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1899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소련의 붕괴를 목격하고 1992년에 사망한 위대한 자유주의 사상가이다. 197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그가 쓴 책중에는 1944년에 나온 '노예가 되는 길'(The Road to Serfdom)이 특히 유명하다. 이 책의 주제는 '왜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가 탄생하는가', '왜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가' 따위이다.
이 책의 한 章은 '왜 最惡이 頂上에 오르는가'이다. 국가반역적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金大中씨나, 저주의 言術로써 한 기업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盧武鉉씨, 그리고 車中에서 넥타이로 아내를 목졸라 죽여놓고 태연히 출근까지 했던 운동권 출신이 어떻게 하여 대한민국의 頂上인 청와대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분석이 이 책중에 있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눴다. 한 그룹은 높은 교육을 받은 知的으로 우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교양이 있기 때문에 생각과 취향이 다르고 어떤 특정한 가치관에 경도되지 않는다. 독재자들은 이들보다는 원시적이고 서민적인 본능을 가진 대중을 노린다. 대중이 꼭 무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비슷한 가치관과 취향을 가졌고 독립성과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 最多 군중을 지지자로 확보하기 위한 최대 공약수적인 정책과 戰略도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재자들은 이 低수준 계층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 지지기반을 넓히려 한다. 여기서 2단계 전략이 나온다. 양순하면서도 잘 속는 대중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선전戰이다. 이 그룹은 자신의 고유한 신념체계가 취약하므로 미리 만들어놓은 가치관을 그들의 귀 속으로 자주 주입시키면 그들의 열정과 감정을 흥분시켜서 전체주의 정당원으로 흡수할 수 있다.
세번째 전략은 네거티브 프로그램이다. 인간의 본성은 긍정적인 프로그램보다는 외부의 敵에 대한 증오심이나 내부의 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을 중심으로 뭉치기 쉽게 되어 있다. '우리'와 '그들'을 대칭시키고, 외부 그룹에 대한 공동의 싸움을 선동하는 것은 지지그룹을 단합시키기 위한 신념을 만들어내는 데 필수적 구성요소가 된다. 외부의 敵에 대한 투쟁심을 선동하는 것은 자신들의 지지층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불러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나치는 내부의 敵으로서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했고, 소련에서는 地主들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여 지지층을 확대 강화했다.
하이에크는 전체주의자들이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인간 본성이 가진 야수성을 선동하면 저변층 사람들의 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인간이 가진 열등감이나 부정적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 숫법이 이들 저변층에 먹혀들 만큼 저질스러워야 한다.
한국의 좌파정권이 그동안 방송 등 선전매체를 총동원하여 벌여온 계층갈등 조장, 양극화 선동, 서울강남주민 공격 숫법은 하이에크가 말한 바 전형적인 전체주의 숫법이다. 이런 좌파 저질문화 속에서는 그런 데 어울리는 사람들만이 출세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개인의 양심은 함몰되고 집단적인 가치관에 종속된다. 그 집단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은 다분히 좌파적이다. 좌파적이란 것은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私생활에도 권력이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독재가 아니라 전체주의적이다.
개인은 양심이 있지만 집단은 없다고 한다. 사회주의, 전체주의 등의 집단주의는 인간 생명의 존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집단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권, 양심, 자유를 탄압하게 된다. 전체주의는 기본적으로 저질들의 정권이기 때문에 증오, 갈등, 분열, 욕설, 거짓말 같은 저급한 문화를 퍼뜨린다. 이런 가운데서 최악의 인간들이 그 사회의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하이에크가 한 62년 전의 예언이었다. 이 예언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적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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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서
제목: 2004년 2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嚴相益 변호사의 사건 實錄-권력·검사·주먹·벤처사기의 혼란스러운 변주곡'제하의 기사 게재와 관련한 진술
재판부 귀중:
진술인은 2004년 당시 月刊朝鮮(주)의 대표이사 겸 편집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위의 기사 필자인 嚴相益 변호사와는 1990년부터 알고 지내온 관계입니다. 특히 嚴 변호사는 필력이 대단하여 진술인이 편집장으로 있을 동안 月刊朝鮮에 여러 번 좋은 글을 기고한 사람입니다. 그는 변호사로서 관계한 12.12 사건-5.18 사건 재판 과정을 實錄으로 기고하기도 했고, 자신이 맡았던 사건의 내막을 기자 이상의 정밀한 취재로써 기사화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인은 嚴 변호사는 정의감이 아주 강하고 문제의식이 높은 분이라는 평가를 내리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글에 대해선 아주 높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써온 글들이 공정하고 정확하며 공익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으므로 그가 가져온 기사들은 거의 수정 없이 게재되었습니다. 2004년 2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嚴相益 변호사의 사건 實錄-권력·검사·주먹·벤처사기의 혼란스러운 변주곡' 題下의 기사도 嚴相益 변호사에 대한 오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게재될 수 있었습니다.
이 기사의 제목붙이기와 편집은 월간조선 편집실에서 한 것인데 편집장이었던 제가 보아서도 공정한 제목과 편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등장한 인물들, 예컨대 呂運桓, 洪準杓, 李容湖씨에 대한 嚴相益 변호사의 기술도 공정하였고, 큰 사건의 내막과 진실을 알리려는 입장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술인은 이 기사에 등장한 어떤 인물과도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이 기사를 교열하고 편집함에 있어서는 정확성과 공익성 이외의 고려는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진술이 진실임을 보증합니다.
2006년 11월30일
진술인: 趙甲濟
주민등록번호: 461109-*******
주소: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1163(MO2)
金大中 정권의 부패 구조를 드러낸 「이용호 게이트」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
그 뒤엔「모래시계」의 인간 드라마가 있었다. 呂運桓의 두 사람-洪準杓 검사와 李容湖, 그리고 진실
嚴 相 益
1954년 경기 평택 출생. 경기高·고려大 법대 졸업.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軍 판사 역임. 수필집 「피고인 각하」, 「임종연습」, 「욕심 그릇이 작을수록 행복하다」 등 발표.
嚴相益 변호사
『할 말 있습니다』
『혹시 呂運桓이라고 아십니까?』
전화 저쪽에서 낮고 조용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년 전 신문에서 삽화와 함께 보았던 굵직한 기사제목이 떠올랐다. 여러 호텔과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조직폭력의 보스로 「李容湖 게이트」 때 政官界에 100억원을 뿌렸다는 거물 로비스트였다.
『이름은 기억합니다만…』
변호사인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金大中 前 대통령에게 조폭정권이라는 낙인을 찍은 원인이 바로 그였다.
『그분이 꼭 한번 뵙기를 원합니다』
『왜죠?』
나는 의아했다. 그는 판결이 확정되어 징역형을 거의 다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변호가 필요 없었다.
『꼭 밝혀야 할 말이 있답니다』
나는 은근히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대검중수부, 국회, 특검의 조사에서도 끝까지 입을 굳게 닫았던 사나이였다.
국제적 주먹
나는 3년 전의 그에 대한 보도자료들을 살펴봤다. 그는 전국주먹을 통일했던 김태촌과 서방파 동기생이었다. 1988년 11월경 그는 전라도 대표로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 야쿠자 조직과 사카즈키(맹세를 위해 술을 마시는 의식)를 갖고 연계했을 정도였다. 그는 1990년 말 전남 광주지역을 평정하고 전국구급 폭력조직의 代父로 군림하면서 광주, 제주에서 호텔을 경영했다. 그 외 「빠찡꼬」(슬롯머신), 유흥업, 증권 등 곳곳에 손을 뻗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가 운영하는 제주관광호텔에 대통령의 아들 金弘一 의원도 묵었다. 그것은 정권이 그의 배경임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침몰시킨 것은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진 洪準杓 의원이었다. 검사였던 洪準杓 의원이 1991년 당시 呂運桓을 수사하자 거물 정치인들이 검찰총장을 항의방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계 및 검찰에 거대한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것 같았다. 「李容湖 게이트」가 터지면서 보도된 그의 배경 역할이 거의 비슷한 구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를 조사한 한 검찰간부는 『呂運桓은 입을 열면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라고 하면서 『그걸 아는 呂씨가 자신의 비호세력을 털어놓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어쨌든 우리 사회의 태풍의 핵심이었던 그를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모래시계」의 조폭 모델
오후 1시경이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서울구치소의 접견실 벽을 후끈 달구고 있었다. 접견실 한가운데 작은 책상을 두고 나는 부리부리한 눈에 각진 턱을 가진 50代 사나이와 마주 앉았다. 呂運桓이었다. 강한 집념과 높은 지능을 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변호사님은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할 말 다하고 쓸 글은 다 쓰는 걸로 압니다. 그래서 뵙자고 청했습니다』
그가 나를 치켜세웠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사람들 앞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면서 오히려, 『呂運桓씨! 자신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나 알고 싶었다. 그게 그릇의 크기이기도 했다. 인간 내면의 크기는 사형수가 대통령보다도 거물일 수 있는 것이다.
『건달도 아무것도 아닌 지방의 조그만 장사꾼일 뿐입니다』
『건달 두목이 아닙니까?』
내가 되물었다.
『어릴 적 건달들과 어울려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성한 신화를 만들었고 洪準杓 검사가 저를 더욱 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그분이 정의의 검사로 출세하는 데 반비례해서 저는 악역을 맡아 왔습니다. 저에 대한 그런 이미지만 없었다면 신문 일면에 金大中 정권이 조폭정권이란 제목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를 보면서 모래시계에서 조폭두목 역을 맡았던 탤런트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주먹세계도 룰이 있습니다. 아무 경력도 없이 하루아침에 돈이나 지위만으로 보스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의 과거를 잘 살펴보십쇼. 폭력배로서의 화려한 前歷(전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 없이 두목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주먹세계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조폭의 두목으로 기소된 점에 대해 법원에서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영원히 두목 칭호입니다』
법원은 그가 두목은 아니고 「두목급 고문」이라고 하면서 징역 4년을 선고했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습니까?』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큰아들이 이제 곧 서른 살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아래 둘째 놈이 있습니다. 전 비록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업종의 일을 했지만 자식들 뺨 한번 때린 적 없이 훌륭히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에게도 신뢰받는 남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한 내 아들들이 깡패자식이 되어 손가락질 받습니다. 귀한 집에서 곱게 자란 아내도 룸살롱 호스티스 출신이라고 언론에 의해 매도됐습니다. 가족까지 멍에를 메고 살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형기를 거의 다 마쳐 가고 있었다. 억울해도 이미 모든 게 종료될 시점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하는 행동이 모호했다.
『왜 이제 와서 굳이?』
내가 물었다.
『刑을 다 살고 말해야 잔꾀 부린다고 욕은 못 할 거 아닙니까? 이 사회에서 받아 주건 안 받아 주건 전 하는 데까지 합니다』
독특한 성향이었다. 국가권력 앞에서 한 인간은 미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그는 가장 험한 조폭두목이라는 낙인이 찍힌 인물이었다. 그런 딱지가 붙은 인물은 잔인하게 뭉개져도 현실에서 동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그의 자세는 홀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본심을 더 알고 싶어 이렇게 방향을 돌려 물었다.
입 안 여는 독사
『呂運桓씨는 자신의 단점을 뭐라고 생각하죠?』
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려고, 순간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남들은 저를 영리하게 봅니다. 그리고 저도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잔머리를 쓰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금방 저한테 해가 돌아올 줄을 알면서도 그냥 뻗대는 성격입니다. 검사한테도 덤볐고 심지어 조사받을 때 반말도 수용하지를 못했던 다혈질입니다.
돌아서서 후회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어할 능력이 저에겐 없습니다. 저를 조사한 대검 중수부과장인 김준호 검사에게도 죽으면 죽었지 굴복 못 한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저에게 입을 열지 않는 「독사」라고까지 저주했어요. 그게 접니다』
나는 그의 공소장도 살펴봤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검찰은 그를 로비자금을 횡령한 것으로 기소했다. 그걸 우회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呂運桓씨는 돈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입니까?』
돈에 대한 철학은 그 인간 자체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神이다. 그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돈 욕심을 제어할수록 神에 가깝다.
『저는 열심히 돈 벌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벽스러울 정도로 지금까지 외상 한번 한 적이 없습니다. 또 남의 것을 거저 내 호주머니에 넣은 적도 없습니다』
드라마 속의 조폭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처와 아들의 방문
지난 8월11일 오후 1시15분. 50代 초의 선이 고운 부인이 20代의 젊은이를 데리고 나의 법률사무소로 들어섰다. 呂運桓의 처와 둘째 아들이었다. 정식으로 재심을 의뢰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건달 두목이나 깡패가 아닙니다』
그의 아들이 울부짖듯 말했다. 선량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부인도 순진해 보였다. 건달로 소문난 사람들의 가족이 더 착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들이 환멸을 느끼는 세상을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내가 부인에게 물었다. 함께 사는 처에게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 남자의 내면을 비교적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제가 대학 1학년 때 만났어요. 집에서 제과점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친구들과 가끔 그곳에 놀러와서 알게 됐어요. 남편이 아직 군대 가기 전인데 그때는 건달이라 우리 집에서도 경계했죠. 그런데 사람이 워낙 서글서글하고 성격이 좋아서 제 마음이 끌렸어요. 그때 건달이라고는 해도 부잣집 아들이 사람 사귀기 좋아해서 여기저기 어울리는 거지 별다른 게 없었어요』
부인이 말하는 건달은 30년 전 그가 둘째 아들 같던 시절 얘기였다.
『당시 남편의 아버지는 呂씨 종친회장으로 30代에 민선면장을 마치고 사업에도 성공한 분이셨어요. 저의 아버지도 지역유지였고 저 역시 대학 졸업 후 전남도지사 비서를 하다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생활은 어땠어요?』
『친정에서 4층짜리 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남편에게 운영하라고 맡겼어요. 남편은 방위 근무를 마치고 20代부터 여관을 했는데 對人관계가 좋아서 그때도 성공한 편이었어요.
남들은 남편이 법조인을 많이 아는 걸로 생각하는데, 남편이 상무대 군법회의 사무실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 알던 법무관 세 명 정도가 다예요. 방위병 근무를 마치고는 남편은 더 이상 건달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사업에 열심이었어요. 야무지고 똑똑한 편이었어요.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는 유흥업도 했지만 전 지금까지도 남편을 믿어요. 한 번도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크니까 물장사 문을 닫고 광주에서 제과점인 ○○당을 운영했었어요』
그녀의 표정은 정직해 보였다.
『말씀하는 것과 달리 남편이 어떻게 건달로 그렇게 유명하죠?』
내가 부인에게 물었다.
『저도 남편이 건달이라는 걸 이해 못 합니다. 남편이 후배들의 변호사비 대준 걸 가지고 洪準杓 검사가 조폭으로 만들었어요. 洪準杓 검사한테 걸려서 남편이 징역 4년을 살았는데 정말 그만한 刑을 받을 짓을 한 게 뭐 있는지 그분께 묻고 싶어요.
그분은 현재 유명한 정치인이지만 우리 가정에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이 맺힙니다. 심지어 그분의 부하직원이었던 검찰청 직원 가운데 한 사람은 우리 남편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되는 바람에 댐에서 자살을 했죠. 또 우리 남편의 배후가 모 부장검사라고 기자들에게 흘려 얼마나 곤란하게 했었는데요. 부르시기만 하면 자살한 최○○씨의 부인이 언제라도 와서 증언을 하겠답니다』
그녀와 아들에게 남편이자 아버지인 呂運桓은 절대 조폭두목이 아니었다. 세상은 관점에 따라 다 다르다. 건달 후배의 변호사비를 대주었다면 법의 시각에서 자금책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洪準杓 검사로 인해 유명해진 呂運桓은 두 번째로 李容湖 게이트의 배경인물로 나와 신문과 방송에 그 이름이 연일 들먹여졌다.
『李容湖라고 아세요?』
내가 물었다.
『광주에 살 때 자주 봤어요. 그 부인이 저를 언니라고 하면서 따랐어요. 그 집 부부하고는 같이 태국, 싱가포르로 해외여행도 같이 했어요. 저는 李容湖 그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하는 걸 경계했어요. 아파트 분양신청을 한 주민들이 李容湖 집 앞에 가서 데모하는 걸 봤어요. 그런 李容湖를 남편이 두둔해 주더니 결국 덫에 걸린 거예요』
변호사인 나는 입보다 사람의 눈동자와 표정을 더 본다. 그리고 말보다 앞서 그 사람의 관점을 파악하기도 한다. 가족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의 말이 또 옳은 것이다.
洪準杓 검사
「모래시계」 검사로 알려진 洪準杓 의원은 대학 시절 나와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사법시험도 나와 동기였다. 그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나는 도서관의 닭장같이 좁은 열람실에서 가난한 고시생으로 지내던 그의 고통을 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책상 위에서 자주 엎드려 자던 원인이 그 시절 영양부족이었음도 기억한다. 그는 성공했다. 그의 저서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洪準杓는 195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대구 영남중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제14기를 수료하였다. 검사로 재직할 당시 법무부장관 처가 관련 사건, 대통령 친척 관련 변호사법 위반사건,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폭력배 사건을 수사했다. 그는 검사가 되어 압력이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소신껏 수사를 한 영웅이 된 것이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한 초기의 일이었다. 한 의뢰인이 와서 『洪準杓 검사 같은 분이 국회로 들어가시고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가 정말 좋아질 겁니다. 제 사건을 그분이 맡으셨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지금은 정치적 거물이 됐다. 옥에 티라고나 할까 내가 그에게 느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는 신념이 강해 한번 단정하면 웬만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그 모델이 洪準杓 검사와 呂運桓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洪準杓 의원의 유세에는 모래시계 검사가 나오고 대역인 거물 呂運桓이 등장한다고 한다. 呂運桓은 검사에게 지지 않고 끝까지 도전장을 보낸 강인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나는 우연히 드라마 속의 두 사람을 현실에서 보게 된 셈이다. 呂運桓을 만나 오랜 시간을 얘기했다. 그 역시 洪準杓 의원 못지않게 강한 신념과 고집을 가진 사나이였다. 洪準杓와 呂運桓. 가난한 집 아들과 부잣집 아들. 검사와 조직폭력배의 두목. 외형은 반대지만 본질은 강한 기질의 유사성도 있었다.
처단대상을 정한 洪검사
洪準杓 의원은 呂運桓에 대한 수사경험을 소설같이 다이내믹하게 묘사해 나간 「洪검사 당신 실수하는 거요」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중 呂運桓과의 전쟁장면을 인용하면 이렇다.
<洪準杓 검사는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아예 먼저 선언했었다.
『저의 다음 처단 대상은 국제PJ파 두목인 呂運桓입니다』
검사는 수사나 내사를 할 때에는 거의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洪準杓 검사는 공개적으로 미리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는 공개 선언한 이유를 첫째가 외부압력 배제를 위해서라고 했다. 呂運桓은 검찰뿐 아니라 법조계 전반에 두터운 배경을 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찰, 정보관계자, 고위공무원, 정치인 등과도 교분이 두터워 공개수사를 하여 자존심 대결을 벌이지 않으면 수사를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洪검사가 도피 중인 呂運桓을 체포하는 장면이 나왔다.
<1992년 1월16일 서울의 한신 서래 아파트의 한 동 앞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고급 세단 승용차가 부서진 것이다. 수위는 곧장 11층에 사는 주인집에 연락했다. 문이 열리며 여자 한 명이 화난 얼굴로 뛰어왔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사관들은 곧장 뛰어들어갔다. 파자마 차림으로 있던 呂運桓이 도망칠 틈도 없이 잡히고 말았다.
수사관들은 먼저 아파트 관리실에서 11층 사람들의 차를 확인하고 呂運桓이 집에 있는 것을 점검했다. 네 명은 呂運桓의 집 11층 좌우에 미리 배치됐고, 나머지 수사관들은 呂運桓의 차를 부수게 한 것이다. 이 사건에 사용된 체포계획이 드라마 「모래시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洪準杓 검사는 책에서 당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적고 있다.
<呂運桓 그는 나와 여러모로 악연이 겹쳤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았다. 나는 5층, 그는 14층이었다. 광주시 북구 우산동 현대아파트는 열 개 동이 있는데 그중 105동만이 좌우로 66평, 55평의 큰 아파트였다. 그는 66평에 살고 나는 55평에 전세 살고 있었다. 같은 동 12층에는 그의 형(여○○)이 살고 7층에는 그와 친한 광주지검 강력부 수사관도 살고 있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가 한 아파트에 살면서 동상이몽의 밤을 매일 보낸 셈이었다.
악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呂運桓의 막내아들과 나의 막내아들인 ○○이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오락게임을 하는 친구 사이였고, 그의 형의 딸은 나의 큰아들과 무등초등학교 5학년 같은 반에 다니고 있었다. 깡패가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친밀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웃사촌이지만 수사를 시작하니 도망자와 추적자 사이가 된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呂運桓의 얼굴을 본 적이 없고 다만 조직 계보도에 있는 사진만 보았을 뿐이다.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얼굴은 보지 못했고 다만 아는 것은 그가 깡패라는 사실뿐이었다>
오락게임을 같이 했다는 그 막내아들이 어른이 되어 변호사인 나를 찾아온 것이다.
呂運桓의 술회
呂運桓의 사건기록을 읽어 보면 洪準杓 의원 못지않게 글을 잘 쓴다. 그가 쓴 반성문, 항소 이유서들을 보면 그의 또 다른 문학적 기질도 발견할 수 있었다. 원고지 1000여 장 분량에 이를 만큼 양도 방대하다. 그는 건달생활과 인생에 대해 속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洪準杓 검사의 글과 呂運桓의 글을 비교해 봤다. 같은 사실을 놓고 서로의 다른 관점과 생각들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서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나밖에 볼 수 없는 자료들이었기에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 누구를 비방하거나 옹호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관점과 생각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검사는 검사의 관점이 있고, 변호사는 한번쯤 피고인의 관점에서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呂運桓의 삶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됐다.
『건달 세계를 빠져나온 것은 아내 때문』
<1954년 1월8일생인 저는 광주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민선면장을 지낸 아버지는 정미소, 제재소, 운수업을 하는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지금도 곡성군 오산면에는 유학자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공덕비가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저는 공부도 잘한 편이었습니다. 시험 운이 없었는지 저는 합격을 낙관했던 광주지역의 명문인 서중에 낙방하고 후기인 동성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중학교에서 반장을 죽 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시절인 1967년경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량 서클에 가입하고 공부를 등한시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그렇게 지냈습니다. 학교보다는 시내를 방황하면서 선후배들을 사귀고 다니길 좋아했습니다.
시민회관 옆에서 불량청소년들과 어울리다 보니 형사들이 「시민파」라고 폭력조직의 이름을 붙여 줬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서클의 제일 막내였습니다. 같이 어울렸던 비슷한 또래의 막내아이가 지금도 그 세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김태촌입니다.
당시에는 건달들끼리 싸움을 하는 게 빈번했습니다. 저는 부유한 집 아들이었지만 싸움도 누구에게 뒤지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또 조직끼리의 싸움에서는 앞장서서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그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웬만한 폭력사건은 좋은 아버지를 둔 덕으로 뒷수습도 잘 됐습니다. 1972년경입니다. 결국 큰 칼부림사건의 주역으로 저는 처음 교도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집안에 총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교도소로 면회 오고 모든 인맥을 동원했습니다. 그런 부모 덕으로 저는 한 달 만에 집행유예선고를 받고 석방이 됐습니다.
그때 저는 인생에서 한 가지 짙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누구 앞에서도 존경받고 엄하던 아버지가 담당검사 앞에서 수없이 머리를 굽히며 사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깡패아들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난 다시는 검사 앞에서 아버지나 나나 머리를 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건달세계를 떠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저를 주먹세계에서 빼내온 건 지금의 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주먹의 세계와 결별해야 했습니다. 저는 방위병으로 軍에 입대해서 광주 상무대의 군법회의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됐습니다. 그때 모시던 장교들이 제가 유일하게 인연을 맺게 된 검찰의 인맥이었습니다.
방위 근무를 마친 나를 집에서는 빨리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야 마음잡고 그 세계와는 손을 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지금의 처는 깡패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는 게 인생의 최대목표였습니다. 뭐라도 할 각오였습니다. 건달세계를 나온 것은 지금 아내의 단호함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건달 애들에겐 내가 희망이자 기준이었다』
결혼 직전 아버지는 제게 화공약품 대리점을 하나 차려 줬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활발하게 거래처도 개척하고 납품량도 늘어났습니다. 1977년 1월8일 드디어 결혼에도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폭력세계와 손을 끊은 것입니다. 1978년 초에는 여유가 있었던 장인이 광주터미널 옆에서 모텔을 경영하도록 시켰습니다. 이상하게도 사업운이 좋은지 저의 사업은 날로 번성해 갔습니다. 아버지가 차려 준 화공약품 대리점도 장인이 맡긴 모텔도 번성했습니다. 철 구조물 제작설치를 하는 공업사도 설립했습니다.
1980년 초에는 광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룸살롱을 만들었습니다. 룸살롱은 너무 잘됐습니다. 모텔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규모지만 매상은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속칭 조폭 출신이나 학창 시절 방황하고 공부 안 한 사람들은 쉽게 남의 회사에 취직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직업은 몇 개에 한정된 천한 것들입니다.
저는 그걸 자각하면서 내가 하는 사업들을 천직으로 알고 열정을 쏟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이름 때문인지 그런 직업을 해도 시비를 걸거나 행패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예전에 함께 어울리던 건달 후배들이 쟁쟁한 현역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광주에서 명실공히 건달 출신으로 성공한 인생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건달들에게는 영웅같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광주지역의 조폭두목급들이 제가 놀던 시절 후배였고, 저를 친형처럼 개인적으로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의 생리를 아는 저는 철저히 조심했습니다. 돈이 된다고 함부로 뛰어들지도 않았습니다. 폭력세계에서 손을 뗀 지 17년 동안 간단한 사고로 입건되는 일 한 번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크면서는 물장사인 룸살롱을 집어치우고 ○○당 제과점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조폭세계와 손을 끊으려면 왕년의 후배들의 인사조차 철저히 외면하고 냉정하게 대해야 하는데 인정상 차마 그러지를 못했던 점이 후회가 됩니다. 돈 없고 배운 것 없고 기술 없는 그들 건달아이들에게 저는 성공한 하나의 기준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저는 점점 부자가 되어 갔습니다. 1989년 초에는 목포 백제관광호텔을 인수했습니다. 건설회사도 만들고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고려산업도 인수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저는 1991년 광주로 온 그 무섭다는 洪準杓 검사와 만나게 됩니다>
나는 洪準杓의 자서전과 呂運桓의 글들을 같은 시점에 따라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비교해서 읽기 시작했다.
수사 시작
洪準杓 검사는 광주로 부임한 이래 그 지역의 폭력조직 중 국제PJ파를 내사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PJ파는 광주시 충장로에 있는 국제다방과 PJ음악 감상실을 거점으로 한 광주·전남지역 최대 폭력조직으로 광주시내 유흥가인 충장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조직원은 130명으로 파악되고 있었고 그때까지의 두목은 김인용으로 계보도에 기재되어 있어 강력부의 金검사가 그를 범죄단체 조직의 두목으로 구속기소한 상태였다. 洪準杓 검사는 두목 김인용의 수사기록과 함께 그간 국제PJ파와 다른 조직 간의 전쟁 사건 기록 등 5년간 집적된 국제PJ파에 대한 수사기록 10여 권을 자세히 검토했다.
거기다가 건설폭력 사건을 다루며 수집한 자료를 종합한 결과 국제PJ파 두목은 실질적으로 呂運桓이라고 판단했다. 呂運桓은 김태촌의 밑에서 서방파 행동대원으로 출발했다. 김태촌이 서울로 간 뒤 광주에 남아 1985년경 국제PJ파를 조직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경찰에 로비를 넣어 呂運桓은 은퇴한 前 두목으로 올라앉고 부두목인 김인용이 두목인 양 조직 계보도가 작성됐다. 그게 洪準杓 검사의 생각이었다. 洪검사는 조직 내부의 불만자를 찾는 게 관건으로 판단했다. 국제PJ파 조직원으로 입건되어 연루되었거나 구속되었던 연루자를 다시 조사하고, 관련된 他 조직의 조직원에 대한 조사도 진행시키는 한편 과거 사건기록을 모두 발췌해서 조직의 전모를 재구성했다.
그 무렵 법무부로 전보된 강력부장의 뒤를 이어 신임부장이 왔다. 신임부장은 呂運桓과 10년 동안이나 친분을 쌓아 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洪검사와는 법대 선후배지간으로 오래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洪검사는 부장과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洪검사가 신임부장을 찾아가 呂運桓 얘기를 꺼냈다.
『呂運桓은 국제PJ파 두목입니다. 현재 제가 내사하고 있고 범죄단 두목으로 구속하려고 합니다. 부장님께서 呂運桓과 교분이 있다면 나중에 곤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呂運桓을 洪검사가 내사 중이란 것은 알고 있지. 하지만 呂運桓은 내가 10년 전부터 알아 왔는데 처세도 능하고 예절바른 사람이야. 내가 알기로 그는 기업가일 뿐이야. 洪검사는 그를 폭력배라고 생각하니 일단은 잘 조사해 보라고』
『잘 알았습니다』
자서전을 보면 洪검사의 강한 집념이 엿보인다. 그는 呂運桓을 두목이라고 단정한 외에 상관인 부장검사까지 비호세력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배달된 칼
그 무렵 呂運桓 회장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洪準杓 검사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있었다. 洪검사는 건설회사 입찰 담당자들이 대부분 폭력성을 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입찰과정의 비리를 뒤지겠다는 내용이었다. 건설회사도 운영하는 呂運桓은 洪검사의 그 발표가 자신을 겨냥했다는 느낌은 전혀 갖지 못했다.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며칠 후 친구인 한 건설회사 입찰담당 상무로부터 이런 전화가 왔다.
『洪검사가 呂회장 당신을 물어보던데 뭔가 선입견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오해가 있으면 그걸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게 필요할 것 같은데…』
일종의 정보제공이자 사전로비를 해 두라는 의미를 포함했다.
『내가 뭐 죄를 졌어야 오해를 풀고 말고 하지』
呂運桓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 무렵 呂運桓은 더 자신이 있었다. 洪검사의 상관인 강력부장은 그가 상무대 방위병으로 있은 인연으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강력부장이 10년 전 평검사 시절 광주에서 집을 얻기 전 얼마간 그의 호텔에서 묵었던 적도 있었다. 그 부장검사가 누구보다도 자신이 폭력조직에서 완전히 손을 씻고 성공한 사업가로 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력부장보다 더 강한 보증이 없었다. 洪準杓 검사가 내사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느새 여름이 가고 추석이 다가왔다. 수입전자상을 오픈한 呂運桓의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이 명품인 독일제 「쌍둥이 주방용 칼 세트」를 다량 수입했었다. 그러나 부도 위기에 몰린 그는 呂運桓에게 명절선물용으로 주방용 칼 세트를 구입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칼 선물은 원래 꺼리는 거지만 동정심이 든 呂運桓은 그걸 130세트 사서 명절선물로 거래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렸다. 원래 명절이 되면 손이 큰 그였다.
그중에 조선대학교 부속병원 내과전문의 「홍순표」가 있었다. 洪검사와 이름도 비슷하고 공교롭게 사는 아파트도 위 아래였다. 선물을 돌리던 呂運桓의 운전기사가 의사 홍순표의 집으로 갔을 때 문이 닫혀 있었다. 기사는 그 선물을 아파트 경비원에게 전해 달라고 맡겼다. 그 경비원은 좀 모자란 사람이었다. 근무 때 술을 마셔서 부녀회에서 말이 많았다.
呂運桓은 경비원의 사소한 실수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밤늦게 洪검사가 돌아오고 있었다. 경비원은 밤중에 돌아오는 洪검사에게 그 칼 선물을 전해 준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주차장에서 세차를 하던 운전기사가 경비원에게 洪박사님께 선물을 전해 드렸느냐고 물었다. 경비원이 洪검사에게 줬다고 대답했다. 운전기사는 선물을 잘못 전달된 걸 알고 경비원에게 불평을 했다. 경비원은 부랴부랴 洪검사 집으로 가서 그 칼을 빼앗듯 도로 가지고 왔다.
이 사건은 조직폭력배 두목이 수사담당검사에게 협박용으로 칼을 보낸 것으로 비화되어 보도됐다. 呂運桓은 자기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혹시 洪검사에게 잘못 배달됐어도 선물을 도로 찾아올 리가 없는데 기사나 경비원의 실수였다고 했다. 그는 똑같은 칼이 130세트나 여러 곳에 명함까지 붙인 채 선물로 갔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법정에 협박의 증거로 제출될 뻔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언론에 보도된 칼 선물 사건은 그 이후 실종되어 버렸다고 했다.
골프장의 신경전
洪準杓 검사는 그 무렵 골프에 푹 빠져 있었다. 일요일 새벽이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광주골프장에 가곤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골프를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같이 있던 정사장이 뒤 테이블로 갔다가 돌아왔다.
『洪검사, 呂회장이 인사를 하자고 하는데』
『어느 여자 회장이 나와 인사를 한다고 해요?』
『허허, 여자 회장이 아니고 呂運桓 회장이 인사를 한번 하자는 거지』
순간 洪검사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벌떡 일어섰다.
『呂運桓은 깡패요. 어떻게 검사가 깡패와 인사를 하나?』
洪검사는 골프장에서 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그날 呂運桓은 보안대 간부들을 데리고 나와 골프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뒷말들이 있을 것이다. 이후 洪검사는 呂運桓에 대한 내사에 박차를 가했다. 국제PJ파 조직원 중 행동대장격인 백○○를 체포하여 이틀 동안 신문했다. 그는 결국 呂運桓이 조직의 간부라고 진술했다. 洪검사는 그를 방면해 주며 당분간은 광주를 떠나 있으라고 일러 주었다. 내사의 사슬이 점점 呂運桓을 조여가자 강력부장이 洪검사를 불렀다.
『일단 呂運桓을 만나보지 그러나? 예전에는 정말 깡패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않거든. 그를 한번 만나보면 그런 오해는 깨끗이 풀릴 거야』
『그럼 한번 만나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수사를 멈출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알았네』
강력부장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골프장에서의 일에 대해 呂運桓의 느낌과 생각은 또 달랐다. 洪검사의 책에 기록된 대로 呂運桓은 보안부대 중령과 사업하는 친구와 라운딩을 하고 있었다. 뒤 팀으로 洪검사 일행이 따라오고 있었다. 클럽하우스에서 일행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洪검사와 함께 운동을 하러 왔던 정사장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는 사이였다.
『洪검사가 저기 계시는데 가서 인사나 하지 그래?』
정사장은 대형사건을 수사하는 검사와 절친한 사이라는 걸 은근히 과시하는 태도였다. 呂運桓은 자존심이 상했다. 죄도 없는데 검사라고 굳이 밥 먹는 자리로 찾아가 아양을 떤다는 게 싫었다. 더군다나 전에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는 법에 걸릴 일을 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힐 필요가 없다는 介潔(개결: 성질이 아주 꼿꼿하고 깔끔하다)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방인 洪검사도 기분이 상해 돌아간 사실을 그가 알 리가 없었다. 呂運桓은 지금 교도소에서 당시의 가벼웠던 태도를 후회한다. 洪검사의 성질도 독특하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고 했다. 어쨌든 골프장의 신경전 얼마 후 검찰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呂회장, 나 이○○이네 자네. 우리 洪검사님 모르시는가? 아직 한 번도 인사를 못 받았다고 하시는데 인사드리소』
검찰서기인 이○○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가 洪검사를 바꿔 주었다. 呂運桓이 공손하게 예의를 다해 인사했다. 洪검사가 한번 만나자고 했다.
『저 역시 한번쯤 모시고 싶었습니다. 평소에 잘 가시는 데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예약해 놓고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洪검사가 승낙했다. 다음날 오후 업장에 있는 呂運桓에게 비서가 메모를 가지고 왔다. 洪검사가 전화를 걸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전화를 하자 洪검사는 통고하듯 단번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가 사적으로 바깥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사무실로 오셔서 차나 한잔 마시고, 처음이니까 이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그 이후 필요하면 사적인 자리를 가지도록 하죠』
일단 검사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순간 呂運桓은 불쾌했다. 열심히 죄 없이 살아왔는데 검사실로 오라는 자체가 싫었다.
「검사가 뭐가 대단하다고 만나는 데 절차가 그렇게 필요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속이 끓어올랐다.
『뭐,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만나시죠. 검사실로 찾아가서까지 인사는 안 할랍니다』
呂運桓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검사실의 氣대결
골프장에서 洪검사와 呂運桓을 연결시키려던 정사장으로부터 呂運桓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주택회사 사장이었다.
『洪검사가 사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자네가 싫다고 바깥에서 만나자고 했다면서? 너무 그런 데 의미를 두지 말고 그냥 찾아가서 한번 만나소. 洪검사 그 사람도 성격이 독특해서 그러니까 우리 같이 갑시다. 오늘 저녁 洪검사가 사무실에 혼자 있기로 했어. 나한테도 슬쩍 呂회장과 같이 와 줬으면 하고 비치던데…』
정사장은 두 사람의 자존심을 모두 배려했다. 사무실에서의 만남 부분에 대해서는 洪검사의 수사일지와 呂運桓이 쓴 부분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洪검사는 책에서 그날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해 9월 말 呂運桓을 밤에 사무실로 불렀다. 그와 친구인 주택회사 사장도 함께 불렀다. 검사와 呂運桓 두 사람만의 밀담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고 잘못하면 누명을 쓸 수도 있었다. 呂運桓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하며 더불어 자신이 깡패로 오인받고 있다는 말도 했다.
『呂運桓씨는 깡패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내가 내사한 바로는 조직폭력 두목임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간 많은 사람들과 좋은 교분을 유지한 덕에 그분들이 내게 당신의 좋은 점을 많이 얘기하더군요. 그분들의 체면도 살리고 광주지검 강력부 검사의 체면도 살리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으니 내가 제시하는 세 가지 방안 중에 하나만 택하면 더 이상 고생은 하지 않을 거요』
洪검사가 말했다. 그러나 呂運桓은 전혀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첫째는 광주를 떠나라는 겁니다. 呂運桓씨가 광주에 계속 있는 한 나는 추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검사의 임무니까 어쩔 수 없어요. 둘째, 당신이 조직으로부터 탈퇴했다는 징후를 보이세요. 하부조직원의 습격을 받든지 조직해체 선언을 하든지 어떤 방법으로도 좋아요. 셋째, 나에게 와서 자백하고 구속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의 형량으로 끝내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 말에 呂運桓은 洪검사를 똑바로 보면서 대답했다.
『첫째 방안은, 일단 나는 깡패가 아니니 광주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광주·전남 지역에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아 이를 정리할 수도 없고, 그리고 둘째·셋째 방안 역시 깡패가 아니니 응할 생각이 없습니다』
협상은 결렬됐다. 呂運桓은 차가운 눈빛으로 일어났다.
『몸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나가는 呂運桓에게 洪검사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가 洪검사가 책에서 쓴 내용이다.
『몸조심 하라』의 의미
이날의 상황에 대해 呂運桓은 이렇게 쓰고 있다.
<입회했던 정사장이 약속이 있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洪검사는 나에게 골프와 늦게까지 일하는 자신의 처지 등 이런저런 사담을 늘어놓았다. 洪검사의 진짜 관심은 그의 상관이 되는 강력부장이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였다. 洪검사는 그의 상관인 부장검사를 이미 나의 비호세력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간질 비슷한 내용의 말도 많이 나왔다.
洪검사는 검찰총장의 비호를 받고 있는 사람도 구속시켜 버렸다고 자신을 과시했다. 그래서 광주까지 쫓겨 왔지만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洪검사는 심지어 앞으로의 수사계획까지도 말해 줬다. 서울로 올라가기만 하면 슬롯머신의 대부인 정덕진을 구속할 거라고 했다. 정덕진이 민정당에 몇십억 선거자금을 준 자료를 지금도 캐비닛 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나자고 해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겁주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그날 洪검사의 말투부터 싫었다. 또 당시 정덕진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洪검사는 내게 광주를 떠나든가 조직원이나 다른 조직에게 칼을 맞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폭력배가 아니라는 나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죄 안 짓고 살면 되는 거지 뭐하러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칼까지 맞는단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가 났다. 정사장이 약속이 있다며 간 지 30분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왔다. 그 무렵 나는 수산물가공사업 때문에 프랑스에 나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洪검사에게 그걸 얘기하고 돌아온 후에 뵙겠다고 인사했다. 洪검사는 돌아오고 나서 골프 라운딩 한번 하자면서 호의를 보였다. 그 말에 「골프채를 선물하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검찰청을 나왔다>
呂運桓의 글은 세밀하게 당시의 상황과 대화내용까지 묘사했다. 그대로 옮기기 곤란한 것들은 대부분 뺐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洪검사의 책에는 「몸조심하라」고 경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呂運桓의 글에는 「몸조심하고 여행 다녀 오라」고 선의로 말한 것으로 적혀 있다. 같은 인사내용의 해석에 두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카즈키 의식
洪검사의 책에는 그 다음날부터의 수사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洪검사는 呂運桓에 대한 증거수집에 박차를 가했다. 보름 후인 10월 중순경 洪검사는 수사기록을 정리하고 증거요지를 메모해서 인지절차를 밟기 위해 부장실로 갔다. 呂運桓은 유럽여행을 가고 없었다. 조직폭력배는 은거해 버리면 잡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모험 그리고 고통이 따른다. 증거도 100% 완비하지 않았는데 서둘러 인지하려는 것은 귀국할 때 공항에서 바로 체포함으로써 신병확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다.
『결재를 해 주십시오』
『한번 기록을 봐야겠어. 그대로 두고 가게. 결재는 내일하지』
이튿날 오후 2시쯤 부장이 결재했다. 바로 공항에 통보하고 기자들에게 범죄사실과 지명수배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던 중 공항에서 통보가 왔다. 呂運桓이 이미 귀국을 했다는 것이다. 인지 및 공항통보를 하루 미룬 바로 그날 오전 11시경 이미 귀국했다는 것이다. 洪검사는 당혹스러웠다. 내부의 적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지만 이토록 신속하게 연락이 될지는 미처 몰랐다.
서울에서 사흘 간 수사관들과 잠복도 하면서 呂運桓을 추적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呂運桓의 반격이 있었다. 呂運桓은 『洪검사가 골프장에서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감정으로 깡패로 몰아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여기에 검찰 최대의 로비스트인 모씨가 작용하여 평민당 국회의원 4~5명이 검찰총장을 방문하고 검찰 상층부에 대고 검사를 모함하는 일이 발생했다. 呂運桓은 청와대 등 여러 곳에 투서를 했다.
다시 광주로 돌아온 洪검사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중 呂運桓이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과 함께 1988년 11월경 일본 야쿠자와 결연식을 맺으러 일본 오사카에 갔다 왔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洪검사는 급히 부산지검 강력부에 연락해서 이강환에 대한 수사기록과 압수물인 비디오 테이프를 복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산지검 강력부의 신검사는 신속하게 이를 보내 주었다. 받아 보니 일본 사카우메구미 오사카 조장 가네야마 고자부로(한국명 김재학)와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의 韓日 조직폭력배 의형제 결연식(사카즈키)이었다. 여기에 전라도 대표로 呂運桓이 참석한 사실을 기록한 테이프였는데 1시간20분 길이였다. 비디오 테이프에 대한 검증조서를 작성하고 언론에 공개했다.
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반격이 들어왔다. 당시 呂運桓과 함께 渡日(도일)했던 인기가수가 呂運桓의 渡日은 자신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전남도경까지 내려와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1988년 11월 오사카에서 천하장사대회가 열렸다. 이만기, 이봉걸 등이 참가했는데 이 대회를 주선한 사람이 바로 가네야마 고자부로이다. 그리고 당시 민속씨름협회 수석부회장은 수원파 두목으로 알려진 최창식이었고 그가 가네야마와 연결되어 이 대회를 주선했던 것이다. 최창식 역시 사카즈키 의식에 수원파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일본 야쿠자의 사카즈키 의식에는 이를 보증하는 의미로 우호관계에 있는 다른 폭력조직의 간부들을 초청하기도 한다. 이강환과 가네야마는 그 당시 한국의 수원파와 번개파 박종석, 전라도 대표 呂運桓 등을 초청해서 조직폭력배의 국제적 연대를 꾀한 것이다.
도망자 신세
呂運桓은 프랑스에서 洪검사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을 했다. 그는 洪검사의 상관인 강력부장을 속으로 원망했다. 깡패가 아닌 걸 알면서 어떻게 부하 검사의 수사를 허가하나였다. 벌써 신문에는 자신에 관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추석 때 독일제 주방용칼 선물도 자신이 洪검사를 협박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는 洪準杓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따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사업 때문에 프랑스에 간 것도 잘 알고 있었잖습니까?』
『일이 그렇게 됐소. 지금 당장 들어오면 구속이니 회사문제를 정리하시고 다시 연락합시다. 어디오?』
『서울입니다』
呂運桓은 다음날 신문을 보고 놀랐다. 洪검사와 전화를 해서 알렸는데도 자신이 독일로 도피한 것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는 것이다. 도망자 신세가 됐다. 하루에 한두 차례 洪검사에게 연락했다.
『사업을 하는 저를 언제까지 이렇게 수배상태로 놔두실 겁니까?』
呂運桓은 속이 바작바작 타 들어갔다.
『지금은 안 돼. 기다리쇼』
洪검사의 냉랭한 대답이었다. 그를 검거하면 일계급 특진이라는 포상이 이미 경찰에 걸려 있었다. 呂運桓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역도연맹회장을 하는 아는 형님이 떠올랐다. 그는 사위가 검사고 검찰에도 비교적 아는 사람이 많은 여○○씨였다.
그는 여○○에게 검찰에 가서 자신의 말을 잘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새 그가 잘 아는 강력부장은 자신의 비호세력으로 간주되어 洪검사는 부장을 제치고 바로 검사장에게 보고하는 체제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呂運桓은 결국 전화 발신자 추적을 통해 검거됐다.
1심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법원은 폭력조직의 두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구체적으로 17년간 어떤 연계나 행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洪검사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자금책 겸 고문급 간부」로 공소장변경을 해서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그는 조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사카즈키 의식에 참여한 걸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원망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呂運桓은 항소심에서 징역 4년이 선고되어 그 형이 확정됐다. 呂運桓은 오사카에서의 사카즈키 의식에 대해서 洪검사의 책과는 달리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가수 남진
『1988년 어느 날 가수 남진씨가 씨름협회 임원들하고 일본에 가게 됐는데, 레이저 디스크를 사러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런 물건들은 쉽게 사 오기 힘든 때였습니다. 원래 남진씨는 제가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내던 분입니다. 게다가 남진씨 앞으로 나온 추가분 왕복 비행기표도 있었고요. 저는 가수하고 레이저 디스크를 사 오면 그래도 공항통과에 편의가 좀 있겠다고 기대하고 갔어요.
씨름협회 임원들은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일본에 가서 오사카에 묵었는데 저는 가수 남진하고 있었어요. 다음날 남진에게 갑자기 가수 김현자 부부가 찾아왔어요. 그곳 무대에 서 달라는 요청이 온 거죠. 남진은 그 부부를 따라가고 그곳에 온 씨름선수들은 씨름장으로 갔어요. 한 식당에서 모두 모여 점심을 먹었는데 문제가 된 건 그때 그곳으로 간 한국의 씨름협회장 이강환이 부산의 칠성파 두목이고, 함께 간 씨름협회 임원 중에 패거리가 있었어요. 저는 이강환이란 칠성파 두목을 몰랐어요. 광주관광호텔 커피숍에서 우연히 한 번 인사한 적밖에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날 오후였습니다. 제가 씨름협회장 이강환하고 그 부하들을 따라 일본 가정집 같은 데로 간 겁니다. 무슨 집인지 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갔죠. 사실 몇 사람 제외하고는 같이 간 사람들도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왜 가는지 이유를 몰랐대요. 하여튼 넓은 다다미방으로 들어갔어요. 한쪽에 일본 사람들이 앉고 맞은편에 우리와 함께 간 사람들이 무릎 꿇고 일렬로 앉았죠. 마치 영화 장면 같더라고요.
각자 앞에 종이를 줬어요. 이름과 주소를 한자로 쓰라는 거예요. 그걸 못 쓰는 사람은 거기 있던 교포가 와서 대신 써 주기도 했어요. 전 그 종이 위에 「전라도 呂運桓」이라고 썼어요. 그걸 자기 뒷벽에 붙였어요. 그리고 앞쪽 중앙에서 일본 야쿠자 가네야마란 사람하고 이강환이 서로 술을 잔에 따라 교환하고 얘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어요. 자기들끼리 뭔가 지분에 관한 협상을 하는 것 같았어요. 그게 끝나고 식사한 게 그날 행사의 전부였어요.
하여튼 행사가 멋있기에 저는 그 사람들에게 그날 찍은 비디오 테이프 한 부만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 레이저 디스크를 사 가지고 귀국했어요. 이강환은 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가고요. 그 비디오 테이프 덕분에 전 조직폭력배가 돼서 징역 4년을 살았어요. 그 물에서 벗어나 실제로 17년간 조그만 어떤 잘못도 없었는데 판사실에서 洪準杓 검사가 그 비디오의 필요한 부분만 보여 주면서 잘 설명하니까 전 국제적 건달이 틀림없게 된 거죠. 이런 말을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시 서울에서 광주도경으로 내려와 기자회견을 했다는 洪검사의 책 속의 인기가수는 남진이었다. 그가 계속말했다.
『그 덕에 李容湖 게이트 사건 때도 제가 등장하니까 왕년의 그 경력 때문에 신문에 조폭정권이라는 새 조어까지 나왔죠. 한번 제게 붙은 국제적 조폭두목이라는 딱지는 벗어날 길이 없어요』
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결국 관점의 차이라고 느꼈다. 洪검사는 呂運桓의 과거경력과 현재의 겉모습과 그림자를 봤다. 후배들이 깍듯이 인사하고 유흥업을 하고 일본에서 사카즈키 의식의 비디오 테이프도 찍은 呂運桓의 행태는 분명 조폭의 실질적 두목으로 볼 수도 있었다.
呂運桓은 그 스스로의 마음을 봤다. 자기관점이었다. 건달세계에서 손을 씻고 17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입건된 적이 없었다. 자신은 사업을 할 뿐이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억울한 면이 많다.
판사는 중간관점을 택했다. 두목이 아니라 고문쯤은 된다는 것이었다. 呂運桓은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아야 했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유일하게 찾아준 고마운 사람이 있었다. 나중에 이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게이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洪검사와의 악연과는 또 다른 인생유전을 呂運桓은 먼 훗날 다시 겪게 된다.
李容湖
呂運桓의 수사기록 속에 나와 있는 李容湖와의 관계는 이랬다. 광주에서 사업을 하던 呂運桓은 구속되기 2년 전인 1990년에 아파트 분양 모델하우스에서 우연히 몇 살 아래인 李容湖를 알았다.
李容湖는 1980년대 말 건설회사의 고용사장을 하다가 독자적으로 삼희종합건설을 설립했다. 당시 李容湖는 세 사람과 동업하여 아파트 시행사업을 하고 있었다. 李容湖는 呂運桓과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呂運桓 역시 번쩍이는 사업기지를 가진 李容湖가 좋았다. 서로 자금을 융통하는 사이가 됐다. 두 집 가족이 동반하여 해외여행도 함께 했다.
그러던 중 呂運桓은 洪準杓 검사에게 잡혀 징역을 살게 됐다. 呂運桓을 찾아가는 사람은 조폭으로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면회를 가는 사람이 없었다. 접견일지에 적히면 그 다음날 비호세력으로 보도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 용감하게 그를 찾아간 사람이 李容湖였다. 뿐만 아니라 李容湖는 명절이 되면 呂運桓의 가족에게 선물도 챙겨 보냈다. 呂運桓은 진정으로 고마웠다.
1996년 5월경 呂運桓은 석방됐다. 다행히 경영하던 호텔이나 회사들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몸은 감옥에 있었지만 부동산들은 오히려 값이 올랐다. 반면 그 무렵 李容湖는 부도가 나서 피해 있는 상황이었다. 李容湖는 재기를 위해서 애쓰고 있었다.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분당에 빌라건축으로 재기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당시 呂運桓이 15억원을 빌려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로 李容湖는 일어서지 못했다. 李容湖가 그 돈을 갚기까지는 그 뒤 1년이 걸렸고 그에 따른 이자는 呂運桓이 받지 않았다. 呂運桓은 중간에 들어서서 李容湖가 못 받은 투자금도 대신 합의를 보고 받아 주었다. 아파트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투자한 돈도 돌려 받지 못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측근의 평가
나는 李容湖와 呂運桓을 다 잘 아는 한 건설사 사장을 만났다. 呂運桓과는 어려서부터 친구였고 李容湖와는 건설업계 동료였다.
『李容湖 회장은 워낙 능력도 뛰어나고 운도 좋아서 가만히만 있었으면 틀림없이 재벌이 됐을 겁니다. 얼마나 운이 좋으냐 하면 李회장이 부도나는 순간 은행의 컴퓨터가 다운이 돼서 위기를 모면하는 것도 제가 직접 본 적이 있거든요. 그게 보통 운입니까?』
그는 李容湖란 인물의 또 다른 면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사업을 위해서는 또 지독한 성격이죠. 예를 들게요. 李容湖를 만나서 6~7년을 지날 때까지 난 그 사람이 술을 못 마시는 줄 알았어요. 같이 해외여행을 가도 못 먹는다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의 주량에 당할 인간이 없어요. 저도 말술을 마시는데 도저히 못 당하겠더라니까요. 여행 가서 남들 모두 신나게 술 마시는데 꾹 참은 걸 보면 정말 무서운 인내력이죠』
李容湖가 행운의 날개만으로 쉽게 날아오른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는 이번에는 李容湖와 呂運桓의 관계를 말했다.
『둘 사이의 문제를 남들은 돈 문제로 아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李容湖의 입장으로 보면 이제는 상장회사를 여럿 거느린 대회장님인데 呂運桓이 자기를 아직도 이놈 저놈 하는 게 기분 나빴겠죠. 하여튼 呂運桓의 성격이 그래요. 옛날에도 洪검사에게 덤볐다가 징역 살았잖아요. 呂運桓이 로비자금을 받아 횡령한 거로 징역을 살고 있는데 전 두 사람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아요. 李容湖는 절대 호락호락 돈을 떼일 사람이 아니에요. 呂運桓 역시 돈을 떼먹을 인격이 아닙니다. 무슨 내막인지 이해할 수 없어요』
오랜 세월 두 사람을 사귀어 온 그는 확신에 찬 어조였다.
화려한 성공
고전했던 李容湖는 어느 순간부터 불같이 일어섰다. 부도 직전의 상장회사 주식을 모아 경영권을 갖는 M&A 사업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李容湖와 呂運桓은 서로 수십억원의 돈을 빌리거나 어음을 할인하는 돈독한 관계가 됐다. 李容湖는 세종투자개발, 삼애캐피탈, G&G 구조조정회사를 경영했다. 부실회사를 인수하고 전환사채 유상증자 등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1998년 말경 李容湖는 대우금속(주)을 인수한 이래 1999년 3월 한국전자부품공업(주), 삼애실업(주) 등을 인수해서 그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세종투자개발(주)을 통해 위 회사들을 실질적으로 경영해 왔다. 政官界 인사들과 인연도 맺어 나갔다.
그룹회장 李容湖가 청와대 영빈관 다과회의 헤드테이블에서 金大中 대통령과 함께 웃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다. 거물이 된 그는 대통령의 측근, 친척, 정치인,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 고위간부 등 권력층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커 갔다.
그 과정에서 呂運桓 역시 성장일로에 있었다. 광주호텔뿐 아니라 외환위기를 맞아 경매에 나온 제주 관광호텔도 인수했다. 李容湖와 呂運桓은 수백억에 이르는 자금들을 각서 한 장 없이 신용으로 주고 받는 사이였다고 한다.
2000년 2월경이었다. 呂運桓은 李容湖가 증권의 귀재가 된 것을 보고 부러웠다. 그런데도 李容湖는 값이 뛸 증권종목은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呂運桓은 李容湖가 관리를 하는 주식을 알아채곤 몰래 증권회사 지점을 통해 증권을 사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영락없이 李容湖는 呂運桓이 그것을 산 줄 귀신같이 알아내곤 했다. 몇 살 위인 형뻘이면서 점잖치 못한 행동을 한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다. 차라리 솔직히 사정하기로 했다.
『나도 주식 같은 데 한번 껴 주라』
그 말에 李容湖가 호의 섞인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형님, 국내 CB 300억을 발행해서 그 돈이 들어오기로 했는데 펑크가 나서 47억밖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미청약분이 남았는데 한 20억원어치 정도만 사놓으쇼. 현재 가격이 2만5250원인데 그때쯤 되면 10만원은 갈 겁니다. 20억만 사놓으면 그때 100억 먹습니다. 네 배예요』
呂運桓은 李容湖가 사라는 전환사채 20억원 어치를 株當(주당) 2만5000원으로 해서 샀다. 한 달 후인 3월경 株當 가격이 5만원으로 올랐다. 한 달 만에 20억을 번 것이다. 모험적 투기는 그만한 달콤한 이윤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李容湖가 전환해서 팔라고 한 시점인 4월이 돼서는 株價(주가)가 폭락했다. 100억을 벌어야 하는데 오히려 본전도 못 됐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呂運桓이 속이 상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올라갈 테니까 염려 말아요』
李容湖의 자신에 찬 대답이었다. 李容湖는 외자 유치계획이나 보물선 발굴 정보 등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안심이 됐다.
특수부의 李容湖 체포
2000년 5월9일 李容湖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체포됐다. 그 소식을 들은 呂運桓은 구조에 발벗고 나섰다. 그날 오후 3시경 呂運桓은 金泰政 변호사를 찾아갔다. 대충의 내용을 들은 金泰政 변호사는 그 앞에서 서울 지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공, 이 사건 내가 맡아도 되겠어?』
呂運桓은 역시 장관 출신이라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金변호사는, 『나보고 선임을 해도 된다고 그러네』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날 呂運桓은 자신의 돈 1억원을 지체 없이 변호사에게 송금했다. 그는 좀더 치밀하게 李容湖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울지검장 아래의 특수부장과 친한 변호사도 중복 선임했다. 명령이 내려가면 담당부장은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친한 변호사가 와서 사정하면 그 감정이 희석될 수 있는 것이다.
증권가는 민감했다. 어느새 李容湖의 체포사실이 증권가 인터넷에 떴다. 李容湖의 삼애인더스 등 그와 관련된 회사들의 주식가격이 폭락하고 투매 현상들이 벌어졌다. 사채시장에 담보로 주었던 주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呂運桓이 李容湖로부터 산 주식도 株當 9000원까지 내렸다.
고민하던 呂運桓은 가지고 있던 삼애실업 전환사채들을 주식으로 전환해서 팔아버렸다. 李容湖를 믿고 산 주식이 7억원 가량 손해만 본 것이다.
하루 만의 석방
놀랍게도 李容湖는 다음날 바로 석방됐다. 2000년 5월11일 呂運桓은 석방된 李容湖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정말 잘됐어. 특수부에서 한 이 사건이 석방될 수 있는 거야? 압수수색까지 당했는데. 이 일 모두 장관 출신 변호사 덕이지』
呂運桓은 어려운 일을 도와줬다는 흐뭇한 감정이었다.
『형님은 무슨 놈의 변호사비를 1억원이나 썼소?』
李容湖가 찬물을 확 끼얹었다. 변호비까지 대줬는데 李容湖는 그 액수를 따지는 듯한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서울 지검장 조카를 내가 데리고 있고 검찰총장 동생도 내 직원이에요. 그 양반들 나하고 다 막역한 사이예요. 더구나 그 윗선에서도 서울 지검장에게 이미 손을 써 놨는데 쓸데없이…』
李容湖의 입에서 거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그는 오히려 자기를 체포한 검사들을 욕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과시했다고 한다.
『나는 조사를 완벽하게 받았어요. 내가 회사의 자금을 횡령 배임했다는 혐의를 받는다는 걸 알고 다른 회사들의 어음이나 유가증권을 빼서 완벽하게 장부를 맞춰 놨어요. 그런데 어떻게 나를 잡겠어요? 증거가 없는데』
呂運桓의 마음속에는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섭섭한 감정이었다.
呂運桓은 李容湖가 체포의 후유증으로 잠시 자금압박을 받았다고 했다. 李容湖는 삼애인더스, 대우금속, 레이디가구, KEP전자를 비롯해서 여러 회사의 株價를 관리하는 경영자의 입장이었다. 구속사실이 인터넷에 뜨자 株價하락이 이어졌다. 자칫하면 도미노 현상처럼 여러 회사들이 쓰러질 위험도 있었다는 것이다. 李容湖는 株價를 다시 올리는 데 자금이 급히 필요했다. 잘 나가는 사업가일수록 자금은 계속 회전하는 것이다. 고인 물 같은 여유자금이 없었다.
李容湖가 얼마 후 呂運桓을 찾아갔다.
『형님, 꼭 도와줘야겠어요』
『뭔데?』
『긴급 체포되고 회사까지 전반적으로 수사가 확대된다는 악성루머 때문에 주식가격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사채시장하고 제2금융권에서 자금을 융통했었는데 株價가 떨어지는 바람에 금융권에서 담보주식을 주식시장에 투매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모든 게 하루아침에 망가질 수 있습니다.
형님이 도와주는 마음으로 계열회사 주식을 사주세요. 이때 매입해 놓으면 지금 바닥시세니까 앞으로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또 전에 손해를 보신 걸 보충하실 수도 있고요. 회사잔고는 검찰에 사건계류 중이라 손을 대기 어려워요』
『더블만 보장해 다오』
다급한 표정으로 李容湖는 설명을 계속했다.
『주식하락을 면하는 방법은 매도하려는 주식을 받아 주고 그 후 시간을 조금만 가지면 다시 관리가 됩니다. 지금 형님이 사두면 크게 이익 보고 지난번 손실도 쉽게 보충할 수 있어요. 저한테도 큰 도움이 되고요.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권유한 게 만약 이번에까지 손실이 생기면 원금보장은 물론이고 상당한 이익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呂運桓은 지난번 손해가 떠올랐다.
『네가 일부러 구속된 건 아니지만 지난번에 그런 바람에 난 20억원어치를 샀다가 손해만 봤어. 난 주식에 대해선 자신이 없어. 그렇지만 네 능력이나 얘기에 믿음은 간다. 난 주식을 관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네 말처럼 정말 확실하다면 내가 현찰 20억원을 만들어 주겠으니 3개월 후 만기인 40억원짜리 어음을 끊어 주라. 정말 확실하다면 난 더블만 보장해 주고 남는 건 네가 먹어라』
呂運桓으로서는 아예 확정이익을 받겠다는 욕심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주면 저에게는 고마운 일이죠 그러면 30억원 투자하시는 게 어때요?』
『지금 당장 그런 액수는 무리고 20억원을 투자할게』
『그러면 제가 어음을 발행해 줄게요. 그 대신 나중에 30억원 투자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말아요』
李容湖가 농담까지 곁들였다. 이 거래가 나중에 엄청난 사회적 폭풍을 일으킨 쟁점이 되는 것이다. 李容湖는 그가 먼저 준 셈이 되는 돈들이 로비자금이라고 했다. 呂運桓은 이 돈 20억원의 수익이 모험투자에 대한 代價라고 반박했다. 서로 그 부분의 돈이 자기 것이라고 상반된 주장을 했다. 투기에 대한 代價가 몇 배나 되는 것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 확정이익을 먼저 받아 챙긴다는 것은 상식을 일탈하는 점도 있었다.
李容湖는 20억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돌려달라고 내용증명을 작성해 놓고 있다가 그 서류가 검찰에 압수됐다.
검찰총장의 체포명령
2001년 8월26일 愼承男 검찰총장은 중수부 3과장 김준호를 불러 李容湖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김준호 검사는 수사관을 소집해서 愼총장의 지시를 전달하고 李容湖에 대한 범죄혐의를 살폈다. 알려진 인물도 아니고 특별한 범죄사실도 없었다. 한마디로 대검중수부에서 맡을 만한 거물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1년여 전인 2000년 5월 서울지검 특수부에 李容湖가 긴급체포 됐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고 두 달 뒤 불입건 결정이 내려진 사실이 발견됐다. 김준호 과장은 순간 수사라인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총장에게 다시 보고했다. 총장은 한번 손을 댔으니 어쩔 수 없다며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01년 9월2일 검찰수사관들은 李容湖가 나이트클럽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재빨리 따라붙은 끝에 호텔에 투숙한 李容湖를 체포했다. 당시 李容湖의 혐의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 기업자금 및 일반인 투자금 400억여원을 빼돌리고 보물 발굴 사업 추진 같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불법주식거래를 한 혐의였다. 이것이 당시 한 주간지의 보도내용이다. 이와 관련 呂運桓이 말해 준 수사배경은 이랬다.
『株價를 조작하려면 금융감독원의 통제와 감시를 흐리게 해야 합니다. 금융감독원은 조작의 혐의가 있으면 그걸 A급, B급, C급, D급으로 분류해서 검찰에 통보해요. 경고부터 시작해서 정식의 수사의뢰까지 등급이 나뉘죠. 그래서 검찰총장의 측근이 로비스트로 필요한 겁니다. 그건 실무진이고 그 외에 핵심실세들이 로비를 많이 합니다. 그게 정보요원들에게 포착되는 거죠. 거물급의 부탁은 고급정보가 되기 때문에 청와대에 보고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청와대에서 먼저 정보를 받고 검찰총장에게 통보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대검에서 조사를 받게 된 李容湖의 입에서 권력의 핵심 실세들의이름이 터져 나왔다. 金大中 대통령의 집사 李守東, 이희호 여사의 처조카 이형택, 金大中 대통령의 차남 金弘業, 愼承男 검찰총장, 김대웅 고검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검찰총장의 동생도 걸려 있었다.
대검 중수부는 「뜨거운 감자」를 손에 쥔 것이다. 그런 정보들을 자체적으로 소화시킬 수 있는 한 덮거나 무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왜 이런 거물급의 이름들이 흘러나오게 됐을까. 呂運桓은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게 하기 위한 李容湖의 방어전략이라고 했다. 반면 李容湖 측의 한 변호사는 李容湖가 스스로 불은 게 아니라 특정 검사의 회유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했다.
어쨌든 대검 중수부는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수사를 지시한 검찰총장이 얽혀버린 것이다. 이럴 때 실무책임자인 중수부장은 여러 형태가 있다. 법과 원칙을 내세워 과감히 치는 성격도 있고 끝까지 보호하는 성격도 있다. 나는 당시 대검 중수부장으로 책임자였던 柳昌宗 검사장을 만났다. 그는 강직하고 따뜻한 성품으로 선후배들로부터 두루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어떤 대형 정보가 있을 때 공명심에 들떠 그냥 수사를 하고 발칵 사회를 뒤집어 놓는 건 올바른 검사의 道(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칼을 가진 검사는 하나 하나의 행위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거죠. 조금의 잘못만 나와도 다 파헤치고 언론에 공표하는 건 검사의 태도가 아니죠. 당시 저는 법조출입 기자들과 여덟 시간이나 토론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비리를 덮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조직을 위해, 또 세상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말이죠』
그는 그게 원인이 되어 자리에서 물러나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대검 중수부장의 수사태도에 따라 政局이 달라지기도 한다.
두 명의 제보자
呂運桓은 상황이 검찰의 통제범위를 넘어선 상황에 대해 이렇게 알려 주었다. 그 무렵 李容湖 회장 밑에서 일하던 간부 두 명이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됐다. 그들은 李容湖가 대검에서 곧 풀려날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심지어는 李容湖가 조사를 받으면서도 회사 직원들을 불러 결재를 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이들 두 사람은 한 신문사 법조팀을 찾아가 제보했다. 李容湖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체포되어 갔을 때 엄청난 범죄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만에 풀려나고 일년 만에 그게 다시 중수부에서 문제가 된 것을 말했다.
기자들은 서울지검 특수2부에서 한 달 동안 내사한 사건이 체포 하루 만에 석방된 게 이상하게 생각됐다. 특수부의 생리가 그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 일년 후 대검 중수부에서 같은 내용을 가지고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혐의를 그대로 써서 구속영장 범죄사실로 만든 것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 무렵 李容湖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한 장의 내용증명이 발견됐다. 그 내용은 李容湖가 검찰로비를 위해 呂運桓이란 인물에게 40억원을 제공했다는 게 들어 있었다. 李容湖의 변호인은 100억원에 가까운 로비자금이 흘러 들어 갔다고 기자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최경원 법무장관은 즉시 『법과 원칙에 따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愼承男 검찰총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2001년 9월20일 대검찰청 특별감찰본부가 설치되고 22일간에 걸쳐 강도 높은 감찰조사가 벌어졌다.
서울 지검장이던 임휘윤 부산 고검장, 서울지검 3차장이던 임양운 광주고검 차장, 특수2부장이던 이덕선 군산지청장 및 당시 특수2부에서 수사를 담당한 5명 등 8명에 대한 조사가 실시됐다. 과연 李容湖에게서 呂運桓에게 간 40억원이 그들에게 뇌물로 흘러 들어갔는지가 그 조사대상이었다. 그 내용증명은 정국을 강타한 핵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언론에서 이니셜로 그 돈을 받은 인사를 발표하면 그에 해당되는 정치적 거물들은 진땀 흘리며 자기는 아니라고 성명을 발표하는 광경들이 속출했다.
감찰 결과보고서
한부환 고등검사장을 책임자로 하는 대검의 특별감찰본부가 보도자료용으로 공개한 결과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李容湖의 부하였던 강성환은 李容湖에 대해 평소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李容湖에 대한 채권을 변제받지 못해 감정이 상해 있던 심상만이란 인물과 만나서 모의한 후 2000년 3월 중순경 이덕선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만나 李容湖의 비리를 제보했다. 이덕선 부장에게서 지시를 받은 특수부의 김인원 검사는 강성환의 진정서를 접수한 뒤 수사계획을 차장과 검사장에게 순차적으로 보고한 후 2000년 5월9일 긴급체포 및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때 김태정 변호사가 임휘윤 검사장에게 전화로 변론을 했다. 다음날인 2000년 5월10일 오전 김인원 검사는 불구속수사의견을 이덕선 부장에게 보고했다. 오후 1시경 이덕선 부장은 제보자인 강성환에게 석방사유를 설명해 준 뒤 오후 7시경 李容湖에게 채권자 심상만과의 합의를 종용하고 오후 9시경 석방했다. 7월 초순경 임양운 차장이 미제사건의 종결을 지시하자 김인원 검사는 李容湖 사건에 대해 불구속기소 의견을, 이덕선 부장은 혐의 없음 의견을 갖고 협의한 결과 7월25일 이덕선 부장 전결로 불입건 결정을 했다>
대검 특별조사본부는 추가로 강성환이라는 인물이 왜 李容湖의 비리를 제보하게 됐나 그 배경을 조사했다. 그 내용은 이랬다.
<李容湖가 회장으로 있는 세종투자개발의 개발담당 사장직에 근무하던 강성환은 과거부터 사업을 함께 해오며 절친하던 李容湖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기간에 거금을 벌어들인 후부터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여러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면 李容湖가 인수한 회사 중의 하나인 대우밸브의 경영권과 운영자금을 받고 그걸로 결별하고 싶었다. 그러나 李容湖로부터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그는)2000년 2월2일경 서로 사업관계로 연결되던 심상만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李容湖의 비리사실을 검찰에 제보해서 처벌받게 하고 싶다는 데 서로 뜻을 같이했다. 심상만은 자기가 받을 돈을 못 받아도 李容湖가 처벌받는 꼴을 보고 싶다고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강성환은 두 달 전 입수한 세종투자개발의 자금일보 등 회사 경리장부 사본을 근거로 제보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2월 중순경 강성환은 마지막으로 李容湖에게 대우밸브의 경영권과 운영자금 10억원을 요구했다.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경리장부 사본을 가지고 회사의 비리를 폭로할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李容湖는 겁먹지 않고 그 제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용호가 지검장님을 안다고 하네요』
감찰 결과보고서는 특수부의 조사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2000년 3월 중순경 이덕선 특수부장은 변찬우 검사에게 제보자료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변찬우 검사는 자료를 검토한 후 바로 수사할 가치가 있다고 부장에게 보고했다. 이덕선 부장은 바로 상관인 임양운 차장실로 가 수사할 것을 보고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李容湖가 차장님과 지검장님을 모두 잘 안다고 하던데요』
『李容湖를 동향모임에서 본 적은 있어요』
임양운 차장은 일단 그 사건을 임휘윤 서울 지검장에게 보고했다.
『조카가 李容湖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검사장이 보고를 들은 후 임양운 차장에게 한 말이었다>
감찰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이덕선 특수부장이나 담당검사의 수사의지가 처음에는 강력했다. 수사과정에 대한 조사는 이랬다.
<2000년 4월 초순경 분담업무를 조정할 필요가 있어 李容湖의 비리자료가 변찬우 검사로부터 김인원 검사에게 인계됐다. 강성환으로부터 진정서가 정식으로 제출되자 金검사는 먼저 강성환을 소환하여 기초조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덕선 부장은 金검사에게 신속한 수사진행을 독려했다.
2000년 4월 하순경 임양운 차장검사는 李容湖와 절친한 윤명수라는 인물을 만나 식사 중 李容湖에 대해 언급하면서 『문제가 많은 사람 같은데 그 사람 일로 연락하지 말라, 특수2부에 李容湖에 대한 투서가 들어와 있다』는 취지의 경고의 말을 했다. 임양운 차장은 1999년 말 윤명수의 소개로 동향인들의 회식자리에서 李容湖와 처음 인사하고 그 후 1~2회 만나 식사한 정도라고 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계속된다.
<2000년 5월 초순 李容湖는 윤명수로부터 『특수2부에서 수사를 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덕선 부장과 친분이 있는 유순석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동시에 회사의 경리관련 장부 정리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했다. 그 무렵 이덕선 특수부장은 유순석 변호사로부터 李容湖에 대해 내사하느냐고 두 번이나 문의받았다. 아는 사이지만 그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수사보안사항이 유출된 것으로 판단하고 담당 김인원 검사에게 신속히 수사에 착수할 것을 지시했다.
2000년 5월8일 김인원 검사는 이덕선 부장과 함께 임양운 차장과 임휘윤 검사장에게 5월9일 李容湖를 긴급체포하고 압수수색할 계획임을 보했다. 임양운 차장은 사건내용과 혐의인정 여부를 묻고 수사를 승인했다.
임휘윤 검사장은 『조카가 李容湖의 회사에 근무하며 그가 예전에 나의 이름을 팔고 다녀 혼내준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의견대로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김인원 검사는 특수 2부 검사들의 지원을 받아 李容湖가 회장으로 있는 세종투자개발 그룹 내 6개의 계열회사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李容湖와 회사간부들을 긴급체포했다. 같은 날 오전 유순석 변호사는 김인원 검사, 이덕선 부장, 임휘윤 검사장실을 순차 방문하여 李容湖를 변론했다. 같은 날 오후 윤명수, 呂運桓 등은 김태정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하고 선임료 1억원을 지불했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김태정 변호사는 임휘윤 검사장에게 전화로 李容湖를 변론했다. 李容湖는 담당검사와 친한 변호사를 선임했다>
윤명수란 인물은 광주일고 동창회의 총무로 李容湖에게 金大中 정권 요직의 동향 여러 인물을 헌신적으로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김인원 검사, 이덕선 부장의 행동을 감찰 결과보고서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5월10일 아침까지 김인원 검사는 특수2부 검사들의 지원을 받아 李容湖와 회사간부들을 상대로 조사했으나 장부상 가지급금 형태로 회사자금이 인출되었다가 어느새 전액 입금 조치되어 있고 자금 흐름이 매우 복잡하여 李容湖 및 관련자들이 모두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金검사는 긴급체포 시한 내에 구속영장을 청구할 만한 입증자료 확보에 실패했다. 수사에 참여한 특수2부검사들과 협의하여 일단 신병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金검사는 그 사실을 일단 이덕선 특수부장과 차장, 검사장에게 순차로 보고했다. 임차장은 별다른 이의가 없었고 임검사장도 『알아서 처리하라』고 석방에 동의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이덕선 부장은 제보자 강성환이 李容湖의 석방조치에 반발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되어 강성환을 불러 이렇게 질책했다.
『적당하지 않은 자료를 주어 곤란하게 되었다. 횡령액도 모두 상환되었다고 한다. 압수수색과 체포를 너무 많이 해서 무리한 수사라는 지적이 있어서 곤혹스럽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강성환은 심상만에게 李容湖가 석방될 것 같다고 전했다. 같은 날 오후 5시30분경 심상만은 특수부장을 소개했던 강훈 등에게 『소신 없는 사람을 소개하는 바람에 사건을 망쳐 버렸다』고 전화상으로 이부장에 대해 심한 욕설을 했고 이에 강훈은 이덕선 부장에게 전화해서 『진정인이 李容湖와 합의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날 오후 7시경 이덕선 부장은 李容湖를 사무실로 데려와 합의하라고 권했다>
대검찰청 특별감찰본부는 2001년 10월12일 내부감찰을 종결하고 이덕선 특수부장을 직권남용혐의로 기소했다. 한편 국회는 2001년 11월22일 본회의를 열고 특별검사법안을 통과시켰다.
특수부장의 회한
얼마 전 나는 당시 이덕선 특수부장과 서울구치소를 나오다가 우연히 만났다. 군법무관으로 33사단 법무참모를 할 시절 그는 검찰관이었다. 일년을 근무하는 동안 그와 가깝게 지내고 성품도 알고 있었다. 그는 쉬다가 몇 달 전에야 변호사 개업을 했다.
『특수부장이 되고 나면 누구나 한 건 크게 터뜨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저도 열심히 제보자들을 만나 정보를 들어봤어요. 李容湖 사건의 경우도 복잡한 내용이라 그 자료를 얻어 가지고 와서 부하검사에게 사건이 되겠나 검토하라고 먼저 지시했죠.
다음날 부하검사가 사건이 된다고 보고하더라고요. 그래서 체포했는데 나중에 하는 말이 구속영장을 발부받을 정도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특수부에선 구속 안 하면 사건이라고 치질 않거든요. 무심코 넘긴 사건이라 전 그 후에 李容湖 얼굴도 사건내용도 기억 못 했어요. 그냥 마지막에 「합의하쇼」라고 한마디 한 게 전부죠. 그게 직권남용으로 기소된 전체 내용이에요』
옆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특수부장이 되는 걸 알고 저는 술을 끊었어요. 술좌석은 세상에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으니까요. 그 사건을 제보받을 때도 심지어 식당에도 가지 않고 로비에서 만나 얘기를 들었어요. 만약 내가 제보자하고 밥이라도 먹거나 뒤에서 뭐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당시 분위기상 저는 틀림없이 구속됐을걸요』
그는 등골이 오싹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사표 쓰고 재판까지 받았잖아요?』
내가 의아한 생각으로 물었다.
『총장님이 관여된 문제니까 조직을 위해 희생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사표 냈죠. 그 다음에는 나를 불구속기소하더라고요.
좀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李容湖가 1심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피고인이 된 나를 직권남용죄로 몰아치는 진술을 하더라고요. 그 사람을 두 번째 보는 거예요. 완전히 일년 전과 입장이 바뀐 거죠. 李容湖의 진술 하나로 저는 1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왔어요. 참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세상이 이럴 수도 있나 하고요. 그 후 총장도 결국 물러났으니까 조직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도 다 의미 없어졌고…』
그가 아직도 회의에 찬 어조로 내뱉었다. 이덕선 특수부장은 그 후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언론에 엠바고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呂運桓의 체포작전이 개시됐다. 대검 중수부3과 수사검사들은 呂運桓만 잡으면 여론의 질타를 일거에 잠재우고 수사를 종결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1년 9월12일 밤 10시경 광주지검에 파견된 세 명의 형사들에 의해 呂運桓은 집에서 체포됐다. 새벽 2시경 대전 톨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수부 수사관들에게 그가 인계됐다. 그는 자금이 들어간 것에 대해 해명하면 석방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때 상황에 대해 呂運桓의 처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집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남편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어요. 검찰청 직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처라고 하면서 집에서 받는다고 했더니 잠시 후 바로 검찰청 직원들이 들이 닥쳤어요. 확인하고 잡으러 온 거죠. 남편이 정말 어떤 잘못을 했거나 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렇게 잡힐 남편은 아니죠』
그 시간 呂運桓은 이미 政官界 실력자들에게 수십억원을 제공한 로비스트로 신문에 인쇄가 되고 있었다.
새벽 4시 대검 중수부 1110실에서 呂運桓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내용증명에서 나온 30억원이 넘는 로비자금을 누구에게 주었느냐가 바로 치고 들어오는 핵심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로비자금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검사를 설득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증권에 투자한 자금이라고 말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중수부에서는 그의 모든 장부, 금전출납부, 전화번호나 명함첩까지 뒤졌지만 마땅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계좌추적에서도 평소 그가 친하게 지내던 검찰청 직원과 발이 넓은 통신회사 사장에게 떡값을 준 게 나왔을 정도였다. 거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휴대폰에도 검찰 고위간부의 이름은 전혀 찍혀 있지 않았다.
특별검사
특별검사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2001년 12월 말 특별검사가 탄생했다. 명칭은 G&G그룹의 李容湖 주가조작 횡령 및 呂運桓 政官界로비 축소 의혹사건이었다. 로비의 주체가 李容湖인지 呂運桓인지, 그 대상은 누군인지가 파헤쳐야 할 대상이었다. 특별검사로 임명된 차정일 특별검사팀은 2001년 12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특검팀은 먼저 김형윤 前 국가정보원 경제단장을 소환해서 그가 진도 앞바다 보물인양사업에 관여한 경위를 집중추궁했다. 특검팀은 이어 2000년 5월경 李容湖에 대한 진정사건을 서울지검이 내사종결할 당시 주임검사를 소환한 것을 시작으로 임휘윤 前 부산 고검장, 임양운 前 광주 고검차장, 이덕선 前 군산지청장 등 당시 서울지검 수사지휘 라인을 차례로 소환했다.
특검팀은 2002년 1월10일 李容湖의 회사에 취직하고 李容湖로부터 6000여만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愼承男 검찰총장의 동생 신승환을 소환 조사한 뒤 이날 밤 12시경 신승환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알선수재혐의로 긴급체포했다.
특검의 이런 조치는 2001년 9월경 신승환을 무혐의 처리했던 대검의 수사결과를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여서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특검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인 이형택 前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보물발굴사업과 관련해서 15%의 지분을 보장받고 청와대, 국정원, 해군, 해경 등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사실이 밝혀졌다. 김형윤과 이형택이 자신들에 대한 수사확대를 막기 위해 愼承男 검찰총장을 압박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요지는 이형택이 2001년 9월경 李容湖로부터 신승환에게 거액을 송금한 내역이 담긴 통장 사본을 넘겨받아 김형윤 前 국정원 경제단장에게 전달했고, 김형윤이 愼承男 검찰총장을 직접 만나 『동생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다칠 수 있느니 수사의 적절한 수위조절이 필요하다』며 수사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 특검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통장 사본을 李容湖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이형택에게 전달한 사람이 바로 당시 李容湖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총장의 동생 신승환과 金大中 대통령 집사 李守東, 이희호 여사 처조카 이형택 등이 구속됐다. 愼承男 총장과 김대웅 고검장의 수사정보 유출에 책임이 지워졌다. 대통령의 아들 金弘業도 구속됐다.
결론
특검은 그동안 李容湖와 여러 가지 거래를 했던 呂運桓을 철저히 뒤졌다. 政官界 「100억」을 쓴 로비스트 呂運桓이라는 내용이 몇십억으로 줄었다가 나중에는 어떤 액수도 발표되지 않았다. 특검은 결국 呂運桓이 아무런 로비도 역할도 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나는 그 사실들을 직접 차정일 특별검사에게 물어보았다.
『李容湖 게이트의 본질이 뭐였습니까?』
『金大中 정권에서 지원한 벤처기업에 편승한 사기사건이죠. 피해자는 대중이고요. 李容湖라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 벤처 기업 육성 때 거기에 편승해서 증권을 했죠. 쓸모 없는 회사를 사서 겉을 잘 포장한 뒤 잘 나가는 회사로 만든 거예요. 유력인사를 동원해서 유상증자나 전환사채를 발행해서 일반주주로부터 돈을 끌어 모은 거죠』
특별검사가 요약한 결론이었다.
『유력인사 동원이란 무슨 말입니까?』
『상법이나 법을 지키지 않고 일을 하니까 언젠가 걸릴 거라는 불안감이 들었겠죠. 호남지역 출신 중에서 출세한 사람들을 한다리 건너면서 알게 됐고 보험용으로 돈을 줬죠. 먼저 부탁하고 돈을 주는 나쁜 머리가 아니었어요. 미리 돈을 줘 놓고 사람을 잡은 스타일이죠』
나는 이번에는 呂運桓에 대해 물었다.
『呂運桓은 어떤 인물입니까?』
『李容湖의 비호세력으로 수사를 했는데 실제로 나온 게 없어요. 우리가 볼 때 로비스트라기보다는 李容湖의 채권자예요. 돈을 빌려 주고 몇 배 받는다고 할까. 이자도 많이 받은 사람이고. 呂運桓으로서는 李容湖에게 돈을 빌려 준 이상 일이 잘 돼야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안 도와줄 수 없는 입장이었죠. 李容湖가 돈을 벌어야 자기도 득을 볼 수 있는 공생관계죠. 우리가 기소한 것은 없어요』
대검 중수부는 李容湖가 준 40억원 부분을 뇌물성 로비자금으로 해석하고 呂運桓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판결문을 보면 『피고인 呂運桓과 李容湖의 진술 중에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느냐가 쟁점이다』라고 전제하고 있다. 1심에서의 李容湖의 증언은 대체로 로비자금임을 시인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의 증언은 약간 뉘앙스가 달라졌다. 2002년 12월24일과 2003년 3월18일자 서울고등법원 비공개 법정에서 한 로비명목의 40억원 부분에 대한 李容湖의 증언부분은 이렇다.
李容湖의 증언
『증인이 40억원의 약속어음을 주고 이를 결제해 준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죠?』
검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이유란 것이 2000년 5월9일 이루어진 증인 李容湖에 대한 검찰의 긴급체포와 석방 당시 특수부장이 종용한 심상만이란 사람과의 합의문제였죠?』
『예, 딱 심상만이라고는 안 했고 민원인들과 합의하는 게 좋겠다는 말은 했습니다』
『특수2부의 수사 무마를 위한 로비를 呂運桓에게 맡긴 것은 평소 呂運桓이 政官界 고위인사와 친분관계를 과시하면서 다니고 특수2부 긴급체포 당시에도 김태정 변호사를 선임해 주는 등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지요? 』
『예』
『呂運桓이 친분관계를 빙자하고 다닌 政官界 고위인사가 누구인지 알고 있죠?』
『이 사건과 딱 연결지어서 한 게 아니라 이 사건에서는 얘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증인이 느끼기에 呂運桓이 그 사람들에게 부탁한 사실도 없고 별달리 노력한 사실도 없어서 배신감을 느꼈지요?』
『呂運桓 형이 평소에 아는 분들 얘기를 하신 것이기 때문에… 딱 꼬집어서 어떤 걸 하겠다기보다는 은연중에 그런 얘기를 죽 비춰 주고 자기가 알아서 맡겠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증인신문조서에 나타난 李容湖의 증언은 분명 검사의 물음에 대한 완곡한 부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못해 반쯤은 화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증인이 느끼기에 실제로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위 말해 힘을 쓴 것은 없는 것 같았지요?』
『그렇습니다』
『증인은 검찰수사과정 및 특검 수사과정, 그리고 1심 법정에서 피고인이 증인에게 친분관계를 과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힐 것을 추궁당한 사실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呂運桓이 정말 그 사람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설사 약간의 친분관계가 있더라도 呂運桓이 과시를 했을 수도 있는 것이라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얘기할 경우 본의 아니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어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呂運桓은 李容湖 증인의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을 악용해서 뻔뻔하게 나서고 있지요?』
『그건 남의 마음이니까 제가 얘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이제 비공개로 하는 마당이니까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나요?』
로비자금과 변호사 비용의 처리
李容湖는 마지못해 세 명 정도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댔다.
『결국 증인 李容湖가 준 돈은 관계 요로에 로비하여 검찰수사를 무마하기 위한 명목으로 준 거죠?』
『관계 요로 로비보다는 당시 일을 수습하려면 변호사도 선임하고 경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경비라는 게 일종의 로비자금인가요?』
『로비라기보다는 일이 번지지 않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李容湖 증인은 呂運桓이 필요하면 아는 실세들에게 돈을 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李容湖는 검사의 질문에서 나타나는 취지를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여운환 측 변호사는 로비자금에 대해 다시 한 번 추궁했다.
『1심부터 로비자금이라고 했지 그게 변호사 비용이라고 한 적은 없었는데 항소심에서 자금의 용도를 변호사 비용으로 바꾸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변호사 비용도 쓰고 검찰청의 아는 사람한테 용돈도 줘야 된다고 해서…』
李容湖의 답변이 정확하지 않았다. 변호사가 다시 다그쳤다.
『증인은 로비자금과 변호사 비용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 자금 중에 변호사 비용도 들어 있었다면 자금 마련을 위한 어음 40억원을 呂運桓에게 준 2000년 6월1일 이후 呂運桓에게 변호사 선임을 부탁한 적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증인은 呂運桓을 믿고 따로 검찰에 로비를 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로비한 적이 없습니다』
『증인은 당시 수사계통의 지휘라인에 있던 임휘윤 서울 지검장, 임양운 3차장 등을 모두 잘 알고 있었지요?』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呂運桓을 통해 따로 로비를 할 필요가 있었나요?』
『임양운 차장님이나 임휘윤 검사장님은 2000년…』
조서上으로 대답은 불분명했다. 마지막으로 재판장이 물었다.
『20억원의 현찰을 주면 40억원의 어음을 끊어 계산해 주겠다고 한 방법은 呂運桓과 李容湖 두 사람이 미리 협의를 해서 한 것인가요, 아니면 일방적으로 한 것인가요?』
『呂運桓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20억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40억원으로 되었다면 늘어난 20억원은 누구의 돈인가요?』
『그때…』
조서에는 대답이 없이 그렇게만 기재되어 있었다.
『20억원을 증권투자해서 돈이 늘어나면 늘어난 돈의 임자는 누구인가요?』
『저입니다. 20억원의 원금은 呂運桓의 것이고요』
『呂運桓 피고인이 20억원 투자했다가 20억원 돌려 받으면 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원금 20억원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는 것인가요?』
『呂運桓과 거래하면서 한 번도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李容湖의 진술이 바뀐 것이다. 처음에는 그 돈을 로비자금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합의금과 변호사 비용 등 경비로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판사의 물음에 대해서는 呂運桓이 투자한 20억원 외에 나머지 20억원은 자신의 돈이라고 한 것이다. 재판장이 다시 따진다.
『呂運桓이 자신이 20억원을 투자할 테니 남을 20억원에서 최소한 10억원은 보장을 해 달라거나 늘어난 금액을 서로 나누자는 식으로 합의할 법한데 어떻습니까?』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20억원을 투자한 呂運桓은 자기는 자선사업만 하자는 얘긴데 그런 일을 왜 했다고 생각합니까?』
『呂運桓 본인이 20억원을 투자해서 20억원이 남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게 강요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강요당해서 하게 된 상황이라면 呂運桓의 돈이 되어야 할 게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각서를 쓰거나 혹시 근거서류를 만든 게 있습니까?』
『呂運桓과 저는 지금까지 거래하면서 한 번도 그런 것을 써 보거나…』
「오줌싸개론」
李容湖의 말 중에도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에 대해 담당검사는 「오줌싸개론」을 주장했다. 李容湖의 진술 중 모순된 점이 발견되자 담당검사는 李容湖가 呂運桓 앞에서는 오줌을 쌀 정도로 벌벌 떤다고 했다. 검사는 呂運桓이 과거 조직폭력배였고 고위층과 많은 연결을 가진 듯 위세를 부려 李容湖를 눌렀다고 말했다. 공판정에서 검사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비로소 설명됩니다』라고 하면서 『李容湖는 呂運桓 앞에 가면 오줌을 싸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수사과정에서 두 사람을 한 차례도 대질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李容湖의 변호사 중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李容湖에 대해서는 담당했던 변호사들의 평가가 엇갈렸다. 만났던 변호사는 李容湖를 좋아해서 李회장님이라고 꼭 존칭을 쓰는 정도였다.
『李회장님은 말이죠 呂運桓 같은 깡패를 자기 반열에 놓는 자체를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세요. 지역건달이 왕년 생각하고 말 함부로 하는 것에 얼마나 무시당했다고 펄펄 뛰었는데요?』
그렇다면 오줌싸개론은 거짓이었다.
사실상 따지고 보면 李容湖 증언의 핵심과 呂運桓의 주장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李容湖는 자기가 검거된 사건에 대해 그가 준 40억원의 어음은 로비자금으로 준 것이 아니라는 뜻을 말했다.
특별검사의 말이 오히려 정확했다. 呂運桓은 많은 이익을 요구하는 채권자였다. 李容湖는 영리한 사업가였다.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각자 자기의 해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재판장이 물었을 때 李容湖가 투자금 20억원 이외의 나머지 돈이 자기 것이라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의 실세들을 안다고 한 과시도 일반적으로 흔히들 나타내는 허풍일 수 있었다.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놓고 呂運桓과 李容湖의 욕심이 달랐다. 거기에 검사의 욕구 또한 다른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검사는 싫어하는 李容湖를 힘겹게 이끌어 呂運桓의 로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고등법원의 판결이유를 보면 현금이나 수표를 呂運桓과 李容湖가 서로 주고 받은 것은 서로 인정하고 있고 다만 그 돈의 성격이나 명목이 문제가 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로서는 呂運桓과 李容湖의 진술 중에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느냐가 쟁점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판단의 핵심을 정확히 이끌어낸 말이었다. 呂運桓의 경우 체포 당시 세금포탈로 짐작하고 액수를 줄여 진술하고 관련서류도 그렇게 만들어 제출하도록 했다고 했다. 그런 행동들이 자신에게 毒(독)이 되어 판결에서 설시되고 있었다.
<계좌추적 결과 등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까지는 모든 혐의내용을 철저히 부인하고 관련자료와 참고인의 진술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부분에 한하여 진술을 번복하고 있는데 이러한 진술태도로 보아 피고인의 주장은 믿기 힘들다>
결국 呂運桓은 우화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내용 중 거짓말한 소년의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판결
고등법원의 판결이유를 보면 李容湖 증언과 呂運桓의 진술 중 누가 더 신빙성이 있느냐가 쟁점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재판부는 李容湖의 말에 좀더 논리와 일관성이 있다면서 呂運桓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삼았다. 보관 중이던 내용증명이 압수된 것이라면 허위로 꾸며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또 李容湖가 처음에 呂運桓을 도주시키려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접근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呂運桓은 수십억의 횡령범, 사기범 그리고 변호사법 위반으로 대법원서 징역 4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李容湖도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한 데 비해 결과는 특별하지 않았다. 보물선 관련 내부자 정보제공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해외전환사채 발행 및 공시위반에 대해서는 아직 상고심에 계류 중이었다. 또한 증권거래법 위반에 대해서는 고등법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고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그의 증인신문조서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1심 판결문을 보면 판사는 이렇게 판결이유를 말한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해저에 매장되었다고 하는 금괴발굴사업을 추진하면서 이 사업을 주식회사 삼애실업의 주가를 상승시켜 이익을 얻는 데 이용하기로 하고 2001년 1월10일 李容湖의 삼애실업 내에 금괴발굴사업을 추진하는 특수자원개발탐사 사업부를 설치하고 매장 금괴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외양을 갖추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외부에 조금씩 유포하여 주식회사 삼애실업의 주가가 상승하게 되자…>
또 판결문은 국회에서 교묘하게 위증을 하는 李容湖의 대담성도 지적하고 있다.
<李容湖는 국정감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선서한 후 증언함에 있어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으로부터 『보물선 사업에서 이형택씨는 전혀 개입된 바 없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없습니다』라고 답변하고 『언제 어디서 만났어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작년 12월경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답변함으로써 기억에 반하는 허위의 진술을 해서 위증한 것이다>
『저는 그동안 呂運桓씨에게서 들은 사실들을 글로 써서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呂씨에게 확인했다.
『그래주십쇼』
그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한 사람인 저를 속이기는 쉽지만 세상에 알려지면 세상은 안 속을 건데요, 어떻습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난 진실합니다. 관련된 모든 인간들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다시 만들어도 난 정말입니다』
그의 독특한 고집이었다.
『처벌받아도 좋습니까?』
『좋습니다. 변호사님이 명예훼손으로 배상판결을 받는다면 제가 그 돈을 물겠습니다. 각서도 쓸게요. 누명을 쓰고 다시 감옥에 간다면 또 가야죠』
세상과 맞짱 뜨자는 고집
그의 시도는 달걀로 바위를 깨뜨리겠다는 식이다. 이미 대법원까지 여러 명의 판사가 그의 주장을 배척했다. 그 자신에게도 말을 바꾸는 등의 가벼운 행위로 일부 책임이 있었다.
『李容湖가 죄송하다고 한마디만 해도 저는 용서합니다. 그동안 산 징역도 다 잊어버릴 겁니다. 그러나 그냥 이렇게는 안돼요』
그의 성격의 일단이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난 그에 게 몇 가지 아픈 질문을 던졌다.
『呂運桓씨가 이 사회에 진정으로 헌신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없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수백억 있습니다』
『그 돈의 의미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수십억, 수백억이 있어도 이 감옥 안에서 내 자신은 한 달에 영치금 몇 십만원 쓰는 게 다입니다. 이제 그 의미를 알죠』
『전설 같은 조직폭력배의 영웅같이 된 이름에 대해서는요?』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30년 전 고등학교 시절 불량서클에 들었던 멍에가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도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呂運桓 게이트라는 말도 제가 조폭 두목이란 화려한 소문이 없었더라면 생겨났겠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조폭두목이란 낙인은 죽을 때까지 영원한 쇠사슬입니다.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고 풀어 주지도 않습니다』
그는 구치소 안에서도 조폭두목으로 특별관리대상이었다.
건달이 가진 건 원색적인 근육의 힘이다. 그런 근육이 무서워하는 것은 감옥으로 사람을 집어 넣는 권력의 힘이다. 그 위에 가장 무섭고도 마음까지도 잡아버리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돈의 힘이었다. 근육이나 권력의 힘은 상대방에게 저항감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돈은 상대방의 영혼마저 마취시켜 버리는 마약 같은 작용을 한 것이다. 나는 그런 힘들을 향한 야망, 질투, 저주, 투쟁의 장면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추락하는 총체적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보통사람이 호송차에 꽁꽁 묶여 다니는 그들의 지금 마음을 엿볼 수 있다면 아마도 자신의 행복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자유롭게 낙엽길을 산책할 수 있는 기쁨, 목마른 자만이 아는 물 한 그릇의 행복을….
後記
지난해 여름을 이 사건 실록을 쓰는 것으로 꼬박 보냈다. 수사기록부터 대법원까지의 공판기록을 꼼꼼히 읽었다. 발로 뛰면서 관련 인물들도 여러 명 수차례 만났다. 한 가지 사실도 관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나는 걸 알게 됐다.
성공한 장발잔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천사였다. 그러나 평생 그를 추적하는 경찰관의 시각에는 범죄자였다.
소설에서 집요하게 장발잔을 추적한 형사는 직업경찰의 이상적 모델이었다. 呂運桓은 깡패사회에서 손을 떼고 17년간 조그만 사고도 없는 사업가였다고 했다. 자신의 의식과 마음에서 그는 이제 깡패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있고 한편 남이 나를 보는 눈이 있다. 신화처럼 부풀려진 건달 경력과 근육질의 청년들이 그에게 머리를 굽히는 장면을 보게 되면 그는 분명 조직의 보스일 것이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객관적인가를 여러 번 自問했다. 나는 그가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약게 한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미웠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대할 때는 편견 없이 그의 말을 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呂運桓과 대칭점이 되는 李容湖씨도 구치소 복도에서 지나가다가 만났다. 그의 말을 통해 눈에 보이는 과거의 기록보다 감추어진 실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자금 수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지위까지 걸린 상황이다. 그는 내게 자신이 잡혀 들어간 근본원인은 정치자금이었다고 했다. 그 역시 억울한 감정과 분노로 가득했다. 최근 그는 「집사 변호사」의 전화 등을 사용해 감옥 안에서 증권을 사고 판 것으로 또 물의를 빚었다.
그는 감옥에 온 정치적 거물들이 다 그랬는데 자기만 기소됐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용호 게이트」의 진짜 본질에 대해 본인인 그로부터 일부 듣기도 했다. 진실은 본인의 마음이 열렸을 때만 들을 수 있지 공권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진짜 얘기는 먼 훗날 다시 듣기로 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도 사회적 편견이나 권력의 의도가 있으면 바로보기 힘들다. 시간에 쫓기는 언론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진실은 그 자체의 힘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나는 그 파편들을 주워 모아 사건 실록을 만든다. 그건 법조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나의 직업이 있기 때문이다. 우연이지만 나만 본 까닭이기도 하다. 징역을 오래 산 한 재소자는 고문의 현장을 보고도, 사실 왜곡의 증거를 잡고도 침묵을 지키는 변호사는 비겁한 속물이라고 질타했다. 나는 이것도 변호사의 한 역할이고, 또한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李容湖 및 로비스트 呂運桓 게이트 수사일지
1. 2001년 9월4일 대검중수부 李容湖 구속.
2. 서울지검 고위간부 로비의혹에 따른 대검 특별감찰본부 설치.
3. 서울지검 간부에게 로비자금 40억원 들어간 혐의의 내용증명 발견. 政·官界에 로비자금 100억원 들어갔다는 李容湖 변호인의 발표.
4. 2001년 9월12일 로비스트로 알려진 呂運桓 구속.
5. 2001년 11월22일 李容湖·呂運桓 특검법 국회통과.
6. 2001년 12월1일 차정일 특별검사 임명.
7. 임휘윤 서울지검장, 임양운 차장, 이덕선 특수부장 등 李容湖 수사라인 검사에 대한 조사.
8. 2002년 1월13일 검찰총장 동생 신승환 구속, 愼承男 검찰총장 사퇴.
9. 2002년 2월1일 金大中 대통령 처조카 이형택 구속.
죽도 보물사업 지원 위해 국가정보원이 해군에 청탁한 데 대한 대가 조사.
국정원 간부, 해군참모총장, 전현직 육군장성,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등 조사.
10. 2002년 2월28일 金大中 대통령의 집사로 불리던 李守東 구속. 해군 참모총장 임명, 해군 소장 진급, 경무관 승진 등 인사청탁 관련의혹.
제주도 발행 복권 판매대행권 관련 청탁의혹.
월드컵 상암구장 구내매점 관련 청탁의혹.
11. 그 외 前 국회부의장 김봉호 등 3명 불구속기소.
12. 여운환 징역 4년, 이용호 징역 6년6월, 이수동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3년, 이형택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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