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와 서독 녹색당

서독의 녹색당에 파고든 동독 간첩들 - 한국 환경운동단체는?






서독 평화·환경운동권에 침투한 동독 국가안전보위부의 정치공작사업을 중심으로 하여

후버투스 크나베(Hubertus Knabe)/오길남 독일전문가 편역

1 머리말

이하 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의 서독 녹색당에 대한 정치공작사업을 주제로 하여 상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다음 두 가지 점을 먼저 밝혀두기로 한다. 첫 번째는 국가안전보위부의 對서방 사업에 있어서 녹색당의 位相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국가안전보위부의 녹색당에 대한 정치공작사업에 관한 자료를 求得하는데 부딪힌 갖가지 어려움에 관한 것이다. 녹색당을 例로 하여 국가안전보위부의 對서방 사업에 관해 기술한다고 하여 서독의 정치세력 가운데 유독 녹색당에 대해서만 동독 슈타지의 침투작전이 용이했으리라고 연상을 하거나 선입견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오히려 녹색당이야말로 80년대에 동독의 반체제 저항세력과 부단한 관계를 - 부분적으로 밀접한 정치 관계와 친분 관계를 - 유지한 서독의 유일 정당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1)

무엇보담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는 - 특히 對서방 스파이활동을 담당한 정찰총국은 - 대서방사업과 관련하여 서독의 정당들 가운데 1980년에 비로소 창립된 짧은 연륜의 녹색당을 첩보활동 차원에서도 정치공작 차원에서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서독의 젊은 근본주의적 저항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결집된 녹색당을 - 기독교민주동맹/기독교사회동맹(CDU/CSU), 독일사회민주당(SPD), 자유민주당(FDP) 등과 같은 서독의 주요 정당과는 달리 -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녹색당이 서독의 정치에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 특히 정찰총국은 - 對서방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연방의희에 의석을 확보한 CDU/CSU, SPD와 FDP 등의 주요 정당에 중점을 두었다. 왜냐하면 이들 주요 정당들은 정부의 시책이나 정치적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국가안전보위부는 - 특히 정찰총국은 - 여러 가지 이유로 SPD에 가장 주목했다. 이 자리에서 그 이유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2)

국가안전보위부는 그러나 서독의 주요 정당들 외에도 녹색당에 대해서도 스파이활동 및 정치공작사업을 벌였다. 국가안전보위부의 녹색당에 대한 첩보활동 및 정치공작사업에 대한 학문적 정리 작업은 오늘날까지 단편적으로만 이뤄졌다. 그 이유는 “1989/90 동독에서의 정치적 대전환(민주혁명)” 때 정찰총국은 여태까지 기록, 관리해 뒀던 서방 활동 비정규요원(West-IM)과 공작대상에 관한 관계서류철을 몽땅 抹消, 消却處分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찰총국의 인포메이션 전자처리시스템(지라)3)의 部分데이터뱅크에 국가안전보위부의 對녹색당 첩보활동 및 정치공작사업에 관한 갖가지 인포메이션들이 저장돼 있었다.

그밖에 국가보위부의 防諜․反探 부서들이 남겨놓은 기록문서도 있었다. 이들 부서들은 對內査察 차원에서나 治安 차원에서 서독 녹색당을 취급해 녹색당 관련 기록 문서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들 기록 문서를 열람, 조사해 본 결과 국가안전보위부 防諜․反探 부서들은 정찰총국으로부터 공작지도를 받았던 서방 활동 비정규요원(공작원)을 동독의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防諜․反探 부서들은 정찰총국의 첩보활동 부서 소속으로 등재된 비정규요원에 의한 對녹색당 스파이활동 및 정치공작사업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정찰총국으로부터 전혀 제공 받지 못해 잘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정찰총국의 중앙인사기록카드에 대한 접근이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이 중앙인사기록카드에 대한 열람 자체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국가안전보위부가 解體된지 오래 됐지만 서독의 어떤 政治人이 동독 스파이 활동 기구에 소속돼 스파이활동 및 정치공작사업을 전개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점은 아주 불만스럽다. 여태까지 슈타지 文書 法 規定4)을 위반한 법 운용방식을 바꿔보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은 舊 서독 정치인들이 동독 국가안전보위부를 위한 간첩행위에 [즉 스파이활동 및 정치공작에] 연루된 사실을 규명하여 사법처리 하는 것을 봉쇄, 차단하고 있는 處事에 대해 전적으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1993년 독일연방공화국 국가안보기관은 美CIA가 1990년에 입수한 정찰총국의 문서(로젠홀츠 문서)5)에 대한 複寫作業을 완료, 90년대 중반부터 로젠홀츠 문서 複寫本을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同 관리위원회는 그 동안 로젠홀츠 문서 복사본 대부분을 電子處理하여 비공개로 관리하고 있다. 그래서 舊 서독의 어떤 정치인이 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의 對서방 사업(간첩행위)에 連累돼 있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차단돼 있다. 연구 목적의 열람도 지금도 옛날처럼 여전히 嚴禁돼 있는 실정이다.

前 정찰총국 首長 마르쿠스 볼프 上將의 抗訴狀에 의하면 국가안전보위부는 舊 서독 독일연방군 게어트 바스치안6) 퇴역장군이 주도했던 “平和鄕軍會 將星들”이란7) 서독 시민운동단체에 매년 100, 000 DM을 지원했다고 한다.8) 게어트 바스치안 퇴역 장성처럼 이미 故人이 된 유명 정치인이 과연 정찰총국의 인물기록카드에 등재돼 있는지, 만약 등재돼 있다면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 그 방식을 지금도 확인할 길이 - 로젠홀츠 문서에 대한 接近 및 閱覽이 禁止돼 있기 때문에 - 막혀 있다. 로젠홀츠 문서를 대조조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신청이 학계로부터 쇄도했으나 이에 대해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 側은 슈타지 文書 法을 근거로 하여 여태까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간단히 규명, 해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를 이렇게 처리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그 결과 한때 녹색당의 정치적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故 게어트 바스치안 將軍은 계속해서 갖가지 뜬소문의 震源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네딕트 마리아 뮐더9) 기자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紙 기고기사에서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10)라는 평화운동 및 환경운동 단체의 구성원들 가운데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비정규요원이 여러 명 있다고 지적했다.11) 이는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에 의한 슈타지 文書 法의 적용방식이 얼마나 不充分한가를 證左해주고 있다. 90년대에 刑事訴追機關은 - 로젠홀츠 文書에 의거해 - 同 기사에서 거명된 바 있는 前 녹색당(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 고위간부 1명에 대해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비정규요원으로 스파이활동(간첩행위)을 한 容疑가 있다고 하여 수사에 착수했으나 1995년 물증 부족으로 수사를 중지했다. 바로 이 시점에도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 측이 형사소추기관에 로젠홀츠 文書에 대한 열람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야 정찰총국 지라 - 部分데이터뱅크 12의 判讀이 가능하게 됐다.

그리하여 1999년부터 베네딕트 마리아 뮐더 기자의 기사에 제공된 시사점을 토대로 하여 조사해 볼 수 있었다. 前 녹색당(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고위간부가「헤르츠베르크」란 코드명의 정찰총국 소속 비정규요원으로 공작원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정찰총국의 인물기록카드와 연방슈타지문서관리위원회의 내부문서에서 속속 들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前 녹색당 고위간부는 뮐더 기자의 기고기사가 나온 후 不作爲訴를 관철할 수 있었다. 이 不作爲訴에 의하면 자기를「헤르츠베르크」라는 코드명의 비정규요원과 동일 인물로 보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뮐더 기자에 물증자료에 대한 접근 및 열람 기회가 거부됐다. 때문에 뮐더 기자는 재판부에 물증을 제시할 수 없었다. 분통이 치미는 이런 奇妙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 활동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비정규요원들의 정체가 모두 밝혀졌다.” 라는 소리가 膾炙되고 있다. 이 사실은 연방검찰총장(Generalbundesanwalt beim BGH)에게나 연방헌법수호청(BfV)에게는 理解하기가 곤란한 것이었다.


2 동독 국가안전보위부가 서독 녹색당을 중시하게 된 이유

동독 국가안전보위부가 일찍부터 서독 녹색당을 취급해 왔었다는 사실은 국가안전보위부 보관 문서에 기록돼 있다. 녹색당이 창립되기 전에 벌써 국가안전보위부는 西베를린 거주 주민들을 비정규요원(공작원)으로 포섭해 두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녹색당 창당 멤버로 적극 활동했다. 이들 몇몇 녹색당 간부들은 창립 과정 중에 있던 녹색당의 내부사정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東베를린 국가안전보위부에 꼬박꼬박 제공했었다. 초창기의 녹색당이란 존재는 서독 측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 국가안전보위부는 녹색당에 대한 첩보(스파이)활동과 정치공작 사업을 전개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첫째 국가안전보위부는 서독(독일연방공화국)에 있는 모든 정치조직의 내부사정과 발전추이를 탐찰하고 인포메이션을 수집한다는 一般原則에 따라 녹색당에 주목하였다;

- 둘째 국가안전보위부는 녹색당 중 대체로 좌익급진주의 성향의 각이한 선구자 그룹에 침투해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좌익급진주의자들을 동독 공산당 유일 통치체제에 위험을 야기하는 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좌익급진주의자들에게서 이데올로기적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 가운데 정보원으로 활용할 만한 자들을 쉽게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셋째 국가안전보위부는 녹색당을 평화운동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 1983년부터는 평화운동을 위한 議會 차원의 肢體로 - 보고,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80년대 초 국가안전보위부는 미국의 핵탄두 적재 중거리 미사일(Pershing II)의 西유럽 배치를 반대하는 西베를린과 서독(연방지역)의 평화운동 단체에 대한 지원을 대서방사업(Westarbeit)의 主된 임무로 보았다;12)

- 넷째 서독 녹색당은 처음에는 동독의 자생적인 평화운동단체와, 후에는 동독의 환경보호 운동권과 접촉,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동독 내 자생적 평화운동 단체나 환경보호 운동권은 동독체제에 적대적인 반체제조직이다 라는 부정적 평가를 했고 특별 감시대상으로 분류해 두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동독의 자생적인 평화 및 환경보호 운동권이 서독 녹색당과 취한 연락관계를 집요하게 탐찰했고 그 연락관계를 막아보려고 시도했다;

- 다섯째 서독 녹색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한 후 녹색당의 위상은 서독의 정계 및 의회 판도에서 높아졌다. 따라서 국가안전보위부의 對녹색당 첩보활동과 정치공작 사업도 중대한 의의를 갖게 됐다. 특히 녹색당이 SPD와 동맹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1982년 姉妹政黨 CDU/CSU를 일방으로 하고 FDP를 타방으로 하여 수립된 연립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옵션이 될 수 있었다. 이 옵션은 CDU/CSU와 FDP에 의한 聯政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동독 공산당과 국가안전보위부에게는 큰 관심사였다.

국가안전보위부가 녹색당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은 특히 “비밀정보활동 사업의 중심적인 계획목표와 유사한 목적설정”에서 확연히 들어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첩보활동(스파이활동)이란 기능적인 고유사업 차원에서도, 동독 공산당의 정치적 관심사 문제를 해결하고 아울러 동독 공산당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한다는 정치공작 차원에서도 對녹색당 정치공작사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들어나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첩보(스파이)활동 차원에만 머물지 않은 對녹색당 정치공작사업을 -동독 공산당과 일종의 동맹관계에 있는 서독의 평화운동 참여 시민단체들과 유관 인사들에 대한 지도 및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 벌였다. 국가안전보위부는 “平和鄕軍會 將星들”과 “본(Bonn) 平和調節委員會”와13) 같은 서독의 평화운동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정치공작사업을 벌였다. 첩보(스파이)활동 차원의 사업을 했는지, 정치공작 차원의 사업을 했는지 그 사이의 경계가 애매모호해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兩 차원의 사업은 상호보완관계에 있었고 일방이 타방을, 타방이 일방을, 보강·보완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983년 1월 정찰총국 黨組織 會議 時 마르쿠스 볼프 上將은 서독 녹색당이 연방의회에 진출하기 전에 벌써 국가안전보위부가 녹색당의 내부 사정을 偵探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했다: “정찰총국은 1983년 3월 녹색당이 일약 연방의회에 진출하게 될 경우 서독에서 새로 형성될 정치세력의 판도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14)

에리히 밀케도 “1986년도 국가안전보위부 중앙 계획목표 하달”에서 무엇보담 서독 녹색당의 의사형성과정을 탐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15) 국가안전보위부 요원 두 사람은 - 그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박사학위 취득 논문(1989년)에서 - 서독 녹색당이 제시한 프로그램과 실천 정책에서 “철저한 정치적 타산과 투철한 사명감에 기초한 공작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당과 국가 지도부의 정책 실현을 最適 지원하고 이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는” 실제적 근거를 모색하고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 작성자들은 “테마와 관련해 당과 국가 지도부가 제시한 정책의 실현을 위해 서독의 사회세력을 동원하고 동시에 - 국제주의적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서 - 階級鬪爭16)의 주력부대에 원조를 제공하여 이들이 社會 戰略的이고 同盟 政治的 지향을 실현하도록 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다.17) 정찰총국의 임무는 마르쿠스 볼프 上將이 제시한 1989년도 계획방향18)에 의하면 서독 녹색 운동권(평화·환경운동권)에서 진행되고 있는 분화과정을 계속 정탐하고 녹색 운동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함으로써 녹색운동권 내의 親동독 현실주의 세력을 보강하고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전복음모 분자들을 녹색 운동권으로부터 축출하는데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서독 녹색당에 관심을 돌리고 주목했다는 사실은 녹색당에 관한 偵察總局 第7課(VII)의 각종 보고서와 녹색당에 관해 인포메이션을 수집하라는 同 부서에 하달된 지령을 열람해 보면 내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 국가안전보위부는 무엇보담도 중요한 정치적 기본문제를 둘러싼 서독 녹색당 내부 토론과 녹색당이 주요 계파로 분화되는 과정에 대해 관심을 쏟았다. 녹색당에 대한 올바른 상황판단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위부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했다:

- 오토 쉴리를 중심으로 한 녹색당 계파가 SPD와 연립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데 과연 이들이 이 연정구상을 관철시킬 수 있을까? -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의 독일정책(對동독 정책) 대변인 직을 잠시 맡았던 헤닝 쉬어홀츠를19)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적인 親동독 녹색당 간부들이 얼마나 큰 勢를 형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국가안전보위부는 동독의 反體制 抵抗勢力을 지원하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녹색당 내 반공세력의 활동 계획”에 대한 인포메이션을 得해야만 했다. 이밖에 국가안전보위부는 에버하르트 부엡, 악셀 포겔, 우쉬 아이트, 하인츠 주어 등20) 그 당시 녹색당의 주요 정치인들에 대한 인물 평가 작업을 요청받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러한 인물 평가 작업을 통해 녹색당의 중진인사 또는 주도적인 인물에 관한 지식정보를 확대하는 방향과 방도를 모색했다.21)


3 국가안전보위부의 對녹색당 정치공작사업

국가안전보위부 本部 第2室(HA II)은 서독 녹색당을 대상으로 하여, 국가안전보위부 베를린 支部 第15課(XV)는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를 대상으로 하여 對녹색당 공작사업을 전개했다. 그밖에 국가안전보위부 對테러 담당 本部 第22室(HA XXII)을 위시하여 西베를린 상주 활동 국가안전보위부 本部 第20室 5課(HA XX/5)뿐만 아니라 通話統制, 郵便物 監視, 無線監聽, 東西往來와 探察 등을 담당하는 부서들도 국가안전보위부의 對녹색당 공작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국가안전보위부 本部 第3室(HA III)은 서독 녹색당 정치인들의 통화 내용을 체계적으로 도청하여, 서독 녹색당의 내부사정과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내부사정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수집했다. 그러므로 녹색당에 침투하여 녹색당 내부에서 암약한 비정규요원의 수를 녹색당 내부에서 暗躍한 총 5명의 공작원에 - 즉 偵察總局 第2課 6係(II/6) 소속 오-크벨렌 (O-Quellen: 대상기관 내부 암약 공작원)에 -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국가안전보위부의 대부분의 사업 분야에서와 같이, 여러 가지 발표논문에 의하면 정찰총국 第2課 6係(II/6)가 총 5명의 녹색당 내부 暗躍 공작원에 대해 공작지도를 했다고 하면서 이들 5명의 공작원을 거명하고 있지만,22) 지라 부분데이터뱅크 12에 등재된 비정규요원의 제보에 대한 1987년까지의 분석평가에 따르면 녹색당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제공한 총 364명의 비정규요원 외에 防諜 및 反探 활동에 투입됐던 비정규요원(이들의 보고는 대체로 입력되지 않았음)이 더 있었다. 이들 비정규요원의 제보 건수를 보면 어느 한 사람의 비정규요원의 제보 건수는 단 하나뿐이 경우가 있었고 다른 어느 한 비정규요원의 제보 건수는 150件이나 되는 경우가 있었다. 43명의 비정규요원은 녹색당에 관해 10件 이상의 보고서를 제출했다.23)

녹색당에 관해 제보를 한 공작원들은 여태까지 극히 일부분만 그 정체가 밝혀졌다. 몇몇 공작원의 경우에는 그 정체를 다른 국가안전보위부 보관문서를 통해 또는 수사를 통해 다소 훌륭하게 밝혀낼 수 있다. 정찰총국의 인물기록카드에 대해서는 슈타지 文書 法 때문에 검토나 대조조사는 물론 열람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비정규요원 網에 대해서 오늘날까지 체계적 서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녹색당 당원뿐만 아니라 前 SPD 본(Bonn) 市黨 위원장 루돌프 매르커 기자와 같은 局外者도 국가안전보위부에 녹색당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정기적으로 제공했었다. SPD Bonn 市黨 委員長 로돌프 메르커는「마르크스」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이었다. 녹색당에 관한 루돌프 메르커의 총 제보 건수는 114건이나 됐다. 루돌프 메르커는 東베를린의 국가안전보위부에 방대한 量의 첩보를 제공했다. 녹색당에 관한 제보 건수는 그의 방대한 총 제보 건수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24)「파울」이란 코드명의 녹색당 저널리스트는25) 東베를린 국가안전보위부에 녹색당에 관해 60건이나 제보했다.

녹색당 내부에서 암약한 공작원들은 다음과 같다:

- 1988년 말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와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간부로 등재된 「차이츠」란 코드명의 공작원은 국가안전보위부에 녹색당에 관해 총 292件을 제보했고,26)
- 前 유럽의회 녹색당 의원단 전문위원 클라우스 크롸쌍27)은「탈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공작원)으로서 61件을,
-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헤르츠베르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28)은 27件을,
- 毛澤東 思想 路線을 追從했던「스푸트니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29)은 313件을,
-「도첸트」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으로 암약한 녹색당 소속 헤센 州 의원은 42件을 제보했고
- 그밖에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전문위원 도리스 펌프리와 조지 펌프리30)는 1983年 이후 각각 정찰총국 第2課 6係(II/6) 소속 다그마와 파버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31)으로서 암약했고,
- 前 연방의원 디어크 슈나이더32)는 국가안전보위부 베를린 支部 第15課(XV) 소속으로 등재돼 있었고「루트비히」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으로 녹색당에 관해 330件을 제보했으며,33)
- 국가안전보위부 本部 第22室(HA XXII)과 정찰총국 第2課 6係(HVA II/6) 소속으로 등재돼 있던 前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34)는「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비정규 요원으로 暗躍하면서 녹색당에 관해 86件 제보했다.35)

녹색당 내부에서 暗躍한 비정규요원들 가운데 그 정체를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자들이 있다. 정찰총국의 지라-데이터뱅크를 검토, 분석평가를 하여 이들의 첩보활동에 대한 斷面圖만은 그려볼 수 있다. 이들이 언제 공작원으로 포섭됐고 언제부터 적극적으로 첩보(스파이)활동을 전개했는지 그리고 어떤 첩보를 제공했는지, 어떤 분야에 중점 투입됐는지를 대충 알아 볼 수 있도록. 이들 비정규요원의 實名은 알아낼 수 없으므로 해당 비정규요원들이 녹색당 내부에서 暗躍하면서 녹색당에 대해 어떤 정치공작을 행했는지 그 전모를 추적, 파악하여 재현할 수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스푸트니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은 1969년 현재 국가안전보위부 포츠담 지부 第15課36)소속으로 등재됐다가 1976년 정찰총국 第2課(II)로 넘겨졌다. 그때부터 마지막까지 정찰총국 第2課 6係長 롤프 케슬러37)로부터 공작지도를 받았다.「스푸트니크」에 관한 첫 제보는 1973년에 있었고 이들 첫 보고서들은 특히 “反帝同盟이라는 毛澤東 思想 路線을 追從하는 組織의 西베를린에서의 活動”38)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제공해 주었다.

그밖에 70년대 후반 국가안전보위부는 西베를린에서 蠢動한 毛澤東 思想 路線을 追從한 親中共 四人幇 系 - 독일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자39), - 독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40)과 - 독일공산당41)에 관한 보고서뿐만 아니라 - 독일공산주의청년연맹42)과 러셀 트리뷰널43)의 창립 준비과정에 관한 보고서도 풍부하게 제공 받았다.

국가안전보위부는 - 특히 정찰총국은 - 70년대 후반기 西베를린에서 준동한 親중국 공산당의 활동에 관해서 엄청난 분량의 제보를 받았는데 이들 제보는 정찰총국의 지라-데이터뱅크에 등재돼 있다. 그 후 1978년에 국가안전보위부는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총회에 관해서 제보를 받았고, 1982년부터는 대표자 위원회의 각종 회의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평화운동권의 활동에 관해서도 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西베를린에서 蠢動한 極左派의 활동에44) 관한 정례 보고를 본격적으로 제공 받았다.

브레쉬넵(Брежнев)의 본(Bonn) 예방 반대시위, 폴란드 노조 '連帶 (솔리다리노쉬)” 지지 시위, 1983년 5월 東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의 페트라 켈리의 一人 항의시위 등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액션이 빈발했다. 국가안전보위부에겐 골치 아픈 중대 사건이었다.「스푸트니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이 국가안전보위부에 제공한 마지막 보고서에는 1985년 西베를린 市議會選擧 時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가 公薦한 시의원 후보들에 관한 개인정보자료도 들어있었다.


4 브리깃테 하인리히 유럽의회 여성의원의 대녹색당 사업

녹색당 내부에서 암약한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공작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브리깃테 하인리히 유럽의회 여성의원을 예로 들어 자세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1982년「탈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 클라우스 크롸쌍은 자신의 여자 친구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국가보위부 테러 전담 本部 第22室(HA XXII)의 정규요원들과 접촉시켰다. 국가안전보위부 장교(정규요원)들은 그녀와의 두 번째 회동에서 이미 “그녀와 맹서의 악수를 나누면서” 포섭할 수 있었다. 훗날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정을 내렸다: “포섭은 정치적 확신을 바탕으로 하여 이뤄졌다. 비정규요원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편에 서 있었다.”45)

크롸쌍은 本部 第22室(HA XXII)에서 데스크를 지키는 정규요원(공작지도원)와 브리깃테 하인리히 간의 연락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傳令員(파발꾼)과 訓令員 노릇을 했다. 연방검찰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크롸쌍은 그 대가로 국가안전보위부로부터 70, 000 DM이 넘는 금액을 수령했다고 한다.46) 1984년 헤센 州 녹색당은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유럽의회 의원후보로 公薦했다. 그 후 정찰총국 第2課 6係(II/6)도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대해 공작지도를 했다. 하지만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대한 비정규요원 기록문서는 本部 第22室(HA XXII)이 계속 관리했다. 그리하여 이 기록문서에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정찰총국을 위해 첩보(스파이)활동을 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 보관 문서에 의하면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유럽의회에 진출하기 前에 벌써 국가안전보위부로부터 녹색당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1984년 6월 유럽의회에 진출한 후 정찰총국 第2課(II) 과장 쿠어트 가일라트와 함께 자신의 향후 거취문제에 대해 상세히 의논했다고 한다. 비정규요원으로서의 활동이 갖는 의의가 커졌기 때문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 의원에 대한 “교육훈련 및 훈령 회동”47)이라는 제목의 밀봉교육을 유고슬로비아에서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휴가여행으로 위장하여 유고슬로비아로 가서 1984년 8월 그곳에서 밀봉교육을 받았다. 이 會同에 관한 보고를 받은 정찰총국 총국장 마르쿠스 볼프 上將은 포섭 담당 부서가 “정치공작 사업에서 성취한 성과”에 대해 크게 치하했다고 한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와의 훈련 및 훈령 회동에 대한 분석평가를 한 바탕 위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했다:

-「베아테 쉐퍼」에게 유럽의회 및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과 관련 구체적 지령을 하달할 필요가 있고, -「베아테 쉐퍼」는 지금까지 녹색당의 정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보충학습을 통해 녹색당의 정치에 대해 충분한 지식과 인식을 갖추도록 해야 하며, - 그러고 난 후에「베아테 쉐퍼」는 첩보(스파이)활동을 통해 갖가지 인포메이션을 입수할 수 있고 정치공작사업을 통해 유럽의회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녹색 정치48)관련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49)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대해 “활용 및 육성 방안”을50) 작성했다.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同 방안에다 완전히 맞추고 그녀의 모든 행보를 同 방안에다 집중시키는 명확한 정치적 구상이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무엇보담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정치적 포지션을 高揚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먼저 그녀로 하여금 유럽의회 여성의원으로서 영향력을 갖추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그녀를 연방독일 녹색당 연방집행부에 진출시키려고 했다.51) 1984년 11월에 작성 완료된 구상에 따르면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유럽의회 의원으로서 갖게 된 갖가지 기회를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 - 정치 사업과 참여를 통해 그리고 본(Bonn)의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이나 녹색당 연방집행부와 접촉활동을 통해 활동무대를 유럽의회에서 본(Bonn)으로 옮겨 - 본(Bonn)의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이나 녹색당 연방집행부에 진출하여 활동을 하도록 확정돼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유럽의회 綠色 系 의원단 內에서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知名度를 높이기 위해 그녀로 하여금 녹색 정치의 내용과 목적에 관해 친숙하게 만들고 유럽의회 녹색 系 의원단 내 모든 계파의 파트너와의 접촉관계를 구축하도록 하고 “녹색 정치를 위해”52) 독자적인 구상을 개발, 발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유럽의회에서 특히 특정 결의안의 평가, 발의 또는 저지와 관련 동독의 입장을 반영, 관철시키도록 방조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때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서독(연방독일) 녹색당의 입장을 참작하고 서독(연방독일) 녹색당의 이익에 反해 행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유럽의회에서의 표결 時 찬반과 관련한 행동거취 등에 대해 유럽의회 녹색 系 의원단에 특정 제안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밖에 유럽의회 여성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서독(연방독일) 녹색당의 反동독적인 계획과 의도들을 탐지하여 국가보위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서독(연방독일) 녹색당 연방집행부에 진출, 서독(연방독일) 녹색당 수뇌부의 인사동정을 파악, 이에 대해 국가안전보위부에 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서독(연방독일) 녹색당 연방집행부 내에서 공작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매사에 적극적인 녹색당원이 되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한때 테러리스트로서 가졌던 주변관계를 깨끗이 정리하고 특히 러셀평화재단53) 연락위원회와 본(Bonn) 평화조절위원회54)에 들어가 평화운동권 인사들과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발판(接觸網)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55)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대해 정리기록해둔 원래의 서류철은 정찰총국이 抹消, 消却處分해 버렸기 때문에 그 서류철은 존재하지 않지만 舊 동독 국가안전보위부 보관 문서 가운데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유럽의회 여성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국가안전보위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對녹색당 스파이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서류철이 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벌써 “활용방안”에서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녹색당에 대해 첩보활동을 하게 된 이후 가치 있는 각종 자료를 국가안전보위부에 넘겨주었다.”고 略述해 둘 수 있었다.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對녹색당 스파이활동에 대해서 정리기록해둔 서류철에는 실제로 “환경운동, 평화운동 등 잡다한 운동 계파 출신에다 다양한 정치성향의 소수파 의원들로 구성된 유럽의회 내 무지개 의원단”56)의 성립 과정과 그 당시 녹색정치계 유럽의회 의원들의 面面과 動靜에 관한 그녀의 제보문건이 수많이 발견되고 있다.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지도원(傳令員 또는 訓令員으로 직파돼 온 국가안전보위부 정규요원)과의 會同은 안전을 이유로 옛날과는 달리 빈번히 이뤄지지 않았다. 때문에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남자치구 크롸쌍이 그녀를 대신하여 제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85년 4월에 확인됐던 것은 그녀의 남자 친구 크롸쌍이 그녀를 대신하여 매월 최소한 1회 “자료 전달”을 하기로 돼 있었다는 사실이다.57) 크롸쌍은 정기적으로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초청 件, 인사 관련 결정사항 건과 각종 회합 및 집회 참가 日程 건에 대해 국가안전보위부에 보고하고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의하면 국가안전보위부는 결정을 내렸다. 1984년 6월 크롸쌍은 -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문제」란 키 워드로 다음과 같이 메모해 두었다: “브리깃테가 유럽-아랍 의원 연맹의 회합(매주 수요일 14:00 시 슈트라스부르크 본회의 시)에 참가해야 할런지? [...] 9월 8일과 9일에 녹색당 연방 여성 小委는58) [...]의 應募에 대해 의결하고자 한다. 에리히(Erich) 관계 문서 참조. 녹색당 연방 여성 팀이 그녀의 채용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길지?”59)

1985년 4월 유럽의회 여성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東베를린으로부터 파발꾼(傳令員)으로 직파돼 온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지도관과 철저히 논의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위부의「湖畔 See」이란 대상가옥(안가)에서 며칠 동안 합숙하면서 회동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구상」에 따라 논의 테마를 미리 확정해 두고 있었다. 즉 東베를린에서 파발꾼(傳令員)으로 직파돼 온 공작지도원은 브리깃테 하인리히와 나흘 동안 회동을 갖고 “비정규요원(IM)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의회 차원에서나 당 차원에서 녹색 정치의 제 문제와 관련하여 전개할 수 있는 활동”에60) 관해서 논의하기로 - 특히 비정규요원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서독 녹색당의 포지션을 이탈하지 않고 좌익활동을 할 수 있는 범위에 관해 논의하기로 - 미리 확정해 두고 있었다.

그밖에 국가안전보위부 측이 크롸쌍과 논의하려고 했던 것은 크롸쌍이 유럽의회 녹색당 의원단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이 得한 인포메이션”을 보고서 형태로 작성하는 방법에 대해서였다.61) 東베를린으로부터 전령원(파발꾼)으로 직파돼 온 공작지도원은 회동 時 두 공작원에게 - 클라우스 크롸쌍과 브리깃테 하인리히에게 - 국가안전보위부의 이름으로 사의를 표하면서 1, 000 DM 상당의 선물을 전달했다.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국가안전보위부가 致謝를 하고 선물을 보내준데 대해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傳令員으로 직파돼 회동에 임했던 공작지도원은 회동 소견서에다 「베아테 쉐퍼」는 - 즉 브리기테 하인리히는 - 그 동안 유럽의회에서 포지션을 구축하여 녹색당 여성정치인으로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객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 받게 됐다고 짧게 결론짓고 아직은 여성의원으로서 녹색 정치를 위한 활동은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는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전망(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소속 의원으로 또는 의원단 직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전망) 실현에서 그전과 변함없이 그녀의 정치적 지명도를 提高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東베를린에서 전령원(파발꾼)으로 직파돼 온 공작지도원은 하인리히와 크롸쌍과의 회동 時 서독 녹색당이 SPD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좋겠다는 논지에 큰 비중을 두고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SPD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반면 정찰총국 측은 SPD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독일사회민주당(SPD)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해 보라는 정찰총국 공작지도원의 요구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2명의 공작지도원은 브리깃테 하인리히에게 SPD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도록 하라는 정찰총국의 지령을 막상 전달은 했으나, 이 지령을 브리깃데 하인리히로 하여금 이행하도록 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 즉 지령의 실현에 여러 가지 제약이62) - 따른다고 판단했다.

東베를린에서 직파돼 온 두 명의 공작지도원은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소속「베아테 쉐퍼」라는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으로 활동 중인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에게 다음 회동 時에는 SPD와 관계를 갖는 件에 대해 특히 정치공작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더 논의해 보자고 했다. 공작지도원이 東베를린으로 돌아가 정찰총국 본부에 제출한 회동 결과 보고서에는 하인리히와 크롸쌍에게 하달된 여러 가지 지령이 언급돼 있었다. 그 가운데 국가안전보위부가 포섭대상으로 점찍어 놓은 녹색당 소속 다른 여성 정치인에 대해 탐지 내지 염탐해 보라는 내용의 지령도 들어있었다. 회동 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은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소속 여성의원과 접촉을 갖고 연락관계를 맺는 사업을 계속 시도할 것이고 그곳(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63)에서 자신의 활동 분야에서 - 경우에 따라서는 이를 뛰어넘어 -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는 일도 시도할 것이라고 했다.64)

1985년 8월 東베를린에서 직파돼 온 공작지도원 두 사람과 해당 비정규요원 두 사람(즉 하인리히와 크롸쌍)은 다시 여러 날 동안 회동을 했다. 회동案에 의할 것 같으면 전령원으로 직파돼 온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공작지도원은 유럽의회 여성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와 논의하려고 했던 것은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서독 녹색당의 결정에 따라 로테이션돼 녹색당 의원단 직원으로 계속 남아 활동하는 문제였다. “主된 방향은 유럽의회(EP) 의원단 사무실 직원 직을 유지하면서 녹색당 연방집행부 집행위원(理事)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代案으로는 국가안전보위부 측이 고려해 본 것은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유럽의회 의원직을 유지하되 녹색系 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방안이었다.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측은 크롸쌍에게도 유럽의회 의원으로서 직업 활동을 가능하면 장기간 계속해 보도록 하라고 권유했다.65) 크롸쌍은 유럽의회 의원단 회의에서 하인리히보다 더 한층 좌익 강경파로서 등단했다. 특히 東유럽 국가의 반체제운동단체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원을 한사코 반대하고 나섰다.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유럽의회 의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녹색당 여성 대표자들이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계속해서 유럽의회 의원으로 남아 있도록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강력히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이런 식으로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유럽의회 내 암약 공작원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그 결과로 수확한 첩보 규모는 작지 않았다. 몇 달 후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은「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공작원의 제보에 의거하여 - 유럽의회 무지개 의원단 내 東유럽 小委의 활동에 관한 인포메이션에서 - 1985년 12월 비공개로 개최된 폴란드 행사 경과를 상세히 記述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럽의회 의원 한 사람이 東유럽의 자유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초당적 기구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지만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은 이 초당적 기구의 설립을 비밀정치공작 사업을 통해 沮止하여 霧散시켜 버렸다.66)

1986년 정찰총국은「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공작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결산하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은 그동안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는데 성공했고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은 이 비정규요원으로부터 다수의 중요 첩보를 제공받아, 정치공작 사업에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다. 그가 제공한 첩보는 정찰총국의 평점시스템에서 優(II) 내지 美(III)의 점수를 받았다.”67)

1년 후 클라우스 크롸쌍과 브리깃테 하인리히를 담당한 공작지도원은 비정규요원「탈러」와「베아테 쉐퍼」가 1986/87 계획연도에 對서방 사업을 통해 33건의 첩보를 제공했는데 그 첩보들은 평균 미(III)라는 점수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총평했다: “兩 비정규요원(IM)의 對서방 사업은 유럽의회 내 무지개 의원단의 활동, 녹색당 연방집행부의 활동과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의 활동을 정탐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공작지도원은 “이는 무엇보담 녹색당의 인권정책․독일정책․국제관계뿐만 아니라 유럽 핵무기 감축(END) 운동 카번트리(Coventry) 집회에 대한 내용적 준비에도 해당된다고” 덧붙여 말했다.68) 1987년 3월 東베를린에서 직파돼 온 정찰총국 공작지도원과 비정규요원은 다시 회동했다. 이때 그들은 브리깃테 하인린히의 유럽의회 의원직 포기(Mandatsverzicht)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同 회동에서「베아테 쉐퍼」는 로테이션 문제와 관련 녹색당 연방대회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브리깃테 하인리히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도 연방대회에서 결의[결정]된 바를 필히 준수하게 될 것이다.” 이때 비정규요원 탈러와 하인리히는 전령원으로 직파돼 온 공작지도원에게 호전적인 좌파 진영으로부터 흘러나온 NATO에 관한 다큐멘트와 인쇄물 외에도 녹색당의 활동과 계획에 관한 다양한 문건을 건네주었다. 반면 국가안전보위부 측은 「탈러」와「베아테 쉐퍼」에게 여태까지 對서방 사업을 훌륭히 수행한데 대해 다시 선물을 전달했다.69)

1987년 8월 정찰총국 공작지도원은 탈러와 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과 회동을 갖고 난 후 작성한 회동 결과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베아테 쉐퍼는 로테이션될 것이다. 이는 확정적이다. 그녀는 정치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적은 선거 시까지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1989년에 다시 유럽의회 의원이 되거나 1991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기 위해서다. [...] 그녀의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우리와 의견 조율을 거칠 것이다.”

“슈타지는 계획상의 공작사업에 임하는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비조직적이라고 불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업 수행 결과는 양호하다. 그녀는 빈번히 제보해 주었고 자료도 제공해 주었다. 탈러는 자료들을 동독으로 들고 들어와 복사를 했다. 공작원 베아테는 1987년 8월의 회동 시에 국가안전보위부에 무제한 협력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탈러와 베아테와 함께 녹색당과 유럽의회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인포메이션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그 인포메이션을 꼭 보내달라고 했다.”70)

마지막 회동결과보고서는 1987년 12월에 작성된 것이다. 유럽의회 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와 담당 공작지도원(훈령원) 사이에 개인적인 긴장관계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탈러」와「베아테 쉐퍼」는 회동 時 국가안전보위부에 - 결정과는 무관하게 - 계속 협력하겠다고 했다.「탈러」와「베아테 쉐퍼」는 국가안전보위부 측에 다시 방대한 자료를 직접 전달했다. 그 후 담당 공작지도원은 정찰총국의 총 지령 구조의 의미에서「탈러」와「베아테 쉐퍼」에게 새 지령을 전달했다.71)

하지만 며칠 후 여성의원 하인리히와의 협력관계는 갑자기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심장마비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사건을 소리 없이 처리해야만 했다.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소속「탈러」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 클라우스 크롸쌍이 「베아테 쉐퍼」라는 코드名의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소속 비정규요원으로 암약한 브리깃테 하인리히가 쓰던 집과 사무실을 정리했다. 브리깃테 하인리히의 유가족은 그녀의 生의 伴侶 클라우스 크롸쌍에게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긴 주소와 전화번호 메모 수첩은 「탈러」가 다음 번 회동 시 국가안전보위부 측에 직접 넘겨주기로 했다.72)


5 정치적 영향력 행사

브리깃테 하인리히 사례가 잘 말해 주듯이 국가안전보위부의 對녹색당 사업은 녹색당에 관한 첩보 입수에만 그치지 않았고 정치공작을 통해 녹색당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도 그 목적을 두었다. 정치적 영향력 행사와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 특히 군비정책과 독일정책(對동독 정책)과 관련하여 서독 녹색당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서독 녹색당을 도구화하여 철저히 이용해 먹는 것, - 동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서독 녹색당 정치인을 몰아내거나 중립화하는 것, - 동독 공산당에 비판적인 행동과 동독의 반체제세력과의 연대를 저지하는 것.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위부는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무엇보다도 먼저 서독 녹색당이 동독에서 통제받지 않고 항의시위 등의 정치활동을 벌이는 것을 특히 경찰력을 동원하여 엄중 대처하였다. 이를 넘어서 1983년 11월부터 국가안전보위부는 총 3, 000명에 달하는 녹색당 추종자와 녹색당 간부에 대해 - 이들의 신원을 이미 파악해 두고 - 동독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이는 녹색당 추종자와 간부들이 동독 국경을 넘어와 동독 반체제 세력과 접촉하는 활동에 제한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기율을 잡는 도구로도 작용했다.

공식적인 접촉(교류)과 대화와 관련하여 국가안전보위부는 녹색당원들 가운데 동독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은 철저히 배제하고 동독에 대해 우호적인 소위 현실주의 세력에게는 - 예를 들면 본(Bonn) 주재 독일민주공화국 상설 대표부를73) 통해 - 특전을 베풀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동독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녹색당 세력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조치를 통해 - 허위 인포메이션, 날조된 소문이나 악랄한 선전선동 책자들을 몰래 유포시켜 - 그들을 모략중상하고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획책했다. 마지막으로 국가안전보위부는 비정규요원(공작원)의 정치공작활동을 통해 녹색당의 내부토론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발버둥 쳤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이들 도구를 어떻게 사용했으며 이들 도구의 효율성에 대해 - 이와 관련된 기록문서들은 단편적인 것이어서 한두 가지 예를 재구성하여 - 알아보기로 하자. 국가안전보위부가 특히 동독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 내부 세력에 대해 - 특히 베를린 정책 및 대동독 정책74) 小委에 대해 그리고 노이쾰른(Neuköln) 구역 小委 조직원들에 대해 - 대처했는지 국가안전보위부 보관 문서에 의거하여 재구성하여 보자.75)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소속「루트비히」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공작원)으로 암약한 정치인 디어크 슈나이더76)가 동독 공산당에 우호적인 포지션을 위해 어떻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여러 가지 상이한 자료에 의거하여 자세히 분석해 볼 수 있다.

슈나이더는 - 이제는 故人이 되고 말았지만 - 1983년부터 1985년까지는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소속 의원이었고 1985년부터 1987년까지는 연방의회 본회의 앞줄에 자리를 잡게 된 녹색당 중진의원이었다. 1984년 녹색당 대변인(원내총무단) 안네 보르크만 여사, 안치에 폴머 여사, 발트라우트 쇼페 여사 등이77) 슈나이더를 높게 평가했듯이 녹색당의 對동독 정책 구상은 슈나이더에 힘입은 바가 엄청나게 컸다.78) 녹색당은 동독 공산당의 독일정책 관(觀)을 - 소위 게라 要請을 - 그대로 인수(引受), 수렴(收斂)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동독 공산당에 대한 국가안전보위부 정찰총국 소속「루트비히」란 코드명의 비정규요원으로 暗躍한 슈나이더의 공적이 실제로 입증된 셈이다.

녹색당원들은 - 그들의 政治觀(politische Vorstellungen)과 행동형태(Aktionsformen)를 녹색당의 성립 시기부터 쭉 고찰해 볼 때 - 원래 동독의 자생적 평화운동단체들에 대해 連帶의 感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동독의 自生的 평화운동단체들은 동독 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이었다. 서독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소속 페트라 켈리와 루카스 베크만79) 兩 의원은 동독의 평화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협력하자고 주장했으나 슈나이더 의원은 이에 반대했다. 슈나이더는 兩 의원의 주장에 재삼 이의를 제기하여 성공적으로 논박했다. 동시에 슈나이더는 동독 공산당의 독일정책 관련 요구를 그냥 그대로 녹색당이 수렴 또는 수용하여 써먹자는 공세적 논지를 폈다. 페트라 켈리와 루카스 베크만을 일방으로 하고 슈나이더를 타방으로 하여 벌어진 2개 분파의 논전과 관련하여 녹색당 내부에 諸 戰線이 형성됐다. 이에 관해서 국가안전보위부는「루트비히」란 코드명의 공작원으로 암약한 연방의원 디어크 슈나이더를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는 그밖에도 슈나이더를 통해 -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회의와 녹색당 각종 위원회 회의의 진행과정에 관해서, - 요쉬카 피셔와 연방의회 녹색당 원내 총무 안네 보르크만 등 녹색당 중진 정치인의 去就 및 動靜에 관해서, 그리고 - 동독 공산당 독재를 반대하는 녹색당 내부 및 동독 내부의 비판세력의 활동에 관해서 정확히 보고받고 있었다.

녹색당 내부에서는 녹색당의 對동독 관계를 둘러싸고 수많은 논전이 전개됐다. 1983년 5월 연방의회 여성의원 페트라 켈리 여사가 東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 이것이 發端이 돼 論戰의 첫 번째 국면이 개시됐다. 그 당시 동독 공산당은 미국 핵탄두 중거리 미사일의 西유럽 배치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을 서독에서 대대적으로 벌이자는 크레펠트 檄文80)을 작성해 놓고 녹색당과 특히 페트라 켈리여사를 同 檄文의 첫 번째 서명자로 만들어 이용해 먹으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안전보위부는 독일 연방의회 의원 페트라 켈리 여사를 잠간만 체포했다가 곧 풀어주었다.

얼마 후 동독 공산당 총서기 에리히 호네커는 페트라 켈리 여사를 동독으로 공식적으로 초청했다. 1983년 6월 에리히 밀케가 국가안전보위부 지도부에 통보했듯이 동독 공산당은 에리히 호네커와 페트라 켈리의 회동을 - 단 페트라 켈리 여사가 동독의 평화운동인사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지 않을 경우에만 - 성사시켜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슈나이더는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이 페트라 켈리 여사를 단장으로 하여 에리히 호네커를 예방하기로 한 계획과 관련하여 - 슈나이더 자신도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호네커를 예방하는 행사에 참가하기로 돼 있었는데 - 페트라 켈리 여사가 알렉산더 광장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인 것에 대해 비난했고 그녀가 東베를린에서 동독의 평화운동인사들과 평화를 위한 공동행동(시위)을 벌이기로 한 계획에 반대했다.

이와 병행하여 공작원 「루트비히」는 국가안전보위부에 -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의 東베를린에서의 항의행동(시위)에 대한 녹색당 내부의 준비과정에 관하여; - 항의행동(시위) 예상 참가자들의 면면에 관하여; 그리고 - 항의행동(시위) 계획과 관련하여 벌어진 녹색당 내부의 논란에 관하여 事前 제보했다.

1983년 10월 31일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은 동독 국가평의회를 방문했다. 녹색당 인사들은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정무를 보는 국가평의회 청사 앞에서 준비해 가지고 간 현수막 여러 개를 잠간만 펼쳐 들었다. 그러고 나서 1983년 11월에 별도로 동부독일의 평화운동단체와 공동행동(시위)을 벌이기로 한다고 통고했다. 이는 페트라 켈리 여사를 단장으로 한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의 東베를린에서의 항의행동(시위)의 결말이었다.

연방의회가 미국 핵탄두 중거리 미사일 퍼싱 2호(Pershing II)의 西유럽 배치를 결의한 후 동독 공산당의 녹색당에 대한 관심은 쇠퇴했다. 對동독 관계를 둘러싸고 녹색당 내부에서 벌어진 論戰의 두 번째 국면은 - 녹색당에 대한 동독 공산당의 관심 退潮로 특징지어진 두 번째 국면은 - 東베를린 경찰과 슈타지가 1983년 11월에 예정된 평화를 위한 행동(시위)을 강압적으로 저지하자 이것이 발단이 되어서 펼쳐졌다. 한편으로는 東베를린 경찰과 슈타지는 녹색당 동독 방문 대표단과 동독 평화운동 인사들이 공동으로 합의를 본 평화시위를 源泉封鎖를 해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독 보안기관은 일주일 전에 공식적으로 에리히 호네커의 알현을 받은 바 있는 녹색당 인사들과 그 밖의 다른 녹색당 대표들에게 입국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들 녹색당 대표들의 신원은 국가안전보위부가 이미 상세히 파악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소속 의원 슈나이더는 이번에도 예정된 평화를 위한 행동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 시위에 대해 반대한다고 신랄한 어투로 공개 선언했다.

그밖에 국가안전보위부는 슈나이더의 제보를 통해 녹색당 소속 연방의회 의원 오토 쉴리 (1998년 오토 쉴리는 연방수상 슈뢰더 하의 SPD와 녹색당의 赤綠 연립정부의 연방내무부장관이 돼, 2005년 11월 정권교체와 함께 퇴임)도 “녹색당 인사들이 동독에서 공개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녹색당의 對동독 관계에서 산통이 깨어졌기 때문에 동독과의 관계를 녹색당이 이제 다시 복원하자면 시간도 한참 걸릴 것이고 수고도 많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유감을 표명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81)

동독 공산당은 녹색당 인사들에 대해서 입국금지라는 강경 조치를 내리고 녹색당과의 더 이상의 공식적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녹색당의 동독 평화운동단체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도 차단했다. 이러한 동독 공산당의 대응조치는 녹색당에 압력으로 작용했다. 1983년 11월의 평화를 위한 시위 계획이 좌절된 후 여러 달이 경과했다. 이제 녹색당은 對동독 관계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슈나이더는 특히 녹색당 의원단 여성 대변인 3명(院內總務團 3女傑)과 연방의원 오토 쉴리를 포섭, 자신의 親동독 입장에 동조하도록 했다. 그는 對동독 관계를 둘러싼 녹색당 내부 논전에 관해 국가안전보위부에 계속 꼬박꼬박 제보했다. 1984년 8월 국가안전보위부는 연방의회 의원 가비 고트발트82)의 제보로 디어크 슈나이더를 중심으로 한 영향력 있는 녹색당원들이 동독 공산당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다시는 東베를린에서 시위 소동을 벌이지 않겠다는 진지한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1984년 9월 슈나이더는 녹색당 원내총무 안네 보르크만 여사와 함께 가진 기자회견에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녹색당은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을 무조건 인정하고 동독 공산당의 게라 要請83)을 수렴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슈나이더와 보르크만 兩 의원은 “독일 재통일 정책과 독일문제의 해결 유보 정책은 - 즉 독일을 재통일하겠다는 정책과 독일문제의 해결을 유보하겠다는 정책은 - 결국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녹색당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84)

1983년 10월 슈나이더는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을 설득하여 연방내독관계성(서독 분단관리부)을 해체하도록 하자는 안건과 베를린 미군 관할지역 방송국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도록 하자는 안건을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 연방예산심의위에 제출, 통과시켰다.85) 연방의원 폴머 여사와 보르크만 여사는 본(Bonn) 주재 동독 상임대표부에 대해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은 동독 공산당의 게라 要請86)을 지지한다.”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84년 11월 폴머와 슈나이더는 東베를린으로 갔다. 兩 연방의원은 동독의 서방정책 전담 허버트 해버87)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을 만난 자리에서 “녹색당원들이 反동독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했다.”는 것을 확신시켰다.88)

국가안전보위부는 양 연방의원과 정치국원 간의 면담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정치국원 허버트 해버와의 면담에 임한 녹색당 중진인사들의 진술을 검토해 본 결과 금년 중순부터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의 내부 분위기는 對동독 입장과 관련하여 디어크 슈나이더를 중심으로 한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간부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反轉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녹색당 의원단 대변인(복수의 원내총무) 폴머 여사와 보르크만 여사 측에서 슈나이더의 포지션을 옹호함으로써 촉진되고 있다. 1984년 9월 12일의 연방의회 본회의 토론에 즈음하여 아. 폴머 여사는 동독의 게라 요청을 지지하고 있다. 오토 쉴리도 1984년 9월 6일 2 정치국원 해버와 면담을 가진 후 명백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이 그룹의 조율된 행동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89)

1985년 2월 슈나이더의 보좌관 유르겐 슈나퍼츠는90) 녹색단 의원단에 호네커의 게라 요청을 공식적으로 인수 내지 수렴한 결의안을 제출했다. 슈나이더는 슈나퍼츠가 제출한 결의안에서 연방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 첫째 동독 공민의 국적을 존중할 것; - 둘째 잘츠깃터(Salzgitter) 집계소의 해체를 지지해 줄 것; - 셋째 연방내독관계부의 업무를 연방수상실과 연방외무부에 移管할 것.91)

同 결의안은 몇몇 녹색당 의원들에게 SPD의 결의안에 너무 치우쳐져 있는 것으로 비춰졌다. 때문에 연방의회에 제출되지 않았다. 그 후 페트라 켈리 여사와 다른 녹색당 정치인들은 동독의 자생적 평화운동단체를 지지한 일로 녹색당 의원단 내에서 비난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1985년 12월 에리히 밀케는 국가안전보위부가 페트라 켈리 여사와 게어트 바스치안 장군에 동독 입국금지 명령을 내렸던 내적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좀 더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親 동독) 녹색당 대표들은 독일정책과 관련하여 페트라 켈리와 게어트 바스치안이 취한 포지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양인은 東베를린에서 도발적인 시위를 주도했다. 사려 깊지 못한 기분풀이 행동이었다.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은 이 일로 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게 됐다. 양인의 평화시위 소동 건은 녹색당 원내총무단이 추구해 왔던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지도부와의 정치대화에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92)

페트라 켈리 여사는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 때문에 녹색당 의원단 내에서 점점 고립돼 갔다. 슈나이더는 녹색당 의원단 소속 의원으로 다음 회기 연방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다. 이제 녹색당은 다시 동독의 반체제단체와의 관계에 보다 큰 비중을 두게 됐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 소속 간부로 남아 독일정책 관련 토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베를린 및 독일 정책 팀이93)이 제시한 兩 독일 국가의 통일을 위한 구상도 동독 반체제 인사와의 개인적 접촉도 자연적으로 분단 도시 베를린에서는 본(Bonn)에서 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국가보위부는 西베를린에 수많은 비정규요원들(IM)을 깔아두고 있었다.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 내에서 암약한 비정규요원들은 東베를린에 제보를 했다. 그리고 이들 비정규요원들은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슈나이더는 피켈하우벤派 로94)호칭된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계파 조직에 대한 비판가로서 명성을 얻게 됐고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조직원들을 상대로 이들 피켈하우벤派는 극우파이고 CIA 고용간첩이라는 설을 유포시켰던 장본인이다. 1986년 9월 국가안전보위부는 “현재 녹색당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대화할 용의가 있는 이성적인 세력이 - 의원단 내와 지도위원회(집행위원회)의 중도파를 포함하여 - 捲土重來하고 있다.”는 상황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안전보위부 베를린 지부 第15課(XV)도 對녹색당 정치공작 사업을 企劃했다. 同 정탐 부서도 親동독 현실주의적 세력 가운데서 對녹색당 공작사업을 훌륭히 수행해 낼 수 있는 자들을 선발, 포섭하여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에서 동독 공산당에 비판적인 반동분자를 몰아내는 肅淸作業에 투입했다.

얼마 후 1986년 10월 디어크 슈나이더, 클라우스 크롸쌍, 모두에 언급한 바 있는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의 간부와 여러 명의 조직원은 西베를린의 역할에 관해 20개의 명제를 공동 작성, 同 명제가 들어있는 페이퍼를 발표했다. 同 命題 페이퍼에 기초하여 西베를린 代案의 候補名簿와 서독 녹색당은 향후의 진로 모색을 위해 토론을 진행했다.

이 命題 페이퍼에 작성에 공동 참여한 자들은 - 美英佛 연합군의 西베를린으로부터의 철수, - 西베를린의 독일연방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와 - 西베를린의 자치와 西베를린 자체의 대외정책 등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동독에 대한 모든 형태의 압력행사를 거부했다. 공동저자들은 동독을 대등한 파트너로 보고 대등한 입장에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서독 체제가 우월하다는 對동독 觀과 視覺을 포기하는 원칙적인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95)


6 끝맺는 말

국가안전보위부는 테친트(techint: technical intelligence)와 휴민트(humint: human intelligence)에 의거하여 연방독일의 녹색당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의회 여성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와 연방의회 의원 디어크 슈나이더를 통해 녹색당 내부 사정에 관한 인포메이션을 - 그리고 이에 대한 접근통로를 -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안전보위부는 對녹색당 사업을 수동적인 인포메이션 수집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녹색당 내부의 適所에 투입된 비정규요원들을 정치적으로 교양하고 이들에게 정치공작사업 방법과 기술을 傳授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었다.

「베아테 쉐퍼」란 코드명을 가진 비정규요원의 공작활동 관계서류철이 보관돼 있는데 그 가운데 유럽의회 여성의원 브리깃테 하인리히에 관한 기록문서가 들어있다. 이를 검토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국가안전보위부가 미리 만들어 놓은 정치적 각본에 따라 녹색당 내부에서 암약하는 공작원들과의 협력 사업을 주도면밀하게 기획, 정치공작사업을 풀어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앞에서 연방의회 의원 디어크 슈나이더를 예로 하여 詳述했듯이 국가안전보위부는 표적 대상 기관의 적소에 배치된 비정규요원을 매개로 하여 연방의회 녹색당 의원단의 정치에 대해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동독 공산당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다시 녹색당의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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尾註

1) Cf. 펜, 한스 요아힘 (Veen, Hans-Joachim) 編: 동독 공산당 독재 하의 저항세력
에 관한 辭書 (Lexikon Opposition und Widerstand in der SED-Diktatur). Berlin, München 2000, p.165 f.

2) 국가안전보위부가 해체된 후 확보하게 된 문서에 의하면 정찰총국(HVA) 독일사회민주당(SPD) 담당 第2課 4係(II/4)는 독일사회민주당 내부 暗躍 공작원(O-Quellen: 오 크벨렌) 14명을 지도관리하고 있었고 기민당(기독교민주동맹: CDU) 담당 정찰총국(HVA) 第2課 1 係(II/1)는 기민당 내부 暗躍 공작원 (O-Quellen)을 최소한 7명이나 지도관리하고 있었음. 자유민주당(FDP) 담당 정찰총국(HVA) 第2課 1係(II/1)는 자민당 내부 暗躍 공작원 (O-Quellen) 5명을, 녹색당 담당 정찰총국 第2課 6係(II/6)는 녹색당 내부 暗躍 공작원(O-Quellen) 5명을 지도관리하고 있었음. 이에 관해서 참조할만한 문헌으로는 뮐러 엔베르크스, 헬무트 (Müller-Enbergs, Helmut) 編: 비정규요원. 제2부: 공작원, 척후와 스파이와의 공작사업 지침 (Die Inoffiziellen Mitarbeiter. Teil 2: Anleitungen für die Arbeit mit Agenten, Kundschaftern und Spionen i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Berlin 1998, p.204-209. 그밖에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다른 활동부서도 서독 諸 정당 내부 暗躍 비정규요원을 다수 지도관리하고 있었음. 위에서 예거한 공작원 數値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입장에서 본 서독 諸 정당의 대략적인 중요도만을 말하여 주는데 불과함.

3) SIRA: System der Informations-Recherche

4) Bestimmungen des Stasi-Unterlagen-Gesetzes

5) 로젠홀츠 문서: Rosenholz-Unterlagen

6) Gert Bastian

7) Generale für den Frieden

8) 볼프, 마르쿠스(Wolf, Markus): 비밀리에 진행된 전쟁에서의 스파이 수장. 회상
(Spionagechef im geheimen Krieg. Erinnerungen), München 1997, p.343.

9) Benedikt Maria Mülder

10) Westberliner Alternative Liste

11) 뮐더, 베네딕트 마리아(Mülder, Benedikt Maria): 環境保護運動團體의 組織員들과 國家 安全保衛部 非正規要員들(Die Grünen und ihre Inoffizielle Mitarbeiter). In: 2001.5. 23일자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紙(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v. 23. 5. 2001).

12) 이와 관련하여 자세히 알아보려면 크나베, 후버투스 (Knabe, Hubertus): 浸透 당한 공화국. 서방에서의 슈타지 活躍相 (Die unterwanderte Republik. Stasi im Westen. Berlin 1999, p.234-260)을 參照하기 바람

13) Bonner Friedenskoordination

14) 1982年 (正確히는 1983年) 1月 13日 정찰총국 당조직 회의 時 볼프 상장 동지가 행한 보고 발췌 (Auszug aus dem Referat des Genossen Generaloberst Wolf auf der Aktivtagung der Parteiorganisation der HV A am 13.1.1982 [gemeint: 1983]; BStU, ASt Gera, Abt. XV 389, Bl. 17ff.

15) Zentrale Planvorgabe für 1986 und den Zeitraum bis 1990; BStU, ZA, Dst 103287, Bd. 1, p. 20.

16) 서독의 親蘇系 獨逸共産黨 (DKP: Deutsche Kommunistische Partei)은 “계급저항”이란 용어를 사용했음

17)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 체제에 있어서 녹색당과 현재의 기본문제에 對한 그들의 입장. 정치적 그리고 정치공작적으로 중요한 분화과정과 경향 (Die Grünen im politischen System der BRD und ihre Positionen zu Grundfragen der Gegenwart. Politische und politisch-operativ bedeutsame Differenzierungsprozesse und Tendenzen); BStU, ZA, JHS 2007; [이하 각주는 용량상 생략됨] [오길남 독일전문가: kilnamoh@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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