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왜 세 차례 실패했던가?

97년에도, 2002년에도, 2004년에도 한나라당은 좌파와 이념적 정면승부를 포기함으로써 애국세력의 동원에 실패했다.
한나라당이 1997년 大選과 2002년 大選, 그리고 2004년 탄핵사태 때 모두 패배한 이유는 좌파를 상대로 이념적 정면승부를 피함으로써 상황의 주도권을 놓쳤기 때문이다. 1997년에 마땅히 한나라당의 李會昌 후보가 따져야 했을 문제는 金大中 후보의 사상적 위험성이었다. 그의 親北前歷과 위험한 통일관에 대해서 李 후보는 끈질기게 물고늘어졌어야 했다. 그리하여 金 후보가 김정일 정권과 대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와 국군통수권자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란 점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켰어야 했다.

당시 아들의 병역문제로 守勢였던 李 후보측은 金 후보의 사상문제를 제기하면 '색깔론'이라는 逆攻을 부르게 된다면서 金 후보에게 가장 불리한 쟁점을 피해가버렸다. 李 후보가 진정한 자유민주의 소신을 가졌더라면 이 문제는 얄팍한 계산이 아닌 철학과 이념의 원칙에 따라서 제기했어야 했다. 여기에 승부를 걸었더라면 李 후보는 당선했을 것이다. '군대도 안간 좌익행동대원 출신의 친북적 대통령'을 택할 것인가 '본인은 군대에 갔으나 아들이 군대에 안간 확실한 대한민국 편 대통령'을 택할 것인가. 이런 선택지를 유권자들에게 제시했더라면 李 후보는 근소한 차이로 이겼을 것이다.

좌파의 가장 큰 약점은 이념적 정체성이다. 우파 자유민주 체제에서 좌파는 反헌법적 존재이므로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民主나 개혁이나 진보로 위장해야 생존할 수 있다. 이런 위장막을 과감하게 걷어내버리면 햇볕에 노출된 좌파는 자유민주체제 아래서는 절대로 생존할 수가 없다. 진실의 햇볕을 받으면 말라죽어버린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좌파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벗기려는 시도에 대해서 늘 '색깔론'이란 억지로 대응해왔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용공조작의 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일부였다. 이 극소수의 무리한 수사를 과장하여 '색깔론'을 전개하니 이념도 신념도 약한 우파 정치인들은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李 후보가 金大中씨의 사상문제를 제기하여 낙선했다고 해도 2002년 大選 때는 틀림없이 당선되었을 것이다. 金 대통령이 4억5000만 달러의 뇌물로써 매수한 6.15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의 실체에 대해서 알게 된 유권자들은 1997년 大選 때 李 후보가 제기했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판단하여 예언자적인 역할을 한 李 후보를 낙선시킨 것을 대하여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그에게 표를 모아주었을 것이다.

李 후보는 2002년 大選에서도 좌파와 정면승부를 하지 않았다. 좌파와 싸우기 위해서는 우파를 대동단결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략이다. 이념투쟁은 상대를 고립시키고 우리 편을 키우는 것이다. 그는 '김정일과 김대중 편이 아니면 모두 우리 편이다'는 생각을 하고 金鍾泌, 鄭夢準 세력과 손을 잡았어야 했다.

1997년에도 李 후보는 흠이 있더라도 우파일 수밖에 없는 金鍾泌 세력과 손을 잡지 않음으로써 그가 충청도 표를 끌고 좌파쪽으로 가서 김대중씨의 신원보증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2002년에도 李 후보는 똑 같은 실수를 했다. 그는 '이념으로 분단된 한국에선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이다'는 상식을 부정하는 선거전략을 수행했던 것이다. 본인도 그러했지만 한나라당의 그 누구도 盧武鉉 후보의 좌경적 이념을 是非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反美촛불 시위에 李 후보가 참석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바람에 정통보수층이 배신감을 느꼈다.

李씨는 지금도 그때 자신을 비판했던 보수층에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한다.
'젊은 표를 얻기 위해서 전술적 좌선회를 한 것을 왜 몰라주었느냐'는 취지이다.
일견 이유 있는 항변이나 여기에 지금의 한나라당도 빠져들고 있는 무서운 함정이 숨어 있다. 우파 후보가 좌파 표를 얻으려고 하면 左右 표를 다 잃게 된다는 것은 한국과 세계 선거사상 한번도 부정된 적이 없는 불변의 공식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파 후보가 좌파에 대해서 추파를 던지는 순간 다수 우파가 그 후보에 대한 배신감을 품고서 이탈하거나 지지도가 약해진다. 우파 후보가 확실한 우파 입장을 밝히고 선거운동을 시작하면 그 소신에 감동한 보수층 유권자들이 일종의 선거운동원이 되어 중도 유권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자발적인 대규모 선거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파 후보의 전술적 좌선회는 쉽게 간파당한다. 좌파의 위장된 우선회는 金大中 후보의 경우처럼 성공하기 쉽다. 우파는 정직을 생명으로 하는 집단이고 좌파는 위장을 가장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우파의 위장은 부자연스럽고 좌파의 위장은 자연스럽다. 우파는 위장술에서는 아마추어이고 좌파는 프로이다.

2004년 3월1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회에서 압도적인 표차이로 盧대통령 탄핵의결을 했다. 그 순간 兩黨 의원들은 '盧대통령은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안이한 시각은 좌파의 생리와 한반도의 이념투쟁의 본질에 대한 무지함을 보여준 것에 불과했다. 盧대통령은 당시 급조된 열린당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한국의 대중조직과 방송을 장악한 거대한 좌파의 대통령이었다. 여기에 김정일 정권이 가세하여 盧대통령 구출에 나섰다. 한나라당은 졸지에 남북한 전체의 좌파, 즉 親盧親北 연합세력과 대결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법리상으로는 국회의 탄핵결의가 정당했으나 남북한 좌파가 조직력과 선전력을 총동원하자 국민 여론이 오도되어 反탄핵으로 돌아섰다. 이때 한나라당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있었다.

그것은 한나라당도 당원들을 총동원하여 광화문으로 불러내고 애국운동단체들의 도움을 호소하여 거리에서 더 막강한 숫자로써 좌파와 대결하는 것이었다. 거리에서 밀리지 않으면 언론의 親盧 편향 보도도 견제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숨어버렸다. 집에 가버렸다. 거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비겁한 의원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탄핵은 잘못이다'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전멸했어야 할 한나라당이 구제된 것은 朴槿惠 대표의 대중적 인기와 보수층 여론의 궐기 덕분이었다.
5월31일 지방선거에서 열린당과 대통령에 대한 국민혐오증의 반사시익으로써 스스로도 놀란 大勝을 거둔 한나라당은 또 다시 좌파와의 싸움을 피하면 자동적으로 이긴다고 판단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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