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를 산 지식인들에게 위로를

과거사를 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고뇌하고 또 눈물 흘려가면서 역사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

현민(玄民:兪鎭午 박사의 아호)선생의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인 금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한 세미나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다가 보니까 일제 때에 살아온 지식인들의 고뇌와 슬픔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눈물이 저절로 흐를 지경이 되었다. 이대로 있을 일이 아니라 나만이라도 일제(日帝)를 어렵게 살아온 그들의 처지를 변명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집안의 숙항(叔行)뻘인 심산(心山: 金昌淑)과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실명(失明)후 돌아가신 증조부의 얘기만 듣고 자랐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내입에는 일제(日帝)라는 말보다는 왜정(倭政)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화식집이나 일식집이라는 말보다는 왜식집(倭食)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편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日帝를 살아온 지식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적대감도 어느 정도 없지 않았다. 특히 倭政 때에 우리 집안식대로 말하면 <왜놈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이나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온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한 부러움이 질투심으로 변해 있어 그리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다.

남들 모두 가는 보통학교에 가려다 조부님에게 붙들려, 왜놈학교에 가려는 놈도 사람이냐는 호통과 더불어 허리춤에 찼던 책보가 불살라지고 나서부터 시작된 내 부친의 유랑생활은 그 자식 때까지 이어져 이제는 고향에 선영(先塋)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집안 내력을 보면서 日帝 때 모두가 우리 집안 같기만 했으면 과연 이 나라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玄民 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라도 친일로 매도당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을 위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日帝 때를 살았던 지식인들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여기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마자 자결로 항의한 수많은 열사들은 제외하고 한일합방이 되고 난 이후의 일들만 가지고 얘기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애국지사들이다.
국내외에서 抗日 독립운동에 앞장서 온 분들, 의사(義士)와 열사(列士)와 지사(志士)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중에는 나중에 변절한 분들도 많이 있다.
둘째는 친일 반역자들이다.
을사5적은 그만두고라도 日帝의 주구노릇을 하면서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이는 등의 악랄한 反민족적 행위를 자행한 자들이다.
셋째는 미래를 준비해온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학교선생이나, 판검사, 변호사, 지방행정관과 같은 지식인과 농촌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넷째는 스스로 은둔생활로 일관한 사람들(節士)이다.
이중에서 첫째와 둘째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크게 시비걸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 은둔생활을 한 분들은 日帝가 망할 때까지 일체 자신을 드러내 놓지 않았으니 누구도 알 수 없을 일이다. 말하자면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째로 분류된 지식인들에 관한 평가다.
미래를 준비해온 양심적 지식인들인 이들은 대표적으로 인촌(仁村:金性洙) 선생이나 玄民 선생처럼 우리 민족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本意 아니게 惡意的 비난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다.
이들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분들이다.
그것은 민족사업이다.
日帝의 관리를 키우고 조선 사람을 일본사람으로 개조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온 日帝의 교육정책에 반발하여 조선인의 조선학교를 세워 조선인을 키워보자는 생각. 日帝를 대변하는 언론에 맞서 조선민족을 대변하는 언론을 창달해 보자는 생각. 일본사람들이 만드는 물건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이 만드는 물건을 써야 비로소 조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운 민족사업을 키우고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참아가자는 생각.
이러한 하나의 목적 때문에 이들이 당해온 수모와 아픔과 굴욕감과 절망감을 이겨내기 위해 인내하면서 흘린 눈물을 지금 누가 가히 알아 줄 수 있을까? 새파랗게 젊은 왜놈으로부터 <야, 너 아무개지?> 하면서 만세 부르라고 하면 만세 부르고, 학생들을 동원하라고 하면 동원하고, 연설하라면 연설하고, 뒤돌아서서는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그들의 인내와 고뇌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 아닌가해서다.
과거사를 캔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깊이 고뇌하고 또 눈물 흘려가면서 역사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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