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武大王陵(문무대왕릉) 碑文(비문)은 1796년(정조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경주부윤 洪良浩(홍양호ㆍ1724~1802)는 이를 탁본해서 서울로 보냈다.
碑文은 발견 당시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 읽을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 碑文을 주목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후손인 금석문의 大家 추사 金正喜(김정희)도 이 碑文의 탁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북경의 학자들에게 보냈을 뿐이다.
실학자 柳得恭(유득공)도 그의 「古芸堂筆記(고예당필기)」권6에서 『金日石單(제)의 金이 鷄林의 金일지 모르나 (碑文의) 全文을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증거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명색이 조선조 최고의 금석문 학자라는 사람에게조차 외면당한 이 碑는 그후 버려지다시피 하다가 日帝(일제)때는 빨랫판으로 사용됐고, 일본인들의 손에 반동가리가 났다고도 했다. 현재 이 碑는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글자가 새겨진 위 쪽은 흔적도 없고,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아래 쪽만 남아 있다.
다행이라면 金正喜가 북경으로 보낸 拓本(탁본)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오늘날까지 우리가 볼 수 있다는 점이다. 碑文의 拓本은 淸의 금석학자 劉喜海에게 들어가 「海東金石苑」에 실려 있다.
이 碑文의 내용은 기원전 2300년부터 文武王(재위 661~681)까지 3000년에 걸친 先代(선대)의 系譜다. 碑文에 등장하는 주요 단어를 보자.
「火官之后(화관지후)」, 「秦伯(진백)」, 「派鯨津氏(파경진씨)」, 「靈源(영원)」, 「禾宅侯祭天之胤(투후제천지윤)」, 「禾宅侯(투후)」, 「假朱蒙(가주몽)」, 「星漢王(성한왕)」 등이다.
다음은 이 碑文을 우리 말로 풀이한 것이다.
「삼국이 通(통=통일)한 뒤로 병대는 달랐으나 (서로 허물하지 않고 잘 지내니 덕은) 바로잡혀 하늘에 짝했다. 사물은 잘 다스려져 경계가 구분되고 나라는 덕을 쌓아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했도다.
신에 응하여신령스런 명령을鯨津氏(경진씨)를 (먼저) 파견하여 三山(삼산)의 관문을 조사하게 하여 동쪽으로 開梧(개오)의 지경을 막고, 남쪽으로 丹(단), 桂(계=合浦)의 양지와 이웃하고, 북쪽으로 황룡을 접하여 朱蒙(주몽)을 부리며서쪽으로 白武(백무)를 글(로서) 우러르게 하는 것을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팔방 먼 곳까지 걸쳐있고, 그 훈공은 삼한에 뛰어나 높고 넓고 넓어서 다 일컬을 수가 없었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근원(靈源)은 먼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火官之后(화관지후)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하였다. (宗과)枝(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出自한) 바다.
15대조 星漢王(성한왕)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仙岳(선악)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金宮殿(금궁전)에 어림하고 玉欄干(옥란간)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러운 수풀처럼 많아 石紐山(석유산)을 보는 것 같았다.
임금님(=文武王)의 생각하심은 멀고 깊으셨으며, 풍채는 훌륭했으며 빼어났다(중략).
봉오리로부터 와서 그 줄기가 합해진 것이 500년이었는데, 큰 命(명)에 처하여 하나를 이루니(중략) 舜임금의 바다(같은 덕은) 적셔 截懸(절현)함이 있고, 堯임금의 해같이 밝음은 끝이 없었다. (중략) 조야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니 無爲(무위)로서 교화가 속히 이루어졌다. (주는 것을 감히) 구하지 않았으나 (옛) 秦伯(진백)의 바탕이 되는 덕이 다시 일어났다.
(이상 碑文 前面 28행)
(일찍이 황제께서는 신농씨를 대신하여 왕천하하신 뒤) 丸山(환산)에 그 공을 기하심이 있었다.
곧 九州(구주)를 一匡(일광)하고 동정서벌하여 (다시 통일천하를 이룰 것인가)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때 나이 56세였다.
(고통스러운 역사로 무덤을 이루어 놓으면) 땔나무꾼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부르고, 여우나 토끼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葬事는 간소하게 서역식으로 다비하고 동쪽 바다에 띄우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너희 나라를 지킬 것이니그 유언에 의해) 화장을 하니 그 달 초열흘에 불에(중략)
몸을 천하게 도를 귀하게 부처를 흠모하셨다. 장작을 쌓아 장사지내니멸함이네. 鯨津(경진)에 뼛가루를 날리시니 대를 잇는 (새)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도다. 우러나는 효성과 우애는 끝이 없었네.
크나 큰 (그)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月 25일에 大舍(대사) 韓訥儒(한눌유)는 (임금의 가르침을 받들어 썼나이다).
(이상 碑文 後面 21행)」
이 碑文을 지은 신라 왕실은 이런 단어의 뜻과 淵源(연원)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보통사람도 웬만하면 자기 조상의 系譜를 알고 있는데, 왕실에서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 뜻은 과연 무엇일까. 火官之后는 중국 舜(순)임금을 가리킨다고 한다. 駱賓基의 「金文新攷」를 우리말로 해석한 한국고문자연구회 金在燮(김재섭ㆍ1934~) 회장의 말이라고 2002년 발간된 「금문의 비밀」의 저자 김대성씨는 밝히고 있다.
발견 당시, 내로라하던 학자들도 풀지못했던 碑文의 내용을 지금와서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金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碑文이 없었다면 신라의 六村長들이 秦에서 망명해온 사람, 즉 「秦之亡人(진지망인)」이라는 삼국지 魏志(위지) 東夷傳의 기록이나, 三國史記, 三國遺事의 『신라사람들은 진나라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이라느니, 『신라 金씨는 少昊 金天의 후손이라 성을 金으로 했다』느니, 점필제 金宗直(김종직)의 「彝存錄(이존록)」, 「김유신전」의 소호 김천 후예라는 명문도 뒷받침할 수 없었을 것이다.
碑文에 나와 있는 文武王의 出自는 文武王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1) 火官之后(화관지후) 기원전 2300년 전
2) 秦伯(진백) 기원전 650년대
3) 派鯨津氏(파경진씨) 기원전 200년대
4) 火宅侯(투후) 기원전 100년대
5) 假朱蒙(가주몽) 기원전 50년대
6) 星漢王(성한왕) 서기 20년대
7) 文武王(문무왕) 서기 660년대
첫번째의 火官之后는 기원전 2300년 전, 다음 帝位(제위)를 이을 당시 정치세력의 중심에 있던 관직의 이름이다. 그 시대의 宰相(재상), 중려, 工共(공공)이라는 관직명으로 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舜이라고 한국고문자연구회 金在燮(김재섭) 회장은 풀이하고 있다.
두번째 秦伯은 진시황의 20대 선조로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 秦穆公(진목공ㆍ기원전?~기원전 621)이다. 춘추시대 秦의 제9대 군주였던 穆公(재위 기원전 660~기원전 621)은 북쪽으로는 河西(하서)를, 서쪽으로는 西戎(서융)에 이르기까지 사방 1000리의 크고 작은 자라 12개국을 제패한 패자로서 秦의 굳건한 기반을 닦은 인물이다.
세번째 派鯨津氏씨는 진시황의 秦이 망하면서 일족을 안전지대인 지금의 경주나 밀양으로 파견한 休屠王(휴도왕, 혹은 休儲(저)王이라고도 한다)의 세력으로 해석한다. 鯨津(고래나루)은 지금 포항 근처의 옛 이름이다.
네번째 투후는 한나라 7대 황제 武帝(기원전 141~87)에게 아버지 休屠王이 金像(금상)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즉 金人祭天(금인제천)했다는 의미에서 金씨로 賜姓(사성)을 받은 金日石單(김일제)다. 漢書(한서) 김일제傳이나 王莽傳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소상하게 김일제 후손들의 활약이나 王莽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김일제의 아버지 休屠王은 누구인가. 金在燮씨는 진시황의 장남 扶蘇(부소)태자의 후예로 보고 있다. 扶蘇의 아들인지, 扶蘇를 측근에서 모신 추종자인지 모른다. 다만 진시황이 갑자기 죽은 후, 帝位(제위)를 동생 胡亥(호해)에게 빼앗긴 扶蘇는 간신들에게 소환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扶蘇 일족은 뿔뿔히 흩어진다. 그 중 한 갈래가 「고구려를 통해(假朱蒙)」 신라 땅으로 들어가 미리 자리를 잡는다. 육로를 따라 한반도 동남쪽으로 진입한 이 세력이 경남 密陽(밀양)으로 들어가 밀양 朴씨 姓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일파는 匈奴(흉노)땅으로 망명한다. 匈奴의 황제 單于(선우)는 일족의 우두머리를 句麗侯(구려후)에 봉한다. 만일 그가 평민이었다면 그런 封爵(봉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扶蘇태자의 혈육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후손 休屠王은 秦을 이은 漢나라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漢의 武帝는 젊은 장수 霍去病(곽거병ㆍ기원전 140~117)을 보내 匈奴를 친다. 霍去病군과 맞서 싸우던 休屠王은 같은 匈奴 일족인 昆邪王(곤사왕)의 꾐에 빠져 죽고 그 왕비와 아들 둘은 漢의 포로가 된다.
漢 황실의 말먹이 노예가 된 두 왕자는 말 사육을 잘 한 데다, 武帝를 암살하려던 자객을 붙잡는 공을 세워 金씨 성과 벼슬을 하사받는다. 형제 중 형이 김일제고, 동생은 金倫(김윤)이다.
김일제는 대략 기원전 135년에 태어나 기원전 8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제가 죽자 漢 황실은 武帝의 陵(능)인 茂陵(무릉)에 陪葬(배장)한다. 陪葬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해당 황제에게 큰 공을 세운 功臣(공신)에게만 배풀어지는 영예다. 김일제의 묘는 현재 西安(서안)에서 40㎞ 떨어진 섬서성 홍평현 남위향 道常村(도상촌), 漢武帝(한무제)가 묻혀있는 茂陵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 지점에 있다.
김일제는 常(상)과 建(건)이라는 아들 둘을 뒀다. 建은 부마도위, 常(상)은 아버지의 작위인 투후 벼슬을 이어받았다. 常은 후손이 없이 일찍 죽고, 建을 이은 國, 國을 이은 아들 當(당), 當의 아들 星(성)도 투후 벼슬을 세습한다. 김일제의 5세인 星이 문무대왕 碑文이 말하는 星漢王이다. 이 星漢王이 경주로 들어와 신라 金씨의 시조 「金閼智(김알지)」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김일제의 동생 金倫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金安上(김안상)은 투후와 맞먹는 都成侯(도성후) 벼슬을 하며 아들 다섯을 둔다. 金安上 또한 9대 宣帝(선제ㆍ재위 기원전 74~권전 49)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宣帝의 陵 杜陵(두릉)에 陪葬된다. 현재 西安 杜陵 동쪽 편에
宣帝의 功臣 무덤 여섯 개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金安上의 묘는 두번째나 세번째 묘일 것으로 중국학계는 추측하고 있다.
金安上의 계보는 다섯아들 중 둘째 敞(창)의 장남, 涉(섭), 또 涉의 장남 湯(탕)으로 이어진다. 湯도 都成侯의 벼슬을 세습한다. 金倫의 5세손 湯이 한국땅 가락으로 망명해와 김해 金씨의 시조, 金首露(김수로)가 된다는 것이 金在燮 회장의 논증이다.
그럼 한나라 황실에서 권력 實勢(실세)였던 김일제의 5세손 星이나 金倫의 5세손 湯이 왜 경주나 김해 땅에 정착했을까.
王莽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투후 當의 어머니 南大夫人(남대부인)의 언니의 남편. 當의 이모부다. 王莽은 한의 10대황제 元帝(재위 기원전 40~33)의 황후 王씨 가문 사람이다. 11대 成帝(재위 기원전 33~7)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王鳳(왕봉)이 大司馬(대사마)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고, 王莽 역시 38세에 재상격인 大司馬가 되어 정권을 잡는다. 王莽은 아홉살 난 平帝(재위 기원전 1~기원후 5)를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으나 서기 5년 어린 平帝를 제거한 후, 9대 宣帝의 손자인 두살짜리 劉嬰(유영)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하다 서기 8년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국호는 新(신).
王莽이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김일제 후예이자 실력자인 金씨 계열의 도움이 컸다. 이에 대해서는 「漢書」 王莽傳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王莽이 전권을 장악한 이후 金씨 계열은 강력한 정치실세가 된다.
그러나 新은 화폐개혁 등 여러가지 개혁작업의 잇단 실패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한 황실 劉씨 집단의 저항을 불러와 15년만에 망한다. 따라서 新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金씨 계열은 살아남기 위해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중국의 遼西(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a치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王莽때 만든 화폐 五銖錢(오수전)이 출토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있다. 王莽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경주에 온 星漢王 「星」이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김해에 온 「湯」이 구지봉에서 알로 태어난다는 金首露의 난생설화 등은 바로 出自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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