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집: 기독교와 이승만과 대한민국

"공산주의는 콜레라이다. 인간은 콜레라와 함께 살 수 없다"고 그 악마성을 통찰한 이승만이 있었기에 우리가 행복하다.
건국대통령 李承晩 박사를 생각한다


조갑제

유럽에 가면 거대한 성당건물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빌어 지은 걸작이다. 성베드로 성당, 톨레도 성당, 노테르담 성당, 쾰른 성당, 바르셀로나의 미완성인 聖가족성당(가우디 설계), 스트라스부르흐 성당 등은 최단 200년, 최장 800년이 걸려 지은 성당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성당에는 여러 건축양식이 다 들어 있다. 고딕,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바로크 등등 여러 양식의 부분 부분들이 하나의 종합된 예술품으로 서 있으니 더 감동적인 것이다. 역사의 기복과 문화의 나이테를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랜 성당들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골동품이나 구경거리로 거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예배당으로 쓰인다. 유럽사람들은 역사속에서 그 역사를 호흡하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민주주의를 그러한 성당건물에 비교해본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그런 성당을 짓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더 많은 세월과 더 많은 시행착오와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 시대까지 거슬러오른다면 오늘의 서구식 민주주의 역사는 약2500년이나 된다.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까지 올라가도 약800년이다. 이 오랜 기간에 민주주의는 갈之를 그리면서 서서히 발전해왔다.

민주주의는 특권층의 것으로 출발했다. 귀족과 시민만이 누리던 민주주의가 평민과 여성, 그리고 흑인 등 소수민족에까지 확산된 것은 최근 100년 사이이다. 유럽에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이 확립된 것도 최근이다. 영국의 경우는 17세기말 명예혁명 이후이고 프랑스는 1871년 제3 공화국 이후이며, 독일은 1945년 이후이고, 前 동구공산권 나라들은 1989년 이후이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시간을 더 많이 먹고 자란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1948년8월15일 건국으로부터 출발한다. 민주주의는 국가라는 그릇이 없으면 담길 수 없는 보물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란 종이위에 쓰여진 학설일 뿐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의 지원을 끌어내어 대한민국을 세우고 반역공산집단의 기습으로부터 이 신생아 같은 어린 나라를 구했다. 건국과 호국을 주도한 李承晩 대통령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첫장을 연 분이다. 우리가 그를 건국 대통령이라고 부를 때 그 의미는 국민국가를 세운 분, 즉 민주주의 건설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국민이 자유민주주의의 기치 아래서 정권을 선택하고 국회의원을 뽑는 국민국가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그 뒤 수많은 기복이 있었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이란 운전대를 놓지 않고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같은 시기 북한의 金日成은 소련이 써주는 시나리오대로 반역집단을 세워 남쪽의 정통국가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전통이 전무한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 그것도 생존의 위협속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아니 살려내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 것이다.

李承晩, 이 분의 어느 시기 행태를 과장하여 그를 독재자로 모는 것만큼 가혹하고 배은망덕한 일은 없을 것이다. 李承晩 대통령을 독재자로 모는 이들의 논리적 근거는 그가 서구식의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聖베드로 성당을 왜 10년만에 다 짓지 않고 수백년이 걸렸느냐고 욕하는 것과 같은 망발이다. 聖베드로 사원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맡은 건축가에게 왜 건물을 다 짓고 돔까지 올리지 않았느냐고 채찍질을 한다면 이는 이 건축가가 하나님이 못되었다고 욕하는 격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고 욕하는 자들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을 참칭한 金日成에 대해선 욕 한 마디 하지 않는다.

李承晩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분이 민주주의 건설에 악영향을 끼친 부분은 공에 비교하면 작다. 민주주의 건설은, 대성당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李대통령은 그 기초공사를 한 분이다.
그는 우선 자유진영 편에 이 나라를 줄세웠다. 李박사와 미국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 1990년대엔 북한처럼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자유진영은 선진국이다. 후진국이었던 한국은 선진국으로부터 민주주의 하는 방법과 시장경제 하는 방법과 군대를 운영하는 방법과 과학기술을 배웠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무능한 나라의 정권들과 친구가 되어 거짓말하고 학살하며 독재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이 남북한의 오늘날 차이를 불렀다.

후진국이 민주주의를 하려면 우선 농사짓지 않는 특권계급으로서의 地主를 없애는 농지개혁을 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하면 地主는 수구기득권세력이 되고 농민들은 불만세력이 된다. 여기에 공산주의나 이슬람 원리주의가 파고들어가면 항구적인 체제갈등이 생긴다. 南美의 대부분, 필리핀, 그리고 파키스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지주출신 정치세력의 반발을 꺾고서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만약 6.25 남침 때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한 북한군이 지주로부터 농토를 빼앗아 소작농에게 나눠주었다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 이들은 농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북한군 편에 서서 국군에 대항해 싸웠을 것이다. 농지개혁은 민주주의의 토대를 놓았을 뿐 아니라 민주한국을 지켜냈다.

李承晩 대통령은 6.25 휴전과정에서 미국을 협박하다시피해가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이에 근거한 한미군사동맹은 지금까지도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준 울타리요 우산 역할을 하고 있다. 韓美동맹은 또 미국이 깔아놓은 세계의 무대에 한국인이 등장하여 수출도 하고 투자도 하며 이민도 갈 수 있는 활동공간을 제공했다. 한국인은 자유진영의 지도국인 미국의 血盟이란 보증하에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안보가 불안하면 절대로 필 수 없는 꽃이다. 한미동맹을 만든 李대통령은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그 울타리와 우산을 만든 것이다. 이런 분을 독재자라고 부르고 한미동맹을 와해시키려는 戰犯세력을 평화, 민족세력이라고 부르는 작금의 한국내 좌파세력이야말로 민주주의 파괴세력이다.

민주주의는 교육받고 먹고 살 재산이 있는 중산층이 적어도 국민의 반 이상이 될 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李대통령은 전쟁중에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았고 대학생에게는 현역복무를 면제해주면서까지 人材육성에 주력했다. 더구나 그가 가르친 것은 독재에 순응하라는 가짜 주체사상이 아니라 독재에 항거하라는 민주주의 윤리였다. 이 교육을 李정권 때 받았던 학생들이 1960년 4.19 학생의거의 주력이 되었다. 이 세상에 자신을 타도하라고 가르치는 독재자도 있는가.
더구나 李대통령은 학생들이 시위진압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물러났다. 4.19 때 학생들은 선거를 다시 하자고 했지 '이승만 물러나라'는 구호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퇴진요구도 없는데 스스로 평화적으로 물러난 사람은 독재자가 아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발췌개헌, 3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집권 시절 경찰과 특무대가 야당을 탄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李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파괴, 봉쇄하려 하지는 않았다. 6.25 남침을 당해서 전쟁중인 나라에서도 국회는 활동했고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했으며 언론은 군대와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선거도 중단되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좌익들까지 지도자로 모시려고 했던 위대한 독립투사였다. 그는 초대내각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쓰지 않았다(반면 김일성은 자신의 편에 선 친일파를 비호했다. 그의 동생 金英柱는 日軍의 통역을 한 사람인데도 제2인자가 되었다). 李대통령이 일제 때의 경찰관과 공무원들을 중용한 것은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일제 때 국가운영에 참여하여 배운 기술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쓰도록 했던 것이다. 일제 경찰관 출신들이 李정권의 수사기관에 들어가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고문수사를 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수사관들의 과잉충성과 법치무시 체질 때문이지 李박사에게 모든 책임을 씌울 수는 없을 것이다. 관리가 백성들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 전통처럼 되었던 조선조 관료의 체질과 일제의 탄압체질을 지도자 한 사람의 책임으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순진하고 낭만적으로 보는 분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李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간판을 걸고 북한과 생존투쟁을 하면서도 그 원칙을 고수해가려고 苦鬪한 데 우선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부분이 90%라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부분은 10%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80%의 긍정이 남지 않은가. 그런 분을 독재자라고 불러 그분의 모든 업적을 말 한 마디로 무효화시키려 드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건국, 호국의 시대가 독재자의 시대였단 말인가. 그 시대의 국민들은 독재자에게 모두 굴종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망할 지경에 처했던 나라를 국민들이 다 잘해서 이렇게 발전시켰단 말인가. 李대통령 시대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그 뒤 朴대통령이 성공적으로 나라를 근대화시킬 수 있는 울타리와 바탕과 우산을 마련했던 고난의 시절이자 영광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功過는 대통령과 국민들이 나눠가져야 한다. 功의 가장 큰 부분과 過의 가장 큰 부분은 물론 李박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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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永益 교수, '神이 내린 사람 李承晩'


미래한국

카리스마, ‘神이 부여한 권능’의 이승만
근대화, 이승만의 업적 위에서 가능

22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대가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를 초빙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에 대한 강연과 토론이 진행됐다. 아래는 이날 강연요지이다.

<이승만 폄하는 ‘연구부족’탓...국내 근현대사 연구 부족으로 외국학설이 석권

이승만에 대한 폄하(貶下)는 근본적으로 ‘연구부족’에 기인한다. 한국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보니 외국 학설이 학계를 석권했다. 브루스 커밍스 류(類)의 수정주의 사관이 그것이다.

이 같은 외국 학설들은 원숙한 안목으로 이루어진 연구업적이 아니다. 외국인이 젊은 나이에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도출한 결론들이 대부분이다.

이승만 비판을 위해 가장 많이 원용되는 자료인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의 이승만 전기를 예로 들어보자. 리처드 알렌(본명: John M. Taylor)은 6. 25전쟁 중 ‘이승만 제거계획’을 작성했던 미8군 사령관 테일러(Maxwell Tayor) 장군의 아들로서 이 책을 쓸 때 30세였다.

미국의 정보*외교 관련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한국에 약 2년간 머물면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이 책을 썼다. 특히 이 책은 4`19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이승만 하야에 개입했던 미국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출판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20여 권의 책을 쓴 ‘제대로 된’ 미국인 학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이승만 전기를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놓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간 사람과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심판하는 것이다. 한국역사를 보는 안목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미국사람들의 책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적 사대주의’이다. 우리 스스로 애정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이승만 박사

한미동맹 후 평화 정착과 경제성장 기반

이승만은 1인당 GNP 50달러, 문맹률 80%에 달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중국만 해도 20여 년간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는데 한국은 3년 만에 이를 이뤄냈다.

이승만이 해낸 업적을 개괄해보자.
이승만은 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 헌법 제정 당시 그는 한민당 세력을 대변하던 유진오의 초안(草案)에 불만을 품고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꿔놓았다. 이것은 ‘정권욕’때문이 아니라 오랜 신념의 결과였다. 새로운 나라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며 내각책임제가 되면 조선조의 당쟁이 재현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승만은 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냈다. “안 해 주겠다.”는 미국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져 간신히 얻어낸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조약 체결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전쟁이 사라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 14년에 한번씩 일어났던 전쟁이 60년 이상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민족생성 이래 가장 큰 경제발전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외교적 바탕위에 가능한 것이었다.

5만 군사, 70만 강군(强軍)으로

군사적으로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건국 초 5만 명 수준에서 이승만 집권 말기에 70만 명으로 증강됐다.
이승만은 미국에 거듭 군사원조를 요구해서 건국 당시 5만의 군대를 갖췄고, 6.25사변 당시 이를 10만으로, 종전 후에는 70만으로 증강시켰다. 조선조가 망할 때 상비군이 겨우 8,500명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도 못 막아내던 우리 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군사강국 대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80%의 문맹률 10% 이하로 떨어져

교육 측면에서는 더 큰 업적을 이뤄냈다. 6년의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80%의 문맹률을 하야 당시 10% 이하로 떨어뜨렸다. 국민의 90%가 문자 해독(解讀)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은 영국을 앞질렀다. 60년 이후 경제기적은 이승만 시절 양성된 고급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경제 측면에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이성계의 과전법 이후 최초였다. 농지개혁을 6. 25전쟁 이전에 단행함으로써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편들지 않게 됐다.

이승만의 집권을 통해 한국은 기독교국가가 됐다. 1885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는데 1900년대까지 양반계층 중 개종한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중인이나 상민,천민들이었다. 양반출신으로서 ‘거의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키운 사람이었다. 1919년 3.1운동 후 그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청년시절의 비전을 실현해간다. 12년간 기독교를 음`양으로 지원했고 이러한 후원을 배경으로 한국교회는 1950년대에 급성장했으며 1960년대 이후 지속적 성장을 한 것이다.

미국을 모델로 하는 건국의 꿈은 미국의 제도가 지상에 어떤 나라보다 우수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의 압박을 받지 않는 부강하고 당당한 나라가 되려면 미국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이승만이 한국을 미국에 예속시켰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체제론’을 맹신하는 이들의 얕은 생각에 불과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이 이뤄 낸 기반 위에서 모든 것을 이뤄냈다. 더 어려운 기초 작업은 이승만이 해낸 것이다.

北공산화 이후 ‘정읍 발언’

이승만의 건국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 46년 6월 3일 정읍발언에서 나온‘남한 單政論’에 근거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이미 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북조선에 ‘親蘇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려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드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에 따라 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그 이름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이란 보통 정부가 갖는 것 이상의 막강한 권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화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美蘇)공동위원회에서 통일된 독립정부를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성과 없이 무기 휴회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보았다. 단독정부 발언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인공’은 대표성 없는 박헌영派의 조직

브루스 커밍스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 하에 미군정이 해방직후 서울에 선포된 인민공화국(人共)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그러나 ‘인공’은 좌익인 박헌영 계 사람들이 서울 경기여고 자리에서 하루 동안 회의를 거쳐 선포한 조직이다. 모인 사람들의 대표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절차도 무시됐다. 커밍스는 이러한 ‘인공’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해방 전 이승만은 미국정부에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국무성에 찾아가 항상 임정승인을 요구하는 이승만을 껄끄러워했다.

실제 미국은 47년까지 이승만 대신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원했다.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선호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 지지로 선회한 것은 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대소봉쇄정책이 확정되고, 같은 해 5월 8일에 열린 미소공위가 또 다시 유산된 이후였다. 미국이 확실하게 반공(反共)노선을 채택하면서 한반도에서도 꾸준히 반공(反共)주의 입장에 섰던 이승만을 밀게 된 것이다.

경찰, 군대 친일파 등용은 여순 반란 탓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은 근본적으로 인재부족 때문이었다. 나치 치하 프랑스의 비시정권에서는 고급인력이 3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통치 이후 한국의 교육받은 인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親獨派 5만을 숙청해도 상관없었지만 한국은 달랐다. 당장 외무장관을 시키려고 해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만들 때 단 한명의 친일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경찰에 친일파가 많이 남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지 2개월 만에 남로당 지령에 따라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앞에서 좌익들을 소탕하기 위해 ‘반공법’이 제정됐고 같은 이유로 일제시대 공산당을 잡던 전문가들이 다시 경찰에 등용된 것이다.

UN통해 명예로운 건국

이승만의 건국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명예로웠다. 새로운 왕조나 독립국가의 탄생은 대개 내전을 거쳐 달성된다. 그러나 이승만은 UN을 통해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는 이승만이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다.‘미국의 괴뢰국가가 되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여 세계기구인 유엔의 축복 속에서 건국을 이뤄냈다.

95.5%의 투표율을 보인 총선거(제헌국회선거)는 남로당과 남북협상파의 방해 내지 비협조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과였다.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이승만은 196표 가운데 180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세계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명예로웠던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카리스마란 ‘神이 부여한 권능’ 혹은 그러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승만은 카리스마였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등 군웅(群雄)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인물이다.‘카리스마’란 모세와 같이 초인적인 권능을 가진 인물을 가리킨다.
‘카리스마’는 역사에 돌연 나타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낸다.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신이 내린 명령이라는 소명의식으로 그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한국사에 나타난 이승만 역시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정리 김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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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일성, 기독교와 가짜 주체교

뒤에 기독교의 탄압자라는 惡名을 얻었지만 金日成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미국의 기독교 단체가 만든 미션 스쿨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이었다. 반석이란 이름도 성경(베드로가 盤石이란 뜻)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강반석은 고향인 칠골교회의 집사로 봉직했다. 金日成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나갔다. 주일학교에서 金日成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성경을 가르치고, 그의 육촌동생 강양욱은 소년 金日成의 주일학교 담당 교사였다고 한다.
북한 정권을, 주체사상이란 종교를 믿는 신도집단으로 해석하여 신도수 기준 세계 제10위의 종교단체로 올린 통계가 있다. 김일성을 聖父, 金正日을 聖子, 주체사상을 聖靈, 10계명을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초대 대통령 李承晩 박사는 원래 전주 李씨 양녕대군(태종의 장자로서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끈질기게 과거 시험에 도전, 낙방을 거듭한 사람이다. 갑오경장으로 과거 시험이 없어지자 좌절해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배재학당에 나가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李承晩이 수구세력에서 급진 개화세력으로 바뀌는 매개 역할을 기독교가 수행한 것이다.

남북한의 두 지도자의 공통점은 여기서 끝난다. 김일성은 만주로 가서 공산주의와 만나고 李承晩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가서 자유민주주의와 만나기 때문이다. 1945년 해방 직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귀국했다. 김일성은 증오의 과학(공산주의)으로 무장한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 돌아왔다. 李承晩은 사랑의 종교(기독교)에 바탕을 둔 인권의 이념(자유민주주의)을 신념화한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李박사는 조국을 미국과 같은 기독교 사상에 기반을 둔 민주국가로 만드는 꿈을 지녔다. 김일성은 인간생명을 하나의 물건으로 보는 유물사상에 젖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을 치는 민족반역의 남침전쟁을 준비한다.

1948년 5월31일 제헌 국회 제1차 회의, 즉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독실한 기독교 신자 李承晩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기도로 시작한 나라가 되었다. 그 뒤 한반도는 두 개의 이념, 두 개의 종교 대결 시대로 들어갔다. 공산주의 對 자유민주주의, 주체광신교 對 기독교, 즉 증오와 사랑의 대결시대가 열린 것이다.

많은 한국의 신학자들은 김일성 김정일을 '사탄의 세력'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하나님을 참칭하고 기독교인들을 학살, 말살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도 사탄의 세력은 제거 대상이지 설득이나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40절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했고, 누가복음 11장23절은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라고 했다. 이는 사탄과 기독교가 대결할 때는 중립지대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 13장엔 이런 귀절이 있다.
<저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하여금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數라 세어보니 666이더라>
여기서 '저'는 땅에서 나온 짐승인데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우상을 앞세워 사람들을 억압하는 악마이다. 위의 귀절을 이렇게 해석해보자.
<두 번째 짐승, 즉 金正日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 이외에는 일체의 매매 행위 즉 시장경제활동을 금지시켰다. 표를 받은 자, 즉 자신의 총애를 받거나 노동당에 가입하여 證(증)을 갖고 다니는 특권층이 아니면 물건을 사고 팔 수도 돈도 벌 수 없어 굶어죽어야 한다. 이 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金正日의 이름이 적힌 노동당원증이고 다른 하나는 666이란 암호가 적힌 표이다. 암호표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난수표를 지녀야 서로 신분이 증명되는 간첩이거나 공작원이다. 金正日의 생일은 2월16일, 「216절」이라 줄여 부른다. 6×6×6=216이 아닌가. 1998년 7월에 치러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金正日은 666구역에서 당선되었다. 공포 영화 「오멘(Omen)」을 보면 부모를 죽이는 어린 악마의 머리에 666이란 숫자가 새겨진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 主流종교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숙명적 과제는 증오의 이념으로 무장한 주체광신도들과 대결하여 북한동포들을 구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도 주체광신도와 한국기독교는 死活을 건 투쟁을 계속해왔다.
한국 기독교는 지난 100년간 한국사회가 발전해가는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기독교는 개화기의 등불이었고, 독립운동시대의 중심세력이었다(3.1 독립선언 서명자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는 또 李承晩을 중심으로 뭉쳐 대한민국의 건국과 護國을 주도했고 산업화 시기에는 근면하고 정직한 자본주의의 윤리를 제공했다. 민주화투쟁期에 기독교는 야당, 학생, 언론과 함께 4대 중심 세력중 하나였다. 다가오는 자유통일기에 기독교는 김정일 제거-북한동포 구원의 신학적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미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탈북자 구출, 북한인권 문제 제기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 비록 속도는 느리게 보이지만 한국의 보수기독교가 과거의 '反共애국노선'을 이어받아 사회의 좌경화에 경종을 울리면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랑 소망 믿음의 종교인 기독교 신도가 학살자 김정일에 분노하지 않고 맞아죽고 굶어죽어가는 북한동포들을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국민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2000만 북한동포와 함께 아파할 때 김정일과 그의 남한내 하수인들과 대결할 수 있는 正義感과 용기가 생길 것이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세 갈래 길목에 서 있다. 첫째 길은 이기주의의 길이다. 이 길의 종착점은 분단고착이다. 두번째 길은 국민들이 좌익의 거짓선동에 넘어가는 길이다. 이 길의 종착점은 赤化통일이다. 세번째 길은 희생과 용기의 길이다. 이는 자유통일이란 관문을 지나 선진국으로 연결된다. 한국의 기독교는 총궐기하여 세번째 길로 대한민국을 인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다.

김정일 광신도와 대결하는 데 가장 유효한 무기는 성경과 헌법이다. 성경은 사랑의 힘을, 헌법은 국가의 힘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狂信과 싸우는 데는 합리와 과학의 힘만으로써는 부족하다고 한다. 또 다른 신념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일 수밖에 없다.
한민족이란 단위를 만들어낸 신라의 삼국통일은 애국불교가 화랑도와 결합하여 만들어낸 힘을 바탕으로 하였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될 자유통일의 힘은, 성경정신과 헌법정신의 결합, 즉 기독교의 사랑과 대한민국의 국력이 합쳐진 데서 생길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어둠과 광명으로 가르고 있는 것은 자유와 억압, 번영과 쇠락의 극명한 대치이다. 남쪽은 기독교가 이끌고, 북쪽은 주체광신교의 세상이 된 결과물이다. 북쪽이 민주화, 복음화될 때 한반도 전체가 광명의 세계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의 반쪽은 암흑이고 반쪽은 광명인 상태로는 오래 살아갈 수가 없다.
종교통계를 보면 영남지역은 신라의 영향이 아직 남아 불교가 강하다. 서울 경기 호남지역은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강하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손에 손을 잡고 북한동포 구원에 함께 나설 수 있다면 이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확실하게 여는 錦上添花(금상첨화)일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

1. 한국 開化의 주역: 주로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개신교가 교육과 의료를 통해서 한국인들과 손잡았다. 기독교를 통해서 韓美 우호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관계 속에서 李承晩이란 기독교 독립운동가가 탄생했다.
2. 독립운동의 중심: 3.1 독립선언 33명중 16명이 기독교도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日帝의 우상숭배에 반대했다가 순교했다.
3. 건국의 중심세력: 李承晩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기독교 정신, 반공정신, 자유민주주의의 터전 위에 세웠다. 제헌국회 개회식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4. 반공의 중심: 북한 무신론 정권은 기독교를 박해하여 남쪽으로 추방한 뒤 괴뢰 정권을 세웠다. 기독교는 남한에 강력한 반공 요새를 건설했다.
5. 護國의 보루: 6.25 때 한국을 지킨 핵심 세력은 기독교적 민주주의로 무장한 서방의 자유진영이었고, 북한 출신 기독교 장교단이었다.
6. 근대화의 철학: 기독교 정신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 좋은 곳에 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가르쳤다. 근대화 시기에 필요한 자본주의의 직업 노동 윤리를 제공한 것이다. 유교적이고 위선적인 淸貧사상이 아닌 기독교적이고 적극적인 淸富사상이 근대화 시기 한국인들을 부지런히 일하도록 만들었다.
7. 민주화의 聖域: 기독교 정신의 평등, 인권 사상은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된 민주화의 논리적 바탕이 되었다. 교회는 민주화의 중심에 있었다.
8. 자유통일의 군병: 탈북자를 돕고 북한을 민주화하여 한반도 전체를 자유화하는 역사적 임무를 기독교가 맡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는 사탄의 세력이자 헌법의 敵인 김정일과 그 추종자들을 惡으로 규정하여 이를 물리치고, 善의 편에 선 자유민주주의의 보루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마지막 대결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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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는 김정일과 대결해야


조갑제



칼빈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왜 일류국가가 되었나.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의 예에서 보듯이 칼빈주의 신앙의 핵심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연결되어 있다.
칼빈주의 신앙을 받아들인 교회는 장로교회인데 그 구조가 민주적이다. 장로들이 교회의 주인으로서 소유권을 갖고 목사는 운영권을 가진다. 소유와 경영의 상호견제가 이뤄진다.
단일 교회는 자율적 운영체이므로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다. 이러다가보니 교회에 내분이 잦다. 이 내분은 민주적 운영과정의 필요악이다.

칼빈주의는 근검절약과 노동, 그리고 건전한 돈벌이를 장려한다. 칼빈주의는 번 돈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써야 한다고 강조하니 자본가들이 자선을 많이 하게 된다.
칼빈주의는 정권이 히틀러나 김정일 같은 전체주의가 아닌 한 정치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고 준법하도록 가르친다. 이는 국민국가의 법치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윤리이다. 칼빈은 원래 변호사였다.
칼빈주의는 그러나 종교를 탄압하고 인간의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제약하는 악마적 정권에 대해서는 타도하는 것이 正義라고 가르친다.

칼빈주의의 위의 특징은 모두가 일류국가와 일류시민들을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 한국의 근대화가 성공한 데는 이런 칼빈주의를 받아들여 근검절약하고 열심히 일하며 준법한는 시민으로 거듭 태어난 많은 기독교인들의 공이 있었다.

개화기, 독립운동기, 건국, 호국, 근대화, 민주화의 과정에서 칼빈주의 기독교가 한 역할은 굉장하다. 이제 남은 칼빈주의의 과제는 김정일과 어떻게 싸울 것이냐일 것이다. 2001년 가을 月刊朝鮮이 한국의 대표목사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더니 50% 이상이 김정일을 '사탄의 제자'라고 대답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참칭하고 기독교인들을 말살한 김정일보다 더한 敵은 없을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과거 김정일보다 훨씬 유순한 독재자들을 상대로 하여서도 저항운동을 벌였다. 한국의 칼빈주의 신학이 김정일을 '사탄의 제자' '기독교의 敵'이라고 규정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이 김정일을 사탄의 제자라고 규정한다면 그 뒤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매일 매주 기독교인들은 김정일의 멸망과 북한동포들의 구출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며 행동해야 할 의무를 진다.

과거 칼빈주의자들이 정치권력의 탄압을 받았을 때 저항한 것에 비교하면 이 정도의 행동은 식은 죽먹기이다. 별다른 희생도 필요하지 않다. 세계를 진보시킨 칼빈주의의 신도들이 이 정도의 용기와 행동도 내지 못한다면 누가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려고 할 것인가. 한반도의 巨惡과 대결하지 않는 칼빈주의 신앙은 신사참배를 한 기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가혹한 비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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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자들의 신사참배 거부


조갑제

한국 기독교의 主流인 장로교파의 칼빈주의가 日帝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적인 힘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한국 反共보수기독교단의 主流인 고신파와 합동파가 아시아 기독교중에선 유일하게 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의 옥살이와 옥사로써 신앙의 자유를 지켜낸 뿌리를 갖고 있다. 반면 김일성 우상숭배주의에 호감이나 이해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파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日帝 때의 신사참배와 만나게 된다. 천황과 김일성은 칼빈주의자들의 눈에는 똑 같은 우상들이다. 하나님을 참칭하는 사탄의 제자들인 점에서 같다.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에 넘어가는 기독교가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반대하는 속성을 가진 점도 이해가 간다.

한국기독교의 칼빈주의 신학을 지켜온 가장 핵심적인 두 신학자가 있다. 고신과 합동파의 산실인 부산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지낸 朴亨龍 朴允善 박사. 이 두 분은 미국 칼빈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제자였다. 메이첸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의 본산이던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된다고 판단하여 이 학교교수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세운 분이다. 朴亨龍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교수로부터 칼빈주의 신학을 배운 뒤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한국의 초창기 장로교 총회는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가기 위하여 1901년에 벌써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朴亨龍은 '좌경화된 자유주의 신학'과 맞섰다. 그는 김재준, 송창근 같은 신학자들의 글을 학술지에 싣는 데 대하여 반발하여 편집위원직 사표를 내기도 했다. 日帝가 기독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즉 천황에 대한 경배를 강요하자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이에 반대한 평양신학교는 자진폐교로써 대응했다. 朴亨龍 박사는 신사참배 강요가 없는 만주국 봉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주기철 목사 등 많은 칼빈주의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옥사했다. 특히 경남지방의 목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주남선(거창읍교회), 최상림(남해), 황철도(진주), 김을길(거제), 이인제(경남), 손양원(경남), 한상동(경남), 손명복(경남), 이원영(안동) 목사들이 투옥되었던 분들이다.

광복 직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세운 신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나중에 합동파가 분리되어 나감)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논란 과정에서 예장은 고신, 합동, 통합측으로 갈라졌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했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김재준 박사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운 것이 기독교장로회이다. 基長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있어선 고신파보다 더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 종파 소속 목사중에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비판을 삼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빈대학교의 金義煥 총장은 최근에 쓴 '메이첸과 한국 보수신학의 형성'이란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성경불신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주권론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주재한다고 믿는데 어떻게 천황을 하나님처럴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金총장은 '아시아에서 신사참배를 정면에서 거부하여 신앙의 정통을 지켜간 것은 한국뿐이다. 대만과 일본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세가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했으나 소수의 반대자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불씨처럼 지켜간 것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다.

한국 칼빈주의 신학의 완성자인 朴允善 목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註釋集을 완간한 분이기도 하다. 이는 칼빈주의 신앙을 한국화한 세계적 업적으로 꼽힌다.
칼빈주의는 준법정신, 근면 성실의 직업정신, 끊임 없는 자기반성과 개혁,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신념체계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딱 맞는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다. 칼빈주의 신앙은 개화기, 독립운동기,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통일기에 무엇을 할 것이냐일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로써 결정될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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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은 352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교인들의 신앙고백이다. 그 全文은 이렇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여기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명시한 것이 눈에 뜨인다. 영어原文은 이렇게 되어 있다.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본디오 빌라도의 治下에서'가 번역과정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로 단순화되는 바람에 빌라도에게 직접 예수처형의 책임을 지우는 형식이 되었다. 빌라도가 여러번 예수를 살려주려고 애썼던 것에 비교하면 사도신경의 이 문책은 가혹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예수의 生殺여탈권을 쥔 사람은 유태인들이 아니라 로마총독 빌라도였다. 그가 비록 예수를 살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그가 유태인들의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만한 결의와 용기만 있었다면 예수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는 대중선동에 맞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양식을 갖고 있었으나 그 양식은 신념화되지 못했다. 대중선동에 굴복하는 권력자의 양심은 범죄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예수의 살인자로 빌라도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가 범한 죄과는 '방관의 죄'이다. 방관하지 않으면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권력자가 방관한 것을 기독교도는 가장 중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예배 때마다 이를 상기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빌라도와 같은 '방관의 죄'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예수처럼 핍박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의 지척에 있는 북한동족들이다. 한국의 1000만 기독교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면 김정일 정권을 약화시키든지 밀어내고 북한동족을 구원할 수 있다. 한국사회의 주류층이 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빌라도처럼 한국사회의 권력자이다.

한국 기독교가 독재자로부터 맞아죽고 굶어죽어가는 북한동족들을 구원할 힘이 있는데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독재자 김정일의'악마의 포식'을 계속해서 방관한다면 수백만 동족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책임을 빌라도처럼 질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눈에는 한국 기독교의 비겁이 김정일의 살육과 같은 무게로 계산될지도 모른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교회당을 최신식으로 짓고, 富者들과 성공한 사람들의 무사태평을 기원해주는 역할에 주력하면서 하나님을 참칭하는 김정일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이 '사탄의 세력'에 의한 동족학살엔 눈을 감아버린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오는 2월28일부터 3월1일까지 서울영락교회에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 '북한동족과 탈북자들을 위한 통곡기도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 기도회는 로스엔젤레스의 孫仁植 목사가 주도하여 이뤄진다. 그는 '한국의 교회들이 북한동족 구원을 기도의 주제로 삼아야 교회도 부흥하고 목회자와 신도들도 뚜렷한 삶의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동족과 김정일의 존재를 직시하지 않는 교회와 목회자와 신도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한 빌라도의 범죄를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짐승처럼 살아가고 동물처럼 죽어가는 북한동족들을 외면한 채 하나님만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도, 소망의 종교도, 믿음의 종교도 아닌, 사탄의 세력에 굴복한, 부패한 邪敎에 불과하다.

오늘도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했을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빌라도를 '한국교회'로 바꾸고 예수를 '북한동족'으로 대체하여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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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 문화- 군사문화국이 정직한가?


조갑제

세계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이 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正直문화를 가진 나라는 기독교 문명국과 군사문화국뿐이다. 물론 서구 諸國은 기독교 문화와 군사문화를 함께 가진 나라이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정직문화를 확립한 일본은 군사문화국이다.

기독교 문명국에서 거짓말이 발붙이기 어려운 것은 인간에 대한 거짓말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이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보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의 관계를 더 중시하므로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려 한 중대범죄가 된다. 물론 거짓말을 많이 한 인간은 죽은 뒤 구원받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군사문화국에서 거짓말은 바로 칼을 맞을 범죄이다. 군대나 전장에서 허위 보고는 중형으로 다스려진다. 전쟁이나 군대에서 하는 허위보고는 승패를 가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집단에서보다도 거짓말은 엄히 처벌받는다.

기독교 문화나 군사 문화가 발달한 적이 없는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거짓말이 큰 잘못이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는 심리중 가장 중요한 것은 是認이나 반성 내지 사과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참회와 반성을 깔고 있다. 군대 문화도 승리와 패배, 항복 등 승부가 분명히 갈라져 변명이나 거짓이 끼어들기 어렵다. 유교 문화권에선 그런 승복과 인정 및 참회의 결단이 별로 강조되지 않고 있다. 참회가 없는 곳에 거짓말이 많은 법이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잘 속아넘어가기도 한다. 정직, 우직한 사람은 잘 속지 않는다. 한국에서 희대의 거짓말장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정직을 모르는 국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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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31일 제헌 국회 제1차 회의, 즉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독실한 기독교 신자 李承晩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李允榮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그 출발이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이뤄졌다. 李박사가 말한 것처럼 기적처럼 온 광복과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국인의 실력만으로써 된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연합국의 도움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많은 우연과 인연과 기적적 사건들의 뒷받침 속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건국에 공이 많았던 李박사가 그 功을 하나님에게 먼저 돌리는 겸허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이윤영 목사는 이렇게 기도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呈示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하략)'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의 기도 뒤 개회사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한다.
'우리가 오늘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로는 우리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의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유엔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1948년7월24일에 있었던 제1대 대통령 취임사의 첫 문장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시작한다.
'여러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런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원래 전주 이씨 양녕대군(태종의 장자로서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사람)의 후손으로서 끈질기게 과거 시험에 도전, 낙방을 거듭한 사람이다. 갑오경장으로 과거 시험이 없어지자 좌절해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배재학당에 나가면서 미국인 선교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수구세력에서 급진 개화세력으로 바뀌는 매개 역할을 기독교가 수행한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의 탄압자가 되어 있는 김일성은 아예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형직은 1911년 미국의 기독교 단체가 만든 미션 스쿨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 강반석은 창덕학교 교장 강돈욱 장로의 둘째 딸이었다. 반석이란 이름도 盤石(베드로의 별명)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강반석은 고향인 칠골교회의 집사로 봉직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매주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주일학교에서 강돈욱은 성경을 가르치고 그의 육촌동생 강양욱은 소년 김일성의 주일학교 담당 교사였다고 한다. 인간의 가치관 형성에 어린 시절의 체험이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김일성식 북한 공산주의의 의식과 행태에서 보이는 기독교적인 요소(십계명과 유일사상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의 유사성 등)가 김일성의 이런 체험에서 유래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일성의 기독교 체험은 그러나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증오와 거짓의 이론인 공산주의와 만나면서 악마의 논리로 변질되어 노예제 사회의 수령지배체제를 지탱하는 도구로 악용된다. 김일성-김정일주의는 가짜 기독교가 악성 공산주의와 교배하여 낳은 악성변종인 셈이다. 이승만의 기독교 정신은 미국으로 건너가 합리정신, 과학정신, 자유민주주의와 만나 더욱 심화되면서 국민국가 건설의 윤리와 이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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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世一씨가 월간조선에 연재하고 있는 '李承晩과 김구' 평전 최근 기사(8월호)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23년에 李박사가 쓴 공산주의 비판이다. 지금 읽어보아도 공산주의 사상이 세계를 풍미하던 이런 시기에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그 문제점을 짚어내었는가 감탄하게 된다. 공산주의의 위선과 악마성을 속속들이 안 李박사가 건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 盧武鉉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 국민들이 누리는 행복의 바탕이란 점을 상기하면서 일독을 권한다. 이 글에서 독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독립운동가로 표창한 盧정권의 조치가 완전히 무식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립국가를 만들려는 사람들을 반대한 것이 공산당의 국제주의 노선이었던 것이다.

<[대평양잡지]의 속간호에 실린 글 가운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글이다. 필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문체나 그밖의 정황으로 미루어 李承晩이 직접 집필한 것이 틀림없다. 이 글은 李承晩이 이 무렵에 공산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공산주의가 오늘날의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도 있고 합당하지 않은 것도 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먼저 합당한 것으로 「인민의 평등주의」를 들었다. 그는 몇천 년 동안 내려온 귀족(양반)과 상민의 세습적 신분제도가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공화주의로 타파되었으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로 말미암아 불평등이 여전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노예로 말할지라도 법률로 금하야 사람을 돈으로 매매는 못한다 하나 월급이라, 공전이라 하는 보수 명의로 사람을 사다가 노예같이 부리기는 일반이라. 부자는 일 아니하고 가난한 자의 노동으로 먹고 살며 인간 행락에 모든 호강 다하면서 노동자의 버는 것으로 부자 위에 더 부자가 되려고 월급과 삭전을 점점 깎아서, 가난한 자는 호가지계를 잘 못하고 늙어 죽도록 땀흘리며 노력하야 남의 종질로 뼈가 늘도록 사역하다가 말 따름이오, 그 후생이 나는 대로 또 이렇게 살 것뿐이니 이 어찌 노예생활과 별로 다르다 하리오. 그러므로 공산당의 평등주의가 이것을 없이하야 다 균평하게 하자 함이니, 어찌하야 이것을 균평히 만들 것은 딴 문제이어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는 대저 옳으니 이는 적당한 뜻이라 하겠고…〉

이처럼 공산당의 평등주의 사상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나서, 李承晩은 그들의 주장의 부당한 점으로 1)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함 2) 자본가를 없이하자 함 3)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4)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5)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는 다섯 가지를 들었다. 그는 이 다섯 가지 주장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마지막의 이른바 國家消滅論(국가소멸론)과 관련해서는 혁명 뒤의 러시아의 실상을 들어 그 부당성을 말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설령 세상이 다 공산당이 되며 동서양 각국이 다 국가를 없이하야 세계적 백성을 이루며, 군사를 없이하고 총과 창을 녹여서 호미와 보습을 만들지라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야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 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항구에 그림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 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가 밀리어네아(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요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되기를 지체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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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本家 없애면 技術革新 못 해

그런데 이후의 공산주의의 역사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때의 李承晩의 주장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의 부당성을 설명한 대목이다. 그는 공산당의 주장대로 자본가가 다 없어져서 〈재정가(기업인)들의 경쟁이 없어지면… 사람의 지혜가 막히고 모든 기기미묘한 기계와 연장이 다 스스로 폐기되어 지금에 이용후생하는 모든 물건이 더 진보되지 못하며 물질적 개명이 중지될지라…〉98)라고 하여, 시장경제체제의 경쟁의 원리와 기술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60년이 훨씬 더 지나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하여 옳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 가을의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기술혁신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이토록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토로했었다.

李承晩은 이러한 통찰력에 입각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일찍이 지식인 사회에서 기독교가 전파되던 양상과 같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력한 기세로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구원의 메시지처럼 전파되고 있던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李承晩의 '민중속으로!'


조갑제

<무릇 開明進步하는 길은 대략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이키는 것이요, 하나는 民會를 열어 토론을 하는 것이오, 하나는 널리 신문사를 설치하는 것이오, 하나는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긴요하다>

이 글은 李承晩이 고종황제를 쫒아내려는 쿠데타 계획에 연루되었다가 한성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1899-1904년)에 쓴 논설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李承晩의 대중노선이다. 그는 국민 전체의 역량이 향상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근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국민들을 교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교육의 수단이 학교, 신문, 도서관, 민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李承晩은 대중을 설득하여 여론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임을 인식한 민주적 정치인이었다.

다른 獄中雜記를 보자.
<지금 나라를 논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정치가 어떻다, 법률이 어떻다'라고 말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자들은 의례히 '광업이 어떻다, 철ㄹ도가 어떻다, 산림이 어떻다, 어장이 어떻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민은 어떠한가'라는 논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전혀 언급하지 않으니, 더욱 政法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백성이 백성답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다울 수 없으며,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면 위에서 말한 여러 政事가 또한 어떻게 큰 정사가 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소유하고자하면 반드시 먼저 백성으로 하여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야 한다. 백성으로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느낌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나무 인형이나 풀인형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몇백만 혹은 몇천만 사람의 모습과 사람의 몸을 빌린 썩은 풀과 썩은 나무를 거느리고 스스로 나라를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李承晩은 평생 민중속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다. 수많은 여행과 연설을 통해서 그는 한국인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이들을 교화하려고 했다. 李承晩의 신화는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다. 정치의 진정한 힘은 민중속에서 형성된 여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李承晩연구가인 연세대학교 柳永益 교수가 쓴 [젊은 날의 이승만](연세대학교 출판부)에는 또 이런 편지가 실려 있다. 당시 미국 공사 호레이스 N. 알렌에게 보는 편지이다.

<근자에 듣자오니 각하께서 생을 위하여 일본공사에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고, 또 외부에 석방도 요청하였다는 소식이 누차 신문지상에 게재되었습니다. 생의 사사로운 분수에 비추어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사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생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청탁한 바가 있어서 그런가 하는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생의 염원을 저버린 것이요, 또한 각하의 公人으로서의 체통을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하물며 한국 죄수의 보호를 이웃 나라의 공사에게 부탁하는 것은 우리 한국의 독립을 존중히 여기는 본의에 위배되며, 貴國과 우리 나라의 友誼를 손상시키는 바입니다. 생은 차라리 억울함을 품고 달갑게 죽을지언정 이 일만은 참으로 원하지 않는 바이오 차마 할 수도 없는 바입니다. 1904년 7월18일>

기록광인 이승만은 한성감옥에 있을 때 목격한 죄수 사망 사례를 자세히 적어놓아다. 고문으로 죽은 경우, 사형 집행, 콜레라 사망 등등이다. 1902년 9월12일에는 17명이 호열자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국가의 체통을 생각하면서 외국인의 救命운동을 거절하고 있다. 그의 애국심은 민중에 대한 동정과 국가적 자존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김유신, 박정희, 이승만은 자신의 인격과 국가의 권위를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했다. 민족주의자란 말은 단어 그대로 민족을 중심에 놓고 이해를 따지는 이들이다. 그런 행동의 논리는 민중속에서만 나올 수 있다. 요사이 한나라당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태에 대해 논평만 내고 있다. 역사의 흐름 한복판으로 들어가 헤엄칠 생각은 하지 않고 비스듬히 꼬고 앉아 평만 한다. 역사의 창조자가 아닌 역사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정통주류세력을 대표하려면 그 세력의 원조인 李承晩을 제대로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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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 같이 기독교에서 출발한 남북한 두 지도자는 그 후 체험으로 인해 사탄의 제자와 자유의 수호자란 두 극단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자유민주주의=대한민국] 對 [가짜 기독교+스탈린니즘=북한 수령지배 체제]. 여기서 가짜 기독교인 김정일 체제는 남한의 기독교에 침투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많이 만들어놓는 데 성공한다. 김정일이나 남한의 거짓 선지자들이나 인간이 가진 야만성, 악마성, 야수성에 호소하여 거짓말로써 남을 속이고 인간 생명을 말살하는 데 있어서는 공통 성을 갖고 있어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성경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사탄의 제자인 김정일은 거짓 선지자 세력인 남한의 기독교 위장 친북세력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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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約 선지자 이사야는 '광명성' 김정일과 그 후손 및 추종자들까지 부관참시되거나 도륙당할 것이고 영원히 그 이름이 지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북한에선 김정일을 광명성이라고 부른다. 한자로는 光明星이다. 1998년에 쏘아올렸으나 궤도진입에 실패했다는 인공위성 이름이 광명성, 무역회사 이름도 광명성이다. 金日成이 金正日을 칭송하는 詩를 지었는데 거기에 광명성이란 말이 나온다. 父子의 한자 이름에 모두 태양을 뜻하는 日자가 들어 있다. 북한을 암흑의 세계로 만든 자들이 스스로를 태양과 별로 비유하고 神을 자처한다. 오만의 극치이다. 이런 자들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성경속에 있다.
舊約(구약) 성경 이사야書 14장12절은 이러하다.
<너 아침의 아들 啓明星(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列國(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How you have fallen from heaven, 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 You have been cast down to the earth, you who once laid low the nations)
이 귀절은 영화를 누리면서 유태인들을 탄압하던 바빌론 제국의 왕이 처할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바로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찍힌' 왕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계명성'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계명성은 샛별, 즉 金星을 가리킨다. 광명성은 국어사전엔 나와 있지 않으나 광명성은 '明星(명성)'의 강조어이므로 이 역시 뜻은 샛별이다.
따라서 이사야書는 '광명성=계명성' 김정일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한 것이기도 하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른다. 그렇다면 舊約 세계의 가장 위대한 先知者(선지자) 이사야는 '계명성=광명성'의 말로를 어떻게 예언하고 있는가.
이사야書 14장13절부터 읽는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하도다>
(You said in your heart, 'I will ascend to heaven; I will raise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 I will sit enthroned on the mount of assembly, on the utmost heights of the sacred mountain. I will make myself like the Most High)
위의 귀절은 바빌론왕과 김정일 같은 지상의 권력자들이 스스로 神이 되어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오만을 그리고 있다. 이런 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계속해서 읽는다.
<그러나 이제 네가 陰府(음부: 저승) 곧 구덩이의 맨밑에 빠치우리로다.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列國(열국)을 驚動(경동)시키며,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보내지 않던 그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列邦(열방)의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 쫓겼으니 可憎(가증)한 나뭇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광명성=계명성' 김정일은 하늘에서 떨어져 죽은 뒤에도 무덤에서 영면하지 못하고 剖棺斬屍(부관참시: 관을 열고 시체를 벰)를 당한다는 예언이다. 이사야書는 바빌론왕과 김일성의 죄과중 하나를 아주 강조한다. 즉 이 자들은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보내지 않던 자'란 준엄한 논고이다. 수만 명의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아오지 탄광 등으로 보내 피눈물을 흘리면서 죽어가게 만든 김정일이 반드시 그 죄값을 치르고 말 것이란 예언이 아닌가.
<네가 자기 땅을 망케 하였고, 자기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일반으로 안장함을 얻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하리로다 할찌니라>
영어 성경은 위의 귀절에서 '계명성=광명성'을 '짓밟힌 시체처럼'(Like corpse trampled underfoot)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바빌론왕과 김정일의 죄과를 '땅을 망치고 백성을 죽인 것'으로 정확히 규정한다. 김정일은 북한의 자연을 망쳤고 수백만 명을 굶겨죽이고 때려죽이며 쏴죽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계명성=광명성' 김정일의 자손과 추종자들에게도 천벌이 내릴 것임을 예언한다.
<악의 후예들(offspring of the wicked)은 영원히 그 이름이 지워지리니,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씌워서 도륙할 장소를 마련하라. 그들이 다시 일어나 땅과 도시들을 취하지 못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그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빌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김정일의 후손뿐 아니라 그 추종자들, 즉 從金반역자들이 再起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예 악의 씨앗을 잘라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예언이 아닌가. 사랑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성경과 神이 '도륙(屠戮. slaughter)'이란 말을 써가면서 '계명성=광명성'의 후손들과 그 추종자들을 응징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도륙이란 한자어는 죽인다는 두 글자로 이뤄져 있다).
왜 이렇게까지 바빌론왕과 김정일에 대해서 神은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바빌론왕 김일성 김정일류는 스탈린 히틀러 毛澤東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고 스스로 神을 참칭한 大逆罪人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세계에서 가장 큰 죄는 여호와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국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죄는 조국과 헌법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은 바빌론왕과 김정일을 사탄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이다(사탄의 定義는 '하나님을 참칭하는 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후손들과 추종자들을 깡그리 도륙해버리겠다고 공언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신비한 의미가 담겨 있다.

5세기의 聖人 제로미야는 히브류 성경을 처음으로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때 그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루시퍼'(lucifer. 빛을 내는 자)라고 번역했고 그 의미는 반역천사, 즉 사탄 악마로 전해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루시퍼'를 사탄의 이름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이다.
성경학자들은 이사야書가 '계명성'으로써 지칭하는 것은 사탄이 아니라 바빌론왕이라고 해석하지만, 제로미아 聖人 등 신도들은 필자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저주하고 응징하는 이라면 악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김정일을 사탄의 대명사인 '광명성'이라 부른 것은 우연의 소치인가 무식의 결과인가. 아니면 필자가 정치상황을 너무 성경적으로 보는 것인가.
김정일 김일성 父子의 행위가 필자로 하여금 평소에 멀리 했던 성경을 찾게 했다. 왜냐? 이 두 악마적 권력자가 기독교 집안 출신이고 그들의 통치술에다가 기독교의 儀式을 많이 도입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참칭했고, 그 학살과 기만의 깊이와 규모가 인간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고 있으므로 정치학 사전으로써는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하니 성경이 일종의 암호열쇠로 등장한 것이다.
북한정권을 神政체제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김일성을 聖父, 김정일을 聖子, 주체사상을 聖靈으로 비유한다. 북한 정권을, 주체사상이란 종교를 믿는 신도집단으로 해석하여 신도수 기준 세계 제10위의 종교단체로 올린 통계가 있다. 10계명을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두번째 짐승을 이렇게 묘사했다.
<저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하여금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數라 세어보니 666이더라>
이렇게 해석해 보면 어떨까. 두 번째 짐승, 즉 金正日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 이외에는 일체의 매매 행위 즉 시장경제활동을 금지시켰다. 표를 받은 자, 즉 자신의 총애를 받거나 노동당에 가입하여 證(증)을 갖고 다니는 특권층이 아니면 물건을 사고 팔 수도 돈도 벌 수 없어 굶어죽어야 한다. 이 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金正日의 이름이 적힌 노동당원증이고 다른 하나는 666이란 암호가 적힌 표이다. 암호표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난수표를 지녀야 서로 신분이 증명이 되는 간첩이거나 공작원이다.
金正日의 생일은 2월16일, 「216절」이라 줄여 부른다. 6×6×6=216이 아닌가. 이건 우연이라고 치자. 1998년 7월에 치러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金正日은 666 구역에서 당선되었다. 김정일은 666과 광명성으로써 악마를 자임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盜用한 성경의 복수인가.





金正日에게 체제보장을 해주고 돈을 주면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바보 겸 위선자들에게 李承晩 건국 대통령이 미리 남긴 말이 있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타협할 수 없다>



칼빈주의자들의 신사참배 거부


조갑제

한국 기독교의 主流인 장로교파의 칼빈주의가 日帝 때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적인 힘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 한국 反共보수기독교단의 主流인 고신파와 합동파가 아시아 기독교중에선 유일하게 천황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고 수많은 성직자들의 옥살이와 옥사로써 신앙의 자유를 지켜낸 뿌리를 갖고 있다. 반면 김일성 우상숭배주의에 호감이나 이해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파의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보면 日帝 때의 신사참배와 만나게 된다. 천황과 김일성은 칼빈주의자들의 눈에는 똑 같은 우상들이다. 하나님을 참칭하는 사탄의 제자들인 점에서 같다.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에 넘어가는 기독교가 反共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반대하는 속성을 가진 점도 이해가 간다.

한국기독교의 칼빈주의 신학을 지켜온 가장 핵심적인 두 신학자가 있다. 고신과 합동파의 산실인 부산 고려신학교의 교장을 지낸 朴亨龍 朴允善 박사. 이 두 분은 미국 칼빈주의 신학의 거두였던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의 제자였다. 메이첸 박사는 칼빈주의 신학의 본산이던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된다고 판단하여 이 학교교수직을 그만두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을 세운 분이다. 朴亨龍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교수로부터 칼빈주의 신학을 배운 뒤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한국의 초창기 장로교 총회는 신학의 정통성을 지켜가기 위하여 1901년에 벌써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朴亨龍은 '좌경화된 자유주의 신학'과 맞섰다. 그는 김재준, 송창근 같은 신학자들의 글을 학술지에 싣는 데 대하여 반발하여 편집위원직 사표를 내기도 했다. 日帝가 기독교에 대하여 신사참배, 즉 천황에 대한 경배를 강요하자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이에 반대한 평양신학교는 자진폐교로써 대응했다. 朴亨龍 박사는 신사참배 강요가 없는 만주국 봉천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주기철 목사 등 많은 칼빈주의 목사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고 옥사했다. 특히 경남지방의 목사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주남선(거창읍교회), 최상림(남해), 황철도(진주), 김을길(거제), 이인제(경남), 손양원(경남), 한상동(경남), 손명복(경남), 이원영(안동) 목사들이 투옥되었던 분들이다.

광복 직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이 박형룡 박윤선 박사를 모시고 세운 신학교가 부산의 고려신학교였다. 이 신학교를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파(나중에 합동파가 분리되어 나감)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반성을 촉구했다. 이 논란 과정에서 예장은 고신, 합동, 통합측으로 갈라졌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했던 사람들이나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김재준 박사의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세운 것이 기독교장로회이다. 基長은 1970년대부터 민주화 운동에 있어선 고신파보다 더 활발하게 참여했다. 이 종파 소속 목사중에는 김일성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거나 비판을 삼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빈대학교의 金義煥 총장은 최근에 쓴 '메이첸과 한국 보수신학의 형성'이란 논문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은 성경불신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주권론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주재한다고 믿는데 어떻게 천황을 하나님처럴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金총장은 '아시아에서 신사참배를 정면에서 거부하여 신앙의 정통을 지켜간 것은 한국뿐이다. 대만과 일본의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수용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세가 미미하다'라고 말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했으나 소수의 반대자들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자유를 불씨처럼 지켜간 것이 한국 기독교 전체의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다.

한국 칼빈주의 신학의 완성자인 朴允善 목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註釋集을 완간한 분이기도 하다. 이는 칼빈주의 신앙을 한국화한 세계적 업적으로 꼽힌다.
칼빈주의는 준법정신, 근면 성실의 직업정신, 끊임 없는 자기반성과 개혁,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신념체계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딱 맞는 논리와 윤리를 제공했다. 칼빈주의 신앙은 개화기, 독립운동기, 근대화의 시기에 한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유통일기에 무엇을 할 것이냐일 것이다. 이는 김정일 정권에 대해서 칼빈주의자들이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로써 결정될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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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일류국가


조갑제

프로테스탄트(新敎)의 정통신학은 칼빈주의이다. 16세기 초 독일사람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하여 카톨릭의 관료적 병폐를 폭로하고 성경정신으로 돌아가 인간과 하나님의 직접 관계에 의한 구원을 제창한 것을 이어받아 세계사의 진보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 칼빈주의이다. 지난 500년간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이념을 꼽는다면 칼빈주의가 단연 1위가 될 것이다. 인류 발전에 가장 나쁜 영향을 끼친 이념은 물론 공산주의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여 조국발전에 기여했고, 북한의 지배층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조국을 망쳤다. 사상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내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근대화에 끼친 공로는 칼빈주의 神學이 들어간 나라가 거의 예외없이 1류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프랑스 출생인 그는 종교탄압을 피해서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와 집권자가 되면서 자신의 신앙을 世俗에서 적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칼빈주의는 당시의 신흥 시민계층이 받아들이면서 북쪽으로 확산되었다. 칼빈주의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퍼져가면서 인류발전에 이정표가 될 만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으킨다.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의 건국은 칼빈주의자들 또는 칼빈주의 정신이 주도한 사건들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이 칼빈주의의 승리 목록으로 덧붙여질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의 정통세력도 칼빈주의를 받아들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주류인 장로교가 바로 칼빈주의 종파이다. 한국 기독교가 칼빈주의를 신념으로 하여 개화기, 독립운동기, 건국기, 호국기, 근대화 및 민주화 시기에 역사의 흐름 한복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기에도 그럴 것이다.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에 상륙했던 미국 장로교 선교회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칼빈주의 신앙을 갖고 한국에 온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칼빈주의를 매개로 하여 유럽의 종교개혁과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미국의 건국정신과 맥을 통하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칼빈주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신념체계였다. 하나님의 主權인정, 성경의 무오류성 인정, 종교와 신앙의 자유, 不義한 권력에 대한 저항권 인정, 근면하고 성실한 직업윤리의 강조를 핵심으로 하는 칼빈주의는 국민국가 건설기의 한국에 맞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가 대팽창한 것은 국민국가건설기의 참여했기 때문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신학이 칼빈주의였던 것이다.

이제 한국의 칼빈주의는 金正日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자유통일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과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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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들


칼빈주의와 미국의 건국

1517년 독일의 가톨릭 승려 마르틴 루터가 [95개 명제]를 발표하여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과 성당의 부패를 고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가 주장한 핵심은 인간은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지 가톨릭처럼 권위주의적인 계급구조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인간과 절대자 사이에 있는 교회의 중계역할을 부정한 것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봉건영주와 국가들이 생겨나면서 유럽은 백년을 넘게 종교분쟁에 휩싸였다. 이 종교 분쟁에서 어느 쪽에 섰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성격이 바뀌게 되었다. 대체로 영국 독일 스칸디나비아 같은 투톤族 나라들이 루터 편을 들어서 개신교(改新敎) 국가가 되었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系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나라들에서는 그 뒤에 산업혁명과 민주화가 상대적으로 잘 진행되어 이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종교혁명을 받아들여 많은 州가 로마 교황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되었다. 제네바市는 프랑스 신학자로서 종교박해를 피해서 망명한 존 칼빈을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모셨다. 칼빈은 이 도시를 자신의 신학에 따라서 통치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그리스도교의 원칙](1536년)은 아주 주목할 만한 구원관(救援觀)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느님이 창세기(創世記) 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인데 칼빈은 무궁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이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러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락한 생활을 할 것인가. 칼빈은 누가 구원을 받을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인가 하는 사실은 확실히 알 수가 있다고 했다. 타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으로 떨어질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지옥행(地獄行) 열차를 타지 않으려면 평소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건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엄격한 도덕률과 근면성을, 그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건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절묘한 논리가 탄생했다.

칼빈의 淸富사상

이 윤리는 그 때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시민계층의 행동철학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적합하였다.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과 맞는 신학이 되었다. 이 사상은 그 뒤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연결되었다. 돈을 버는 행위를 천한 것으로 보는 종교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달리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파악했다. 돈벌이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려면 돈을 벌고 특히 쓰는 행위가 정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인간이 돈을 버는 것은 개인의 부(富)를 증식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몫을 잘 관리하여 크게 키우는 행위이다.

그리하여 그 富를 사회에 환원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빛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경제관은 청부(淸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활동을 경멸했던 주자학의 청빈(淸貧)사상과 정반대이다. 청빈사상은 위선적이고 선언적이며 패배적인 생각이라면 청부사상은 적극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천적이다. 淸貧의 사조에서 자란 한국의 자본주의가 아직도 천민적(賤民的)이란 비판을 듣고 있는 것은 철학이 돈을 미워하면서 다투기만한 때문이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돈과 정신을 통합할 수 있는 경제윤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칼빈주의는 개신교의 주류(主流)신학이 되어 프랑스의 위그노派 독일과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그리고 영국 청교도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미국의 건국정신은 이 영국 청교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재미있는 역사의 우연이 있었다.
16세기 초 영국왕 헨리 8세는 원래 로마 교황과 사이가 좋았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영향을 차단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란 칭호까지 받았다. 그런데 헨리 8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 캐서린 공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남아(男兒)를 출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요청은 허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는 사정이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왕비 캐서린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 카를로스 5세의 숙모였다. 카를로스 5세는 합스부르그 왕조(王朝) 출신으로서 스페인왕뿐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도 통치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세속적인 권력은 카를로스 5세가, 정신적 권위는 로마 교황이 나누어 갖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 교황은 카를로스 5세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숙모 캐서린과 영국왕 헨리 8세가 이혼하는 것을 허용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는 앤이라는 여자와 결혼해버렸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로마의 교황권이 약화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헨리 8세가 아들을 얻기 위해서 맞아들였던 앤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이다. 이 딸이 커서 엘리자베스 1세가 되고 그의 치세(治世)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극단적인 개혁파 청교도

그런데 영국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로 논쟁이 일어났다. 칼빈주의의 원칙을 도입하여 영국 교회에 남아있는 가톨릭적인 잔재를 청소하자는 개혁세력을 퓨리턴(Puritan)이라고 불렀다. 영어로 퓨리파이(Purify), 즉 청소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퓨리턴, 즉 청교도 중에는 영국 교회자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개혁파가 있었다. 이들을 분리교도(Separatists)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국에 건너간 것이 이 분리주의자들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개혁적인 기독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상향을 건설하려고 했다는 이 점이 미국의 국가적 성격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영국의 동쪽 스크루비에 있던 분리주의 집단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1607년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10여 년 살다가 보니 문제가 생겼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신도들은 이 분리주의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으나 일자리는 하층민 수준으로 제한하였다. 선원, 병사로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네덜란드의 습관에 동화되어 조국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이 영국을 떠난 것은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인데 이곳에 오래 살다가는 후손들이 동화되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고, 그리하여 이 분리주의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영국, 즉 뉴 잉글랜드를 건설하자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때, 즉 1620년 무렵 워싱턴 남쪽에 있는 지금의 버지니아 지방에서도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회사라는 식민지 회사가 개척민을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다. 분리주의자들 35명은 이 버지니아 회사로부터 토지사용권을 얻어서 주식회사를 설립한 뒤에 이 회사소속으로서 총 1백2명의 이주자들을 모집하여 1620년 9월 영국의 플리머스항(港)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이들을 태운 1백80t짜리 메이플라워호(號)가 대서양을 건너 그해 12월에 도착한 곳이 지금 매사추세츠州에 속하는 해변으로서 플리머스라고 이름지었다. 이들은 원래는 버지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폭풍 때문에 이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메이플라워는 다음해 4월까지 머물면서 겨울에는 이주민들의 피난처로 쓰였다. 혹독한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순례자(Pilgrims)로 불리게 된 이들 중 반이 죽었다. 근처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시체를 묻어도 표시를 남기지 않았다. 다음해에는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워서 풍작을 이루었다. 이를 기념하여 추수감사절이 생겼다.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플리머스港에는 메이플라워號의 복제품과 최초의 상륙자가 밟았다는 돌, 그리고 민속촌으로 재현된 농장이 있다.

이 플리머스 농장에는 청교도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영국 억양의 중세영어를 써가면서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비행기가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무슨 새가 저렇게 크지}라고 능청을 떨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코리아, 코리아,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청교도들이 건설한 이 농장에는 교회, 감옥, 요새가 있다.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시설인 것이다.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뭉쳤다고 해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순례자들은 영국의 보호로부터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선 어느 나라의 주권 아래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규율을 잡지 않으면 공멸(共滅)할 것이라는 공포에서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다. [메이플라워 맹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자치기구를 설립했다. 교회의 간부들이 자치기구의 간부를 겸하였다.

교회에서 태어난 국가

메이플라워 맹약에 서명한 사람들이 총회(General Court)를 구성하고 여기서 지사를 뽑았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교화를 요람으로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해야 왜 아직도 미국에서 청교도적 정신의 영향이 그토록 뿌리깊은지를 알 수가 있다. 버지니아보다도 매사추세츠 지방의 개척이 늦게 되었는데도 미국의 발상지라고 하면 이곳 뉴 잉글랜드가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버지니아의 개척은 영국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서 식민지로서 경영을 한 것이고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등 뉴 잉글랜드는 여기에 새로운 영국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이 세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산다는 차원과 정신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삼아 모험을 결행한 것의 차이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철학적인 바탕을 깔고 하는 것과 그냥 편의대로 하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흐르면 크나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이다.

플리머스 정착촌의 인구는 7천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뉴 잉글랜드의 중심지는 곧 그 북쪽에 있는 보스턴으로 옮겨갔다. 순례자들(분리주의자)보다는 다소 온건한 영국 청교도들이 1620년대 말부터 보스턴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변호사이자 청교도 지도자인 존 윈스롭의 지휘하에 이들은 청교도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를 보스턴에서 구하여 [언덕 위의 도시], 즉 신시(神市)를 만들겠다고 1630년에 알벨라號를 비롯한 일곱 척의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들은 매사추세츠만(灣)회사라는 일종의 무역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의 이사회에 해당하는 사령탑에는 [자유인]이라고 불린 교회의 간부들이 주주(株主)의 자격으로 포진하였다. 이사회는 정착민들의 자치기구 책임자를 선출하였다. 이민자가 많아지자 이사회의 구성원은 교회가 아닌 마을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확대되게 되었다.

즉, 교회에서 회사가 생기고 회사에서 정부와 의회가 생겨난 과정이다. 교회로 상징되는 정신, 회사로 상징되는 물질, 그리고 정부로 상징되는 권력, 이 세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미국에서는 그 요람기에서부터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3대 구성요소인 종교(또는 이념), 경제, 권력의 관계가 갈등하면 그 국가는 통합성을 상실한다. 이 관계가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하여 한 덩어리로 되어 있을 때 그 국가는 건실하고 생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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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와 일류국가


인륙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혁명가와 혁명이론은 칼빈과 칼빈주의이다. 프랑스 사람 칼빈은 프랑스 왕조의 신교도 탄압을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제네바 시장이 된 그는 칼빈주의에 따라 이 도시를 다스렸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구원예정설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갈 것인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인가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
인간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누가 구원받을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구원받지 않을 사람인가는 알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할 자는 인생을 낭비하는 자, 도둑질 하는 자, 게으른 자,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

이런 구제불능의 그룹에 들지 않으려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의심을 갖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재산을 늘리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16세기 이런 칼빈주의는 그때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상공업자들과 시민계급의 윤리(막스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의 윤리로서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번 돈을 좋은 데 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거리낌 없이 돈을 벌자! 이른바 淸富 사상인 것이다.

칼빈주의가 주도권을 잡은 나라는 따라서 富强했다. 칼빈주의자들은 또 왕정과 독재를 미워했으므로 곳곳에서 혁명과 봉기를 일으켰다. 네덜란드에선 칼빈주의자들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일으켜 성공했다. 영국에서는 퓨리탄이라고 불린 칼빈주의자들이 크롬웰의 지휘하에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카톨릭 세력뿐 아니라 왕정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크롬웰의 등장 이전 영국 청교도들이 카톨릭왕의 탄압을 피해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것이 미국 독립정신의 시초였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즉 17세기부터 약300년간 세계를 주도해온 선진해양산업강국의 정신적 엔진이 칼빈주의였다.

부국강병, 법치, 인권, 개인주의, 경쟁, 근로의 보람을 확산시킨 칼빈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었다. 칼빈주의는 영국에서는 장로교에 들어갔다. 19세기말 개화기 때 이 장로교가 한국으로 들어와 그들의 칼빈주의가 한국인의 개화, 독립투쟁, 건국, 근대화, 민주화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자유통일의 시기에도 그럴 것이다. 세계적인 성공모델인 대한민국의 발전에 끼친 칼빈주의의 역할을 추적하면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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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에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내지 경고한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다.

1932년 초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1934년 장로회 총회장은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듬해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 이후 일제는 신사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마저도 금지시켜 이러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평남의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신사참배 거부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요 저지를 호소하고, 같은 해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화 ·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다.

김선두(金善斗) 목사도 일본 유학생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 요로에 진정하고자 19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이에 동조하는 일본 정계 요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알려지자 김목사는 사전에 구속되고 총회도 삼엄한 경찰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함으로써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청원자측이 일제의 권력구조 내지 식민통치 체제를 인정한 체제 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확산 폭로하고 불의를 담대히 경고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의의를 지닌 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이를 결의 실행하는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 인물은 평남의 주기철(朱基徹), 평북의 이기선(李基善), 경남의 한상동(韓尙東) ·주남선(朱南善), 전남의 손양원(孫良源), 함남의 이계실 등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朴義欽) ·김형락 ·김윤섭 등이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수차례 검속 탄압하다가 1940년 6월경부터 9월경에 걸쳐서 본격적인 검거에 착수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해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1940년에 나온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이나 같은해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걸쳐서 실시된 ‘조선 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 검거령’은 바로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용학 ·주기철 ·최봉석 ·최상민 ·김윤섭 ·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 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가 있었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는데,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 여 명에 이르고 2백 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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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한국 교회의 분열과 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大韓-敎長老會,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구분 종교단체

설립연도 1912년 9월 1일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5

설립목적 장로교회간 협력, 장로교 전파

주요활동 선교활동, 신앙교육활동, 사회봉사활동

규모 노회 60개, 교회 6,494개, 목사 1만 3409명, 전도사 4,036명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으로 예장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성서를 하느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이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으며, 칼뱅주의에 입각한 장로회헌법과 12신조 및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기본신조로 한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앨런(H.Allen)이 고종의 지시에 따라 광혜원을 운영하고,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소속 로스(J.Ross)가 신약성서를 번역하여《예수셩교젼서》를 출간하면서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선교사들이 장로회선교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이것은 1901년 한국교회 대표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한로회가 조직되어 독로회(獨老會)라 불리었으며, 같은 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이 최초의 한국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 1912년 9월 1일 독로회시대를 청산하고 7개 노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에는 헌법을 제정하여 장로교의 신앙노선과 교리체계를 확립하였다.



1938년 9월 10일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50여 명의 목 사들이 순교하고 평양신학교는 폐쇄당하였다. 1943년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된 뒤 1945년 7월 18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후 1947년 총회를 재건하고 1949년 4월 22일 교단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었다. 1952년 9월 11일 고려신학교측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가고, 1953년 6월 10일 조선신학교측이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분리해나갔다. 1959년 9월 28일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분리해나갔으며, 그 이후 50개가 넘는 교단이 생겼다.



주요 활동은 ① 선교, ② 총회산하 각 교회의 신앙교육 장려, 총회산하 각 기독교학교의 신앙교육 장려, 교육부 산하 각 연합회 지도 관리, ③ 노회 및 지교회의 사회선교·사회봉사 활동을 위한 지원활동, ④ 사회선교를 위한 인력 발굴, ⑤ 효과적인 구호를 위한 정책개발과 집행, ⑥ 소외된 농어촌교역자 재교육, ⑦ 각노회 농어촌부 활성화, ⑧ 농어촌살리기 운동, ⑨ 군종목사 지원, ⑩ 선교사 파송 및 관리업무 등이다. 기관지로는《기독공보》를 발행한다.



최고의결기관인 총회의 임원은 총회장·부총회장·서기·부서기·회계·부회계·회록서기·부회록서기로 구성되며, 총무단은 총무·사무국장·기획국장·7개부로 구성된다. 산하기구로는 10개 상임부, 10개 위원회, 24개 특별위원회, 4개 재단, 2개 기관, 7개 신학대학교, 19개 자치단체, 18개 국내연합선교기관, 해외선교협력교단, 해외교회연합기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 있다. 그밖에 노회 60개, 교회 6,494개, 목사 1만 3409명, 전도사 4,036명, 장로 1만 6138명이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5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大韓-敎長老會(合同),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12년(1959년 통합 측과 분리)

소재지 서울 강남구 대치3동 1007-3

설립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주요활동 복음 전파, 해외 선교, 교역자 약성

규모 노회 86개, 교회 6,795개, 교역자 1만 8038명, 평신도 230만 명, 선교사 1,076명(200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는데, 창립 당시의 명칭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였다. 1949년 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꾼 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머니즘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분리되면서 WCC를 영구히 탈퇴하였다.



1963년 문교부(지금의 교육인적자원부)에 총회를 사회단체로 등록하고, 1965년부터 《기독신보》(지금의 기독신문)를 발행하였다. 1977년 주교교사통신대학을 설립하고, 1982년 총회유지재단 설립 인가를 받은 뒤, 1986년 연건평 2,300평의 총회 회관을 준공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을 근본 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교리문답)을 교리의 표준으로 삼는다. 또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질서의 준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함께 예수교장로교단를 대표하는 교단으로, 2002년 현재 전국에 86개의 노회와 6,795개의 교회가 있다. 목사·전도사 등 교역자는 1만 8038명, 평신도는 230만 명이며, 해외 86개국 53개 지부에 1,076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그 밖에 총신대학교·총신대학원·신학대학원·교육대학원·선교대학원 등 5개의 직영 총회신학원과 10개의 총회 인준 신학교가 있다. 총회 회관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3동 1007-3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大韓-敎長老會(合同正統)]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단

설립연도 1980년 5월 16일

소재지 서울 서초구 방배3동 1031-1(총회 회관)

설립목적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 수호

주요활동 칼뱅주의 신앙을 근거로 한 개혁주의 신앙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

규모 소속 교회 2,200개(2001), 산하 노회 52개(2002), 목회자 3,900명, 선교사 130명



1980년 5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합동진리라는 이름으로 출범해 이듬해 합동진리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연합을 합해 합동정통으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보수정통주의를 표방한다.



신앙은 칼뱅주의를 특징으로 한 개혁주의적 신앙관을 가지며, 교리는 《사도신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기조로 하고 있다.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을 완성하였고, 1995년 10월 연건평 340평에 지하 2층, 지상 6층의 총회관을 마련하였다.



교단에 소속된 교회의 수는 2,200개(2001), 산하 노회는 52개(2002), 목사·강도사·전도사 등 목회자 수는 3,900여 명이다. 교단 내 교인의 수는 80만 명이고, 미국·러시아·아르헨티나·브라질·필리핀·유럽 등 16개국에 파송된 선교사 수는 130명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천안대학교를 비롯해 4개의 신학계 대학원, 5개의 특수대학원, 기독신학교, 총신예술학교, 천안외국어대학 등이 있으며, 《기독교연합신문》을 발행한다. 총회 회관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3동 1031-3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大韓-敎長老會(高神),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PCK:Kosin)]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서를 신조로 하는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52년 9월 11일

소재지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58-10(총회 본부)

설립목적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유지,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앙

주요활동 복음 전파, 해외 선교

규모 노회 34개, 교회 1,578개, 교인 43만 8283명, 목회자 3,682명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다가 8·15 광복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주남선 목사 등 초창기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1952년 9월 11일 경상남도 진주(晉州) 성남교회당에서 제1회 총노회를 개최하면서 출범하였다. 이들은 본래 다른 교파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신 측 총대들을 거부하고 총회로부터 축출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고신 교단을 출범시킨 것이다.



고신 교단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데, 초기 지도자들은 1946년 6월 진해(鎭海)에 하기 신학강좌를 개설하고, 이어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복음병원을 설립하고 얼마 뒤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았으며, 다시 부산광역시 송도의 고신대학교와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으로 발전하였다.



교단 출범 이후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부르짖으며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임을 믿고 있다. 또 웨스트민스터 교리 표준서를 신조로 삼아 칼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견지하면서 한국 교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02년 현재 34개 노회에 1,578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은 43만 8283명, 목회자는 3,682명(목사 2,230명, 강도사 425명, 전도사 1,027명)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58-10번지에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大韓-敎長老會(大神), The General Assembly of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aeshin]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신조로 삼고 있는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61년

소재지 경기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73

설립목적 평양신학의 전통에 근거를 둔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 전파

주요활동 국내 복음 전파, 해외 선교, 목회자 양성

규모 노회 37개(국내 34, 해외 3), 교회 1,400개, 목회자 1,500명, 선교사 111명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로 출범해 1972년 한국 장로교 총회의 명칭이 다양화됨에 따라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로 개칭하였다. 1974년 교단 교회선언문을 채택하고, 이듬해 교단 교회 헌법을 제정하였다. 1980년 통합·개혁·기독교장로회·고신 등과 한국장로교협의회를 창립하고, 1985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연합회 회원교단이 되었다.



1986년 총회신학원을 설립하고, 1994년 한국기독교평화통일추진협의회 창립 교단으로 참여한 뒤, 같은 해 재단법인으로 총회 유지재단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95년 대지 6,463평에 건평 443평의 총회 회관을 매입하고, 1998년 3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를 개교하였다.



평양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순수한 성경적 복음과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감 없이 신뢰해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신조로 삼는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정통) 교단과는 신앙적 뿌리가 같다.



2002년 현재 국내에 34개, 해외에 3개의 노회가 있으며, 교단 소속 교회는 1,400여 개, 목회자는 1,500명, 해외 파송 선교사는 111명이다. 그 밖에 직영 신학원으로 대한신학교와 대신대학원이 있으며, 인준 신학원인 안양대학교·안양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고 있다. 총회 본부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073번지에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韓國基督敎長老會,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 김재준(金在俊)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1953년에 형성된 교단.


구분 한국 장로교 교단



설립연도 1953년 6월

소재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56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501호(총회 본부)

주요활동 국내 선교, 해외 선교, 교회일치운동 전개, 북한 선교 및 사회 민주화, 목회자 양성

규모 노회 24개, 교회 1,509개, 교인수 32만 2465명(2000년 12월)




예수교장로회(약칭 예장)와 그 뿌리는 같다. 그러나 1947년 제33회 총회 이후 김재준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 문제를 둘러싸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면서 분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어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 당시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 대한 목회자격 박탈, 김재준 목사의 교수직 파면과 아울러 소속 경기노회에서 목사직 박탈이 의결되면서 이듬해 6월 완전한 분립이 이루어졌다.



조선신학교는 17세기 정통주의 신학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중간노선인 신정통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성서의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신봉하는 박형룡(朴亨龍) 목사를 주축으로 한 보수진영에서 성서문자의 무오(無誤)를 주장하여 기독교장로교측을 극단적 자유주의로 혹평함으로써 완전 결별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고, 세계장로교회의 주류를 좇아 에큐머니컬운동(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섰다. 같은 해 목포노회의 동참을 필두로, 이듬해 전남·경남 두 노회가 가담한 데 이어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선교사 21명을 파송해 줌으로써 활기를 띠어갔다.



1956년 제41회 총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최초로 부목사·여자장로제 등을 채택하고, 이듬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 가입해 국내교회 연합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하였다. 1961년 18개 노회를 9개 노회로 통합하고,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았다.



196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유지재단 설립인가를 받고, 1971년 사회선언지침을 채택해 도시산업선교·반독재 투쟁에 가톨릭 지도자 등과 보조를 맞추어 사회참여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74년 여목사 제도를 채택하였고, 1979년에는 세계개혁교회연맹(WARC) 실행위원회 및 신학협의회를 예장 측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1993년 통일헌법특별연구위원회를 설치한 뒤, 1997년에는 북한선교복지회관 설립 추진운동을 결의하였다.



2000년 12월 현재 교회는 1,509개, 목사는 2,090명, 교인은 32만 2465명이다. 또 2002년 현재 전국에 24개의 노회가 있고, 총회 기관으로는 한신대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비롯해 14개의 장애인 선교기관, 8개의 사회복지법인, 6개의 특수 선교기관이 있다. 총회본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136-56번지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501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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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셋째로는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 하는 일 이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 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기독교 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신파의 방법론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 교수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 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 기독교 장로회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 기독교교회 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 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 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것을 그동안 주장해 왔다.



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것이다. 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 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 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 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 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용출처 : http://cafe.naver.com/historyth.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4 + 백과사전 + 신학자료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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