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과 포드 대통령 시절에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서 한 시대를 연출했던 헨리 키신저는 1999년에 자신의 회고록 마지막 편을 [再生의 시절-Years of Renewal]이란 제목으로 간행했다. 이 책에서 그는 1975년 월남의 패망 과정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자신의 하루하루 체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기자는 거대한 역사의 전환 속에서 키신저와 같은 천재도 무력해지고 포드 대통령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는 시대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1960년대에 미국 사회에서 불붙기 시작한 反戰운동과 反기성운동(히피 등)이 미국의 정치권을 월남포기 쪽으로 움직여간 과정의 클라이맥스가 1975년4월의 사이공 함락이었던 것이다.

1975년4월21일 구엔 반 티우 월남 대통령은 미국이 파리 평화 협정의 준수를 강제하지 못함으로써 월남이 월맹의 불법 침공에 의해 망국의 위기에 처했다고 공격하면서 사임했다. 미국 언론은 티우의 퇴장을 환영하면서 비로소 월남과 월맹 사이에 대화를 통한 타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티우의 마지막 연설을 敗將의 넋두리쯤으로 경멸해마지 않았다.

이런 매도를 지켜보면서 키신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티우는 미국의 행동을 미워할 만한 모든 근거를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종료시킨 책임자라고 하여 나를 누구보다도 미워했으나 나는 그가 용기와 명예심을 가지고 조국을 위해 봉사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반전 운동가들이 그를 평와의 장애물이라고 비판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그와 그의 조국은 더 좋은 운명을 맞았어야 했다. 만약 미국 의회가 고립된 우리의 우방(월남)에게 원조를 중단할 것을 결의할지 모른다고 예측했었다면 나는 1972년의 마지막 협상 때 그를 그토록 몰아붙이지 않았어야 했을 텐데하는 생각을 했다>

1972년 가을, 파리에서 5년에 걸쳐 계속된 미국과 월맹 사이의 평화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티우는 미국에 반발했다. 미국이 월남에 침투한 월맹 정규군 수십만을 철수시키지 않고 그들의 점령지역을 聖域으로 인정해주면서 미군만 일방적으로 철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국토안에 적의 영토와 적의 군대를 허용한 이 협상은 필연적으로 월남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었다. 키신저와 닉슨은 티우를 위협하고 달래가면서 결국 월남이 이 협상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서한으로써 월남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과 평화 협정의 준수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反戰운동의 영향을 받아 1973년6월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월남에 대한 원조를 21억 달러, 10억 달러, 7억 달러로 매년 깎아갔다.

'내가 그때 티우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하는 키신저의 후회는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 파리 평화 협상은 미국과 월맹이 월남을 배제하고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월남의 국익을 희생시키기로 합의한 셈이었다.

북한의 김정일이 노리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핵무기를 카드로 하여 미국과 단독 협상을 하여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면 한국의 국익은 결정적으로 손상을 받는다. 김대중 정부는 희한하게도 북한정권이 미국과 단독 대좌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는 자세를 취했다.

키신저의 후회는 우리에게 自主국방 의지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우리의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지켜낸다는 의지를 국가 지도부와 국민들이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미국에게 맡겨버린다면 우리의 운명은 미국 의회, 미국 여론 속에서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