事實은 金武星 의원의 '5·16혁명 긍정론'을 지지한다!

金武星 새누리당 의원은 14일 "朴正熙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赤化통일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무능하고 부패한 우리 정치권을 뒤집어 혁명을 했다"며 "당시 소장이던 朴 전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서울 충정로 한국공인회계사회관에서 열린 '21세기분당포럼·전국포럼연합' 강연회에서 金 의원은, "우리 국민이 (박 전 대통령 집권 때) 좀 억압을 당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 경제가 북한 경제를 따라잡아서 오늘날 (북한을 추월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에 민주당은 이윤석·박광온 대변인을 통해 "국민 대중과 동떨어진 역사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게 유감스럽다"며 "역사를 배운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끄러운 언동"이라고 말했고 金泳三 전 대통령의 아들도 비난에 가세하였다(김무성 의원은 김영삼 직계였다).

민주당의 '국민 대중과 동떨어진 역사 인식'이란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

*서진규 씨가 1990년대에 하버드 대학 석사논문으로 쓴 5·16에 대한 한국인의 평가엔 이런 자료가 나온다. 40세 이상의 어른들 467명을 상대로 「1961년에 5·16이 났을 때 지지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하고 물었다. 응답자의 46%가 「지지했다」고 응답했고 19%는 「반대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찬반 의견을 표시한 사람들 중 약 70%가 「혁명을 지지했다」는 뜻이다. 서진규 씨는 연령층을 확대하여 808명을 상대로 「5·16 혁명의 한국 발전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응답자의 62%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 5·16혁명은 필요했다」고 답했고 17%는 「방해가 되었다」고 했으며 21%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답했다. 「박정희의 독재적 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69%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했고 11%는 「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했으며 20%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군사혁명 당일인 1961년 5월16일 미군 방첩대는 거리로 나온 한국인을 대상으로 면접 여론조사를 하였다. 10명에 네 명은 '혁명 찬성', 두 명은 '찬성이지만 너무 일렀다', 네 명은 '반대'였다고 한다. 약 60%가 찬성하였다는 이 통계는 서진규의 上記(상기) 조사와도 일치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으로 장면 정부를 뒤엎은 데 대하여 한번도 변명한 적이 없다. 죽을 때까지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다. 죄책감이나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다는 識者(식자)들의 분석은 말장난이다.

*일부 학자들은 朴正熙가 경제개발에 힘을 쏟은 것은 5·16 군사쿠데타가 憲政(헌정)질서를 짓밟았다는 죄책감이 있어 그걸 만회하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5·16군사혁명이 4·19 학생혁명 정신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생각을 들여다 본다.

朴正熙는 1963년에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000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朴正熙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合憲(합헌)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朴正熙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不遠(불원)한 장래에 亡國(망국)의 非運(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虛名(허명)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內敵(내적)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관 지명자들이 국회 인사청문회장에 나가면 야당 의원들은 "5·16을 어떻게 보나",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라고 묻는다. 정답은 "법률적으론 쿠데타이고, 역사적으론 혁명이며, 나의 가치 판단은 긍정적이다(또는 부정적이다)"일 것이다.
5·16 당시 한국 지식인들의 여론을 선도하던 월간지 <思想界(사상계)>의 1961년 6월호 권두언은 발행인 張俊河(장준하)가 쓴 글이다. 그는 5·16의 성격을 박정희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定義(정의)하였다.

<4·19 혁명(革命)이 입헌정치(立憲政治)와 자유(自由)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民主主義革命)이었다면, 5.16 혁명(革命)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張 사장은 4·19와 5·16을 대치시키지 않고 통합하려는 論旨(논지)를 유지한다.
<혁명공약(革命公約)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무능(無能)하고 고식적(姑息的)인 집권당(執權黨)과 정부(政府)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革命)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수행한다는 점(點)에서 우리는 5·16 혁명(革命)의 적극적 의의(意義)를 구(求)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는 5·16 혁명(革命)은 4·19 혁명(革命)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繼承), 연장(延長)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준하는 나중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바뀌지만, 5·16 군사혁명 당시엔 불가피성과 당위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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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10월 28일 사뮤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아래 電文은 군사혁명정부에 대한 극찬이다. 그는 5.16 군사혁명이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면서 장교들의 의욕을 평가했다. 버거 대사는 부임 전엔 박정희 군사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사람이었으나 가까이서 지켜본 주체세력 군인들의 개혁의지에 감동한 듯하다. 5.16은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한 사람들이 근대화 혁명을 성공시킨 경우이므로 편의에 따라 쿠데타 혹은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쿠데타가 꼭 혁명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혁명이 꼭 쿠데타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필자의 박정희 전기 중에서 인용한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 다섯 달이 되었다. 이 정권은 권위적이고 군사적인 면에서 대외적인 인상이 다소 나쁜 면이 있긴 하지만 정열적이고 성실하며 상상력과 의지력으로 꽉 차 있다. 이 정권은 일반 국민들로부터는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대중적 지지 기반도 없지만 진정한 의미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시작하여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 前 정부하에서 토의되었거나 구상되었던 개혁 프로젝트들 은행·신용정책,무역, 실업자들을 위한 공공 공사의 확충, 탈세대책, 농업과 노조 대책, 교육 및 행정부문, 복지(교도소의 개혁, 윤락녀 재활대책, 가족계획사업, 상이군경과 유자녀 지원)등이 실천되고 있다. 많은 개혁은 긍정적이고 상당수는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들이다.

몇몇 개혁들은 뜻은 좋았지만 너무 급히 서두는 바람에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혁명정부는 그런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매점매석행위, 뇌물, 정경유착, 밀수, 군사물자 횡류, 깡패, 경찰 과 기자들의 공갈 행위에 대한 군사정부의 단속은 이미 효과를 내고 있 다.공산당의 침투공작에 대한 사찰활동과 반공선전의 질과 양이 모두 증가했다. 군인출신 장관들은 행정을 유능하고 효율적으로 지휘함으로써 우리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다. 과로로 인하여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아 문제이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근 한 달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장 유능한 장관중의 한 사람인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내각회의중 쓰러졌다가 2주간의 휴식을 끝내고 현업에 복귀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두 달간 휴식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박정희 의장도 과로로 인해 피로한 상태이다. 유능한 장관들의 효율성은 그러나 최고회의와 내각 사이에 기능과 책임의 분명한 구분이 잘 안되어 있어 다소 약화되고 있다. 몇몇 최고회의 위원들은 내각의 결정을 뒤집고 간섭하며 군인출신 장관들 가운데는 내각수반을 젖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최고회의의 기능을 입법활동에 한정시키고 내각이 행정을 전담하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쿠데타에 처음부터 가담한 사람이 아닌데다가 이승만 정권 때의 경력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명령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의 태도는 방관자적 이다. 이런 태도는 비관적인 태도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국사람들이, 특히 지배층이 장기간에 걸쳐서 유능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뿌리깊은 자신감의 결여 때문이다. 이 혁명이 어느 길로 갈 지를 예측하기는 너무 이르다. 박정희 의장에게 많은 것들이 달려 있다. 그는 가장 냉정하고 믿음직하며 안정되어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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