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이 통일(?)됐다
'지금은 최고 불황에 가장 불안한 때'


대선 전 화두는 세대간의 갈등이었다. 지역 간의 갈등에 이어 세대간의 갈등까지 불거져 우리 사회 분열이 심각하다는 얘기가 연일 언론을 장식했는데, 이번 달 취재를 하면서 국론이 통일(?)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대가 다르건, 지역이 다른 건 입모아 '요즘이 유사 이래로 최고 불황에 가장 불안한 때'라고 말한다.

대선 전에 택시를 탔다가 기사와 지지후보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가 강제 하차를 당할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택시 타면 기사들이 입을 맞춘 듯 똑같은 얘기만 한다. 하나같이 거리에 사람이 줄었고, 택시 손님이 없다는 것이다. 불황을 가장 빨리 체감하는 직종이 바로 택시라며 바퀴가 꺼지게 한숨을 쉰다. 여행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불황의 여파가 가장 빨리 미치는 곳이 여행업계라며, 북핵 때문에 오는 사람없고, 달러 올라서 나가는 사람없어 현지의 랜드사까지 동반 몰락할 지경이라고 하소연이다.

서울에서 가장 붐빈다는 동대문 상가와 신촌에 나갔을때 한결같이 '사람이 줄었다'는 얘기만 들려왔다. 동대문 상인들은 손님이 없어 내놓은 가게가 태반이라며, 동대문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신촌의 호객꾼들은 새벽 두세시까지 흥청대던 거리에 밤11시면 사람이 끊긴다며 매상이 30% 이상 줄었다고 했다.

부자동네라는 압구정동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잣집 사모님이 많이 온다는 미용실의 헤어디자이너는 '흰 머리카락 한올을 못 견뎌 하시던 사모님들이 요즘 웬만하면 참는다'며 여럿이 와서 머리하고 식사하러 다니던 분들이 점심값 아끼려고 혼자 나온다고 일러준다. 주변 옷가게 상인들도 들어오는 손님이 없다며, 돈 가진 사람들이 불안해서 돈을 안 쓴다고 답답해했다.

부동산공화국 대한민국의 부동산중개소들도 요즘 개점휴업상태다. 사람들이 '지금은 집살 때가 아니라 달러를 챙길 때'라며 중개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인을 만나든 택시 기사를 만나든 한결같이 하는 말은 '대선 전부터 불황조짐이 보이더니 대선 이후 완전히 얼어붙었다. IMF 때가 차라리 나았다'는 것이다. 주변의 프리랜서 친구들은 광고 홍보 물량이 푹푹 줄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고 전한다. 불황 때 기업이 가장 먼저 줄이는 물량이 바로 광고 홍보 물량이다.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수술로 고소득을 올리던 비뇨기과, 안과, 피부과, 성형외과에 수술환자가 대폭 줄었다고 한다.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수술이 아니면 다들 안 하는 추세라고 한다. 심지어 한의원에 보약짓는 사람들도 줄었을 정도이다. 충무로 인쇄소도 물량이 없고 자판기 커피 매상도 30%나 줄었다. 300원짜리 커피도 생각해보고 빼먹는 세상이 되었다. 포장마차 아줌마는 사람들이 어묵도 안 사먹는다고 툴툴거렸다. 두주불사(斗酒不辭)하던 대한민국 남자들이 지금 술을 마시지 않아 술집이 텅텅 비었다. 광화문의 한 비즈니스 클럽의 영업부장은 2월부터 안되기 시작하더니 3월부터 완전히 공치고 있다며, 울상이었다.

IMF 때처럼 기업이 대량 해고를 한 것도 아니고 월급이 동결되었다는 소식도 없다. 그렇다고 부자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는 것일까. 카드 돌려막기를 금하고 카드 한도가 줄었다지만 건실한 직장인이 훨씬 많은 세상 아닌가.

주변 사람들에게 왜 돈을 안 쓰느냐고 했더니 모두들 한목소리로 '지금 어느 간 큰 사람이 돈을 쓰느냐'고 말한다. '뭘 믿고, 누굴 믿고 함부로 돈을 쓰느냐,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돈을 쓰느냐'며 철모르는 소리하지 말란다. 비장한 표정으로 '모든 지출을 중단하고 가능하면 달러나 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리모델링 하려다 중지한 사람도 있고, 조국에서 뼈를 묻겠다더니 이민 준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외국에서 한국의 평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평온은 그야말로 '태풍전야의 고요'이다.

사람들이 지갑을 꽉 닫고 있으니 상인들은 '개혁이고 뭐고 빨리 장사나 잘되게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최고 불황아래 가장 불안한 지금, 사람들은 사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도 의견이 통일되었다.
'이라크전이 빨리 마무리되어야 한다. 북한이 핵을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미군을 나가라고 말해선 안 된다. 안보는 경제와 직결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얘기가 바로 7-8월 전쟁설이다. 이라크 전쟁이 끝나면 다음은 한국차례라는 것이다. 해외 교포들이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있다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열되었다. 전쟁나면 도망갈 데도 없으니 앉아서 당한다는 쪽과 전쟁 기운만 보이면 바로 떠버리겠다는 쪽으로.

취재결과 불황과 불안심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일 정치권에서 우리 경제가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는 발표가 나오고 있다. 7-8월 전쟁설을 들먹이면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 절대로 한반도에서 전쟁은 나지 않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건 '경제상황이 좋고 전쟁이 안 난다'는 확언이 아니다.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취재 중에 어떤 사람이 '이미 우리는 전쟁이 나기도 전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했는데 그 말에 공감이 갔다. 있는 돈도 쓰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심리적 공황상태, 이미 사람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새정권이 출범하고 새봄이 왔건만, 사람들은 점점 더 움츠러들고 있다. 유사 이래로 북한에 현금을 가장 많이 퍼다 주면서 관계를 돈독히 했다더니, 결과는 불황과 불안으로 되돌아왔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한겨울이다. 대체 누가 이 마음을 녹여 줄 것인가.

이번 취재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얘기는 8월에 출산할 예정이라는 한 산모가, '대한민국에서는 불안해서 태교를 할 수가 없다. 미국의 친지들이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며 빨리 오라고 한다. 곧 갈 예정이다'라고 했던 얘기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아이도 마음놓고 낳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는가. 여자와 어린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 그게 바로 좋은 나라다.

李根美 (프리랜서 www.rootlee.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