학원 등 학교설립 사업도 추진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온건하면서도 강력했고, 독자성을 띠었다는 특성을 구체적으로 표출한 사례가 1946년 ‘대구 10사건’의 불참과 ‘과도입법의원 선거’의 참여이다. 이 같은 행동은 그 무렵 전국적인 좌파의 활동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일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도화선이 된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 명(3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주장도 있음)이 참가하는 8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 이 사태로 민간인과 경찰관들의 희생이 컸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있있던 이 사건에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했던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에는 이 무렵 제주도에서 10 대구사건의 여파로 10월 9일 소동이 일어나 전남 본토에서 미군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으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이는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작년을 회고컨대) 육지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1946년 10월 좌파계열이 불참한 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참여, 인민위원회 간부를 당선시킴으로써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다. 미군정은 군정 실시 1년 만에 온건 우파와 중도파를 중심으로 하는 입법기관의 설치를 추진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이었다. 그러나 좌파진영에서는 입법의원을 뽑는 선거를 보이코트하였다. 그 절차가 일제시대의 중추원 참의 선출제도와 비슷하고, 자칫 남한의 단독정부 추진의 예고일 수 있다는 불신의 시각이 있었다.
1946년 10월 31일 전국적으로 민선 입법의원 선거가 끝났을 때 당선자들은 거의 우파 일색이었다. ‘입의(立議)선거에 우익이 승리’라는 제목으로 UP통신이 타전한 기사를 보면 당선자의 소속 정당‧단체가 한국민주당 15명, 대한독립촉성회 14명, 무소속 12명, 한국독립당 2명, 인민위원회 2명으로 분류되었다. 이 통계에서 보듯 한민당과 독촉 중심의 당선자 가운데 좌파세력이라면 인민위원회 소속 2명뿐인데, 그 당선자들이 바로 제주도에서 배출되었다.
제주도에서 입법의원으로 선출된 문도배(文道培)는 구좌면 인민위원장, 김시탁(金時鐸)은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이었다. 문도배는 1930년대 해녀봉기 배후인물로 3년의 옥살이를 했던 항일운동가이며 김시탁은 조천에서 의원을 경영하던 의사였다.
그런데 서울에 나타난 두 사람은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은 대신 민전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입법의원 참가 거부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 장군은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하지와 웨드마이어 장군의 대화 비망록에서 하지는 “제주도만이 좌익 입법의원을 선출했는데 그들 두 사람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실종되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일련의 사건, 즉 대구사건의 불참과 입법의원 선거의 참여(비록 당선자가 뒤늦게 사퇴했지만)는 당시 제주도 좌파운동 세력의 성격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인민위원회의 역량이 대중성을 띠고 지속한 한편 온건성과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군정과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협력관계도 1947년 3절 발포사건을 계기로 첨예한 대립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다.미군정과 도제 실시
1)미군정 실시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았던 중앙청에서는 항복조인식에 이어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는 의식이 있었다. 이로써 ‘일제 36년’은 막을 내리고 38선 이남 남한에서 미군정 시대가 시작되었다.
미군정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통치 방침은 핵심적인 2개의 정책문서, 즉 ‘맥아더 포고’로 집약되어 있다. 9월 7일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의 자격으로 발표된 포고 제1호는 ‘조선인민에게 고함’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포고는 헌법이 없던 미군정 3년간 점령정책의 기본이 되는 법규로 활용되었다. 이날 포고 제3호도 발표됐으나, 그것은 통화(通貨)에 관한 것이었다.
포고 제1호에서는 38선 이남 지역에 군정을 실시한다고 밝히고 6조항의 점령조건을 발표했다. 그것은 ①모든 행정권은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 ②모든 공공기관 종사자는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집무에 종사 ③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등 엄단 ④주민의 소유권 존중 ⑤군정기간 중 영어가 공용어 등으로 요약되었다.
포고 제2호는 범죄 또는 법규 위반에 대한 처벌 규정으로, 미군 최고지휘관의 포고‧명령‧지령에 위반하는 자, 미국인 및 연합국 국민의 인명‧소유권‧안전을 해치는 자, 치안‧질서를 교란하는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연합군에 적대행위로 나오는 자는 점령군 군율회의에 회부, 사형 또는 다른 형벌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군정 하에서 4사건 연루자들을 처벌할 때 적용한 법규도 바로 이 ‘포고령 2호’이었다.
9월 12일 제7사단장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에 임명되면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이 가동되었다. 그러나 지방에는 군정요원들이 배치되지 않아서 지역별로 1～2개월 늦게 군정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초 남한에는 7사단 이외에 40사단, 96사단이 진주할 예정이었으나, 제주도를 포함한 남한 남서부지역에 배치하려던 제96사단이 중국 텐진(天津)지역 소요 진압차 중국으로 전출되는 바람에 차질을 빚었다. 96사단 대신 들어온 부대는 제6사단인데, 이 부대는 10월 중순부터 상륙하기 시작, 제주를 포함한 전남‧북 지방에 배치되었다.
당시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남에 속해 있었는데, 전남도지사는 10월 25일 린트너(Julius H. Lintner) 중령이 발령되었다. 그때야 일본인 도지사도 면직된 것이다. 광주시사에는 1945년 10월 27일 오전 10시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정식으로 군정 실시 선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도의 군정은 11월 9일 제59군정중대가 상륙하면서 비로소 실시되었다. 8 이후 86일만의 일이었다. 그만큼 행정공백이 길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미군정의 한국정책은 혼선을 거듭하였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심지어 일본인 관리를 그대로 활용하려다가 반대여론에 부닥쳐 수정되기도 하였다. 특히 중앙정책이 곧바로 지방군정에 시달되는 일이 드물었고, 따라서 이 지방과 저 지방의 정책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전남지역을 담당한 제101군정대 요원이었던 미드는 “도착지에 대한 어떠한 브리핑도 받지 못했으며 도착해서 해야 할 의무도 부여받지 못했었다. 장교들은 각자 카이로선언과 맥아더의 조선민에 밝힌 3가지 선언, 24군단과 7함대의 합동 참모회의에서 성급히 작성된 군정실시 비밀계획, 군정에 의해 인쇄된 열서너 가지의 법령, 일반규칙, 주의문 등등의 사본을 휴대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미드는 한국에서의 군정업무 수행에는 ①부여된 상황에 대한 선례의 부족, ②문제점에 관한 정보의 부재, ③통치자들의 경험부족 등 3가지 기본적 난제 이외에도, ④효율적인 의사소통의 결여와, ⑤서구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동양인에게 인식시킴에 있어 수반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언어장벽은 심각해서 정책결정을 할 때 몇몇 통역관의 견해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무렵 미군의 지방진주는 보통 3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단계는 시찰단의 사전 파견, 다음에는 전술부대에 의한 점령, 마지막 단계가 군정요원의 파견과 군정 실시였다. 그러나 제주도의 미군진주는 앞에서도 살폈지만 일본군의 항복‧무장해제‧철수에 초점이 맞춰져 진행되었다. 즉 9월 28일 그린 대령의 항복접수팀과 파우웰 대령의 무장해제팀의 상륙에 이어 10월 22일에는 제749야전포병대대가 제주에 진주, 일본군 송환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비로소 군정업무를 전담할 제59군정중대가 진주했으며, 11월 10일에는 전술부대로서 6사단 20연대에 배속된 제51야전포병대대 분견대가 파견되었다.
｢제주도 제59군정중대 부대사｣에는 59군정중대가 1945년 9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 민정요원 보충대에서 편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대는 9월 26일 미국을 출발, 10월 21일 인천항에 도착했으며 제주에는 11월 9일 상륙하였다. 제주 진주 시점의 병력은 장교 7명, 사병 40명 등 47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대 병력은 계속 늘어나 1947년 1월에는 장교 11명, 사병 63명 등 모두 74명으로 증원되었다. 이 군정중대의 지휘관은 스타우트(Thurman A. Stout) 소령이었다. 그는 제주도의 최고자리로서, 일본인이 맡았던 제주도사(島司) 자리에 올랐으며, 1946년 8월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될 때에는 도지사를 맡기도 하였다. 그 직책에 대해서 언론 등에서는 ‘제주도 군정장관’으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제주도 미군정본부는 일제시대의 제주도청(濟州島廳)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스타우트 소령 역시 일제시대 도사 사무실에서 집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인, 한국인 공동 도지사제도가 도입되면서 1946년 2월 박경훈(朴景勳)이 한국인 제주도사로 부임하였다. 스타우트와 박경훈 도사는 통역관을 사이에 두고 한 사무실에 근무했다. 광주에서도 미국인 도지사와 한국인 도지사가 한방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같은 근무형태는 당시 다른 지역에서도 통용됐던 것 같다.
스타우트 휘하에 미군장교로서 법무관, 정보관, 공보관, 재산관리관, 의무관 등을 두어 군정업무를 추진하였다. 초기 군정중대에서 역점을 두었던 분야는 치안유지와 적산관리였다. 따라서 경찰권과 사법권을 관장하는 공안담당 장교인 법무관과 일제가 흡수한 국유재산 등을 관리하는 재산관리관이 주목을 받았다. 법무관은 처음에 존스(Jones) 대위가 맡다가 1946년 하반기에 패트릿지(Partridge) 대위가 부임, 그 이듬해 3사건을 맞게 된다. 재산관리관은 마틴(Martin) 대위와 케리 대위가 번갈아 맡았다.
미군정은 남한에 민주주의를 접목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정책의 시행착오로 일반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주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실책으로 지적되는 것이 조선총독부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기구와 부일 협력자들을 그대로 존속시켰다는 점이다. 미드는 “군정요원들은 초기에 이 지방 저 지방을 돌아다니며 현 재직자이면 누구든 군정의 이름으로 그의 관직을 승인해 주었다. 많은 시장과 경찰서장 및 기타 지방고관들이 그들의 자격이나 평판이 적절히 조사되지도 않은 채 임명되었다”고 지적했다.
제주도의 사정도 비슷했다. 일제시대 관리들이 대거 재등용되었다. 특히 친일경력의 경찰관들마저도 군정경찰관으로 변신하였다. 지역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곡물수집정책은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제주도에서는 군정관리와 모리배와의 결탁문제가 유독 부각되었다. 1946년 12월 미군정청 여론조사과 과장보 페라루(Feraru)의 ｢제주도시찰보고서｣에도 제주군정청 핵심인물인 스타우트 소령과 패트릿지‧마틴 대위 등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됐다는 정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모리문제는 1947년에 이르러 전국적인 시선을 끌었다.
2)제주도제 실시
① 도제 실시의 정치적 의미
미군정 시기인 1946년 8월 1일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 도제(道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하나의 섬인 도(島)에서 남한 아홉 번째의 도(道)로 승격된 것이다. 제주도의 도제 실시는 1946년 7월 2일 러치(Archer L. Lerch) 군정장관의 명의로 공포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법령 제94호 ‘제주도의 설치’에 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군정법령 94호는 모두 6조로 되어 있는데, 제1조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됨을, 제2조는 도명을 ‘제주도(濟州道)’로, 제3조는 도 산하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등 2개 군을 구성하며, 제4조는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의 관할구역을 명시, 결국 제주도의 행정구역이 2군 1읍 12면으로 편성됨을 밝히고 있다. 또 제6조는 이 법령이 1946년 7월 31일 24시에 효력을 발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스타우트 도사가 미국인 제주도지사로, 박경훈 도사가 한국인 도지사로 발령되었다. 북제주군수에는 박명효(朴明效), 남제주군수에는 김영진(金榮珍)이 발탁되었다. 그런데 이 도제 실시는 제주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인민위원회 계열의 반대에 부딪쳤다. 앞에서 존 메릴의 논문이 “군정당국과 인민위원회 사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제주도(島)가 도(道)로 승격되면서부터였다“고 지적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제주도의 분위기는 당시 국내신문에도 보도되고 있다.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는 것에 관한 시비는 분분하였거니와 이곳 주민들 중 보수진영에서는 당국의 방침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도민의 태반은 인위(人委)를 위시하여 도로 승격한 것을 아직도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첫째로 본토와 고립됨으로써 식량 기타 물자 교류에 있어 전남으로부터 분리됨을 싫어한다. 그 다음에 하루바삐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는 그들은 모든 행정구역의 변형을 민족의 총의로 된 우리 정부에 맡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셋째는 도로 승격함으로써 기구가 확대되어 세금이 증가됨을 우려하는 한편, 해방 전에 200여 명이던 경관이 수배로 느는 것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반대한다고 한다. 또한 도로 분리되어 본토와 다른 독특한 시정을 하는 것은 결국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기우에서 나오는 점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도제 실시는 우파진영 지역유지들의 건의와 제주도 군정당국의 요청, 그리고 미군정청의 정치적 분석 등이 함께 고려된 것 같다. 보수진영에서는 1945년부터 김홍석(金洪錫)을 중심으로 ‘제주도제 실시 추진위원회’를 구성, 아놀드 군정장관에게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도 승격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제주도 군정당국에서도 제주도의 행정구역 독립을 요구하였다. 미드는 그의 글에서 “제주도가 독립된 행정단위로 재출현한 것은 59군정중대의 장교들이 미군정에 꾸준한 압력을 가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아놀드에 이어 군정장관에 취임한 러치 소장은 1946년 6월 2일 제주도를 직접 방문, 도제 실시 여부를 검토하였다.
본래 ‘탐라국’이란 독립국가의 경험이 있었던 제주도의 주민들은 독립적인 성향이 짙었다. 1949년 4월 제주도 사태를 종합 분석한 미군 보고서에도 “수세기 동안 정치적 소수자에 대한 유배지로 이용한 점과 행정의 불모지화는 제주 섬에 점차적으로 분리주의 철학을 심어 놓았다. 민중의 분리주의 의식은 60마일이나 되는 지리적 간격보다 더 넓었는데, 이러한 의식은 제주도를 한국의 한 지역으로 보기보다는 속국으로 취급하는 본토정부의 정책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드는 “일제는 제주를 ‘한국의 시칠리아 섬(이탈리아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앙정부의 오랜 지배와 그에 항거한 저항의 역사가 있는 섬)’으로 간주, 이 지역 원주민들에 의해 표출된 강고한 독립정신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 지역을 전남지역 일부로 통합해 버렸다”고 분석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고, 그동안 전남과도 일정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던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막상 미군정이 제주도를 전남과 분리시키려 하자 오히려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인민위원회는 경제적 부담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군정의 의도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던 시기는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휴회로 들어간 뒤 미군정이 좌파세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던 시점이었다. 그 해 5월부터 열렸던 미‧소 공위에서는 공위에 참가할 한국 내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자격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미군정은 1차 미‧소 공위가 성과없이 끝나자 곧바로 정당의 비밀활동을 규제하는 ‘정당등록법’을 발표하는 한편, 경찰과 경비대 조직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런 시점에서 추진된 제주도제 실시는 단순히 행정기구의 격상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군(郡) 수준에서 도 수준에 맞게끔 군경 조직들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제주도제는 첫째 행정기구의 확대개편 뿐만이 아니라, 둘째 제주감찰청 신설 등 경찰기구의 확대, 셋째 경비대 제9연대 창설 등으로 표출되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활동영역이 더욱 좁아지고 제한을 받는 여건이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주도의 승격문제를 미군정 아래에서가 아니라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바로 이런 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도제를 반대하는 뜻에서 도 승격이후에도 그들의 기구 명칭에 ‘도(道)’를 쓰지 않고 종래의 ‘도(島)’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② 경찰기구의 확대
제주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찰조직도 확대 개편되었다. 1946년 8월 1일에 제주감찰서로, 9월 11일에는 제주감찰청으로 승격되었다. 그 산하에 총무과, 공안과, 통신과, 수사지도과, 사찰과 등 5개과를 두었다. 12월 14일에는 제주읍 소재 제1구경찰서 이외에 서귀포에도 제2구경찰서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종전 1개 경찰서 체제였던 제주 경찰이 도 승격이후 1개 감찰청, 2개 경찰서 체제로 그 기구가 확대된 것이었다.
1946년 4월 경찰제도가 관구(管區)경찰제로 개편되면서 각 도의 경찰조직은 종전의 경찰부에서 관구경찰청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경기는 제1관구경찰청, 강원은 제2관구경찰청 식으로 호칭됐는데, 당시 제주도가 속해 있던 전남은 제8관구경찰청으로 불렀다. 따라서 이런 기준이라면 제주도가 도로 승격하면서 제9관구경찰청이 설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감찰청 기구를 두었다.
제주도에만 생긴 이 감찰청은 지휘관의 직급을 감안할 때, 경찰청과 경찰서의 중간 단계의 조직으로 해석된다. 당시 경찰직급은 경찰총감-총경-감찰관-경감-경위-경사-순경 순이었는데, 초대 제주감찰청장으로 발령 받은 김대봉(金大奉)의 직급은 감찰관이었다. 그때는 관구경찰청장이 총경 급에서, 경찰서장이 경감 급에서 임명되던 때이다. 제주감찰청은 3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47년 3월 9일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개칭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갑자기 끝났을 때 가장 당황했던 집단 중 하나가 조선총독부 소속의 한국인 경찰이었다. 경찰 자료에도 1945년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한 9월 8일 사이에 일본인 경찰관 90%가 그 자리를 지킨 반면, 한인 경찰관은 80%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전 당시 총독부 소속의 제주 경찰은 총 101명이었는데 이중 일본인이 50명, 한국인이 51명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곧바로 기존의 총독부 경찰조직을 군정경찰의 골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해방 직후에도 한동안 식민지시대 경찰 이름이 그대로 호칭되었는데, 1946년 1월에 이르러서야 ‘주재소’가 ‘지서’로, ‘순사부장’이 ‘지서장’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지서주임’으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일제경찰관 출신자들이 대거 미군정 경찰로 들어갔는데, 1946년 말 군정경찰 경위 급 이상 간부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경찰 출신으로 밝혀졌다.
제주경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초기 경찰 간부들은 거의 친일 경력이 있는 일제 경찰로 채워졌다. 따라서 민족 감정과 도덕성의 논란 등으로 처음에는 수세에 몰렸다. 인민위원회 치안대 활동에도 협조, 혹은 묵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제 실시를 계기로 경찰력이 강화되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미군정은 군정 초기에 치안 확보문제를 경찰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갔다. 따라서 군정경찰은 해방 이후 최대의 물리적 강제력을 갖는 기구로서, 전투경찰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무장에서도 경비대에 비해 앞섰다. 경찰인력은 계속 증원되었다.
일제시대 101명이던 제주도 경찰력은 제주도제 실시 이후인 1947년 2월에는 33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 해 3절 시위에 대비해서 다시 본토에서 응원경찰 100명을 불러 들였다가 발포사건이 유발되었다. 이에 제주출신 일부 경찰관들이 발포사건의 항의로 사임하자 대대적인 개편 증원작업을 진행, 1947년 4월에는 500여 명으로 늘리면서, 육지출신 경찰관 245명을 제주경찰로 흡수하였다.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난 직후에는 응원경찰까지 합쳐 한때 경찰력이 2,0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미군정의 제주경찰은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있었다. 첫째는 간부를 포함한 다수의 경찰관들이 일제 경찰 경력자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타도 출신 경찰관의 비중이 높았는데 특히 철도경찰과 이북출신이 많았다. 셋째는 응원경찰의 지원을 자주 받았는데 1948년 7월의 경우 제주에서 활동한 경찰력의 75%가 응원경찰로 구성되어 있었다.
③ 경비대 9연대 창설
제주도가 도로 승격됨에 따라 1946년 11월 16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조선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되었고 초대 연대장에는 장창국(張昌國) 부위가 발령되었다. 9연대의 발족도 도제 실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1946년 조선경비대를 발족시킨 미군정은 각 도별로 1개 연대씩을 창설한다는 ‘뱀부 계획(Bamboo plan)’에 의거해 각 지역별로 향토연대를 조직해 갔다. 뱀부 계획이란 ‘일정한 주둔지를 기준으로 하여 고안된 경찰예비대로서 필요한 병력을 그 지역의 지원자로 충원하는 방식’인데, 이미 미군이 필리핀에서 시도한 바 있었다. 이 계획에 의해 1946년 1～4월 사이에 8개 도에 각각 1개 연대씩 조직한 데 이어 제주도에는 도 승격 이후 전국에서 가장 늦게 향토연대인 제9연대를 창설하게 된 것이었다.
8 직후 광복군을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지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속속 귀향한 뒤 군사경력과 연고를 중심으로 사조직 성격의 군사단체를 형성해 갔다. 이런 사설단체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1945년 11월 군정청에 등록된 군사단체의 수는 무려 3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난립상을 보였다. 미군정은 이를 정비하기 위해 1945년 11월 군정법령 제28호를 공포, 군대조직을 통괄할 국방사령부와 군무국을 설치하고, 사설군사단체와 치안단체를 불법화하였다.
미군정은 당면한 언어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광복군‧일본군‧만주군 출신을 같은 비율로 입교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광복군 출신 중 주류파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일본군과 만주군이 대거 입교했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임관자 110명의 출신을 보면 일본군 출신이 87명, 만주군 출신이 21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광복군 출신은 2명에 불과했다. 결국 군 조직도 경찰과 비슷하게 일본군 경력자가 주로 기용되었다.
1946년 1월 15일에는 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 지역별로 향토연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제주의 9연대는 다른 지역의 8개 연대가 창설된 지 6개월 뒤에 후발부대로 출범한 탓인지 인적 구성에서 본토와는 다른 형태를 밟았다. 즉 다른 지역의 향토연대는 기간요원까지도 현지 지원자로 구성한 반면에, 제주의 9연대는 광주 4연대로부터 기간요원 54명을 지원 받아 부대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국방부에서 나온 자료는 “(이들) 기간병들이 불량성, 아니면 사고뭉치 또는 좌익 불순분자들이라 애로가 많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9연대가 본부로 사용한 곳은 일제시대 해군항공대가 있었던 모슬포 ‘오무라(大村)병사’였다. 제주도 최초의 비행장으로 건설된 이곳은 1937년 중‧일 전쟁 때 도양 폭격의 기지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일본군 병영을 막사로 삼은 제9연대는 이듬해인 1947년 3월부터 제주도내 청년들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벌였다. 3월 25일 제주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선보이는 등 섬을 일주하면서 읍면 소재지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9연대는 이런 모병활동을 거쳐 1947년 한 해 동안 모두 8차례에 걸쳐 많게는 80명, 적게는 40명 단위로 청년들을 입대시켰다. 이들 병사들은 입대 기수 별로 ‘1기생’에서 ‘8기생’으로 불렀다. 1948년 1월에 와서야 9연대의 병력이 비로소 4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에 제주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병 모집활동을 벌여 ‘4’직전에는 800명에 달하였다.
9연대의 초기 모병활동은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보급이 시원치 않아 때로는 수제비로 끼니를 때울 정도였으며 장비도 경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무렵 “경비대는 경찰의 보조기관이며, 정식 군대가 아니다. 정식 군대는 추후 모집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젊은 층 사이에는 ‘경비대는 미국의 용병’이란 주장도 나돌았다.
초대 연대장으로 발령 받은 장창국은 부임 전에 서울에서 미국인 경비대사령관과 육사 교장 방에 인사차 들렀더니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강하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제주에 내려와 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환영연에 참석했다가 젊은 사람으로부터 “경비대가 미국의 용병이지 무슨 군인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직감적으로 과연 좌익세가 세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만 해도 전국적으로 경비대 모병심사를 할 때 사상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초창기 ‘불편부당’을 내세워 비이념화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경비대 침투를 막기 위해 신원 보증제를 도입하자는 한국인 고문의 조언도 무시하였다. 이런 결과 조선공산당에서 후원한 국군준비대 대원들이 대거 경비대에 침투하게 되었고, 공산당 후신인 남조선노동당은 군사부를 두어 이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무장유격대의 자료에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서도 9연대 1차 모병 때 모슬포 출신 4명을 프락치로 입대시켰는데, 이중 2명이 이탈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일은 9연대에서 모병 광고를 하면서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님’을 강조한 점이다. 제주신보 1947년 4월 22일자부터 여러 차례 게재된, ‘청년에게 고함!’으로 시작된 모병광고는 제9연대장 장창국 소령의 명의로 실려 있는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국방경비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동포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순국하려는 피끓는 젊은이들의 애국군사기관이다. 우리들은 모국(某國)의 주구도 아니다. 일개 정당의 이용기관도 아니다. 다만 안으로는 자주독립을 추진시키고 밖으로는 국방의 중책을 완수하려는 국가의 간성이다.
이런 광고문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미군정의 좌우합작정책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소련 지향의 정부 수립을 막는다는 방침 아래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정책은 바로 미군정 스스로 극좌주의나 극우주의를 배제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9연대의 ‘좌도 우도 아니다’란 선언은 그 당시의 이런 정치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라.정치‧사회경제 동향
1)정치 동향
① 신탁통치 논쟁
1946년 한국의 정치사는 ‘반탁과 찬탁을 둘러싼 정치논쟁과 격렬한 좌우의 대립’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몰고 온 신탁통치안은 국내 정치세력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최초로 명백하게 표출한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정치사에 가장 특기할 만한 정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독립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약속된 것은 1943년 11월 미‧영‧중 수뇌가 참석한 카이로(Cairo) 회담에서였다. 이 결의는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국제회의 공식문서 속에서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밝힌 카이로 선언에는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란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즉각 독립이 아니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를 의미하였다. 종전 직후 남‧북한에서 군정을 실시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 등 3개국 외상이 모여 한국의 신탁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한 회담이 바로 모스크바 3상회의였다.
이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확정됐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기 위하여 한국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이 한국임시정부와 협의하면서 미‧영‧중‧소의 4대국이 5개년간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를 할 것 등으로 대별된다. 그리고 이 방안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 한국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도록 하였다. 이 모스크바 협정은 자국의 이익을 바탕으로 한 미‧소 양국의 타협안이라는 지적도 나오는데, 즉 ‘한국임시정부의 참여’란 원칙에는 당시 우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 내 좌파정당과 사회단체를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참여시키겠다는 소련의 의도가 담겨 있었는가 하면, ‘미‧영‧중‧소 4개국 참여’란 원칙은 영국과 중국 등 친미적 국가를 신탁통치 주도국가에 포함시킴으로써 소련에 비해 수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내포돼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신탁통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알려졌을 때, 대다수의 국민들은 ‘신탁통치’란 말을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다름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단지 한국을 지배하는 나라가 종래의 1개국이 아니라 4개국으로 늘어난다는 인식 아래 모욕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김구 중심의 임정 세력은 즉각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력하게 반탁시위를 주도해 갔다. 이승만(李承晩)과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으로 약칭) 세력의 반탁운동은 처음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것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그 강도를 높여 나갔다.
이에 반해서 좌파세력들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처음엔 신탁통치에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다가 1946년 1월 2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는 정보 부족 때문에 반탁의 태도를 취한 것은 ‘과오’였다고 표현하면서 3상회의 지지로 선회하였다. 인공은 3상 결정이 해방과 독립을 보장하는 진보적 결정이며 국내 사정에 비추어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하였다. 곧이어 조선공산당에서도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찬탁, 반탁운동에도 불구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준비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에 대비해서 우파세력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판단, 1946년 2월 14일 하지 사령관의 자문기구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으로 약칭)을 발족시켰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에 참여할 정당‧단체의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 끝에 제1차 미‧소 공위가 실패한 후에는 온건 좌우파를 중심으로한 좌우합작위원회, 그리고 이어 과도입법의원 설치를 추진하게 된다.
이에 맞서 좌파진영에서는 1946년 2월 15일 인공 중앙위원회를 계승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으로 약칭)을 결성하였다. 이 민전은 일종의 정당이라기보다는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비롯한 좌파정당과 노동단체, 농민단체, 청년단체, 부녀단체, 문화단체 등을 총망라한 좌파세력의 통일전선이었다. 공동의장으로는 여운형‧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 등이 추대되었다. 전자의 민주의원이 중앙무대 중심의 조직이라면, 후자인 민전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 조직된 전국단위의 단체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이런 중앙의 흐름과는 다르게 표출되었다. 1946년 1월 초순 제주읍에서 대대적인 신탁반대 궐기대회를 시발로 각 면 단위로 반탁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를 건준과 인민위 조직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전 조직도 남한 각 지방에서는 1946년 상반기에 거의 편성되었으나, 제주도에서는 좌파세력이 강했음에도 1947년 2월에 이르러 비로소 결성되었다. 제주도 좌파세력은 얼마 후 상부의 지시를 받고 찬탁운동에 동조,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 입장을 밝혔으나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하였다.
② 좌파 정당‧단체
8 직후 제주에서 최초로 결성된 정당조직은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으로 약칭) 전남도당 제주도(島)위원회였다. 1945년 10월 초 제주읍 한 민가에서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던 20여 명이 참석, 결성했다는 것이다. 당원 가입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1946년 말까지 섬 전체적으로 당원 수가 100명 선을 넘지 않았다.
조공 제주도위원회는 간판을 내걸지도 않았고, 특별히 조공의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중적인 인민위원회 활동에 주력했고, 청년동맹 등의 외곽조직을 통해 대중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좌파정당인 조공 제주도위원회는 1946년 11월 23일 중앙에서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등 3개 좌파 정당의 통합으로 남조선노동당(이하 ‘남로당’으로 약칭)이 결성되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박헌영‧여운형‧백남운(白南雲)이 주도하던 조공‧인민당‧신민당 등 좌파정당은 전통과 이념, 혁명 추진세력의 설정 등에서 각기 독자성을 띠고 그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당면한 과제로서 신탁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3상 협정의 지지와 미‧소 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일제 잔재의 청산과 토지개혁 등 중요한 정책과 노선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다. 1946년 2월에는 통일전선체 민전을 결성, 제1차 미‧소 공위에 공동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미‧소 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간 다음부터 미군정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조공 간부들을 검거하였고, 그 해 9월 6일 해방일보 등 좌익계 신문들을 폐간하였다. 9월 7일에는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조공 등에 공세를 펴는 한편 온건 좌파성향의 여운형과 온건 우파의 김규식을 끌어들여 좌‧우 합작운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변화에 따라 조공 등의 좌파세력은 자신들의 존립과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합법적인 대중정당의 필요성을 절감, 3당을 합당해 남로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남로당은 미군정청에 합법정당으로 등록되었다. 남로당의 결성식에는 미군정 간부와 CIC 관계자들도 참석하기도 하였다. 위원장은 인공의 지도자 허헌, 부위원장으로는 박헌영이 선출되었지만, 조직의 실권은 당시 체포령을 피해 해주에 있었던 박헌영이 쥐고 있었다.
제주의 경우는 당시 조공만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명칭의 변화과정만 거쳤다. 조공 제주도위원회 임원들이 1946년 12월 조천 김유환(金瑬煥) 집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남로당 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은 일제시대 사회주의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조천의 안세훈(安世勳)이 맡았다. 초기 주요 활동가로는 김유환, 김은환(金誾煥), 문도배(文道培), 현호경(玄好景), 조몽구(趙夢九), 오대진(吳大進), 김한정(金漢貞), 이신호(李辛祜), 이운방(李運芳), 김용해(金容海), 김정노(金正魯), 김택수(金澤銖), 문재진(文在珍), 부병훈(夫秉勳), 송태삼(宋泰三), 이도백(李道伯) 등을 꼽을 수 있다.
남로당은 원래 대중정당을 표방하고 나섰기 때문에 초기부터 활발하게 당원 배가운동을 전개하였다. 제주읍내 중심가인 칠성통에 남로당 간판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3절 기념집회를 배후에서 주도하게 되는데 이 무렵에는 전도의 당원수가 3,0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에 앞서 좌파 외곽조직 정비작업을 함께 추진하였다. 본토에서 이미 조직이 완료된 민전, 민청, 부녀동맹 등이 그때까지도 제주도에는 미조직 상태였는데, 이들 조직도 1947년 1～2월 사이에 결성되었다.
제주도 민전 결성식은 1947년 2월 23일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일구락부에서 있었다. 중앙의 민전에 비해 1년 늦게 조직된 것이다. 이것은 제주도에서는 우파세력이 미약한 반면 좌파조직은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되어 있었고, 그때까지도 인민위원회의 대중적인 영향이 온존했기 때문이다.
제주 민전 의장단으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안세훈, 승려인 이일선(李一鮮), 제주중 교장 현경호(玄景昊) 등 3명이 추대되었다. 또 부의장으로는 김택수‧김용해‧김상훈(金相勳)‧오창흔(吳昶昕) 등 4명이 선출되었다. 이날 제주 민전 결성식에서 명예의장으로 스탈린‧박헌영‧김일성(金日成)‧허헌‧김원봉(金元鳳)‧유영준(劉英俊)이 추대되었다. 결성식에 박경훈 지사가 참석, 축사를 하였다. 또 경찰고문관 패트릿지와 강인수(姜仁秀) 제주감찰청장도 참석, 질서문란을 방지하기 위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한편 좌파 청년단체는 초기에는 청년동맹(제주도 위원장 文在珍)으로 결성되어 주로 건준 및 인민위원회 산하의 치안대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1월 12일 조선민주청년동맹(이하 ‘민청’으로 약칭) 제주도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위원장으로는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했던 김택수가 선출되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민청 조직도 중앙에 비해 9개월 가량 늦게 결성되었다.
민청 제주도위원회는 읍‧면‧리 단위까지 편성될 정도로 광범위한 조직체를 갖게 되었다. 당시 민청 면 단위 결성대회 보도기사를 보면 지서주임 등이 참석, 축사를 했다는 내용도 있다.
미군정은 1947년 4월 행정명령 제1호로 우파 청년단체인 대한민청을, 5월에는 행정명령 제2호로 좌파 청년단체인 조선민청을 각각 테러단체로 규정,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중앙에서는 민청 조직을 기반으로 그 해 6월 6일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이하 ‘민애청’으로 약칭)으로 재편되었다. 제주도 민청도 6개월만에 해산하여 7월경 민애청 제주도위원회(위원장 康大錫)로 바꾸게 되는데, 명칭만 변경됐을 뿐 조직상 변화는 없었다. 이 민애청 조직이 4 무장봉기 때 자위대와 유격대의 핵심근간을 이루게 된다.
민청과 더불어 읍‧면‧리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조직을 갖게 되는 제주도부녀동맹도 1947년 1월 15일 결성되었다. 위원장에 김이환(金二煥), 부위원장에 고인선(高仁善)‧강어영(康御榮)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런 조직정비를 끝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중단된 미‧소 공위 재개를 촉구하는 행사를 3절 기념대회와 결부시켜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들어간다.
③ 우파 정당‧단체
제주도 우파진영에서는 8 직후 홍순녕(洪淳寧)을 중심으로 건준 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점차 좌파세력에 밀리어 인민위원회 활동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다 이승만과 김구의 귀국과 반탁운동을 계기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좌파세력에 밀렸던 우파진영은 반탁운동을 통하여 다수의 대중을 어느 정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1945년 12월 26일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하 ‘독촉’으로 약칭) 제주도지부가 발족되었다. 위원장에는 박우상(朴雨相)이 맡았다. 이 무렵 우파진영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박명효(朴明效), 강지수(康芝洙), 홍순용(洪淳容), 홍순녕, 김근시(金根蓍), 박종훈(朴鍾壎), 김충희(金忠熙), 김희수(金希洙), 황순하(黃舜河), 문재숙(文在淑), 박치순(朴致順) 등이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중앙의 우파진영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미묘하게 세 갈래의 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하나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의 움직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반탁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이승만과 김규식의 중간 위치에 끼인 김구의 노선이었다.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독촉 발족으로 손을 맞잡았던 이승만과 김구는 이 무렵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46년 7월 14일 김구가 제주를 방문, 현지의 우파진영을 고무시켰다. 김구의 제주 방문은 그가 당수로 있던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으로 약칭) 조직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미 한독당 제주도당부가 결성되어 있었지만 그 당세가 미미하였다. 미 군용기 편으로 제주에 도착한 김구는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시국강연을 통해 “우리 민족은 대동 단결하여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데 매진하자”고 역설했다. 이날 한독당 제주도당부 개편대회도 열렸는데, 새로운 위원장에는 홍순용이 선출됐다.
이 같은 우파진영의 세력 확장에도 불구하고 1947년 초까지 좌파세력에 밀렸다. 우파진영은 지방으로 갈수록 더욱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군 보고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1947년 3사건 직후에 ‘제주도의 우익정당’이란 제목으로 제출된 미 CIC의 보고내용이다.
3월 21일 방첩대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 면에서도 결핍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두 당은 섬 전체적으로 약 1,000명 가량의 당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우익 정당들은 좌익계의 강한 반발에 부닥쳐 정치적 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한편 우파청년단체의 결성 역사를 보면 중앙무대에서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 제주에서는 보다 단조로운 양태를 띠고 있다. 제주도의 우파청년단체가 태동한 시점은 정국이 찬탁과 반탁 논쟁에 휩싸여 전국적으로 우파청년단체의 조직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1946년 3월에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회(위원장 김충희)가 처음으로 발족되었으며 1947년 2월에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가 창립되었다. 이들 두 단체가 1947년 10월 대동청년단(이하 ‘대청’으로 약칭)으로 합쳐지는데, 대청 단원들은 ‘4’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압대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우파청년단체 결성 당시 지방에는 이미 건준 및 인민위원회 산하 청년단체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단원을 포섭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광복청년회와 대동청년단 단장을 계속 맡아 제주도 우파청년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김인선은 “이들 단체가 태동할 때에는 이념 중심보다 사람(인물) 중심으로 결성된 면이 없지 않다”고 회고하였다.
이밖에 1947년 11월 서북청년회(이하 ‘서청’으로 약칭) 제주도단부(위원장 張東春), 그 해 12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이하 ‘족청’으로 약칭) 제주도단부(단장 白璨錫)가 결성되었다. 제주도 우파진영은 1947년 3사건 이후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일면서 좌익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더욱 활기를 띠고 세력 확장에 나섰다. 그럼에도 당시 국내 우파정당 핵심의 하나인 한민당이 제주도에는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2)사회경제 동향
20세기 초반에 일제의 식민경제체제가 들어오면서 제주도의 자연경제는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농민들은 일본으로의 출가노동을 택해 일본 공업 노동자로 흡수되었다. 그런데 종전이 되면서 아무런 대비책이 없이 다시 종래의 자연경제 체제로 돌아오게 됐다.
8 직후 제주도는 귀환자들의 심각한 실직난, 일본 노동시장에서 보내오던 송금이 끊기고 대일 교역의 불법화, 그리고 생필품의 부족현상까지 겹치면서 매우 곤궁하였다. 여기에다 1946년에 들어서면서 불어닥친 콜레라의 만연과 극심한 보리농사 흉년까지 겹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콜레라는 1946년 봄에 남한 각 지방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 해 6월에 이르러 제주도에서도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생겨났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를 콜레라 전염의 새로운 지역으로 선포하고 “6일간의 검역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제주도에 들어갈 수 없다”며 연륙 교통을 통제했다. 여름에 들어서면서 콜레라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미군 보고서는 콜레라 발생 상황을 계속 기록하다가 1946년 8월 29일자를 마지막으로 그 이후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 8월 말 상황인 마지막 기록에는 전국 사망자 7,193명, 제주도 사망자 369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제주도의 새로운 환자가 424명이 발생됐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콜레라에 의한 희생자 수는 369명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 인구의 1%에 해당하는 제주도로서는 타도에 비해 콜레라의 피해가 심한 편이었다. 콜레라를 예방한다고 마을과 마을 사이의 왕래를 통제하기도 해서 민심이 흉흉하였다.
한편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던 그 해에 제주도는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게 되었다. 제주의 토질은 척박해서 논이 거의 없고, 보리와 조‧고구마 등 밭작물 농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들 밭작물 농사가 대흉작이었다. 특히 보리 농사가 심했는데, 1944년 생산량이 268,133석이던 것이 1946년에는 그 31%선인 83,785석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마‧조 등 여타 잡곡류의 경우 1943년 생산량이 387,181석이었는데, 46년에는 그 61%인 236,641석에 머물렀다.
이쯤 되자 제주도의 식량난은 심각했다. 귀환인구의 증가로 식량수요는 늘었으나 생산량은 절대 부족했다. 칡뿌리와 해산물 등을 채취해 겨우 목숨을 연명해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톳과 보릿겨 등을 섞어 만든 이른바 ‘톳밥’등이 유행하였다. 돼지 사료로 활용되던 전분박이 식용으로 나돌았다. 뒤늦게 다른 지방에서 곡물이 반입됐으나 그래도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민심을 자극시킨 것이 난조를 보인 미군정의 곡물정책이었다.
미군정은 1945년 10월 5일 일반고시 제1호 ‘미곡의 자유시장’을 통하여 일제시대의 미곡공급 배급제를 폐지하고 미곡의 자유판매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곧 혼란을 가져왔다. 몇몇 지주와 관리들의 매점매석으로 유례 없는 쌀값 폭등현상을 불러왔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군정청 법령 제24호 ‘미곡수집령’을 공포, 일제가 행하던 미곡수집체제, 즉 쌀 공출제도를 부활시켰다. 이에 대해 농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좌파진영에서도 이를 정치 쟁점화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이에 미곡수집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규정을 만들어 단속을 강화했다. 러치 군정장관이 1947년 3월 기자회견을 통해 미곡수집에 불응한 이유로 구금된 자의 총 수가 전국적으로 8,631명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듯이 군정당국과 농민 사이에 마찰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전국적으로 곡물수집 실적이 가장 부진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1946년 추곡 수매량은 전국적으로 4,358,000석이었으며, 제주도에는 5,000석이 배정되었다. 그런데 1947년 1월의 미군 보고서를 보면 그때까지 전국적으로 69.5%가 수집됐으나, 제주도의 수집 실적은 1%에 불과했다. 또 미군 보고서는 2월 15일까지의 수집률은 전국 78%, 제주 22%, 2월 22일까지는 전국 81%, 제주 44%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제주도의 추곡 수매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그리고 47년 여름 하곡수집을 할 때에는 수집 공무원과 마을 청년들의 충돌사고도 빚어진다.
한편 8 이후 제주도의 뜨거웠던 교육열기도 두드러진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마다 주민 자치적으로 국민학교 설립운동이 전개됐으며, 면 단위별로는 중등학교 세우기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해서 8 이후 1947년까지 2년 사이 신설된 학교는 초등 44개교, 중등 10개교에 이르렀다. 학생수도 초등의 경우 20,000명에서 38,000명으로, 중등은 300명에서 3,600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다.
1946년부터는 진보적인 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제주농업학교와 오현중학교에서 일제 잔재 교육과 파쇼 교육에 반대한다는 이유를 내세운 동맹휴학운동이 교내에서 일어났다. 1947년에 접어들면서 학생운동이 교내를 벗어난 사회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그 첫 번째의 시도가 양과자 반대시위였으며, 두 번째의 시도가 3절 시위였다.
1947년 2월 10일 제주 시내 중‧고등학생들이 연합으로 군정청이 자리 잡았던 관덕정 앞 광장에서 양과자 반대시위를 벌였다. 시위 학생 수에 대해 미군 보고서는 ‘300～400명’으로, 제주신보는 ‘1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군정당국은 이를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미시위로 규정했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는 “학생들이 제주읍에서 이 지역의 군정중대에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대항해 시위를 시작했다. 군정중대는 시위를 해산시키고 학생들을 읍내 밖으로 쫓아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47년 초에 양과자 수입 반대문제는 전국적인 이슈였다. 이 거부운동에는 비단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진영에서도 참여하였다. 독촉 선전부는 그 해 1월 8일 드롭스 등 양과자 수입액만도 1억 8천만 원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양과자 먹지말고 국산장려운동을 펴자”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제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양과자 반대시위는 반미운동의 초보적인 형태로 나타났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곧이어 3절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1947년 초에 제주에서 전국적인 파문을 일으킨 사건 가운데 모리배 문제가 있었다. 그 무렵 제주에서는 밀무역이 성행했다. 일본에 있던 재산을 반입하거나 생필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어선들이 현해탄을 넘나들었지만, 경찰에서는 이를 밀수 행위로 간주, 단속을 벌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모리배들과 손을 잡고 이런 사례들을 적발하면 법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뒷거래로 잇속을 채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런 모리행위에 군정 관리와 경찰 고위간부까지 가담하면서 사회문제가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감찰청장 파면까지 몰고 온 ‘복시환(福市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47년 1월 11일 서귀포 법환리 출신 재일동포들이 고향마을에 전기를 가설하기 위해 기증한 자재를 싣고 오던 복시환이란 선박이 경찰당국에 밀수선으로 적발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처리하는데 모리배들이 끼어 들고, 그 배후에 경찰 고위간부와 미군정 장교까지 연루됐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지방언론에서 심층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중앙언론에 ‘모리 천하 제주’란 제목 아래 대서특필되면서 전국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중앙조사단이 제주에 내려와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사건에 연루된 신우균(申宇均) 제주감찰청장이 2월 20일 직위해제되고 3월 24일 경무부 사문위원회에서 파면결정이 내려졌다. 이런 사건으로 후임 제주감찰청장에는 전남 출신 강인수가 발령되어 3사건을 맞게 된다.
당시 제주도민사회에서는 ‘모리배’란 단어가 유행했다. 그 말 속에는 미군정 관리와 경찰을 불신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겨 있었다.
2.3사건과 무장봉기의 전조
가.3사건과 총파업
1)3사건
1947년 3월 1일은 제주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큼 역사흐름의 한 획을 그은 날이었다. 제28주년 3절 기념식을 맞아 제주도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빚어진 이 날의 사건은 주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 시작되었고 군정당국은 이에 맞서 응원경찰과 서청 등 우파 청년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전개함으로써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 대립국면으로 돌입했다. 결국 3절 발포사건은 ‘4으로 가는 도화선’, 곧 기점(起點)이 되고 말았다.
① 3 기념준비위 결성
1947년에 들어서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이미 어려워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미 한국문제에서 세계문제, 남‧북한 문제에서 동서진영의 문제로 변전되어 가는 냉전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으로 좌파세력은 더욱 쫓기는 입장이 되었다. 특히 좌파세력은 1946년 10월 ‘대구사건’을 계기로 2개월 동안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 미군정을 뒤흔들어 놓았지만 상대적으로 막대한 좌파조직이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무렵에 결성된 남로당이 합법적인 대중정당을 표방하게 된 것도 이런 까닭에서 비롯되었다.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창당된 뒤 조직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중적 투쟁의 핵심과제를 미‧소 공위의 재개 촉구에 두고 이를 추진해 갔다. 바로 이 시기에 제28주년 3절 기념식이 다가오자 남로당 중앙당은 3 기념행사를 무기휴회에 들어간 미‧소 공위의 재개 투쟁과 결부시켜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열 것을 각 지방 당에 지시했다.
이 해의 3 기념행사는 비단 남로당만 준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좌파 정당‧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우파진영에서도 준비위원회를 결성, 대중적 집회를 모색해 갔다. 이로 인하여 서울‧인천 등 여러 지역에서는 3 기념행사의 좌우 공동주최 방안이 모색되기도 했으나 결렬되고 좌파 따로, 우파 따로 기념식을 준비해 가는 형국이 되었다. 좌파진영에서는 좌파세력의 통일전선인 민전이 3절 기념행사 준비를 주도했다. 이 같은 전국적인 동원계획에 당황한 군정당국은 3절 기념행사는 가급적 제한하되 특히 가두 행렬과 데모 행진에 대해서는 엄금한다는 지침을 전국 미군 군정부대와 경찰에 시달하였다. 그리고 3절이 다가오자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한편 제주도 좌파진영에서는 이런 전국 흐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제주도 좌파세력은 온건성을 유지해 왔으며 미군정과의 전면적인 대립국면도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폈듯이 1947년 초부터 민청‧부녀동맹‧민전 등의 결성을 통해 조직 확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7년 2월 17일 ‘3 투쟁기념행사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제주신보에는 ‘3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결성’이란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28주년을 맞이하는 3월 1일 혁명운동기념일을 전도적으로 의의깊게 성대히 거행하기 위하여 3 투쟁기념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7일 오후 2시에 관공서를 비롯한 사회단체, 교육계, 유교, 학교단체 등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인사 다수가 읍내 김두훈(金斗壎)씨 댁에 회집하여 안세훈씨의 사회로 제반 토의가 있은 다음, 3 기념행사의 모든 문제를 준비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고 위원장에 안세훈씨, 부위원장에 현경호씨, 오창흔씨 양씨를 추대함과 동시에 총무부, 재정부, 선전동원부 등 부서를 설치하고 위원 28명을 선정하여 5시 반경에 폐회하였다.
제주도경찰국에서 펴낸 제주경찰사에도 2월 17일 읍내 관공서 단체 대표 및 지방유지로 3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고 기술하고 선임된 위원 27명의 신원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안세훈(53세)
△부위원장 현경호(54세) 오창흔(35세)
△총무부 김승문(金升文세) 박태훈(朴台勳) 김영홍(金永鴻세) 양을(梁乙세) 고창무(高菖武세)
△재무부 김두훈(金斗壎세) 조응만(趙應萬세) 김태경(金泰京세) 김차봉(金次鳳세)
△재정부 홍종언(洪宗彦세)
△동원‧선전부 이일선(李一鮮세) 김용해(金容海세) 김정로(金正魯세) 강어영(康御榮세) 김문규(金文奎세) 김태현(金泰炫세) 고칠종(高七鍾세) 임창운(任昌運세) 김덕훈(金德訓세) 김임생(金壬生세) 고원경(高元慶세) 이정숙(李貞淑세) 양군옥(梁君玉세) 김시봉(金時鋒세)
이 준비위원회에는 우익인사와 관공리뿐만 아니라 경찰 간부와 검찰 관계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원으로 위촉된 김차봉 경감은 당시 제주감찰청 부청장이었고, 김승문 경위는 제1구경찰서 수사계장이었다. 또 양을은 제주검찰청 검찰관대리(검사시보)였다. 제주경찰사는 이에 대해 “위원 중 일부는 본인의 의사를 듣지 않고 소위 전형위원이 임의대로 결정하여 추천 당한 자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 3 기념행사를 앞두고 조직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배후에서 조직적이고도 세밀하게 행사 준비에 대한 지침을 산하단체와 각 읍‧면, 직장 세포들에게 시달하였다. 제주4연구소에서 발굴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3운동 기념투쟁의 방침’에 나온 표어를 보면, 당면한 미‧소 공위 재개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등의 정치문제뿐만 아니라 경제문제, 사회문제, 지역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각 읍‧면에서는 인위, 민청, 부동(婦同) 기타 각종 단체 및 직장 대표자로 3기념 준비위원회를 즉시 조직할 것. 준비위원회에는 동원부, 선전선동부, 준비부를 둘 것. 각 부락 및 각 직장에서도 이에 준하여 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 단 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 대표로 조직할 것.
2. 24일까지 3운동의 원인, 경과, 의의, 결과를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의 방향에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 각 부락 및 직장에서의 선전선동사업 및 동원 예상을 반드시 각 읍‧면 준비위원회에 보고케 하고 즉시 각 준비위원회에서는 도준비위원회에 종합보고를 할 것.
3. 25일부터 28일까지 각 읍‧부락 및 직장대회를 소집하여 3 시위운동에 전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반(班) 및 직장 단위로 동원 조직하여 지휘자 및 자위대(2, 3인)를 선정하여 부락 준비위원회에 보고할 것.
4. 당일에 지휘자 및 자위대는 반 및 직장별로 동원시켜 시위행렬로 부락 준비위원회가 지정한 장소와 시간에 집합할 것.
5. 각 읍‧면 준비위원회가 지정한 시간, 장소에 각 부락 준비위원회는 동원된 전원을 시위적 행렬로 집합할 것. 단체기 및 표기기(標記旗) 특히 인위기(人委旗)를 들 것. (이하 생략)
12. 표어 (일반)
민주주의적 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만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일제적 통치기구를 분쇄하라!
단일 누진제 즉시 실천!
입법의원을 타도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 파쇼분자의 근멸!
삼상회의 결정의 즉시 실천!
인민 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신앙의 절대 자유!
식량문제 해결은 인민의 손으로!
3절 기념 행사를 닷새 앞둔 2월 23일 민전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따라서 3 행사 주최는 다른 지방처럼 민전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 민전 도위원회 공동대표의 한사람인 안세훈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이자 3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을 겸하고 있었다. 안세훈을 비롯한 민전 의장단은 2월 25일 경찰고문관 패트릿지 대위를 방문, 집회허가를 신청했다.
한편 제주경찰당국은 2월 22일 3 기념행사와 관련, 시위는 절대 불허한다는 내용 등 4가지 사항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①각 관공서, 기타 각 단체의 기념행사는 각자의 직장에서 행할 것, ②가두행렬과 데모행진을 전적으로 금지함, ③기타 일반의 기념행사는 리‧동 또는 읍‧면 단위로 하고 타 리‧동, 읍‧면 주민의 참가를 금함, ④리‧동 또는 읍‧면 단위로 기념행사를 행할 시는 반드시 집회허가원을 당국에 제출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3 기념행사위원회에서는 지방에서는 면 단위로 기념식을 갖되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지역만은 제주북국민학교에 모여 연합으로 대대적인 기념식을 갖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제주북교 집회는 우여곡절 끝에 좌우익 합작으로 추진하게 됐다고 증언하는 우익인사도 있다.
2월 28일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이 3 기념행사위원회 대표 안세훈 등 여러 명을 미군정장관실로 초치, 3절 기념행사에 대한 협의가 있었다. 이 사실에 관해 제주경찰사에는 스타우트 소령은 강인수 감찰청장, 패트릿지 대위, 강동효(姜東孝) 제1구경찰서장이 배석한 가운데 시위행렬은 절대 금지하고 기념행사를 가지려면 읍내를 벗어난 서비행장에서 거행하라는 통첩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2월 23일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 씩 100명으로 편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왔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이 응원경찰대가 일주일 후 3절 발포사건을 유발한다.
섬으로 고립된 제주도에는 소요가 일어날 때마다 본토에서 군사가 급파되는 역사가 있었다. 봉건체제 해체기인 조선 말에 도합 여섯 차례의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중앙정부는 군사를 파견, 진압했다. 일제시대에도 1919년 조천 만세운동, 1931년 제주농업학교 동맹휴학사건, 1932년 해녀봉기사건 등 항일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전라도 경찰부 소속 무장경관들이 제주에 내려왔다. 본토 진압대의 제주 파견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태 발발 이후에 진압병력이 도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처음 시도된 1947년의 응원경찰 파견은 이런 관례를 깨고 사태 발발 이전에 보내졌다는 특이성이 있다.
이에 대해 경찰 자료에는 “군정당국은 중앙에 제주도의 불안한 상태를 보고하여 특별대책을 세워주도록 한 결과 1백여 명의 경찰응원대가 도착하였고 연이어 서북청년단이 입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찰업무를 담당했던 한 경찰관 출신은 당시 3절의 집회‧시위문제는 전국적인 상황이며, 제주경찰 자체에서 특별히 응원경찰을 요청한 사실이 없다면서 응원대의 파견 배경에 다른 주장을 했다. 그것은 “복시환 사건으로 해임된 신우균 감찰청장이 서울에 올라가 제주경찰을 불신하는 모략에서 비롯된 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② 3절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던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의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으로 추산됐다. 이날 10개 면에서도 별도의 기념식이 열렸는데 각 지방마다 수천 명씩 모였다. 경찰은 원래의 제주경찰 330명과 응원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보강하고 이 가운데 150명을 제주 읍내에 배치, 시골에서 올라오는 군중을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제주읍뿐만 아니라 애월면‧조천면 등 주변 주민들이 모여들었으며,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학생들은 이미 이날 오전 9시께 오현중학교에 집결, 한 차례 행사를 치른 다음이었다.
이 기념식에서 대회장인 안세훈은 “3 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어 각계의 대표들이 나와 연설을 했는데, 주로 3 정신을 계승 자주독립을 전취하자는 내용이었다. 또 삼상회의 절대지지,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를 촉구하는 구호도 나왔다. 제주경찰사에는 이 날의 행사에 대해 경찰병력을 읍내 요로에 배치하여 군중들에게 귀가할 것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 수만 군중이 집결하는 사태에 이르자 “경찰은 유혈진압을 피하고 주도자는 사후에 검거하기로 군정관과 협의, 북국민학교에서의 3절 기념행사 거행을 묵인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북국민학교 행사는 불법집회인가? 합법집회인가? 濟州警察史는 이에 대해 ‘무허가 집회’로 기록하고 있다. 또 미 6사단 정보참모부도 24군단에 제출한 정보보고 제1보에는 이 날 행사를 ‘허가받지 않은 집회’로 규정,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허가받은 집회로 밝혀졌다. 조병옥 경무부장이 남한에서 일어난 3 기념행사와 치안상황을 밝힌 담화에서 제주도 문제도 다루고 있는데, 집회 허가와 관련해서 “제주도는 2월 28일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치 않았던 바, 행렬까지 허가하라고 함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 취소하였는데, 1일 시민이 남산국민학교(북국민학교의 오기)에 모였으므로 집회만 허가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날 집회의 합법성은 3 행사 주도자 안세훈에 대한 재판 판결문에서도 입증됐다. 1947년 10월 6일 제주지방심리원(심판관 崔元淳)은 안세훈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3 기념식은 당시 제주감찰청장의 허가를 수(受)한 것으로 인정하고 무죄를 언도한다”고 판결했다.
이날 오후 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정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한 대열은 감찰청이 있는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졌다. 제주 읍내를 중심으로 서쪽 지역 주민은 서쪽 대열에, 동쪽 지역 주민들은 동쪽 대열에 합류하여 마을로 돌아가면서 시가행진을 하며 위세를 부린 것이었다.
오후 2시 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소란이 일어난 무렵에는 시위행렬이 관덕정 광장을 벗어난 시점이었다.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과 언론의 심층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당시 관덕정 광장에는 ‘S’자 형태의 행진으로 위세를 부리던 시위군중이 지나간 다음이어서 건물 옆쪽에 듬성듬성 100～200명의 관람군중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은 한 기마경관이 관덕정 옆에 자리잡았던 제1구경찰서로 가기 위해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됐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관람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군중들은 “저 놈 잡아라!”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당시 관덕정 앞에는 육지에서 내려온 응원경찰이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일제히 발포한 것이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망자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세‧제주북교 5년), 박재옥(朴才玉세‧여), 오문수(吳文壽세), 김태진(金泰珍세), 양무봉(梁戊鳳세), 송덕수(宋德洙세)로 밝혀졌다.
이 날의 발포는 위협 수준을 벗어난 것이었다. 희생자 가운데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이나, 도립병원으로 가는 골목 모퉁이에 쓰러져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 모두 등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여러 정황을 볼 때, 공포만 쏘아도 군중들이 흩어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됨에 따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먼저 과잉반응을 보인 응원경찰의 심리문제에 초점이 모아졌다.
이날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응원경찰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표출한 사건이었다. 당시 도립병원에는 그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한 응원경찰관이 입원해 있었는데 동료 2명이 경호 차 병원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그들 중 한명인 이문규(李文奎‧충남 공주경찰서 소속) 순경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도립병원 앞의 발포를 ‘비이성적(irreconcilable with rational thinking)’ 행위로 규정하면서 2건의 발포자들에 대한 심리분석을 다음과 같이 했다. 즉 “그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 폭도들에 의해 동료 경찰이 잔혹하게 당했던 사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대구 10월 사건’을 경험했던 자들로 과잉반응을 보일 수 있는 심리여건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날 발포사건 직후 제주감찰청 앞에서는 무장경관대와 시위대가 대치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시위대는 주로 학생들과 부녀동맹 소속의 부녀자들이었다. 이를 막아선 경찰은 기관총을 장착한 스리쿼터를 앞세운 50명 가량의 무장경찰로 집총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무장경찰은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 대위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대치하던 시위대는 제주신보 기자들의 설득으로 자진 해산했다. 이로 인한 쌍방의 인명피해는 없었다.
한편 3 기념 행사와 시위를 둘러싼 충돌은 비단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끼리 충돌하거나 경찰의 발포로 사망 16명, 부상 22명 등 모두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제주경찰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제주의 3사건은 경찰이 가해를 하고 민중이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에 민심수습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경찰당국은 민심 수습보다는 발포의 정당성 강조에 주력했다. 도립병원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무사려한 행위’로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핵심적인 사건인 관덕정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치안유지의 대국(大局)에 입각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앙의 경무부 측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는 해명에 나섰고, 일부 언론에서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또 강인수 제주감찰청장도 이와 유사한 성명서를 발표했다가 지방언론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았다. 즉 제주신보는 사설을 통해 “감찰청장의 성명에 의하면 발포 당시에 S자형으로 행진하던 시위대가 현장에 있던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 점은 본사 기자가 직접 목격하였기에 청장의 통찰이 정확하지 못한 게 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며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 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3 발포사건 직후에 사표를 제출한 박경훈 도지사도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발포사건의 동기에 대해서 처음에는 ‘경찰서의 습격’에 비중을 두었다가 3월 20일에 이르러 정보기록을 수정했다. 즉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에는 “제1구경찰서로 보고하기 위해 가던 한 기마경관이 우연히 그의 말에 달려든 한 어린이에게 경상을 입혔다. 그러자 이를 야유하던 200명 미만으로 추정되는 군중이 경찰서 쪽으로 그를 뒤따라갔다. 경비를 서고 있던 경찰은 군중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이 사건에 앞서 시위대들은 광장 주변에서 S자 모양으로 열을 지어 행진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 군정 책임자인 스타우트 소령도 “관덕정 앞 사건은 어린애를 친 기마순사에게 군중이 돌을 던지고 여세로 경찰서를 습격할 기세를 보임으로 발포하게 된 것이나 나중에 알아본 결과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시종일관 이 문제를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여 민심 수습보다는 강공책에 비중을 두었다.
경찰은 사건이 발생된 3월 1일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통금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였다. 이미 충청도 응원경찰 100명이 들어와 있었으나 비상경계령을 펴다보니 경찰력이 모자라 가까운 전남 경찰에 응원경찰 지원을 요청했다. 1일 저녁에 목포 경찰 100명이 제주를 향해 출발했다. 제주 경찰은 2일부터 3 행사 위원회 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했다. 2일 하룻동안 학생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곧이어 무조건 구타와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다 경찰 책임자의 발포 정당성에 대한 담화가 나오자 민심이 들끓었다.
본토에서 온 응원경찰에 의해 발포되었다는 점, 그리고 희생자들이 시위대가 아니라 단순한 관람군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좌파만이 아니라 우파진영 인사들도 우려의 빛을 나타냈다. 좌파세력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反警) 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삐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제주 민전은 각계가 참여하는 3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경찰 측에서는 이를 거부했다. 다만 3월 3일 관(官) 중심으로 조사단이 구성됐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런 좌파세력의 움직임을 배후에서 주도해 갔다. 그리고 3월 7일 각 읍‧면 위원회에 ‘3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란 장문의 지령서를 내려보냈다. 이 지령서의 주요 내용을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 지난 3월 1일 제주읍에서 일어난 발포살해사건에 대하여 제주도위원회 상무위원회는 제주읍위원회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그 연석회의에서 대정면의 건의문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투쟁방침을 결정하는 동시에 ‘당 투위’를 구성하고 이 투위가 전체적 3사건 대책 투쟁을 지도하기로 되었음.
- 투쟁방침으로는 ①3 투쟁방침의 연장으로서 당의 영웅적 대중투쟁을 위한 합법 전취 ②미제 및 반동 진영의 약체화에 대한 결정적 최후적 투쟁 ③제2혁명단계의 대중적 투쟁에 대한 완전한 정치적 사상적 무력적 준비.
- 조직활동은 도‧면위에서는 당내 투쟁조직으로서 ‘3사건 투쟁위원회’를, 당외 투쟁조직으로서 ‘3사건 대책위원회’를 합법적으로 읍‧면‧리‧구에 구성할 것.
- 파업단에서는 다음의 요구조건과 성명서 1통은 미 지방장관에게, 1통은 중앙장관에게, 1통은 각 대책위원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3월 10일 정오를 기하여 총파업에 들어갈 것.
- 요구조건은 ①발포책임자 강동효 및 발포한 경관을 살인죄로써 즉시 처형하라 ②경찰관계의 수뇌부는 즉시 책임 해임하라 ③피살당한 동포의 유가족의 생활을 전적으로 보장하며 피상자에게 충분한 치료비와 위로금을 즉시 지불하라 ④3사건에 관련되어 피검된 인사를 즉시 무조건 석방하라 ⑤경관의 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⑥경찰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이런 방침에 따라 3월 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金行伯) 집에 모여 ‘제주도 3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에 김용관(金龍寬), 부위원장에 이시형(李蓍珩)을 선출했다. 또 3월 9일에는 제주읍 일도리 김두훈(金斗壎) 집에서 사회인사 수십 명이 모여 ‘제주 3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장에 홍순용, 부위원장에 안세훈을 선출했다. 당시 안세훈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이었고, 홍순용은 대표적인 우익인사로, 한독당 제주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면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서에 나오는 ‘대정면당의 건의’는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당시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이렇게 밝혔다.
의외의 불상사건에 접한 도당본부는 그 첫 번째 대책으로서 유가족 원호의 모금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대정면당 역원회에서도 그 대책 강구를 위한 회의를 가졌었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보아 잠시라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손톱에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데 반하여 우리들은 백수공권이어서 그들 총검부대와의 직접적인 정면 충돌은 도저히 생각조차 못 해볼 일이었다. 그러므로 평화적인 항의의 의사표시의 수단으로써 ‘전도 총파업’을 전원일치 가결하고, 조직부 이승진을 연락원으로 도당본부에 파견하고 이것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이승진(李承晋)은 4 무장투쟁 때 유격대 총사령관을 맡게 되는 김달삼(金達三)의 본명이다. 이승진은 이때 22세(1925년 생)의 청년으로서, 대정중학원 교사이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고 있었다. 대정면당은 군정당국에 항의의 표시로 평화적이면서도 그 강도가 가장 높은 전도 총파업을 도당에 건의하기로 하고 이승진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2) 3 총파업과 군정당국의 대응
① 3 총파업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이 파업은 경찰의 3 발포와 그 대응에 항의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 파업은 앞에서 살폈듯이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배후에서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날 정오 제주도청에서 직원 간담회가 개최됐다. 이 간담회를 통해 3사건진상조사단에 진상보고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즉각 청원(廳員)대회를 소집했다. 오후 1시 박경훈 도지사와 김두현(金斗鉉) 총무국장 등을 비롯한 1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도청 청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제주도청 3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하지 중장과 스타우트 제주군정장관에게 보내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정하고 “이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제주도청 청원 140여 명은 사무를 중지한다”는 파업결의를 했다. 제주도청의 파업 성명서 요지는 다음과 같다.
과거 3운동은 조선민족이 다같이 조국을 찾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잔학무도한 탄압과 지도자층의 미약한 일제와의 타협적 태도와 당시 국제정세의 불리로 말미암아 허다한 희생자만을 내고 실패에 귀(歸)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거 3운동을 회상할 때 감격과 새로운 희망에서 해방 후 3운동을 민족독립 전취에로 옮길 단계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과거의 선배를 추모하기 위하여 제주읍의 기념행사는 3만 대중이 모인 가운데 엄숙한 식을 거행하고 평화와 질서 있는 행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포악한 경관의 불법발포로 인하여 6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중경상자를 내게 되었음은 역사적 시일(是日)을 모독하고 민족적 이념마저 상실한 탄압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평화군중에 대한 발포는 과거의 역사에 유례가 없으며 일제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포악이요, 해방된 조선에 있어서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우리는 여사한 현실을 일관할 때 허다한 모순당착이 내포하여 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30만 도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 냉정한 입장에서 고찰하고 선량한 인민과 더불어 그 진두에서 용감히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성명한다.
요구조건
①민주경찰 완전확립을 위하여 무장과 고문을 즉시 폐지할 것
②발포책임자 및 발포경관은 즉시 처벌할 것
③경찰수뇌부는 인책 사임할 것
④희생자 유가족 및 부상자에 대한 생활을 보장할 것
⑤3사건에 관련한 애국적 인사를 검속치 말 것
⑥일본경찰의 유업적 계승활동을 소탕할 것
10일에는 제주도청 이외에도 항무서, 측후소, 신한공사, 제주‧남일버스 등 운수업체, 제주농업중학교‧오현중‧제주중‧교원양성소의 교원과 학생, 제주동‧남‧북초등학교 교직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11일에는 북제주군청과 제주읍사무소, 우편국, 식량사업소, 전매서, 무선국, 식량영단, 금융조합, 고녀(高女), 남진운수 등이, 12일에는 세무서, 세관, 통역단, 식산은행, 남전, 신한공사 농장, 생필품조합, 이용사회 등으로 확대됐다. 관공서, 학교, 기업체 등 파업단체 대표들은 3월 11일 회동, 파업의 효과적인 실효를 거두기 위해 연합적인 전선을 펴기로 하고 ‘제주읍 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高禮龜)를 구성했다.
파업은 제주읍 뿐만 아니라 삽시간에 각 면으로 퍼졌다. 3월 13일 정오까지의 각 면별 파업상황은 다음과 같다.
△애월면：애월면사무소 애월중 하귀중 각 국민학교 우편국 금융조합
△한림면：한림면사무소 한림중 각 국민학교 금융조합 우편국 전분공장
△대정면：대정면사무소 대정중 어업조합 금융조합 우편국 전분공장 각 상점 가두는 철시
△안덕면：안덕면사무소 국민학교
△서귀면：남제주군청 서귀면사무소 금융조합 서귀중 우편국 각 국민학교 수력발전소
△남원면：남원면사무소 국민학교
△표선면：표선면사무소
△성산면：우편국
△구좌면：구좌면사무소 금융조합 우편국 각 국민학교
△조천면：조천면사무소 조천중 우편국 각 국민학교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밖에도 모슬포‧중문‧애월 지서 등지에서 제주출신 경찰관 중심으로 현직 경찰관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중문지서에서는 지서주임을 포함한 경찰관 6명이 3월 13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하여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로 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는 내용의 담화를 지서 앞 게시판에 부착하고 지서를 떠났다. 이런 직장 이탈사태로 나중에 경찰관 66명이 파면 처분된다.
독립신보는 제주도 파업사태에 “156개 단체 직원이 총파업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제주경찰사에는 그 당시의 자료를 인용,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 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숫자는 166개 기관‧단체에 41,211명이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직능별 파업실태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군‧읍‧면사무소 등 23개 기관 515명
△제주농업학교 등 중학교 13개교 교직원‧학생 3,999명
△제주북교 등 국민학교 92개교 35,861명
△제주우체국 등 우체국 8개소 136명
△제주여객 등 운수회사 7개 업체 121명
△식산은행 등 은행 8개소 36명
△남전 출장소 등 15개 단체 542명
그러나 이 기록에도 앞의 경찰관 파업 숫자는 빠져 있다. 또 일부 지역에서는 상점 등이 문을 닫아 파업분위기에 동조했는데, 이런 민간인들의 파업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이보다 더 많은 인원이 3 경찰 발포사건에 항의하는 총파업에 참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유족돕기 모금운동이 제주지역의 유일한 지방지인 제주신보사가 회사 차원의 모금 캠페인으로 전환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됐다. 제주신보는 3월 10일자 신문에 ‘3사건 희생자 유가족 조위금(弔慰金) 모집’이란 사고(社告)를 게재했다. 이 사고는 “그들 희생자는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는 글귀에서 풍겨주듯,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같은 모금 취지문은 경찰의 정당방위론과는 배치되는 내용이었다.
이 모금운동은 전도적으로 확산됐다. 각 직장에서, 학교에서, 시장에서 조위금이 모아졌다. 이 신문 3월 14일자에는 그 시점에서 “대정면민이 인민위원회에 기탁한 성금만도 3만 원을 돌파했다”고 보도, 대정인민위원회에서 그 지역 모금운동을 주도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때까지도 인민위원회가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금운동에는 우파계열 유지들도 참여했으며, 강인수 감찰청장과 일부 응원경찰도 성금을 기탁했다. 또 서울 제주도민단체인 ‘서울제우회’에서 50,000원을, 광주 제주도민단체인 ‘광주제우회’에서 23,025원을 보내왔다. 그 해 6월 모금운동이 마감할 때에는 기탁된 조위금이 317,118원에 이르렀다. 당시 중학생 월사금이 50원이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 모금액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② 군정당국의 대응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읍에서 일단의 좌익 3절 행사 참가자들을 공격하여 몇사람을 죽이기 전까지는 제주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여 일으킨 소요들은 제주도를 점령하고 있는 미군에 의하여 비교적 느슨하게 억제되어 있었다. 공격을 받은 섬 주민들은 경찰에 대하여 즉각적인 보복을 하였고, 1년 여에 걸친 유혈폭력이 시작되었다.”
이 글은 1949년 4월 1일 시점에서 제주도사태를 종합 분석한 주한미군사령부의 정보보고서에 나온다. 결론적으로 이 미군 보고서는 3사건을 ‘4사건의 도화선’으로 보고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3사건이 발생된 직후 미군정은 제주도상황을 중시했다. 재조선미육군사령부와 미군정청이 합동으로 제주사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3월 8일 제주에 파견했다. 이 조사단의 책임자는 카스티어(James A. Casteel) 대령이었다. 미군정시기에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에 현역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군 중앙조사단은 10일 오전 11시에는 스타우트 제주도 군정장관을 비롯한 제주도 조사단과 박경훈 도지사 등과 함께 관덕정 앞과 도립병원 앞 등 발포현장에서 목격자의 증언을 들으며 조사했다. 오후에는 제주도 군정장관실에 3기념 행사 관계자를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 미군 중앙조사단은 이런 와중에 파업사태가 발생하자 파업의 원인과 그 배후를 면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3월 12일 스타우트 소령과 제주신보 기자 사이에 일문일답 식으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그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문) 3사건 진상조사가 완료되었다 하는데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답) 조사단에서 조사가 완료되어 보고서를 제출하여 왔으나 내용을 읽어본 즉 조사에서 탈락된 점이 많으므로 보고서를 조사단에 반환하고 재조사를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조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전부 조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방금 서울 중앙청에서 카스티어 대좌가 3사건 진상조사차 내도하여 철저히 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문) 그러면 조사는 언제 완료되어 발표하겠는가?.
(답) 가급적 속히 발표하겠다.
(문) 3 불상사건에 있어서 십 수명의 사상자를 낸 책임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답) 조사가 완료되기 전에는 확답할 수 없다.
(문) 10일 양일에 각 관공서 및 사회 등은 총파업을 단행하여 각 요구조건을 군정당국에 제시하였다 하는데 그 요구조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파업할 원인이 안된다고 본다. 그리고 요구조건은 3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많다.
(문) 금반의 파업으로 인하여 본도의 행정, 교통, 통신공사 등 모든 것이 질식상태에 빠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가?.
(답) 파업을 하는 것은 결국 조선인에게 그 영향이 돌아가는 것이며 미군정엔 하등 영향이 없고 조선인 자신의 해가 되는 것이다.
(문) 조선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미군정인 만큼 이 질식상태를 완화하는 것이 군정의 의무라 보는데.
(답) 그것은 질문이 안된다. 감히 말하면 나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온 파업단에 대하여 파업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충고도 하였다. 그리고 파업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본다.
(문) 그러면 그 요구조건은 부정당하다고 보는가?.
(답) 진정서에 기입된 요구조건은 정확한 근거가 없다고 본다. 각 진정서를 보면 사실과 맞지 않는 점이 많고 그 근거는 전부 1개소의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 같다. 그리고 진정서는 대동소이하다. (중략)
(문) 도민은 카스티어 대좌의 진상조사에는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공명정대한 조사를 기대하고 있는데.
(답) 카 대좌는 현재 모든 사실을 종합 중이며 조사 완료 후 상관에 보고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당분간 알 수 없으나 그 조사는 신속히 하고 또 민주주의적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카 대좌와 나는 누가 나쁘고 좋다 등 시비를 말할 수는 없으나 여하간 죄인은 재판에 회부하여 처치할 것이고 피고는 증거와 증언 등을 진술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미군 중앙조사단의 현지 확인조사가 실시되면서 경찰 측에서 일부 잘못을 시인하는 변화조짐이 있었다. 강인수 감찰청장은 3월 11일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경관은 1구서 소속으로 충남에서 내도한 부대장이 당일 도립병원 앞에 배치시켰던 것인데, 무사려한 발포로써 중상자를 낸 사실은 어제 하지 사령부에서 진상조사차 내도한 카스티어 대좌가 조사하게 될 때에 비로소 나 역시 확연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는 대단히 미안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이 이런 변화조짐도 10일부터 시작된 총파업이 전도로 확산되면서 다시 강경입장으로 선회했다.
미군 조사단은 이런 일련의 흐름을 예민하게 관찰하면서도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했다. 카스티어 대령 팀은 3월 13일 제주를 떠나면서 아무런 발표문을 남기지 않았다. 또 조속히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겠다던 제주도 군정장관 스타우트 소령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3사건에 대한 미군 조사단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이들 조사팀의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미군 정보보고서에서 이들 조사단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1947년 3월 14일 기록된 미 6사단 정보보고서의 내용이다.
제주도에서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다. 상당수의 선박회사를 포함한 모든 운송기관의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다. 또 한국인이 소유한 공장뿐 아니라 군정이 감독하는 공장 등 모든 공장들도 파업에 들어갔다. 모든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도 파업중이다. 군정청의 한국인 직원 가운데 75%가 파업중이다. 파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요구가 다양하게 나오고 있지만, 파업의 근본 원인은 3월 1일 폭동 당시 경찰의 행동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 것 같다. 최근 남로당이 이러한 증오심을 주민 선동에 이용하고 있다. 현재까지 보고된 폭력 사태는 없다.
그 다음날인 3월 15일자에 작성된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6사단의 보고를 인용, “(제주) 총파업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3월 1일 폭동 당시 경찰의 행동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 것 같다. 이 증오심을 남로당이 선동에 이용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들 미군 보고서는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3 경찰 발포로 도민적인 반감이 고조되었다는 점이다. 미군 보고서는 이를 ‘증오심(hatred)’이란 극단적인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이런 도민감정을 남로당이 대중 선동,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군 정보보고서 중에는 매일 매일 보고하는 ‘일일정보보고’와 지난 일주일 동안 진행된 상황을 분석한 ‘주간정보요약’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3월 20일자에 작성된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는 제주도 총파업사태에 대한 종합분석의 글을 싣고 있다. 이 주간정보요약서에 눈길을 끄는 부분은 총파업에 좌익만이 아니라 우익 쪽에서도 동참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제주읍의 총파업은 지난 3월 1일 벌어진 불법시위와 폭동으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부상을 입은 데 대한 항의로 ‘좌‧우익 공히 참가(both left and right)’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이 주간정보요약서는 제주도민의 좌익성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고 있다.
제주읍과의 통신이 부분적으로 단절됐기 때문에 제주읍의 총파업에 관한 보다 상세한 정보가 부족하다. 가장 최근의 보고는 파업이 누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좌‧우익에 관계없이 대다수의 주민이 자신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믿을 때,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번 파업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미군 정보보고서는 3 총파업에 대해 제주도민의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런 감정을 부추기는 남로당의 대중선동에 의하여 증폭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군정은 그러면서도 사후 대응책으로 전자의 치유책, 즉 민심 수습보다는 후자의 문제인 좌익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갔다. 이 사후처리 문제는 당시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맡겨졌다.
미군 중앙조사단이 떠난 다음날인 3월 14일 오전 조병옥 경무부장이 미군 수송기 편으로 제주에 내려왔다. 조 부장 시찰에는 경무부 공안국 부국장 장영복(張永福) 총경과 경감이 지휘하는 무장 경호대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제주도 도착 즉시 제주도민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3절에 발생한 불상사에 접종(接踵)하여 정치 산업 및 교육 각 기관의 활동이 마비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본관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다. 첫째 제주도의 동포제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경비상 만전대책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기만적 선전과 파괴적 모략으로써 제주도의 사회를 무질서 상태에 빠지게 하였고 빠지게 할 근본적 요소를 제거할 근본방침도 수립되어 있다. 도정 책임자와 협의하여 그 실현에 옮기겠다. 바라건대 동포제위는 안심하기를, 그리고 경찰과 협력하여 제주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폭동과 같은 무질서의 행동같이 조선건국의 전도를 위험케 하는 것은 없다. 폭동의 빈발은 조선민족의 정치적 자치력과 도덕적 자율성이 결여함을 세계의 이목 앞에 폭로시켜 우리의 위신과 신용을 실추시키는 것이다. 동포여, 반성자중하여 일상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건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포고문에서 경찰의 발포로 빚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경찰총수로서 해명하거나 유감의 뜻을 표현한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비록 간접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3사건을 하나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만전대책이란 다른 지방의 응원경찰을 대거 투입, 물리력으로 무질서한 제주 치안을 바로 잡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실제로 다음날 전남‧전북 경찰청에서 2백여 명이 급파되는 등 응원경찰이 속속 증원되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 방문 첫날 오후에 제주도청을 방문, 파업중인 공무원들에게 파업 중지를 촉구했다. 이날 현장에 있었던 한 공무원 출신은 “조병옥 경무부장이 도청 안의 사무실에 도청 직원들을 불러 놓고 파업 중지를 촉구한 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놀라운 내용의 연설을 했다”고 회고했다. 조병옥 부장은 순시 다음날인 15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지역유지들을 대상으로 시국강연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도 이와 유사한 연설을 했다.
그 무렵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경무부 최경진(崔慶進) 차장은 3월 12일 기자들에게 제주도 총파업 소식을 전한 뒤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면서 응원경찰 파견 계획을 밝혔다. 경무부 제2인자가 조병옥 부장의 제주 순시 이전에 이미 ‘주민 90% 좌익’이라고 밝힌 점으로 미뤄 제주 섬에 대한 경찰 수뇌부의 인식과 선입견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3월 14일 목포항을 떠난 전남 경찰 122명과 전북 경찰 100명은 다음날 제주항에 도착했다. 3월 18일에는 경기 경찰 99명이 파견됐다. 이로써 2월 말 제주에 들어온 충남‧북 경찰 100명을 합치면 응원경찰은 421명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응원경찰 수는 원래 있었던 제주경찰 330명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응원경찰대가 속속 제주에 도착하면서 제주경찰은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제주경찰관 가운데 일부가 파업에 동조, 근무지를 이탈하는 바람에 더욱 불신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6일에는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본토 경관들을 중심으로 특별수사과(과장 李虎)가 설치됐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응원경찰대가 충원된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를 검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맨 처음 기습당한 곳이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회 본부였다. 투쟁위원회 간부들이 검거됐다. 3절 행사를 주도했던 민전 간부들과 남로당 간부들도 속속 연행됐다. 3월 18일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전도적으로 약 200명 가량 된다”고 밝혔다. 검속 강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높아졌다.
제주도에 6일 동안 체류한 뒤 귀경한 조병옥 경무부장은 3월 20일 군청청 기자실에서 제주도 3절 발포사건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2건의 발포사건 책임문제를 언급하면서 ①제1구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제 사정으로 보아 치안유지의 대국에 입각한 정당방위로 인정함 ②제주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행위는 당시에 존재한 모든 사정으로 보아 경찰관의 발포는 무사려의 행동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나.검거선풍과 관민 충돌
1)검거선풍
3월 10일부터 시작된 제주도 총파업은 3월 20일 전후해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3월 19일 오전 8시에 접수된 보고서에 따르면 파업중인 군정청 고용원의 90%와 운송분야 고용원의 50%가 직장으로 복귀했으며, 상황은 진정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내 언론에서도 3월 20일부터 일제히 ‘제주 관공리 파업 일단락’이란 제목아래 보도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은 “제주도 관공리의 파업은 군정실시 이래 처음 보는 광범위의 대파업으로 그 사태의 중요성에 비추어 지난 14일 경무부장 자신이 현지에 달려가 진상조사와 아울러 수습대책을 강구 중에 있다고 하는데 18일 오후 10시 조 경무부장으로부터 경무부에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18일부터는 파업을 중지하고 집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서울신문은 3월 18일 현재로 파업에 참여한 174개 기관‧단체‧학교 가운데 56개 직장이 파업을 해제했고, 나머지 118개 직장이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통계를 자세히 보면 이 시점에서 관공서들은 거의 파업을 해제한 반면 초‧중등학교에서 파업해제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3월 말에 이르러 교원과 학생들의 파업도 해소됐다. 제주신보는 “제주시내 중등학교는 24일부터 속속 등교하기 시작하였는데, 24일의 학생 등교율은 약 30%였고, 26일에는 약 50%로 점차 등교율은 증가될 가망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제주도 총파업 사태는 3월 말로 일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와서는 경찰당국의 대량 검속이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됐다.
조병옥 경무부장의 지시로 3월 15일부터 파업단 관련자 검거에 나선 경찰당국은 단속 첫날 3절 기념행사를 주도한 김두훈‧고창무 등 제주 민전 간부들을 구속하는 것을 시발로 파업 중이던 직장의 간부들을 속속 연행 취조하기 시작했다. 3월 18일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이 밝혔듯이 이틀 새 검거된 사람은 200명에 이르렀다. 이런 검속은 계속돼 연행자는 3월 말 300명, 4월 10일께는 500명에 달했다. 4월에 들면서 연행자 가운데 군정재판에 회부되는 사람, 훈방되는 사람 등으로 분류됐다.
구금된 사람 가운데는 고급관리, 교원, 경찰관, 단체 간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3월 31일에는 제주도청 간부들이 연행됐는데, 임관호(任琯鎬) 산업국장을 비롯한 10여 명이 경찰에 전격 연행, 제주사회에 충격을 줬다. 제주신보는 제주도 간부 연행사실을 이렇게 보도했다.
검거에 검거가 계속되어 결말을 예상치 못하게 하는 파업사건에 대한 검거취조는 그 수 무려 200여 명에 달하였다 함은 이미 본지에 기보한 바이거니와 동 사건에 대한 취조가 일단락을 지은 것처럼 보이던 거월 31일에 이르러 돌연히 또 검거선풍이 일어나 31일, 1일 양일에 도 산업국장 임관호씨를 위시로 학무과장 이관석(李琯石)씨, 인사과장 송인택(宋仁澤)씨, 회계과장 강산염(姜山炎)씨 등 도 간부 10여 명을 검거 취조 중이라는 바 특히 관공서에 치중하여 취조를 개시한데 대하여는 일반의 주목을 끌고 있으며 예상외로 광범위한 파급으로서 귀추는 극히 주목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제주도 산업국장 임관호이다. 그는 파업을 단행한 제주도청 직원들에 의해 제주도청 파업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었다. 경찰 연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가 4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1948년 5월부터 제주도지사에 재직하게 된다.
이들 연행자들에 대한 취조는 주로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파견 나온 경찰들이 맡았다. 3월 15일 제주경찰감찰청에 특별수사과가 설치됐는데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은 “(특별수사과는) 육지에서 내도한 경관으로써 조직되고 있다”고 밝혔다. 검거자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그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한 수사요원들이 속속 제주에 추가 파견됐다. 그들 중에는 1946년 10월 대구사건의 수사로 이름을 떨쳤던 사찰부서 요원들도 많았다. 이러다 보니 경무부 자체에서 제주사건 수사 지휘관의 격상 필요성이 제기돼 3월 말에는 제1관구경찰청(경기) 김태일(金泰日) 부청장이 수사 총지휘관으로 제주에 파견됐다.
이 무렵 연행자의 취조과정에서 심한 고문이 자행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경찰 당국자는 이를 부인했지만, 당시 경찰에 연행됐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고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한 증언자는 “육지경관들이 취조하면서 파업 주동자와 배후를 대라면서 무조건 때렸다. 옆방에서도 비명이 그치지 않았고, 동료직원 한 사람은 무수히 구타당해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고문사실은 재판 과정에서도 제기됐다. 피고인들이 “경찰의 청취서는 사실무근이다. 고문이 심하므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다시피 되었지만 이런 자백을 한 바는 없다”거나 “말도 듣기 전에 구타 고문을 감행하는 등 민주경찰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주장을 했다.
이쯤 되고 보니 직장을 이탈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특히 교육계가 심각했다. 교원들이 구속되거나 수배령을 피해 피신하는 바람에 교단의 공동현상이 생긴 것이다. 제주북국민학교 학부모들은 3월 26일 긴급회의를 갖고 교원 석방을 요구하는 한편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임시교원을 채용해 줄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이런 여파로 교단이 비게 되자 그 빈자리를 이북출신들이 내려와 채워 갔다. 3사건 직전까지 김달삼이 교사로 재직했던 대정중의 경우 제주출신보다 이북출신 교사가 더 많아지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이런 사회현상은 8 이후 귀환했던 젊은이들이 거꾸로 일본으로 나가는 역류현상을 일으켰다. 재일 제주인 동포사회를 연구해온 김민주는 “제주 청년 3,000명 가량이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주로 1947년의 일이다. 사태 발생 이후인 48년이나 49년에 일본으로 왔다는 사람들은 거의 거짓말일 것이다”고 주장했다.
한편 좌파진영은 민전을 중심으로 3월 22일 전국적으로 24시간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철도와 공장 등이 멈추었다. 요구조건은 3절 기념대회에서 만행한 경찰관 즉시 처벌, 노동조합운동의 자유보장, 박헌영 체포령 취소, 전평 간부 즉시 석방, 진보적인 노동법령 즉시 실시, 좌익신문 정간 취소 등을 내걸었다. 미군정은 이를 불법파업으로 간주하고, 전국적으로 관련자 검거에 나섰다. 이같은 군정당국의 강경대응으로 1947년 3월 1일 이후 3월 28일까지 경찰에 검거된 사람은 남한 전체적으로 2,176명에 이르렀다. 이 속에 제주 검속자는 230명으로 분류됐다. 제주도 인구가 남한 인구의 1%임을 감안한다면, 제주 검속자가 전국 평균치보다 10배 가량 많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앞서 중앙 민전은 3월 19일 제주도의 3절 발포와 3 총파업을 중시, 특별조사반을 파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3월 24일 제주에 도착한 민전 특별조사반은 본부 조사부장 오영(吳英)을 단장으로 윤학기(尹學起) 변호사 등 4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일주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3사건을 다각도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3월 28일 수도경찰청의 체포명령으로 오영 단장이 서귀포에서 전격 체포되면서 이 조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오영 단장의 체포는 당시 전국적으로 단행한 ‘3 총파업’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민전 중앙본부는 이때도 제주도를 포함한 일련의 파업 감행이 경찰의 탄압에 항의하는 것이지, 미군정 자체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즉 미 6사단 정보보고서는 “민전은 미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띄워 최근의 파업은 경찰의 가혹한 탄압과 일제 경찰에 대항한 것이지 미군정에 대항한 것은 아니며, 제주도의 파업 역시 경찰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주 총파업에 다수의 경찰관들이 동참한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경무부는 직장을 이탈하거나 사표를 제출한 경찰관들을 파업 경찰관으로 간주해 사문위원회에 회부, 파면 결정을 내렸다. 이때 파면 처분을 받은 경찰관 수는 66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3명은 구속 조사를 받았다. 이 파업 경찰관을 소속 별로 보면 △제주경찰감찰청 경사 4명, 순경 6명 △제1구경찰서 경사 3명, 순경 39명 △제2구경찰서 경위 1명, 경사 1명, 순경 12명이다. 발포경찰관에 대해서는 도립병원 앞의 발포사건을 유발한 이문규 순경이 유일하게 파면처분을 받았다. 파업 참여 경찰관 수는 제주경찰의 20%에 해당됐다. 그 빈자리는 다른 지역출신자들로 채워졌다. 또한 당시 미군정에서도 극우단체로 분류한 서북청년회 소속 단원들이 제주경찰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
한편 제주도에서 3사건 및 3 총파업 연루자들에 대한 군정재판이 1947년 4월 3일부터 개정됐다. 군정재판 제1회 공판의 주심은 제주도 군정청 법무관인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가, 검찰관으로 패트릿지 대위가 입회한 가운데 제주지방심리원 법정에서 열렸다. 군정재판이 열리면서 가장 난관에 부닥친 것이 통역문제였다.
4월 10일 제주경찰감찰청은 총 검거자 500명 가운데 군정재판에 송치된 자가 199명, 앞으로 송치 예정자가 61명으로 결국 군정재판 회부 건수는 도합 260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또한 검거령이 계속 발동되고 있고, 검속자의 추가로 군정재판 송치자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관과 검찰관이 모두 미군 장교들이 나서게 됨에 따라 피고인과의 정확한 의사소통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군정재판은 4월 12일까지 4차 공판이 진행됐다.
그런데 러치 군정장관은 4월 14일 한국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군정재판을 중지하고, 이미 군정재판에 회부된 사건도 한국재판소로 이관하라고 명령했다. 이 조치는 표면적으로 군정업무의 한국인 이양방침에 따라 사법권도 한국인 법원과 검찰에 위임하는 것으로 공포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통역문제 등 군정재판의 한계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3 총파업’ 등으로 전국적으로 구속자 수가 2,000명을 넘고 있었다.
군정재판에서 한국 민간인 법정으로 이관됨에 따라 한국인 판사와 검사가 진행하는 3사건 공판은 4월 21일부터 시작됐다. 이 일반재판은 5월 23일까지 10여 차례 열렸다. 이 기간 동안 모두 328명에 대한 사법처리가 됐는데, 실형선고는 52명에 불과했고, 52명이 집행유예, 56명이 벌금형으로 풀려 나왔으며,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다. 이같은 사법부의 형량은 경찰당국의 강공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으로, 1947년 8월 다시 군정재판이 부활되는 빌미가 됐다.
3절 기념행사를 주도한 제주 민전 공동대표인 현경호에게는 벌금 5,000원이 선고됐으며, 나중에 검거된 남로당 제주도위원장이자 제주 민전 공동대표였던 안세훈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00원이 선고됐다. 최고 형량은 허두문(許斗文) 등에 내려진 징역 1년이었다. 이때 적용된 미군정 법령은 주로 맥아더 총사령관의 포고 제2호와 군정법령 제19호 제4조, 제72호 등이었다. 이 일반재판에서 3절 기념행사 준비모임 가운데 일부는 무허가로, 일부는 허가받은 것으로 판명됐다. 3월 1일 당일 행사 가운데 시위는 무허가였지만,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기념행사는 허가받은 집회로 판결됐다.
경찰의 검속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47년 3사건 이후 1948년 ‘4’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됐다. 이로 인해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나중엔 미군 감찰반이 “제주도의 유치장은 한국의 어떤 행형시설과 비교해 보아도 죄수들이 넘쳐나는 최악의 경우를 나타내고 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갇혀 있다. 비교적 작은 감옥 안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관민 충돌
① 주민-경찰 충돌사건
3사건 이후 지역주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19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사건을 시발로 6월 종달리사건, 8월 북촌리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우도사건’은 1947년 3월 14일 우도의 민청 맹원들이 대중 시위를 감행한 후, 우도경찰관파견소의 간판을 파괴 소각한 사건이다. 이날 성산포 동쪽 해상에 위치한 우도주민 절반 가량인 1,000여 명은 국민학교에 집결, 3사건 대책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우도 섬 한바퀴를 돌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민청 간부 몇 명이 경찰관파견소에 찾아가 삐라를 압수한 데 항의하고 파견소 간판을 불태워 버렸다. 당시 우도에는 경찰관 3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나 손을 쓸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2일만에 비로소 경찰서에 알려져 응원경찰대 15명이 급파됐다. 그러나 민청 간부들은 이미 우도 섬을 떠난 뒤여서 일부 관련혐의자 만이 검거됐다.
‘중문리사건’은 1947년 3월 17일 시위군중에게 응원경찰이 발포, 주민 8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앞서 밝혔지만 3월 13일 중문지서 주임 양경한(梁慶漢) 등 제주출신 경찰관 6명 전원은 제주읍에서 일어난 3 경찰 발포가 부당하다면서 사직했다. 당황한 경찰 측은 3월 15일 김경술(金京述) 경위를 반장으로 한 응원경찰대 20여 명을 중문지서에 배치했다. 응원경찰대는 곧이어 총파업에 가담했던 지역 인사들을 연행했다. 구금자 중에는 지역주민의 신망을 받던 중문중학원 원장 이승조(李承祚)와 중문민청 위원장 김성추(金性秋)도 포함됐다. 이승조는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법문학부 출신으로 해방 후 중문면장까지 지냈으며, 김성추는 일제 때 노동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인물로 해방 후에는 청년운동과 야학운동을 주도해 왔다.
3월 17일 오전 11시 중문면사무소 소재지 중문리 향사에서 지역주민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면민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3사건으로 인한 수감자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청하자고 결의하고, 오후 1시께 중문지서로 몰려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면장 등 지역유지들이 먼저 지서에 들어가 석방교섭을 벌였지만, 응원경찰대는 완강했다. 시위행렬이 지서 앞에 이르자 경찰 지휘관은 해산명령을 내렸다. 여러 차례 해산 요구에도 응하지 않자 경찰은 발포했다. 이 발포로 강상준(姜祥俊) 등 지역주민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종달리사건’은 1947년 6월 6일 민청의 불법집회를 단속하던 경찰관 3명이 오히려 집회 참석 청년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이날 밤 8시를 전후해 구좌면 종달리 바닷가에서는 마을 청년 200명 가량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 민청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미군정은 5월 16일 행정명령으로 민청을 해산했는데, 중앙 민청에서는 5월 21일부터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6월 5일 합법단체로 민애청을 조직, 군정청에 등록했다. 종달리 민청은 이런 과도기에 민청의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이날 집회를 소집한 것이다.
이런 집회 개최 정보를 입수한 세화지서 소속 김순영(金順影) 황종욱(黃鍾郁) 최한수(崔漢洙) 경찰관 3명은 단속차 집회 현장에 나타났다. 집회 참석자들이 동요하자 종달리 민청 부위원장인 부옥만(夫玉萬)이 나서서 “우리가 잘못한 일이 없으니 도망칠 이유가 없다”면서 대중을 선동했다. 곧이어 청년들과 경찰관 사이에 몸싸움이 시작됐고, 수세에 몰린 경찰관들이 급한 김에 바다에 뛰어 들었다. 부옥만은 해초를 긁어 모으는 갈고리가 달린 장대로 경찰관들의 제복 옆구리를 걸고 잡아당겼다. 결국 실신상태의 경찰관들은 자신들이 소지했던 포승줄에 묶이는 신세가 됐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몰고 올 후유증을 심각하게 여긴 청년들은 피신하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경찰관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마차에 실려 세화지서로 옮겨졌다. 경찰은 곧 비상을 걸었다. 이때부터 경찰과 집회참석자 사이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미군 주간정보요약서는 “6월 6일 경찰관이 성산에서 북쪽으로 2마일 떨어진 구좌면 해안의 한 예인선에서 열리고 있던 남로당의 불법모임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폭행 당하고 포승줄로 묶였다. 사건 책임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찰당국은 6월 16일 종달리사건 관련 수배자가 71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결국 수배자 71명 중 42명이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사건 주모자 부옥만에게는 가장 무거운 징역 4년이 선고됐다. 그에게는 포고령 제2호와 군정법령 제19호, 형법 제95�조를 적용, 공무집행 방해‧소요‧상해‧불법체포죄 등을 물은 것이었다. 일부 자료에는 종달리사건으로 경찰관 2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부옥만의 4년 복역기간 중 살인죄나 폭행치사죄를 추가 적용한 적은 없다.
‘북촌리사건’은 1947년 8월 13일 조천면 북촌리에서 불법 삐라를 단속하던 경찰관과 지역주민들이 충돌, 쌍방의 부상자를 낸 사건이다. 광복절 비상근무에 들어간 경찰은 이날 오전 11시께 순찰 도중 북촌리에서 삐라를 붙이던 사람들이 달아나자 뒤쫓으면서 총격을 가했다. 이 발포로 10대 소녀 장윤수(張允洙)를 비롯해 여자 2명과 남자 1명 등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에 흥분한 한 소녀가 사이렌을 울려 마을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경찰과 대항할 것을 결의했다. 때마침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 김병택(金秉澤) 순경 등 경찰관 2명이 붙잡혀 집단폭행을 당했다.
북촌 주민들은 이에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지 마을에서 3㎞ 가량 떨어진 함덕지서에 찾아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함덕지서에서는 지서 지붕에 기관총을 장착, 공포를 쏘면서 시위군중들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에 대해 한성일보는 “해방 2주년 기념식을 앞둔 13일 오전 11시경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는 경관과 민중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여 양측에 각각 3명의 중상자와 다수의 경상자를 내었다고 한다. 동 사건의 원인은 다수의 삐라가 살포되어 있어 경찰이 출동하였었는데, 민중과 충돌이 일어난 것이라 한다”고 보도했다.
또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에는 마치 2건의 사건이 별개로 일어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즉 “8월 13일 폭도 약 200명이 제주도 함덕지서를 공격해 여자 1명을 우연히 부상 입히고, 경찰관 2명을 폭행했다. 증원된 경찰이 폭도들을 해산시켰다(6사단 보고)”와 “8월 13일 북촌과 함덕에서 경찰과 좌익분자들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여자 2명과 남자 1명이 무차별 난사로 다쳤다. 충돌은 경찰이 북촌마을 담벼락에서 좌익분자들이 붙인 포스터를 찢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증원된 경찰이 폭도들을 물리쳤다(CIC 정보요약)”로 돼 있다. 이 사건으로 주민 40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한편 이 무렵 전국적으로 삐라 부착운동이 전개됐는데, 특히 제주도가 심했다. 미군정은 1947년 5월 17일부터 미‧소 공동위원회가 속개되자 이 기간에는 정치적 집회를 일체 금지하는 행정명령 제3호를 발포했다. 이 정치집회 금지령에 대해 국내외적으로 비난여론이 일자 7월 9일 행정명령 3호를 해제했다. 다만 정치적 목적의 가두시위는 계속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전후해서 제주도에서 마을마다 삐라 부착과 무허가 집회가 성행했다. 경찰은 이를 불법행위로 간주하고 단속을 강화했다. 6월 한달 동안에 삐라 살포와 무허가 집회 혐의로 초등교원양성소 학생 8명과 제주농업중학교 학생 2명, 조천중학원 학생 2명을 비롯해 30여 명이 검거되거나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부는 미군정 포고령 제2호와 군정법령 제19호 위반으로 기소된 초등교원양성소 학생 3명에게 징역 5개월의 실형을, 초등교원양성소 학생 5명과 조천중학원 학생 2명에게는 각각 징역 5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제주농업중학교 2명에 대해서도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다.
그런데 제주농업중학교에서는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3학년 학생 2명에 대해 ‘상부의 지시’라면서 퇴학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퇴학처분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2학년 학생 전원이 합동 퇴학원을 제출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1947년 8월에 이르러 반미 삐라도 살포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는데, 그 보고내용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강탈하려는 미군을 몰아내자’는 등 미군을 공격하라는 선동적인 삐라가 최근 제주도에 뿌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 뿌려진 삐라 내용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보리공출 문제였다.
② 군정수뇌부 전면교체
1947년 3월 시점에서 제주도정과 치안은 미국인인 제주도 군정장관(공식직함은 ‘수석민정관’)과 경찰 고문관, 한국인인 제주도지사와 제주경찰감찰청장 등 4자의 영향 아래 있었다. 모슬포에 경비대 제9연대장이 있었지만, 당시는 부대 창설 초창기여서 제주도 지역문제에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어쨌든 연대장까지 포함한 제주 수뇌부 5명이 3사건 이후 모두 교체됐다.
제주도 군정장관은 1947년 4월 2일 스타우트 소령에 이어 베로스(Russel D. Barros) 중령이 부임했다. 37세의 그는 미국 동해안 출신으로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군에 투신, 태평양전쟁 때 필리핀 전투에서 활약했다. 종전 후 한국에 진주, 제2대 국방경비대 사령관으로 취임, 한국군 창군작업에 관여했다. 베로스는 1946년 11월 제주도 모슬포에 창설되는 제9연대 초대 연대장인 장창국 부위가 인사차 경비대사령관 방에 들렀을 때, 제주도에는 좌익세력이 강하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인물이다. 베로스는 그 해 12월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8개월 동안 제주의 군정업무를 총괄했다.
제주도지사는 초대 지사 박경훈에 이어 1947년 4월 10일 전북출신인 유해진(柳海辰)이 발령됐다. 남조선과도정부 임명사령에 박경훈 지사가 3월 12일자로 해면(解免)된 것으로 기록돼 사표 제출날짜를 기준으로 소급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제주신보는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박 지사는 (3월) 14일 사직서를 스타우트 장관에게 제출하였다”고 보도한 바 있다. 독립신보는 “이번 사건(3사건과 3총파업)에 책임을 느껴 스타우트 고문에게 사표를 제출하였다 한다”고 덧붙였다.
43세의 신임 유해진 지사는 제주와는 연고가 없던 인물이었다. 그의 제주도지사 발탁은 미군정청 민정장관 안재홍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유해진은 해방직후 안재홍이 국민당을 창당하게 되자 그 길을 쫓아 정당활동을 했으며, 국민당‧신한민족당‧한국독립당이 합쳐 한국독립당이 되자 농림부장을 맡았다. 민정장관 안재홍은 반공성향이 강한 유해진에게 제주도지사 임명사실을 알리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제주 땅에 좌익들이 발붙일 곳이 없도록 하고 민생과 치안 유지에 모든 힘을 기울여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제주경찰감찰청장은 1947년 3월 31일 서울출신인 김영배(金英培)가 발령됐다. 그는 서울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제주청장으로 부임, 1948년 4월까지 재직하게 된다. 전임자가 독직사건으로 물러나게 되자 그 후임으로 2월 20일 취임했던 강인수 청장은 결국 3사건의 여파에 밀려 40일만에 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제주경찰사에는 3절 발포사건 당일 “민심수습을 위해서 이 날짜로 강동효 경찰서장이 파면됐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제1구경찰서 강 서장이 해임된 것은 1947년 5월 24일이며, 해임 사유도 발포사건의 책임이 아니라 수뢰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
제주경찰의 진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경찰 고문관 패트릿지 대위도 1947년 6월 초 교체되어 그 후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 고문관 래데루 대위가 부임했다. 미국 경찰에서도 15년간 근무한 적이 있는 래데루는 수사 베테랑으로, 3월에 카스티어 대령 조사단의 일원으로 제주에 내려와 3사건을 조사한 바 있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각 지방에서 삐라사건 등으로 다수가 검거되어 있는데 조사할 때 고문을 감행하는 경관이 있다면 엄벌에 처할 것이며 파면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한편 1947년 5월 21일에는 제9연대 연대장이 장창국에서 이치업(李致業) 소령으로 교체됐다. 이 연대장 교체는 3사건과는 연관이 없다.
군정당국은 이 같은 수뇌부의 물갈이를 통해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그 후 제주도에서 진행된 내용을 볼 때 우익진영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수뇌부 인사에서 제주출신은 완전히 배제됐다. 심지어 경찰감찰청 간부들도 육지출신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군정 수뇌부 가운데 제주도에서의 활동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인물은 유해진 도지사였다. 그는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나의 지향하는 바는 극우 극좌를 배제하고 중앙노선에 입각한 정치이념에서 우러난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제주 행적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군 보고서에도 ‘극우파’라고 표현될 정도로 그는 재임 기간동안 오로지 정치적 반대파를 척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유해진 도지사는 제주도에 내려오면서 경호원 격으로 서청 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이 서청 단원들은 밤에는 지사관사 주변을 경비했다. 그는 도지사로 부임한 뒤 관공리의 숙정작업부터 손을 대었다. 총파업에 가담하거나 주도했던 관리들을 가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이런 관공리 숙정작업은 도청뿐만 아니라 군청, 경찰, 운수, 체신 등 전 행정기관으로 파급됐다. 숙정선풍은 교육계에도 불었다. 공직사회에는 날로 빈자리가 생겨났다. 이런 공백을 주로 이북출신으로 채워갔다.
유해진 도지사는 부임 전에 전국적으로 가장 저조한 실적을 보였던 곡물수집에도 앞장섰다. 미군정은 전국적으로 1947년 하곡 수집량을 71만 1천 석으로 결정하고 제주도에도 1만 7천 석을 할당했다. 생산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전체 생산량의 5분의 1을 수집량으로 책정 할당한 것이었다. 제주도 보리농사는 1946년에 이어 1947년에도 흉년이었다. 그러나 유 지사는 이런 지역실정에도 아랑곳없이 행정력을 동원해 독려했다.
주민과의 첫 충돌은 1947년 7월 말 한림면 명월리에서 발생했다. 행정당국에서 우익청년단체원들을 동원, 강하게 하곡 수집에 나섰다가 지역 주민들과 마찰을 빚은 것이다.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명월리 충돌사건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유 지사가 한 일이라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두번째 사건은 1947년 8월 8일 안덕면 동광리에서 발생했다. 마을 주민 50여 명이 하곡 수집 독려차 이장 집에 머물고 있던 공무원들을 상대로 할당량을 조정해 줄 것을 요구하다가 언쟁 끝에 공무원 3명을 집단 구타했다. 유 지사는 이런 마찰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할당량의 104%를 초과 수집했다고 중앙에 보고했다.
유해진 도지사는 6척 장신에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행동파여서 주위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1947년 여름에는 유 지사를 암살하자는 삐라까지 나돌았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CIC의 보고임을 전제, “극우파(an extreme rightist)인 제주도지사는 좌익분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그의 암살을 요구하는 삐라가 여러 장 뿌려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유 지사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지 경찰에서 빌려온 권총을 늘 옆에 끼고 잤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유해진 도지사가 1947년 11월부터 미군정청의 특별감사를 받았다. 이 감사는 미군정청 특별감찰관 넬슨(Lawrence A. Nelson) 중령의 지휘 아래 1947년 11월 12일부터 1948년 2월 28일까지 서울과 제주도에서 집중적으로 실시됐는데, 넬슨 중령은 이 조사 결과에 대해 장문의 ‘특별감찰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명 ‘넬슨 특별감찰보고서’로도 부르는 이 보고서에는 이번 조사가 남조선과도정부 수석고문관 존슨(E. J. Johnson)의 지시로 실시됐다고 밝혔다. 그런데 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하면 제주도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을 포함한 제주주둔 미군장교들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는 인상이 짙다. 보고서에는 감찰을 실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제주)행정의 모든 면이 정치에 오염되어 어떠한 지식인이라도 거부할 만한 행정의 한 유형을 생산해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넬슨 중령은 유해진 도지사의 개인문제와 그가 이끌고 있는 제주도정에 대해서 광범위한 조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중앙의 군정관리들로부터 의견서를 받기도 했다. 다음은 1947년 11월 21일 제주군정청 법무관 스티븐슨(Samuel J. Stevenson) 대위가 제출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의견서의 일부이다.
제주도지사는 심지어 한독당이나 독립촉성회의 사소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은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도 자동적으로 좌익분자로 가정하는 극우의 슬로건을 채택하고 있다. 그는 또한 좌우 제휴계획이나 중도인사들을 혐오하면서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이다. 4월 1일 이후 본인이 알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이 확실하게 승인한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떤 단체의 회합도 허가하지 않았다. 본인은 온건 좌익인사들이 허가 없이 회합을 열고 있다고 확신한다. 조만간 경찰은 한 모임이 있을 것을 통보할 것이고 그 회합을 분쇄할 것을 요구받아 지도자를 체포할 것이다. 이 사건은 폭력을 불러 좌익단체들에게는 많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 온건 좌익과 일부 중도파들을 더욱 좌파로 몰고 갈 것이다.
같은 날 제주 주둔 미 방첩대(CIC) 대표 메리트(Henry C. Merritt)가 넬슨 중령에게 보고한 ‘유해진 지사의 행위’에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인은 1947년 6월 제주도에 부임한 이래 방첩대 지구대 책임자로 있다. 본인은 부임한 뒤 유해진 지사를 알았다. 유 지사는 극우인사이며 많은 우익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이다. 유 지사는 광복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의 고문으로 있다. (중략) 제주도에 부임한 이래 본인은 집회 허용을 요구한 좌익단체를 알고 있지만 결코 허용된 적이 없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모든 좌익분자들의 회합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우익단체들은 허가를 요청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보장된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유 지사는 매우 독단적이며 만일 어떤 사람이 그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강력한 좌익분자로 분류되기 쉽다.
제주 군정청 법무관과 CIC 대표의 의견서는 유 지사가 극우파라는 점, 자신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상대를 좌익분자로 몰고 가는 매카시즘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우익 집회를 제외한 좌파나 중도파의 집회를 허가하지 않아 불법집회를 양산해 내고 있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 집회 허가권은 도지사가 갖고 있었다. 유 지사의 집회 허가 편파문제는 이미 언론에도 보도됐었다. 제주신보는 1947년 7월 베로스 중령과의 회견 과정에서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는데, 이에 베로스 중령은 “유 지사는 일절 나에게 말하여 준 바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인사로부터도 편당적(偏黨的) 행동을 취한다는 보고가 있어 조사중이다. 또 집회는 중앙의 지시에 의하여 정식 수속만 하면 허가는 하게 되었다. 차후 집회허가원을 신청하고 유 지사가 무조건 불응 시는 나에게 말하여 주기 바란다”고 밝혔지만 이 문제가 시정되지는 않았다.
한편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제주에 조사온 특별감찰실 넬슨 중령에게 유해진 도지사의 극우적 행동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베로스는 이어 “그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위는 본인은 물론 제주도민들을 당혹하게 했다. 제주도 우익의 테러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넬슨 중령은 광범위한 조사를 벌인 끝에 유해진 지사가 대단히 문제가 많은 도지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넬슨 특별감찰보고서’에 기록된 유 지사의 문제 부분을 추려 내면 다음과 같다.
- 유해진 지사는 지사로서 도정업무를 적절히 수행하는 데 있어서 반복적으로 무능력함을 드러냈다. 그는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쓸데없는 시도를 해왔다. 그는 좌파를 지하로 몰고 갔으며 그곳에서 좌익활동은 더욱 위험스럽게 변모했다. 좌익세력의 숫자와 동조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 유 지사 재임 기간 경찰은 테러행위를 수없이 자행했다. 경찰 최고위직은 모두 본토에서 모집된 경찰관들로 채워졌다. 유 지사는 제주도 출신이 아니며, 많은 자리에 제주도 주민들에게 호응 받지 못하는 본토 사람들을 임명했다.
- 하곡 수집계획과 식량 배급과 관련한 유 지사의 행정은 한국정부의 모든 행정기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운영 미숙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중략) 그는 할당량의 15%를 수집해놓고 100%를 수집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하곡수집 계획을 미숙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군 지역의 불평등한 식량배급 체계를 야기시켰다.
- 제주 유치장은 한국의 어떠한 행형시설에서 보이는 넘쳐나는 죄수 수용시설 가운데 최악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10×12피트(3.04×3.65m)의 한 감방에 35명이 수감됐다. 비교적 작은 유치장에 전체 365명의 죄수가 수감돼 있다. 지사는 수감자 대부분이 좌익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좌익을 우익으로 전향시키려는 그의 계획의 일단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넬슨 중령은 1948년 3월 11일 이런 조사 결과를 토대로 ①유해진 지사 교체 ②제주도 경찰행정에 대한 조사 ③미국인 경찰 고문관의 제59군정중대 임무 동시 수행 ④과밀 유치장 조사 등 4개항을 군정장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은 경찰고문관의 겸직 문제와 과밀 유치장 조사 등에 대해서는 시정명령을 내렸으나 핵심적인 민심 수습용으로 건의된 유 지사 해임 건은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4사건을 맞게 된 것이다.
③ 우익진영 강화
4사건의 배경이나 전개과정을 볼 때, 미‧소의 관계 변화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협력 분위기일 때에는 한반도의 외딴 섬 제주도에도 화해바람이 불어오다가,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면 될수록 이 좁은 섬에도 정치적인 긴장상태가 심화됐다. 세계적 수준의 동‧서 냉전체제는 1947년 3월 대소(對蘇) 강경정책이라는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 선포 이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동‧서 냉전이 첨예하게 표출되던 곳이 한반도였으며, 결과론이지만 제주도는 그 결정적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런 대립구도는 한꺼번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몇 차례의 강온 고비를 거치면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이념혼선도 빚어졌다. 미군정 하에서 그런 혼선이 극명하게 드러날 때가 1946년의 좌우합작운동 때였으며, 이어 1947년 5월부터 제2차 미‧소 공위가 열리면서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제2차 공위는 미국과 소련이 제1차 공위에서 쟁점이 됐던 임시정부 참여 정당 및 사회단체의 자격문제를 놓고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고, 이에 협력한다는 정당‧단체’로 합의함으로써 급물살을 타게 됐다. 드디어 한민당도 종래의 태도를 수정,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제출했고, 또한 반탁 우익진영의 정당‧사회단체도 태도를 바꾸어 공위 참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막상 협의대상의 정당‧단체 명부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미‧소의 대립은 다시 표면화됐다. 신탁 논쟁기인 1946년 2월부터 1947년 7월까지 미군정에 등록한 정당‧사회단체는 166개에 이르렀는데, 우익정당의 70% 이상이 제2차 공위가 열리던 6월 한달 동안 등록한 것이었다. 소련 측은 이를 ‘급조된 정당‧단체’로 규정, 공위 참여를 제외시켜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미국 측은 모두 참여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제2차 미‧소 공위도 1947년 8월에 이르러 결렬 위기를 맞게 됐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표면적으로 좌‧우익에 대해서 똑같이 대우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제주도 관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1947년 7월 “좌‧우익의 정당을 물론하고 그 관계자가 관공리 직원으로 취직할 수가 있다. 이것이 즉 민주주의 원칙”이라고 표명했다. 심지어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도 그 무렵 “나의 희망은 제주도만은 좌‧우가 손을 잡고 나가도록 합작운동에 노력할 심산”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입장들도 제2차 미‧소 공위가 결렬 국면으로 돌입하면서 변화 조짐이 나타났다.
1947년 8 기념일을 앞두고 실시된 좌익 검거사건은 그 시발이었다. 8월 12일 새벽부터 경찰은 좌파세력에 대한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이틀새 서울에서만 민전‧남로당‧전평‧전농 등 좌파정당 간부 1,300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를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됐다. 군정청은 이 사건으로 검속된 사람이 모두 13,769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독립신보는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검거선풍”이라고 표현했다. 군정당국은 이에 대해 ‘8 폭동음모’가 탐지되었기에 치안 유지 차원에서 관련자들을 검속했다고 밝힌 반면, 좌파진영에서는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제주도 경찰당국도 8월 14일부터 민전 간부와 남로당원, 공무원 등에 대한 일제단속에 나섰다. 검거된 사람은 제주도청 공무원 8명을 포함해 민전 간부와 세무서 직원, 도립병원 의사와 간호사, 우편국 교환수 등 20여 명에 이르렀다. 구금된 인사 가운데는 초대 도지사를 지냈던 박경훈도 포함되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1947년 7월부터 제주 민전 의장을 맡고 있었다.
제주 민전은 3사건과 총파업 이후 불어온 검거바람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민전 임원들은 체포되거나 검거령을 피해 일본 등지로 피신한 사람이 많았다. 그 활동도 한동안 소강상태였다. 그러다가 5월 제2차 미‧소 공위가 재개되자 민전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제주 민전도 이에 발맞춰 대대적인 조직 정비에 들어갔다. 7월에 전 도지사 박경훈을 의장으로 추대하고, 항일운동가이자 초대 조천면장을 지낸 김시범을 부의장으로 영입했다.
제주신보에서 “전 지사 박경훈씨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라고 보도할 정도로 그의 민전 의장 추대 소식은 제주사회에서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이면서 제주도 최대 갑부(朴宗實)의 장남이자 미군정 하에서 초대 지사를 지낸 그가 군정당국과 대립관계에 있던 민전 수뇌부가 되리라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박경훈은 3절 발포사건에 대해 벌써부터 경찰에 잘못이 있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풀리지 않자 도지사직을 사퇴했다는 게 그의 부인의 증언이다. 3 발포사건 ‘총탄의 피해자는 관람군중이었다’는 그의 발언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넬슨 특별감찰보고서’ 안에는 박경훈 등의 체포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울고검 검찰관 이호(李澔)의 보고내용을 보면 박경훈은 1947년 7월 말 민전 의장의 자격으로 제주경찰감찰청장을 만나 미‧소 공위에 제출할 진정서를 서명날인 받아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 진정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견해, 즉 국호는 인민공화국으로, 행정기관은 인민위원회로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민전 회원에 한해 받도록 승인된 진정서를 일반 도민들로부터도 받음으로써 공중치안을 교란한 혐의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박경훈은 연행 나흘만인 8월 17일 석방됐다. 다른 연행자들도 속속 풀려 나왔다. 일부 구금자가 경찰당국에 의해 불법집회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그것도 보석금으로 풀려 나왔다. 요란스러운 검거에 비해서는 싱겁게 끝났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이 박경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베로스는 “박경훈 전 지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매우 친미적인 인사이다. 그는 정치적인 이유와 우익인사가 아니기 때문에 좌익인사가 됐지만 군정에 위험인물이 아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제2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고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가 미국에 의해 서방진영 국가가 압도적으로 많이 가입된 유엔에 상정되면서 미‧소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국내 정세의 양극화는 첨예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 우익진영의 세력이 급속도로 강화되던 시기도 바로 이 시점이다.
제주도에서도 1947년 9월부터 우파청년단체의 조직 강화가 두드러졌다. 4사건의 발발배경과 진행과정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 제주조직이 바로 이 시기에 발족됐다. 또한 광복군 출신 이범석(李範奭)이 이끄는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단부도 창립됐다.
대청은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인 이청천(李靑天)을 중심으로 1947년 9월 21일 발족됐다. 22개 우파청년단체를 규합한 대청은 창립 때부터 이승만의 정치노선 지지를 분명히 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우파청년단체로 대한독립촉성청년연맹 제주도지부(위원장 김충희)와 광복청년회 제주도지회(단장 김인선) 등 두 개 단체가 조직돼 있었는데, 이 두 단체는 대청이 흡수한 단체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자연스럽게 통합문제가 거론됐다.
따라서 중앙의 모임 통합 소식을 전해듣고 1947년 9월 2일 두 단체의 제주조직은 대동청년단 제주도지부 결성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제주의 두 우파청년단체는 임원 구성문제 등을 둘러싸고 헤게모니 다툼이 벌여져 결국 ‘2개의 대청’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즉 9월 30일 광복청년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대청 제주도지단부를, 10월 3일에는 독립촉성청년연맹 중심으로 대청 제주도지부가 각각 결성된 것이다. 그러나 양측은 11월 4일 공동으로 대청으로의 통합 성명을 발표하고 12월 21일 대청 제주도단부 임시대회를 열어 단장에 김인선을 선임하고 김충희를 고문으로 추대함으로써 분열상을 매듭지었다. 1947년 11월 중앙에 보고된 대청 제주지부의 단원 수는 1,000명이었다.
그런데 이 두 단체의 갈등을 봉합하고 합치는 일에 미군 CIC가 개입했다는 보고서가 있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보고서는 또 대청의 단원 모집과정에서 잦은 테러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즉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CIC 정기보고를 인용, “제주도는 최근 대동청년단의 단원 확보운동과 관련하여 테러행위가 잦았던 곳이다. 방첩대는 제주의 (테러 행위) 중단과 모든 우익단체의 통합이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다”고 기록했다. 대청 제주조직은 각 지방으로 확산, ‘4’ 발발 당시에는 경찰지서에서 단원들이 철야근무를 하는 등 ‘경찰보조단체’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대청 제주조직이 제주출신 반공청년들로 구성된 반면, 서청은 이북출신으로만 조직된 반공청년단체이다. 서청 제주도본부가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다. 이날 제주극장에서 제주도본부 결성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장동춘(張東春)을 선출했다. 그러나 서청 단원들은 1947년 3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 공산당 집단에 쫓겨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많았다. 처음에는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7년 하반기부터는 경찰, 행정기관, 교육계에서 근무하는 단원들이 늘어났다.
서청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선우기성이 그의 저서에서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나돌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날이 갈수록 그 위세가 등등했다. 서청은 당시 이승만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서청이 “‘반민주적’이라고 의심되는 인사들에 대해 정력적으로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며 ‘빨갱이 사냥’에 매달렸다”고 지적하고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미‧소 공위에 협력하거나 반대시위를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도 좌익분자를 철퇴한다는 미명 아래 서청에 의한 테러가 자주 발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상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결부됐다.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아예 없었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의 기록, 즉 “서청 순회 조직에 의해 제주도 주민들에게 가해진 테러 소동에 대해 서청 지도자는 11월 18일 방첩대에 사과하고, 단원들이 더 이상 테러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익들은 서청 자금 모금을 테러에 의존해 왔다. 구타사건이 5건 일어났고, 적어도 같은 수의 협박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에서도 그 실상을 읽을 수 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그 다음날의 CIC 보고를 통해 서청 제주위원장이 제주 방첩대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무렵의 제주지방심리원 판결문 중에는 서청 대원의 폭력행위를 처벌한 기록도 있다. 기소된 서청 대원은 서청 제주도본부 총무부장 이 아무개로 1947년 11월 28일 민청 활동을 했던 청년을 서청 사무실로 끌고가 무수히 구타했는가하면 3일 후에는 밀항선을 단속한다고 주민을 붙잡아 심문하면서 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 서청 대원의 폭력행위에 대해서 벌금형을 선고했다.
‘4’ 발발 이전에 제주에 상주한 서청 단원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좌파 쪽의 자료는 제주읍 300명을 포함해 모두 760명이 상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청 단원의 제주 파견은 ‘4’발발 이후 더욱 늘어난다. 당시 서청 단장을 지냈던 문봉제(文鳳濟)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4사건이 나자마자 서청 단원 500명을 경찰전투대 요원으로 보낸 적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서청 단원들에게 ‘제주도는 악몽의 섬’이었고, 제주도민의 입장에서는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고 표현한 글이 있다. 그러나 실제의 상황은 이보다 더 험악했다.
족청 제주도단부 창립위원회 결성식은 1947년 11월 5일 제주읍사무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날 결성식에서 위원장에 제주도건준 부위원장을 지낸 최남식을 선출했다. 그러나 최남식이 바로 그 날 사임함으로써 후임에 백찬석(白璨錫)을 선임했다. 우파청년단체의 후발조직인 족청은 단원 모집과정에서 선발조직인 대청과 심지어 서청의 견제를 많이 받았다. 특히 1948년 5 단독선거를 앞두고 총선거 참여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당시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던 이승만 계열의 불만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4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족청 단원들이 ‘빨갱이’로 몰려 집단으로 사살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런 우파청년단체들이 조직을 강화하는 데 유해진 도지사와 미 CIC의 역할이 컸다. 우익강화 정책을 폈던 유해진 도지사는 광복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의 고문을 각각 맡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역유지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백색테러의 배후인물로 지목되는 사건이 있었다.
1947년 9월 6, 7일 이틀간 제주민전과 관련이 있는 제주읍내 지역유지 집에 괴한 6～7명이 잇달아 침입, 닥치는 대로 기물을 부수고 사람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 제주사회에 충격을 줬다. 첫날 피해를 당한 사람은 제주도식량사무소 박태훈 소장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침입자들은 박 소장을 당시 제주민전 의장인 박경훈으로 잘못 알고 테러를 가했다는 것이다. 박태훈은 박경훈의 동생이었다.
둘째날 침입자들이 공격한 집은 박경훈 바로 앞에 민전 의장을 맡았던 현경호 제주중 교장 집이었다. 당시 현경호는 집에 없었는데, 감찰청 직원이라 사칭한 침입자들은 10분간 방안을 수색한 뒤 현경호 부인을 곤봉으로 강타했다는 것이다. 수사에 나선 미 CIC는 사건 발생 직전에 괴한들이 두 차례 현 교장 집에 전화를 건 사실을 확인하고 전화국을 조사했다. 그런데 교환수는 그 전화가 유해진 도지사의 집에서 건 것이라고 진술했다. CIC의 추궁을 받은 유 지사는 전화 건에 대해 모른다고 부인했다. 이 침입자들은 서청 단원들로 알려졌으나 사건 처리는 흐지부지됐다.
미 CIC는 정치단체의 움직임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미 CIC 요원들이 제주에 상주하게 된 것은 3사건과 3 총파업 직후인 1947년 3월 중순께였다. 제주 CIC의 첫 보고는 그 해 3월 21일 제출된 ‘제주 우익정당이 허약하다’는 내용부터 시작됐다. 남한을 담당했던 � 방첩대 역사｣에는 1947년 5월 당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9개소에 지구대가 설치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CIC 제주지구대는 1948년 말에도 계속 운영된 것으로 나와 있다.
CIC의 제주 상주가 단순히 사건분석 보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판도와 그 역학까지 분석하면서 상황에 따라 개입해온 사실은 여러 군데의 정보보고서에서 입증되고 있다. 제주에서 2개의 조직으로 혼선을 빚던 대청을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통합했다거나 테러를 자행해온 서청 단원들이 CIC에 사과하고 적법 준수를 약속했다는 내용 등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제주 CIC는 1947년 12월에 의미심장한 보고를 한다. 그것은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것”이라는 첩보보고였다.
또한 1948년 1월 제주 CIC의 보고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최근 좌익인사들의 활동’이란 제목의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도 눈길을 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2사건과 고문치사
1)2사건
한반도 문제를 상정한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14일 미국 안을 통과시켰다. 유엔총회 결의는 한국 국민 대표들을 선거로써 뽑되 공정한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설치하며, 선거는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남‧북한에서 동시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거 후 가급적 빨리 국회를 구성,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 결의는 그러나 소련의 협조 없이는 그 목적을 실현할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월 초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예견됐던 대로 소련의 거부로 북한을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유엔은 한국위원단의 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안’을 상정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미한 것이었다.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반대 이유는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다는 것이었다. 이 반대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남한 단독선거 찬반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나는 단독정부 반대‧남북협상의 추진을 내걸고 통일운동을 주창한 김구‧김규식 등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미군정과 보조를 맞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던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노선이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 7일을 기해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고 간 이른바 ‘2구국투쟁’이었다. 남로당은 이때 9개항의 투쟁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 맡겨라
4.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5.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6. 노동임금을 배로 올려라.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8.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민전도 이에 호응, 2월 7일 “전 조선인은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을 선두로 위대한 구국투쟁에 궐기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남로당의 지령으로 이날 새벽부터 전평 산하의 각 단위노조를 시발로 전국 각 지역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철도‧전신‧전화‧체신‧공장‧광산 등이 일제히 파업을 하였고 부산에서는 선박데모도 있었다. 총파업에 참가한 노동자의 수는 약 30만 명에 달했다.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 파괴,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등 극렬한 행동도 있었다.
이 2사건으로 2월 7일부터 2월 20일까지 전국적으로 집계된 통계에 의하면 파업 30건, 맹휴 25건, 충돌 55건, 시위 103건, 봉화 204건, 검거인원 8,479명으로 나타났다. 경무부가 발표한 인명피해는 사망 39명, 부상 133명으로 집계됐다.
한편 2월 7일 제주도는 경찰의 비상경계 속에 의외로 조용했다. 미 24군단의 정보보고서도 처음에는 “제주도는 2월 7일 이후 소요 기간 내내 아주 조용하다. 2월 7일 첫 폭동이 일어난 이후 제주도의 소요는 불법집회나 삐라 살포로 제한되어 있다”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2월 8일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여러 지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도 나중에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 즉 “2월 9, 10, 11일 밤, 제주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다.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미군 보고서에 나온 경찰지서 6개소 습격 사실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계리 경찰관 린치사건과 고산지서 발포사건 등은 당시 신문자료와 체험자의 증언을 통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사계리 경찰관 린치사건은 1948년 2월 9일 일어났다. 안덕면 사계리 청년들은 이날 향사에 모여 남한 단독선거 반대 집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을 안에 경찰관 2명이 들어와 있는 것을 알고 급습하게 된 것이었다. 청년들은 경찰관들을 향사로 끌고가 마을에 머물게 된 경위와 밀고자를 대라고 추궁했다. 청년들은 3사건 이래 마을 집회가 있을 때마다 정보가 누설되고 있다고 보고 내통자를 찾는 데 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뭇매를 맞던 경찰관들은 뒤늦게 출동한 경찰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일부 자료에는 ‘서광리 경찰관 생매장사건’으로 잘못 기록되고 있다.
고산지서 발포사건은 2월 10일 시위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발포, 주민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음력 설날인 이날 한림면 고산리 청년 100여 명은 마을을 돌며 ‘왓샤 시위’를 한 뒤, 지서 앞으로 몰려 왔다. 이때 지서 안에는 경찰관 3명뿐이었다. 경찰은 총알이 장전된 총을 겨누며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경찰은 청년들이 응하지 않자 발포, 마을 청년 신응선(申應善)의 다리에 총상을 입혔다. 이 한 발의 발포로 군중들은 흩어졌다. 나중에 시위 주모자 10여 명이 검거됐다.
2사건 이후 또다시 전도적으로 검거선풍이 불었다. 경찰은 제주읍 삼양리 한 마을에서만 주민 94명을 연행했다가 석방하기도 했다. 이 무렵 구금자들에 대한 경찰의 취조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2)고문치사 사건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 제주사회의 민심을 동요시켰다.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金用哲,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 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3월 14일 모슬포지서에서 유치 중이던 대정면 영락리 청년 양은하(梁銀河, 27세) 역시 경찰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3월 말에는 서청 경찰대에 붙잡힌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朴行九,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초주검상태에서 끌려가다가 총살당한 충격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제주도에서 해방 이후 1947년 3사건 이전까지 경찰의 고문문제가 제기된 적은 없다. 그러나 3사건 이후 경찰의 고문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특별수사과의 강압적인 수사기술은 공포대상이 되곤 했다. 응원경찰이 철수하면서 교체 경찰력으로 제주에 들어온 철도경찰과 이북출신 경찰관들은 제주사람들을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시각으로 본 반면, 현지 주민들은 이들 외지출신 경찰관들을 ‘육지 것들’이란 반감과 경원의 눈초리로 볼 때가 많았다. 이런 심적인 갈등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면서 다양한 고문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조천지서 고문치사 사건은 사건 발생 6일만에야 지방언론에 처음 보도됐다. 제주신보의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구서(1區署) 조천지서에 작년 3사건의 피의자로서 유치 중이던 동리 청년이 유치장 내에서 급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동 사망자는 조천면 조천리 하동에 주소를 둔 김용철(당년 22세)이란 청년인데, 작년 3사건의 피의자로서 경찰에서 수배 중이었는데, 지난 3월 4일 미명 동면 대흘리 2구에서 피신 중이던 것이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 중이었던 바, 6일에 이르러 돌연 급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검찰당국에서는 이 보고를 접하여 익(翌) 7일 채용병(蔡龍秉) 검찰관 지휘 하에 의사 장시영(張時英)씨 외 관계관 등이 급거 현지에 출장하였는데 경찰감찰 부청장 박근용(朴根容)씨와 CIC 미인(美人)도 동행 입회 하에 사체를 해부 검시하는 한편 사인에 대하여 면밀한 현장조사를 마치고 귀읍(歸邑)하였다는 바, 앞으로도 의사의 감정서에 의하여 조사를 계속하리라 하며 CIC에서도 검찰당국과 병행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이 보도 이전에 벌써 조천 지역에서는 지역민들이 김용철의 죽음을 고문에 의한 사망으로 여기고 민심이 들끓었다. 경찰 측에서는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둘러댔으나 시신 전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어서 설득력이 약했다. 조천중학원 학생들은 사인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지역 유지들도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철저한 조사를 군정당국에 요구했다.
이 조사는 검시의사 선정에서부터 잡음이 일었다. 경찰 측에서는 당시 제주도청 보건후생국장 송한영 의사를 검시의사로 적극 추천했다. 공교롭게도 송 의사나 제1구경찰서장(문용채) 수사과장(성범용), 그리고 사건을 유발한 조천지서 주임(조한용)이 모두 이북출신이었다. 그러나 검찰당국은 검시의사로 제주출신 장시영을 선택했다.
부검은 이례적으로 두 차례 실시됐다. 1차 부검은 경찰 측의 훼방으로 건성으로 마쳐졌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미군 고문관은 재부검을 지시했다. 다음날 실시된 2차 부검 결과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 결정적인 사인으로 밝혀졌다. 의사 장시영은 경찰의 계속되는 회유를 뿌리치고 “타박으로 인한 뇌출혈이 치명적인 사인으로 인정된다”는 감정서를 제출했다. 이 한 장의 감정서가 조천지서 경찰관 5명 전원의 구속사태를 몰고 왔다. 고문현장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경찰관들은 김용철을 거꾸로 매달아 곤봉으로 쳤다는 것이다.
조천지서 사건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3월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또다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신보는 이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6일 조천지서에 검속 중인 한 청년이 급사한 사건에 대하여 아직 그 진상이 판명되지 못한 관계로 일반의 억측이 구구하고 있는 이때, 또다시 모슬포지서에서 검속 중에 있는 한 청년이 작 14일 아침 돌연 급사한 사실이 있었다. 즉 대정면 영락리에 거주하는 양은하(27)란 청년은 포고령 위반 피의자로서 모슬포지서에 검속되어 있던 중 작 14일 아침 4시 돌연 급사하였다는데, 이 급보에 의하여 제주검찰청 박 청장 및 제주경찰감찰청 수사과장과 십자의원 문종후 의사가 급거 현장에 출장하여 검시한 결과 ‘고환’(불알)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되어 담당 취조경찰 고응춘(高應春‧순경) 및 변태문(邊太文‧형사) 2명을 경찰청장 명의로 즉석에 검속하고 방금 엄중 취조 중에 있다 한다.
이 사건은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경찰, 불법행위로 체포. 3월 14일 2명의 경찰관이 모슬포에서 죄수 1명을 구타해 치사시킨 혐의로 동료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는 내용이다. 양은하는 당시 마을에서 연설을 잘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경찰에 검거되기 직전에도 ‘조국이 분단되기 때문에 단독선거를 반대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양은하와 함께 모슬포지서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한 증언자는 “지서에서는 매질부터 시작했다. 주로 몽둥이로 때리거나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워 위에서 밟기도 하고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이 더욱 울분을 느꼈던 것은 경찰관들이 심심하면 한 사람씩 불러내 장난삼아 고문을 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양은하의 동생은 “경찰관들이 형님의 머리카락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결국 불알이 상해 숨지게 됐다”고 증언했다. 이 때도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소식을 들은 양은하의 형제들이 지서에 달려갔을 때 지서 뒷마당에 시신을 묻으려고 했는지 시신 옆에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2건의 고문치사 사건은 1948년 4월 17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제4차 회의에서도 거론됐다. 이 회의에서 제주도를 시찰했던 프랑스 대표 마네(Manet)가 고문치사 문제를 제기했고, 딘 장군이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관련된 회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그룹의 요원으로서 마네는 한국 경찰이 가끔 일본인들로부터 전수 받은 방법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딘 장군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였으며, 심문 도중 제주도 경찰에 의하여 발생했던 두 명의 한국인의 죽음을 언급했다.…미 군정장관인 딘 장군은 3월 6일에 발생했던 그 사망사건 가운데 한 건은 조사가 완료되어서 군사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사망사건에 대한 조사는 지금 진행 중에 있다. 만일 그 조사에 의하여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유죄가 있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게될 것이다.
두 사건이 이런 국제적인 조명을 받은 때문인지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 경찰관 11명 모두 군정재판에 회부되어 전원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즉 조천지서 경찰관들은 1948년 5월 6일 3명이 징역 5년, 2명이 징역 3년을, 모슬포지서 경찰관들은 6월 9일 5명이 징역 5년, 1명이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은 것이다.
앞의 고문치사 사건들이 유엔임시위원단에서 거론될 정도로 조명을 받았다면, 박행구의 총살사건은 ‘4’발발이란 급박한 상황에 파묻혀진 사건이다. 한림면 금릉리 청년 박행구는 경찰과 서청에 잡혀 집단구타를 당한 뒤 즉결총살을 당했다. 사건 전날 마을 안에서는 선박 진수식이 있었는데, 술에 취한 박행구가 우익청년들과 사상논쟁을 벌이다가 ‘민족을 팔아먹는 민족반역자’라고 소리 높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사망일은 1948년 3월 29일로 추정되고 있다.
라.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준비
1)1 검거사건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키도록 명령했다(CHEJU-DO, Communists Ordered To Riot Between Middle February, 05 March)=1월 22일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이 노획해서 번역한 문건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또한 문건에는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몇몇 남로당 간부들이 새벽 3시에 회의장을 급습한 경찰을 피해 달아난 것으로 여겨지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106명이 체포되었고, 같은 날 정오 이전에 63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등사기와 다량의 서류가 압수되었다.(방첩대 정보요약, 2월 5일, C3)
폭동 지령 문건이 발견된 공산주의자들의 불법회합과 관련하여 1월 22일 체포된 106명 외에 1월 26일까지 좌익분자 115명이 추가로 검거되었다. 총 연행자 221명 중에서 63명이 경찰의 심문을 받은 다음 방면되었다. 방면된 자들은 공산주의자인 남로당 당원이었다. 미방면자들의 정치적 성향은 보고되지 않았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32호, 경찰 보고)
이 글은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요약하면 ①1월 22일 새벽 3시 경찰이 남로당 조천지부 불법집회장을 급습, 106명을 체포한 것을 시발로 1월 26일까지 모두 221명을 검거했고 ②‘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내용의 문건 등을 압수했으며 ③연행자중 남로당원 63명을 방면했다는 내용으로 압축될 수 있다. ‘제주도 남로당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주한미군 971 방첩대 보고서에는 압수된 문서 중에 유엔 위원단과 총선거, 군정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내용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이하 ‘남로당 제주도당’으로 약칭)는 1947년부터 대규모 세력확장을 시도하면서도 당원들을 비밀리에 관리했다. 특히 3사건 이후 몇 차례 검거선풍이 불어닥치면서 철저한 점조직으로 당원들을 관리했다. 당시 미군정이나 경찰 측에서는 남로당 제주도 조직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계보나 당원 범위 등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남로당 자체의 철저한 조직관리에 기인하고 있지만, 경찰의 정보망이 주민과의 거리감으로 대중 속을 파고들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이처럼 비밀의 베일에 가려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체계가 노출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1948년 1월 중순께 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 김생민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시작됐다. 경찰의 고문과 회유에 버티던 김생민은 구금 일주일만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직부 연락책의 전향은 베일에 쌓였던 남로당 제주조직 체계의 전면 노출이나 다름없었다. 경찰은 이런 정보를 토대로 1월 22일 조천면 신촌리를 급습한 것이다. 신촌리는 김생민의 고향이자, 당시 도당 조직의 핵심인 조직부 아지트가 있었다. 조직부장은 바로 김달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황을 감안하더라도 앞의 미군 정보보고서 내용은 몇 가지 의문점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는 새벽 3시에 1백 명 이상 집단적으로 모이는 남로당 집회가 있었을까 하는 점, 둘째는 2월 중순에서 3월 5일까지 폭동을 일으키라는 문서의 진위, 세 번째는 남로당 당원을 방면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첫 번째 의문부터 실제 상황은 보고내용과는 다른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그 날 새벽 경찰에 연행 당했던 주민들의 증언에서 나왔다. 당시 18세의 청년이었던 허춘섭의 증언내용이다.
그날 새벽에 경찰관 2명이 집으로 들어오더니 ‘새로 부임한 경찰서장의 강연이 있으니 학교로 나오라’고 말했다. 그런 줄 알고 국민학교로 갔더니 신촌리민 거의 나와 있었다. 그리고 학교 울타리 주변에 70～80명의 경찰관이 깔려 있고 GMC 7～8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노인과 어린애, 장애자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경찰서장 강연 들으러 경찰서에 간다고 했다. 트럭을 타고 제주읍내 관덕정 옆의 제1구경찰서까지 갔다. 그때까지 친절하던 경찰관들이 하차할 때 갑자기 태도를 돌변, “남로당 놈의 새끼들”이란 말을 하기에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갔던 사람들은 모두 명부를 작성한 뒤 유치장에 분산 수용됐다. 수백 명이 갔으니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날부터 차례로 불러다 고문을 하는데 장작과 ‘쇠좆매’로 쳤다. 주된 내용은 남로당의 가입 여부였다. 이를 부인하면 고문을 했다. 경찰은 연행했던 사람들을 몇 차례에 걸쳐 석방했다. 이덕구 등 6명이 가장 오래 살았는데, 그들도 42일만에 풀려 나왔다.
허춘섭은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사전에 피했는지 거의 빠졌고, 이때 붙잡힌 이덕구(유격대 2대 총사령)는 심한 고문으로 고막이 터지고 발가락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이 내려친 장작에 맞아 어깨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해 열흘만에 풀려 나왔다는 김인평은 “우리 집은 형제가 잡혀 들어갔다. 그때는 추운 겨울철이어서 사촌 여동생이 우리 옷을 갖고 경찰서에 왔다가 오히려 경찰에 잡혀 고생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왜 구금 당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김생민도 정작 마을주민들의 연행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이 제공한 남로당 조직체계도는 면당 책임자 이상의 간부였는데, 나중에 보니 일반주민들까지 경찰에 붙잡혀 왔었다고 증언했다. 이상의 증언내용을 토대로 정황을 분석해보면, 김달삼 등 핵심간부를 놓친 경찰이 일반 마을 주민들까지 연행해놓고 미군 쪽에는 ‘남로당 불법집회 참여자’ 검거로 보고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연성이 있다.
두 번째 의문은 폭동 지령 문건이다. 이 문건은 누가 지령했는지 그 실체도 나와 있지 않지만, 나중에 진행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투쟁 결정과정을 보더라도 그 시점에 의문점이 있다. 이에 대해 좌파쪽 자료는 “남로당 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꾸며낸 유언비어”라고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제주 CIC가 이런 중요한 정보를 보고하면서 정보의 신뢰도를 ‘C3’으로 평가한 점이다.
세 번째의 의문인 ‘남로당원의 방면’은 그 시점에서는 매우 미묘한 것이었다. 증언내용을 보더라도 남로당 가입여부를 가려 그 자체만으로도 제재하려는 경찰 측의 의지는 강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그때까지도 표면적으로는 남로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한반도문제를 유엔에 상정시킨 미국은 남한 내에서의 어떠한 정치집단도 하등의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음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있었다. 서울에 들어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1월 23일 남북한의 선거에 대한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과 북한 3명 등 모두 9명의 정치가를 지명했는데, 남한 정치가로는 이승만, 김구, 김성수, 김규식 이외에 남로당 지도자 허헌, 박헌영이 포함됐다는 점도 눈여겨 볼 점이다.
한 남로당 연구자는 “미군정 하에서 남로당은 합법정당이었으므로 그때까지도 남로당원이란 이유만으로 구속되지는 않았다. 남로당원들이 구속될 때는 당원이란 이유에서가 아니라 허가받지 않은 집회 참석, 혹은 폭동모의 등에 가담했다는 이유 등으로 미군정 포고령 제2호 등의 저촉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당시의 분위기는 ‘1 검거사건’ 일주일만인 1월 30일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의 회견에서도 엿볼 수 있다. 김 청장은 “피검자 중 무고한 자는 속속 석방하는 중”이라고 전제하고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자를 탄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비합법적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라고 표명했다.
그러나 조직부 연락책의 전향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1 검거사건 이후에 전도적으로 경찰의 남로당 간부 검거작업은 지속되었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안세훈을 비롯해 김유환, 김은환, 김용관, 이좌구, 이덕구 등 거물급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무장투쟁의 핵심인 김달삼도 경찰에 붙잡혀 연행도중 도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도 남로당 조직을 전면으로 노출시킨 이 검거선풍의 사후처리는 흐지부지됐다. 폭동음모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 못한데다, 1948년 3월에 이르자 5선거를 앞둔 미군정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요청을 받아들여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특사령을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주도 남로당 거물급 인사들도 ‘4’발발 이전에 모두 석방됐다.
그럼에도 당 조직의 폭로는 단순히 제주도 남로당 조직이 노출됐다는 사실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제주도당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다. 남로당 조직원 사이에는 조직의 와해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긴장감이 팽배했다. 결국 이런 위기의식을 부추긴 강경파의 주도에 의한 지도부의 개편작업은 바로 무장투쟁을 촉발하는 한 동인(動因)이 됐다.
2)무장봉기 결정과정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이후 미군정과 좌파간에 치열한 대립국면이 표출됐다. 좌파진영에서는 시위, 삐라 살포, 전주 절단, 철도 파괴, 지서 습격 등의 격렬한 선거 반대 캠페인을 전개했다. 2월 26일 전북지방의 경찰지서 26개소가 일시에 피습 당해 4개소가 파괴되고 2개소가 소실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전국에서 1월에 1건도 없었던 경찰관서 습격이 2월 한달 동안 무려 125건이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급박한 전국 상황은 조직 노출이란 치명타를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세대 교체와 노선 변화를 촉진시켰다. 남로당 자료는 이 상황에 이르자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일어나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장봉기 논의 과정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도당 지도부 내에서조차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히 맞섰다. 정세판단과 대응책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명분론과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당 조직을 장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강경파에게 5선거는 통일을 가로막는다는 논리로 대중선전의 좋은 명분이 됐다. 경찰과 서청 등의 탄압으로 이반된 민심을 끌어 모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이와 함께 만약 단독정부가 수립된다면 당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무너지므로 조직 수호 차원에서도 단독선거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웠다.
강‧온건파 간의 노선 갈등으로 ‘4’발발 직전에는 제주도당 지도부 핵심세력이 종래의 일제하 사회주의 노선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로서 강경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23세의 청년 김달삼이었다. 대정중 교사였던 그는 1947년 3사건 때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도당에 총파업을 건의한 바 있고, 그 이후 도당 조직부 차장,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무장투쟁이 결정된 다음에는 유격대 조직을 총괄하는 군사부 책임을 맡게 된다. 나이 어린 김달삼이 이처럼 부상한 데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이자 선전부장이었던 장인 강문석(姜文錫)의 후광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촌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 현재 도쿄에 살고 있는 이삼룡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오르그는 늘 왔으며, 김두봉의 집이 본거지였다. 해방 후 강문석은 한번도 제주에 오지 않았다. 김달삼은 20대의 나이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제주를 떠난 뒤였다.
그런데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는 아니었다. 미군에게도 맞대응할 생각이 없었다. 미군에 대해 다소 감정이 있었지만 그들은 신종 무기가 많은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우선 시위를 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장기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익렬(9연대장)과도 회담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다. 그러나 봉기가 결정된 후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니까 ‘우리의 결정이 정당한 것 아닌가’하는 분위기였다.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 노출이 안된 것은 그래도 조직이 지켜진 것이다. 4 발발 후 나는 정치위원으로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소재한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
이삼룡의 증언은 그동안 회자되던 ‘신촌회의’의 실체를 어느 정도 구체화시켰다. 무장투쟁이 강‧온건파의 논쟁 속에 12대 7로 결정됐다는 것도 새롭게 알려진 사실이다. 무력투쟁 대상을 경찰과 서청으로 한정했지 결코 경비대나 미군이 나서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남로당 관여자들의 증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그들은 투쟁 지도부가 국내외의 정세를 너무 안일하고 자기 쪽에 유리하게만 생각하는 정세판단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김시종은 “나는 ‘4’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개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남로당 대정면책으로 1947년 3사건 직후 옥고를 치렀던 이운방은 “무장투쟁을 주장한 신진세력들은 정세를 낙관했다. 당시 단선을 저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상황에서 제주도 봉기는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봉기를 유발시켜 제주도에 진압병력을 추가로 내려보내지 못할 것으로 파악했다. 경비대는 중립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또한 국제문제로 화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진압에 관여하지 못할 것으로 인식했다”고 밝혔다.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 연락책으로 활동하다가 전향, 경찰관 생활을 했던 김생민은 “우리는 북한이 1949년에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남‧북에서 양군이 철수를 하면 이젠 국내문제이고, 그러니까 미군이 철수하고 남로당 세력이 강하고 이북에는 팔로군이 들어와 있어서, 국제정세나 국내정세나 모두 유리하다고 보았다. 강경파들은 그래서 무장투쟁을 하며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본 것이고, 온건파들은 ‘우리만 고립된다’고 반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무장투쟁 결행방침은 1948년 3월 15일께 전남 도당 조직지도원(오르그)까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남로당 제주도상위(島常委)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이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주도에 있어서 반동 경찰을 위시한 서청, 대청의 작년 3 및 3 투쟁 후의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인한 인민의 무조건 대량검거, 구타, 고문 등이 금년 1월의 신촌사건을 전후하여 고문치사 사건의 연발로써 인민 토벌 학살 정책으로 발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단선‧단정 반대, 유엔 조위(朝委)격퇴 투쟁과 연결되어 인민의 피 흘리는 투쟁을 징조하게 되었다.
3 투쟁에 있어서의 각급 선전 행동대의 활동은 그후의 자위대 조직의 기초가 되었으며 3투쟁 직후 도당의 지시에 의하여 각 면에 조직부 직속 자위대를 조직하게 되었으나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사태가 더욱 악화됨을 간취한 도상위는 3월 15일경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
결국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두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 ’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논의과정에서 새롭게 부상한 신진세력들이 국내외 상황을 낙관하고 무리하게 무장투쟁 쪽으로 몰고 갔다. 따라서 그들의 정세판단이 무모했다는 지적도 있다.
3)무장봉기 준비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에 대비해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무장세력과 보급, 무기 확보 등의 작업에 들어갔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3월 15일 이후의 조직 정비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3월) 25일까지를 준비 기간으로 하여 도상임(島常任‧특히 투위 멤버)으로써 군위(軍委)를 조직 투쟁에 필요한 자위대 조직(200명 예정)과 보급, 무기 준비, 선전 사업 강화에 대하여 각 책임을 분담
예정 기간을 넘어 3월 28일 비로소 재차 회합을 가져 기간의 준비 사업에 관한 각자의 보고를 종합 검토한 결과, 4월 3일 오전 2시～4시를 기하여 별항의 전술 하에 무장 반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음.
남로당 제주도당은 당 조직을 투쟁위원회로 개편하고 군사부를 신설했다. 군사부 밑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는데 군사위원장은 군책과 총사령관을 겸하도록 했다. 무장투쟁의 실권이 주어진 이 자리는 김달삼이 맡았다. 무장대 조직으로는 유격대(톱부대)와 자위대, 도군사위원회 직속의 특경대 등 3개 그룹으로 구성했다.
3월 28일 점검 결과 제주도내 13개 읍면 중 제주‧조천‧애월‧한림‧대정‧중문‧남원‧표선 등 8개 읍면에서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모두 320명이 편성됐다. 무장대는 소대 10명, 중대 20명, 대대 40명 등의 소단위 인원으로 부대 체계를 갖췄다.
확보된 무기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나중에 자세히 살피겠지만, 일부 자료에는 일본군의 무기들을 확보, 대단한 무장을 했고 심지어 기관총, 대포로 중무장했다고 표현한 글들이 있으나 실제 확보된 총은 30정에 불과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가장 중요한 수류탄과 휘발유탄을 구입 못해서 이것이 4 투쟁에 실패의 결정적인 한 원인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 한라산 중턱 오름에서 지역청년들이 모여 무장훈련 받는 모습이 목격됐다. 3월 20일께 애월면 중산간지대인 ‘새별오름’에서 무장대와 경찰간의 첫 충돌이 있었다. 당시 새별오름에서 한림면 일대 자위대 67명이 합숙하며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이 합숙훈련장에 애월지서 경찰관과 서청‧대청 단원 등 9명이 급습한 것이었다. 이에 무장대 측에서 발포하자 경찰관 등이 퇴각했다. 이날 충돌로 자위대 1명이 경상을 입었을 뿐 쌍방의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은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위원회는 제주읍내 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는 경비대 병력을 동원해 점령하고 도내 14개 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원들이 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제주도당에서는 모슬포 소재 경비대 제9연대에 4명의 조직원을 침투시켰다. 이 가운데 2명은 중도에 이탈했으나, 2명은 ‘프락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전에 프락치를 접촉, 제주경찰감찰청 등의 습격작전에 경비대원 동원 가능성을 타진하자 그 프락치는 9연대 전체 병력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고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과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러나 9연대에는 차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동차 5대만 보내주면 좋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도보라도 습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4월 3일 당일 경비대 동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도당 파견원이 자동차 5대까지 준비해 갔으나 9연대 프락치를 접촉할 수 없었다. 수소문을 해봤더니 프락치 2명은 영창에 감금되어 있었다.
4)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진위
일부 자료에는 4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그 배후에는 북한과 소련이 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한 글들도 있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원은 박갑동(朴甲東)의 글에서 비롯되고 있다.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은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남기고 싶은 글｣에서 ‘4’문제를 언급했다. 그 글에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에 의해 4사건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있다. 박갑동의 연재내용은 1983년 박헌영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나왔다. 이 글은 그때부터 보수적 입장에 있는 필진들에 의해 재생산, 인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박갑동의 글 가운데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대한 ‘적극적인 보이코트’지령에 따라 남로당이 대대적인 무장폭동장소로 택한 곳이 제주도다. 남로당이 굳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를 택한 이유는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공산당의 조직활동이 가장 활발했고 따라서 그들의 선전과 조직활동 등으로 도민의 사상이 자못 붉은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의 무장행동대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4월 3일 상오 2시, 문상길이 부대장병들을 속여 완전 무장시킨 뒤, 3대의 트럭으로 제주경찰감찰청과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는 것을 신호로 도내 14개 서를 모조리 습격했다.
…당시 중앙당에서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또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로 보냈었다.
그런데 이 글은 실제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진 내용들이었다.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서부터, 문상길 부대가 경찰감찰청 등을 점령한 것, 14개 서를 모조리 습격했다는 내용, 이중업‧이재복‧강문석을 제주에 파견했다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다.
도쿄에 살고 있는 박갑동은 문제된 글에 대해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내 글을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박갑동은 이어 “4이 5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 4은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로당 전문 연구가인 김남식은 “남로당의 5선거 저지투쟁은 대중동원에 의한 정치투쟁과 폭력투쟁을 배합한 복합형태이지 전면 무력투쟁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제주 봉기 이후 본토에서 호응투쟁도 없었다. 제주도의 특수여건이 김달삼 등의 선동에 의해 터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존 메릴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4월 3일의 공격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캠페인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제주도당부의 전투적인 지도부의 주도 아래 감행되었다”고 분석했다. 존 메릴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조사 결론으로는 중앙당의 지령이 없었다는 것이다”고 밝히고 “4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대의 분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남로당에 관여했던 증언자들도 중앙당의 지령설을 부인하고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행동이었음을 밝혔다.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이었던 이삼룡은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7년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에서 “4 투쟁은 일부의 미숙하면서도 모험적인 분자들에 의하여 시기 아닌 시기에 하등의 세심 세밀한 준비도 없이 단지 몇 자루의 소총을 가지고 무장봉기로 저돌맹진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국적 투쟁의 일환으로부터 자의로 이탈해서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개시되었고, 고립무원의 환경 가운데서 적연히 막을 닫게 되었다”고 표현했다.
중앙지령설에 대한 의문은 군 장성출신들의 저서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김점곤(소장 예편)은 그의 저서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에서 육‧해‧공으로 격리되어 있는 제주도로부터 적화를 확대시키어 북상을 시도한다는 것은 이 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물리적 능력과 정치적인 상황에 비추어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폭거라는 점 등 6가지 이유를 내세워 중앙지령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5선거 반대투쟁에서 제주도만이 특이하게 이질적인 투쟁형태를 보였고, 이는 당노선에 대하여 일종의 돌기물적 성격임이 틀림없었다”고 기술했다.
1948년 지리산 진압군 사령관을 지낸 백선엽(대장 예편)은 그의 저서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적고 있다.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가 없었다는 사실은 제주도당이 시도했던 4월 3일 경비대의 동원계획이 무산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 문제를 다룬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國警)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 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 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 소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었음.
그래서 4 투쟁 직전에 고 하사관이 문 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된다고 투쟁 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고 함.
이 말을 듣고 도 파견 국경 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으니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 재사 요청하였으나 중앙 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결국 거절당했음. 이리하여 4 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원에 의한 거점 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음.
이 기록은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도 무장투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는 단서가 되고 있다. 따라서 4사건은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다.
Ⅲ.전개과정
1.무장봉기와 5선거(1948.4.3～1948.5.10)
가.1948년 4월 3일 상황
1)무장봉기의 슬로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된 유혈사태의 시발이었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같은 무장대의 슬로건은 1963년 일본에서 간행된 김봉현‧김민주 공저의 제주도인민들의 4무장투쟁사에 소개되어 있다. 이 책자에는 4월 3일 무장대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뿌렸다는 2개의 ‘호소문’ 내용이 담겨 있다. 아래의 내용은 무장대가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경찰‧공무원‧대동청년단 단원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친애하는 경찰관들이여! 탄압이면 항쟁이다.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들을 수호하며 동시에 인민과 같이 서고 있다. 양심 있는 경찰원들이여! 항쟁을 원치 않거든 인민의 편에 서라. 양심적인 공무원들이여! 하루빨리 선을 타서 소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직장을 지키며 악질 동료들과 끝까지 싸우라. 양심적인 경찰원, 대청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를 위하여 싸우는가? 조선사람이라면 우리 강토를 짓밟는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 나라와 인민을 팔아먹고 애국자들을 학살하는 매국 배족노들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경찰원들이여! 총부리란 놈들에게 돌리라. 당신들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란 돌리지 말라. 양심적인 경찰원, 청년, 민주인사들이여! 어서 빨리 인민의 편에 서라, 반미구국투쟁에 호응 궐기하라.
다른 하나는 무장대가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다.
시민 동포들이여!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 오늘은 당신님의 아들 딸 동생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삐라들은 대략 3가지로 요약되는 주장을 담고 있는데, 이를 주장하는 내용의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저항하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짧은 말에 함축되어 있다. 둘째는 단독선거‧단독정부의 결사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반미구국투쟁’이란 표현이 말하듯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표명하고 있다.
이같은 삐라의 슬로건은 경찰과 서청의 횡포에 맞서 싸우겠다는 데서 몇 걸음 더 나아가 단선 단정 반대와 반미투쟁이라는 정치적인 색채를 띤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같은 지향점은 당시 5선거를 통해 38선 이남 지역 내에서 반공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미군정과 국내 단선지지파들과의 정면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2)12개 경찰지서 피습
무장대는 4월 3일 새벽 2시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제1구(제주) 경찰서 관내 삼양‧함덕‧세화‧신엄‧애월‧외도‧조천‧한림‧화북지서와 제2구(서귀포) 경찰서 관내 남원‧대정‧성산지서 등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그런데 그동안 군‧경 측에서 출판된 관변자료들은 제주4사건에 대해 서술하면서 많은 오류를 범했거니와 4월 3일 하루의 상황에 대해서도 이런 오류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 자료들은 이날 13～14개 지서가 습격을 받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무장봉기가 발발한 지 9개월 여 지난 후에 신설된 ‘모슬포경찰서’가 이날 상황기록에 등장하는가 하면, 고산‧저지지서 등은 습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또한 ‘13개 지서 모조리 습격’이란 표현을 통해 마치 제주도내에는 13개 지서 뿐이며, 이들 지서 모두가 습격 받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1952년 내무부 치안국에서 펴낸 대한경찰전사에서 비롯된 이 오류 부분은 1982년에 나온 제주도지에 이르기까지 수정 없이 반복 인용되고 있다.
또 대한경찰전사에는 4월 3일 당일의 사건을 설명하면서 “폭동주모자들이 제주경찰감찰청 및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함으로써 일시에 제주 전경찰에 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함과 아울러 전제주를 공산계열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가공할 폭동 기도를 한 다음…”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같은 내용은 최근까지도 반복 인용되는 오류의 근거가 되었다. 즉 앞에서 자신의 글이 아니라고 수정한 바 있지만, 박갑동의 박헌영에는 “4월 3일 상오 2시, 문상길이 부대 장병 등을 속여 완전무장시킨 뒤 3대의 트럭으로 제주경찰감찰청과 제주경찰서를 기습, 점령하는 것을 신호로 도내 14개 지서를 모조리 습격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4월 3일은 물론이고, 제주4사건이 끝날 때까지 제주경찰감찰청과 제주경찰서가 기습받거나 점령당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같이 과장된 묘사는 좌파적 시각에서 쓰여진 제주도인민들의 4무장투쟁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자에는 4월 3일 14개 지서와 서청‧국민회‧독촉‧대청 사무실을 습격하고 유해진 지사, 김영배 경찰감찰청장을 비롯한 41명의 ‘반동분자’집을 기습 파괴했다면서 그 명단까지 밝혀 놓았다. 그러나 실제 피습받은 우익인사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
그렇다면 실제 4월 3일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각 경찰서 지서별로 가나다 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구경찰서 관할인 삼양지서는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한 경찰 측 책자에는 이날의 삼양 상황에 대해 “공비 20명이 내습했으나 완전격퇴 피해 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대 측 자료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도 4월 3일 지서 습격 상황이 기술되어 있는데, 삼양지서에 대해서 “경찰 6명, 아부대 16명. 소지 무기 99식 소총 1정, 다이너마이트 2발, 휘발유탄 4발. 상호 접전 지서 정문까지 육박 가라스(유리)를 죽창으로 파괴시켰으나 적의 발포 극심하고 응원대가 올 것을 염려하여 퇴격. 상호 피해 무”라고 쓰고 있다.
구좌면 세화지서는 이날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지서가 일시 점령당했다. 지서에는 10명 가량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급히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구했으나 경찰 2명이 일본도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무장대 측 자료에는 서북출신 경찰관 1명을 살해하고 2정의 총을 노획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날 사건 중에서 신엄지서 관내 마을인 북제주군 애월면 구엄리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구엄리는 우익인사의 영향력이 큰 마을이었다. 무장대 측 자료에 의하면 이날 구엄리 습격에 모두 120명이란 인원이 동원됐으며, 무장은 소총 4정, 다이너마이트 5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고 한다. 지서 주변에 40명을 배치해 습격하려는 순간, 이웃 애월지서를 공격하는 습격조가 예정시간보다 30분 가량 앞당겨 행동에 옮기는 바람에 사전에 발각되어 지서 측으로부터 응전을 받아 지서 점령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원화(宋元和) 순경이 숙소에서 피습을 받아 칼과 죽창에 열 네 군데나 찔리는 부상을 입고도 지서로 달려가 구사일생했다. 무장대는 이날 우익인사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공격해 우익활동을 하던 문영백(文永伯)의 10대 딸 두 명을 살해했다. 결국 이날 구엄리에서는 우익인사와 그 가족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었고, 교전 과정에서 무장대 2명이 사살됐다.
애월지서에는 지서 마당에 폭발물이 던져졌으나 불발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서 마당에는 전날 내린 비가 고여 있었는데 사제 폭발물이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애월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80명이 동원됐다.
제주읍 외도지서에서는 이북출신의 선우중태(鮮于仲泰) 순경이 무장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외도지서 습격에는 무장대 14명이 동원됐으며, 총은 99식 소총 1정이었다고 한다.
조천지서는 약 한 달 전인 3월 6일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경찰관 대부분이 교체돼 상대적으로 방어하기에 불리한 상태였지만, 4월 3일 새벽 무장대의 공격을 받았을 때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조천지서에 근무했던 정도일은 “어떤 순경이 우연히 밖을 내다보다가 은밀히 지서로 접근하는 무리를 발견해 한 발의 공포탄을 쏘았는데 모두 도망갔는지 그것으로 상황이 끝났다”고 증언했다. 무장대 측 자료는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써 포위전은 완전히 성공했으나 사전 발각으로 퇴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 한림지서는 습격을 받자 지서를 지킬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무장대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아 지서 안에서의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이북출신 김록만(金祿萬) 순경이 숙소인 여관에서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숨졌다. 또 다른 경찰관 2명도 각기 숙소에서 잠을 자다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했다. 한편 무장대는 경찰을 지서 안에 묶어 놓은 후 지목했던 우익인사의 집을 찾아다니며 공격했다. 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 감찰위원장 겸 한림면 위원장을 맡았던 현주선(玄周善) 등이 부상을 당했다. 이로써 이날 경찰 1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국민회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원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화북지서도 피해가 심했다. 특히 화북지서는 무장대의 방화로 불길에 휩싸여 전소되었고, 이 때 지서 안에서 숙직을 하던 사환이 불에 타 숨졌다. 또한 민가에 세들어 살던 김장하(金章河) 순경과 그의 아내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결국 화북에서는 경찰관 1명, 경찰관가족 1명, 경찰사환 1명 등 3명이 숨지고, 지서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화북 공격에는 무장대 14명과 99식 소총 1정이 동원됐다.
제2구경찰서 관할인 남원지서를 습격한 무장대는 10명이었으며, 99식 총 2정과 일본도, 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무장대에게 첫 희생을 당한 사람은 대청단원으로서 지서 경비를 거들던 협조원들이었다. 협조원 방성화는 무장대가 지서 안으로 뛰어들면서 쏜 총알에 복부를 맞아 숨졌고, 또다른 협조원 김석훈은 각목과 칼에 맞았으나 가까스로 도망쳤다. 이어 무장대는 고일수 순경을 붙잡아 칼로 살해했다. 무장대는 마지막으로 지서 무기고를 부숴 미제 카빈총과 공기총, 그리고 탄알 등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 이로써 이날 남원지서에서는 경찰 1명과 협조원 1명이 숨지고, 협조원 2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대정골에 위치했던 대정지서에서도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경찰관 1명이 중상을 당했다. 보성리 향사를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대정지서는 경찰관이 3명뿐인 소규모 지서였다. 이날엔 2명의 경찰관이 지서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이무웅(李武雄) 순경이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장대 측 자료에는 이날 7명이 습격에 참여, 2발의 사격으로 경찰관 1명을 즉사시켰다고 기술돼 있다.
모슬포지서 소재지인 모슬포는 경비대 제9연대의 주둔지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모슬포지서는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 무장대는 대동청년단 대정면 책임을 맡고 있던 강필생(姜必生)의 집에 폭발물을 투척하였다. 강필생은 폭발물 파편이 몸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지만 목숨을 구했다. 이후 강필생은 경찰에 투신했다.
성산포지서에는 14명의 경찰관이 있었으나 이날 밤 근무자는 3명뿐이었다. 40명의 무장대가 99식 총 2정을 갖고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이 발포하자 모두 도망가버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무장대 측 자료는 2정의 총이 모두 고장이 나는 바람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함덕지서에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에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상 현지 확인을 통해 살펴본 바, 4월 3일 하루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피해상황을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화북=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신엄‧구엄=경찰 부상 1명, 민간인 사망 5명‧부상 10여 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 방화 4채
△남원=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1명‧부상 2명
△한림=경찰 사망 1명‧부상 2명, 민간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외도=경찰 사망 1명
△함덕=경찰 행방불명 2명
△세화=경찰 부상 2명
△대정=경찰 부상 1명, 민간인 부상 1명
그런데 이 통계는 무장대 측 자료와 차이가 있다. 무장대 측의 자료는 4월 3일 공격에서 경찰관 10명이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함덕지서에서 행방불명된 2명 중 납치해간 1명을 살해했다고 해도 5명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데 세화‧대정지서 등의 사례에서 보듯 무장대는 지서 밖에서 총격을 가해 경찰관이 쓰러지면 상부에는 ‘즉사’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죽지 않고 부상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있었다. 또 무장대 측 자료에는 ‘서청 사망 7명’이란 표현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이날 숨진 경찰관들은 마을마다 순직비가 세워져 있다. 이 때 사망한 경찰관들은 방침에 따라 순경은 경위로, 경사는 경감으로 모두 2계급 특진되었다. 이날뿐만 아니라 제주4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희생된 모든 경찰관들은 2계급 특진되었다.
나.무장대의 조직과 무력
1)무장대 구성원
4월 3일 무장봉기가 시작되자마자 군‧경의 초미의 관심사는 과연 무장대가 어떻게 조직‧훈련되고 있으며, 병력과 무기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이후 무장봉기가 얼마나 조직적‧계획적으로 벌어졌는가, 또는 관변자료의 주장처럼 과연 무장봉기가 남로당 중앙, 북한, 소련과 관련되어 있으며 제주도 무장대가 외부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공급받았는가 하는 의문과도 관련되는 주제였다. 1967년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에는 무장대의 병력과 무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제주도에 병력 총 60,668명을 배치하고 본토결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패전과 더불어 일본군은 요새화 된 한라산의 진지와 막대한 무기 탄약을 산중에 매몰하고 철수한 바 있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일본군의 철수시 산중에 매몰한 무기를 모집하여 이것으로 무장하고 군사훈련은 팔로군 출신들이 담당하여 중국에서 사용한 유격전으로 자못 그 기세는 당당하였다. 이들의 무장병력은 500명에 달하였고 이에 부화뇌동한 수도 1,000명에 이르러 총수 1,5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제주도폭동의 군사적 배경’이라는 소제목 아래 언급된 이 글은, 첫째 무장대는 일본군이 한라산에 매몰한 막대한 무기‧탄약을 파내어 무장했고, 둘째 그 숫자는 ‘무장폭도 500명, 비무장폭도 1,000명’에 이르렀으며, 셋째 군사훈련은 팔로군 출신이 담당해 중국에서 사용한 유격전을 지도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한마디로 ‘강력한 무장력’으로 요약되는 이런 내용은 이후 출판된 다른 관변자료들도 대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강경작전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써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500명 가량이 일제 총기로 무장했고, 팔로군 출신이 유격훈련을 시켰다는 식의 내용은 무장봉기 초기의 실제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무장대에 대한 과장은 좌파 측 자료도 마찬가지이다. 남로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노력인민은 제주4사건에 관한 첫 보도 때 무장대 병력과 무기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구성 : 민주운동, 특히 UN배격 2 항쟁으로 반동경찰의 추궁을 받고 피신하고 있는 민주진영 지도자 ○천명으로 구성되어 학병(學兵) 중병(中兵)출신의 민애청원을 중심으로 한 청장년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도 이채를 끄는 것은 이번 투쟁이 시작되던 4월 3일 맹휴로 들어간 제주농업학교, 제주중학교 생도들이 과감하게 참가하여 철석같은 진용을 구성하고 있다.
△무장 : 일제가 전시 20만 대병의 군비로서 은폐 저장하여 두었던 무기 탄약과 미군상륙 후 바다에 집어넣었던 무기 등을 꺼내어 확보한 것 등이라는데 죽창, 철모자, 일본도는 물론이오 권총, 장총, 기관총도 있고 대포까지 가지고 있다 한다. 그리고 탄환, 수류탄 등도 거의 무진장이라고 한다.
좌파적 시각에서 쓰여진 제주도인민들의 4무장투쟁사에는 무장대 숫자를 ‘3,000명’으로 기술해 놓았다. 일제가 매몰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내용은 관변자료와 마찬가지인데, 무장대 숫자를 수천명으로 보거나 심지어 기관총과 대포가 있고 탄환과 수류탄이 무진장이라고 하는 대목은 그 과장의 정도가 관변자료 보다 오히려 더 심함을 보여준다. 관변자료의 과장이 강경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남로당의 과장은 5선거 저지에 실패한 서울 등 전국에서 선전‧선동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기존 자료와 미군 기밀문서 등을 분석해 비교적 객관적 표현에 힘썼던 존 메릴은 그의 논문에서 “주력 500명 가운데 반수는 총으로 무장했고, 나머지는 칼‧낫‧죽창‧사제수류탄과 폭발물‧곡괭이‧삽 등으로 무장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실제 무장대의 무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무장봉기 발발 초기 무장대 인원을 살펴보면, 300여 명인 것으로 보인다. 무장대로부터 노획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4’직전의 병력이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등 총 320명으로 조직됐고, 4월 3일 당일 지서 습격에는 350명이 동원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경찰은 편의에 따라 이 숫자를 늘리거나 줄였다. 무장대 숫자는 4월 15일 경무부에 들어온 보고를 통해 처음으로 언급됐는데, 이때에는 300～400명으로 소개됐다. 그런데 경무부 공안국장으로서 사건발생 직후 제주에 파견돼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을 맡은 김정호는 4월 2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무장대 숫자를 2,000명으로 늘려놓았다. 그러나 같은 날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은 무장대 숫자에 대해 “500～600명”이라고 말했다. 김대봉은 며칠 후 “순전히 폭도로 인정할만한 수는 200～300명에 불과하다”며 더욱 숫자를 줄였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김대봉은 “폭도의 실수는 수괴 15～16명, 그 외 약 500～600명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 주둔 경비대 9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은 무장대 숫자가 300명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무장대 숫자에 혼선을 빚은 까닭은 전적으로 경찰의 편의 때문이었다. 중앙에서 제주에 특파됐다가 귀임한 형사대 일행은 5월 중순경 “경찰은 현재까지 30여 회 교전하여 폭도 약 500명을 검거하고 무기 다수를 압수하였다”고 전과를 알렸는데, 그들이 밝힌 무장대 숫자는 ‘2,000명’이었다. 이미 500명 가량을 검거하고서 무장대 숫자를 이전처럼 500～600명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제주경찰 당국은 사태 종결 후 “공비 수는 한 때 16,900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7,893명이 토벌대에 의하여 사살되었고 2,004명이 귀순, 7,000여 명이 생포되었다”라는 통계를 밝히기도 했다. 1948년 8월 한 잡지는 이같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무장대 숫자에 대해 이렇게 꼬집었다.
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경비대가 제주에서 사용한다는 명칭, 즉 인민해방군의 (반란군) 수는 시종여일하게 500명이라고 하여 왔는데 이 수는 당국이 수차에 걸친 소탕성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의 주동부대는 500명 정도라고 하니 이 500명이라는 것은 과연 수수께끼인가? 소탕성과나 500명이라는 두 가지 중에 허위가 하나 있어야 다른 하나가 진실로써 성립될 것이다.
한편 경찰은 무장대 구성원의 성분에 대해 처음부터 ‘외부 유입설’을 주장했다. 무장봉기 직후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은 “폭동사건은 제주도민의 주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육지부에서 침입한 악질불량 도배들이 협박 위협 등으로 도민을 선동시켜 야기된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김정호는 며칠 후 “반도를 체포하여다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계열에서는 일부러 잔악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하여다 제일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 등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형편”이라고 주장했다.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도 “백정 같은 사람을 돈으로 매수, 지명살해를 한 사실도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무장대원의 성분이 외부에서 모집해온 백정이라는 주장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무장대의 잔혹성’을 선전하는데 이용됐다. 이어 중국 팔로군 출신이 개입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은 이런 주장에 대해, 팔로군이 참가하였다는 풍설은 낭설이며 폭도들은 주로 제주도민이라고 해명했지만, 군사부 최고 간부급에는 팔로군에서 상당히 훈련을 받은 자가 있다는 보도가 여전히 나오기도 했다. 외부 유입설은 심지어 북한군 유입설로까지 확대되었다. 북한군 유입설은 미군정장관인 딘 소장에 의해 처음으로 나왔다. 제주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딘 장관은 5월 6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 공산군 간자(間者)가 5ㆍ10선거에 반대하는 테러전에 종사하는 게릴라를 지휘하기 위하여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나와 남조선 관헌이 별개로 행한 조사는 다같이 외부 간자가 오해를 가진 청년들을 교사하여 선거찬동자를 살해하고 그들의 가족을 소각하게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 촌락은 두 부대가 양면에서 습격하고 있는데 이 두 부대는 철퇴하고 다시 합류하여 산중으로 퇴각하고 있는데 이 습격상태를 보건대 동 습격은 동도 내에 있는 북조선 군인이 무전으로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8년 7월호로 출판된 잡지 신천지는 “중공군이 잠입했느니, 일본 공산당원들이 들어 있느니, 북조선 인민군 간부가 무전기로 지휘하고 있느니 한라산 폭도들에 대한 억측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정작 확인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들의 교묘한 전술만이 화제와 더불어 파문을 일으킬 뿐이다”라며 외부 유입설을 부인했다. 신천지는 8월호에서도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북조선이니 팔로군의 원조와 지휘를 받느니 하던 초기의 풍문은 허설이 되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1948년 7월 제주도 주둔 최경록 제11연대장도 “팔로군이나 북조선 인민군이 다수 가담하고 있다고 하며 또 포로도 있다는데……”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런 일은 전연 없다”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처럼 무장대원에 대한 외부 유입설은 곧 낭설임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북한군 유입설’은 곧이어 등장하는 ‘북한선박 출현설’ ‘소련잠수함 출현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이후에는 모두 허위임이 밝혀졌으나 당시에는 강경작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2)무기 현황
무장대의 무기에 대한 추측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주로 칼과 죽창으로 무장해 있고 총기류는 일제 99식 총 몇 정이 전부라는 설에서부터 기관총과 대포까지 가지고 있고 탄환과 수류탄이 무진장 있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있다. 1948년 4월 말경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은 무장대가 3개월 분의 탄약과 식량을 저장하고 있으며 기관총을 소지한 자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5월 초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은 무장대가 기관총을 가지고 있다는 풍설은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4월 3일 무장봉기 때 무장대의 총기 보유 상황은 매우 빈약했다. 4월 3일 성산포지서를 포위했던 40명 가량의 무장대의 무기 중 총기류는 일제 99식 총 등 2정 뿐이고 나머지는 갈고리‧죽창‧몽둥이 등을 들고 있었다. 남로당 대정면책 출신인 이운방은 “궐기 당초의 무기조달 상황을 보면 소총이 약 30정 정도였다고 하며 대정면에는 소총이 3정 뿐이었다”고 증언했다.
무장대의 무기가 매우 빈약했음은 노획물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1948년 6월 유동열(柳東悅) 통위부장은 제주도에서의 경비대 활동에 관해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문에는 4월 27일부터 5월 27일까지 한달간의 경비대가 거둔 전과가 소개됐는데, ‘포로와 귀순자 3,126명, 사망 7명, 유기시체 1명’이라는 전과에 노획물은 겨우 ‘99식 총 3정, 수류탄 15개, 청룡도 5개, 철모 17개, 죽창 12개’였다. 1948년 6월 제주 현지에서 취재활동을 벌였던 조선통신 특파원 조덕송의 현장보고서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토벌군이 ‘대정면 인민군사령부’를 습격해서 압수했다는 무기를 살펴봤더니, 곤봉, 구시대의 엽총, 일본도, 죽창, 철창 등이었다면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무기, 이로써 최신 무기에 생명을 걸고 버티고 나서야 할 절대성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미군 사령관인 브라운 대령도 7월 1일자 보고서를 통해 “10%정도는 총으로 무장하였고, 나머지는 일본도와 재래식 창으로 무장하였다”고 밝혔다.
빈약했던 무장대의 병기는 첫 무장봉기 이후 다소 보강됐다. 4월 3일 지서 습격 때 총기를 일부 탈취했고, 이후 일부 경비대원들이 무장대 측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미군보고서는 이에 대해 “폭도들은 4월 3일 하루동안에 미제 카빈총 6정과 일제 99식 총 1정, 그리고 탄약 119발을 탈취해 갔다”고 기록했다. 1948년 5월 20일에는 9연대 군인 41명이 탈영했는데, 이 때 탈영병들은 개인병기와 장비, 그리고 실탄 5,600발을 가져갔다. 탈영병 41명 중 20명이 이틀만인 5월 22일 체포되면서 소총 19정과 실탄 3,500발이 회수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나머지 21명의 무기로 인해 무장대의 병기 현황이 크게 늘었다. 1949년 2월 4일에는 한 중대가 총기를 운반하다가 무장대의 습격을 받아 99식 총 150정을 탈취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장대의 병기 상황은 이런 총기의 탈취에도 불구하고 늘 탄약이 부족했고 미군 측으로부터 계속 신식 무기를 공급받는 군‧경에 대항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한때 북한이나 본토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그것은 억측일 뿐이었다. 이같은 사정은 주한미군사령부가 1949년 4월 1일 제주도 사태를 종합 분석한 기밀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반도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탄약 부족이다. 노획하고 탈취한 식량은 풍부하다. 일본 군대가 남긴 동굴은 꽤 안전한 은신처가 되어 주고 있으나, 탄약 공급에 대한 대책이 없다. 한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경기관총 3정과 박격포도 탄약 부족으로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생포된 반도들에 따르면 현재 탄약 저장량은 M-1 소총 실탄 800발, 카빈 소총 실탄 90발, 일본제 99식 소총 실탄 400발에 불과하다 한다. 노획한 미제 무기의 탄약은 토벌대로부터 탈취하는 것이 유일한 공급원이다. 그러나 반도들은 99식 소총의 경우 실탄 2,000발 정도의 재장전 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반도들이 본토나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한국 해군함정의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 정찰 및 경찰의 해안 마을에 대한 빈틈없는 방어는 외부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무장봉기 당시 무장대의 인원은 300여 명 뿐이었고, 무기 역시 이후 다소 보강되긴 했으나 4월 3일 첫 봉기를 일으킬 때는 일제 99식 총 30여 정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무장대 노획문서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4월 3일 무장봉기 때 동원된 무장대 인원수는 350명이었고, 병기로는 99식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3)조직과 편성
무장대는 어떻게 조직‧편성되었는가. 증언해 줄만한 무장대 수뇌부가 없는 상태에서 무장대 조직과 편성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좌파 측에서 출판한 책자, 무장대로부터 노획한 문서, 그리고 미군자료 등을 통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①좌파 측 자료의 소개
제주도인민들의 4무장투쟁사는 무장대의 조직과 편성에 관해 시기별로 그 변천과정을 소개했다. 즉 무장봉기가 시작되기 전 고문치사 사건 등이 벌어지자 각 면리(面里)에 자위대(自衛隊)가 편성되었으며, 이러한 대중적인 열망과 원호의 토대 위에서 한라산 등 산악과 밀림지대 등 각 지구에 유격대(遊擊隊)가 편성됐다는 것이다. 이 책자는 이어 4월 3일 무장봉기 직후에는 “무장대를 일층 강화 발전키 위해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열렬한 혁명정신과 전투경험의 소유자 30명씩을 선발하여 ‘인민유격대(속칭 인민군)’를 조직하였으며, 또한 그의 기동성과 민활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하였다”면서 “△제1연대=조천‧제주‧구좌면－3지대(이덕구) △제2연대=애월‧한림‧대정‧안덕‧중문면－2지대(김봉천) △제3연대=서귀‧남원‧성산‧표선면－4지대(?)”로 연대 구분을 하였다. 이밖에 독립대로서 정찰임무를 하는 특공대(特攻隊), ‘반동’들의 동정과 지방자위대의 폐단을 감시하는 특경대(特警隊)가 조직되었고, 유격대의 사상교육을 위한 정치소조원을 각 대와 소부대에 배속하였다고 소개했다. 또한 인민유격대 재편성과 함께 “인민들의 대중적 투쟁을 가일층 주동성을 갖고 활발하게 전개키 위하여 각 읍‧면과 행정단위로 강력한 자위대(10명)도 조직하였다”고 밝혔다.
복잡하게 소개된 무장대 구성을 무장봉기 직후 시점에서 정리하면, △본격적으로 입산해 활동을 하는 정예의 ‘인민유격대’(각 면에서 30명씩) △각 행정단위에서 활동하는 ‘자위대’(10명) △정찰 임무를 하는 ‘특공대’ △각 지방 상황을 감시하는 ‘특경대’ △유격대 사상교육을 하는 ‘정치 소조원’등으로 요약된다.
이어 제주도인민들의 4무장투쟁사는 도 당부 간부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도 당부’책임=안요검, 조몽구, 김유환, 강기찬, 김용관
△‘도당 군사부’책임=김달삼(본명 이승진), 김대진, 이덕구
△총무부=이좌구, 김두봉
△조직부=이종우, 고칠종, 김민생, 김양근
△농민부=김완배
△경리부=현복유
△선전부=김은한, 김석환
△보급부=김귀한
△정보부=김대진
△부인부=고진희
도 당부 책임자나 군사부 책임자가 여러 명인 것을 보면, 위 조직표는 어느 한 시점의 것이라기 보다는 시기별 책임자 전부를 나열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 무장대 출신 증언자는 무장대 조직에 대해, 도 사령부 밑에 각 면마다 면사령부가 있었으며, 도 사령부에는 케(캡틴), 조직책, 군사부책이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이 ‘투쟁위원회’를 이루어 모든 결정을 하였다고 증언했다.
다른 증언을 통해 들어본 면 당부의 조직체계는 각각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가령 대정면당부의 조직은 케(캡틴)와 조직부‧자위부(군사부)‧총무부‧선전부가 있었으며, 주요 사항은 케‧조직부책‧자위부책 세 사람이 결정했다. 그리고 자위부책 밑에는 특경대(3개 소대)와 각 마을별로 자위대가 있었다. 구좌면당부에는 총책(K동지) 밑에 조직책(O책)‧선전책(A책)‧총무 등 3개 부서가 있었으며, 조직책이 관장하는 ‘특행대’가 별도로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②미군의 조사보고서
제주 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제주도 남로당 조사보고서’는 무장대 조직과 편성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1948년 6월 20일 작성된 이 보고서는 인민해방군과 지원단체인 자위대 조직원들과 접촉해 왔던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작성됐으며, 남로당의 당과 군사부 양쪽의 상황과 조직, 지휘체계 등에 대한 정보를 요약한 것이라고 밝혔다. 보고서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남로당 조직’은 전라남도위원회, 제주도위원회, 제주읍위원회, 면위원회, 마을위원회, 인민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전라남도위원회는 제주도위원회에 지시를 내리는 상부기관이다.
제주도위원회는 제주도의 모든 좌익단체에 지령을 내리는 상부기관이다. 제주도위원회 간부는 위원장 김유환, 부위원장 조몽구, 간부부장 현두길(다른 각 부장을 조정‧통제함), 조직부장 김달삼, 선전부장 김용관, 농민부장 이종우, 청년부장 김광진, 여성부장 김금순, 재정부장 김광진.
제주읍위원회는 다른 면조직과는 다르다. 이곳에는 2개의 독립된 위원회인 일반위원회와 특별위원회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는데 두 위원회 모두 제주도위원회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 △제주읍위원회(일반위원회)는 읍내 당의 합법 활동에 대한 사법권을 갖는다. 이 위원회는 다른 면위원회와 같은 기반에서 활동하고 구성이 같다. 조직원들은 위원장 강규찬, 부위원장 겸 조직부장‧총무부장 고갑수, 간부부장 강대석, 선전부장 고칠종, 청년부장 임태성. △제주읍특별위원회는 제주읍에만 있는 당의 지하조직을 지휘한다. 제주도위원회로부터 모든 명령을 받는다. 임무는 군정청, 국립경찰, 경비대, 학교, 우익단체 같은 전략적 정보청취소에 프락치를 심는 일과 위에 언급된 조직 내에 소규모 비밀 ‘세포’를 증강해 당의 사업을 계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런 비밀 세포들은 제주읍특별위원회 위원장에게 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전복활동을 도모하는 이 조직의 무모하고 냉혹한 효율성을 보여주는 놀랄만한 한가지 사례는 경비대 제11연대장을 살해한 일일 것이다. 이 특별위원회는 남로당이 불법화하면, 이와 관련한 일상적인 비효율성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제주도위원회의 기능을 맡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제주읍특별위원회는 임무를 확대하는 한편 제주도 지하조직의 최고위원회가 될 것이다. 제주읍특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인물로 구성돼 있다. 위원장 김응환, 조직부장 강대석, 선전부장 이창수, 학생부장 한국섭, 재정부장 이창욱.
면위원회들은 제주도의 최고위원회와 같이 여러 부서로 조직돼 있다. 또 모든 하위 군사조직과 준군사조직처럼 구성돼 있으며 한 조직원이 담당한다.
마을위원회는 한 조직원이 여러 부서의 임무를 겸한다. 그러나 심문팀 보고서는 마을위원회가 최소한 조직원 3명, 즉 위원장과 선전부장, 조직부로 구성된다고 밝히고 있다.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은 폭도들이 마을 사람들을 강제로 지명해 환호하는 방법으로 선출한다. 이 사례에서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조직됐던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던 사람이 선출됐다. 이런 선거절차는 무장한 폭도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현재 제주도 민간인 수용소에 수감된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폭도들이 마을을 떠난 뒤 그들의 명령에 따라 선전 및 조직부장으로 임명됐다고 밝혔다.
둘째로 ‘남로당 군사부’는 1948년 4월 초 구국투쟁위원회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군사부’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다. 무장부대는 ‘인민해방군’과 ‘자위대’ 등 2개의 주요 부서로 구성된다. 인민해방군 구성원들은 산폭도들이며 그들은 제1선의 전투부대라 할 수 있다. 자위대는 산폭도 인력을 보충하고 마을과 폭도부대 사이의 연락 책임을 맡는 기능 이외에 일반 군대의 보급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군사부에는 인민해방군과 자위대 외에 ‘세포’와 ‘관련조직’이 포함된다.
인민해방군의 조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각 면은 폭도 1개 중대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인력을 제공한다. 이런 중대와 대대들은 종종 그들 고유의 마을 이름을 사용한다. 상황에 따라 병력규모가 달라진다.
인민해방군의 전투서열과 관련, 대대 사령관은 정보부, 병기부, 보급부, 위생부 등의 조직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80명 가량으로 구성된 1개 대대는 2개 중대와 1개 기동부대로 나뉜다. 기동부대는 폭도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장교들은 일본식 칼‧권총‧철모로 신원이 확인된다. 각 부대의 구성과 평균인원을 보면, △대대(60～80명)=각 면에 1개 이상 △중대(25～35명)=대대 당 2개 중대 △소대(13～15명)=중대 당 2개 소대 △분대(5～7)=소대 당 2개 분대.
인민해방군의 훈련 상황을 보면, 보고들마다 그 내용이 다소 다르다. 한 보고서는 “지휘관이 인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막사 앞에 2열 종대로 집합하는 하루 3차례의 점호가 있으며 오전 점호 뒤에는 1시간 동안 달리는 등 엄격한 체력훈련이 계획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다른 부대에 대한 보고서에는 부대에 있는 동안 나무 모으기와 숯 만들기 식량창고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등의 가사임무만 한다고 언급돼 있다. 부대 입구에는 보초(한국어 빗개)를 서며 100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 2개의 검문초소가 있다. 한 건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엄격하게 격리되며, 막사 부근을 떠나지 말도록 명령받는다. 또 이 부대에 있는 건물들은 약 100야드 정도씩 떨어져 있으며, 인접 건물에 있는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는다. 실제 습격 나갈 때만 여러 건물의 인원들이 2열 종대로 집합해 점호를 받으며, 무기와 실탄이 지급된다.
인민해방군의 정치학습은 정치지도원들이 담당한다. 정치지도원은 끊임없이 남로당의 목적을 교육하며 특히 습격에 앞서 “어떤 특정 마을에 있는 모든 인민은 가치가 없어 죽어 마땅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반역자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잡혔을 때 부대의 위치나 인원을 누설하지 말고, 오도(誤導)하거나 거짓말 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요령 등을 가르친다. 보안을 이유로 간부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단순히 ‘지휘관’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인민해방군의 무기와 탄약은 일본이 만든 장비들이 압도적이고 99식 일제 소총이 주류를 이루는데, 현재 미제 카빈총과 M1 소총이 확인됐으며 한 보고서는 약 25명으로 구성된 기동부대가 미제 카빈총 10정과 일제 99식 소총 15정으로 무장했다고 밝혔다. 실탄은 실제 습격이 계획될 때만 20～50발 지급된다. 총을 갖고 있는 폭도들은 습격이 끝난 뒤 사용하지 않은 실탄을 반납한다. 다른 무기들은 일본 장교 칼과 총검, 지팡이나 곤봉, 죽창, 비수들이 있다. 지난 3주 동안 소련제 장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인민해방군의 보급은 면내 마을에 있는 남로당을 통해 이뤄진다. 이 남로당은 사전계획에 따라 음식물과 의류, 자금, 인력충원, 명령과 정보를 제공한다.
자위대는 1948년 2월께 마을 단위로 제주도 전역에 걸쳐 조직됐으며 1948년 5월 초 인민자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자위대의 조직은 표면상으로는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사실상 교활한 폭도부대의 임시보급창이며 마을기지다. 마을 자위대에 대한 명령은 남로당 마을위원회 위원장이 내린다.
자위대의 임무는 이름과 달리 마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도부대가 마을을 습격할 때 합류해 테러 공격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자위대는 보급조직 임무를 수행한다. 식량과 자금 모집은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모집된 식량과 자금은 폭도부대의 연락원에게 전달하기 위해 마을 남로당위원회 위원장에게 건네진다. 면 지역의 폭도부대와 남로당 마을 조직 사이에 매우 긴밀한 연락이 이뤄지고 있다.
이 밖에 ‘세포’와 ‘관련조직’이 있다. 민애청, 민주여성동맹, 전평 등 관련조직은 명목상 독립된 단체인데 남로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많은 구성원들이 이중 회원으로 있다.
이 조사보고서는 미 24군단 정보참모부 헝거(R. Hunger) 상사에 의해 작성됐다. 정보분석 전문가로 보이는 헝거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제주도 심문팀이 작성한 심문보고서를 주로 활용했고, 그밖에 정보원으로 미 방첩대 제주지구대, 경찰, 경비대, 그리고 포로들로부터 압수한 서류와 유인물 등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미군팀의 정보력이 다양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③무장대 노획문서
한편 무장대 노획문서인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시기별로 조직과 병력, 그리고 무기 등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를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무장봉기 직전
1. 조직체계：10인으로 1개 소대, 2개 소대로 1개 중대, 2개 중대로 1개 대대
2. 조직：①유격대(제주읍, 조천‧애월‧한림‧대정‧중문‧남원‧표선면 등 8개 면에 조직. 구좌‧성산‧서귀‧안덕‧추자면 등 5개 면은 제외)
②특경대(도 군사위원회 직속)
3. 인원수：320명(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특경대 20명)
4. 병기：99식 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
△제1차 조직 정비(무장봉기 직후)
1. 병력 정비：유격대를 250명으로 정리(이는 첫 무장봉기 때 톱 부대인 유격대와 후속부대인 자위대가 공동작전을 한 이후 함께 산에서 공동생활을 하는데 있어 혼란이 있고 보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정리 강화한 것)하였다가 재차 병력 확충의 필요성을 느껴 400명 정도로 확충
△제2차 조직 정비(5선거 직전)
1. 동기：엄격한 규율과 치밀한 기밀확보 그리고 신속한 행동을 보장하기 위한 작전상의 필요에 의해 각 면 투쟁위원회 군사부 직속의 각 유격대를 도 사령부 직속으로 편성
2. 체계상의 정비：1개 분대 3명, 3개 분대로 1개 소대(10명), 2개 소대로 1개 중대(23명), 2개 중대로 1개 대대(49명), 2개 대대로 1개 연대(110명)
3. 병력：3개 연대로서 370명(特務部 20명 포함). 특경(特警)을 해체해 사령부 각 부문에 전원 배치
△제3차 조직 정비(5월 말일)
1. 동기：국방경비대의 대량 입도(4,000명)와 그의 포위 토벌전이 전개되자 충돌 회피와 비합법 태세 강화의 필요상 인원을 대량 감소 정리
2. 체계상의 정비：1개 분대 5명, 3개 분대로 1개 소대(16명‧이 중 제3분대는 취사분대)
3. 인원 정리：370명을 240명으로 정리
△제4차 조직 정비(6월 18일 착수)
1. 동기：새로운 투쟁에 대비해 조직의 시급한 정비‧강화의 필요성
2. 체계상의 정비：(판독 불능)
3. 병력：3개 소대로 1개 지대(支隊) 편성. 1개 지대 인원수는 60명. 총 4개 지대 합계 240명에 도사령부 26명으로 총계 266명
△제5차 조직 정비(7월 15일 정비 완료)
1.인원수：501명(각급 지도부 35명, 통신대 34명, 유격대 120명, 특무대 312명)
2. 병기：①소총 147정(M1 6정, 카빈 19정, 99식 117정, 44식 4정, 30년식 2정)
②소총 탄환 7,740발(M1 1,396발, 카빈 1,912발, 99식 3,711발, 44 식년식 721발)
③경기관총(일본제) 1정
④척탄통(擲彈筒) 2문(탄환 8발)
⑤수류탄 43발
⑥다이너마이트 69발
⑦신호탄 2개
⑧군도(軍刀) 16정
⑨권총 8정(6연발 1정, 8연발 6정, 10연발 1정). 탄환 합계 119발
⑩기타 라이깡 103발, 지뢰 라이깡 8발, 야포탄환 4발
3.주의：①각급 정치부원은 상급 정치원 소속. 최상급 정치부원은 도당책 소속
②특무대(特務隊)는 지대(支隊) 정보과 소속(임무는 정보수집, 개인 테러, 군 활동에 호응 보급의 원조 등. 조직은 각 면에 특무대장 1명과 연락원 수 명을 두며 그 외에 3인 1분대, 1소대(10명)로 하고 1개 부락에 1～2명 정도로 조직하되 특무대원은 세포로부터 제외한다.
③사령부 및 지대를 사령관(지대장)과 정치부원과 작전참모(작전교육과책)의 3인으로써 최고지도부 구성
④각 지대 중 특무대는 각 면, 각 부락에 주둔하되 지대 지도부 통신대 각 유격대 소대는 지대 지도부 중심으로 밀집 생활함.
이 무장대 측의 투쟁보고서도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의 원본은 1949년 6월 7일 경찰특공대가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입수, 제주경찰청에 보관하게 됐고, 필사본을 과장급 이상 경찰 간부들이 소장하게 됐다고 한다.
1948년 7월까지의 유격대와 자위대의 조직변화를 기록한 이 보고서에 의하면, ‘4’직전에 320명으로 구성된 무장대 인원은 한때 240명까지 줄였다가, 7월에 이르러 501명까지 확대 편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실제 총기로 무장한 유격대는 12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무장대 숫자를 수천 명씩 기록한 기존의 자료들은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미군정의 대응
1)제주비상경비사령부 설치
미군정은 사태 초기 이 사건을 ‘치안 상황’으로 간주하였다. 당시 5총선거를 앞두고 단선(單選)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면서 전국적으로 무력 충돌이 빈발했다. 미군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인 1948년 2월과 3월 두 달 사이에 무력충돌에 의해 전국적으로 경찰관 55명이 숨지고 좌파 청년 144명이 사살되었다. 국방경비대 제3여단 참모장 백선엽(白善燁) 중령은 마침 4월 2일 모슬포 주둔 제9연대를 시찰한 뒤 무장봉기가 일어난 4월 3일에는 제주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는 사건 발생 보고를 받고도 이를 ‘치안 문제’로 판단해 바로 제주를 떠나기도 했다.
미군정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4월 5일 아침 전남 경찰 약 100명을 응원대로 편성해 급파하는 동시에 제주경찰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해 사령관으로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金正浩)를 파견하였다. 미군정은 또한 제주도 도령(道令)을 공포하여 타 지역과의 해상교통을 일체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 이어 4월 10일 국립경찰전문학교 간부후보생 100명을 제2차로 파견해 경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또 서청 단원들도 증파되었다. 당시 서청 중앙단장을 지낸 문봉제(文鳳濟)는 잡지 북한과의 인터뷰에서 “4사건이 나자마자 조병옥 경무부장이 나를 불러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500명을 보내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대동청년단 중앙본부에서도 단원들을 특파했다.
사건 발발 직후 김정호 비상경비사령관은 “폭동사건은 육지부에서 침입한 악질불량 도배들이 도민을 선동시켜 야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조병옥 경무부장은 4월 14일자로 ｢도민에게 고함｣이라는 선무문을 발표, “여러분은 민족을 소련에 팔아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공산분자의 흉악한 음모와 계략에 속은 것”이라고 사태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러나 사태의 원인에 대한 처방 대신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힘으로써 진압한다는 정책은 도민들의 반발을 사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북한에서 쫓겨 내려와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고 있는 서청은 1년 전 이미 경무부 수뇌부에 의해 “주민의 90%가 좌익”이라고 단정된 제주도민들에게 가혹한 탄압을 가하여 물의를 빚었다. 이와 관련 1948년 5월 초 제주를 시찰했던 광주지검 김희주(金禧周) 검찰관은 5선거 반대가 사건발단의 직접 원인이라면, 서북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이 간접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응원경찰도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급파되는 바람에 무리한 행동으로 도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로 인해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딘 장군은 5월 6일 기자들과 만나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의 반 수는 5일간의 훈련 밖에 받지 않았으며 이 결과로 지나친 행위를 하였을지 모른다”면서 “포학 행위를 한 경찰 2명이 미군 군법회의를 통해 처리될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력한 경찰력을 통해 사태를 진압하려 했던 김정호 비상경비사령관은 “오후 8시 이후 전도의 통행을 금지하고 위반자를 사살해 버리겠다”는 강경한 작전을 전개했다. 그 결과 4월 24일 밤 9시경 조천면 조천리에서 거리를 걷던 주민 2명이 경찰의 총격을 받아 이 중 문홍목(21)이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경찰은 경비대가 사태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는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갈등을 겪었다. 심지어 경찰은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스스로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후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그 무렵의 군‧경 갈등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경찰은 경비대의 진의를 타진해 보기도 하였다. 즉 반도들의 근거지를 차단하기 위하여 산간에 접한 부락을 소각시켰다. 주민들이 몰려와서 경찰이 부락에 불을 질렀다고 경비대에 신고하였다. 대대장인 오일균 소령은 출동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일부 하사관들이 대대장 모르게 출동하였다. 경찰 이야기는 반도들이 부락을 습격하여 방화 소각하고 경찰이 교전하다가 희생자가 많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한 계략에서 조작하였다는 것이 판명됨으로써 군경간에는 더욱 불미한 간격이 조성되었다.
2)평화협상 추진
①군정장관의 귀순공작
무장봉기가 처음 일어났을 때 경비대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서울에 있는 경비대 수뇌부에서도 제주도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보고, 그 진압은 경찰이 할 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동안 벌어졌던 군‧경간의 갈등도 경비대의 출동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군인들은 경비대가 향후 창설될 국군의 모체라고 생각했으나, 경찰은 경찰예비대라는 뜻이 담긴 경비대를 무시했다.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경비대원과 경찰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고, 무력충돌이 발생해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모슬포에 주둔하고 있던 경비대 제9연대는 4월 13일 제주읍에 특별부대(부대장 김용순 대위)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것은 진압작전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비 치안’을 하기 위한 것이며 인원도 10명 미만이었다. 김익렬 제9연대장과 정보주임 이윤락 소위도 잇따라 성명을 발표, 군은 정부의 재산과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 확수(確守)하기 위하여 군이 출동하였다며 그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력만으로 한계를 느끼자 4월 17일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S. Mansfield) 중령을 통해 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토록 명령했다. 아울러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진해 주둔)를 4월 20일부로 제주에 파견하도록 명령하면서 부산 제3여단의 미고문관 드루스(Clarence Dog De Reus) 대위가 이에 합류해 동참하도록 했다. 딘 군정장관은 이어 4월 18일 맨스필드 중령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귀관은 제주도의 상황에 정통하다.
2. 4월 18일 제주도에 도착한 두 대의 L-5 연락기는 귀관의 지휘 하에 있다.
3. 한국 국방경비대 추가병력이 4월 20일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다. 도착 즉시 이 대대도 현재의 다른 한국 경비대와 같이 귀관의 작전통제 하에 놓일 것이다.
4. 귀관은 귀관의 배치에 따라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데 군 부대를 이용하라.
5.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귀관은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
6. 경비대의 작전에 의해 붙잡힌 포로들은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 그들을 경비대에 의하여 준비되고 보호된 막사에 두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본토로 후송하도록 조치하라.
7. 일일 상황보고를 무선통신으로 본부에 보고하라.
딘 장관의 이 명령은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4월 20일 파견될 제5연대 1개 대대와 기존의 제9연대 병력을 작전통제하라고 명령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군과 함께 사태 진압에 나설 대상으로 경찰 대신 경비대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포로를 경찰에게 인계하지 말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셋째,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한 점이다. 이는 향후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열린 평화협상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미군 기밀문서를 종합해 볼 때,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 밤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미 6사단 일일보고서는 “48년 4월 22～23일 밤중에 경찰과 경비대는 합동작전으로 최근의 소요에 참여한 혐의가 있는 60명의 좌익을 체포했다. 경찰은 유격대원들이 은신했을 것으로 혐의가 가는 집들을 계속해서 습격했고, 경비대는 그 마을의 일정한 지역을 방어하는 것으로 지원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보고서 내용이 말해 주는 것처럼 이 합동작전에서 경비대가 한 일은 무장대와 직접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의 수색전을 간접 지원하는 것이었다.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추진되었다. 이 평화협상은 제주4사건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후에 김익렬 연대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평화협상은 김익렬 연대장 혼자의 결정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딘 장군은 이미 4월 18일에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고 맨스필드에게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이는 김익렬 연대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익렬 회고록을 통해 본 회담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즉 딘 장관의 지시를 받은 맨스필드 중령은 귀순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유해진 지사, 김정호 제주비상경비사령관,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그리고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에게 책임자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겁이 났는지 병에 걸렸다고 핑계를 대거나 연락도 없이 출장을 가버리는 등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맨스필드 중령이 다섯 번째로 요청하게 된 사람으로서 맨스필드가 자신에게 무장대와 직접 만나 담판을 지으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4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한 언론은 전단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단선단정을 죽음으로써 항거하려는 제주도의 투쟁은 날로 확대하여 가고 있어 평화의 섬 제주도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터로 화하고 있는 터인데 방금 현지에 출동중인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육군중령 김익렬(金益烈) 씨는 지난 22일 다음과 같은 전단을 비행기로 산포하여 그 가열한 전투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 우리는 과거 반삭(半朔) 동안에 걸친 형제 제위의 투쟁을 몸소 보았다. 이제부터는 제위의 불타는 조국애와 완전 자주통일 독립에의 불퇴전의 의욕을, 그리고 생사를 초월한 형제 제위의 적나라한 진의를 잘 알았다. 이에 본관은 통분한 동족상잔, 골육상쟁을 이 이상 백해무득이라고 인정한다. 우리 국방경비대는 정치적 도구가 아니다. 나는 동족상잔은 이 이상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형제 제위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만반의 용의를 갖추고 있다. 본관은 이에 대한 형제 제위의 회답을 고대한다. 우리가 회합할 수 있는 적당한 시일과 장소를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제시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자 무장대 측으로부터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며, 수행인은 2명 이상은 안된다. 만남 장소는 무장대 진영이어야 하며 장소와 시기는 추후 통보하겠다’는 내용의 답신이 왔다.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 측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이 사실을 맨스필드 중령과 군사고문 드루스 대위에게 보고하고 상세한 지시를 요청했다. 맨스필드 중령은 김익렬 연대장에게 “①제9연대장 김익렬은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책임진다 ②요구조건은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행자 명단의 작성 제출” 등 부여된 권한과 회담에 임하는 요령 등을 알렸다.
한편 군 자료에 의하면, 김달삼은 제주도 부대장을 통해 통위부 참모총장인 이형근과의 면담을 요청한 바 있었다. 이같은 내용은 1950년 3월 20일 당시 동해사단장이던 이형근 준장이 북한에서 빨치산을 이끌고 온 김달삼에게 보냈다는 ‘귀순 권고문’에 나온다. 즉 이형근은 이 귀순 권고문에서 “본관은 과거 통위부 참모총장 재직시 귀군이 제주도에서 아군 부대장을 통하여 본관과 면담할 것을 요청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제주도 부대장’이 김익렬 연대장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만일 ‘제주도 부대장’이 김익렬 연대장을 지칭한 것이라 할지라도 김달삼이 이형근과의 면담을 요청한 시점이 ‘4 평화협상’ 이전인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김달삼이 평화협상에 임하면서 그 ‘효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김달삼이 김익렬 9연대장과의 협상을 시작하며 우선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물었던 데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김달삼이 이형근 참모총장에게 면담을 요청한 것은 평화협상의 효력을 보장받기 위한 위한 것으로 보인다.
②하지 사령관 개입
미군정 수뇌부는 회담일이 임박해오자 긴밀하게 움직였다. 미 24군단 작전참모 타이센(A. C. Tychsen) 대령의 지시에 따라 슈(M. W. Schewe) 중령이 무장대와의 협상 하루 전인 4월 27일 제주에 도착했다. 슈 중령의 임무와 활동은 그가 타이센 대령에게 보낸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보고서에는 슈 중령의 임무에 관해 “제주도 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만나 섬의 상황을 평가하고 활동을 관찰하며, 제주도의 민간인에 대한 통제와 게릴라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맨스필드 중령이 제안한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과보고가 사령부에 보고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즉 슈 중령 임무의 핵심은 맨스필드 중령이 제안한 계획(선무공작)의 추진상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지적돼야 할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당초 평화협상은 미군정청 딘 장관의 지시에서 비롯됐지만 협상 직전 미 24군단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24군단 작전참모의 지시는 곧 주한미군사령관이자 24군단장인 하지 장군의 지시로서, 하지 장군이 평화협상에 직접 개입했다는 점을 말해 준다. 둘째, 제주 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은 당초 딘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군사고문관 드루스 대위, 김익렬 9연대장 등과 상의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협상 준비에 임했지만, 이제부터는 24군단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미 24군단은 군사업무, 미군정청은 민간업무로 역할분담이 되어 있는 데다, 미군정청은 주한미군사령부의 산하조직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군정청의 딘 장관이 제주 주둔 59군정중대를 통해 민간업무 외에 지방 차원에서의 군사적 명령을 일부 내릴 수는 있지만, 군령권은 엄연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하지 장군은 평화협상에 대해 어떻게 임했는가. 이 역시 미 24군단에서 파견된 슈 중령의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슈 중령은 4월 27일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미 20연대장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 제주도에 파견된 미 20연대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가이스트(Geist) 소령, 그리고 경비대 제5연대 고문관 드루스 대위 등과 만나 상황을 논의했다.
슈 중령에 앞서 광주 주둔 미 20연대의 브라운 연대장 등 미군 일부 병력이 이미 제주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브라운 대령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의 지시사항을 알렸다. 지시사항이란 ①경비대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것 ②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를 종식시킬 것 ③무장대 활동을 신속히 약화시키기 위해 경비대와 경찰이 확실한 결속을 할 것 ④미군은 개입하지 말 것 등이었다. 아울러 브라운 대령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현재 가용한 경비대 병력으로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맨스필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하지 장군의 지시사항을 보면, 경비대를 동원해 서둘러 사태를 진압하라는 내용이 있을 뿐 ‘평화협상’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하지 장군이 딘 군정장관의 방침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물론 딘 군정장관이 제안한 ‘평화협상’이란 것이 결코 무장대와의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력진압을 벌이기에 앞서 항복을 받아내자는 ‘귀순공작’이 딘 군정장관의 구상이었다. 김익렬 9연대장도 그의 회고록에서 ‘평화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귀순공작’이었다. 그런데 하지 장군의 강조점은 단순히 ‘사태 진압’에 있는 게 아니라 ‘조기 종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슈 중령은 4월 27일 제주도에 도착한 지 불과 30분만에 대대적인 작전을 폈다. 일주일 전 제주에 파견돼온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활용해 마을들을 수색했다. 모든 부두와 도로를 봉쇄한 가운데 무기, 삽, 곡괭이, 도끼, 전선 절단기 등을 찾기 위한 가옥 수색이 진행됐다. 아울러 혐의자, 단체 조직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했다. 그러나 전과는 거의 없었다. 마을에 젊은이는 거의 없었으며 여인들은 남편이 어디에 갔느냐는 질문에 대해, 죽었다거나 육지 또는 일본으로 갔다고 대답했다. 미군들이 이 대답을 거짓이라고 판단해 더 자세히 물으면 여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미군은 정찰기를 띄워 작전 상황을 파악했다. 슈 중령은 미군의 모습이 너무 많이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맨스필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작전현장에 가지 않았으나 모든 작전을 지시했고 보고 받았다.
4월 28일에도 작전이 진행됐다. 작전에 앞서 경비대 제5연대 장교들, 군 고문관 드루스 대위, 경찰 고문관 번스(Burns) 대위, 범죄수사대(CID)의 메리트(Merritt)와 작전계획을 철저히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슈 중령은 “제주도에서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더 나아가 제주도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군경의 성패에 남한 인민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는 하지 사령관의 이야기를 전했다. 4월 28일의 작전은 슈 중령이 L-5 정찰기로 상공에서 확인하는 가운데 오전 10시부터 시작됐다. 제5연대 병력이 트럭과 행군을 통해 4개의 마을에 진입했고 도로상이나 마을에 있던 민간인들을 집결시켰다. 슈 중령은 오전 11시 50분 59군정중대 본부로 돌아왔다가 작전결과를 보고받지 않은 채 오후 12시 40분 제주를 떠나 서울의 미군사령부로 복귀했다.
이상이 4월 27일과 28일 이틀동안 슈 중령이 제주도에서 펼쳤던 작전인데, 왜 4월 28일로 예정된 평화협상을 앞둔 시점에서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는지 의문이다. 또한 기존의 제9연대 병력을 제외하고 부산에서 파견돼 온 제5연대 병력을 동원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는 하지 장군이 사태 진압과 관련해 두 가지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 장군은 일단 딘 군정장관이 제안한 귀순공작 작전을 확인‧감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향후 무력 진압작전에 대비해 무장대의 전력을 탐색하는 등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슈 중령에게 작전을 진행시킨 것이다. 그래서 작전 때 9연대를 제외해 김익렬 연대장이 평화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제5연대 병력을 동원해 작전을 펼친 것이다.
또한 4월 27일부터 이틀간 벌인 ‘작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평화협상에 지장을 줄만한 본격적인 무력충돌이 아니라 탐색전 혹은 위세 과시용 작전이었다. 이같은 분석은 미 6사단과 미 24군단의 일일정보보고서 중 4월 27일과 28일의 경비대 작전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아래 보고서의 내용은 슈 중령의 작전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슈 중령의 작전은 당시 제주읍에 주둔하고 있던 제5연대 병력과 미 제20연대 병력을 동원해 제주읍 부근만을 수색한 것이다.
○1948년 4월 27일 제주읍 영평리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에 출입 방해를 위한 도랑이 파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1948년 4월 27일 정오부터 28일 정오 사이, 경비대 정찰대는 제주비행장 활주로 서쪽 3～5마일 지점에 위치한 제주읍 외도리와 애월면 하귀리에서 새로운 도로장애물과 절단된 전화선을 발견했다.
○1948년 4월 28일 미 보병 제20연대 정찰대는 제주읍 노형리에서 ‘자유롭고 통일된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김구와 이승만을 죽여야 한다는 내용이 적힌 삐라를 습득했다.
한편 슈 중령의 보고서는 ‘장래의 작전’과 관련, 4월 29일과 30일에도 연이어 작전을 벌일 계획이지만 이미 진행된 작전 결과에 따라 더 이상 작전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미 6사단과 미 24군단 일일 정보보고에 4월 29일과 4월 30일 경비대가 작전을 펼친 기록이 전혀 없는 걸로 보아 슈 중령이 제주도를 떠난 4월 28일 정오 이후 더 이상의 미군 작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③김익렬-김달삼 협상 성사
미군이 제주읍에서 수색전을 끝낸 직후 제주도 서남부 지역에 위치한 대정면 구억리에서는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에 평화협상이 열렸다. 김익렬 회고록을 통해 본 협상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김익렬 연대장은 1948년 4월 28일 정오 대정면 모슬포 연대본부를 떠나 회담 장소인 대정면 구억리로 가서 김달삼을 만났다. 김익렬은 우선 김달삼에게 “제9연대가 지금까지는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며 회담이 결렬되면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알렸다.
김달삼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의문을 표했다. 이에 김익렬은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밝혔고, 김달삼도 “나도 제주도의 도민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밝힘에 따라 협상이 진행됐다.
김익렬과 김달삼은 우여곡절 끝에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①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합의된 귀순절차는 회담 다음 날에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각각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지에도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4시간에 걸친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밤늦게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보고하자 맨스필드는 큰 만족감을 표했으며 자신이 요청한대로 전 경찰에 대해 지서 밖 외부에서의 활동을 일체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고 이후 제주4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
3)진압정책 채택
①오라리 방화사건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은 협상이 파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제주읍 중심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면서 시작됐다.
오라리에서는 4무장봉기 이래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희생 사건이 몇차례 발생했다. 4월 29일에는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4월 30일에는 동서간인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됐는데 두 여인 중 한 명은 맞아 죽고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5월 1일 벌어졌다. 오전 9시경 전날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마을 부근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경찰 3～4명과 서청‧대청 단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매장이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만을 태운 채 돌아갔고 청년단원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 중에는 오라리 출신 대청 단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면서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마을을 벗어날 무렵인 오후 1시경, 무장대 20명 가량이 총과 죽창을 들고 청년들을 추격했다. 청년단이 급히 피해 이 과정에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 시각을 전후해 마을 어귀에서 이 마을 출신 경찰관의 어머니가 피살되었다.
오후 2시경, 서청‧대청 단원들로부터 무장대 출현 소식을 접한 경찰기동대가 2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오라리 마을로 출동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장대는 이미 마을을 떠났고, 주민들은 불붙은 집을 진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총을 쏘며 진격해오자 주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산 쪽으로 도망쳤다. 이 과정에서 고무생 여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이 때 어머니를 잃은 박기하는 “어머니가 총에 맞아 숨졌을 때 하늘에서 비행기가 오랫동안 머리 위를 맴돌았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경비대 지프와 트럭이 출현하자 황급히 마을을 떠났다. 평화협상 당사자인 김익렬 연대장도 사건 발생 소식을 듣고 직접 모슬포에서 달려와 현장 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경찰의 후원 아래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자행한 방화라고 판단, 미군정을 찾아가 이를 보고했으나 묵살 당했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무장대의 행위라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 대해 당시 제9연대 정보주임이었던 이윤락 중위는 “김익렬 연대장과 함께 맨스필드 중령을 찾아가 보고했더니 평화협상 결과에 만족해하던 지난번과는 달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동화여관에 미군 CIC(방첩대)와 G-2(정보참모부) 간부요원들이 와 있으니 그들과 만나 협의하라’고 말했다. 만나보니 G-2 간부는 중령이었고 CIC간부는 소령이었는데, 그들은 우리의 조사보고서에 대해 ‘경찰 보고와 다르다. 그것은 폭도들의 짓이다’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해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한편 김익렬 연대장은 포기하지 않고 오라리사건의 조사를 계속해 다음 날인 5월 2일 오라리 주민들이 방화 주동자로 지목한 이 마을 출신 대청 단원 박 아무개를 제주읍내에서 검거해 모슬포 영내에 구금 조치했다. 그러나 박 아무개는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된 후 신임 박진경 연대장에 의해 곧 풀려나 경찰에 투신했다. 이는 경비대원들의 불만을 샀고, 후에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들이 재판정에서 박진경 연대장의 과오를 지적할 때 그 중의 하나로 언급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오라리 방화사건은 미군 촬영반에 의해 입체적으로 촬영됐다. 미군 비행기에 의해 불타는 오라리 마을이 공중에서 찍혔는가 하면, 지상에서는 오라리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모습이 함께 촬영되었다. 긴박하게 돌아간 당시의 상황들이 촬영됐다는 것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무성영화의 필름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돼 있는데 제주4사건의 초기 상황을 다룬 유일한 영상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필름의 제목은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로서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미군은 이 영화를 통해 오라리 방화사건이 무장대 측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편집해 놓았다. 따라서 이 영화는 강경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미 그 시점에 미군의 강경책이 결정돼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②미군의 공격 명령
1948년 5월 3일 딘 군정장관 등 미군 수뇌부는 무장대를 총공격해 제주사건을 단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경비대총사령부에 명령했다. 무장대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귀순공작’이 파기된 대신에 무력에 의한 강경진압책이 채택된 것이다.
한편 5월 3일은 김익렬-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져 평화협상이 깨지는 계기가 된 날이기도 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총격을 가한 자를 잡아보니 경찰이었으며, 취조한 결과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고 증언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이같은 경찰의 행태에 대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동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면서 전투가 재발되자 맨스필드 중령도 크게 화를 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날 벌어진 경찰의 총격사건과 상관없이 이미 평화협상의 파기는 예정된 일이었다. 제주 주둔 미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과 김익렬 연대장이 제주도에서 평화협상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중앙의 미군 수뇌부는 이미 무력진압 방침을 채택했고 이를 경비대총사령부에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경비대총사령부 총참모장 정일권(丁一權) 대령은 “5월 3일 이후 브라운 소장, 딘 군정장관 등의 현지 지휘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단시일 해결책으로 단연 공격작전으로 나가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딘 군정장관은 지난 4월 18일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귀관은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고 맨스필드 중령에게 명령함으로써 김익렬-김달삼 간에 열린 평화협상의 단초를 제공했던 당사자였다. 그랬던 딘 장관이 태도를 바꾸게 된 것은 미 24군단장이자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장군의 결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지 장군은 딘 장관이 제주 주둔 미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에게 내린 지시로 시작된 ‘귀순공작’이 김익렬 9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으로 구체화 되어가자 협상일 하루 전인 4월 27일 슈 중령을 제주에 파견해 이를 확인‧감독하도록 했다. 그리고 슈 중령은 4월 27일부터 이틀간 경비대 병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친 후 4월 28일 낮 12시경 서울로 돌아갔다. 4월 27일과 28일의 작전은 비록 수색전에 그치긴 했지만, 경찰 대신 경비대가 주도한 작전으로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이는 유동열 통위부장이 제주사건과 관련해 “4월 27일 폭도 토벌의 전화를 열었다”고 한 발언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나서 4월 28일 평화협상이 열렸고, 다음날인 4월 29일에는 딘 군정장관이 제주도를 다녀갔다. 이 때 딘 장관이 왜 제주에 왔는지, 당초 평화협상(귀순공작)의 제안자로서 협상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오라리 방화사건 때 중앙에서 온 미 CIC(방첩대)와 G-2(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의 간부가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한 채 강경진압을 강요했다는 당시 9연대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의 증언을 보면, 미군 수뇌부에서는 이미 무력진압의 방침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을 책임지고 있는 하지 장군은 4월 27일 슈 중령을 제주에 보내 사태 진압을 위한 두 가지 방법에 대해 점검했다. 즉 귀순공작을 확인‧감독하는 동시에 아울러 무력진압에 대비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 무장대의 전력을 확인했다. 5선거를 앞둬 사태의 조기 진압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하지 장군은 결국 두 번째 방법인 무력진압 방침을 채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같은 방침은 제주에서의 작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간 슈 중령의 4월 29일자 보고서에 암시되어 있다. 슈 중령은 보고서에서 제주도 상황에 대해 “미 59군정중대장이 현재 제주도에 있는 병력을 확실히 통솔한다면 제주도에 있는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상황을 진정시키는데 충분하다. 공산주의자들과 게릴라 세력이 오름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활발한 작전이 요구된다”고 평가했다. 현재의 병력만으로도 진압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이 보고서는 하지 장군의 결심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③연대장 전격 교체
1948년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安在鴻) 민정장관,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 경비대사령관 송호성(宋虎聲) 준장 등을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 제주도지사 유해진(柳海辰),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金益烈) 중령, 제주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과 딘 장군 전속통역관 등 모두 9명이 참석했다. 군정청의 수반을 비롯해 모두가 군‧경의 수뇌부들이었다.
이 날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밝혀주는 자료로는 회의 참석자 중 한 명인 김익렬 연대장의 회고록이 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맨스필드 중령이 회의 사회를 보았는데, 맨스필드는 회의에 앞서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으나 회의 내용은 극비이다.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 상황설명을 한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은 사태의 성격을 국제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계획한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군‧경 합동작전만이 사태를 진압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로 나선 김익렬 연대장은 폭동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경찰의 실책에도 기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은 또한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도민들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사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제주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있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김익렬은 이어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 만한 물적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했다.
뜻밖의 사진첩과 물적 증거물이 나오자 딘 장관은 조병옥 경무부장을 향해 “닥터 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의 보고내용과 다르지 않소”라고 질책했다. 그러나 조병옥은 김익렬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증거물과 사진첩도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김익렬을 가리키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고 외치면서, 김익렬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주의 간부로서 활약하고 있으며, 김익렬은 자기 아버지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이 조병옥의 발언에 격분해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이자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싸움이 계속되자 딘 장군은 회의를 종결시켰고, 그 길로 공항으로 가 서울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딘 군정장관 일행은 오전 7시에 제주를 향해 떠났다가 회의를 마치자마자 그날 오후 5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딘 장관은 다음 날인 5월 6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5일 우리 일행이 제주도에 도착하자 오전 중에 각각 각도를 달리하여 독자적 입장에서 사건을 조사하였다. 그래서 하오 1시경에 집합하여 각자가 조사한 것을 교환하였다. 그래서 그 보고를 조사한 결과 이번 폭동은 도외(道外)에서 침입한 소수의 공산분자들의 모략에 선동되어 양민들이 산으로 들어가서 현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은 소수 불순분자가 산으로 들어가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제주도의 분위기는 평온하였다. 이 사건도 경찰과 경비대의 노력으로 곧 회복되리라고 본다.
딘 장관의 기자회견에서 주목되는 것은 첫째, 일행은 각각 각도를 달리하여 독자적 입장에서 사건조사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제주사태를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각이 각각 달랐음을 말해준다. 둘째, 사건의 배후로 ‘도외에서 침입한 공산분자’를 지적했다는 점이다. ‘외부 공산분자 유입설’이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셋째, 제주도의 상황에 대해 낙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딘 장관이 제주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다음 날인 5월 6일 제9연대 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전격 교체되었다. 김익렬 중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오전 11시경 난데없이 경비대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 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라며 당황했던 순간을 묘사했다.
이상 5월 6일 딘 장관의 기자회견 내용과 같은 날 전격적으로 이뤄진 연대장 교체를 보면, 딘 장관은 5월 5일 제주에서 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이미 무력진압 방침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월 5일의 회의는 함께 온 일행 중 무력진압 방침에 이견이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한 절차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그 대상은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과 안재홍 민정장관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경비대는 출범하면서부터 그 위상을 놓고 경찰과 갈등을 벌이며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향후 국군의 모체가 될 경비대가 외적이 아닌 동족을 대상으로 첫 작전을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이 당시 경비대의 일반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6월 2일 통위부장은 담화를 발표하면서 “육해경비대는 신성한 건국초기에 동족상잔의 애사(哀史)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은인자중하여 왔다”며 그동안 무력진압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김익렬 회고록에 주목되는 대목이 있다. 즉 5월 5일 김익렬 연대장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인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을 때, 송호성 경비대총사령관과 안재홍 민정장관이 적극적으로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김익렬 연대장은 송호성 총사령관이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불분명했으며, 자신은 그것이 조병옥을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편 김익렬은 연대장 해임 후 서울로 가서 송호성 총사령관에게 제주상황을 보고했더니 송호성은 “제주도 사람들은 이제 다 죽었구나”라며 걱정하였고,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한결같이 칭찬하고 지지해 주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안재홍은 싸움이 그치지 않자 갑자기 탁자를 두드리고 통곡을 하면서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강조돼야 할 점은 5월 5일의 ‘제주회의’와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는 5선거를 앞두고 제주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한 미군정 수뇌부의 조치였다는 점이다.
라.제주도 5선거 좌절
1)선관위원‧선거사무소 피습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전국의 상황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전국적으로 5선거 반대자들에 의한 경찰서‧선거사무소 습격이 줄을 이었다. 딘 군정장관은 남한 땅의 13,800여 개소의 선거사무소를 35,000여 명의 경찰력으로는 도저히 지켜낼 수 없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4월 16일 향보단(鄕保團)을 조직해 경찰을 지원하도록 했다.
그런데 당시 좌파 뿐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구 계열의 우파와 김규식 계열의 중도파에서도 5선거가 한반도를 영구히 두동강내는 단선‧단정 획책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김구와 김규식은 단독선거에 반대해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하는 등 선거 반대 움직임이 크게 일어 미군정을 긴장시켰다.
특히 제주에서는 ‘단선‧단정 반대’가 4월 3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무장대의 주요 슬로건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서든 제주 사태를 조기에 진압해 당면 현안인 5선거를 무사히 치르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선거를 앞두고 △경비대 9연대장의 교체 △경비대 병력 증강 △응원경찰 파견 △향보단 조직‧배치 △군정 수뇌부의 현지 시찰 등의 대책을 세워갔다. 그러나 최종 선거인 등록 결과 제주도 등록률은 64.9%로 전국 평균 91.7%에 훨씬 못 미치는 전국 최하위를 기록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거나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잇따라 벌어졌다. 4월 중순경에 이르자 선거사무소 습격 사건이 시작됐다. 4월 18일 새벽 제주읍 도평리 투표소가 피습 당해 선거기록을 빼앗겼고, 4월 19일에는 조천면 신촌리 투표소가 피습 당해 화재로 소실되는 바람에 모든 기록물을 잃었다. 투표소 피습에 이어 선거관리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미군 보고서는 4월 21일 밤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진 선거 관련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호리-48년 4월 21～22일의 밤중에 숫자미상의 사람들이 선거등록사무소를 기습해 모든 선거기록을 탈취했다. (C-3)
○내도리-48년 4월 21～22일의 밤중에 지역구 사무소의 모든 등록기록이 탈취 당했다. (C-2)
○동일리-48년 4월 21일 밤 10시 30분,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등록사무소를 기습해 선관위원을 사살하고 모든 선거기록을 탈취해 갔다. (C-2)
○모슬포-48년 4월 21일 밤 11시, 경찰복장을 한 규모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경찰지서와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공격자들은 부근 캠프에 있던 경비대에 의해 격퇴됐다. 우익 1명이 죽었다. (C-2)
○대 정-48년 4월 22일, 아마도 앞서 모슬포에서 사건을 저지른 자들과 같은 집단으로 보이는, 경찰복장을 한 무리들이 선관위원을 공격해 죽이고 등록기록을 탈취했다.
선거사무소에 대한 공격이 잇따라 발생하자 선거관리위원들은 투표용지와 투표함을 투표소로 옮기는 일을 거부하면서, 미군이 수송수단을 이용해 이 업무를 대신 수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4월 30일 새벽 대정면 신평리에서 선거관리위원이 피살되었다. 5월에도 선거관련 업무 종사자에 대한 습격 사건이 이어졌다. 5월 1일 제주읍 도평리에서 마을 선거관리위원장이 칼에 찔려 숨졌다. 이어 5월 5일 화북리 선거관리위원장이 피살되었다. 이처럼 선거관련 업무 종사자에 대한 습격사건이 그치지 않자 중산간마을에 거주하는 선거관리위원들은 자기 마을을 떠나 해변마을로 피난했다. 선관위원들이 사퇴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5월 3일 조천면 조천리의 모든 선거관리위원들이 사퇴했다. 선관위원들의 사퇴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는 경비대가 나서 투표용지 배분 등 선거관리 업무를 대신 맡기도 했다.
미국은 전국적인 선거반대 움직임에 노심초사 하면서도 선거에 개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미군들에게 투표소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미군들이 직접 선거 현장에 나타나 독려하기도 했다. 미군 보고서는 군정관리까지 선거 업무에 나섰던 당시 제주도의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했다.
제주도에서는 공산폭도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선거관련 공무원들이 투표인 명부 열람 등 모든 선거관련 업무 취급을 꺼려함에 따라 선거실시에 대한 어려움이 발생되고 있다. 조천면에서는 대략 50%에 해당하는 선거관리위원들이 사임했다. 총 65개 투표소가 선거 당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군정관리들이 북제주군의 약 50% 지역에서 선거자료 배포와 수집을 도왔다.(미군정 보고)
미군들은 이 때 제주지역을 순시하며 투표함 수송상황을 점검하다 조천면에서 특히 실적이 부진한 것을 확인하고 화가 난 나머지 조천면장을 연행하기도 했다. 당시 조천면장이었던 김민규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장총을 맨 미군이 통역관과 함께 조천면사무소에 들렀는데, 투표함 배치 상황을 점검하다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어려운 지역 실정을 이야기했으나, 미군은 무조건 ‘협조하지 않는다’면서 계속 화를 내다가 나를 억지로 지프에 태워 끌고 갔다. 통역을 통해 항의를 하고 나서야 풀려났다”고 증언했다.
안덕면에서는 미군이 직접 중산간마을로 가서 선거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 미군과 함께 투표함을 들고 중산간마을로 갔던 김봉석은 “광평리에 보낸 투표함이 두 차례나 탈취 당해 고민을 하던 차에 미군 1명이 스리쿼터를 몰고 와 투표함을 수송하겠다고 나섰다. 위험하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극 나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함께 광평리로 가서 리사무소에 투표함을 설치했다. 결국 광평리에서는 그 미군과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고 증언했다.
이같은 혼란 속에서 대리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남제주군 안덕면 상천리에서는 이날 이장 집에서 이장‧서기 등 3명이 모여 100명 가까이 되는 마을 유권자들의 투표용지를 몽땅 한 특정후보에게 몰아 투표를 해버렸다.
이 기간 중 경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미군 자료에 의하면, 5월 7일부터 10일까지 나흘동안 제주도에서 모두 2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들의 성분을 보면 ‘△경찰=사망 1명, 부상 9명, 실종 4명 △우익=사망 7명, 부상 3명 △폭도=사망 21명’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미군 보고서는 당시 제주에 파견돼 있던 제주도 군정청본부, 미 20보병연대, 미 방첩대의 정보요원들이 보고한 정보를 수합해 기록한 것이다. 또한 이 정보들 속에는 현지 경찰이나 경비대가 보고한 내용도 포함돼 있다. 따라서 미군 보고서는 미국의 이익과 부합하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으며, 정보의 내용도 실제의 상황을 전부 기록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누락하거나 은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위에 소개된 5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희생자 통계에서도 전체 사망자 29명 중 21명을 ‘폭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기간 미군 보고서의 내용 중 ‘폭도 사살’에 관한 기록은 “경비대는 1948년 5월 10일 조천리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탈출하려 한 남자 1명을 사살했다”는 내용뿐이었다.
한편 무장대는 선거를 보이코트 하는 방법으로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주민들의 산행은 5월 5일경부터 시작됐다. 주민들이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그래서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 가족이나 대동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미 6사단 일일보고서는 5월 10일 하루동안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중문면-48년 5월 10일, 투표소가 기습당해 모든 투표용지가 파괴됐다.
△성산면-48년 5월 10일, 투표소가 60명의 집단에 의해 방화됐다.
△제주읍-48년 5월 10일, 다이너마이트 2개가 제주읍사무소 부근에서 폭발했다. 보고된 사상자는 없다.
△제주공항-48년 5월 10일 오전 11시 40분, 약 250명과 50명의 두 집단이 각각 공항남쪽 200야드 지점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큰 집단은 평범한 백색깃발을 들고 있었다. 경비대 1개소대가 그곳에 파견됐으나 큰 집단은 노형리 쪽으로 사라졌다. 보고된 사상자는 없다.
△표선면-48년 5월 10일, 투표소 1곳이 습격 받았다. 2명이 죽고 모든 투표용지가 파손됐다.
△구좌면 송당리-48년 5월 10일 오전 11시, 2명이 죽고 1명이 부상당했으며, 가옥 7채가 불에 탔다. 자세한 내용은 조사중이다.
△조천면-48년 5월 10일, 14곳의 모든 투표소가 제 기능을 못했다.
△조천면 북촌리-48년 5월 10일 오후 4시, 투표소가 불에 탔다. 모든 투표용지가 파손됐다.
△표선면 가시리-48년 5월 10일, 투표소 피습 때 이장과 학교 교장이 피살됐다. 교장 부인은 부상을 당했다.
△성산면-48년 5월 10일, 투표소 피습 때 4명이 피살됐다. 자세한 내용은 조사 중이다.
△조천면 조천리-48년 5월 10일, 경비대는 심문 받던 중 탈출을 시도하던 한 사람을 죽였다. (B-2)
△애월면 신엄리-48년 5월 10일 오후 6시, 한 군정관리는 신엄리 교외에서 경비대원 5명을 만났다. 그 경비대원들은 16명의 유격대에 의해 신엄리에서 축출 당했다고 진술했다. 그 후 밤중에 조사한 결과, 그런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고 유격대가 그 마을에 있지도 않았으며, 그 경비대원 5명은 근무이탈 했었음이 밝혀졌다. 그 미군 고문관은 그 경비대원들을 직위해제 시킬 것이라고 보고했다.
2) 2개 선거구 무효화
미군정은 미군과 경비대, 경찰, 향보단까지 총동원하여 선거를 독려했지만 경계가 삼엄했던 제주읍내 중심지를 제외하고는 선거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를 실시한 결과, 총선거인수 7,840,871명 가운데 7,487,649명이 투표해 95.5%의 투표율을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제주도 지역은 3개 선거구의 총 유권자 85,517명 중 53,698명이 투표해 62.8%의 가장 낮은 투표율을 나타냈다. 이 중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총선거인수 37,040명 중 32,062명 투표)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무소속 오용국(吳龍國)이 당선 확정되었다. 그러나 북제주군 갑구는 43%(총선거인수 27,560명 중 11,912명 투표), 북제주군 을구는 46.5%(총선거인수 20,917명 중 9,724명 투표)의 투표율로 과반수에 미달되었다. 국회선거위원회에 제주도의 선거결과 보고를 위해 상경했던 선관위원 홍순재는 제주도의 선거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북제주군 갑구：73투표구 중에서 겨우 33투표구의 투표함 32개가 들어왔는데, 그중 2개 투표함은 공함(空函)이었다. 따라서 결국 43투표구의 선거가 실시 못된 것으로 양귀진씨가 3,000여 표로 나타난 결과로는 최고점이나 등록자 37,040명 중 과반수가 투표치 않았으므로 북제주군 을구 양병직씨의 경우와 함께 국회선위(選委)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북제주군 을구：61개 투표구 중에서 31투표구만이 선거를 실시하였다.
△남제주군：87투표구 중에서 86투표구가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현 입법의원 오용국(吳龍國‧무소속)씨가 16,000여 표로 당선되었다.
결국 제주도의 투표 상황은 북제주군 갑구(甲區)는 73개 투표구 중 31개 투표구, 북제주군 을구(乙區)는 61개 투표구 중 32개 투표구만 선거를 실시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에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5월 18일 선거법 제44조에 의해 갑구의 최고득표자 양귀진(梁貴珍)과 을구의 최고득표자 양병직(梁秉直)의 당선을 무효로 인정하고 19일 군정장관에게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한 무효 선포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딘 군정장관은 5월 26일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한 선거가 무효이며, 선거법 제44조에 의하여 오는 6월 23일 국회선거위원장의 지휘 감독으로 재선거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의 포고(5월 24일부)를 발표했다.
그러나 제주 사태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더욱 악화의 길로 접어들어 갔다. 제주도선관위는 6월 초순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6월 23일의 국회의원 재선거는 불가하다며 다시 재연기를 요청했다.
오는 6월 23일 시행하기로 된 북제주군 갑을 양구의 국회의원 재선은 상금도 시행불능 상태에 있으므로 제주선거위원회에서는 중앙선거위원회에 대하여 재선거일 재연기를 요청하였다 하는 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한다.
(1) 제주도내 2군 1읍 12면에 1,206명의 선거위원이 있었는데 그 중 15명이 살해당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므로 남제주 선거위원들은 피신 중에 있는 사람도 많으나 대부분은 후환이 두려워서 나오기를 싫어하고 있다.
(2) 북제주군내 133개소의 투표소에 있던 선거인명부는 거의 그 절반이상이 탈취 혹은 방화 등으로 말미암아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새로 작성하지 못할 현상에 있다.
(3) 5선거에 입후보하였던 북제주군 갑구의 4명과 을구의 4명은 한 사람도 양보하는 사람이 없으니 무투표 선거로 할 수도 없는 현상이다.
선거 강행의 의지를 보였던 딘 군정장관도 부득이 6월 10일 선거를 무기 연기하는 다음과 같은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제주도(濟州島) 재선거의 무기연기
제1조 1948년 3월 17일부 국회의원선거법 제44조에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여 중앙선거위원회의 추천으로서 본관은 1948년 5월 10일 시행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 선거의 투표가 파괴분자의 행동과 폭력으로 인하여 해(該) 양 선거구의 5할에 미급(未及)한 투표구에 한하여 행하여졌기 때문에 1948년 5월 24일 무효를 선언하였음. 동시에 본관은 해(該) 양 선거구에서 1948년 6월 23일 재선거를 시행하도록 명하였음. 제주도에서 파괴분자는 공중치안과 질서의 교란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므로 북제주도(北濟州島)의 갑구 및 을구의 선거인에 대하여 해(該) 양구(兩區) 인민의 의사를 진실히 대표할 수 있는 평화롭고 혼란없는 선거를 보장하기 위하여 본관은 자(玆)에 해(該) 양 지구의 재선거를 무기연기할 것을 명함. 제2조 본령은 공포일로부터 효력이 발생함.
이로써 제주도는 5선거를 거부한 남한의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국회의원 재선거는 꼭 1년 후인 1949년 5월 10일에 실시되었다.
2.초기 무력충돌기(1948.5.11～1948.10.10)
가.미군사령관의 진압 지휘
1)미 20연대장 파견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선거가 무산되자 5월 20일경 미 6사단 예하 광주 주둔 제20연대장인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현지의 모든 진압작전을 지휘‧통솔하도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4평화협상’ 직전 제주를 방문해 예하 부대인 제주도 주둔 제59군정중대의 맨스필드 중령과 토벌작전을 점검한 바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6월 23일로 예정된 재선거를 앞둬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라는 딘 군정장관의 특명을 받고 미 6사단이나 20연대 소속이 아닌 특수한 자격으로서 파견돼 온 것이었다.
4월 3일 무장봉기 당시 브라운 대령의 관할지역인 전라북도의 경비대 제3연대 연대장을 맡았던 임선하는 브라운 대령의 위상과 성향, 그리고 그의 제주파견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브라운 대령은 당시 미 6사단 20연대장이었습니다. 20연대 본부는 광주에 있었는데 전남‧전북과 제주가 그 사람의 치안 책임 아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전북에 주둔해 있던 3연대장의 직책을 맡았던 나도 브라운 대령으로부터 작전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의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 경험도 많았지요. 당시 광주에는 대표적 미군 지휘관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브라운 대령이요, 다른 한 사람은 프라이스 대령이었습니다. 프라이스 휘하에는 전술부대가 없었고 도청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이른바 민정관(군정장관)이었지요. 그러나 브라운 대령은 광주 상무대에 실지로 20연대 전투부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미 20연대 점령 작전구역 안에서는 경찰이나 경비대는 브라운의 지휘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지위에 있던 브라운 대령이 제주에 상주하게 된 것은 미군정에서 그만큼 제주사태를 심각하게 여기게 됐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시 전주에 있었기 때문에 브라운 대령의 제주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브라운 대령의 제주에서의 역할이나 활동은 1948년 6월에 조덕송(조선통신 특파원)이 쓴 글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실린 조덕송의 글 중 관련부분은 다음과 같다.
지금 제주에는 육로로부터 파견된 경관 외에 기히 있던 사설단체까지도 임시경관으로 편입되어 있다. 경찰과 협력하는 단체로 제주도에는 아직도 향보단이 존속하고 있으며 그들은 경찰의 지휘 하에 비교적 경찰지서에 가까운 동리의 경계에 불철주야 하고 있다. 이리하여 위험한 산악지대의 전투에는 경비대가 주동이 되어 있고 또한 해안경비대는 제주도 해안의 경계와 육지로부터 증가되는 파견부대의 수송에 당하고 있으니 이를 통솔 지휘하는 최고지휘관이 미국 브라운 대좌이다. “본관이 온 후로는 육상 해안 양(兩)경비대와 경찰이 잘 협력하여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언명한 최고지휘관은 “사건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다(브라운 대좌가 언명한 2주일은 지금 한 달이 넘었다)”라고 피력하고 “사건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본관이 평정해 놓은 후에 다시 발생한다면 그것은 본관의 책임이 아니고 조선인 행정자의 책임이다”
조덕송은 같은 글에서 “치안복구를 목적으로 딘 군정장관의 특명을 받고 이곳에 와 있는 최고지휘관 브라운 대좌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고 언명했다”고 재삼 강조하면서 “조선사람 아닌 브라운 대좌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견해이겠으나 무엇인지 섭섭함을 금치 못할 말씀이다”고 심경의 일단을 토로했다.
그 당시 법조‧언론‧재경제주도민 등 각계에서는 “4의 발발 원인에는 억압에 못 이겨 민심이 폭발한 복합적인 것이 있다. 그 원인을 찾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 해결책을 거듭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이런 원인 치유책은 외면한 채 강경진압 일변도로 치달았음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는 브라운 대령의 짧은 발언이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브라운 대령은 “본관의 계획대로만 간다면 약 2주일이면 평정될 것”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처음부터 강력한 작전을 전개했다. 조덕송은 그의 글에서 “상공에는 미군 정찰기가 날고 해상에는 미군 순양함의 경계의 황연이 그칠 사이 없고 또한 육상에는 기마로, 지프로 제일선을 지휘하는 미군장교가 동서를 질주하고 있는 금일의 제주도”라며 브라운 대령이 진두 지휘하는 육‧해‧공 작전에 대해 묘사했다.
브라운 대령이 강경일변도의 작전을 한 까닭은 그가 부임한 후 벌어진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무엇보다도 브라운 자신의 성향과 제주사건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미 6사단장 워드(Orlando Ward) 소장은 자신의 부하인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 토벌사령관으로 떠나게 되자 5월 19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충고했다.
본인은 한가지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데 그것이 적절할 지 그렇지 않을 지 모르겠지만 본인은 과거에 남아메리카와 그 밖의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선동과 관련이 전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소요와 혁명이 있었던 때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제주도에 공산주의의 선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본인은 주요한 문제가 경찰에 대한 증오심에 의하여 발생되었다고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소요들은 시민들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체하여 적절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자극요인들을 제거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매우 완곡한 표현이긴 하지만, 워드 소장은 제주도 사태를 반드시 공산주의 선동의 문제로만 보지 말 것을 조언한 것이다. 아울러 경찰의 횡포가 사태의 한 원인임을 지적하면서, 경찰의 횡포를 막고 민심을 수습해 사태를 해결하라는 충고이다. 브라운 대령도 워드 소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부임하자마자 경찰의 횡포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운 대령은 7월 2일 답신을 보내 워드 소장의 충고에 대해 반박했다. 이 편지에서 브라운은 “제주도가 공산주의자들의 거점으로 조직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그 증거는 일단 우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파고들어 갔을 때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경찰의 잔악성과 비효율적인 정부도 원인이었지만 본도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에 비하면 지엽적인 원인들입니다”라며 강경작전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또한 브라운은 그의 보고서에서 “연대장들이 공산 선동가들과 협상을 벌이면서 단호한 작전이 필요한 곳에 지연전략을 구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면서 “만일 군정중대의 민간담당 장교가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더라면 경비대는 즉각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도 일부 관여했던,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간의 ‘4 평화협상’은 무장대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며, 그 때 보다 강력히 대처했어야 했다는 후회였다.
이같은 브라운 대령의 성향과 제주사건에 대한 그의 인식은 강경진압작전으로 나타났다. 브라운 대령은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열흘 가량 지났을 때 언론보도를 통해 자신이 펼치고 있는 작전에 대해 밝혔다. 이 보도에서 우선 브라운은 “내가 오기 전에는 경찰과 육해군 사이에 서로 협력을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내가 온 후부터는 그러한 일이 없어졌다”고 밝혀 제주도 주둔 군‧경을 통합 지휘하는 자신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이어 브라운은 경찰, 경비대, 해안경비대에게 각각 역할을 분담시켜 펼치고 있는 자신의 작전 방침을 밝혔다. 즉 △경찰은 한라산을 중심으로한 주변도로로부터 4㎞까지 사이에서 치안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고 △국방경비대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으며 △해안경비대는 하루에 두 번씩 제주도 일대 해안을 순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운 대령이 밝힌 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이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 채 부작용만을 낳았다는 것은 이후의 전개과정이 말해주고 있다.
2)박진경 연대장의 진압작전
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간 다음 날인 5월 6일, 전격적으로 제9연대장의 교체가 이뤄졌다. 그 동안 화평정책을 추진해 온 김익렬 중령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경비대 총사령부 인사처장 박진경 중령을 발령한 것이다. 박진경 중령이 새 연대장으로 발탁된 것은 일제 때 오사카 외국어학교를 나와 영어에 능통해 미군과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일제 말기 일본군으로서 제주도에 주둔한 바 있어 일본군이 축성한 진지나 지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경비대 총사령부는 1948년 5월 4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를 5월 15일 제주도로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合編)토록 했다. 아울러 초대 제11연대장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즉 5월 6일 제9연대장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온 박진경 중령은 5월 15일자로 제11연대장으로 변경됐고, 6월 18일 부하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한 달 열흘 가량 제주도에 머물며 진압작전을 지휘한 것이다.
5월 15일 이후 박진경 연대장이 지휘하는 제11연대의 병력은 기존 제9연대의 1개 대대, 부산 제5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대구 제6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그리고 11연대가 수원에서 창설될 당시의 1개 대대와 연대 기간요원 등으로 구성됐다. 또한 연대 참모를 두어 연대의 틀을 갖추었다. 당시 제11연대 참모부 구성을 돕기 위해 제주에 왔던 김종면(金宗勉)의 증언에 의하면, 5월 말경 S-1(인사참모)에 최갑중 소령, S-2(정보)에 김종평 중령, S-3(작전)에 임부택 대위, S-4(군수)에 백선진 소령이 파견됐다. 그런데 김종면은 “계급을 보더라도 우리는 연대 참모가 아니라 고문관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박진경 연대장이 죽자 작전을 맡은 임부택 대위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제주를 떠났다”고 말했다.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한 직후인 5월 20일 경비대 병사 41명이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탈영병들은 주로 제주출신이었다. 이 사건은 진압작전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제주출신 병사들이 진압작전에서 소외되었다는 점도 문제였다.
제주출신으로서 9연대 3기생으로 입대해 당시엔 11연대 소속이었던 한 증언자는 “탈영한 군인들 중 90%가 제주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자 취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 놈은 다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출신은 모두 ‘모슬포 대대’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의 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탈영사건 이후 우리 모슬포 대대를 제주읍 오등리 천막 속에 분리시켜 놓고 토벌도 시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9연대 1기생 출신의 한 증언자는 “5연대와 6연대 병력이 들어온 후부터 작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고뭉치였다.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이 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제주출신이 소외된 채 제주 실정을 모르는 타 지역 출신 군인으로만 작전을 전개한 것은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한 배경이 되었다.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우선 “선무공작으로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단위 대장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는 평가이다. 또한 당시 박진경 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채명신(蔡命新)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쪽에서는 박진경 대령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하는데 그는 양민을 학살한 게 아니라 죽음에서 구출하려고 했습니다. 4 초기에 경찰이 처리를 잘못해서 많은 주민들이 입산했습니다. 그런데 박 대령은 폭도들의 토벌보다는 입산한 주민들의 하산에 작전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민간인 보호작전은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무자비한 작전공격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박진경 연대장이 무모한 강공작전을 폈다는 주장은 그가 연대장 취임식 때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발언했다는 전임 연대장의 증언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고 있다. 특히 박진경 연대장을 직접 저격했던 손선호(孫善鎬)는 재판정에서 박진경 연대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중략)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이같은 손선호의 주장은 박진경 연대장의 참모였던 임부택(林富澤) 대위의 증언과도 비슷하다. 임 대위는 재판정에서 ‘①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 ②양민 여부를 막론하고 도피하는 자에 대하여 3회 정지명령에 불응자는 총살하라’는 박진경 연대장의 명령에 대해 진술했다. 박진경 연대장이 벌인 작전의 모습은 제주지역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의 보고서를 통해 일부 엿볼 수 있다. 제주도 진압작전의 최고 정점에 브라운 대령이 있었기 때문에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은 곧 브라운 대령이 진두지휘하는 작전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6월 16일 쓰여진 한 미군 비밀보고서는 그 무렵 전개된 진압작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다음과 같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a). 국방경비대 4개 대대가 제주도의 동서남북에 각각 주둔하고 있다. 이들 대대는 전투지역 휘하에 약 2개 중대로 구성됐다. 경찰은 해안지역 치안에 책임을 맡고 국방경비대는 해안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맡고 있다.
b). 모든 대대가 동시에 공동 목표로써 산간 고지대를 향해 내륙으로 작전을 전개하는 경비대 지역의 수색은 완료될 예정이며 군인들은 오늘 자신들의 부대로 돌아갈 예정이다. (6월 16일)
c). 이 작전에서 약 3,000여 명이 체포됐고 심사를 받았다. 현재 여성 2명을 포함해 575명이 제주의 포로수용소에 있으며 4개 심문팀의 심사를 받고 있다.
이 무렵의 작전에 대해 한 언론은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는 약 6천 명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제주도 중산간마을 전역을 수색하면서 대규모로 주민들을 체포한 이 작전은 바로 브라운 대령이 직접 기자에게 밝힌 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이었다. 육군역사일지는 이 작전에 대해 “제주도 주둔 이래 연일 연전촌가(連戰寸暇)의 틈도 없이 발생하는 폭동 진압작전에 매일같이 토벌해 오던 중 이날 제2차로 한라산 총공격을 개시하여 이를 완전 포위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무장대가 경찰만을 상대하고 경비대를 피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벌어진 이러한 작전은 무장대를 잡지 못한 채 애꿎은 주민들의 피해만 양산해 냈다.
통위부 담화로 발표된 5월 27일까지의 전과를 보면, 포로와 귀순자 3,126명을 잡고 8명을 총살했으나 노획물은 일제 99식 총 3정, 수류탄 15개, 죽창 12개, 청룡도 5개, 철모 17개였는데, 경비대 측 손해는 부상 5명이었다. 남제주군 파견 부대장은 “포로 인원은 670명이나 무기는 없었으며 연대사령부로 송치하였다”고 밝혔다. 한 미군보고서는 “11연대는 6주간의 제주도 작전에서 약 4,000명을 체포하여 심문 끝에 약 500명을 구속했다. 작전 중 경비대 사상자는 사망 3명, 중상 2명이었다.”고 밝혔다.
물론 박진경 연대장 재임 때의 인명피해는 그 해 겨울 대규모 집단 총살극으로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와 비교하면 많은 수는 아니다. 그런데 이는 무장대가 전략적으로 경찰만을 상대할 뿐 경비대와의 충돌을 피했기 때문이다. 1948년 6월경 진압작전에 나섰던 한 장교는 “경찰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싸우는 소위 인민군이 경비대가 출동하면 대개 도망친다. 무차별 사격을 삼가고 있는 경비대의 두통거리는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경비대는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했다. 이 때 발빠른 젊은이들은 잡히지 않았고 포로들은 행동이 느린 노약자들이었다. 1948년 6월 ‘종군기자’로서 제주사태를 취재했던 조덕송은 ‘포로’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포로들이 후송되어 온다. 자동차로 가득이나 실려가는 젊은 사람들. 도보로 철덕거리고 끌려오는 노소에다 부녀까지 끼어 있는 일련(一聯). 비는 아직도 개이지 않는다. 구부린 채 말없이 이끌려가는 그들의 안색은 그들의 의복과 같은 색깔이다. 감히 그들을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런지. 12～13세 되는 소년이며 60이 넘은 늙은이며 부녀자까지 무엇 때문에 폭도로 규정받지 않으면 안될 처지가 되었는가.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만다. 철모에 군대 우장을 쓴 필자의 꼴도 그들의 눈에는 경비대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의 보금자리이던 그들 자신의 마을을 고개를 돌리며 끌려서 지나가는 포로들이여. 과연 이 무수한 포로들이 그치는 날 이 마을에 비로소 평온의 피리소리가 들려올 것이냐.
한편 브라운 대령의 진두지휘 아래 작전을 수행해 온 박진경 연대장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그의 진급은 선임자를 앞지른 것으로서 딘 장군의 배려에 따른 특진이었다. 제주도민의 시각으로 볼 때는 ‘무차별 체포작전’이었지만 딘 장군은 이를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해 제주에 온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대령으로 특진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그의 작전방침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처럼 중산간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불과 한 달 사이에 수천 명의 ‘포로’를 양산해낸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은 주민들을 더욱 산으로 도망치게 했고, 자신은 암살당함으로써 사태해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응원경찰 증파
조병옥 경무부장은 각 경찰관구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450명과 수도경찰청 최난수(崔蘭洙) 경감이 지휘하는 형사대를 제주도로 보냈다. 응원경찰은 철도경찰 350명과 제6관구와 제8관구에서 선발한 100명으로 구성됐다. 5월 18일 새벽 특별열차로 서울을 떠난 이들은 목포를 거쳐 19일 아침 제주로 향했다. 5월 20일에도 응원경찰 수십 명이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대거 들어온 응원경찰로 인해 19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약 2,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기존 제주경찰 500명, 응원경찰 1,500명). 제주 실정을 모른 채 ‘제주는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만 갖고 있는 응원경찰을 대거 파견함으로써 부작용이 속출했다. 한 언론은 5선거를 전후해 벌어졌던 경찰의 민간인 처형 등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기자단 일행은 가장 큰 희생을 내었고 또한 쌍방의 교전이 치열하였던 애월면 하귀리를 찾아 이곳 중학교의 교원과 생도에게서 당시의 정경을 들었다. “눈앞에 선한 당시의 실상을 지금 얘기만 하려도 몸서리납니다. 사건이 발생하자 약 1개월 후에 경찰응원대가 폭도들을 소탕한다고 하여 70노인과 소학생까지 포함한 18명의 도민을 마을에서 사살하였습니다. 피살자 가운데에는 경찰에 협력하는 사상을 가진 자도 있었으나 가리지 않는 무차별 사격이었습니다. 우리 학교의 어린 두 학생이 그 당시 무참히도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경찰의 잔혹 행위가 사건 확대의 한 원인이라는 것은 브라운 대령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브라운 대령은 상부에 올린 보고서를 통해 “지나친 잔혹 행위와 테러가 제주도에 도착한 응원경찰에 의하여 자행되었다”면서 5월 22일 폭동진압을 위한 조치로 양민에 대한 경찰의 테러와 살해를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경찰의 가혹 행위가 여론을 악화시켜 오히려 사건진압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브라운 대령은 6월 중순경 기자회견에서도 “사건 진압에 참가한 경관이 양민을 학살하여 여론을 일으킨 일도 있었으나 이러한 경관은 철저히 단속할 것이며 현재 5～6명의 경관을 살인혐의로 구속 취조하고 있다. 한편 도내 전 경관에 대해서는 ‘고문철폐’의 서약서까지 작성하여 민주경찰의 정신으로 사건을 수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의 잔혹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6월 7일에는 저지지서 경찰이 금악리에서 불구자인 소년 1명과 노인 1명, 그리고 부녀자 7명을 체포해 연행하던 중 5명을 총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응원경찰 40명이 포함된 저지지서 경찰이 중산간마을인 금악리를 덮쳤을 때, 대부분의 주민들은 급히 몸을 피했으나 거동이 불편한 불구자와 노약자 그리고 부녀자 등이 집에 남았다가 붙잡힌 것이다. 청년들과 달리 발빠르게 피하지 못한 게 죄였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날의 희생자 가운데는 여든 살의 김정생(金丁生) 노인, 신체불구자 박두옥(朴斗玉), 임산부 박경생(朴庚生), 그리고 양씨 성을 가진 여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건은 뒤늦게 세상에 알려져 미 CIC가 조사에 나섰는가 하면 저지지서 주임 등 경찰관 31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한편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은 6월 11일자로 정직처분을 받았는데, 이는 응원경찰의 고문과 살해 등 물의를 빚은 것과 관련해 문책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한 언론은 최천의 정직처분 사실을 알리면서 “동 씨는 사건수습 처리에 있어서 부하 감독 불충분 등 책임을 지게 된 것이라 한다”며 정직처분 이유에 대해 추측했다.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속출한 까닭은 제주 실정을 모른 채 진압작전에 내몰린 응원경찰의 잘못 외에도 서북청년회 등 사설단체원을 무분별하게 임시경찰로 활용한 탓도 있었다. 또한 무장대의 습격으로 인명희생을 당한 피해자 집안의 청년들을 경찰에 우선 채용해 활용한 경찰 당국의 조치도 보복행위를 조장했다. 일부 경찰들은 휴가를 이용해 무장대 혐의자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보복 사형(私刑)을 가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에 관해 제주도에 파견되어 있던 경찰고문관 코페닝(Lester Chorpening)은 “섬에 진주한 응원경찰대가 동료 경찰과 가족이 살해 당한데 대해 복수하기로 작정하고, 잔혹한 보복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강경작전이 사태진압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여론만 악화시키자 미군정은 인사정책을 통해 유화책을 폈다. 이미 5월 28일 반공 일변도의 강경정책을 펴온 유해진(柳海辰) 제주지사를 경질하고 제주출신인 임관호(任琯鎬)를 새 지사로 임명한 바 있는 미군정은 이어 6월 17일에는 역시 제주출신인 김봉호(金鳳昊) 제8관구경찰청 부청장을 제주경찰감찰청장에 임명했다.
김봉호 청장은 부임에 앞서 조병옥 경무부장으로부터 “제주도 사건 수습에는 당신 외에는 없소”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히면서 “제주도 출신인 나는 향토애에 호소하여 우리 경찰 자신의 결점을 시정하고 민간 측에 결점이 있다면 시정할 결심이나 지금까지의 정보를 듣고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유화책을 펼 것임을 시사했다.
6월 24일 부임한 김봉호는 부임 직전 발생한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최경록 신임 연대장과 전도 읍면장이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 “먼저 경찰 자신의 불법 부정을 근절 숙청하겠다. 차단된 교통을 해결하는 동시에 입출입 물자에 대해서는 간섭방해 않겠다. 부화뇌동한 자는 처벌치 않고 귀순하는 자는 양민으로 인정한다”고 천명하는가 하면, 실제로 같은 날인 7월 1일자로 어획금지를 해제하고 도내 여행증명제도를 폐지하는 등 유화정책을 펴나갔다. 이어 7월 5일에는 목포～제주간 정기연락선 여행자에 대한 여행증명제도 폐지했다.
그러나 조병옥 경무부장은 김봉호 청장의 제주 부임 하루 전인 6월 23일 담화를 발표, 폭동 발발의 원인을 경찰관의 비민주적 과오에서 찾으려는 것은 사고와 판단의 착오라고 주장하면서 “제주폭동 만행 수습의 근본방침은 종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밝혀 민심수습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던 김봉호 청장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예고했다.
나.연대장 암살사건과 경비대 개편
1)박진경 대령 피살
1948년 6월 18일 새벽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그의 숙소에서 부하들에 의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 연대장은 6월 17일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이튿날 새벽 3시 15분경 M-1 소총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미군 측에서는 그동안 브라운 대령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에 적극 나서고 있는 박 연대장을 크게 신임해 왔던 터라 피살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박 연대장 살해 당일 미군보고서가 급보를 전하면서 “박 대령은 조선의 부대장 및 야전지휘관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평가되던 인물이다”라고 논평한 것은 미군이 얼마나 박 연대장을 신임했고,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는가를 보여준다.
특히 본격적인 진압작전의 적임자로 박진경을 발탁해 신임 연대장으로 임명했고, 6월 1일에는 직접 제주에 내려와 진급한 박 연대장에게 대령 계급장을 달아주기도 했던 딘 군정장관은 박진경의 죽음에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미 고문관이었던 웨솔로스키의 증언에 의하면 로버츠 당시 통위부 고문관도 박진경의 진급식에 참석했고 박진경이 암살당했을 때 직접 제주에 내려왔다고 한다. 딘 장관은 피살사건이 벌어진 18일 정오 총포 연구자 2명을 대동하고 급히 제주로 향했다. 딘 장관은 현지 사정을 조사한 뒤 이날 저녁 박 연대장의 시신을 싣고 귀경하였다. 박 연대장의 장례는 6월 22일 오후 2시 서울 남산동에 있는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통위부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와 유가족,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등 각계 인사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部隊葬)으로 치러졌다.
사건 즉시 군‧경은 물론 미군 CIC(방첩대), CID(범죄수사대) 요원들이 투입돼 조사를 벌였다. 연대본부에 근무하던 사병들은 모두 연병장에 집결한 채 조사를 받았다. 헌병들은 일일이 탄창과 총기검사를 해 탄알을 갖고 있거나 총기청소 상태가 불량한 병사들을 따로 집결시켜 조사했다. 특히 딘 장관이 대동하고 온 총포 연구자들이 11연대 장병들에 대한 일제 총기조사를 벌이는 등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
김종면 중령은 당시 통위부 정보국 간부로서 일시 제주에 파견돼 11연대 정보참모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박진경 연대장과 칸막이 하나 사이로 잠을 자다 이 암살사건을 겪었다. 김종면은 이에 관해 “미군은 탄환이 총신을 빠져나올 때 강선과의 마찰로 긁히는 흔적이 총마다 다르다는 점에 착안, 모든 병사들의 M-1 소총을 한 발씩 쏘게 해 탄환을 대조하는 치밀한 수사를 벌였다”고 말했다. 김종면은 또한 “브라운 대령이 ‘어떻게 옆방에 자면서 피살될 때 모를 수가 있느냐’며 내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면서 “같은 중령 계급인데 박 연대장은 진급하고 나는 못하니 불만이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수사는 한 장의 투서에 의해 실마리가 풀렸다고 한다. 투서는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를 잡아보면 암살사건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육사 3기인 문상길 중위는 모슬포 제9연대 창설 초기부터 소대장을 거쳐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문상길 중위를 시작으로 암살사건 연루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그들은 문상길(文相吉‧중위), 손선호(孫善鎬‧하사), 배경용(裵敬用‧하사), 양회천(梁會千‧이등상사), 이정우(李禎雨‧하사‧미체포), 신상우(申尙雨‧하사), 강승규(姜承珪‧하사), 황주복(黃柱福‧하사), 김정도(金正道‧하사) 등 모두 9명이었다. 무장대 측 자료에 의하면, 암살사건 관련자 중 이정우는 M1 총 1정을 소지한 채 입산해 무장대에 합류했다.
직접 총을 쏘아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사람은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되어온 손선호 하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경비대총사령부에서는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암살범들을 고등군법회의에 회부하기 위해 7월 12일 서울로 압송했다. 박진경 연대장의 피살사건은 육군장(陸軍葬) 제1호로 기록된 고급 장교의 첫 희생이어서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언론에서도 재판과정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고등군법회의는 8월 9일 통위부 고등군법회의실에서 재판장 이응준(李應俊) 대령 주심으로 열렸다. 재판의 초점은 연대장 암살의 동기와 배후를 밝히는 데 맞춰졌다. 이 자리에서 고등군법회의 검찰관 이지형(李智衡) 중령은 문상길 중위가 무장대 책임자인 김달삼의 사주를 받아 암살계획을 세웠으며, 손선호 하사가 권총으로 박 대령을 암살했다는 내용의 기소문을 낭독했다.
그러나 문상길 중위는 법정에서 ‘김달삼 지령설’을 부인했다. 문상길은 동족상잔을 피해야 한다는 김익렬 전 연대장의 방침에 찬동했기 때문에 김익렬 중령과의 회견을 추진하기 위해 김달삼을 만난 적은 있으나 그의 지령을 받아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문상길은 이어 “심리조서에 서명 날인한 것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내용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피고인들도 한결같이 김익렬 전 연대장과 박진경 연대장의 작전을 비교하면서 무모한 토벌전을 막기 위한 것이 암살의 동기라고 밝혔다. 신상우 하사는 “박진경 대령은 동포를 학살하고 진급했다. 미군인이 직접 위장(位章)을 달아주었다”고 진술했다. 특히 직접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3천만을 위해서는 30만 제주도민을 다 희생시켜도 좋다, 민족상잔은 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실제 행동에 있어 무고한 양민을 압박하고 학살하게 한 박 대령은 확실히 반민족적이며 동포를 구하고 성스러운 우리 국방경비대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박 대령을 희생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진술했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에 관한 ‘김달삼 지령설’은 4월 28일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했던 김익렬 전 연대장에게까지 파문이 확산돼 김익렬 중령은 그 배후 혐의로 전격 연행됐다. 당시 한 언론은 “김 중령의 구금 이유는 박 대령 살해사건과는 별로 관계없는 것이라고 통위부 측근자는 언명하였다”면서도 “그러나 소위 인민해방군 사령 김달삼과 직접 면담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김 중령의 구금은 그러한 관계가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왜 진작부터 강경진압작전을 하지 않고 무장대와 협상을 했느냐는 의심이었다.
그러나 김익렬 중령은 재판정에 나와 “모든 군사행동은 당시 최고 작전회의 참모이던 드루스 미군 대위의 지휘였고 박 대령 살해는 나는 전혀 모른다”며 무장대와의 협상을 비롯한 모든 군사행동이 미군의 지휘 아래 진행됐음을 밝혔고, 경비대총사령부 총참모장 정일권 대령도 이에 동의함으로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변호인들은 암살범들의 범행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변론했다. 관선변호인 김흥수(金興洙) 소령은 “문 중위 이하 각인은 산사람의 지령을 받은 일도 없고, 또 무슨 사상적 배경도 없고 다만 민족애와 정의감에서 나온 범행이었으니 특별히 고려해 달라”고 변호했다. 이어 김양(金養) 민선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금번 제주도 소요사건의 직접원인이 일부 악질 경관과 탐관오리의 비행에 인하였다는 것은 이미 각 책임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해방된 이 땅에서 제주도민들이 가진 그 모든 불평과 본의 아닌 민족상잔에서 쓰러진 동포의 죽음을 본 이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방지하고 30만 도민을 구할 수가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어리석고 좁은 판단이나마 자기 생명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뼈아픈 각오로 이러한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물론 박 대령을 암살한 것은 유죄요 잘못이다. 그러나 이러한 범죄는 또 오늘날 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8 정권이양을 앞두고 바야흐로 완전 자주독립 하려는 이때 외세가 재무장하고 이 땅을 다시 침략하려고 노리고 있으니 이러한 용감한 젊은 생명은 살려두었다가 차라리 우리 조국을 위하여 죽을 기회를 줄 것을 바라며 또한 그들은 반드시 민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는다.
그러나 검찰관 이지형 중령은 “그릇된 민족 지상의 이념에서 군대의 생명인 규율을 문란케 한 중범죄”로 규정하면서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선고 공판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하루 전인 8월 14일 열렸다. 재판부는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신상우‧손선호‧배경용 하사관 등 4명에게 총살형을 언도했다. 또 양회천에게는 무기징역을, 강승규에게는 5년 징역을 각각 선고했으며 황주복‧김정도 하사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인 통위부 감찰총감 이응준 대령에 의해 내려진 이 판결은 유동열 통위부장을 거쳐 딘 군정장관의 인준을 받은 후 집행하는 절차를 밟게 돼 있었다. 그런데 변호인의 감형 진정서가 제출되고, 각계에서 감형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총살형에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다. 그 덕분인지 신상우‧배경용에 대한 총살형은 집행 직전 특사에 의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결국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한 산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문상길은 집행 직전 마지막 유언 기회를 주자 “스물세살을 최후로 문상길은 갑니다. 여러분은 조선의 군대입니다. 마지막 바라건대 ×××의 ××아래 ×××의 ××아래 ××를 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갑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손선호는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로 시작되는 군가를 부르다가 “오, 하나님이시여!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십소서”라고 기도를 올리고 총살되었다.
2)11연대 후기 진압작전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당하자 미군사령부는 6월 21일 새로운 11연대장에 최경록(崔慶祿) 중령을, 부연대장에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제 때 전투경험을 쌓은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서 미군정 시대에는 나란히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공통된 경력을 갖고 있다.
최경록 연대장과 송요찬 부연대장은 제주에 부임한 즉시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 색출에 주력하는 한편, 전임 연대장과 같은 진압작전을 계속 추진했다. 미 24군단 일일보고에 기록된 이 즈음의 경비대작전을 모두 살펴보면, 경비대는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하던 날부터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쳤다. 6월 21일 오후 6시부터 24시간 동안 구좌면 송당리 지경에서 48명을 체포하고 카빈총 1정을 회수했고, 같은 기간 제주읍 삼양리에서 29명을 체포했다. 6월 25일에도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오후 6시까지 수색작전을 펴 176명을 체포하고, 약 3만원의 돈과 5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압수했다.
이 보고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경비대는 6월 21일, 6월 22일, 6월 25일, 6월 26일 잇따라 수색작전을 전개해 253명의 ‘폭도’를 체포하는 전과를 거둔 것이다. 그런데 노획한 총기류는 단 1정 뿐이다. 심지어 6월 25일에는 176명의 ‘폭도’를 체포하고도 노획물은 돈과 식량뿐이었다. 한 언론은 200명을 체포하고도 노획무기가 하나도 없었던 6월 26일의 경비대 작전을 이렇게 보도했다.
중산촌에 머물러서 치안에 노력하던 국방경비대는 6월 26일 새벽부터는 북제주 방면에다 무력을 써서 중간산촌 각 부락을 둘러싸고 소요에 가담한 혐의자를 다수 체포하였다. 이번 방법은 해안지대까지 넣은 대규모의 행동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구좌면, 조천면, 제주읍 등지에서 체포된 인원만도 200여 명에 달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소요부대의 간부로 인정되는 2명도 있었고 대부분은 농민이었으며 무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상황은 최경록 연대장 스스로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최경록 연대장은 제주에 온 지 20여일 만인 7월 14일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최경록 연대장은 자신이 지휘하는 진압작전 마지막날인 7월 15일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토벌을 4회 한 일이 있었는데 산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었다”면서 “산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소년, 청년, 장년, 노년으로 되어 있는데 소년은 12세로부터 노년은 60세까지 있다. 그 중 청년이 제일 많고 그 다음 장년과 소년이요, 제3위는 노년이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 무장대의 활동은 거의 없었다. 제주도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은 6월 22일 기자단을 안내해 제주를 일주한 뒤 “여러분이 친히 본 바와 같이 우리가 오늘 통과한 길은 약 1개월 전에는 위험해서 통행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사고가 없어서 도내 도로, 전선은 모두 복구되고 있으며 얼마쯤 치안도 회복되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6월 23일에는 유동열 통위부장도 “폭도 측의 실제 행동, 실력이 저하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무장대가 공세의 고삐를 늦춘 채 일시 행동을 중지한 까닭은 그동안 사태를 관망해오던 경비대가 본격적인 작전에 나서자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암중모색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 경무부의 최난수 경감은 “폭도들은 5월 20일 이후 투쟁방법을 변경하여 일부는 귀순을 가장하고 일부 정예부대는 수 개 부대로 분산하여 무장한 채로 산중에 도피 잠적중이다. 말하자면 ‘장기항전’에 돌입한 모양이다”라고 분석했다. 한 언론은 “폭도들은 경찰에 대하여서 여전히 항쟁을 계속하고 있다 한다. 국방경비대가 출동하면 대항 없이 종적을 감추는 그들이 ‘친애하는 경비대여, 검정개(경찰관을 이렇게 부른다)를 타도하라’는 삐라로 경비대에 대한 태도를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한편 강경한 진압작전이 계속되자 각 지역의 제주출신 모임 등을 중심으로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청원이 줄을 이었다. 6월 19일 광주제우회(光州濟友會)는 제주도 경찰당국에 △무력적 처리 방침을 버리고 평화적 방법을 취하여 극도로 무기 소지를 제한할 것 △도민의 생계를 보장할 것 △테러하는 사설단체를 즉시 해체할 것 △해상교통 특히 제주～목포간의 증명제도를 철폐할 것 △고문치사, 폭행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 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7월 1일에는 서울제우회가 △각 애국정당단체를 망라한 제주도사건 대책간담회를 개최토록 할 것 △각 애국정당단체를 망라한 현지조사단의 파견을 위하여 적절한 방법을 강구할 것 △각계각층의 지도적 인사로써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건의 정치적 해결을 위하여 군정책임자와 절충할 것 등을 요청하는 건의서를 40여 정당‧사회단체에 제출했다.
이 건의에 따라 7월 6일 40여 정당‧사회단체가 민독당 회의실에 모여 대책위 구성을 놓고 토의했다. 제주출신 5만여 명이 회원으로 있는 부산제우회(釜山濟友會)는 7월 5일 “이 사태는 도민 전체가 평화를 위한 최후적 방법으로 무장봉기한 것에 틀림없다”고 지적한 후 “이 사건 수습에 있어서 무력적 공격을 가함은 도저히 옳지 못한 일이므로 평화적 방법으로서 급속 해결하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하지 중장을 비롯하여 딘 군정장관, 경무부장, 사법부장, UN조선위원단 등 관계 요로에 전달하는가 하면, 그 실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부산 각 신문기자들과 더불어 6일 하오 제주도로 향했다.
경비대는 대대적인 수색작전과 주민 연행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무장대의 대응이 없는 데다가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라는 각계의 압력이 거세게 일자 ‘작전행동 보류’를 선언했다. 최경록 연대장은 교통차단 해제, 어획금지 해제, 통행시간 연장 등의 조치를 취했고, “이후는 특수한 경우 이외의 작전행동은 보류하나 경찰 및 각 행정기관에 협력하여 치안회복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로써 제주사태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중산간마을 등을 휩쓸고 다니며 주민들을 연행한 경비대 11연대의 작전은 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당시 제주 취재에 나섰던 한 언론은 국방경비대가 감시하는 천막수용소에는 20세 청년에서부터 60대 노인까지 있었다면서 “이들은 산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을에서 농사에 종사 중 붙들려 온 것으로 ‘지금 이게 석달째요’하고 기자단 일행에 하소연하듯이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같은 상황은 도민들로 하여금 경찰에 이어 경비대까지도 경원시하게 함으로써 사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했다. 그 무렵 제주에 특파됐던 한 기자는 당시 마을의 실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처처에 절도된 전주는 그대로 밭이랑 산등성이에 나자빠져 있건만 의연히 엄존하는 경찰지서의 바리케이드만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부락민 40～50명이 지금 경비전화선 복구와 지서돌담 구축 공사부역으로부터 돌아온다. 맥없이 일행 앞을 지나던 그네들이 제주출신의 일행의 한 사람 말에 순시로 사방을 둘러싸고 울음의 바다를 이루고야 만다. 들고 있던 괭이를 돌 위에다 두드리면서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 없다”고 울부짖는가 하면 공포와 울분에 북받친 60노파는 무어라 문표를 가리키며 가슴을 두드린다. 붙어있던 집집 문표가 하룻밤에 없어지자 전 부락민이 지서에 인치되어 난타 당하였고 또한 학대받고 있다 한다. 죄는 폭도에 있는 것인가, 부락민에 있는 것인가. 총소리는 잠잠한데 주름잡힌 이맛살에 왜 이다지도 우색이 가득하며 터질까 염려되는 울분에 잠겨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하는 기자의 말에 “먼 곳 총은 무섭지 않으나 가까운 총부리가 무섭수다”라고 고함으로 응수한다.
특히 무차별 연행은 젊은이들을 오히려 무장대 편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한 언론은 “600리 제주도 주변 부락 부락에는 청년을 구경하기 어렵다. 그들은 무차별 집단 검거를 피하여 소위 인민해방군의 전위대에 몸을 던져버렸다 한다”고 전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묻는 질문에 “호적에도 없는 아들 딸을 내놓으라는 데는 질색하겠다”고 답변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3)9연대 재편
경비대총사령부는 7월 15일자로 경비대 제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연대장에 기존 11연대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부연대장에는 기존 11연대 대대장인 서종철(徐鐘喆) 대위를 각각 임명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11연대는 제주출신인 본래 9연대 병력만을 배속 해제해 제주도에 남겨둔 채 7월 24일 연대 창설지였던 경기도 수원으로 철수했다. 이에 앞서 경비대총사령부는 11연대 철수에 대비해 7월 21일 제3여단 소속 2개 대대를 차출, 제주로 이동시켜 9연대에 배속시켰다. 즉 5월 15일 11연대에 합편됐던 9연대가 꼭 두 달만에 병력이 바뀐 채 재편성된 것이다. 그리고 제주 주둔군 책임자를 최경록에서 송요찬으로 바꾼 것이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제주주둔 병력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제주 사태가 진정된 상황을 한 가지 이유로 꼽을 수 있을 지 모른다. 경비대 재편성 직전인 7월 12일 통위부 이형근(李亨根) 참모총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도 사태는 일단락 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태가 일단락 되었다면 계속 남아 마무리 작전을 수행할 일이지, 새삼스레 병력을 이동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병력 교체의 진정한 이유로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제주 상황을 확실히 마무리하려는 의도를 꼽을 수 있다. 당초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W. L. Roberts) 준장은 6월 21일 11연대 지휘부를 제주에 파견하면서 제주도 미군사령관인 브라운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요일 귀하의 요청에 따라 파견하려고 하는 장교들로부터 우리가 기대하는 임무에 대하여 귀하에게 고지한다. 오늘 우리는 최(경록) 중령을 11연대의 연대장으로, 송(요찬) 소령을 부연대장으로 파견하였다. 최 중령은 이곳의 모든 지휘관들로부터 선택되었으며 본인도 그를 좋아하며 그의 배후가 아주 훌륭한 것 같다. 송 소령은 강인하며 용감한 사람이라고 본인은 이해한다. 우리는 감찰관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송 소령은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최상의 장교이며 우리는 그를 감찰관으로 활용할 수 있다.
미군은 부연대장 송요찬의 ‘강인하고 용감한’ 점을 높이 샀다. 이에 비해 연대장 최경록에 대해서는 주변의 신망을 받기는 하지만 온건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9연대 재편 직전인 7월 12일자 미군 비밀문서는 제주도 상황에 대해 “반란이 계속됐으나 이 달(6월) 하순 접어들면서 국방경비대 사령관은 ‘평정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작전이 더딘 것은 경비대가 오직 학살이라는 수단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고 밝혔다”고 기록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작전도 차별없이 주민을 연행하는 형태이긴 했지만, 종전보다는 완화된 것이었다. 이에 관해 최경록 연대장이 ‘학살’을 꺼려했기 때문에 작전이 더딘 것으로 분석했던 것이다.
반면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이후 재편된 9연대장에 임명된 송요찬은 최경록과는 다른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관해 로버츠 준장은 송요찬을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당시 제9연대 고문관이었던 피쉬그룬드는 송요찬에 대해 ‘매우 터프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김정무(金貞武)는 9연대가 재편된 7월 15일 제주에 파견돼 와서 그 해 12월 15일 제주를 떠날 때까지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다. 김정무는 자신이 겪었던 송요찬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난 9연대 군수참모로 제주에 갔습니다. 당시 인사참모는 최세인, 정모참모는 탁성록, 작전참모는 한영주였습니다. 제주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인데, 하루는 직속부하인 구매관 강의원(姜義遠‧육사 4기생)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알아보니 송요찬 연대장의 지시에 의해 처형됐다는 겁니다. 난 9월 1일부로 대위 진급을 했는데 9월의 어느 날 연대장이 부르더니 다짜고짜 ‘너 재판장 해라. 이 놈을 죽여야 돼!’라고 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범죄사실도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사형언도를 하라는 겁니다. 사관학교에서 군법회의에 대해 몇 시간 배우긴 했지만 재판을 해본 일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요. 재판정에 나가보니 얼마나 고문을 당했는지 사람이 반쯤 죽어 있었어요. 피고인은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이었습니다. 도지사 관사에서 쌀 한 말을 공비에게 줬다는 게 범죄사실이었지요. 쌀 한 말에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골에서 쌀 창고 열쇠는 늘 할머니가 갖고 다니던 게 기억 나 “피고가 직접 쌀을 주었느냐?”고 물었지요. 이에 당시 57～58세 가량 된 박경훈 지사는 “아닙니다. 저도 구속돼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사람 친척이 와서 굶어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해서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도지사 관사에서 쌀이 나왔다 하지만 부인의 행위를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무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법무관 등 몇 사람과 평의에 들어갔지요. 어떤 사람은 “사형 집행을 하라고 하는데 한 20년 어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15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10년을 말하는 이도 있고. 고심 끝에 심판관들에게 “이건 무죄이지만 부인을 데려다 사형을 한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한 3년이 어떻겠소?”라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 3년을 언도했습니다. 아직도 무죄인 사람에게 3년형을 언도한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됩니다. 어쨌든 재판결과를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이 공산당 같은 놈의 새끼!”라며 철모로 나를 갈기는 겁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크게 부었습니다. 같이 재판에 참여했던 최세인 인사참모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장 송효순은 동기생인데 매일 술을 먹고 괴로워했습니다. 물어봐도 말은 안 하고.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헌병들이 사람들을 동굴에 몇 십명씩 데려다놓고 갈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굉장히 착한 사람이거든요. 결국 손을 써서 중간에 제주를 떠났습니다. 또 한영주 작전참모는 밤낮으로 연대장에게 맞았습니다.
한편 연대 교체 이유에 대해서는 또다른 미군 보고서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병력 교체의 이유는 놀랍게도 ‘훈련’ 때문이었다. 7월 21일 부산 3여단의 2개 대대가 제주에 오고 7월 24일 11연대가 제주를 떠남으로써 9연대 재편이 완료된 지 일주일 가량 지났을 무렵, 딘 군정장관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야전훈련을 위해 제주도의 국방경비대 연대들을 교체시킨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1개 연대가 제주도에 4～6주 동안 주둔할 것이다. 산간지대에서 항상 연대 훈련이 이뤄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제주도 사태를 경비대의 야전 훈련용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인 것이었다.
다.8지하선거와 무장대 개편
1)‘남조선 대의원’ 선거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다. 이는 북한의 정권 수립에 따른 것이었다. 북한은 정권을 세우는데 있어 명분을 세우기 위해 ‘남북협상’을 최대한 활용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제1차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평양에서 열린 것은 48년 4월 19일의 일이었다. 이 회의에는 김구 등도 참석했다. 이 때 “남조선 단독선거가 설사 실시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는 달리 통일적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여 조선헌법을 제정하고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런데 남한에서 5선거가 치러지고 정부 수립이 임박해 오자, 제2차 연석회의가 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다. 제2차 연석회의에는 북쪽에서 북로당 등 15개 정당·단체 대표자와 남쪽에서 1차 회의 후 북한에 잔류하거나 다시 비밀리에 38선을 넘은 20여 개 정당‧단체 대표가 참석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은 “국토 양단과 민족 분열을 막자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남한에서 단정이 수립되니 북한에서도 단정을 수립하겠다는 것은 민족분열 행위”라며 회의에 불참했다.
제2차 연석회의에서는 앞으로 세워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정부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선거도 북한지역 뿐 아니라 남한에서도 통틀어 실시하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한에서 공개적인 선거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2중 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 즉, 각 시‧군에서 5～7명씩 뽑힌 대표자들(1,080명)이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남한 전역을 술렁이게 했던 ‘지하선거’란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할 남측 대표자 1,080명을 뽑는 선거였다. 당시 남로당 고위 간부였던 한 증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낮에는 미군정 치하에 있어도 밤만 되면 좌익이 힘쓰는 지역에서는 선거가 반공개적으로 실시됐습니다. 주로 경남‧경북‧전남‧강원 등지의 외딴 마을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들 지역에서는 밤에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먼저 전권위원들이 선거에 대한 해설을 한 뒤 인민 대표 후보들의 면면을 소개했지요. 다음 그 지역의 남로당원이나 좌익계 인사가 나서 후보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고 곧바로 투표가 진행됐습니다. 그러나 반공개 투표가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연판장을 돌려 서명 받는 식이었습니다. 얇은 미농지의 연판장에는 인공헌법 실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해당 지역의 후보자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연판장에는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도록 했으나 지장을 찍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주민들을 모을 때는 선거 사실을 숨긴 채 구장 같은 마을 책임자, 좌익 동조자에게 다른 명목을 내걸고 부탁하는 방법을 썼지요. 기습적으로 치러진 지하선거였지요. 집회를 열기가 곤란한 지역의 선거는 전권위원들이 연판장을 갖고 집을 개별 방문, 서명‧날인을 받는 우격다짐 식이었지요. 주민들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는 윽박지르는 등 위협적인 방법도 예사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4사건이 벌어지고 있던 제주도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 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육지에서처럼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서 전권위원들이 선거에 대한 해설을 하거나 ‘인민 대표 후보’를 소개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이런 백지날인이 지하선거에 참여, 투표를 했다기보다는 산 쪽을 지지하는 서명에 동참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제주도에서의 지하선거는 주로 중산간마을과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다. 이 서명에 두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무장대의 강요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르는 경우도 있었다. 1948년 8월의 한 미군보고서는 제주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8월 19일 무장폭도 20명을 포함한 폭도 40명이 세화리에 침입하여 주민들에게 북한 선거를 지지할 것을 강요하며 백지 투표용지에 강제로 서명하도록 했다. 경찰은 이 폭도들을 공격해서 격퇴시켰는데 양측의 보고된 사상자는 없다. 보고에 따르면 폭도 집단은 제주도의 모든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백지에 서명토록 하고, 인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돈과 식량을 제공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폭도들로부터 양자택일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사람은 최악의 경우 경찰에 체포되어도 며칠 구류를 살다가 풀려날 것이고, 협조를 거절하는 사람은 죽게 되며 그 집은 방화될 것이라고 하였다. 8월 18일 제주도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한 서귀면에서 마을 주민 5명이 폭도들로부터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북한정부와 선거를 지지하는 청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지하선거를 앞두고 통행금지 시간을 연장하는 한편 목포～제주 간 여행증명제도를 다시 실시하는 등 8월 말까지 비상경계에 돌입했다.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제주도는 지하선거를 추진하려는 무장대와 이를 막으려는 경찰 간의 충돌로 다시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상황으로 빠져들어 갔다. 한 미군보고서는 “8월 2일 경찰은 무장 폭도 20명을 포함한 폭도 50명과 서광리 인근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 접전에서 폭도 2명이 사살되고 경찰 1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은 수류탄 1개, 일본총 3정, 실탄 60발을 압수했다”고 기록했다. 이 마을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날의 교전은 안덕지서 경찰들이 무장대가 ‘백지날인’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출동해 벌어진 일이었다. 8월 19일 새벽에는 한림지서 소속 경찰 4명이 한림면 협재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경찰 1명이 희생되었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의 의미를 몰랐다. 투표 용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백지에 손도장을 찍는 형태였고 그 목적에 대해서는 ‘무장대를 지지한다’는 정도의 뜻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1948년 여름에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졌던 이 일은 ‘백지날인 사건’이라고 부른다. 한 증언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여름에 산에서 내려와 도장을 받아갔습니다. 매미 소리가 나거나 꽥꽥거리는 소리가 나면 산에서 왔다는 신호였지요. 그 사람들이 와서 도장을 찍으라고 하면 무서워서 모두들 손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렇게 도장을 찍은 집에는 돌멩이로 표시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조직을 지지하는 뜻으로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백지날인’은 대부분 강압에 못 이겨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백지날인은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가하는 등 남한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후에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 간수였던 한 증언자는 유치장에서 알게 된 한 여인이 총살에 처해지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이옥(李玉)이라는 처녀가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군인들에게 총살당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죄를 지어 들어왔느냐고 물으니 백지날인한 죄로 끌려왔다는 겁니다. 백지 들고 와서 자꾸 찍으라기에 찍었다는 겁니다. 난 이 처녀와 약간의 인연도 있고 해서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지요.
이렇게 제주에서는 도장 한번 찍은 것이 총살의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남로당 연구가는 “그때 ‘도장 찍는 일’ 때문에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명분이 통했다면 남한 땅에서 그 일로 인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어도 된다는 논리로 비약된다”고 지적했다.
2)김달삼 월북
남한의 각 지역 대표 1,080명이 참가하게 될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8월 초 남한 전역에서는 월북행렬이 줄을 이었다. 도중에 체포되거나 교통사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78명이 불참했지만, 모두 1,002명이 참가한 가운데 8월 21일 대회가 열렸다. 1,002명 중에는 제주도 대표도 6명 포함돼 있었다.
무장대 총책 김달삼도 해주에서 열린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1948년 8월에 제주를 떠났다. 김달삼이 언제 떠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8월 2일 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배를 타고 목포로 떠났다. 추측하건대 이들은 북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라는 미군 보고로 볼 때, 김달삼은 일행 4명과 함께 8월 2일 제주를 떠난 것으로 유추 해석할 수 있다. 좌파 측 자료에는 이 해주대회에 참가한 제주도 인민대표가 안세훈‧김달삼‧강규찬‧이정숙‧고진희‧문등용이라고 6명의 이름을 써 놓았다. 이 가운데 ‘문등용’은 생소한 이름으로 아마 가명이 아닌가 여겨진다.
해주대회 첫날인 8월 21일, 35명을 뽑는 주석단 선거가 있었는데 20대 중반의 김달삼이 허헌‧박헌영‧홍명희 등 좌파 거물들과 나란히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이어 8월 25일에는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북한 측 대의원 212명을 뽑는 총선거와 동시에 남한 측 대의원 360명을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선출하는 일이었다. 입후보자 360명이 발표된 가운데 찬반투표의 요식행위를 거치는 형식이었다. 이 때 제주도 대표 안세훈, 김달삼, 강규찬, 이정숙, 고진희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뽑혔다.
김달삼은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에 앞서 벌어진 ‘입후보자에 대한 토론’ 시간에 토론자로 나서 제주4사건에 관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은 우선 박헌영에 대한 지지를 밝힌 후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 김달삼은 이어 5선거를 보이코트 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길게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자주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김달삼의 월북이 곧 제주4사건 발발 때의 기본적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분단된 남과 북에 적대적인 두 개의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강경한 정부의 자세를 맞게 되었다.
한편 무장대 총책이던 김달삼이 제주도를 떠남에 따라 무장대 조직은 개편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이덕구(李德九)가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의 지휘 총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3.주민 집단희생기(1948.10.11～1949.3.1)
가.강경진압 방침 채택
1)국내외 정치상황
1948년 11월 중순께,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4사건 전개과정에서 가장 참혹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됐고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는 등 글자 그대로 ‘초토화’ 됐다.
초토화의 책임은 당시 정부와 주한미군사고문단에게 있다고 판단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군 통수권자이며, 미군은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대규모의 강경진압작전이 벌어졌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는 한국과 미국의 정치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들의 단서를 찾기 위해 국내외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도표와 같이 일지를 정리했다.
우선 단편적인 일지 내용만으로 살펴본다면, ‘1948년 11월 중순’은 남북에 각각 정권이 들어서면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통일운동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둘째,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돼 지배세력간에 큰 갈등이 벌어졌고, 여수 14연대와 대구 6연대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이다. 논란 끝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도 이 때였다.
셋째, 미‧소간 냉전이 심화되면서 양군의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던 때였다. 남한에 진주했던 미군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했다.
① 국내 정치상황
□ 국내외 정치상황
날 짜
제 주 도
국 내
미국‧소련‧북한
47. 3. 12
트루먼 독트린을 계기로 미‧소 간 냉전 시작
48. 4. 3
제주도에서 무장봉기 발발
48. 4. 8
미국, 주한미군을 48년 12월말까지 철수키로 잠정 결정
48. 8. 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공포
48. 8. 24
한미군사협정에 따라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군에 귀속
48. 8. 26
임시군사고문단(PMAG) 설치
48. 9.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48. 9. 15
주한미군 철수 시작
48. 9. 19
소련, UN결의에 따라 북한주둔군의 연말 철수방침 밝힘
48. 9. 22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48. 10. 8
제주해안에 소련잠수함 출현설
이승만, 미군철수 연기 요구
48. 10. 11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48. 10. 17
해안에서 5㎞ 이상 통금을 명령하는 포고령
48. 10. 19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48. 11. 2
대구 6연대 반란사건
48. 11. 중
강경진압작전 개시. 중산간 방화와 주민 살상
48. 11. 17
‘계엄령’ 선포
48. 12. 1
국가보안법 공포
48. 12. 12
유엔, 한국정부 승인하며 미소 양군 조속 철수 요구
48. 12. 17
미 국무부, 12월말 주한미군 철수방침 재고 요청
48. 12. 25
소련, 북한에서 철수 완료
48. 12. 29
9연대와 교체해 2연대(연대장 함병선)가 제주 주둔
49. 3. 2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설치(사령관 유재흥).
49. 3. 23
주한미군 철수를 49년 6월 말로 연기 결정
49. 5. 10
국회의원 재선거 실시
49. 5. 15
제주도전투사령부 해산
49. 6. 6
반민특위 습격사건
49. 6. 21
국회프락치사건 발생
49. 6. 26
김구, 안두희에게 암살
49. 6. 29
주한미군 철수 완료(군사고문단 5백명 잔류)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의 처지는 ‘정치적 위기’로 집약해 표현할 수 있다. 이승만의 위기는 정부수립 직전부터 시작됐다.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를 놓고 갈등이 빚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은 내각책임제를 통해 권력을 나누고자 했던 한민당을 누르고 1948년 7월 20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8월 4일 내각 발표 때 한민당이 철저히 소외되자 양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이에 앞서 이승만이 첫 국무총리로 지명한 이윤영(李允榮)은 국회에서 거부됐다. 이승만이 새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처음으로 겪은 시련이 그동안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한민당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약칭 ‘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해 민족을 전쟁터로 몰아넣었고 독립운동가를 고문‧살해했던 친일파를 처단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것은 시대적 과제였다. 그러나 친일파는 해방 후 ‘반공주의자’로 변신해 이미 경찰과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비호했다.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에게 친일파는 가장 큰 정치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친일파 처단 시도는 이미 미군정 시절인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통과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군정장관 딘은 이 법의 공포를 거부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을 즈음해 친일파 처단 문제가 또다시 제기됐다. 국회 본회의장에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라는 협박장이 살포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1948년 9월 1일 마침내 반민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승만은 처음엔 반민법 공포를 기피했지만, 이 법을 거부할 경우 다른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부득이 9월 22일 공포했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구성됐다.
그러나 이승만으로서는 한민당과도 결별한 마당에 정치기반인 친일파를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과 관련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들의 반격은 곧바로 시작됐다. 반민법이 공포된 이튿날인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반민법에 반대하는 ‘반공구국총궐기대회’가 열렸다. 대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사람은 이종형(李鍾滎)이었다. 그는 일제 때 애국지사를 잡아다 살해하는데 앞장섰고 해방 후엔 대동신문과 대한일보를 운영하면서 극우적 발언을 일삼던 전형적인 ‘친일파 반공주의자’였다. 이날 아침부터 경찰은 ‘오늘 운동장에 안 나오면 빨갱이’라며 주민들의 참석을 독려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김웅진(金雄鎭) 의원은 국회 대정부질의를 통해 ‘반공구국총궐기대회’를 비판하면서 “38이남에 전개되고 있는 제주도사건,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다 이러해서 거기에 있는 양민까지 전부를 죄인으로 몰려고 하는 이런 음모는 대단히 장래에 우리의 치안문제가 어지러워진다고 봅니다”라며 향후 제주상황을 우려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반민특위 요원에 대한 친일경찰의 암살음모와 관제데모가 이어지는 등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방해공작은 계속됐다. 심지어 이승만은 1949년 2월 11일 국무회의 자리에서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 노덕술(盧德述)이 반민특위 조사관에게 체포된 데 대해 격노하면서 오히려 반민특위 조사관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6월 6일 경찰의 습격을 받은 후 급격히 약화된다. 결국 반민법에 의해 처벌받은 사람은 불과 7명 뿐인데다 그마저 이듬해 봄까지 감형이나 형집행정지로 모두 풀려남에 따라 친일파 숙정작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반대세력을 물리쳐 정권을 안정시키는 일이 시급했고, 유엔으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도 큰 과제였다. 이를 위해선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가 절실했다. 또한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떠오른 친일파문제, 통일문제, 토지개혁문제도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핵심 현안 가운데 특히 친일파문제와 통일문제는 이승만에게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통일논의는 미군철수 문제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모두가 국가의 정당성, 존립 등과 관련된 심각한 현안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지위는 여전히 불안했고, 유엔총회 회기 중에 정부가 승인을 받을 수 있을 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1948년 9월 15일 김구와 김규식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전(全)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 이승만을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10월 13일에는 소장파의원을 중심으로한 47명의 의원이 ‘외군철퇴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미 9월 15일부터 미군 일부가 비밀리에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미군이 남한 군대의 조직, 무장, 훈련을 지원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주한미군 철수를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이승만은 11월 2일 ‘국군’이라 불리는 5만 병력의 훈련과 장비지급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국군’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약속했던 군사‧경제 원조도 지지부진했다. 더구나 그 당시 미국의 방침은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킨다는 것이어서 이승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군 철수가 임박한 1949년 5월 27일에도 국무회의에서 “미군 철퇴에 관하여 미국 내에서도 불가하다는 여론이 있는 듯하니 국내에서 공론을 좀더 환기하여 미국의 책임과 목적을 이행케 하기 위하여 한국 방비력 안전을 보장할 때까지 주둔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미련을 보일 정도로 주한미군 철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소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미군의 작전통제 아래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됨에 따라 사태는 8일만에 마무리됐다. 이승만에게 여순사건은 위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일거에 쓰러뜨릴 기회였다.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면 사태를 사실대로 보고하거나 축소해야 할 터인데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사태를 과장하였다. 또 항간에는 백범 김구가 여순사건의 배후라는 낭설이 떠돌았다. 김구 암살범으로서 최근 피살된 안두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선생이 국회프락치 사건과 관련되고 더욱이 국군월북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에 관련되었다는 풍문에 울분을 참지 못한 것”이라며 암살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여순사건은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최대의 정적인 김구까지도 궁지에 몰아넣을 ‘호재’였던 것이다.
이미 해방정국에서도 보여줬듯이 이승만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세우는 최대 이슈는 ‘반공’이었다. 권력다툼 때문에 결별했던 우익정당 한민당도 이 점에선 이승만과 이해를 같이 했다. 군 내부에 숙군 선풍이 불었다. 11월 2일에는 대구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숙군의 속도와 강도를 높여줬을 뿐이다.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12월 1일 공포). 전날인 11월 19일 국회는 주한미군 계속주둔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은 ‘친일파 정국’, ‘통일 정국’에서 급속히 ‘반공 정국’으로 변했다. 국가보안법의 경우 ‘일제 치안유지법의 재판이다’, ‘이 법률을 발포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등 소장파 의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피를 한 포기 뽑다 보면 나락이 다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 있느냐’는 논리에 밀렸다.
국가보안법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는 소위 ‘국회프락치사건’을 통해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 법에 의한 상징적인 희생양은 소장파 의원들로서 그동안 반민법 제정과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섰고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경찰에 의한 반민특위 피습사건, 김구 암살사건과 함께 모두 1949년 6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6월 말 미군이 철수했다.
② 미국의 대한정책
2차대전 종전 후, 미국의 세계전략은 1947년 3월 12일 발표된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을 계기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사회주의 봉쇄정책을 천명한 트루만 독트린은 2차대전 종식 후 급속히 진행된 동원해제와 전쟁경제 해체과정에서 미국이 겪어야 했던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 이때부터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됐다. 냉전이 시작될 때 오히려 미군철수가 추진됐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이는데, 이는 미국의 소련봉쇄정책이 유럽에 집중됐고 한반도는 부차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 주한미군 장기 주둔을 주장하는 미 국무부와 조기 철수를 주장하는 군부(국방부, 육군부 등) 간에 지루한 논쟁이 시작됐다. 미 국무부는 이데올로기 격전장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소 대결에서 패배해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것은 위신문제였다. 따라서 미군의 장기주둔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군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다. 또 2차대전의 동원체제 해제로 인한 병력감소와 군비삭감으로 더 이상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수 없다고 강력 주장했다. 일본에 있던 맥아더의 극동사령부도 군부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런 논쟁 속에서도 미국의 고민은 남한에 ‘공산주의 방벽’을 구축한다는 과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철수해야 하는 문제 등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있었다.
결국 주한미군 철수를 둘러싼 미 국무부와 군부 간의 논쟁의 결과는 미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안보회의(NSC, National Security Council)에서 결정됐다. 의견 절충을 벌인 끝에 양자간 타협안으로서 대한정책의 최종지침서 격인 ‘NSC-8’과 ‘NSC-8/2’가 발표됐다. 미군의 ‘철수일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48년 4월 8일=미 대통령, ‘NSC-8’을 승인함에 따라 1948년 12월 말까지 미군을 철수키로 잠정 결정
△1948년 9월 15일=주한미군, 비밀리에 철수 시작
△1948년 9월 19일=소련, UN결의에 따라 북한주둔 소련군을 연말까지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
△1948년 11월 12일=미국 특사 무쵸, 여순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면서 미군철수를 연기토록 요청
△1948년 12월 12일=UN총회, 대한민국을 승인하면서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
△1948년 12월 17일=미 국무부, 12월 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키로 결정한 ‘NSC-8’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
△1948년 12월 25일=소련, 북한 주둔군을 완전 철수했다고 발표
△1949년 3월 23일=미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를 1949년 6월 말까지 연기한 대한정책지침서 ‘NSC-8/2’를 승인
△1949년 6월 29일=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을 남긴 채 철수완료
이상의 일지를 살펴볼 때, 우선 남한 내의 혼란이 주한미군 철수 연기에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 1948년 12월 말까지 철수키로 결정한 ‘NSC-8’에 대해 국무부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철수 시기에 대한 논란이 다시 벌어지던 시점에 제주도에서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48년 11월께에 이르러 미국 내 철수논쟁의 핵심은 ‘과연 남한정부가 공산주의의 방벽이 될 만큼 자생력을 갖췄느냐’는 문제였다. 국무부를 설득해야 하는 군부 역시 무조건 철수를 주장하던 초기와는 달리 남한정부의 자생력을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편 미국이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를 앞두고 소련의 공세에 대비해 작성한 문건을 보면, 미국이 5선거를 보이코트한 제주도사건에 대해 얼마나 큰 부담을 갖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미국은 이 문건에서 남한의 5선거와 북한의 8선거와 관련해 유엔총회에서 소련이 주장할 가능성이 있는 예상문제를 7가지로 정리했다. 즉 ①북한선거는 남북한 전국에서 실시된 유일한 선거인데, 미국과 남한당국의 탄압으로 지하선거화 됐다 ②인민의 모든 지형적‧경제적‧사회적‧정치적 부분들이 선거에 참여했다 ③북한 선거는 남한 선거와 달리 위협과 유혈사태가 없었으나, 남한은 제주도의 선거반대로 국회의원 2석이 공석으로 남아 있다 ④남한 사람 대부분은 5선거를 지지하지 않았으나 자본가와 친일파만 자신들의 권위 유지를 위해 나라를 분열시키는 이 선거에 참여했다 ⑤북한 선거는 등록 유권자의 97.97%가 투표했으나, 남한은 77.48%만이 투표했다 ⑥북한의 최고인민회의에는 남한의 대표자 360명이 참여하고 있다 ⑦남북한의 모든 핵심적인 자리가 채워져 있다는 것이 미국이 예상한 소련 측의 공세였다. 결국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되기는 했으나, 그동안 미국은 이같은 소련의 공세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2)미군의 지휘‧통제
①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지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이 갖게 되었다. 이는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John R. Hodge) 장군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른 것이었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주한미군사령관은, 본국정부의 지시에 따라서 또한 자기의 직권 내에서,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방군을 계속하여 조직, 훈련, 무장할 것을 동의한다.
제2조, (중략) 미군철수의 완료시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은 공동안전을 위하여 또는 대한민국 국방군의 조직, 훈련 및 장비를 용이케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대한민국 국방군(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및 비상지역에 주둔하는 국립경찰파견대를 포함함)에 대한 전면적인 작전상의 통제를 행사하는 권한을 보유할 것으로 합의한다.
이와 같이 협정은 미군이 완전 철수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물론, 미군 주둔에 필요한 기지와 시설의 지배권을 계속 갖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국군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계속 미군에게 귀속된 것이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이 사실을 이범석 국방장관에게 분명히 주지시켰고, 때문에 이범석은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보고를 통해 국방장관인 자신조차도 군의 작전 지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전략) 군정을 이양 받았다고 하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군대가 아니면 공동안전보장의 필요성에 의지해서 이 군에 대한 조치는 마음대로 그렇게 용이하게 다른 행정부분처럼 되는 것이 아니며 장비를 완전히 넘겨받은 것도 아니고… (중략) 이 국방장관은 군사행정의 주체이고 아직 상정되지 않은 국군조직법입니다마는 오직 군□에 대한 것을 안다는 것 뿐입니다.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도까지 지시한다… 부대의 이름과 군의 문제를 가지고 국방장관이 마음대로 작전 지도를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후략)
한국군을 지휘‧통제할 주한미군의 핵심으로는 임시군사고문단(PMAG)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임시군사고문단은 1948년 8월 15일 일반명령 제31호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고문단 단장으로는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이 임명됐다. 로버츠는 이미 1948년 5월 20일부터 미군정 통위부 고문관으로 복무하던 중 새롭게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직을 맡게 된 것이다. 제주도의 고문관으로는 버제스(F. V. Burgess) 대위가 임명돼 왔다.
당시 50대 중반인 로버츠는 미국 육사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으며 용맹을 떨쳤는데 전쟁이 끝나자 진급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한국 주둔을 자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로버츠 준장은 통위부 고문관 시절 제주도 주둔군이 9연대에서 11연대로 교체될 때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송요찬을 선정해 제주에 파견한 장본인이었다. 이 때 로버츠는 후에 9연대장으로서 무모한 강경진압작전을 벌인 송요찬에 대해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제주 주둔 미군사령관 브라운 대령에게 소개한 바 있다.
한편 주한미군을 총지휘하던 하지 장군이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 직후인 8월 27일 한국을 떠나고 대신 콜터(John B. Coulter) 장군이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 24군단장으로 부임했는데, 미군 철수가 진행됨에 따라 콜터 장군이 지휘하던 24군단이 1949년 1월 15일 부대 해체를 위해 일본으로 떠난 후 로버츠가 주한미군사령관까지 겸임하게 된다. 로버츠는 또한 24군단이 철수하는 가운데 편성된 제5전투연대의 지휘권도 장악하였다. 고문단은 1948년 8월께 100명 수준이던 것이 1948년 말경에는 241명으로 늘어났다.
한국군에 대한 임시군사고문단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나타나 있듯이 그 시절의 한국군은 조직‧훈련‧무장은 물론 작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미군 고문관에 의해 통제받았던 것이다. 임시군사고문단 요원 가운데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을 지낸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는 회고록에서 정부 수립 후부터 자신을 포함해 이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총참모장, 로버츠 고문단장 등 6명이 상시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가 매주 열렸다고 증언했다. 여순사건은 고문단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로버츠 단장은 하우스만 외에도 풀러(Fuller) 대령 등 8명의 고위급 고문관을 현지에 파견해 사건 진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② 미군사고문단의 활동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었다.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1948년 9월 29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 국방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경비대의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 고문관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작전통제권의 주체와 그 영향력에 대해 분명히 했다. 이는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이 1948년 10월 28일 국회 보고를 통해 자신도 군의 작전 지도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전통제권은 단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10월 9일 로버츠 고문단장은 광주 제5여단 고문관 트리드웰(Treadwell) 대위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최근 제주도 작전에 있어서 강조할 점은 미군 고문관들이 사전에 바로잡았어야 했던 결함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제주도 작전은 통상 통위부 본부의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 작전은, 한 부대장의 의견에 의하면, 전적으로 한국인의 책임 하에 있다. 현재 계획된 작전의 지원과 전개는 미국인들의 간섭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적절한 지휘계통에 따라 한국인들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9연대의 현재 작전에 대한 모든 전술‧병참 지원은 5여단에 위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5여단은 적절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미군 고문관들이 한국인들의 지휘계통을 통해 즉각적인 수정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위의 보고서는 ‘제주도 작전에 있어 결함이 노출됐으므로 미군의 노출을 가급적 줄인 상태에서 한국인 지휘계통(5여단)을 통해 즉각적인 수정조치를 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에 앞서 10월 6일 제주도 주둔 59군정중대장 노엘(Edgar A. Noel) 소령은 로버츠 고문단장에게 공문을 보내 “무전기, 무기, 탄약의 즉각적인 선적이 시급하다”고 요청했다.
이와 같은 제주 주둔 미군 부대장의 요청과 로버츠 고문단장이 광주 5여단의 미 고문관에게 보낸 지시는 즉각 현실화됐다. 바로 10월 11일 광주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된 것이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제주도작전에 관한 모든 상황을 제주도에 파견한 고문관 버제스 대위를 통해 보고 받아 이를 다시 매주 정기적으로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고했으며, 이범석 총리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군 작전에 관해 일일이 관여했다.
특히 로버츠 고문단장은 CIA, 송요찬 9연대장, 서북청년회를 주목했고 이들을 강경진압작전의 핵심으로 활용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1월 8일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CIA는 훌륭히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9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강력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11월 15일자 보고서에서도 “CIA의 활동이 우수하다”고 칭찬하면서 “한국군 3개 대대를 주로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로버츠는 또한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총장 등에게 보낸 12월 18일자 서신에서도 강경작전을 펼치고 있는 송요찬에 대해 “송요찬 중령은 섬 주민들의 당초의 적대적인 태도를 우호적‧협조적인 태도로 바꾸는 데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였다”고 거듭 칭찬하면서 “이러한 사실이 신문과 방송 그리고 대통령의 성명에 의하여 크게 일반에 알려져야 한다”고 권고했다. 로버츠의 이같은 권고에 대해 채병덕 참모총장은 12월 21일 즉각 답신을 보내 “담화를 통해 송요찬의 활동을 소개토록 할 것이며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하도록 추천할 것“이라며 로버츠의 권고에 대해 화답했다. 채병덕은 또한 이 답신에서 송요찬에게 훈장을 수여할 것이라고 로버츠에게 약속하기도 했다. 여기서 ‘CIA의 업무’가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로버츠 고문단장은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는 송요찬 9연대장을 칭찬하거나, 미군 스스로 ‘과격한 반공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는 서북청년회를 군에 대거 투입함으로써 가혹한 작전을 조장했던 것이다.
또한 로버츠 고문단장은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바람에 한국군 지휘관들조차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자, 12월 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보내 계엄령이 실시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한편 로버츠 고문단장은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도에서 죽어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게릴라의 공격으로 살해당했으며, 약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고문관 리드(John P. Reed) 대위의 보고내용을 첨부해 1949년 2월 7일 미 육군부장관 로얄(Kenneth C. Royall)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비록 한국군에 의한 살해도 부분적으로 인정했지만, ‘대부분 게릴라의 공격으로 살해당했다’고 한 것은 사실 왜곡이었다.
한편 로버츠 고문단장은 미국 본토의 군 수뇌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 사실화하며 철수를 추진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미군을 철수시켜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만일 미군이 사라진다면 즉시 북한이 남한을 흡수 또는 공격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철수에 반대하기도 했다.
로버츠 준장은 미 24군단이 1949년 1월 15일 부대 해체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자 주한미군사령관까지 겸임하게 된다. 로버츠 준장은 1949년 3월 11일 미 대사관 드럼라이트(Everett Drumright) 참사관에게 “제주도에 CIA를 설치 운영하도록 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로버츠 고문단장은 육군부 기획작전국장인 볼트(Charles L. Bolte) 소장에게 미군이 철수한 후의 고문단 존재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면서 “한국군은 미국인 대신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고문관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성실하고 정직하게 수행한 결과 점점 그 결실이 맺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한국 군인들은 똑똑하지만, 현재까지 우리가 아무런 사심없이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는 것처럼) 이기적인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돈과 승진, 전리품이나 그 이상의 무엇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얻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혹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한국 군인들은 우리가 그들을 훈련하는 목적이 미국인이 피를 흘리는 대신 피를 흘리고, 미국을 위하여 쏘는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③ 괴선박출현설 유포
1948년 10월 경부터 집중적으로 터져나온 이른바 ‘괴선박 출현설’ 혹은 ‘소련 잠수함 출현설’은 강경작전을 합리화시키는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설은 미군의 보고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고 국내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됐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들은 동족상잔에 큰 우려를 표명하면서 무력으로써 사태를 해결하려는 데에 반대하고 있었다. 더욱이 제주도를 시찰하고 온 중앙 인사들의 발언은 토벌당국을 더욱 난처하게 했다. 박근영(朴根榮) 검찰관은 “원인은 경찰관의 제주도민에 대한 그릇된 행동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고, 이인(李仁) 검찰총장은 “악질관리 행동이 큰 원인”이라면서 “100명의 경찰관을 보내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유능한 자를 보내어 민심수습을 하는 것이 낫다”고 지적했다.
7월 18일에는 한독당 등 22개 정당 사회단체들이 모여 ‘제주도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 제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했다. 8월 20일을 전후해 응원경찰 800명 가량이 제주에 증파되자 한 언론은 “무력방법으로서는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공통된 견해가 되고 있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9월 6일에는 12개 정당‧단체들이 합동으로 “동족상잔 중지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론은 대규모 유혈사태를 걱정하면서 무력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무력진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이미 남과 북에 각각 서로에게 적대적인 정권이 들어서 있을 때에 ‘인민공화국 깃발이 매달린 괴잠수함’이 출현했다는 보도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앙 언론들은 1948년 10월 8일 제주해상에서 잠수함을 발견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는데, 그 출처는 아래의 미군 보고였다.
1948년 10월 8일 오후 5시 10분, 미군 커리어 비행기 조종사는 북위 33도 56분, 동경 126도 48분 지점에서 잠수함 1대를 발견했다.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그 잠수함은 10～12노트 속도로 동진하고 있었다. 정체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배가 미국이나 영국 것은 아니다.
잠수함 발견 당일 긴급히 보고한 이 미군 정보보고서는 잠수함의 국적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언급함으로써 소련 혹은 북한의 잠수함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며칠 후 이 사건은 국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해군 고위간부인 김성삼(金省三) 대령의 말을 인용해 “지난 8일 상오 9시경 제주도 근해에서 미군 비행기가 정체 모를 잠수함을 발견한 바 있었고 동일 정오에도 제주도 북방 8마일 해면에 잠수함이 출몰하였으나 국적은 자세하지 않다”고 보도했다. 말은 갈수록 불어나기 시작해 다음날 보도에는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이 어느새 ‘인민공화국기’로 변해 있었다.
제주도 미국 민사청장 ‘노우웰’ 소좌는 10월 8일 상오 11시 50분경 성산포 전면 5마일 해상에서 모국 잠수함 1척이 부유(浮游) 중임을 정찰기로 비행 중 발견하였고 또 동일 하오 1시경 역시 동 20마일 해상에서 부산 방면으로 항행 중인 잠수함 1척을 발견하였는데 괴잠수함의 번호는 ‘C 53’이며 함미(艦尾)에는 인민공화국기가 달려 있는 것을 기상(機上)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만으로는 ‘괴잠수함 출현설’의 사실 여부를 단정짓기 어렵다. 그런데 주목되는 사실은 괴선박 출현설이 이 때 외에도 여러 차례 있었고, 4 전개과정의 중요한 고비가 되는 시점이면 으레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것은 1948년 7월 11일이다. 미군보고서는 “붉은 깃발을 단 북한선박 1척이 제주도 부근에서 해안경비선에 의해 나포됐다”고 긴급히 보고했다. 그러나 이틀후 “나포한 선박은 놋쇠를 시장에 팔기 위해 가던 중”이라고 정정보고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한달여 후인 8월 17일 또다시 괴선박 출현설이 불거져 나왔다. 이번에는 아예 괴선박의 정체를 ‘소련선박’으로 못박았다. 미군은 발견 당일 ‘CIC(방첩대) 긴급보고’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8월 17일 새벽 4시 제주도 해안을 벗어나 순찰하던 해안경비대 경비선 ‘광주’는 5백톤급 소련선박을 발견했다. 그 소련선박은 정지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한 채 갑판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경비선을 향해 발사했다. 보고된 피해나 사상자는 없다(F-6).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군은 이 보고서에서 ‘소련선박’ ‘기관총 발사’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하면서도 스스로 그 신뢰도에 대해서는 가장 낮은 수준인 ‘F-6’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안경비대에서 나온 첩보 수준의 보고였지만 며칠 후 언론에는 같은 내용이 이렇게 보도됐다.
17일 새벽 4시경 본도 한림면 비양도 해상을 초계 중이던 해안경비대 경비정은 부근 해상에서 정체 모를 괴선 한 척을 발견하고 즉시 정지를 명하였는데 그 괴선은 도리어 2정의 기관총으로 위협을 하면서 경비정으로 돌진하고자 하다가 북방으로 달아나 버렸다 한다. 경비정은 즉시 기지로 연락하고 기지에서 미군 측에도 통보가 되어 미군에서는 김포비행장으로 가서 연락을 하는 등 비상조치를 하였다 하며 급거 출동한 미군비행기는 장시간 근해를 탐색한 듯 하나 그 후 소식은 불명하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괴선은 청백 2색기를 단 쾌속 주정으로 백색에는 두 개의 붉은 별이 그려있었다 한다.
이처럼 괴선박 출현설은 미군 보고서에서 출발했고, 이를 받아 언론이 보도함으로써 크게 유포된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사건 발생 후 미군은 비행기 몇 대를 경비대에 대여하여 삐라를 산포하였다 하며, 바다에는 세계 제일을 자타 공인하는 미 해군이 해상과 상공을 경비하고 있는 만큼 외부에서의 공급은 치안 당사자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며 괴선박 출현설이 낭설임을 지적했지만, 북한 혹은 소련의 괴선박이 출현했다는 보도는 강경진압작전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즉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직후인 1948년 8월 2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는 단시일내 사태의 전면적 결말을 짓기 위해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고 예고하면서 이같은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을 4가지를 들었는데 그 첫번째 이유로 “제주도 근해에 괴선박이 출현한 것”을 꼽았다. 앞서 언급한 ‘10월 8일 잠수함 출현설’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 달 만에 또다시 터져 나온 것이며, 이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창설되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괴선박 뿐만 아니라 심지어 괴전투기가 출현했다는 설도 나왔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한 미군 보고서는 이렇게 보고했다.
편대를 이룬 정체불명의 전투기 6대와 4개의 엔진을 가진 폭격기 한 대가 제주도 상공에서 관측되었다. 전투기들은 1만 피트 고도에서 편대 대형을 깨뜨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행하였다. 남한 국방경비대 조종사가 연락기를 가지고 탈주하여 북한으로 향해 갔다.
미군은 열흘 후 이 정체불명의 전투기가 ‘미군 비행기’라고 정정보고함으로써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지만, 소련‧북한선박 출현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1949년 1월 4일 제주 주둔 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중령은 계엄령 해제조치가 작전수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며 이를 철회해 주도록 경비대사령부에 요청했다. 그러면서 함병선은 계엄령 재선포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했다.
소련표시를 한 3천톤급 선박 2척이 제주도 삼양리 약 5마일 지점에서 한국인 해안경비대원에 의해 1월 3일 오후2시 발견됐다. 해안경비정이 이를 추격했으나 공해상이기 때문에 정지시킬수 없었다. 미확인 선박은 4일 오후2시 30분에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는데 부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논평>한국군은 이 선박이 제주도 유격대를 지원하기 위한 북으로부터의 물자를 싣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전에도 한국군에서 나온 바 있지만 불확실하다.
미군 측의 ‘불확실하다’는 논평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동아일보가 같은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여론화됐다. 한편 소련은 소련잠수함 출현설이 그치지 않자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모스크바 19일 발 AFP합동】소련 해군기관지 라니프르트지는 18일 소련잠수함이 제주도 근해에 출몰한 일이 없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한정부 대변인의 최근 성명은 허위이며 남한정부는 2개월 전에 공포하여 작년 12월에 해제하기로 된 제주도의 계엄령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미군은 상금(尙今)도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미 독점자본가들의 한국에 관한 계획과 일치되는 것이다”
소련선박 출현설은 마지막 작전기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설치에 때맞춰 또다시 이어졌다. 1949년 3월 10일 제주시찰에 나섰던 이범석(李範奭) 총리와 신성모(申性模) 내무부장관은 마무리 진압을 강조하면서 “여러 차례 소련선박이 출현하고 있으며 북한선박이 나타나 한라산 폭도와 화광(火光) 신호를 교환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
이처럼 ‘괴선박 출현설’은 강경진압작전을 펼치는 시점에 앞서 꼭 터져나왔고, 실제로 대규모 유혈사태의 구실로 작용했다. 그런데 미군은 계속되는 괴선박 출현설이 불확실한 첩보나 소문에 근거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무장대가 대부분 궤멸됨으로써 사건이 거의 마무리되던 1949년 4월경에 가서야 다음과 같이 이를 확인‧정정하는 보고를 했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로부터 또는 북한으로부터 병참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한국 해군정의 지속적인 순찰과 공중정찰 및 해안마을에 대한 경찰의 빈틈없는 방어는 외부 지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무장대가 거의 궤멸돼 사건이 마무리 되어가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괴선박 출현설’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미군의 입장을 뒷받침하듯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孫元一) 소장은 1949년 4월 14일 기자들과 만나 “제주도 근해에 외국선이 출몰한다는 낭설은 소련선박이 우리를 원조하고 있다는 공산도배들의 모략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도 연해 4마일 밖에서 소련선박이 항해하는 것이 있으나 이는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소련선박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항로를 지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특히 제주 해안봉쇄를 맡고 있던 해군 제3특무정대 사령관은 “항간에 소련 잠수함 출몰설이 있으나 제주도는 매일 파도가 세어 우리 소형 정대는 ‘마스도’만 보이기 때문에 일반이 이를 착각 오인하고 낭설을 유포하고 있어 민심수습에 영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제주 지역에서 계속 터져나오던 괴선박 출현설은 사태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가서야 ‘근거없는 낭설’임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강경진압작전의 중요한 빌미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강경작전에 대한 반대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조작의 의혹이 있다. 10월 8일 괴선박 출현설이 나온 직후인 10월 11일에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된 것도 이런 의혹을 더해준다.
3)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
① 군사력‧경찰력 강화
1948년 9월에 접어들자 한동안의 소강상태를 깨고 사태가 악화될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전국 각 경찰관구에서 차출된 응원경찰대 800명이 8월 29일 제주에 들어온데 이어, 또다시 대규모의 응원경찰이 증파됐다. 그동안 무장대는 ‘8 지하선거’ 준비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차 김달삼 등 핵심지도부가 제주를 떠남에 따라 공세를 늦췄고, 토벌대 또한 정부 수립을 앞둔 데다가 우기(雨期)로 인해 진압작전이 지연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다시 사태가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는 9월 초 김봉호 제주경찰감찰청장을 통해 구체화됐다.
【제주 발 조선】금반 청장회의 참석차 상경하였다가 귀임한 제주경찰감찰청장 김봉호 씨가 말한 바에 의하면 목하 제주도 사태 수습을 위하여 ○○○○명의 응원대가 내도중이라고 한다. 이는 종래에 보던 단순한 증원이 아니고 단시일간에 사태의 전면적 결말을 짓기 위함이며 씨가 상경하였을 때는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중앙 권위 측에서 미리 계획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사건 초기에 있어서는 현재 수도경찰청원인 500명에 300명을 증가시킨 800명의 경찰력으로 점진적 수습을 계획하였으나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던 까닭에 누차 응원대를 파견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사태는 이로 인하여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여 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또다시 악화될 기세를 보이고 있으므로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라 한다.
김봉호 청장은 이어 △제주도 근해에 괴선박이 출몰한 사실 △무장대의 재출현 △한림지서장이 살해당한 사실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회의에 참석해 제주상황을 보고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같은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중앙에서 제주사건에 대해 강경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괴선박 출현설’은 근거가 불분명한 첩보 수준의 것이었다. 무장대의 재출현이나 한림지서장 살해사건도 이전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김달삼 등 무장대 지도부가 해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난 것은 오히려 사태가 완화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더구나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라는 여론에 따라 경찰감찰청장을 제주출신으로 바꾼 이래 소강상태가 지속돼 평화적 해결이 기대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시일간에 사태의 전면적 결말’을 짓기 위해 응원경찰대가 대거 내도 중이라는 소식은 의아함과 두려움을 함께 불러일으켰다. 이에 한 언론은 “다시금 겨레끼리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될 새로운 화근이란 대체 과연 무엇일까. 단지 위에 말한 ‘객관 정세’만으로 골육상쟁의 불가피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라며 강경으로 치닫는 진압당국의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다.
제주도에 대한 대규모 진압작전은 김봉호 청장이 “딘 군정장관을 비롯한 중앙 권위 측에서 미리 계획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던 것처럼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순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한 학자는 남한정부 수립 직후 전개된 미군과 정부의 강경진압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이제 어느 한쪽 내부의 저항은 단순히 그것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보다는 다른 한쪽과 연계되어 자신을 붕괴시키려는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남한의 경우 그것은 그 체제를 출범시킨 미국과 정부에게 모두 적용되었다. 더욱이 두 개의 적대적인 국가의 출현은 그 저항이 아무리 정당한 것일지라도(예컨대 부정, 부패, 탄압, 착취에 대한 저항일지라도) 그러한 저항들은 모두 적대적인 상대방과 연계된 붕괴음모라고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도구까지 갖게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진압세력의 정당성, 또는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자원임에 틀림없었다.(중략)
제주도에서의 진압은 미군과 정부군에게 북한의 도전에 대응하고 소련‧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되어질 수 있었으며, 그러한 명분은 얼마든지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진압해도 정당화된다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제 남한정부에게 제주도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가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고, 주한미군 철수를 앞두고 있는 미국에게는 냉전 초기 자신들이 설정하려는 세계질서에 가장 큰 걸림돌로 등장했다. 실제로 심상치 않은 징후는 이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인 8월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앙당국에서 일대 소탕전 방침을 정하고 응원대를 속속 제주도에 증파했기 때문이다.
8월 25일 비상경비사령부의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는 포고문에 이어 8월 28일 수도관구경찰청 소속 경찰관 800명이 제주를 향해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러던 차에 경찰청장회의 참석차 상경했다가 귀임한 제주경찰감찰청장 김봉호가 “몇 천명의 무장응원대가 내도 중에 있어 결정적인 토벌전이 벌어질 기세”라고 중앙의 소식을 전해 왔던 것이다. 8월 30일에는 제주도 제9연대를 예하에 두고 있는 광주 제5여단 참모장 오덕준(吳德峻) 중령이 여단장을 대리하여 “사태를 조속히 해결코자 내도 순시”했다. 그동안의 소강상태는 향후 다가올 대규모 진압작전의 준비기간이었고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은 것이었다.
강경진압작전은 10월 들어 전격적으로 단행된 제주경찰감찰청장의 교체와 제주도경비사령부의 창설로 보다 구체화됐다. 중앙정부는 제주도 출신으로 그동안 온건책을 지향해 온 김봉호 경찰청장을 10월 5일자로 사퇴시키고 그 후임에 평남 출신인 경무부 공안과장 홍순봉(洪淳鳳)을 발령했다.
이는 주요 관리들을 제주출신으로 등용해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겠다던 중앙의 방침이 변경됐음을 의미했다. 제주도 미국공보원장이었던 알버트 필립슨이 “제주도 소요 원인은 악질경찰의 폭행 때문이다. 그러나 김봉호 경찰청장 부임 후는 그런 일은 없다”고 했을 정도로 김봉호 청장의 온건책이 민심 수습에 큰 역할을 해오던 터여서 그의 경질은 강경책을 택하겠다는 상징적 인사였다.
홍순봉 신임 청장에 이어 제주도민들에게는 극도의 갈등 상대였던 서북청년회도 대거 들어왔다. 서청을 지원하며 강공책을 채택했던 홍 청장은 10월 6일자로 부임한 이래 이듬해인 1949년 7월 28일까지 10개월간 최대의 유혈사태 한복판에 서게 된다.
경비대총사령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지난 6월 1일부로 부산 제3여단 예하 부대였던 제주도 제9연대가 광주 제5여단 소속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사령관에는 광주주둔 제5여단장 김상겸(金相謙) 대령이 임명됐다. 부사령관에는 제9연대장인 송요찬(宋堯讚) 소령을 임명했다. 진압사령관이 연대장급에서 여단장급으로 격상된 것이다. 김상겸 대령은 당시 65세의 노장으로서 1920년대 러시아군 중좌와 폴란드군 대좌를 지냈고 해방 후에는 운수경찰학교장(총경)과 경비대 총참모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제주도경비사령관 김상겸 대령에게는 제9연대와 부산에서 온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에서 온 제6연대 1개 대대, 해군함정(해군 소령 최용남 부대),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됐다. 경비대총사령부는 또한 제5여단 예하 부대인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를 제주도에 증파하도록 명령했다.
단순히 병력만 증강된 것이 아니었다. 향후 벌어질 대규모 유혈사태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병력 활용의 변화’라는 점에 있었다. 제9연대의 미군고문관이 작성한 8월 5일자 일일보고서는 “S-2가 재편되고 있음. 제주도 출신의 S-2 소속은 제1대대로 전출됐음. 정보업무에 대한 경찰, 경비대와 CIC 사이의 연락이 개선됐음”이라고 적고 있다. 이 일일보고서 8월 12일자에는 “제주도 출신의 부대원들이 S-3에서 전출됨”이라 적혀 있다. 진압전 때 가장 중요한 정보 부문(S-2)과 작전 부문(S-3)에서 제주출신들을 철저히 배제한 것이다. 현지 실정을 잘 알고 주민들과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는 제주출신 군인들은 강경진압작전을 벌이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취해진 이 조치는 대량 살상으로 전개된 대토벌전을 예고했다.
한편 진압당국은 이에 앞서 제주와 육지간의 왕래를 차단했다. 이미 지난 7월 5일부로 폐지됐던 여행증명제가 8월 13일부터 부활돼 목포행 정기 연락선을 타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실제로 제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해 22개 정당 사회단체들이 모여 구성한 제주도사건대책위원회가 ‘제주도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으나, 이들은 8월 28일 목포에 도착한 이후 목포항에서 끝내 승선이 거부돼 제주행이 좌절됐다. 제주도는 점점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갔다.
② 포고문 발표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한 지 6일만인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다음과 같은 포고문을 발표했다.
본도의 치안을 파괴하고 양민의 안주를 위협하여 국권 침범을 기도하는 일부 불순분자에 대하여 군은 정부의 최고 지령을 봉지(奉持)하여 차등(此等) 매국적 행동에 단호 철추를 가하여 본도의 평화를 유지하며 민족의 영화와 안전의 대업을 수행할 임무를 가지고 군은 극렬자를 철저 숙청코자 하니 도민의 적극적이며 희생적인 협조를 요망하는 바이다. 군은 한라산 일대에 잠복하여 천인공노할 만행을 감행하는 매국 극렬분자를 소탕하기 위하여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기간 중 전도 해안선부터 5㎞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임. 단 특수한 용무로 산악지대 통행을 필요로 하는 자는 그 청원에 의하여 군 발행 특별통행증을 교부하여 그 안전을 보증함.
이 포고문은 10월 5일 경찰청장 교체와 10월 11일의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등을 통해 내부의 체제를 정비한 진압당국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는 신호탄이었다. 대외적으로 강경진압 방침을 천명한 것이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 포고문 속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들이 들어 있다. 우선 제주도의 지형상 진압대상 지역으로 설정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마을 전부가 해당된다. 따라서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의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산간마을에서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폭도배로 인정해 이유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전시상황에서도 어려운 즉결심판권이 발동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와 관련, 미 고문관이었던 피쉬그룬드는 “9연대는 한라산 쪽을 향해서 내륙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적으로 간주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런 포고가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내려졌다는 대목이다. 통상 군에게 ‘최고 지령’을 내릴 수 있는 기관으로서 대통령이나 군 수뇌부를 지목할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최고 지령’의 발령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미군의 강경진압 방침은 4발발 초기에 이미 가닥을 잡고 있었다. 4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나에게 작전수행후 미국행 알선과 10만 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 연대장 시절에 9연대 정보참모였던 이윤락도 “CIC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미 CIC 장교가 그 해 5월 김익렬 연대장에게 제안했던 작전이 5개월만에 실제 상황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제주해안은 포고문이 발표된 다음날인 10월 18일 즉각 봉쇄됐다. 해군은 7척의 함정과 수병 203명을 동원해 제주해안을 차단했다. 또한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19일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제14연대가 총부리를 돌려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강경작전은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여순사건’으로 인해 위기를 느낀 당국이 강경작전을 벌이게 됐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미 그 이전인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의 포고문을 통해 강경진압작전의 방침이 정해졌던 것이다. 여순사건은 강경진압작전의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라기보다는 더욱 가속화시킨 계기였던 것이다.
한편 제5여단장으로서 제주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김상겸 대령은 사령관에 임명된 지 8일 만에 제5여단 예하 부대인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이에 대한 문책을 받아 파면되었다. 이에 따라 송요찬 9연대장은 김상겸 후임으로 제주도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돼 제주경찰과 해군 함정까지 휘하에 두는 명실상부한 진압군의 총 책임자로 등장했다.
③ 서북청년회 등 동원
진압당국은 강경한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민간 사설단체들을 적극 활용했다. 사설단체로는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이 전위에 서서 군‧경 못지 않은 역할을 했다. 특히 가족이 무장대에게 희생당한 유족들을 경찰조직에 편입시킴으로써 보복행위를 조장했다. 또한 주민들에게 민보단을 구성케 하여 마을 경비를 맡겼고, 민보단원 중 청년들은 다시 특공대로 편성해 진압작전에 앞장세웠다. 학생 조직인 학련(學聯)도 진압작전에 활용했다.
그런데 이들 민간단체의 활용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거나 도민들간 불신과 갈등의 골을 깊게 하는 등 큰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서북청년회는 4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 받아 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
서청의 제주 입도는 크게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번째는 1947년 3사건 직후로 전북출신 유해진 지사가 부임하면서 호위병 형식으로 서청단원을 활용한 것이 그 시초이다. 4 발발 직전까지 들어온 서청은 대략 5백～7백명 선으로 추산된다. 이때까지는 일정한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강매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서청에 의한 백색테러도 종종 발생, 민심을 자극시켰다. 이는 4 발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두번째의 집단 입도는 4 발발 직후의 일이다. 당시 중앙의 서청 단장이었던 문봉제의 증언에 의하면 경무부장 조병옥의 요청에 의해 제주도사태 진압요원으로 서청 단원 5백명을 급파했다는 것이다. 그 서청 단원들이 제주도내 각 지역에 분산돼 기존단원들과 함께 진압전에 참가했다.
세번째는 바로 여순사건 직후의 상황으로 1948년 11월 두달 사이에 최소한 1,000명 이상의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진압작전의 한복판에 선 것이다. 이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다. 이들이 전율할 학살극을 벌여도 이를 제재할 기관은 없다시피했다. 이와 관련 미 고문관이었던 피쉬그룬드는 “미국에서 경찰관은 그 지역 출신이 하는데 왜 북한에서 탈출한 서북청년회가 제주도에서 경찰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청의 배후에 바로 미군과 이승만이 있었다. 미군이 제주도 서청을 후원했다는 근거는 미군 스스로의 정보보고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0월 24일 ‘임시경찰(temporary policemen)’로서 활동하는 서청 단원들이 조천면 신흥리 사건 현장에 파견돼 게릴라를 쫓아냈다”고 기록, 이때 이미 경찰의 신분을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미군 정보문서에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한 모병(the secret induction)’을 통해 서청 단원들을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승만도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 사실은 미군 기밀문서와 서청 단원의 증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미 정보보고서는 ‘청년단, 군대와 경찰을 강화시키다’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 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서청 단원으로 1948년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 경찰의 길을 걸었던 박형요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청 총회에 직접 참석, 모병을 역설하는 연설을 듣고 제주도까지 오게 됐다고 증언했다.
난 이북에서 전기 재료상을 하고 있다가 김일성이 싫어서 1948년 5월 월남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청 문화부 일원으로 활동했지요. 1948년 12월 10일로 기억합니다. 명동에 있던 서울시 공관에서 서북청년회 총회가 열렸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제주도 4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서청 금호동분회 총회가 열렸는데, 분회장인 임승현(林承鉉, 바로 경사로 임용됐으며 곧이어 경위로 승진해 표선지서 주임‧제주도경찰청 정보주임 역임) 씨가 ‘여수 순천 제주사태로 대통령 각하께서 서청원을 파견하라는 지시가 있으니 모두 지원하자’고 제안, 거기에 응하게 된 것이지요.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했는데 글깨나 아는 25명은 경찰이 됐고, 나머지 225명은 군인이 됐지요. 그때는 문맹자들이 많았습니다. 제주에 와보니 우리보다 앞서 경찰 복장을 한 ‘2백명 부대’가 와 있더군요. 서청 단원 중엔 군인으로 간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박형요는 이어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하는 등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서청 대원들이 경비대나 경찰에 대거 투입된 것은 단순한 병력 증강만이 아니라 제주출신 군인과 경찰들이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압당국이 제주출신 군경은 현지 실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제주도민으로서 온정을 베풀 수 있으므로 강경작전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1948년 11월 서청 단원들이 경찰이나 군인 복장을 하고 대거 제주도에 내려오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청 단원들이 심상치 않은 방법으로 공권력에 무더기 투입되는 과정에는 당시 최고통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까지 개입했다. 그해 11월 중순께 제주경찰에 서청 단원 200명이 1차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경찰로 급조됐다. 또 군인으로 이보다 훨씬 많은 대원들이 제주도에 내려 보내졌다. 200명의 서청 경찰대는 이른바 ‘2백명 부대’로 불렸다. 이 부대의 일원으로 제주도에 내려왔던 김시훈은 모병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청 산하단체인 ‘진용동지회’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진남포와 용강군에서 월남한 사람으로 구성된 까닭에 머릿글자를 따 진용동지회라 불렸지요. 하루는 사무실에 갔더니 친구들이 너도나도 경찰관이 되어 제주도에 간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제주도 4사건을 진압하려면 사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서울에서도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지 구별키 어렵다, 그러니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사람들은 서청 뿐이니 서청에서 경찰관을 선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도 ‘친구따라 강남가는 식’으로 경찰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 경찰전문학교는 서울 광화문 앞에 있었는데, 거기서 간단한 면접시험을 봤지요. 경찰관이 돼서 취조하려면 최소한 ‘가나다라’는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결국 글자깨나 아는 사람은 경찰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군인 이등병이 된 것입니다. 이때 경찰합격자가 2백명이 되어서 ‘2백명 부대’라고 불렀지요. 군인으로 된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김시훈은 당시 서청을 모집할 때 제주도에서 평안남도 출신의 제주도경찰국장 홍순봉과 제주도 서청 단장 김재능(金在能)이 직접 서울에 올라와 지원을 독려했다고 밝혔다. ‘2백명 부대’는 경찰전문학교에 입교, 14일간의 단기교육을 마친 후 경찰복을 입고 제주도에 내려왔다. 김시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한 사흘쯤 교육을 받고 있노라니, 진용동지회 회장이던 정용철(경위로 특채되어 삼양지서 주임이 됨)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지금 김재능 씨가 제주도로 돌아가는데 그를 그냥 따라 가도 경찰관으로 임명해 준다고 하더라’면서 같이 가자고 해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 11명이 서울서 3일만 교육받고 김재능 단장을 따라 제주도에 내려 왔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오니 다시 경찰교육을 받아야 한다기에 교육을 받았지요. 그 때문에 서울서 14일동안 제대로 교육받은 189명은 ‘제주경찰 9기’가 됐고, 우리 11명은 ‘제주경찰 10기’가 됐지요.
그러나 제주경찰사에는 ‘제주경찰 9기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육을 받은 58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서청 ‘2백명부대’는 이와는 별도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군 정보문서에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물이 있다.
최근 서북청년회의 자원자 620명이 서울경찰의 감독 아래 12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을 마친 후에 그들은 정규경찰의 자격으로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발령되었다. 현재 계획은 이 요원들이 이들 소요발생 지역에서 한달간의 임무를 마친 후 서울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찰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다른 청년단체는 자신들이 그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대동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동맹은 자기들 조직이 경찰에 협력할 기회를 가졌으나 자원자는 아직 없다고 한다.
서청은 경찰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도 변신했다. 송요찬 연대장은 서청 단원들을 군에 편입시켜 이른바 ‘특별중대’를 만들었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 아닌 군인’이었지만 9연대 헌병이나 장교들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다. 송요찬이 그러한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다. 민간인 신분으로 제주에 왔다가 특별중대원이 된 노윤복은 이렇게 증언했다.
난 1948년 7월 계몽연극단 20명과 함께 제주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연극을 보러오지 않아 흐지부지될 때에 송요찬 연대장이 우리를 무장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1개 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중대장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린 없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특별중대에 대해서는 타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지요.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총살집행을 할 때는 “희망자 나오라”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신분도 모르고 그냥 남의 말 듣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내가 의심을 받으니까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제주도의 1948년 11월과 12월은 그야말로 피비린내나는 유혈현장이었다. 미군 정보문서에서 표현한 ‘임무(duty)’란 무엇을 말함인가. 미군 지휘부가 제주도 유혈사태에 동조했거나 최소한 묵인했다는 사실은 이런 기밀문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몬 것도 문제였다. 역시 서청출신 경찰관으로 ‘2백명 부대’에 이어 제주에 왔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라지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중앙정부에서조차 이념문제를 흑백논리로 각인시킨 점이다. 즉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킨 것이 사태를 더욱 유혈극으로 몰고 간 한 동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서청 중앙본부의 문봉제 단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한 해명성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회를 파견했다”면서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다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제주도”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 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 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 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군은 이렇게 보고했다.
11월 9일, 서북청년 단원들이 제주도 총무국장인 김두현을 타살했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서청 단원들은, 김두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며 자기들은 단지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A-1).
이런 불법적인 살인행위에 대해서 당시 절대적인 장악력이 있던 미군 정보기관이나 9연대 수사기관의 조치는 미온적이었다. ‘공산주의자를 처형했다’고 주장하면 살인행위도 용납되는 세상이었다. 이같은 태도는 경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국에서는 살인에 가담한 서청 단원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총무국장 살해사건 때 경찰이 범인을 잡아 구금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홍순봉 경찰청장도 김재능 서청 단장에게 양보했어요. 범인들을 9연대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습니다. 살인범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군인이 된 것입니다.
또한 전국통일학생총연맹(全國統一學生總聯盟‧이하 학련으로 약칭)에서도 제주도에 계몽대를 파견한 바 있거니와 제주 학련은 진압당국과의 연계 아래 준(準) 진압조직이 되었다.
민보단(民保團)은 가장 중요한 경찰의 외곽조직이 되었다. 당초엔 민보단의 전신인 향보단이 있었다. 향보단은 1948년 4월 16일 딘 군정장관에 의해 발표됐다. 향보단 조직은 ①만 18세 이상 55세 이하 남자는 모두 의무적으로 향보단원이 된다 ②만 15세 이상 65세 이하 남녀는 각기 향토방위에 대한 공동책임이 있다 ③향보단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각 지역 주민의 의연금으로 충당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향보단은 당면한 5·10 선거를 앞두고 전국 곳곳에서 발생하는 선거반대 소요를 경찰병력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제 식민주의 시절의 경방단이나 국민의용대 같은 성격의 강압에 의한 조직이라는 반발이 일었다. 향보단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해당지역의 순찰업무를 계속하다가 잇따라 말썽이 일어나자 48년 5월 22일 해산되었다.
그런데 6월 초 제주 상황을 취재한 한 언론은 “경찰의 보호 아래 향보단이 조직되어 철야 경계를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어 제주에서는 향보단이 더 지속됐던 것 같다. 향보단이 민보단으로 부활한 것은 1948년 10월 말경으로 보인다. 수도청장은 1948년 10월 29일자 담화를 통해 이미 민보단 조직이 완료됐음을 밝혔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그 보다 훨씬 전에 민보단이 구성됐다. 한 민보단 관련자료는 제주도 민보단이 창설된 것은 1948년 8월 11일로 밝히고 있다. 이때 도단위 민보단 조직이 창설되고 이어 각 지역별로 민보단을 조직하게 됐다는 것이다.
민보단 안덕면 화순리 대대장을 지낸 지연부(池連富)가 생전에 기록했던 ‘화순리 민보단의 경비활동’은 당시 민보단의 조직과 활동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안덕면 화순리 민보단이 조직된 것은 48년 8월의 일이었다. 부서로는 단장(장행규) 아래 부단장(지희온‧양문일), 총무(지봉일), 자경부(지연부), 동원부(안창현), 연락부(이정만), 부녀부(오태정)를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경부가 자경대로 개칭되면서 경비조직이 강화되었다. 즉 마을경비 임무는 18세 이상 65세 이하의 남자에게 모두 부여되었다. 자경대 조직도 대대·중대·소대·분대의 편제로 재편되었다. 대대장은 자경대장인 지연부가 맡고 제1중대장에 강문팔, 제2중대장에 양태희가 선임되었다. 민보단이 처음 한 것은 지서 주변을 돌담으로 방호벽을 쌓은 일이었다. 주민들을 동원, 높이 5m, 폭 3·5m의 축성을 한 뒤 15m 간격으로 망루 7개소를 설치했다.
그해 겨울에는 화순 마을을 산 쪽과 차단하기 위해 마을 주변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 성담은 마을 동쪽 속칭 도살장에서 시작하여 국민학교 북쪽 신사터～서동네 속칭 메마르～마을 남쪽 속칭 동태동산에 이르기까지 장장 1,500m에 달했다. 이 성은 폭 2·5m, 높이 3·5m로 쌓여졌으며 50m간격으로 망루 17개소가 설치되었다. 성을 쌓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어린 고사리 손에서 늙은 할머니 손까지 모두 동원되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이 어려운 노역을 감내해야 했다.
민보단 단원들은 밤낮으로 죽창과 철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화순 민보단의 경우 제1중대가 하루 경비를 서면, 다음날에는 제2중대가 보초를 서는 격일 근무제를 채택했다. 날마다 다른 암호가 하달되었다. 암호는 바로 생명선이었다. 한밤중에 깜빡 암호를 잊고 다니다가는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몰랐다.
화순 민보단의 야간 경비근무조에는 매일 177명이 동원되었다. 배치인원별로 보면 △지서 망루 및 정문 6개소 근무에 30명 △마을 망루 17개소와 문 5개소, 중요요소 3개소 근무에 125명 △망루대 경비 순찰원 8명 △전주 순찰원 6명 △근무확인 순찰원 8명 등이다. 주간 경비근무조에는 50명이 배치되는데 △마을 5개 문에 30명 △마을 외곽경비 12명 △지서 경비근무 4명 △본부사무실 대기조 4명 등이다. 결국 한 마을을 지키면서 날마다 주·야간에 동원되는 인원이 222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지서에는 비상 사이렌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민보단원들은 수분 내로 집결해야 한다. 이 비상훈련에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곤욕을 치른다. 민보단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지역주민들이 담당해야 했다. 부녀자들은 토벌대나 경비조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로 분주했다.
민보단 단원들은 군경 진압작전에 곧잘 동원되었다. 그들은 죽창 등의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무기를 들고 군인이나 경찰관보다 앞서 최전방으로 내몰렸다. 단원들 가운데는 진압작전에 참여했다가, 혹은 보초를 서다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았다. 어느 경우에는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거나 근무가 태만하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의 총탄에 사살되는 일도 있었다.
49년 4월 1일자로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작성한 기밀문서 ｢제주도 보고｣에는 제주도 민보단 인원이 5만 명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기밀문서는 “제주도 남자들은 농삿일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토벌전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정보분석도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경을 지원하고 있는 민보단은 섬주민 중 성년남자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으며 조악한 죽창으로 무장하고 있다. 대략 5만 명으로 추산되는 그들은 밭에서 농사짓기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게릴라 토벌전에 나가는 걸 더 좋아한다. 군과의 합동작전 때 일선에 즉각 투입되었기 때문에 민간인 전투원 중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상당수가 입산했거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민보단을 구성할 청년들이 절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향토방위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65세의 노인과 아낙네들까지 게릴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을 쌓는 일에서부터 밤에는 교대로 성을 지키는 보초의 일을 감내해야 했다.
민보단 중에서도 젊은 청년들은 다시 ‘특공대’라는 이름 아래 재편돼 군‧경이 전개하는 진압작전에 ‘총알받이’로 동원됐다. 특공대원은 대략 3,000명 선으로 추정된다. 서울 주재 AP특파원은 “창을 가진 약 3,000명의 시민이 소탕전에 있어서 정부를 원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채병덕 참모총장이 1948년 11월 30일 발표한 담화에서 “최근 제주도 작전에 있어서 소수의 국군장병에 인솔된 보조 무장도민 3,000명” 운운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나.계엄령 선포
1)계엄령의 실태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계엄령이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의 직접 지시를 받아 선포된 것인지, 사후 추인을 받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나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계엄령 시행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제주4사건의 전개과정에서 계엄령은 주민 희생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전의 희생이 비교적 젊은 남자로 한정된 반면,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서너살 난 어린이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총살당했기 때문이다. 계엄령은 제주도민들에게 재판절차도 없이 수많은 인명이 즉결처형된 근거로 인식돼 왔다.
이 때문에 계엄령이라는 용어는 지금까지도 제주도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고,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조차도 ‘계엄령’이란 용어만은 빠뜨리지 않고 증언했다. 남편이, 혹은 아들과 손자가 군경토벌대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했다고 강조하면서도 말미에는 꼭 “그 때는 계엄령 시절이라서…” 또는 “계엄령 때문에…”라며 ‘시국 탓’을 했다. 이들에게 계엄령이란 체념을 상징하는 말이었고 가족이 죽은 ‘이유’였다. 심지어 촌로들은 계엄령을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무소불위의 제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은 당시는 물론이고 최근까지도 그 실체가 매우 불분명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4’ 관련 기록들이 계엄령을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계엄령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언제 선포됐다가 해제됐는지, 심지어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던 것인지 혼동만을 줄뿐이었다. 계엄령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혀 없음은 물론이고, 선포됐다는 날짜 또한 제각각이다. 과연 계엄령은 언제 선포된 것이며, 계엄령이란 이름 아래 벌어진 강경한 진압작전은 정당한 것인지, 또한 계엄령은 합법적인 것인지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먼저 기존 자료에 나타난 계엄 선포일을 보면, 크게 ‘10월 8일 설’과 ‘11월 17일 설’(혹은 11월 16일), 그리고 ‘11월 21일 설’로 나뉜다. 계엄령의 주무 부서인 군 자료는 대부분 10월 8일로 기록하고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대비정규전사에는 “1948년 10월 8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고 간략히 적혀 있다. 경찰자료인 제주경찰사 역시 “10월 8일 도 전역에 걸쳐 계엄령이 선포됐다”라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제주연감, 제주도지(상), 대하실록 제주백년 광복제주 30년 등과 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마을 향토지에도 10월 8일로 기록돼 있다. 학술 논문에도 제주도지(상)과 광복제주 30년을 각각 인용해 “10월 8일 당일로 도 전역에 걸쳐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 쓰여 있다.
계엄해제 시기는 대체로 ‘1948년 12월 31일’로 일치한다.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계엄선포 시기는 밝히지 않은 채 “1948년 12월 31일 제주도지구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고 적고 있다. 한국전쟁사의 내용을 거의 옮겨 쓴 대비정규전사 등 대부분의 자료들 역시 12월 31일을 계엄해제일로 잡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1948년 10월 8일 선포된 계엄령이 그해 12월 31일 해제됐다’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다만 어떤 근거에서인지 몰라도 마을지인 김녕리 향토지가 계엄선포일을 1948년 10월 1일로, 제주연감이 계엄해제일을 1949년 10월 12일로 기록한 것이 일부 눈에 띌 뿐이다.)
그러나 미국 측 자료와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정보보고서는 11월 17일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1948년 12월 8일 열린 국회 보고에서 처음으로 제주 계엄령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자리에서 이범석 국방장관은 1948년 11월 16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음을 밝혔다. 또 국내 언론은 계엄령이 11월 21일에 선포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자료에 나타난 계엄 선포일은 셋 또는 넷으로 나뉜다. 대부분 출처를 제시하지 않은 이런 기록들이 어떤 1차 사료에 근거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계엄령에 관한 문건을 좀더 찬찬히 살피다보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날짜의 혼동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계엄령이 선포됐었는지 조차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방대한 군 자료를 바탕으로 초창기 군의 역사를 기록한 창군에도 1948년 10월 22일 여순지구에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기록하면서도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군 기록이 꼼꼼히 정리된 육군역사일지도 마찬가지로 제주 계엄령에 관한 언급이 없다. 심지어 미군은 줄곧 제주 계엄령(martial law)에 관해 보고하다가 뒤늦게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없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2월 5일 김동성 한국 공보처장은 지난 10월 25일에 내려졌던 여순지역, 전남지방과 지리산지구에 대한 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난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됐던 제주도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는 한달 전에 해제됐지만 그 효력에 대한 공식적인 사전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정부는 38선 부근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비상사태가 선포될 거라는 어떠한 보도, 소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논평>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령은 현 한국정부에 의해 선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계엄령의 실체와 그 선포시기를 둘러싼 혼란은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아래의 대통령령 제31호를 통해 해소되었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단기 4281년 11월 17일
국무위원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李範奭)
국무위원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暎)
국무위원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국무위원 재무부장관 김도연(金度演)
국무위원 법무부장관 이 인(李 仁)
국무위원 문교부장관 안호상(安浩相)
국무위원 농림부장관 조봉암(曺奉岩)
국무위원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
국무위원 사회부장관 전진한(錢鎭漢)
국무위원 교통부장관 허 정(許 政)
국무위원 체신부장관 윤석구(尹錫龜)
국무위원 이윤영(李允榮)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전원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이 문서는 1948년 11월 17일자로 계엄을 선포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계엄 해제에 관한 문서는 ‘대통령령 제43호’로서 “제주도지구의 계엄은 단기 4281년 12월 31일로써 이를 해지한다”고 적혀 있다. 이로써 계엄 선포 날짜에 관한 기록은 비록 ‘계엄령이 아닌 비상사태’라고 한정짓기는 했지만 오직 미군 보고서만이 정확한 것으로 밝혀진 셈이다. 그렇다면 왜 계엄령의 주무 부서인 군 자료에는 계엄령에 관한 기록이 아예 없거나 ‘10월 8일’이라는 엉뚱한 날짜가 기록돼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같은 언론사에서 불과 열흘 간격을 두고 보도된 아래의 두 기사는 당시의 혼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지음 항간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였다는 말이 떠돌고 있는데, 19일 국방부 보도과에서는 전연 무근지설이라고 다음과 같이 부정하였다. △국방부 보도과 담(談)=이즈음 모든 신문을 비롯하야 항간에 떠도는 말과 같이 제주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 일은 없다. 각처에서 폭동이 일어나므로 군에서는 작전상 경계를 엄중히 한 것이 민간에 오해된 모양이다.
지난 21일 도내 전역에 계엄령이 실시되고 뒤이어 23일에는 계엄령 포고 제1호로 교통 제한, 우편 통신 신문 잡지 등 검열, 부락민 소개, 교육 기관에 대한 제한, 처소 벌채 급 도로의 수리 보전 급 폭동에 관한 벌칙 등 7종목으로 세측이 발표되었다(국방부 29일 檢閱濟).
계엄령은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관보에만 게재됐을 뿐, 이를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비밀리에 선포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편 계엄령이 선포됐다고 하지만 계엄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승만은 계엄사령관에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인 송요찬을 임명했지만 송요찬은 계엄령이 무엇인지 몰랐다. 송요찬 연대장 아래에서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정무도 “계엄령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와 관련, ‘4’기간 동안 제주 경찰로 근무했던 김호겸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계엄령은 법적 근거도 없는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랐으니까요. 하루는 홍순봉 경찰청장과 함께 있는데 송요찬이 찾아왔어요. 우리 세 명은 일제 때 만주군과 일본군에서 같이 복무했고, 해방 후에도 함께 경찰전문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요. 송요찬은 홍순봉에게 ‘위에서 계엄령을 내리라고 하는데 어떡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계엄령이라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고 구체적 지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송요찬도 답답한 노릇이었지요. 또 송요찬은 무식한 편이었습니다. 반면에 홍순봉은 일제경찰로서 만주에서 근무할 때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직책을 얻을 정도로 실력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홍순봉이 계엄령이니, 포고령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대신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산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인다는 것은 계엄령이라고 해도 안되지요. 일제 때 만주에선 그런 게 있긴 했습니다. 특정지역을 설정해 무조건 발포하는 것이지요.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제주 계엄령은 1948년 11월 17일 선포됐고, 12월 31일 해제될 때까지 한달 보름간 지속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왜 이승만은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계엄령에 대해 언론에 숨길 정도로 비밀에 부쳤는지, 또한 계엄령을 집행할 계엄사령관조차 그 내용을 몰라 허둥댔는지, 더구나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은 왜 뒤늦게 계엄령의 실체를 부인했는지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같은 의문은 최근 발굴된 한 미군 자료에 의해 풀렸다. 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은 1948년 12월 1일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계엄령(martial law)에 관한 문서를 동봉한다. 이 문서가 귀하의 모든 지휘관들에 발표되어서 그들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언제 발표될 수 있는지, 누가 발표하는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이 무엇인지 숙지하도록 할 수 있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된 지 14일만에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보내진 이 문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계엄령 선포 당시 국내에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계엄령의 구체적 내용을 한국군 수뇌부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셋째, 미군이 보내준 문서를 통해 비로소 한국군이 계엄령의 내용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이 자료만으로는 미군이 이승만에게 계엄령 선포를 직접 지시했는지, 사후에 추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미군이 보낸 계엄령에 관한 문서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계엄령에 관한 문서를 동봉해 그 시행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미군과 계엄령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계엄이 해제된 지 한참 지난 후에 미군이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으로 불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령은 현 한국정부에 의해 선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한 것은 ‘계엄법 없는 계엄령’과 자신들과의 관계에 대해 발뺌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불법성 논란
①계엄령 재판
제헌헌법 제64조(계엄선포권)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계엄이 선포된 1948년 11월 17일 당시에는 해당 법률인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계엄법은 계엄 선포일은 물론이고 해제된 지 거의 1년이나 지난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법률 제69호로 제정 공포됐다.
이 때문에 최근 계엄령이 과연 적법하게 선포된 것인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지난 1997년 제민일보는 ‘4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제목 아래 “제주4 때 제주도민 대량 학살의 법적 근거로 알려진 계엄령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제민일보는 이같은 보도의 근거로써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지구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령 제31호’를 제시하면서 △제헌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명시해 계엄선포를 법률에 위임했음에도 실제 계엄법이 제정된 1949년 11월 24일 보다 1년이나 앞서 계엄이 선포된 점을 강조했고 △제헌헌법 제99조에 ‘법률의 제정없이는 실현될 수 없는 규정은 그 법률이 시행되는 때부터 시행한다’는 규정을 들었으며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가 계엄령(martial law)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한 당시 주한미군의 기밀문서를 제시했다. 제민일보는 또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등을 역임한 김호겸의 증언을 통해 당시 제주도지구계엄사령관이던 송요찬 조차도 계엄령의 구체적인 내용을 몰랐다는 점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 4계엄령은 적법한 것이며, 양민학살이 없었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즉 △일제 하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 칙령에 따라 일본의 계엄령이 시행됐다는 점 △해방 후에는 미군정법령 제11호를 통해 폐지할 법률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는데 그 안에 계엄령은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계속 유효했다는 점 △미군정법령 제21호를 통해 해방 후 그동안 폐지된 것을 제외한 모든 법률 및 제 명령을 존속시켰으므로 계엄령 역시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헌헌법(제100조)은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고 했으므로 제헌헌법 이전의 현행법령, 즉 일제 법령 등 구법령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 등을 들어 일제 때의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즉, 제주4사건 당시 비록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때까지 계속 효력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계엄법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같은 주장 아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가 제민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계엄령 재판’은 위와 같은 논쟁 속에서 2000년 7월 20일의 1심 판결과 12월 22일의 항소심 판결에 이어 2001년 4월 27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끝날 때까지 약 1년 8개월간 진행됐다. 대법원(재판장 이규홍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계엄 선포를 전후한 시기에 군‧경 토벌대에 의한 무장대의 진압과정에서 제주도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었고, 무장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주민들이 재판절차도 없이 살상당하는 등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라며 ‘양민학살’을 인정했다.
그런데 4계엄령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계엄선포 행위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루어진 불법적인 조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후 “이 사건 계엄은 실제로 제헌헌법에 따른 계엄법이 제정되기 이전에 선포되었으며, 제헌국회에서도 여순반란사건과 관련하여 선포된 계엄의 불법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점, 일제시대에 시행되던 계엄령이 이 사건 계엄 선포시까지 유효하게 존속되고 있었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군정법령 및 제헌헌법의 각 해당조항에 대한 고도의 법률적 판단을 요하는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고, 현재도 ‘제주4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관련하여 일부 국회의원들이 이 사건 계엄의 선포를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가 이 사건 계엄의 적법성 여부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다른 의견을 균형 있게 소개하지 않고 단정적인 판단을 한 흠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편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판단을 보도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자료와 근거에 의하여 나름대로 진실 확인 작업을 거쳐 보도한 것인 이상, 피고가 전제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은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결국 대법원은 4계엄령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을 유보했다.
한편 ‘계엄령 재판’을 전후해 김순태 교수(한국방송대 법학과)와 김창록 교수(부산대 법학과) 등 법학자들이 논문을 통해 4계엄령의 불법성 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했다.
②국회에서의 논란
살펴본 바와 같이 4계엄령의 불법성에 관한 법률적 판단은 학계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런데 법학적인 문제를 떠나 과연 이승만이 일제의 계엄령을 근거로 4계엄령을 선포했느냐는 역사적인 문제가 남는다.
이는 계엄법 제정 이전과 그 이후에 선포된 계엄령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1949년 11월 24일 계엄법이 제정된 후에 선포된 계엄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엄법 제1조에 의하여 좌(左)와 여(如)히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하여 “대통령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64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만일 4계엄령이 일제 계엄령을 법적 근거로 하여 선포한 것이라면 이것 역시 ‘(일본) 계엄령 ○조에 의하여 제주지구에 계엄을 선포한다’라고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 대통령령으로 선포된 4계엄령이나 이보다 20여일 앞서 선포된 여순지구 계엄령은 모두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서 제정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을 이에 공포한다”라고 하였다. 국무회의에서 법률안을 제출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의결’하고 ‘제정’한 것이다.
4계엄령이나 여순지구 계엄령이 실제로 일제 계엄령을 법적 근거로 하여 선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국회속기록이 보다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계엄령에 대한 국회에서의 첫 논의는 여순사건으로 인해 1948년 10월 25일 최초의 계엄령이 내려진 직후인 1948년 10월 27일 조헌영(趙憲泳) 의원은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데 왜 국회에 정식보고 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튿날 이범석 국방장관은 “지방사정으로 말하면 여수, 순천지구에 대통령령으로 사건을 용이(容易)히 처리하기 위해서 계엄령을 발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처리는 군부에서 하도록 하고 군경의 지휘를 군에서 행사하도록 하였습니다”라며 계엄 선포 사실을 인정했다.
계엄령에 관한 논의는 10월 30일에 이르러 더욱 심화됐다. 국방장관을 통해 계엄 선포 사실을 확인한 의원들은 보다 본격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조헌영 의원과 김약수(金若水) 의원은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국회 승인절차를 밟지 않은 데 대해 거듭 질책했다.
조헌영 의원과 김약수 의원이 국회의 승인절차라는 ‘사무상의 문제’를 지적한데 반해, 같은 날 유성갑(柳聖甲) 의원은 계엄 선포의 법적 근거에 관한 보다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하였다. 즉 헌법 제64조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계엄법이 아직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같은 지적은 사흘 후인 11월 2일에 집중적으로 터져나왔다. 이날 최국현(崔國鉉) 의원은 “이번에 계엄령이 발포되었는데 그 계엄령은 헌법 몇 조에 의지해서 발포했는지, 만약 57조인가 67조 거기에 의지했다고 하면 그것은 일본 천황이 하는 그런 계엄령밖에 안됩니다”라고 이인(李仁) 법무장관에게 물었다. 이에 당황한 이인 법무장관은 “계엄령 선포는 대통령이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 군사령관이 발동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답변을 하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순지구 계엄령은 1948년 10월 25일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통령에 의해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 계엄령에 이인 법무장관 자신을 포함해 모든 국무위원들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더구나 이미 이범석 국방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령으로 계엄이 선포됐다고 인정한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인 법무장관은 계엄령이 ‘현지 군사령관’에 의해 선포된 것이라고 답변했다.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법무장관이기에 당황한 나머지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김병회(金秉會) 의원은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현지 군사령관의 계엄령은 위헌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김병회 의원이 헌법 64조를 거론하며 추궁하자, 이인 법무장관은 마침내 “이 점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 마는 하여튼 우리나라에는 계엄법이라는 것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습니다”며 계엄법의 부재를 분명하게 인정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현지 사령관이 계엄법에 의해 계엄령을 발동했다’고 한 앞선 발언을 스스로 번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인 법무장관은 뒤이어 또 한번의 거짓말을 하였다. 이인 장관은 “계엄령은 급박한 때에 현지 군사령관이 하는 것이며, 행정권 정지나 사법권 귀속 없이 단지 동란을 방지하는 응급조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에 의해 선포된 계엄령’이 위헌임을 인식해 그 책임을 현지 군사령관에게 떠넘기고, 계엄령의 의미를 애써 축소한 것이다.
다.중산간마을 초토화
1)초토화의 배경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창설과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등을 통해 강경작전의 준비작업을 완료한 진압군은 소개된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등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계엄령은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조차 “계엄령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할 정도로 그 성격이 모호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인 법무장관은 국회 답변을 통해 계엄령은 현지 군사령관이 발동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이번 행정령이 발동한 것이라든지 그 외에 사법권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정지되지 않는다고 엉뚱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혼란상은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현상이었다. 대통령령 제31호로 선포된 계엄령에는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지경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주둔 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는 막연한 표현 외에 그 어떤 규정도 없다. 계엄 선포 14일이 지난 후 미군이 계엄령의 내용에 관해 국방부 참모총장에게 알렸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계엄령이라는 이름 아래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그 내용조차 제대로 전달돼 지켜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명국가라면 계엄법에 80대 노인에서부터 젖먹이에 이르기까지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총살하라는 조항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일제 때 일본군이나 만주군으로 복무했던 군인들에게 중국인 학살의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1948년 9월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에 대한 군법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한 언론은 ‘박진경 연대장이 무고한 양민을 다수 학살하였다’는 피고 병사의 진술과 관련, “중일전쟁 중 왜군이 비전투원인 중국 인민에게 야만적 학살을 무수히 감행한 것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바로 그 영향이 금후 중일 관계에 어떤 역사를 전개케 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더구나 국내사건에 있어서랴”라며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강경진압작전을 주도한 송요찬 제9연대장과 함병선 제2연대장은 모두 일제 지원병 준위 출신이었다.
그러나 설령 중국에서의 학살극 경험이 있었다 할지라도, 계엄령이라는 이름 아래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재판절차도 없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동족을 총살한 것은 일선 군 지휘관이 임의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에 관해서는 국무회의록 등 정부문서에 잘 밝혀져 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국무회의록은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수집됐다.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의 발언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
제주4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였다. 이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즉각 말단 검찰조직에까지 전달돼 구체적으로 실현됐다. 즉 1월 26일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에게 공문을 보내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고, 검찰총장은 다음날인 1월 27일 각 고등검찰청 검사장, 지방검찰청 검사장, 지방검찰지청장에게, 2월 21일에는 각 검찰지청장에게까지 각각 전달됐다. 검찰총장은 이어 2월 23일에는 예하 각 검찰청에 공문을 보내 그간 좌익사건 처리에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하고 있다고 질책하면서 엄중 처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아무리 국가보안법 등을 동원하더라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설령 전시라 할지라도 재판도 없이 비무장 민간인을 무차별 총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활용했다. 비록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아 계엄령의 효력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 당시 계엄령은 군‧경‧민 모두에게 ‘군대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은 1948년 12월 8일 국회에서 “계엄령의 시행으로 급속도로 사태의 호전을 보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령은 1948년 12월 31일부로 이미 해제된 터여서 1949년에 들어서는 더 이상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계엄령 해제 사실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2월 5일 김동성 한국 공보처장은 지난 10월 25일에 내려졌던 여순지역, 전남지방과 지리산지구에 대한 비상사태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난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됐던 제주도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는 한달 전에 해제됐지만 그 효력에 대한 공식적인 사전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제주도 계엄령을 해제하면서도 그 효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는 사실은 당시 군 간부의 증언 등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1949년 제주 주둔 제2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전부일(全富一)은 “계속 계엄령 상태인 줄 알았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1949년 7월부터 제주에 주둔하기 시작한 독립대대장 김용주(金龍周)는 “그 때 나는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계엄령이 해제된 후 제주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국회의원도 “내가 돌아올 적에 계엄령이 다시 실시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계엄 아닌 계엄’이 계속 실시됐던 것이다.
한편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4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강경진압작전이 미국과의 교감 속에서 벌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소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1949년 5재선거가 무사히 치러지도록 진압작전을 전개하고 돌아온 경찰대에게 이범석 총리는 환영사에서 “여러분의 공적으로 진압된 제주도의 완전 진압은 비단 대한민국에 대한 큰 충성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방어하는데 큰 공적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사건 진압을 두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 공적’ 운운하는 것이 다소 과장되게 들리지만, 아래의 국무회의록은 이승만의 원조 요청을 고리로 한 미국의 대한정책을 보여주고 있다.
“보고사항(대통령)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 = 미 상원의원의 발언 중 반공조건부 대한원조안 주장에 대하여 감사 사함(謝緘)을 외무장관이 보냄이 좋겠다.
보고사항(공보) 시사보고의 건=미국 하원 외교위(外交委)에서 1억 5,000만불 가결이나 반공(反共)조건부임”
미‧소 냉전이 제주4사건의 참혹함을 불러왔다는 것은 당시 언론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한 언론은 참화의 제주도를 소개한 후 “외국 기자들은 이 사태를 가리켜 가장 흥미롭기나 한 듯이 ‘마샬’과 ‘모로토프’의 시험장이니, 미소 각축장이니, 38선의 축쇄판이니 하고 이곳 제주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을 붓끝으로만 이리 왈 저리 왈 한 사실도 있었다”면서 “(제주도는) 극동의 반공보루로써 새로운 시험장이 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한 언론도 제주사태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보다도 오히려 시험무대”라고 분석했다.
2)언론통제‧해안봉쇄
군은 강경작전을 벌이기에 앞서 언론을 통제하고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제주도를 고립시켰다. 이로써 제주도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무분별한 진압작전을 제어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었다.
제주 해안은 계엄 선포 한 달 전인 10월 18일부터 이미 봉쇄된 상태였다. 해군이 7척의 함정과 수병 203명을 동원해 제주해안을 차단한 것이다. 이 때부터 제주도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었다.
한편 언론과 진압당국간의 갈등은 강경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주신보 기자였던 김기오(金基五)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증언했다.
최천 감찰청장 시절인데, 하루는 경찰의 토벌지구를 취재하게 됐습니다. 난 송요찬 연대장과 G-2(미군 정보참모부)에 있던 한국인 2세 캡틴 리와 함께 현장을 찾았지요. 그런데 소위 폭도라고 해서 처형된 사람 중에 놀랍게도 장님이 있었습니다. 난 즉시 그 내용을 기사화해 신문에 실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최천 감찰청장으로부터 “어떻게 민간과 경찰을 이간시키는 허위기사를 실었느냐”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또 이북출신인 동태운 사찰주임이 “당신, 한라산 폭도와 무슨 관계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협박하며 날 유치장에 가뒀습니다. 난 항의 끝에 풀려났지만 뒷날 또 사건이 터졌습니다. 외도지서의 응원경찰이 주민을 데려갔는데 그 주민이 시체가 되어 길바닥에 버려진 것입니다. 난 그 내용을 또 기사화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구수회의를 열어 날 제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애월국교와 제주농업학교 후배인 박운봉 경사가 날 걱정한 나머지 내게 몸조심하라며 언질을 줬습니다. 난 생명에 위험을 느껴 그날로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게 1948년 7월경의 일입니다.
김기오는 급히 제주를 빠져나가 화를 면했지만, 제주도내에서 발행하는 유일한 신문인 제주신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1948년 7월 22일 제주경찰청 특별수사대는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해 지하투쟁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제주신보 기자를 검거하였다. 검거된 기자는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지만 제주신보는 기자를 비롯한 종업원들의 검거사태로 인해 한동안 신문발행을 휴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주사건에 관한 소식은 제주신보 뿐만 아니라 중앙의 여러 언론에서도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1948년 9월 15일에는 중앙의 여러 신문들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일제히 보도했다.
【제주 발 조선】열 세살 밖에 안되는 소년을 소요민의 일원이라 하여 고문치사케 한 전율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주읍 삼양리에 거주하는 진인수(13) 군은 산중 소요민으로 지목되어 지난 7일 그 동리에 있는 경찰지서로 붙들려가서 지서장 민용기(閔用基) 경사와 순경 2명에게 난타를 당하여 그 이튿날(8일) 새벽 1시경에 드디어 절명하였다 한다. 이 보고에 접한 제주검찰청에서는 검찰관을 현장에 파견하여 검시를 하게 하는 한편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고문에 협력한 두 순경을 체포하고 재빨리 도망간 지서장의 행방을 엄탐 중이다.
13살 소년이 고문치사 당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중앙일간지에 실리자 난처해진 진압당국은 더욱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경 제주읍내 언론인들이 줄줄이 군 부대로 끌려 들어갔다. 경향신문 제주지사장인 현인하(玄仁廈)는 학병출신으로 해방 후엔 경찰에도 잠시 몸담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1947년 12월경 제주에 지사를 개설해 주재기자까지 두었던 경향신문은 당시 제주에서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증언자는 “현인하는 영어를 잘하는 인테리인데다 장사수완도 좋아서 경향신문이 아주 잘 팔렸다. 경향신문 일색이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증언자는 현인하가 끌려간 이유에 대해 “헌병대가 경향신문을 조사하려 하자 현인하는 막 야단을 쳐 쫓아냈다. 헌병대는 이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사태가 험악해지자 그를 끌고가 처형했다”고 말했다. 뒤이어 서울신문 제주지사장인 이상희(李尙熹)가 끌려가 희생됐다.
무차별한 진압작전이 막 벌어지기 시작한 1948년 11월에 이르러서는 아예 사전 검열을 실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언론을 통제했다. 국방부가 11월 20일을 기해 군 작전과 군기(軍機)를 보호하고 보도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 관계 기사의 사전 검열을 천명한 것이다. 국방부는 사전 검열에 대해 언론 탄압이라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11월 22일 “보도통일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고 결코 자유로워야 할 언론을 탄압하거나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며 보도 통제 의지를 거듭 밝혔다. 실제로 이후 군 관련 기사에는 ‘검열제(檢閱濟)’ 또는 ‘검열필(檢閱畢)’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이처럼 제주해안이 봉쇄되고 언론이 통제됨으로써 제주는 글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섬이 되었다. 이로써 제주도가 얼마나 외부와 차단돼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들의 관심 밖에 있었는가 하는 점은 국회의 논의과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제주사건에 관한 국회에서의 첫 논의는 1948년 6월 11일 제주출신 오용국(吳龍國) 의원 등 6명이 ‘제주 소요사건을 긴급 선처하기 위하여 임시특별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동의안을 제출했을 때이다. 그러나 이 긴급동의안은 제안자 수효 부족이라는 이유로 상정되지 못했는데, 이 때 최국현 의원은 “시방 오(吳)의원이 말씀하신 제주도 문제 심히 중대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문제를 접수한다고 한다면 그 이상으로 경성(京城)에 지금 전기 문제, 보리공출 문제,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들어올 줄로 압니다”라며 긴급동의안 자체를 반대하기도 하였다. 서울의 전기 문제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될 만큼 제주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9월 27일에는 김웅진(金雄鎭) 의원이 나서 “38 이남에 전개되고 있는 제주도사건, 제주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다 이러해서 거기에 있는 양민까지 전부를 죄인으로 몰려고 하는 이런 음모는 대단히 장래에 우리의 치안문제가 어지러워진다고 봅니다”라며 우려를 표명한 바 있는데, 이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한 정부의 방해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곁다리로 언급한 것일 뿐 제주사건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유혈 참극이 벌어지기 시작할 무렵, 제주에 관한 국회에서의 논의를 보면 제주가 얼마나 외부와 차단돼 있으며 관심 밖에 있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10월 7일 ‘지방행정조직법’ 제1독회 자리에서 조국현(曺國鉉) 의원이 지난 1946년 8월 도(道)로 승격된 제주도(濟州道)를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환원시키자고 주장하면서 비롯된 논란은 10월 13일 제2독회 때 본격화됐다. 조국현 의원은 제2독회 때에도 “만일 제주도(濟州島)를 도(道)로 승격시킨다고 할 것 같으면 크나 적으나 또 다른 울릉도나 대마도도 전부 도(道)로 해야 될 것이올시다”라며 도 승격 반대에 앞장섰다. 이날 결국 여러 의원들의 찬반양론 끝에 불과 한 표 차이로 제주도는 도(道)의 지위를 유지하게 됐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제주사건이 유혈사태의 위기로 치달을 때 도(島)냐, 도(道)냐를 두고 격론을 벌인 이날 국회의 모습은 외부와 차단된 제주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중산간마을 방화‧소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됐다. 그동안에도 분별 없는 총살이 곳곳에서 벌어지긴 했지만 그 강도와 희생 규모 면에서, 그리고 전지역에 걸쳐 동시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11월 중순 이후’는 이전 기간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는 등 제주도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특히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성들이 희생된데 반해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총살함으로써 제주4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 때에 희생됐다.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통계를 보면, 15세 이하 전체 어린이 희생자 중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의 희생자가 76.5%를 차지한다. 또한 61세 이상 희생자 중에서는 이 기간에 76.6%가 희생됐다.
직책상 직접 진압작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9연대 군수참모로서 강경진압작전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김정무(金貞武)는 이 시기 작전에 대해 “그 때에 초토화작전이라는 말을 했는데, 싹 쓸어버린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중산간마을에) 그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산에 올라간 무장세력이 거기에서 도움을 받으니까 분리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적이라는 작전개념이었다”고 증언했다.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켰다는 말이었다. 9연대 선임하사였던 윤태준(尹太準)은 “송요찬 연대장은 초토화작전을 폈다.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라, 또는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이런 건 육지에서도 없었다. 초토화작전이 상부의 지시인지 또는 연대장 독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으로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이같은 무분별한 작전에 관해 미군사고문단은 사태가 거의 종결된 1949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에 있는 제2군 사령관 멀린스(C. L. Mullins Jr.) 소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제주도에서 반도들의 저항이 확산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경찰과 군의 무능한 지휘관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산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마을 주민들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질렀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그동안 군과 경찰 측에서 나온 자료에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총살극은 철저히 외면한 채 마치 이 시기에 무장대와 교전을 벌여 대단한 전과를 거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 다음의 자료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주도 주둔 연대장은 11월 20일부터 11월 27일까지 122명의 반란자들을 생포했고, 576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10월 1일에서 11월 20일 사이에는 1,625명을 사살하고 1,383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했다. 많은 물건들이 노획되었으나 무기는 약간의 일본식 소총이 노획되었을 뿐이다. 2개월 동안 총 60여 개의 무기가 노획되었다.
또 이 시기를 다룬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 보고서를 보면, ‘11월 13일 경비대 작전결과, 구좌면 행원리에서 무장대 115명 사살’ 또는 ‘11월 24일 제주읍 노형리 부근의 전투에서 무장대 79명 사살’ 등의 전과기록이 나오는데 진압군 희생자는 한 명도 없다.
이같은 내용은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여러차례 보도됐다. 즉 ‘11월 21일부터 이틀간 남제주군 중문면 부근 한라산록 일대를 소탕해 폭도 88명을 사살했는데 국군 측에는 아무런 손해가 없다’거나 ‘11월 14일 노형리에서 폭도 79명을 사살했는데 국군 측 손해는 없다’는 보도 등이 그것이다. 국방부의 사전 검열을 거친 언론의 보도내용의 공통점은 역시 ‘다수의 적 사살, 국군 측 피해는 전무’이다.
이처럼 매우 불균형하고, 그래서 납득하기 어려운 전과는 1948년 12월 8일 이범석 총리의 국회 보고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자리에서 이범석 총리는 1948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 간의 전과를 보고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적 유기시체’ 421명에 ‘포로’가 5,719명인데 반해 국군 측의 손해는 전사 3명에 전상 8명이다.
흔히 게릴라전에서는 진압하는 측에서 더 큰 피해를 입는 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숫자의 무장대를 사살‧체포했으면서 노획한 무기가 없고, 또한 전투가 벌어졌다면서 경비대 사망자는 거의 없고 무장대만 사살됐다는 위의 보고들은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교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주민들이 총살됐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군‧경 토벌대가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총살했으면서 희생자들을 무장대로 조작했다는 혐의는 군‧경 측이 밝힌 ‘폭도’의 숫자와 ‘전과’를 비교해 보면 자명해 진다.
△1948년 4월 현재=폭도들의 수효는 약 300명 내지 400명(경무부 공보실장)
△1948년 4월 현재=폭도의 수는 전도를 통틀어 300명 넘지 않아(김익렬 제9연대장)
△1948년 12월 현재=무장폭도 현재 50～60명에 불과(국무총리의 보고)
△1949년 1월 현재=무장폭도는 150명 내지 400명 설(내무부장관의 보고)
△1949년 3월 현재=무장폭도는 200명 가량(국무총리의 보고)
△1949년 3월 현재=무장폭도는 150～600명(내무부장관의 보고)
1948년 4월 3일 이후 토벌대의 계속되는 전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폭도’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데 대해 언론에서는 이미 “인민해방군의 (반란군) 수는 시종여일하게 500명이라고 하여 왔는데 이 수는 당국이 수차에 걸친 소탕성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의 주동부대는 500명 정도라고 하니 이 500명이라는 것은 과연 수수께끼인가?”라고 꼬집은 바 있다.
그런데 군‧경 진압대와 정부 수뇌부에서는 강경진압작전을 부인했으며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동안 사소한 내용까지 시시콜콜 기록해온 미군보고서도 강경진압작전 기간에는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아래의 미군 보고서는 강경진압작전과 관련된 몇 되지 않는 드문 기록으로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산천단-1948년 11월 19일 낮 12시 45분, 약 10명의 경비대원들이 가옥 4채를 방화했다(F-1). 오후 1시 미군은 L-5 비행기에서 그 마을에 경비대원들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때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A-2).
방화 뿐만 아니라 총살에 대한 보고서도 있다.
1949년 1월 25일 제주도 오라리. 한국군 2연대의 미군고문관이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의 시체 97구를 발견했다. 각 시체는 5～6발의 총을 맞았다. 빈 클립과 탄피로 볼 때 M-1소총이 사용됐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경찰과 군은 그 사건에 관여했음을 부인했다.
직접 살해 현장을 목격했다는 보고서도 있다.
1949년 2월 20일 도두리에서 76명의 반도들이 민보단에 의해 죽창에 찔려 죽었다. 사망자들 중에는 5명의 여인과 중학생 정도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과 군기대(한국군 헌병)가 그 작전을 감독했다.
논평: 4명의 미군사고문단원이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처형돼 있었고 38명의 처형은 우연히 목격됐다.
미군보고서에 나타난 것처럼 강경진압작전은 중산간마을에 대한 방화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하는 형태로 벌어졌다. 당초 진압군의 작전 개념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疎開)시키고, 해변마을에서는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 대해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은 국회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 적정(敵情)：국군의 맹렬한 섬멸전과 식량난 및 병기, 탄약 보급 불충분과 아울러 협력자 멸소(滅少)에 따라 무장폭도 현재 근근 50～60명에 불과하나 도민 중 다수가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것은 참 유감사임.
나. 제9연대 장병이 전 제주도내에 주요지점을 확보하며 산간부락 양민을 해안선 도시에 보갑제(保甲制)를 실시하기 위하여 이주시키며 도내 도로 양측 총림(叢林)을 벌채하여 폭도 급습에 대비하며 폭도에 대한 보급선을 완전 차단하는 동시 폭도에 대한 협력자의 철저한 처단을 단행함으로써 일로 제주재건에 매진중임.
이처럼 소개령은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주민들을 집단 이주 시킨 후 ‘보갑제’라는 연대책임식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일반 주민과 무장대를 차단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당시 9연대 선임하사였던 이기봉(李基鳳)은 “산간 벽지에 있는 사람을 전부 해안지대로 내려오라고 해 가지고 안 내려오는 사람은 전부 공비로 인정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진압군은 일부 중산간마을의 경우 소개령이 채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을 덮쳐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총살하기 시작했다. 또한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자신의 피신으로 인해 어머니와 어린 자식 등 가족과 친척 12명을 잃은 부성방(夫成邦)은 “억울하고 가슴아픈 것은 당시 우리 딸 중 제일 철든 것이 열두 살이고, 그 아래로 열 살, 여덟 살, 여섯 살난 아기들인데 이것들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죽였는가?”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작전은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 입산하게 하는 바람에 당초 ‘무장폭도는 50～60명에 불과’하다는 이범석 총리의 국회 발언이 무색할 만큼 이후 다수의 주민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초래했다. 후에 미군 고문관은 군의 무분별한 총살이 주민들을 오히려 무장대에 가담시키고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연락용 비행기가 선전 전단을 뿌리고,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무차별로 떨어뜨리고 있다.
(2) 한국군 병사들과 지역경찰의 지역주민에 대한 우월적인 태도는 불필요하게 평화스러운 시민들을 자극하여 폭도활동에 가담하게 하는 요인인 것으로 사료된다.
(3) 주한미군사고문단 요원들은 불필요하게 위험에 노출돼 있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즉 수적인 열세와 통신의 부족, 전적으로 한국군에게 안전을 의존하는 것, 그리고 열악한 환경 및 명백히 재판없는 주민 처형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자극받고 있는 여러 마을의 분위기, 아울러 적절한 훈련과 통제를 받지 않은 병사들의 시민권 침해가 그 원인이다.
토벌대는 소개령 이후 중산간마을이나 산악지역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 발각 즉시 사살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피신생활을 못이겨 ‘귀순’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강경진압작전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1948년 12월 중순께 이르러 당초의 작전개념이 변질됨으로써 더욱 큰 주민희생의 원인이 됐다. 즉 중산간마을 주민을 해변마을로 소개(疎開)시켜 무장대와의 연계를 차단함으로써 무장세력을 궤멸시킨다는 당초의 작전 방침은 ‘전과 올리기’로 변질됐다. 이에 대해 1948년 12월 17일자의 한 미군보고서는 “최근 제9연대의 진압작전이 계속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 중 하나로 “수준높은 작전을 전개하려는 욕망과 제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제9연대는 1948년 12월 말로 여순사건 진압에 공적을 세운 대전의 제2연대와 맞교대할 예정이었는데, 이에 제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여순사건 진압이라는 업적에 맞설만한 전과를 올리기 위해 욕망을 표출한 것이 진압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1948년 12월 중순경 제9연대의 ‘전과’를 보면,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한 인상을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대살(代殺)’ ‘자수사건’ ‘함정토벌’, 그리고 산중에 은신한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한 것이다.
우선 ‘대살’이란 이름 아래 총살이 자행됐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서 소개해 온 사람이든, 본래 해변마을 주민이든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을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한 것이다. 19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이 사건을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희생자 중에는 73세의 할머니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자수사건’이란 과거 자신의 죄를 자백한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이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과거 조금이라도 잘못한 사람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살려주지만 나중에 발각되면 총살을 면하지 못한다. 이미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협박했다. 자수를 권했다는 사실은 ‘관련자 명단’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지만, 겁에 질린 많은 주민들이 자수했다. 이들은 주로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에서의 활동, 1947년 경찰관의 3절 발포사건에 항의해 시위를 한 사실, 무장대가 마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을 때 이들의 요구에 따라 시위에 참여하거나 식량 등을 준 사실 등을 자수했다. 그러나 진압군은 약속과 달리 자수자들을 집단 총살했다. ‘자수사건’의 대표적 사례로는 소위 ‘박성내 사건’이 손꼽힌다. 조천면 관내에서 자수한 200명을 수용하고 있다가 1948년 12월 21일 “토벌에 따라갈 사람은 차에 타라”고 속여 150명을 제주읍 ‘박성내’라는 하천 변에서 집단 총살한 것이다.
토벌대가 전과 올리기에 급급해 무모한 진압작전을 벌인 사례로 ‘함정토벌’을 빼놓을 수가 없다. 토벌대가 무장대 복장을 하고서 민가에 들어가 협조요청에 응하는 사람들을 총살하는 것이 함정토벌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중엔 ‘곰도 무섭고 범도 무서운 세상’이라는 표현이 있다. 토벌대도 무섭고 무장대도 무섭다는 말이다. 낮에는 토벌대가 마을을 장악해 ‘폭도 혐의자’라 하여 총살하고, 토벌대가 물러간 밤에는 무장대가 들이닥쳐 ‘반동분자’라 하여 숙청하는 상황에서 일반 주민들이 무장대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토벌대는 무장대 지원자를 찾아내기 위한 방편으로써 함정을 팠다.
함정토벌은 도내 전역에서 벌어졌는데, 제주읍 도평리 주민들의 집단희생은 함정토벌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9년 1월 3일 이른 아침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은 든 한 무리가 제주읍 도평리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했고, 어떤 이는 인공기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인공기를 들고 갈중의를 입은 이 무리는 무장대가 아니라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주민들 중 일부는 그 무리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경하(梁京河)는 “빨갱이면 맞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마을 유지인 김병해(金秉海)는 외도지서 주임 김영철(金永哲)에게 욕을 하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해 주민 70명 가량이 총살당했다. 한 증언자는 “환갑이 넘은 김성규라는 분은 학교운동장에서 지목 당하는 바람에 부인, 아들, 며느리, 어린 손자 등과 함께 6명이 몰살당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무차별 진압작전을 피해 산간지역의 굴이나 숲에 은신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문에 언급됐듯이, ‘공산당 선전에 속거나 집이 다 불에 타 갈 곳이 없어 도로 올라간 자’로서 사태가 완화된 후 ‘형용이 말 아닌 남녀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한겨울 동안 이리저리 쫓겨다니면서도 끝까지 목숨을 부지했던 사람들은 사태가 완화된 후 하산해 살 수 있었지만, 강경진압작전이 한창 진행될 때는 발각당하는 즉시 총살됐다.
1992년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굴된 사건은 제주4사건 당시 은신자에 대한 무분별한 작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확인 결과 이들 유해의 주인공들은 1948년 12월 18일 제9연대의 진압작전에 의해 희생된 도피 입산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희생자들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주민들로서 그 중엔 여자 3명과 아홉 살 난 어린이도 포함돼 있어 충격을 주었다. 다랑쉬 굴 속에서는 플라스틱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 잔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철사뭉치,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유골 1구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모, 군화, 철창, 대검이 놓여 있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12월 18일 제9연대 제2대대가 제주도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작전을 전개했다. 제9연대는 이 작전에서 민간인과 경찰의 도움을 받아 남자 130명을 사살하고 5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소총 1정과 칼 40자루, 창 32개를 노획했다”고 기록했다. 9연대 잔류병력의 철수 마지막 주인 12월 21일부터 28일까지 일주일 간에는 무려 463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사살자와 노획한 무기와의 납득할 수 없는 불균형은 진압작전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전개됐는지를 보여준다.
미군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무장대에게 협조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전개된 것이라며 이렇게 기록했다.
9연대는 11연대의 ‘무대응’ 정책을 즉각적으로 무차별적인 공포통치로 대체했다. 9연대는 반란자들에 대해 상당히 성공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9연대는 이와 동시에 모든 저항을 발본색원하기 위해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의 점령기간 동안에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자행됐다. 그러한 계획은 외형상 주효한 듯 보여 1948년의 마지막 2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반도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9연대의 무차별적인 작전은 새롭게 반도 대열에 합류하는 자들을 양산해 냈다. 그래서 2연대와 9연대가 교체했던 12월에 새로운 게릴라 테러의 물결이 시작됐다”
위 미군보고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강경진압작전 기간 중 ‘반도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당초 채택한 ‘대량학살 계획’은 계획에 그치지 않고 제주도 전역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됐다. 이는 앞서 지적한, ‘다수의 적 사살에 국군 피해는 전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전과’를 낳았다. 아울러 무차별적인 작전은 주민들로 하여금 새롭게 무장대에 합류케 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한편 구좌면 세화리, 표선면 성읍리, 남원면 남원리와 위미리 등 일부 마을이 무장대로부터 큰 피해를 당했다. 당초 무장대는 경찰, 서북청년회나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그리고 군‧경에게 협조하는 우익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살해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이후 진압군의 강경작전이 벌어진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토벌대 편으로 기울었다고 판단되는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주로 군‧경 주둔지인데다 이들 마을에서 ‘도피자 가족’ 총살이 벌어지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라.진압부대 교체
1)연대교체의 의미
1948년 12월 29일 제주 주둔군이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됐다.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와 제주 주둔 제9연대가 서로 맞교대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있었던 주둔군 교체와 달리 제9연대와 제2연대의 교체는 그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즉 1948년 5월 15일부로 제9연대가 제11연대에 합편된 것은 그간 제9연대가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않은데 대한 문책으로 연대장을 교체하고 병력을 보강한 뒤 새롭게 진용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1948년 7월 15일부로 제9연대를 재편하고 곧이어 제11연대를 철수시킨 것도 한 달 전 벌어졌던 박진경 제11연대장 암살사건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면 1948년 12월 말로 제9연대를 철수시키고 제주사건 진압작전의 책임을 제2연대에게 맡긴 이유는 무엇일까.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할 때나, 다시 제9연대를 재편하면서 제11연대를 철수시킬 때에는 제주 주둔군 전체가 이동한 게 아니라 연대장이 교체되면서 병력 일부가 이동한 것일 뿐이었고, 기존 제주출신 9연대 병사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는 기존 제주 주둔군을 송두리째 대전 주둔군과 교체한 것이어서 그 배경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더구나 그간 제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은 미군도 ‘성공적’이라고 평가할만큼 무장대 활동을 무력화시켰고, 그 결과 연대 교체 직후인 1948년 12월 31일부로 계엄령이 해제되기도 했다. 따라서 단순히 제2연대에게 ‘실전 경험’을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 시점에 연대 교체가 이뤄졌는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1949년 1월 21일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제주사건을 발근색원하라’고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사태에 관한 이승만의 조급증에 대해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李應俊)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제주도 공비토벌이 시일을 끌게 되어 대통령 이 박사의 독촉을 받은 일도 있었다. 공비토벌작전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보고는 관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가 듣고 싶다는 것이다.
제9연대와 제2연대의 교체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사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할 무렵부터 이미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몇차례 탈영사건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연대장 암살까지 저지른 기존의 제주 주둔 병사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압부대 수뇌부에서는 제주출신 병사를 포함해 일부 병사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믿고 있었다. 1948년 5월 21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한 미군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관측자들은 이 연대 장병들의 많은 숫자가 중산간지역의 공격자들에 동조하고 있는 것 같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다. 단기적으로 보면 그 연대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설령 현재 그 부대 안에 공산주의자가 있을지라도 언젠가 그들은 탈영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고 남아 있는 대원들은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신뢰할 수 있는 토벌대’로서 우선 서북청년회를 지목했다. 미군 역시 무차별 강경진압작전이 막 시작된 1948년 11월 중순경부터 서북청년회 단원의 군 투입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대부분의 군 병력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충원한다는 계획이었다. 12월 중순경부터 제주 주둔군과 경찰에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투입됐다. 미군은 서청이 제주 주둔군과 경찰을 지원하는데 대해 칭찬을 하며 유도하기도 했는데, 서청에 관한 미군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서북청년회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으로 구성돼 있다. 그들은 과격한 반공주의로 주목받고 있으며 공산주의자를 발견하기만 하면 시위를 한다. 그들은 적극적인 시설방어와 정보수집 면에서 오랫동안 경찰과 경비대의 작전에 가담해 왔다.
미군과 토벌당국은 제주사건 진압작전의 주역으로 서청에 이어 제2연대를 주목했다.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는 바로 ‘여순사건’을 진압한, 실전경험이 있는 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대 교체가 완료된 것은 1948년 12월 29일이지만, 그 계획은 늦어도 12월 초순경 수립돼 있었다. 고문단의 풀러(H. E. Fuller) 중령은 12월 6일 “제주도 주둔 9연대를 본토로 이동시키고 2연대로 교체 투입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연대 교체 계획에 따라 제2연대 선발대가 12월 16일 제주도에 도착했고, 제9연대 선발대가 12월 19일 대전에 도착했다. 또한 지난 1948년 10월 19일 제주 출동을 앞둔 여수 제14연대가 총부리를 돌려 반란을 일으켰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제2연대 장병들에 대한 이른바 ‘사상검증’으로 보이는 ‘예방책’까지 실시했다. 이에 관해 미군 보고서는 “제2연대의 모든 공산주의적인 요소는 대전을 출발하기 전에 깨끗이 제거됐다”고 기록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제주 주둔군을 제9연대에서 제2연대로 교체하고, ‘과격한 반공주의자’인 서청 단원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킨 것은 제9연대보다 더욱 더 강경한 작전을 통해 조속히 사태를 끝내기 위한 조치이며, 이는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와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연대 교체 계획과 추진은 철수를 앞둔 제9연대에게 경쟁심을 촉발시킴으로써 무모한 진압작전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성공적인 작전’을 펴는 제9연대를 철수시켰다기보다는 연대 교체 계획이 제9연대로 하여금 경쟁심을 자극해 ‘성공적인 작전’을 촉진시킨 것이다. 실제로 제9연대는 선발대가 대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12월 중순경부터 이동이 완료된 12월 말까지 가장 가혹한 진압작전을 벌였다.
이 무렵 제9연대는 해변마을에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집합시켜 가족 중 젊은이가 사라진 집안 사람들을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했고, 과거 시위사실 등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한 후 자수자들을 집단 총살하는 등 마치 ‘전과(戰果) 올리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무모한 작전을 벌였다.
2)전투력 강화
제주에 파견된 제2연대장 함병선(咸炳善) 중령은 일제 지원병 준위 출신으로, 최경록 제11연대장, 송요찬 제9연대장에 이어 일본군 준위 출신이 3대 연속 제주도지구 진압군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일본군으로서 만주 지역 등지에서 중국군이나 항일 빨치산과 싸웠던 전투 경력을 인정해 제주 진압전을 맡긴 것으로 보인다. 함병선은 1948년 12월 7일부로 제2연대장에 임명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제주에 파견됐다.
군 수뇌부는 함병선 제2연대장에게 강경작전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2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힘썼다. 그 첫 번째 조치로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군‧경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뒤이어 성산포경찰서와 모슬포경찰서를 신설하는 등 경찰조직을 강화하였다. 또한 항공사령부의 비행기와 제6여단 산하 유격대대를 제주도에 파견해 제2연대장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또한 육군본부는 1949년 1월 20일부로 2연대를 기존 2여단 소속에서 해편(解編)하여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만들었다.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군‧경에 배치하려는 계획은 늦어도 1948년 11월말 경부터 비밀리에 추진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부장관과 합의하여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남한 전역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서청을 군에 6,500명, 경찰에 1,700명 가량 공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제2연대의 3개 대대 중 제3대대는 대부분 서청 단원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1948년 12월 20일 제주도에 파견된 서청 단원들은 ‘특별중대(elite company)’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다.
12월 20일, 200명의 서북청년 단원이 은밀하게 대전에 있는 경비대에 입대했다. 제주도에 새롭게 도착하여 제9연대에 배정된 그들은 곧바로 제복을 지급받았다. 그들의 입대는 서북청년 단장과 제2여단장간에 은밀히 계획된 것이다.
(논평) 이 200명의 은밀한 입대는 서북청년회로부터 ‘특별중대’를 구성하려는 제2여단의 계획이 완료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특별중대의 임무는 글자 그대로 특별한 것으로서, “서북청년 단원을 장교로 배속하기 위해, 그리고 공급과 장비에 관한 특별한 고려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 특별중대는 2여단에서 반대자를 색출하고 남침사건 때 최선봉으로 활용”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특별중대 투입은 단순한 병력 증강의 의미를 넘어,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담당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같은 서청의 권한은 실제 제주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서청 특별중대원 출신의 한 증언자에 의하면, 특별중대는 2연대 주둔기 때 새롭게 편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9연대 주둔기 때 편성돼 헌병들조차 간섭하지 못할 정도의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다만 9연대 주둔기의 특별중대가 계급장도 달지 않은 채 활동한 사병(私兵)의 성격이었다면, 2연대 주둔기 때는 비로소 정규군에 편입됐다는 차이가 있다.
서북청년 단원들은 군 뿐만 아니라 경찰에도 집중 배치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북청년 단원을 경찰로 끌어들이기 위해 단원 20명을 이끌고 온 자에게는 처음부터 경사 계급을, 50명 인솔자에겐 경위 계급을, 200명 인솔자에겐 경감 계급을 주는 혜택을 주면서 적극 유인했다. 실제로 서청의 중간 간부 출신으로 삼양지서 주임으로 근무했던 정용철은 자신의 휘하에 서청단원들을 이끌고 온 대가로 처음부터 경위로 특채됐다. 서북청년 단원들은 불과 12일간의 훈련만을 받은 채 1948년 12월 초 정규경찰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파견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경찰에 서청을 파견함과 동시에, 제주도에 경찰서를 증치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제주도에 두 곳 뿐인 경찰서를 네 곳으로 두 배나 늘린 것이다. 경찰서 증치는 1949년 1월 18일 대통령령 제50호로 발표되어 당일부터 실시돼 모슬포경찰서와 성산포경찰서가 신설됐다.
남제주군 대정면에 위치한 모슬포경찰서는 남제주군의 대정면‧안덕면과 북제주군의 한림면을 담당토록 했고, 남제주군 성산면에 위치한 성산포경찰서는 남제주군 성산면‧표선면과 북제주군 구좌면을 관할토록 하는 등 기존의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의 관할 구역을 떼어 맡겼다. 이어 2월 19일에는 경찰특별부대(사령관 김태일 경무관) 505명이 파견돼 경찰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아래의 이승만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시정일반에 관한 유시의 건(대통령) : 제주도사태는 미 해군이 기항(寄港)하여 호결과(好結果)를 냈다 하며 군 1개 대대, 경찰 1,000명을 증파하게 되었으니 조속히 완정(完征)하여 주기 바라며 여수‧순천지구 계엄령의 철폐를 요청하는 자가 다유(多有)하니 고려하여 주기 바란다.
육군본부는 또한 육군 항공사령부의 비행기 2대를 1949년 1월 24일까지 제주도에 파견해 진압작전에 협조토록 했다. 육본은 이어 유격전 전문 부대인 제6여단 산하 유격대대를 1949년 1월 31일에 제주도로 이동시켜 제2연대장 지휘 아래 진압작전을 벌이도록 조치했다.
3)집단살상 지속
당초 제2연대의 목표는 “종래의 미온‧소극 작전을 떠나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 작전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3단계로 나누어 진압작전을 전개하겠다고 표방했다. 이범석 총리는 이 3단계 작전에 대해 국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주도의 기관(機關), 장비, 토벌의 군사행동은 작전이 세 단계로 나누어 가지고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대가 교대되어서 1월 달부터는 먼저 부대를 각 지방에 평균배치해가지고 그 지방지리에 익숙하며 지방실정에 능숙하며 또 따라서 그 동안의 부락내부에 있는 출몰하는 소위 무장폭도라는 것 이것을 부락민과 이탈시키는 즉 부락에서부터 축출하는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면 제1단계의 준비기간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병력을 집결하고 한번 부락지대를 재소탕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2단계입니다. 지금 제3단계에 들어와서 2월 25일경부터 부대는 부락에서부터 구축(驅逐)당해 가지고 한라산 꼭대기로 향해서 도주하는 무장폭도를 포위하고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접전이 있었고 그 동안에 군대는 부락지대에 내려오지 않고 그냥 폭도를 한라산 꼭대기에서 노역을 하면서 구역 배후의 절대 안전을 확보해 가면서 절대 포위권을 압박하고 들어갔습니다.
제주 현지를 취재한 한 기자는 이 3단계 작전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우선 작전목표를 3단계로 나누어 금년 1월부터 1월 말일까지를 제1단계로 하여 주안점을 해안선의 방위태세와 양민의 민심수습에 치중하여 선무공작을 개시하고 제2단계에 들어가서는 2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에 양민의 불안 공포감을 덜기 위하여 동족살상전을 회피하는 의미에서 삐라살포로 반란자 귀순공작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양민 귀순자로 구성된 평화사절단을 귀순권고자로 20일간 기한부로 한라산 폭도근에 파견하였으나 그 후 소식이 묘연하게 됨에 이르러 이때껏 온건 완화작전을 취하여 오던 국군은 최후적 결의를 갖고 제3단계인 무력소탕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3월 1일부터 동월 말일까지의 일대 섬멸전이 바로 그것이다.
약간의 날짜 차이가 있지만 위의 두 자료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른바 ‘선무공작’을 제1단계 작전으로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2단계로 무장대와 주민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제3단계에 이르러 산악지역 소탕에 나선다는 작전 개념이었다.
조속한 사태해결의 임무를 띤 제2연대가 교체 후 첫 한 달간을 강경작전 보다 선무공작을 펼치겠다고 표방한 까닭은, 이범석이 발언한 바와 같이, 우선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지역 실정을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아울러 연대 교체 전에 이미 제9연대의 강경진압작전으로 사태가 거의 마무리 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2연대의 이동이 결정된 후 선발대가 제주에 도착한 날짜는 1948년 12월 17일이지만, 제2연대가 대전에서 제주도로 이동을 완료해 본격적으로 제주도지구 작전을 담당한 것은 1948년 12월 29일이었다. 그런데 이 기간은 제9연대의 진압작전이 가장 가혹하게 전개된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 비무장 민간인들이 군에 의해 무차별 집단총살됐고, 무장대는 은신상태에 들어감으로써 ‘반도 105명을 사살했으나, 국군 측의 피해는 없다’는 전과가 발표될 정도로 군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이에 따라 국방부 보도과장 이창정(李昌禎) 소령은 연대 교체 직후인 1948년 12월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 작전을 마치고 온 제9연대장의 활동을 찬양하면서 “폭도의 진압이 일단락 지었으므로 수삼일 내로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도 “지난 11월 17일 이후 실시되고 있는 제주도지구 계엄령에 관하여는 제주도 사태가 날로 평온화 되어감에 따라 이를 금년 말로 해제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었다.
이처럼 제2연대 교체 전에 이미 군 수뇌부가 ‘폭도 진압이 일단락’됐다거나, ‘사태가 날로 평온화’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무장대의 활동은 거의 무력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2연대는 ‘적의 최후의 한 명까지 섬멸을 기하는 포위 고립화 작전’을 펴기에 앞서 다소 여유를 갖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선무공작’에 나서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2연대의 작전계획은 연대 교체기를 틈탄 무장대의 공세로 인해 수정될 수밖에 없었고, 제9연대와 마찬가지로 강경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런데 제2연대의 작전은 무장대가 있는 산악지역에는 가지도 못한 채 해안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되었고, 재판도 없이 주민들을 대규모로 즉결처형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이같은 제2연대의 작전에 대해 미군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함병선 대령이 지휘하는 제2연대는 처음에 해안마을에 숙사를 정했다. 함 대령은 섬사람들의 계몽을 위한 선전 계획을 수립함과 동시에 반도들의 하산을 호소했다. 산에 은신해 있는 무장반도에 대한 공격행위의 중단은 그러한 계획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으며 이에 고무받은 유격대는 방어부대의 코 밑에 있는 해안마을까지 공격하여 식량을 구해 가기도 했다. 그러자 제2연대는 다소 공격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주로 반란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복에 한정됐으며 종종 마을 사람들을 재판의 혜택도 없이 즉석에서 대규모로 처형하기도 했다.
무장대의 공세는 연대 교체 직후인 1949년 1월 1일 제주읍 오등리에 주둔하고 있던 3대대를 기습 공격하면서부터 재개됐다. 이 사건에 대해 미 군사고문단은 “600명의 게릴라들이 1월 1일 2연대를 급습. 30명의 게릴라 사망, 10명의 포로, 경비대 사망자 없음”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군 자료는 이 날 제3대대 장병도 7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연대 앨범 뒷부분에 수록된 전사자 명단에는 이 날 고병선(高炳善) 중위(전사 후 대위로 특진)를 포함해 모두 10명의 장병이 희생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제2연대의 제주 주둔기에 전사한 장병 중에 위관급 이상은 3명 뿐인데, 그 중 고병선이 가장 높은 계급이다. 연대 교체가 이뤄지자마자 위관급 장교가 희생된 이 사건은 제2연대의 작전 계획을 전면 수정케 했다.
1월 3일에는 제주읍내 중심지에 위치한 제주도청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해 진압당국을 더욱 긴장시켰다. 이 사건은 나중에 사적인 감정에 의한 내부인의 소행으로 밝혀졌지만, 경찰은 책임 추궁이 두려웠는지 1월 5일까지도 아직 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사건 자체를 부인할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 사건은 국무회의 자리에서도 거론됐는데, 내무부장관이 “원인은 불순분자의 방화 혐의가 농후하다”고 보고했다. 미군도 “파업과 관련된 사건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이처럼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으나, 사건 직후에는 무장대의 소행으로 추정돼 강경작전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에 제2연대는 지형지물을 익히고 지방실정을 파악하면서 선무공작을 하리라던 제1단계 작전계획을 즉각 바꾸었다. 제2연대는 우선 강경작전을 벌이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나섰다. 즉 “소련 표시를 한 3천톤급 선박 2척이 1월 3일 제주도 삼양리 약 5마일 지점에서 발견됐다”면서 “이 선박은 제주도 무장대를 지원하기 위한 북(北)으로부터의 물자를 싣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련선박 출현설은 미군이 “이런 견해는 전에도 보안군에게서 제기된 바 있지만 불확실하다”고 논평할 정도로 경비대가 강경작전을 벌이기 앞서 자주 등장하는 주장이었지만, 이튿날인 1월 4일 계엄령 지속을 요청한 아래의 자료는 함병선 연대장이 제주 주둔 직후 벌어진 무장대의 공세에 대해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준다.
제주도 주둔 제2연대장은 1월 4일 제주도에 내려진 계엄령을 지속시켜 줄 것을 무선으로 경비대사령부에 요청했다. 그는 계엄령 상의 야간통행금지와 이주제한이 지속되지 않는다면 유격대 토벌이나 북한선박의 물자공급을 막는 데에 크게 불리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1월 1일에 있었던 두 차례의 폭도 집단의 기습이 제2연대장으로 하여금 이러한 요구를 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100명 정도로 추정되는 폭도들의 첫 공격은 오라리에 주둔한 그의 연대를 향한 것이었다. 폭도 20명이 사살되었으나 경비대 측에서도 대원 27명이 부상을 당했다. 같은 날 인근 지역인 도두리에도 폭도들의 기습이 있었다. 그 결과 주민 10명이 피살되었고, 수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주택 26채가 소실되고 많은 식량과 의복이 약탈되었다 (경비대 보고).
함병선 연대장의 증언 등을 토대로 쓰여진 듯 보이는 군 책자는 이 작전에 대해 “1월 4일 육‧해‧공의 연합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에 앞서 한라산에 귀순권고의 전단을 살포하여 최후 통첩을 하고 작전을 개시하였다. 해군함정은 37미리 포로 위협사격을 가하였고 공군의 L-4, L-5형의 연락기는 국산 수류탄과 폭탄을 투하하였다. 각 대대병력은 제주읍 일원과 한라산 일대를 수색하였으나 반도들의 근거지를 발견하지를 못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무장대와 조우해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신문보도나 미군자료에는 이 날의 작전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2월 4일 벌어진 육‧해‧공 합동작전과 혼동한 게 아닐까 여겨진다. 제2연대가 본격적인 진압작전에 나선 때는 1월 6일로 보인다.
지난 12월 28일 본도에 상륙한 이래 침묵을 지켜오던 국군 제2연대는 지난 1월 6일 상오 3시를 기하여 드디어 행동을 개시하고 도처에서 적의 주력을 격파하였는데 6일 상오 6시 반 명덕리(明德里, 제주읍서 약 8㎞)에 도착한 국군 ○○부대는 무장폭도 약 70명과 철창, 죽창 등을 소지한 무장폭도 약 250명으로 추산되는 적 주력이 잠복 중임을 발견하여 연대장 직접 지휘하에 지형적 악조건을 극복하며 총섬멸을 위하여 적을 완전 포위하고 점차 포위망을 압축하는 동시에 적진의 정찰 및 내부소탕을 목적으로 연대장 자신이 단신 삼엄한 적의 보초선을 뚫고 적진에 잠입하여 교묘히 폭도를 행세하고 폭도의 1인과 상면하여 폭도가 쓰는 암호를 사용하였으나 암호가 통하지 않아 결국 위기일발의 경계에서 적진을 탈출하고 돌아와 맹렬한 일대 포위섬멸 작전을 개시하여 약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드디어 적을 완전 섬멸상태에 빠지게 하고 다음과 같은 혁혁한 전과를 획득하였다. 적의 유기시체 153, M1소총 1정, 탄약 500발, 일본도 및 죽창 다수, 피복, 선전삐라 다수 압수, 국군 피해 전사 3명, 부상자 5명【현지 군 검열제】
이날의 전투는 ‘적의 유기시체 153, M1소총 1정, 탄약 500발, 일본도 및 죽창 다수, 피복, 선전삐라 다수 압수’라는 전과에 ‘국군 전사 3명, 부상자 5명’이라는 군 피해상황이 말해주듯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2연대 앨범에는 1월 6일 전사한 7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이날 전투를 시작으로 제2연대의 작전이 본격화됐다. 무장대도 아직 제2연대가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틈을 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1949년 1월의 전면전이 재개됐는데, 무장대의 일제 99식 총으로는 제2연대의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특히 1949년 1월 12일 벌어진 ‘의귀리 전투’는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약 200여 명의 폭도가 1월 12일 새벽 6시 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정, 99식총 10정, 카빈총 3정이 노획됐다.
군인 희생자는 두 명이 더 늘어 모두 4명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원읍 충혼묘지 비석을 보니, 이날 희생된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춘(文錫春), 일등중사 이범팔(李範八), 이등중사 안성혁(安星赫), 임찬수(林燦洙)’였다. 기습을 받아 4명의 희생자를 낸 제2연대의 충격도 컸겠지만, 이날 전투는 무장대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무장대원 200명이란 숫자는 여러 정황을 볼 때, 당시 무장대 세력이 거의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무장대는 이 기습공격에 전력을 쏟은 셈인데 이 중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함으로써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날 사건 이후 1월 중에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해 경찰을 공격하거나 주민들을 살해한 사건은 있었지만, 군대를 직접 공격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1949년 2월초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추가 보고에 따르면 폭도들의 활동은 여전하지만 과거와 같은 대규모의 활동은 없다”고 기록했다.
한편 무장대의 공격은 곧 민간인에 대한 진압부대의 보복 총살로 이어지는 등 악순환을 초래했다. ‘의귀리 전투’ 때에도 군 주둔지인 의귀국민학교에는 중산간을 헤매다 잡혀온 주민 8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제2연대 군인들은 사건 직후 이들을 학교 뒷밭으로 옮겨 모두 사살하였다. 이 때 희생된 80여 구의 시신은 나중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합장되었으며 현재 의귀리에 소재한 합장 묘역에는 ‘현의합장묘(顯義合葬墓)’라는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1월 17일에는 해안마을인 조천면 북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세칭 ‘북촌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아침에 세화 주둔 제2연대 3대대의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던 도중에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졌다. 그러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를 불태우고 주민 300여 명을 집단 총살한 것이다. 또한 군인들은 살아 남은 주민들 중 함덕리로 소개해 간 북촌리 주민 100여 명을 또다시 총살했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 당시 경찰로서 대대장 차량 운전수로 차출됐던 김병석은 놀랄만한 증언을 했다. 김병석은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 죽였으며, 군인 개개인에게 총살의 경험을 주기 위해 박격포 대신 총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1949년 1월 무렵 제주의 모든 해변마을들이 성으로 둘러 쌓이게 되었다. 1948년 12월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축성 작업에 대해 한 언론은 “축성에 남녀노유 할 것 없이 적극성을 띠게 되어 만리장성을 연상케 하는 장장 12만여m의 축조를 단시일에 준공하여 부락내의 자가숙청(自家肅淸), 폭도내습에 만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도민들은 만리장성을 연상할 정도로 엄청난 역사(役事)인 이 축성작업에 동원돼 큰 곤욕을 치렀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도피한 상태에서 주로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이 등 노약자들이 노역에 시달렸다.
해변의 모든 마을을 성으로 두르고 주민들에게 보초를 서게 함으로써 무장대는 더욱 고립되어 갔고, 이로써 해변마을로 소개한 주민들은 더 이상 무장대 지원혐의를 받지 않아도 되는 여건이 조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피자 가족 총살’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산간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의 희생도 여전했다. 이미 제9연대 주둔기인 1948년 11월과 12월 중에 벌어진 군‧경의 방화로 집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들 중 일부는 해변마을로 소개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마을 인근에 있는 굴이나 숲 속에 숨어 힘든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들은 제2연대의 산악지역 진압작전 때 발각돼 총살되는 사례도 많았다.
1949년 1월 25일 미군사고문단은 어린이를 포함한 남녀 97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각 시체에는 5～6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는데, 빈 클립과 탄피 등으로 볼 때 M-1소총이 사용된 것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군과 경찰 모두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고 미군사고문단은 보고했다.
2월 20일 제주읍 도두리에서 군과 경찰의 감독 아래 5명의 여인과 중학생 나이의 소년이 포함된 76명이 민보단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미군사고문단에게 목격됐다. 그런데 미군사고문단은 자신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38명은 이미 죽어 있었고, 38명의 처형에 대해서는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이 살해 현장을 방치한 채 단지 목격했을 뿐이라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이는 미군이 대규모 민간인 희생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49년 2월에 접어들면서 주민희생은 더욱 커져갔다. 특히 2월 4일 제주읍 봉개지구(봉개리‧용강리‧회천리) 주민들은 집단희생을 당했다. 육해공 합동으로 펼쳐진 대규모 작전이기 때문인지 이 날의 ‘전과’는 언론에도 크게 보도됐다.
지난 4일 상오 3시를 기하여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함병선 연대장 지휘 하에 육해공군 합동작전이 전개되어 방금 무장폭도와 치열한 격전을 하고 있다 하는 바, 그동안 제2대대 제7중대의 과감한 용사들은 소위 인민군 재판장 강태문, 암살대장 박응수 등을 비롯한 폭도 간부들을 체포하고 제3대대에서는 반란군 1등중사 고영준을 체포하는 등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판명된 전과는 다음과 같다. 사살 360명 포로 130명 기타식량 의류등 다수압수 (국방부 검열제)
무장대를 360명 사살하고 130명을 포로로 잡았다면, 이미 보름 전인 1949년 1월 중순경 내무부장관이 국회에서 보고한 무장대 숫자 ‘150명 내지 400명’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이날의 전과로 인해 무장대는 완전히 궤멸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대부분 비무장 민간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발빠르게 도망치지 못한 노약자들이었다. 군인들의 방화로 집을 잃은 채 마을 인근의 굴속이나 숲에서 겨울을 넘기던 주민들이 새벽에 급습한 군인들에게 집단희생 당한 것이었다.
봉개‧용강‧회천리 주민들은 이미 집들이 모두 불에 탄데다 이날의 사건으로 주민들이 집단희생을 당해 ‘쑥밭’이 되었다. 그런데 함병선 연대장은 사태가 거의 종료된 후 주민들이 다시 모여 마을을 재건하자 자신의 성을 따서 마을명을 새로 짓기도 하였다. 현재는 다시 제 이름을 찾았지만 한동안 이 지역은 함명리로 불렸다. 즉 함병선 연대장의 성(姓)과 작전참모 김명(金明) 대위의 이름을 조합해 마을 이름을 ‘함명리(咸明里)’라고 바꿔버린 것이다.
한편 제2연대가 육해공 합동작전을 펼쳐 무장대 360명을 사살하고 130명을 포로로 잡았다며 전과를 과시한 바로 그 날, 다른 지역에서는 총기를 운반하던 군인들이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일제 99식 총 150정을 트럭 2대에 나눠 싣고 이동하던 군이 구좌면 김녕리 부근에서 무장대의 매복 기습을 받은 것이다. 이날 군은 총기 150정을 모두 빼앗겼고 15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무장대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궤멸상태에 이르게 된 때가 언제 쯤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언론보도 등을 종합해 볼 때 제2연대가 산악소탕전에 나선 3월 중순경이 아닐까 여겨진다. 제주 시찰을 마치고 귀경한 이범석 총리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2월 15일 군은 해변가의 부락부터 수색을 시작하여 점점 한라산 쪽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데 수색 숙청된 부락은 경찰에 맡기고 부대는 한라산 서남쪽에서 폭도의 주력에 대하여 총공격하였다. 제주도의 무장폭도는 약 260명이며 그 외에 추종하는 민중은 총 한 자루에 20명씩 죽창을 들고 따르고 있다. 그간 소탕전에 의하여 폭도는 산골짜기로 도피 중에 있다”고 말했다.
한 잡지는 이 작전에 대해 ‘완전소탕의 주원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즉 무장대 주력이 남원면 산록지대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제2연대가 2월 15일 밤 현지로 가 야영을 했다가 16일 새벽 기습공격을 해 16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는 것이었다. 이 잡지는 이어 “적은 무장대의 반수 이상을 유기 시체로 둔 채 도망했으니 중경상을 면한 무장대는 기십명이나 될지, 비무장 철창대 등의 누적된 시체는 불계(不計)하니 그 전과가 기하(幾何)이며 반면에 산폭도의 피해는 치명상이었던 것이다. 이 섬멸적 타격을 받은 후로 종래와 같은 하산 습격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진압부대와 무장대간의 충돌 속에서 애꿎은 비무장 민간인들이 집단희생을 당한 데에는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탓도 크다. 제9연대와 마찬가지로 제2연대도 언론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군에 관한 일체의 보도는 정식 발표를 제외하고 모두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기에 중앙에서는 제주도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국회에서도 여순사건의 후유증만 집중 거론될 뿐이고, 제주도 사건에 관해서는 정부 측의 일방적인 발표만 계속됐다.
경찰에 의한 주민 피해도 컸다. 당시 현직 검사가 구속되는 상황은 일반 주민들의 피해 정도를 짐작케 한다. 서울지검에서 검사시보를 마치고 1949년 2월 23일부로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에 임명된 양을(梁乙) 검사가 제주도로 가기 위해 준비하던 중 상경한 제주경찰서 형사대에 2월 28일 체포돼 제주도로 압송되었다. 판사에 의해 발부된 구속영장도 없이 마치 납치하듯 끌고간 것이었다. 특히 법무부장관의 사전 승인도 없이 현직 검사를 체포한 이 사건은 사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권승렬(權承烈) 검찰총장은 급히 법무부장관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고, 서울지방검찰청장은 경찰의 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또한 대검찰청에서는 치안국과 연락하는 한편 제주도경찰청에 대해 양을 검사의 체포 해제를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김효석(金孝錫) 내무부차관은 즉각 담화를 발표, 양을 검사는 제주도 거주 당시인 1948년 10월 말경 모종의 범죄사건 관련자로 판명되어 제주지방법원 판사가 발부한 정식 구속영장을 받아 이를 집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차관은 아울러 ‘경찰이 현직 검사를 불법으로 체포했다’는 기사는 사실무근이며 이로 인해 경찰의 위신이 손상됐으므로 기사의 출처를 조사하고 있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김 차관의 말과는 달리 양을 검사가 정식으로 구속된 것은 1949년 3월 14일이었다. 제주지검에서는 양을 검사가 현지 검사인 관계로 심의하기 곤란하다며 5월 30일 사건을 광주지검으로 이송했다. 양을 검사는 미군정법령 제19호 위반, 내란음모 및 방조 혐의를 받았지만, 1949년 10월 31일 광주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무죄 구형). 이로써 양을 검사는 2월 28일 불법 체포된 이래 큰 곤욕을 치르다가 8개월만에 풀려났는데, 제주지검에서 광주지검으로 이송되기 직전인 5월 25일부로 이미 검사 직에서 의원면직된 상태였다.
경찰이 불법적으로 검사를 체포해 고문‧취조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여순사건 때 경찰이 현직검사를 즉결총살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경찰의 위세가 검찰을 능가한 것이 당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이 때문에 1949년 2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국무회의 자리에서 내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이 정면 충돌하기도 했다.
○행정상황 보고의 건(내무부장관)：경찰이 적색분자의 검거 기타 국책범죄자(國策犯罪者)를 인치검속하여 사건으로 검찰청에 송치한 즉 무죄 혹은 경한 조치를 취하여 경찰에 위신보전과 국가이익에 장해가 크므로 불평이 많으니 보조를 맞춰주기를 요청함.
○군경 규율 단속에 관한 건(법무부장관)：국군이 최근 천상천하 유아독존격으로 군 이외는 멸시하고 민간에 피해가 다심(多甚)하며 일본인 치하에는 군이 민간물자를 징발하면 보상하였으나 지금은 보상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경찰도 검사를 행방불명 처분을 하는 등(제주에서 검사가 경찰관에게 유인당한 후 4개월간 행방불명이고 검사장이 행방불명된지 수주일에 이르렀음) 놀라운 일이 발생하여 민간에 원성이 점고(漸高)하니 대통령각하께서 친히 단속을 엄명하심을 요청하다.
내무부장관이 검찰의 온건한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자, 법무부장관이 즉각 군‧경의 초법적인 횡포를 지적하면서 대통령이 단속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의 요청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오히려 경찰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승만은 이미 1월 21일 국무회의를 통해,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제주도 사건을 발근색원하라’고 지시한 바 있거니와, 내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충돌한 지 불과 10여 일 만인 2월 23일 검찰총장이 산하 각 기관에 보낸 아래의 공문은 이승만이 경찰의 강경론에 손을 들어 주었음을 보여준다.
좌익사건 처리에 관한 건：수제(首題)의 건에 관하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위시하여 국책으로 누차 언명된 바에 의하여 만유감(萬遺憾)이 없게 선처하실 것으로 사료하는 바이오나 최근의 제반정보에 의하면 지방에 따라서는 건국에 방해되는 사건의 처리가 지나치게 관대하여 도리어 후려(後慮)를 야기하는 사례가 불무(不無)한 듯 하오니 특히 국가 기초의 공고안정에 치의(致意)하시와 엄중 처단하실지며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은 그 경중을 불문하고 사건접수 즉시로 범죄사실을 상세 보고하심은 물론 처단결과 역(亦) 무루(無漏) 속보하심을 요망함.
검찰총장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지 말고 강경조치하라고 지시하는 내용이다. 이는 앞서 소개한 바 내무부장관이 소위 ‘적색분자’에 대한 처리가 미흡하다며 법무부장관을 힐난하는 바람에 서로 충돌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법무부의 태도가 크게 뒤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월 19일 응원경찰대 500여 명을 이끌고 제주에 파견됐다가 5월 18일 서울로 돌아온 김태일(金泰日) 경무관은 지난 3개월 간의 작전에 대해 “제주도에 파견된 이래 140회 이상의 작전을 통하여 폭도를 완전히 소탕하고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돌아왔다”고 귀환보고를 했다. 이 내용은 며칠 후 내무부차관에 의해 보다 구체적으로 발표됐는데, △전과는 폭도 사살 495명, 포로 1,524명이고 △아방피해는 중상 2명, 경상 3명이었다. 산악지역은 군대가 맡고 경찰은 주로 해안마을 경비에 치중했다고 하지만, 3개월 간 140여 회의 작전을 하고도 경찰 희생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과연 그 ‘작전’이 어떤 것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제2연대의 강경진압작전은 1949년 3월초까지 약 2개월 간 지속됐다. 이미 무장대는 궤멸되거나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져 하루하루 연명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중산간마을 부근에 있었다. 군‧경에게 발각되면 현장 총살되는 현실 속에서 주민들은 오도가도 못한 채 쫓겨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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