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는 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서구적 민주주의를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전(前)근대의 산업화 전기(前期)」라고 보았다. 박정희의 <봉건 對 근대화> 시각에 대해서 야당세력은 한국사회가 당면한 당시의 역사적 과제를 <민주 對 反民主> 구도로 해석했다. 혁명에는 혁명의 논리가 있고 그것은 혁명적 역사관에 기초한다. 1961년의 한국을 봉건사회, 당시의 집권세력인 민주당을 「민주주의라는 껍데기를 쓴 봉건적 잔재」라고 해석했다는 데 박정희의 혁명성이 있다. 그는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4·19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라고 썼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유당을 反민주, 민주당을 민주로 보았는데 박정희는 두 黨이 똑같이 내건 민주주의를 가면으로 규정하고 그 뒤에 있는 부패와 무능을 봉건적인 것, 전근대적(前近代的)인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다리가 안무너지고 있는 것은 교각(橋脚)때문이란 피상적 시각을 무시하고 「다리가 안무너지는 것은 구조물의 역학공식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보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접근법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불가피성을 부인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 민족성과 사회 발전단계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을 꿈꾸었고 야당은 서구식 민주주의 이외의 대안(代案)을 거부했다. 민주주의의 주체적 수용과 무조건적 수용이 대치하는 가운데 박정희 근대화의 산물(産物)인 중산층은 한국적 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또 권력의 남용과 권력의 비호에 익숙해진 기회주의적 정치세력밖에 남기지 못해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어나갈 기수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박정희의 실용적 정신은 명분, 허례, 과시, 미신을 배격하는 실리(實利)·근검(勤儉)·소박(素朴)한 자세로서 나타났다. 1960년대에 활약했던 혁명가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자력갱생, 수입代替 정책으로 나아갔다. 나세르, 카스트로, 김일성, 네윈이 대표적이다. 이런 정책은 대중을 선동하고 끌고가는 데 있어서는 퍽 유리하다. 박정희는 인기가 별로 없는 對外개방적 수출立國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그는 매판자본의 비호자니 매국노니 하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민족주의란 명분을 버린 데 대한 응징이었다.
1970년대 공고(工高)를 정부에서 육성하고 있을 때 工高교사들이 대기업체로 뽑혀가는 일이 잦아 당시 문교부에서 규제방안을 올렸다. 박정희는 화를 내면서 『돈 많이 준다는 데로 가는 게 당연하지 왜 그걸 막느냐』고 했다. 기생관광을 단속해야 한다는 건의에 대해서도 『그 사람들도 돈을 벌면 그 짓이 창피해져서 하라고 해도 안할 거야』라고 말했다. 이 두 마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박정희의 사고방식은 시장원리에 대한 신념,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직시(直視), 그리고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생긴다」는 경제 중심적인 체계를 갖고 있다.
박정희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중앙청으로 계속 쓰고 낡아서 삐걱대는 총독관저를 집무실로 쓴 것도 「누가 지었건 건물은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건물에 무슨 죄가 있나」라는 실용적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명분론적으로 보면 「日帝가 만든 건물을 때려부수면 민족정기가 살아난다」는 非과학적 처방이 나온다. 민족정기란 막연한 관념이 1조원(새 박물관 신축경비 등)이나 되는 實利를 무시하게 된다. 확실하게 보병 1개 사단을 만들 수 있는 경비와 불확실한 민족정기 회복,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교양 문제이다. 실용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은 그 정신이 갖고 있는 정직성과 과학성 때문이고 명분론이 열등한 것은 여기에 내재(內在)된 허위와 事大, 그리고 미신성 때문이다.
"돈 많이 준다는 데로 가는 게 당연하지 왜 그걸 막나"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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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5, 2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