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얻어낸 누룽지

약 40명의 조선인 신병을 지휘하는 소대장은 50에 가까워 보이는 소위였으며, 그 밑에 10여 명의 일본인 基幹(기간)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 밖에 취사병도 3~4명 있었습니다. 우리 소대에 일본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은 셋밖에 없어, 저를 포함한 이 세 사람은 노동 외에 통역도 해야 했습니다.

전쟁 말기라, 軍부대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雨宮 씨 책에 소개된 他 부대보다는 나은 편이었는지, 굶주림으로 인한 절도 등 사건은 기억나지 않고, 탈주병도 없었습니다. 다만 필자처럼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고생은 대단했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 배급되는 담배를 전부 친구에게 주었고, 고향 부모에게 보내는 동기들의 편지를 代筆(대필)해주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기들이 힘든 노동으로부터 저를 제외시켜 준 적이 많았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로 빈혈증을 일으켜 작업에 나가지 못한 날도 있었지만, 저를 도와준 조선인 戰友(전우)의 도움으로 광복되는 날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었습니다.

50명이 넘는 대원의 밥을 큰 가마솥에서 짓기 때문에 누룽지가 많이 생겼습니다. 일본인은 밥솥에 생기는 누룽지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어, 우리 부대에서도 취사병은 밥을 지은 다음에 이 밥솥을 깨끗이 씻으며 누룽지는 버렸습니다. 조선인 신병들은 이 누룽지가 몹시 아까워, 저를 통해 상관에 이야기하여 이 누룽지를 걷어 新兵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일본인 상관들은 자기네 풍습에 없는 일이라 처음엔 완강히 거절하다가, 우리 통역들의 열성어린 설득으로 결국 누룽지 재활용이 허가되었습니다. 이 상당한 양의 누룽지가 배고픈 조선인 新兵(신병)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근처 農家(농가)의 모내기 작업을 돕기 위해 농가에 분산 배치되어, 종일 모내기를 도운 적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 농가에는 노인과 젊은 아낙네들만 있어 우리는 환영을 받고, 식사와 간식을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新兵 전우들도, 손에 익은 농사일이라 별 어려움 없이 하루의 봉사를 즐겁게 했습니다. 우리에 대한 농부들의 동정은 대단했습니다. 대부분 가족을 戰場(전장)에 보낸 이들이기에 우리 일행에게 사진 등을 보여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뒤늦게 안 光復

1945년 8월15일은 평일인데 아침부터 작업이 없었습니다. 좀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영내에서 휴식을 취하라는 말에 모두 희색이 돌았습니다. 밀렸던 속옷 빨래를 시작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신문을 볼 수 없는 신병이니, 그날 정오 天皇(천황)의 중대 녹음 방송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2시가 가까워지자, 소대장과 하사관들이 모두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날은 일본의 お盆(오봉·우리의 추석과 같은 일본의 명절)으로 밤에는 공회당 옆 연못가, 벚나무와 수양버들로 울창한 공원에서 일본 전통 群舞(군무) ‘봉오도리’를 추는 축제에 조선인 대원들도 초대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燈火管制(등화관제)도 없이 곳곳에 전등과 초롱불이 장식된, 이때까지와는 다른 화려한 분위기였으나, 이것이 敗戰(패전) 때문이라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다음날도 평일인데 작업이 없었습니다.

8월17일에야 비로소 일본의 패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영내 화장실에 갔다가, 평소와 달리 크게 틀어놓은 民家의 라디오 뉴스에서 패전하여 새 내각수반으로 天皇 친척이 지명되었다는 이야기 등이 돌았습니다. 평소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던 일본인 상등병에게 은밀히 이 라디오 이야기를 했더니 그제야 모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세 사람의 조선인 통역이 소대장에게 불려가 특별한 부탁과 함께, 조선인 대원들에 잘 설득하여 동요가 없게 패전 이야기를 전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동요는 없었지만, 대원들의 기쁨과 궁금증은 대단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군 상관들은 우리에게 신문을 읽게 하고, 여러 정보도 공개적으로 전달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제대와 귀국 문제였는데, 열차 수송편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대는 하지 않은 채 영내 생활을 계속하는, 이상한 분위기의 생활이 계속되고 식량사정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목숨을 건 密船 귀환

8월31일, 드디어 본국으로 歸還(귀환)하는 날이 왔습니다. 우리는 영내에서 제대식을 갖고, 조선인 대원은 별 하나씩을 더 달아주어, 2등병에서 1등병으로 승진되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대원들은 새 지폐로 200엔(圓)을 전별금조로 받았는데, 당시 面직원 초봉이 약 30엔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지막 영내 식사를 마친 뒤, 오후에는 임시열차 편으로 사연 많았던 야가이(谷貝村) 마을을 출발했습니다. 귀국 길에 나선 조선인 대원 일행의 들뜬 기분은 이를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만, 이것이 또 하나의 고생길인 것을 그때엔 모두가 몰랐습니다.

軍用(군용) 수송열차에 오른 지 약 25시간 뒤, 제대한 우리 조선인 대원 일행은 日 서남단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일본군 인솔자는 사라졌습니다. 現地(현지)에 귀국 업무를 돕는 일본인은 있었지만, 패전 후 혼란이 계속되는 시절이라, 모든 것에 질서가 없고 오직 귀국만 바라는 수많은 조선인 제대병을 쉽게 통솔할 길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 임시 숙소 배정을 받은 우리는, 언제 있을지 모를 정부의 수송선 배정을 기다릴 수 없어 부산으로 가는 민간 배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민간 어선이나 화물선으로 密航(밀항)을 돕는다며 우리를 유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때는 9월 초순으로 태풍이 잦은 계절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풍랑이 험한 현해탄은 소형선 운항이 위험해 密船(밀선)을 타고 야밤에 출항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과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누구누구의 어선은 거친 풍랑을 이기지 못해, 대마도 가까이서 침몰했다는 슬픈 소식도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군대 있을 때보다 불편한 숙소와 나날이 증가하는 귀국자 수에 초조해진 우리 일행 중 일부는 드디어 이 密船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야간 탈출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9월4일 밤으로 기억합니다. 제대 때 받은 돈에서 배삯을 내고, 안내하는 한 일본인을 따라 어두운 해안을 헤맨 끝에 조그마한 어선 船倉(선창)에 몸을 숨겼습니다. 크지 않은 기관 어선에 40명 가량이 승선한 듯했습니다. 이젠 운명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고 다들 깜깜한 선창 안에서 몸을 쪼그리고 잠을 청했습니다.

이 생명을 건 도박이 성공해, 다음 날 낮 우리 배는 부산 오륙도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멀미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 모두가 선창에서 기어 나와 갑판으로 나갔습니다. 밀항선을 탔다는 죄의식 없이, 배는 외항선 부두 한 모퉁이에 당당히 닻을 내렸습니다. 九死一生(구사일생),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고향 남해로 가는 배편을 알아 볼 수 없어, 우선 진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학생 시절을 보낸 진주에는 외사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기적적으로 물자를 구입하러 온 父親(부친)을 만났고 상봉의 기쁨을 나누며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左翼 친구의 죽음

고향에 돌아 온 저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게 있었습니다. 바로 정치적 혼란이었습니다. 당시 제 고향 남해는 두 개의 큰 섬에 10만이 좀 넘는 인구를 가진 郡(군)으로, 8개 面이 있었습니다. 거주하던 일본인은 극소수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이 두 개가 있었으며, 초등학교장, 경찰서장 등이 거의 전부라 일본인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광복 후 그들로 인한 혼란은 비교적 적었고, 그들의 귀국도 역시 별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광복 직후 조직된 呂運亨(여운형) 씨의 ‘건국준비위원회(建準·건준)’와 좌익계 ‘인민위원회’ 두 세력 간의 정치적 알력이 대단하였습니다. 남해에서도 美軍이 진주한 1945년 10월 초까지, 그런 갈등의 조짐이 곳곳에서 목도되었습니다.

제 초등학교 후배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강 모라는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이 친구와는, 방학 때엔 며칠씩 읍내에 있는 그의 집에서 寢食(침식)을 같이 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제가 일본에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맨 먼저 찾아 온 사람 중 한 명이 이 강 모라는 친구였습니다.

집에 찾아 와서 한 시간 가량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면서 이 친구가 제게 준 인쇄물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일본의 유명한 경제학 교수의 《빈보모노가타리(貧乏物語)》였고, 다른 하나는 레닌의 《共産黨 宣言(공산당 선언)》이었습니다. 일본말로 ‘가리방’이라고 하는 등사판으로 만든 조잡한 팸플릿式 소책자로, 두 책의 내용을 요악한 인쇄물이었습니다.

학생 시절에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교수의 책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 밤을 새어가며 열심히 요약된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광복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사촌형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공산청년동맹 지방 위원회 간부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제 선친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친구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습니다. 선친은 建準에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建準 지방 조직 간부 중에 친지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지만, 조직 활동이 바빠서였던지 단 한 번 집으로 찾아 온 뒤로 소식이 없었는데, 뒤에 들은 바로는 청년동맹 일로 과로를 해 결국 故人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곧 美 군정청 남해 분견대에 근무하게 되어 외부와의 접촉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절친한 친구의 최후도 못 보았습니다.


美 군정청 통역이 되다

당시 서부 경남의 중심도시며 제 고향인 남해에 가까운 경남 진주에까지 미군이 進駐(진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45년 9월8일, 인천에 상륙한 존 하지(John R. Hodge) 중장이 이끄는 美 육군 제24군 휘하 제7사단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뒤 곧 38선 이남의 조선 美 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치볼트 아놀드(A. Arnold) 육군 소장을 장관으로 하는 在조선美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이 9월19일 정식 발족하고, 軍政부대가 도청 소재지와 중요 도시에 진주하여, 지방 행정기구도 접수하였습니다. 남해에까지 미군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일본 군대로부터 귀국한 지 약 한 달 후인 10월 중순, 저는 군정청 통역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미군 선발대 수 명이 LST 상륙정을 타고 남해읍에 나타났을 때, 이 작은 고을은 난생 처음 보는 미국인이라, 그들의 상륙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 邑 전체가 크게 시끄러웠습니다. 꼬마 아이들에게 당시 귀한 껌이나 초콜릿 등을 나누어 주는 面사무소 광장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로, 소문을 듣고 간 저는 美軍 근처에 접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군중에 둘러싸인 美軍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영어 하는 사람 없느냐고 고함지르는 것이 들렸습니다. 안면이 있는 어른들이 저를 쳐다 보며 눈짓을 하였습니다. 그 중 선친하고 친분이 있는 어르신 한 분이 저를 군중 속으로 밀어 넣으며, ‘여기 있소’ 하고 외쳤습니다. 이 것이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영어에 특히 흥미가 있었습니다. 유명한 毒舌(독설)로 거의 모든 학생이 싫어한 구사마(草間)라는 일본인 영어 교사가 저의 1학년 때 담임이었는 데, 그때 제가 급장이었습니다. 저는, 東京(동경)의 명문 사립 게이오(慶應) 대학 출신인 성질 고약한 구사마 선생의 偏愛(편애)를 받았고, 그 덕에 영어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회화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영어회화가 대학 입시에 필수 과목이 아니었던 터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느 정도 영어를 해독했다 하더라도, 회화 실력은 많이 모자랐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발음이나 억양도 일본식으로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처음 대하는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한심스럽고 당황스러운 미국인과의 첫 대면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렵게 영어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조선인을 발견한 美軍 장교의 표정은 극히 긍정적이었습니다. 아주 의도적으로 느릿하게 발음하며 저와의 첫 대화를 시작하며, 일주일 후 정식으로 남해 군정청 분견대에 미군이 進駐할 터이니, 그 때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까지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약 1주일 후(10월15일로 기억), 지프차 한 대를 앞세워 약 20명의 美軍이 남해읍에 가까운 선착장에 LST로 상륙하여 정식 주둔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행하는 조선인 안내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통역은 저 하나밖에 없으니, 24시간 그들과 寢食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통역일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부대 정식 이름은 ‘美 군정 제58중대 남해 분견대(58th USMG Company Namhae Detachment)'였습니다. 대장은 40대의 변호사 출신 육군중위 존 시 커드(John C. Curd)였습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대위로 승진했습니다. (계속)