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10·26사건이나 12·12사건 등 이미 현대사로 분류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이번에는 퇴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영향력이 있기에 현존하는 권력이라고 볼 수 있는 金大中(김대중) 前(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는 또한 제 이야기를 기록해서 전파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 전달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는데, 한 사람은 朴正熙(박정희) 前(전) 대통령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서 나눈 대화 시간만 해도 아마 스무 시간이 넘을 겁니다. 제 기억으로는 8회 정도의 긴 인터뷰를 했는데, 어떤 인터뷰는 네 시간, 여섯 시간 내내 계속된 것도 있었고, 攻防戰(공방전)을 벌이는 식의 인터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과거의 여러 가지 자료를 발굴해서 ‘趙甲濟(조갑제)의 김대중 연구’라는 시리즈 기사를 <월간조선>에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저의 연구결과, 취재결과의 요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한국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문입니다. 6·15선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선언문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제2항이죠. 제2항을 요약하면,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방향으로 통일을 논의해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2항을 가지고 북한에서는 계속 6·15선언을 실천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약점 잡은 자가 약점 잡힌 자를 갖고 논 6·15선언
6·15선언을 실천하라는 의미는 무엇이냐. 북한은, 6·15선언 2항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으니 연방제 통일방안을 실천하자, 또 실천하기 위해서는 민족대단결에 장애가 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서 남한에서도 김일성, 김정일주의자들이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주자는 억지를 6·15선언을 이행하라는 요구로 포장하여 우리에게 들이대고 있습니다. 마치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독촉하듯이 말입니다.
먼저 6·15 남북공동선언이 어떻게 나왔는가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6월 13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고, 6월 14일 아침에는 金正日(김정일)과 김대중 대통령이 1대 1로 보좌관들과 함께 만났습니다. 이 때 김정일이 開口一聲(개구일성)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오늘 회담을 진행하지 못하겠다. 오늘 텔레비전을 봤더니 남한의 검찰이 人共旗(인공기)를 올린 대학생을 수사하려고 하는데, 지금 민족문제를 놓고 토의하는 마당에 이럴 수가 있느냐, 대통령께서는 저번에도 말씀하셨다시피 만남 그 자체가 중요하니, 만남은 이루어졌으니까 이 길로 돌아가십시오”
김정일이 이렇게 이야기하니 김대중 대통령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아마 그 때 보고를 못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구차한 이야기가 오고가던 끝에 회담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이 때 김정일이 보인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태도는 연장자에 대한 아주 무례한 태도의 정도가 아니라, 약점을 잡은 자가 약점 잡힌 자를 대하는 아주 발칙한 대화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0년 6월 14일, 15일의 상황에서 김정일은 현대 측으로부터 4억 5000만 달러를 받았고 5,000만 달러는 물건으로 받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였죠. 그 사실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만약 그 사실이 폭로되었으면 김대중 정권은 무너졌을 겁니다. 김정일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북한 사람들에게 알려져도 오히려 이것은 조공을 받았다고 자랑할 만한 것이지, 정권퇴진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독재자는 원래 그런 문제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뇌물을 준 사실로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회담 당시 김정일에게 약점을 잡힌 상태였습니다. 약점을 잡고 5억 달러를 받았으면 돈을 준 사람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야 될 사람이, 딱 도착하자마자 ‘돌아가십시오’라는 무례한 말을 했고, 그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6·15선언이 나왔다는 것을 짐작한다면 6·15선언 제2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아는 데 참고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6·15선언 제2항을 파기하지 않는 한 이 조항은 우리에게 계속 굉장한 곤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김정일은 6·15선언으로써 대한민국에 쇠사슬을 채워서 함정에 빠뜨린 것입니다.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김정일·김대중 두 사람이 합의를 한 것이죠. 이 합의가 合憲的(합헌적) 合意(합의)냐, 아니면 일종의 共謀(공모)냐 하는 게 문제입니다.
도대체 6·15선언 제2항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낮은 단계의 聯邦制(연방제)와 남한의 聯合制(연합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北의 연방제 통일방안의 지향점은 ‘한반도 전체의 赤化’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한의 노동당 규약이 천명하고 있는 대로 한반도 전체의 赤化(적화)입니다.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위한 가장 위험한 對南(대남)공작수단이 바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이죠.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통일방안도 하나 있습니다. 盧泰愚(노태우) 정부 때 국회에서 의결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인데, 이것은 金泳三(김영삼) 정부 때 약간 수정되었지만 지금도 유효한 방안입니다.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방안만 우리 헌법에 부합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6·15선언은, 하나는 적화로 가는 통일방안이고 하나는 자유로 가는 통일방안인데도 여기에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까? 하나는 지옥으로, 하나는 천당으로 가는 열차인데 어떻게 공통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무리하게라도 공통점을 찾는다면 출발점이 비슷하다는 정도일 것 같습니다. 출발점이 정말 비슷한지는 나중에 따져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출발점이 비슷하다 하더라도, 즉 열차가 똑같이 서울역에서 떠난다 하더라도 하나는 평양으로 가는 열차고 하나는 부산으로 가는 열차인데 공통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출발지가 같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두 열차를 묶어놓고 출발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기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6·15 선언의 제2항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1단계는 남북 간의 교류를 추진해서 여러 가지 여건이 충족됐을 때 남북 연합으로 간다는 것인데, 이 단계는 양쪽 모두가 함께 독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연락 기구를 두고 있는 형태입니다. 그 이후 완전한 통일을 지향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제시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다릅니다. 원래 북한이 내세운 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한이 모두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위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간판을 하나 덮어 씌워서 국가를 하나로 만들자는 겁니다. 이 자체가 사기인 것이죠. 체제가 다른데 어떻게 국가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세계 역사에서 체제가 다른 나라끼리의 연합이나 연방은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지금 美(미) 합중국 연방은 인종이 다르지만 체제와 이념이 같기 때문에 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은 곧장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추진하게 되면 생기게 될 여러 가지 부작용을 고려해 만들었다는 중간단계인 것이죠. 이 단계에서는 남북한의 양쪽 지역 정부가 국방·외교를 행사할 수 있지만 연방제 국가로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연방제는 하나의 국가 하에서 양쪽 정부가 약간의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국가인 대한민국이 ‘남한지역 정부’로 격하되니 이것과 한국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구상해온 통일방안이 문제인데, 여러 가지의 명칭 상의 변경이 있긴 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 중 제1단계는 바로 남북연합입니다. 2단계에서는 연방으로 가고, 3단계에 대해서는 이 분이 이야기를 안 하고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자유통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 첫 번째 단계인 남북연합제와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사이에는 분명히 유사성이 있습니다.
6·15선언 2항의 남측 ‘연합제’의 정체는?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6·15선언 2항에 나오는 남측의 ‘연합제’라는 통일방안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실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에서 추구하는 연합제와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방안은 단계도 다를 뿐더러 아무런 상호관계가 없고 유사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적인 통일방안은 북한의 연방제와 비슷하다고 해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분명히 유사성이 있어요.
합의해 준 6·15 선언의 제2항에 나타나는 통일방안의 문제점은 누구의 연합제냐 하는 부분이 불분명하는 점입니다. 민족의 앞날을 놓고 남북 간에 합의를 한 것인데, 국가의 大事(대사)인 만큼 불분명하면 안 되죠. 지금까지 논의된 결과를 설명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2000년 6월 16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와서 국무회의를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일을 설득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연합제는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었던 3단계 통일방안의 연합제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 다음날인가 李會昌(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그 문제에 대해 따졌습니다. 그 연합제는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공통점이 없는데 왜 합의를 했느냐고 따지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아, 그것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부터 있었던 우리나라의 연합제 통일방안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말을 바꾼 것이죠. 이것은 말을 바꿀 성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회창 총재에게 한 이야기는 무시하고, 6월 16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보고를 우리가 진실로 믿는다면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자기의 私的(사적)이고 국가의 공인을 받지 않은, 즉 국회에서 의결도 거치지 않고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지도 않은 개인적인 통일방안을 가지고 가서 그것과 비슷한 김정일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합의했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법이라는 규정이 가능합니다.
연합제와 연방제를 연결시켜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더불어 그 방향으로 추진하기로 했다는 6·15선언의 제2항 부문은 대한민국이 자유통일을 향해 제대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1991년 당시 남북 사이에 맺은 기본합의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북합의서의 내용은 참 잘된 내용입니다. 6·15선언이 김대중의 약점을 잡은 김정일의 페이스대로 맺어진 만큼 대한민국에 毒(독)이 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본다면, 1991년에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우리 측에 아주 유리하게 되어있고, 실천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로 돌아간다면 남북 간에 다른 새로운 약속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6·15 선언의 배경이 되는 對北(대북)불법송금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념과 정체를 아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건국 정당성 확신 안보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를 보면 중요한 맥락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해방 직후 이 분은 좌익 활동가였습니다. 신민당이라는 좌익정당의 목포 지역 선전부장을 했죠. 파출소 습격에 연루되는 등 아주 활발하게 좌익운동을 했다는 것은 본인도 인정을 한 부분이고 수사기록에 의거해서도 다 확인된 내용입니다. 신민당이 다른 두 당과 합쳐 남로당을 만들 때는 본인은 남로당을 따라가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고, 그 주장을 번복할 만한 증거를 수사기관이 제공한 적도 없습니다.
본인은 대략 1946년에, 그 단계에서 전향을 했다고 얘기합니다. 다만 전향한 좌익인사들을 모아서 구성한 輔導聯盟(보도연맹)에서 자문위원 비슷한 자리를 하나 맡아서, 돈을 주는 사람으로 籍(적)을 걸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일찍이 좌익운동을 활발하게 한 20대 중반의 시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사관이나 인생관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의 이념적인 지향점은 그 후 성장기를 지나면서 바뀔 수는 있지만 안 바뀌는 부분도 있습니다. 안 바뀐 부분은 무엇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책이나 말에서, 특히 대통령이 된 이후 공식적인 연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김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언급은 하지 않지만 정통성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좌-우익 대결에서 左翼(좌익) 편에 선 적이 있는 김대중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대해 국민 대부분이 느끼고 있는 애정이나 자랑 등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 이 분의 생애에서 중요했던 시점은 유신 쿠데타죠.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유신 조치 이후 이 분은 일본과 미국 등에 있으면서 親北(친북) 인사들과 손을 잡고 일본에서 韓民統(한민통)이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그 조직에서 의장으로 취임하기 며칠 전인 1973년 8월 8일에 납치돼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죠. 만약 李厚洛(이후락) 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한민통의 의장으로 활동했을 것입니다.
한민통이라는 단체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친북 한국인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공작금도 받고 해서 김대중 씨를 추대하는 식으로 만든 단체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법원은 이 단체를 反국가단체로 확정판결 했죠. 한민통이 反국가단체라는 것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북한 공작원이 해외 민주화인사로 둔갑, 김대중 찾아와 악수
1980년에 김대중 씨는 내란선동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유죄선고를 받은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선동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한민통에 首魁(수괴)로서 가입을 했다는 점입니다. 작년에 이 분이 재심 신청을 해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한민통에 가입한 것에 대한 무죄는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刑(형) 선고는 失效(실효)됐지만, 아직도 유효하다고 봐야 됩니다.
한민통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郭東儀(곽동의)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민통의 조직부장이 됐는데, 작년에 해외민주화인사 초청이라는 형식으로 입국해서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 악수를 했습니다. 곽동의는 우리 수사기관에 의하면, 밀항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서 몇 달 동안 공작교육을 받고는 다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들어온 북한의 공작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물론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불법입니다.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기도 하고, 그 행위 자체는 나름대로 처벌도 받고 비판받아야 될 부분입니다. 이후락 정보부장이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것이 분명한 김대중 납치를 왜 감행했느냐에 대한 부분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중 납치에 대해 이후락 씨가 몇 번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이것이죠.
‘가만두면 한민통이라는 조직이 김대중 씨를 업고 망명정부 비슷한 활동을 해가지고 북한의 김일성과 직접 상대를 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납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후락 씨가 김대중 납치를 결심하게 된 동기에는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윤필용 사건을 통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니까 박 대통령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점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김대중 납치 이유에 대한 이후락 씨의 증언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해방직후 좌익 행동가 시절, 한민통을 만든 행동, 그리고 6·15 선언 전후 김정일에 대한 굴욕적인 태도를 동시에 연결시켜 보아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간과 이념과 정책을 다 포괄하는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對北송금사건은 <월간조선>이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특종 중의 하나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사실관계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2003년 12월호 <월간조선>에는 金演光(김연광) 편집장이 對北송금사건 수사기록을 다 분석해서 쓴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유료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남북 정상회담 뒷거래의 전모’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이 기사에는 이 사건의 전모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왜 <월간조선>이 對北불법송금사건과 관계를 맺게 됐었는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자면, 2002년 5월호에서 현대가 북한에 4억 달러를 불법으로 제공했다는 설이 있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이것은 미국 국회의회조사연구소에 근무하는 래리 닉시라는 사람이 쓴 논문을 인용을 해서 그 사람을 직접 인터뷰해 쓴 기사입니다. 이것을 밑줄 그으면서 읽었던 엄호성이라는 한나라당 의원이 자기 나름대로 조사를 해서 그 해 9월 정기국회 때 폭로를 하게 됩니다. 김대중 정권 시대였기 때문에 취재에 여러 가지 제한도 있었고 수사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들어서서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對北송금에 대한 특검, 즉 특별검사가 임명돼서 수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朴智元(박지원), 權魯甲(권노갑) 같은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는가 하면, 鄭夢憲(정몽헌) 씨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에서 <월간조선>이 상당히 중요한 특종을 여러 번 했습니다. 2003년 12월호는 수사기록을 모두 얻어서 분석해서 실었는데 사실관계 면에서는 결정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법송금 일본 공안기관이 먼저 인지한 듯
이 對北송금사건에 대해 지적할 만한 것이 참 많습니다. 對北송금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을 추적 해보면 김대중 정권의 속성과 남북 간의 어떤 뒷거래,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보다도 행동을 보면 사람의 생각과 정책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對北송금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요시다 다케시라는 귀화한 재일교포가 있습니다. 일본 공안기관에서는 북한 공작원으로 보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1998년에 현대 鄭周永(정주영) 씨가 소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간 일을 주선해주면서 현대 측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또한 현대 측에 고문으로 고용되기도 해서, 이 사람이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것을 정몽헌 씨한테 이야기하고, 정몽헌 씨는 김대중 정권에게 전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씨를 특사로 임명하여 남북 간에 이뤄진 비밀협상의 첫 회담이 2000년 3월, 싱가포르에서 있었습니다. 이 싱가포르 회담에 나타난 사람 중에 재미있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한국 측 대표단 속에 낀 사람이 아까 말한 요시다 다케시라는 일본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김영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김영완은 그 후 여러 가지 비자금 사건에 이름이 등장했는데, 어떻게 보면 김대중 정권 측근들의 비자금 창고지기, 비자금 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국가 大事(대사)를 논의하는 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일본 사람과 지금은 수배자가 된 김영완이라는 사람이 남북 비밀 접촉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저는 요시다 씨가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정보를 일본 공안기관에 알려줬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의 활동 무대는 일본입니다. 일본이 싫어하는 북한과 접촉하는데, 잘못하면 일본 경찰에 의해 혼이 날 수도 있고 혹은 처벌받을 수도 있는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自國(자국)의 공안기관과 협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본 공안기관이 먼저 김대중 대통령의 對北불법송금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곧 한국에 대한 약점을 잡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의 약점을 잡고 있는 것이 한국에 대한 약점을 잡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소위 남북간의 민족 사업을 논의한다는 자리에 일본 국적자가 입회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장사꾼끼리의 흥정…적에게 약점 잡힌 국가정보원
이처럼 처음부터 남북정상회담 협상은 公(공)과 私(사)가 무너진 상태에서 일어났습니다. 협상하는 과정이 특검 수사기록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걸 읽어보면 두 頂上(정상) 간에 만나서 이야기해야 될 구체적 정책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어요. 전부 돈을 얼마 줄 것이냐 하는 흥정이죠. 제일 처음 북한은 10억 달러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많다, 깎자’하는 흥정 과정에서 5억 달러가 됐죠. 이것은 장사꾼끼리의 흥정을 남긴 기록이지, 민족통일 같은 것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후 결국 현대가 4억 5000만 달러의 돈을 댔습니다. 현대가 돈을 댈 수 있도록 산업은행이 빌려주고 해서 결국 우리가 낸 세금까지 포함한 우리의 國富(국부)가 김정일에게 전달된 것인데, 그 중에서 2억 달러는 국가정보원이 전달했습니다. 국가정보원은 그 2억 달러를 북한의 對南(대남)공작기관인 대성상사 등의 계좌로 넣었습니다. 주로 홍콩·마카오에 있는 김정일 해외비밀 계좌로 넣어준 것이죠. 이 일을 국가정보원이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노리는 主敵(주적)의 對南공작기관, 그것도 김정일의 개인비자금 계좌로 우리의 防諜(방첩)기관이 돈을 보내주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는 정보기관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윤리를 파괴한 짓입니다.
이 일을 한 뒤에 국가정보기관이 북한의 통일전선부 사람들과 만나서 당당하게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정보원이 약점을 잡혀버렸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 할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주려면 북한 당국으로 돈을 줘야지 왜 對南 정보기관에 돈을 줘서 군사비나 對南공작비로 쓰이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제일 중대한 문제는 무엇인가. 모든 對北불법 송금사건의 지령관계에서 제일 위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특검이나 검찰이 진술서 하나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헌법을 지키는 변호사모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국가반역행위로 고소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반역혐의로 고소를 당할 정도의 전 대통령에게 진술서 한 장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법치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라는 것을 대한민국의 公(공)기관이 스스로 증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혜를 본 건 북한과 현대, 손해 본 건 대한민국의 국익과 안전
그렇다면 현대는 무슨 특혜를 받았느냐. 현대 그룹의 요직에 있었던 李益治(이익치)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약 20조원의 특혜를 받았습니다. 당시 흔들리고 있던 현대하이닉스와 현대상선을 구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에서 정부가 봐 주는 바람에 약 20조원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익치 씨가 증언한 내용이 수사기록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그룹은 장사를 잘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해를 본 것은 대한민국의 국가이익 아니겠습니까? 또한 대한민국의 안전과, 대한민국의 富(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개최된 6·15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과 아주 근사한 회담을 해서 중대한 양보를 얻어낸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6·15 공동선언 제2항이라는, 우리에게 독이 되는 것을 받아서 마셔버린 꼴이 됐죠. 이게 뭡니까? 돈은 돈대로 갖다 바치고, 국가 이익은 국가이익대로 갖다 바쳤으니 말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러한 행적이 국가보안법이나 이적죄에 해당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조사를 해봐야 압니다. 통치권 논리를 주장하면서 죄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법정에서 한 번 가려야 될 문제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고도 조사 한 번 받지 않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앞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행동을 따라 배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반역면허증을 주는 나라는 자살하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한 冊에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이런 모든 수상한 현상의 진원지는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대중 씨의 생애를 연구하면 상기 50개 정책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일관성이 발견된다, 김대중 씨의 일관성, 즉, 대한민국과 북한 주민들에 대해서는 냉담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그의 대북관과 국가관은 그가 20대 초반에 좌익 행동대원이었다는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젊었을 때 가졌던 이념적 세계관은 나중에 설사 그 사람이 전향했다 하더라고 그의 세계관에 찌꺼기로 남아있게 된다. 김대중 씨의 경우 張勉(장면)정부 시절 빼고는 줄곧 역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감시당하고 납치당했으며 구속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내용을 살펴보건대 억울한 면도 있으나 좌경모험에서 온 처벌인 경우도 있다.
이런 김대중씨에 대해서 역대 북한 정권은 우호적인 응원을 보냈고, 포섭대상으로 삼아 공작한 증거도 있다. 김대중 씨로는 대한민국 역대정부에 대해서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감정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반감 내지 냉담함으로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중 씨의 일관된 대북관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권력에 의지하여 상기 50개 항목이 제시하는 바와 같은 정책과 현상들로 실천되었다. 그의 좌파적 세계관, 對北觀(대북관)은 하나의 가치관 내지 신념으로 정착되었다. 여기에다 노벨상을 받겠다는 오랜 집착이 결합됐다. 욕심과 이념이 한 덩어리로 되어 그 행동을 지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익과 헌법과 원칙은 크게 망가졌다.
김대중 씨는 1972년에서 73년 사이 북한정권의 하수기관인 한민통 결성과 관련하여 1980년에는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보여준 정책들은 그런 유죄선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념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위 50개 항목의 성격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정체성, 헌법정신 등 우리 체제의 핵심 가치관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이다. 우리 헌법이 권력자에 의한 이런 도전까지도 허용할 수 있는 것인지 국민들은 그 헌법체계에 물어볼 의무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한국 사회가 크게 좌경화됐다는 사실은 여론조사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2001~2년, 약 2년 동안 매월 여론조사를 했는데, 조사를 할 때마다 물었던 내용이 있어요. 당신은 김정일을 惡(악)으로 보느냐, 善(선)으로 보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당당하게 나는 김정일을 선으로 본다는 사람이 10%에서 12%가 됐습니다. 김정일을 악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선으로 본다는 말은 차이가 있죠.
이념적 내전상태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
2004년에 <프론티어 타임즈>라는 인터넷 신문에서 창간 기념 여론조사를 했더니, 미국과 북한이 전쟁을 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질문에 북한과 손잡고 미국과 싸워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20%가 됐습니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 좌경화가 급속히 진행됐고, 우리의 친구를, 우리의 동맹국이고, 우리의 우방국이고, 우리의 해방자이기도 했고, 우리에게 선진문물을 가르쳐준 개화기의 친구이기도 했던 미국을 주적으로 돌리고, 우리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포함해서 수많은 도발을 감행했던 김정일 정권을 친구로 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20%로 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20%는 힘없는 20%인가. 이 20%는 젊고, 권력 속에 있든지 권력과 가까이 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죠. 권력을 동원할 수 있고, 금력을 동원할 수 있고, 정보를 동원할 수 있고, 수사기관을 동원할 수 있는 등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20%가 있다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황이 지금 행동으로 안 옮겨져서 그렇지, 마음속으로는 이미 6·25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념적 6·25, 이념적 내전상태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10%가 20%로 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소위’ 햇볕정책입니다. 왜 제가 ‘소위’라고 하느냐. 햇볕정책의 의미는 북한 주민들에게 햇볕을 쬐어주어서 북한 주민들이 보다 큰 자유를 누리고 물질적인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나 집행되는 과정을 보면 햇볕은 김정일에게만 쬐여졌습니다. 김정일을 위한 햇볕이었죠. 이제 탈북자들까지도 우리가 굶어죽어도 좋으니까 제발 북한에 대해서 원조를 안 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할 정도가 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의 기조로 내세운 화해와 협력이 뭡니까? 북한 주민과의 화해 협력이라 하면 말이 되는 것 같죠.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상대한 것은 북한 주민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이었지 않습니까? 김정일과의 화해라는 것은 민족 반역자와의 화해, 전쟁범죄자, 테러리스트와의 화해죠. 그럼 그 말을 한 번 바꾸어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김정일과 화해할 일이 있습니까? 일방적인 피해자가 반성않는 가해자와 화해한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햇볕정책의 본질은 민족반역자, 테러리스트와의 화해
그럼 협력이라는 말도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북한과의 협력이라고 하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북한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김정일, 아니 김정일이라는 말도 빼고, 김정일이라는 자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 즉 민족반역자, 독재자라는 말을 집어넣어 봅시다. 그럼 민족반역자와의 협력, 테러리스트와의 협력이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이 한 일의 실체는 민족반역자와의 화해, 민족반역자와의 교류, 민족반역자와의 협력입니다. 이것이 바로 햇볕정책의 본질인 것입니다.
다시 6·15 선언으로 돌아가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 마디 말이 생각납니다. 여러분들은 하도 정치인들의 거짓말에 많이 속아서 기억이 잘 안 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 만나서 나눴던 대화 중 있었던 이 말 한 마디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했습니다. 특히 미국 기자들과 만날 때마다 자랑을 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김정일이 통일된 후까지도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東北亞(동북아)에 평화가 온다 하는 이야기를 하더라. 따라서 김정일은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원치 않는다” 라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전한 이야기인 만큼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게 사실이라면 남북 간에 긴장완화는 이미 된 것이고, 남북 간에 제일 큰 기본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북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김정일은 2001년 러시아에 가서 푸틴을 만나 발표한 공동성명서에도 즉각적인 미군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럼 어느 것을 믿어야 하느냐. 그동안 거짓말을 많이 한 前歷(전력)이 있는 김대중 씨의 말을 믿어야 하느냐, 아니면 김정일이 푸틴과 함께 발표한 국가 간의 공용문서를 믿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 저를 포함한 많은 전문가들이, 이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확하게 전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01년 8월에는 林東源(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이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洪思德(홍사덕) 씨가 여기에 대해서 물으니까 임동원 씨가 이야기하기를, 그 때 김정일 위원장이 말한 주한미군 계속 주둔 허용 발언의 취지는 지금의 주한 미군이 있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고, 남북한에 중립화된 또는 對北(대북) 적대 정책을 포기한 주한미군이면 통일 이후까지 있어도 좋다는 말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이런 기사는 사실 1면 톱에 크게 보도가 되었어야 할 내용이죠. 이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과 완전히 다르다, 그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크게 보도되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언론이나 정치인들이나 정작 중요한 것은 크게 취급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는 것은 크게 취급하는, 大小(대소) 분간을 잘 못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도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이야기가 맞다고 봅니다. 김정일이 한 말, 주한미군이 계속 있어야 된다는 말의 의미는 그의 말대로 對北 적대정책을 포기한, 즉 남북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냥 중립화 되어버린, 하나의 평화유지군 정도의 있으나마나한 주한미군이 되면 있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당시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였는데, 金大中씨는, 김정일이 이렇게 변했으니까 빨리 김정일과 만나서 美北(미북)수교를 하든지, 평화협정을 맺자는 말을 하기 위해서 미국 기자들한테 이것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떻게 한반도의 안전 보장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주한미군에 대한 이야기를 대통령이 이렇게 과장·왜곡할 수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5년 동안 대통령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됐나 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남북 간에 평화를 증진시켰다는 공로였던 모양인데, 과연 평화가 증진이 되었느냐 하는 점은 2002년 6월 29일에 있었던 서해사태가 증명하죠. 북한으로부터의 도발이 없었던 대통령 시절은 한 번 있었습니다. 바로 盧泰愚(노태우) 대통령 시절인데, 이때는 북한으로부터의 무장도발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동구권이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근과 채찍으로 북한을 잘 다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반드시 이겨라. 그러나 먼저 쏘면 안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서해에서 두 번의 군사적인 충돌이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쪽에서는 금강산을 통해서 돈도 받고 뇌물도 받는데 말입니다. 김정일, 이 인간은 어떻게 된 인간인지 뇌물을 받으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우리 옆구리를 계속 내질렀습니다. 김정일은 뇌물 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조금 미안해서라도 뇌물을 준 사람을 잘 대우하기 마련인데, 5억 달러의 뇌물을 주는 측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오만방자하게 대했듯이, 현대의 금강산 관광을 통해 돈을 받으면서도 한 쪽으로는 서해사태를 도발했던 것입니다.
북한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금강산 관광이라든지, 햇볕정책이라든지, 김대중 대통령과의 교류 같은 일들이 많아질수록 체제유지 면에서는 불안해집니다. 남북 간에 사람들이 교류하면서 평화가 오는 듯 싶게 되면 북한 사람들을 강하게 압제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가끔 긴장을 조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해에서 그렇게 난리를 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김정일은 북한 주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통일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참자, 우리가 美帝(미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이런 식으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승리의 날은 반드시 온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라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이 내용이 근거 있는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1999년 서해에서 충돌이 일어났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먼저 쏘아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국방부에 했어요. 얼핏 들으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말이 안 됩니다. 악당과 결투하러 나가는 보안관에게, ‘너는 절대로 악당과 싸워 이겨야 된다, 그러나 너는 먼저 총을 뽑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2002년 6월 29일, 이 날은 우리나라 축구팀이 대구에서 터키와 3, 4위를 가린 날이 아닙니까? 이미 며칠 전부터 북한의 경비정이 포신을 낮춰서 조준자세로 남쪽으로 침범했다가 올라가는 것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해군에서도 이것은 도발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보고를 올렸는데, 그 보고가 국방부 장관에게 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색도 되고, 장관 또한 햇볕정책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리의 교전수칙은 ‘먼저 쏘면 안 된다’ 였습니다. 도발하기 위해 조준자세로 내려오는 배에 대해서도 옆에 가서 일단 경고 방송을 하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좋은 표적감인 배의 옆구리를 측면으로 갖다 대고 경고방송을 하러 갔다가 맞은 것 아닙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침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자살해 버린 거죠. 경고 사격을 했었어야 하는데, 그 때는 경고 사격도 못하게 했습니다. 아니, 넘어오면 일단 경고사격을 해야죠. 최근에 경고사격을 했다고 말썽이 나서 우리 軍(군)의 몇 사람이 옷을 벗었습니다만, 무장하고 월경하는 배에 대해 경고 사격도 못하게 하는 이런 反군사적인, 反국가적인 지침이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만들어진 겁니다. 이 사태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념적 가치관을 결부시켜서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主敵(주적)개념을 포기해야 된다든지, 국가보안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대내적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책 추진이 있었고, 그 총체적인 결과는 아까의 설문조사 결과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 안에 우리의 동맹국인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북한과 손을 잡고 미국과 싸워야 된다는 20%의 국민이 있는 겁니다. 이 20%의 국민과, ‘아니다, 그래도 미국과 손잡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50%, 나머지 ‘모르겠다’파 가 30%인 현실, 말하자면 적과의 동침상태가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책임일 것이고, 법률적인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저의 얘기는 일단 마치고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질의응답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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